다산 형제들을 개종시킨 후 이벽의 발걸음은 중인 계급을 향 하였다. 나름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중국어 역관(譯官) 김 범우, 최 창현, 최 인길, 김 종교를 개종시켜 나갔다. 그러나 당쟁을 두려워하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벽에 부딪치기도 하였다. 이벽을 찾아온 이는 바로 이 가환이었다. 이 벽이 서학을 전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 우리 집에도 직방외기(職方外紀) , 서학범(西學凡) 등이 있어 나도 서양 서적을 읽어 보았네 그것은 기이한 글, 괴벽한 책으로서 우리들의 견식을 넓히는 수단에 지나지 않은데 그것이 어찌 천명(天命)을 좇아 심신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소 - 하고 꾸짗었다. 이벽이 즉시 교리를 들어 답변을 하자 이 가환은 말문을 닫고 책을 구해 읽어 보겠다고 하였다. 이 벽은 천학 초함 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책을 이 가환에게 빌려 주었다. 이 당시 이 벽은 성년광익(聖年廣益)이란 책도 있었지만 이 가환이 성인(聖人)들의 영적인 모습들을 믿지 않을 것 같아 빌려 주지 않으려 하자 서로 다 틈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이 가환은 많은 책을 빌려 본 후 반복하여 숙독의 과정을 거쳐 결국 믿음을 갖기로 한다. 당시 이 가환은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된다. 아래 내용은 황사영 백서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 진리이고 분명한 정도(正道)임이 틀림없다. 사실이 아니라면 책에서 말하는 바들이 하늘을 모함하고 업신여기고 서양 신부들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벼락 맞아 죽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대단한 변화였다. 이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천주교를 권하며 입교시키고 자신의 딸에게 세례 받을 것도 권하지만 자신은 북경으로 가 서양신부에게 받기 위하여 자신은 받지 않고 기다린다.
그렇지만 다산의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 또는 달래신부의 한국천주교사에서는 달리 표현하고 있다.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 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 말하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산은 추가로 이후 이 가환은 의심받을 만한 행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은 시대적 사항에 따라 이 가환을 보호하려는 목적인 것 같다. 이 벽과 이 가환의 논쟁 후 이 기영(李基永)이 찾아왔다. 이 기양은 이 총억의 부친으로 남인 학자 중에 유명한 인물로 이 벽도 존중하는 학자였다. 그러나 이 벽은 이 기양의 공격을 논리 정연한 답을 통해 승복을 받지만 이 기양은 겉으로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가버렸다. 그렇지만 1801년 신유 대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옥사를 하게 되고 이 기양은 함경도 마천령 단천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대학자로서 유명한 두 사람을 대면하여 승리하였지만 이 벽은 유학자들의 반대가 극심해 지자 반대를 막아 줄 대학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양근 에 살고 있던 권 철신, 일신 형제가 떠오른 것이다. 그곳을 찾아 가 열흘을 묵으면서 천주교리를 놓고 토론 끝에 권 일신은 입교하게 된다. 다산 정 약용은 당시의 내용을 녹암 권 철신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처음으로 이 벽이 서교(西敎)를 선교하자 따르는 자가 무리를 이루었다. 이 벽은 감호는 모든 선비가 존경하는 분으로 감호가 천주교를 믿고 따른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 하고 곧 가마를 타고 감호로 가서 10여 일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이때에 공의 아우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 벽을 따르자 공은 우제의(虞祭義)라는 글 한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권 철신의 우제의는 전하지 않는다. 추측하건데 조상 제사문제가 천주교 십계명과 배치되어 이에 따른 조상 제사 뜻과 하느님께 바치는 제례의 뜻을 밝히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점은 다산의 선중 씨 묘지명( 先仲氏 墓誌銘)에서 1784년 4월 이때 까지 제사를 패한다는 설이 없었다는 기록을 보아 심증이 가는 일이다. 권 철신은 얼마 후 본명을 암브로시오로 세례를 받는다. 다산 형제들과 권 철신 형제들을 입교시킨 이 벽은 그제야 이 승훈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입교시킨 예비자들을 모아 강학를 주재한다. 그때 홍 낙민도 참석하게 된다.
-1785년 봄 한국천주교 첫 박해인 을사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난다. 이때 이 벽의 부친은 이 벽에게 배교를 당부하며 목을 매달아 죽겠다고 위협을 가 한다. 이 벽은 효와 천주의 사랑을 놓고 극심한 번민에 빠지게 된다. 이 벽은 권력층의 극심한 탄압과 문중 친척들의 가혹한 위협으로 가족들에 의해 집 안에 감금된다. 방에 앉아 좌정하고 십여 일 이상 음식을 전폐하고 의관도 벗지 않고 철야 기도와 묵상을 이어갔다. 죽어도 배교에 임하지 않으며 신앙을 증거 해 나가며 버티다. 결국 1785년 음력 6월 14일 한국천주교 최초의 자원 희생제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박해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
한국천주교 년대별 박해 |
1785 |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정조 9) 봄에 형조(刑曹, 秋曹)에서 명례방 검범우집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집회를 적발하여 낸 사건. |
1791 | 신해박해- 1791년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 폐제분주 사건 |
1795 | 을묘박해-을묘년(1795)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이른바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야기된 천주교박해. |
1801 | 신유 대박해-수렴청정을 하던 정순대비가 서학(가톨릭)을 엄격히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가톨릭교도를 대대적으로 붙잡아 처형했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과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등 신도 100여 명이 죽고 정약용 등 400여 명이 유배를 떠났다. 이를 고발하는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어 박해는 더욱 더 거칠어진다. |
1815 | 을해박해-1815년(순조 15) 을해년에 경상도에서 벌어진 천주교 박해사건. |
1819 | 기묘박해- |
1827 | 정해박해- 신유사옥을 마무짓기 위해 척사윤음을 반포하여1827년(순조 27) 정해 년에 전라남도 곡성을 시발로 하여 경상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에까지 파급되었던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
1833 | 계시박해- |
1836 | 병신박해- |
1839 | 기해 대박해 -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원인은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僻派) 풍양(豊壤) 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1846 | 병오 대박해- 1846년 (헌종12) 6월5일부터 9월20일까지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처형하였다. |
1860 | 경신박해-천주교가 전파된 이후 몇 번의 박해 사건이 있었으나 계속 교세를 확장했다. 철종 때는 안동김씨 정권이 천주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써서 별다른 천주교 탄압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당시 좌포도대장 임태영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주도하여 벌인 사건이다. 그는 1839년(기해년)의 천주교 대박해사건 때 크게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의 아들로, 우포도대장 신명순과 의논하여 조정의 허락 없이 서울과 지방의 천주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를 체포, 서울로 호송하였다. 천주교도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포졸들이 행패를 부리는 등 이 사건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안동김씨 집안의 호조판서인 김병기와 병조판서 김병운은 천주교도의 박해가 있은 후 나라에 좋지않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는 이유를 들며 천주교도의 체포를 반대하였다. 결국 사건을 주도했던 임태영과 신명순이 파면되고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철종의 명으로 석방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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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 병인 대박해-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자 프랑스 외방선교회는 앙베르·모방·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주로 농민, 아녀자,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 갔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를 침략 세력인 서양 오랑캐를 끌어들이고 제사를 거부하는 등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원군은 1866년(고종 3) 1월초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66년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는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했다. |
1868 | 무진박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