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맛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땅, 충청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었단다.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우리를 만나러 선생님이 오셨다. 한 달에 한 번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는 그 곳에서도 이른 시간인데도, 환한 미소로 맞아 주신다. 많은 비에도 활짝 피어있는 꽃과 푸릇한 풀들, 자연의 힘은 여전히 위대하다.
질문자 : 이 책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니까, 읽기가 쉽고 번역이 [의식혁명]보다 읽기가 편했어요. ‘놓아버림’을 ‘항복 기제’로 표현 했더라구요. ‘항복’과 ‘항복 기제’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사람들이 그동안 노력을 하고 살았는데, 노력 하지 말고 놓아버려라. 항복해버려라.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려라. 여기서는 이렇게 표현해요. ‘노력 기제’보다는 ‘항복 기제’를 사용하라. 이렇게 표현해요.
선생님 : 단어를 두 개로 쓰는 거야? ‘기제’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모르겠다? 시스템인가? -나중에 선생님께서 ‘메카니즘’이라고 표현하셨어요. -
질문자 : 애쓰고 노력하고 추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 이 책이 너무 좋아요.
선생님 : LETTING GO 하면 LET은 뭐를 하게 해라. 이런 뜻이잖아. 가자. LET는 그 다음에 것을 막지 말고 둬라. 그런 뜻이야. 가게 둬라. 그런 뜻인데, 이것을 잘 못 이해하면, 안 갈 놈을 가게 해라 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야. 이 친구 이야기는, 가게 되어 있어. 붙잡지 마라. 그런 의미라고 봐야 해. 가는 놈은 가게 둬라. 나보고 번역하라고 하면, ‘놔두기’ 적극적으로 버린다는 것은 아니야. 원래 왔으니까 가게 되어 있어. 가는 것을 그냥 가게 해라. 적극적인 의도나 의지가 안 들어가는 거야. 들어간다면 안 한다는 것을 하는 거야. 안 하는 것을 했다. 억지로 말하면.
이것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네가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라.’ 이렇게 얘기해. LET GO라는 말을 쓰고, LET GOD라는 말이 본문에 나와. 네가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얘기는, 나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야. 그게 항복이지. 나는 졌다. 여기서 항복했다는 얘기는, 누군가에게 자기를 맡긴다는 얘기도 돼. 이 나라와 이 나라가 싸웠는데, 이 나라가 졌어. 항복하잖아. 이긴 나라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점령군이. 그런 것처럼,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노력 기제’로 하지 말고, ‘항복 기제’로 하라는 얘기는 그 문제를 풀려고 애쓰지 마라. 그 말 아닐까? 그것이 가게 되어 있으니까. PATHWAY는 그것으로 가는 길이잖아. 항복으로 가는 길.
질문자 : 인간관계의 ‘의존성’이 점차 줄어든다는데, 인간관계의 가장 골칫거리가 ‘의존성’이래요. 명확하게 정립이 안 되는 거예요. 점점 독립적으로 커가잖아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라잖아요.
선생님 : 여기서는 인간관계의 ‘의존성’은 골칫거리로 봤네. 인간관계에서 의존이라는 것은 자기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구를 의존하는 거겠지. 이를테면, ‘난 당신 때문에 힘들어.’의존성‘이지. 내가 힘든 것은 당신 때문이니까. 내가 행복한 것도 당신 때문이고. 이런 것을 ’의존성‘이라 얘기하지 않을까 싶어. 이런 관계는 상당히 골칫거리지.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야. 그에게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 그것이 사라진다는 거야.
질문자 :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사라져가면서 제대로 성인이 되어가더라구요. 어린 시절에 상처를 두고두고 원망하고 탓을 했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성장하니까 결국은 내 문제구나.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바라봤을 때, 조금 답이 생기더라구요. 자기 탓으로 돌릴 무렵에 보면 커 있더라구요.
선생님 :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도 그것도 또한, ’의존성‘이야. 여기서는 그것조차도 놓아버려라.
질문자 :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네요.
선생님 : 종교에서 그렇게 하는 거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은 긍정적인 이유가 있어. 그런데, 거기서 멈춰서는 안 돼. 내 탓으로 돌리는 것도 상당히 교만한 짓이야. 지가 뭘 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야. 알고 보면 자기가 한 것이 없어. 아무도 탓할 것이 없다. 인간관계에서 ’의존성‘이 왜 골칫거리냐. 서로 사람 탓을 하는 거야. 그러니 인간관계가 점점 어렵게 되는 거야. ’의존성‘이 폭력과 자살로 표출된다는 것이 탓할 대상이 자기 자신이면 죽어버리는 거야.
항복한다는 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해결 할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거야.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접는 거지. ’될 때로 돼라.‘ 소위 그런 말을 하잖아. 일리가 있어. 그것이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 볼려면, 책을 읽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건에서 자기가 실제로 그렇게 해보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이 책의 좋은 점은 꽤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 봐라. 하는 지시가 많이 있어. 이 사람 믿고 하라는 대로 해보면, 그런 뜻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봐.
질문자 : 지금까지 보면, 하고자 하는 것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그냥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거지, 상대방도 내 의지대로 좌지우지해봤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니까요.
선생님 : 돌이켜보면, 그렇단 말이야. 의식지도에 나오잖아. 의식 수준에 따라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어.
질문자 : 의식 수준이 아주 높게 숫자화가 되어도 개인 생활의 도덕적, 윤리적 척도에 포함이 안 되나요? 사회적 통념과 의식 수준은 관계가 없나요? 불편하게 읽었어요.
선생님 : 불편한 대로 받아들여. 잘못 아냐. 윤리, 도덕이 의식 수준의 어디에 들어가냐? 상당히 낮은 수준에 들어가. 그것들을 어기는 놈들이 있어. 그래서, 그것을 못 어기게 만든 거란 말이야. 노자가 얘기하잖아. “인,의,예,지”는 “도”가 없으니까 생기는 거라고. “도”라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거지. 이쪽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는 거야. 그런 점은 있어. 그것을 굳이 이해 시킬려고 하지 않고, 그 친구들은 그래.
질문자 : 서로가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면서 서로 함께 하지않고, 배려하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선생님 : 여기서 이 사람이 ’항복‘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해하게 되면, 사람들을 어떻게 하건간에 내버려 둬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나는 이해할 때, ’항복‘할 때,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혼자 항복을 하니? 누가 있으니까 항복을 하지. ’나는 두 손 듭니다.‘ 이거잖아.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어.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의존성‘이 없어지는 거지. 그 문제에 대해서 네가 두 손 들어라. 해결사로 나서지 말고 그냥 둬라. LET GO 나는 이렇게 이해했어. 항복하는 대상은 저 사람이 아니야. 저 사람한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항복하는 거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시오.‘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하나님, 존재에다가 항복을 하는 거지. 나 둔다는 것은, 그 분이 하시게 바톤을 넘겨드린다.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거야.
우리가 앉아서 밥 먹고 얘기하잖아.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야. 어떤 분이 우리를 통해서 하는 거야.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거야. 아주 추상적으로 말해서, 우리 공통점아 사람이잖아. 사람, 이것은 이름만 있지. 실체가 없어. 그 사람이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이 당신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사람이잖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의 한 모습이야.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당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모습을 안 가지고 있어. 그래서, 많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도 모양이 달라지고 있어. 끊임없이 달라지는 거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진을 찍지만 다 당신이야. 그런데, 전부 달라. 그 사람은 나이를 안 먹어. 공간도, 시간도 없어. 그것이 끊임없이 당신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모양을 바꾸면서. 당신을 사람이라고 하자. 사람이 당신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을 얘기라는 거야.
질문자 : 실체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 실체가 없으면 이런 모양을 할 수가 없어. 이름만 있는 거야. 실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눈으로, 감각으로 파악이 안 되는 거야. 당신은 없다고도 할 수가 없어. 당신이 있는데, 없다고도 할 수 없어. 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 그 당시에 그런 모양으로 우리 눈에 포착이 되는 거야. 실체는 안 보여. 안 보이는 실체,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각자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은 하나지. 우주에. 남자, 여자 관계없이 사람이 이런 모양을 하고 있고,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항복을 한다는 얘기지. 말이 이상하다. (웃음)
그 사람을 종교인들이 얘기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한테 항복한다면, 금방 알아들어. 사실, 안 하면서. (웃음) 다 알아. 언젠가는 하나님한테. 틱낫한은 이렇게 얘기해. 물결과 물, 바다와 물결, 하나잖아. 그 물결은 다 다르잖아. 사람은 다 다르지만, 사람은 하나다. 이게 다 사람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항복을 하라면, 어떤 사람한테 항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 중심에 항복한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한테 항복한다. 불교 신자 같으면, 부처님한테 항복한다. 맡긴다. 그런 말이지. 귀의한다.
’당신이 하십시오. 나는 못 하겠습니다. 나는 실력이 없습니다.‘ 진짜 실력이 없어. 내가 실력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 열쇠야. 내가 뭘 하겠다는 의도, 그것 ’기제‘ 이것이 다 사라지는 거야. 내가 노력해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 텅 비워지는 거지. 그것을 ’항복‘이라는 것으로 번역되는 거지.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어. 이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할려고 하지 마. 이해되는 것 가지고나 살아. (웃음) 이런 책을 읽을 때도 공감되는 부분만 밑줄치고 받아들여. 괜찮아. 뭔 말인지 모르면 넘어가. 이런 책은 한 번 정도 읽어서 되는 책이 아니야. 적어도 다섯 번 정도는. 읽으면서 빨라지지. 여러 번 읽으면서, 처음에 읽으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나중에 이런 말이구나 것을 알게 돼. 그런 재미가 있어. 이런 책은 한 번 슬쩍 읽지 말고. 자주 들여다 보고.
질문자 : 여기서는 “큰 나”라고 표현을 했더라구요.
선생님 : 이것은 “작은 나” “큰 나” 노자는 그것을 “도”라고 했어. “도”는 눈에 안 보여. 바람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는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잖아.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부는구나. 알잖아. “도”도 마찬가지야.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지만, ”도“가 있구나. 를 알 수가 있지. 길이라고도 하고, 그것이 있구나. 당신이 나를 마주 보고 있잖아. 마주 보고 있을 때, 그냥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 눈에 들어온 거야. 당신 눈에 내가 들어간 거고. 보는 거잖아. 엄격히 얘기하면,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거야. 내가 의도적으로 봐서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니까 보는 거란 말이야.
질문자 : 완전 피동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니까 본다는 말이네요. 날 살리시니까 내가 사는 거고.
선생님 : 그렇게 되니까 내가 뭘 한다는 말을 못 하는 거야. 내가 뭘 한다는 것도 안 나오지만, 나하고 얘기하는 것도 그 뿐이고, 실물이 없다. 알게 되는 거지.
질문자 : 모든 선생님들이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알겠는데, 집에 돌아가면 다시 일상에 빠져서 똑같이 사는데, 평상시에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 게 좋을까요? 일상생활에서 아무리 부대끼고 살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한테 항복하고 꿈을 꾸면 살아라.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 같아요.
선생님 : 아까 완전 피동이라는 말을 했잖아. 그게 어느 경계에 가면 나라고 하는 경계가 내가 주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단 말이야. 내가 늘 얘기했듯이, 입이 지가 말한다는 생각을 오랜 세월동안 하다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네. 누군가가 나로 말을 하는 거네.‘ 이렇게 된 거란 말이야. 내가 입이라면, 내가 다 먹고 자고 하는 줄 알았는데, 누가 이 몸으로 먹고 자고 하네. 이렇게 된 거야. 그 실체, ”큰 나“를 ”작은 나“가 알게 되는 거야. 그 때는 자기가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야. 그 분이 나를 통해서 뭘 해. 내가 하는 것이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피동인데, 인간은 깨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있단 말이야. 코는 생각을 못 해. 그래서, 얘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손도 생각이 없어. 그래서, 내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인단 말이야. 그런데, 인간은 생각을 한단 말이야. 지 생각이 있어. 결국은 그것이 하나의 착각이라고 하지만, 지가 생각하는 줄 알아. 사실은 누가 내 머리로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조차도.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에고라는 거지. 나라는 것이 독립된 주체가 있다. 학교에서 배우잖아. 의존하지말고 자립해라. 자아를 가져라. 잘 가르치는 거야. 그런데, 그 종국은 자아를 부정하라는데, 있어야 부정하지. 그러려면 있어야 해. 어떻게 부정하니. 공부가 깊어지면, 부정할 자아도 없었구나. 내가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이 생각조차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알게 돼. 그럼, 누구지? 이렇게 되는 거야. 어떤 성자는 평생 기도가 두 마디였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죠?“ 그 기도가 끊임없이 나왔대. 그냥 물었을 뿐이야. 답은 몰라.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의지로 뭘 하겠다는 마음이 다 없어지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해. 아주 오래 전에, 디아코니아에서 그 분한테 여쭸어. ”예수님이 12번 묵상을 하는데 보니까 전부 동사가 피동사야. 자기가 뭘 했다는 게 없어. 옷도 뺏겨 갔고, 벗어준 게 아니고, 맞았고, 욕도 먹었고, 끌려갔고, 당신이 하신게 아무것도 없네요.“ 물었어.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액티브한 모습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전부 당했네요. 하신 게 아무것도 없네요.“ ”잘 봤다. 내가 그것을 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한 거란 말이야.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이 죽음의 쓴 잔을 치워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 저는 죽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고 자기 뜻을 접었단 말이야. 자기 뜻을 포기한 거야. 그리고, 아버지한테 맡겼단 말이야. 죽이시든 살리시든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하십시오. 그런 뜻 아니겠어. 내 뜻을 접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 뜻이었어. 100프로 피동이면서 100프로 능동이라는 묘한 말을 하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능동적으로 내 뜻을 접었다. 무슨 뜻인줄 알려면 그렇게 해 봐야 해.
질문자 : 합작품이네요.
선생님 :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합작을 한 거지. 인간 세상에서 뭔 일이 이루어진다면 같이 하는 거야. 하늘과 땅이 같이 하는 거지. 내 삶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처음부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에서 뭔 일이 일어나잖아. 한 번도 하늘의 뜻과 내 뜻이 어긋나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아버지 뜻과 내 뜻이 서로 어긋나서 따로 논 적이 없다. 서로 뜻을 합하는 방법은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하면 돼. 그러면, 뜻이 사로 어긋나지 않잖아. 오랜 세월 하늘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동의한 거야. ”네가 원하니? 그래, 해라. 나도 원한다.“ 오랜 세월 살면서 마치, 하늘이 나한테 동의한 것을 마치, 내가 하늘에게 동의한다고 착각한 거야. 그래서,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생각했어. 그것이 내 소원이었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 했고. 그것은 철들고 나서부터. 늘 여쭤봐. 여쭤봐서 하라는 대로 한다. 오랜 세월 그렇게 생각했어. 거의 70 가까이. 사람 만날 때도. 관계를 맺을 것인가.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생각한 거야. 지금까지 살아왔어. 어느 날, 그것이 아니구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이 동의하셨구나. 그래서, 서로 이것이 합쳐졌구나. 그런 것을 알았어.
내 뜻을 내 스스로 부정하는 것도 나잖아. 요즘 기도는, 그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님. 당신이 누구신지 나는 잘 모릅니다. 솔직히. 당신이 나한테서 뭐를 원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싶어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뜻이 뭔지 잘 모르지만, 그 뜻을 저를 통해서 이루십시오. 제가 그것을 막지 않게 해 주세요.“ 이렇게 지금 기도하고 있어. 이게 예수의 길이야. 내 뜻을 당신 앞에서 지우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 뜻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이것이 아니고, 당신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능동에서 피동으로 넘어가는 거겠지.
항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항복이라는 것이 졌다. 이런 얘기잖아. 당신 앞에 나를 다 드릴테니까, 나를 죽이든 살리든 뜻대로 하십시오. 내어 맡기는 거. 본인도 나중에 얘기하지만, 엄청난 병을 앓았잖아. 의사고. 그것을 알면서, 소위 ’놓아버림‘ 놔두기를 깨달았을 때부터 자기가 자기 병을 고칠려는 의지가 없어지는 거야. 좋은 약 찾아 먹지 않고, 놔둔 거야. 그러니, 하나, 둘 고쳐진 거야. 황금빛으로 아주 빛나게 비치는 금덩어리가 있어. 검은 천으로 덮어. 그러면, 그 금이 검게 되냐? (웃음) 검은 천으로 덮었다고 해서 변질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냥 있어. 벗겨지면 저절로 드러나는 거야. 벗기는 것도 금덩어리가 벗기지는 않잖아. 누군가가 벗겨.
내 동생이 어디다가 글을 쓴 것을 봤는데, 자기가 광화문을 걸어가는데, 까마귀가 날라오더래. 하늘에서. 서울 한복판에 웬 까마귀야. 쳐다봤더니, 자세히 보니 까마귀가 아니라 까만 비닐 봉지더래. (웃음) 저 높은 빌딩에서 누가 버린 거야. 바람에 날아 온 거지. 까마귀로 잘 못 본 거야. 그런 말씀을 들었대. ”비닐 봉지가 바로 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는 더러운 쓰레기를 비우는 것이 마지막으로 할 일이다.“ 이런 글을 썼더라구. 내 안에 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 나 이런 사람이라고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은 마음, 아직도 자기 안에 남아있는가 봐. 이런 것을 다 비우고 싶다. 아름다운 글을 썼어. 내가 거기다가 한마디 달까 말까 하다가 안 달았어. 그것은 자기가 알아야 돼. ’쓰레기 봉투는 쓰레기를 못 버린다.‘ 항복하는 것은 내가 못 합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당신이 하십시오. 자기가 병이 낳고 그것을 통해 병을 치료하다보니까, 병원이 자꾸 커지고, 엄청나게 규모가 커진 병원이 생기고. 자기를 놔 버리니까 자기 말대로 우주가 동원되서 열심히 일을 하더라는 거야.
뉴욕에 방 구하는 얘기도 나와. 방이 하나 필요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날로 아파트가 생긴 거야.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데, 일이 되어지는거야. 내가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돌아 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는 거구나. 알게 되는 거지.
질문자 : 어느 순간에 ’허무주의‘가 발현되어서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고, 하늘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서 자살 충동이 느껴지고, 주위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하늘의 의미를 잘 받아 들여야겠군요.
선생님 : 이런 사람들이 얘기하는 중요한 것 하나는, 우리 시선이 사회현상이 돌아가는 그런 시선에 뺏기지 말란 얘기야. 전부 그것을 보지 말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들여다봐라. 눈길을 돌려 자기 속을 봐라. 아이들이 자살을 하고, 그런 현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야.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내 안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지,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잖아. 세상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산다고 해도 완전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봐. 고맙게도 나는 어릴 적부터 예수라는 사람을 내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이 고마워. 개인적으로 참 고마워.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물어볼 곳이 있단 말이야. 그것이 선생이지. 물어보고, 그 가르침 받아서 해보는 거고. 나 자신한테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냐. 그 질문을 그 분한테 해보라는 거지. 이런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면 되겠습니까? 그것을 진심으로 하면, 그런 대답이 올 거라고 봐.
이 사람은 무실론자야. ”하나님,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로 존재한다면, 살기 힘든데, 해결해 주십시오.“ 질문 했대. 전환점이 되는 거야.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진 않아. 기독교에서 오염되고, 잘 못 인식되어서, ”큰 자“ 이렇게 쓰긴 해. 그것이 그거야. 그 분에게 두 손 드는 거지. 말이 한계가 있어. 뭔 소리를 해도 다 담을 수는 없다. 기도 하나 가지고 살아 봐. 난 이렇게 기도해. ”하나님, 난 당신 뜻이 뭔지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 뜻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제가 그것을 방해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것도 내가 못 해. 돌이켜 놓고 보면, 군데군데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길을 열어주고, 나를 구해준 존재를 경험했잖아. 하고 있잖아. 그때 나를 도왔구나. 나를 인도해서 누구를 만나게 하고, 사건을 경험하게 하고, 여기까지 나를 오게 했구나. 없어? 있잖아. 그러니까, 여기 앉아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누구인지 알 거 없어. 알려고 노력해도 알아지는 것이 아니야. 우리 엄마인데, 진짜 우리 엄마인지 누가 그것을 증명해 주냐? (웃음)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어요. 요새 유전자 검사도 한다 하더라. 내가 엄마를 믿고 의지하지만, 내 속에 뭐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지? 그래도 의지하잖아. 나를 맡기고.
질문자 : 선생님, 요즘에 어디서 어떻게 지내세요?
선생님 : 나도 효선도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데, 효선이 참 공부를 잘 하고 있어. 아주 잘 지키셔. 그분이. We have no idea. 정말이야. No program, No problem. 뭔가 아이디어가 없다고 하지만, 뭔가 자꾸 주셔. 며칠 전에는 엄마 돌아가시고 돈이 들어와서 있는데, 이것 가지고 오두막 짓자 그래. 잘 했다 했어. 그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절대 그 아이디어를 우리가 실천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것은 동의해. 우연찮게 건축업자도 만나게 되고, 돌아가. 부암돈 전세 살던 사람도 나가서 짐을 옮기고 그곳에 있을 거 같아. 집을 지어주시면 노은에서 살고. 매일, 하루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이나 감당하고 살자. 여기까지 합의가 되었어.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내일 먹을 밥을 지금 어떻게 먹냐? 못해. 어제 청주에서 노은가는 길이 비 때문에 ㅂ막혀서 고생고생해서 갔다더라. 생전 모르는 길도 가보고.
뭔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존재하게 한 뭐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게 하는 거잖아. 나를 여기 존재하게 한,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는 뭐가 있으니 내가 존재하는 거잖아. 이 물건이 도공이 있어서 여기 존재하듯이,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누가 나를 만들었고, 누가 나를 있게 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나보다 그분이 더 잘 안단 말이야. 거기에다가 ”쓰시오.“ 하는 거야. 그쪽으로 마음을 두는 거야. 누구인지 알려고 애쓰지 말고, 내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단 사실을 인정하고.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여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분명한 사실이잖아. 누가 나를 여기 있게 한 거야? 이 모양으로. 어디다가 쓸 것인지는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쓰십시오.“ 예수가 한 기도가 그거야.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살자는 거지. 이 책을 쓴 사람도 그 얘기고.
살려주시니까 사는 거지.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야.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해.
선생님 : 당신 것인데, 나는 볼 수 있어. 본인만 못 봐. 그것이 뭘까? 자기 얼굴이야. 자기 얼굴을 못 봐. 코 끝만 보이지. (웃음)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 내 얼굴을 보는 방법. 거울에 보이는 내 얼굴은 내가 아니지. 내 모습이지만, 나랑 반대로 보이잖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나랑 닮기는 했지만, 나는 아니야. 나의 참 얼굴을 보는 사람은 없어. 거울보고 내가 저렇게 생겼구나. 알 수 있는 거지. 거울말고 내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따로 있어. 생각해 봐. 사진도 내 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어. 사진하고 거울하고 차이가 뭐야? 사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내 얼굴은 지난 날의 내 얼굴이야. 과거의 내 얼굴. 거울은 지금의 내 얼굴. 사진은 지금의 내 얼굴을 못 보여줘. 10분 전에 찍은 것도 과거지. 지난 날의 내 모습을 보여줄 뿐이야. 거울은 어제의 내 모습을 못 보여줘. 거울은 지금 여기 내 모습이지. 어제의 내 모습은 거울은 못 보여줘. 사진은 지금의 내 모습을 못 보여줘.
사진처럼 사는 사람과 거울처럼 사는 사람이 있어. 사진처럼 사는 사람은 과거를 살아. 과거의 자기, 지난 날의 상처, 지난 날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 해. 그것만 봐. 지금은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아파. 어제의 상처 때문에. 거울처럼 사는 사람이 드물어. 거울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잖아. 이 순간, 그것이 유일한 거야.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 옛날 어른들이 거울처럼 마음을 쓰고 살아라. ”用心若鏡“ 거울처럼 마음을 써라. 지난 지난 날의 사건에 휘둘리지 말고,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지 말고, 내일 오지않는 일을 걱정하지 말고, 현재 순간을 살아라. 그것이 해보면 참 어려워. 왜 어려울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쉬울 건데, 그것이 가장 어렵단 말이야.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았어. 아이 때는 그것이 없으니까 순간을 살아. 예수가 어린아이 같아야 하늘나라 간대. 그때 예수가 말한 어린아이는 젖먹이야. 엄마 품에 안겨있는 젖먹이. 젖먹이는 전쟁이 나도 엄마가 있으니까 겁 안 나잖아.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 떨어지면 난리나. 그 엄마가 누구냐. 아까 얘기한 나를 있게 한 존재, 그것이 있으니 내가 사는 거야. 그것을 기억하라.
3살, 4살부터는 자아가 생겨서 엄마한테 벗어 날려고,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고, 그런단 말이야. 그게 필요해. 그랬다가 다시 엄마 품으로 기어 들어와야 제대로 된 거야. 엄마 품을 떠나지 않는 놈은 엄마 품이 어떤 데인지 몰라. 괜히 헛고생한 거 아니야. 다 필요해서 겪는 거야. 그래서, 고마운 거야. 그러나, 끝내 엄마 품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그 고생한 것이 진짜 헛 것이야.
질문자 : 커피를 마시는데도 생각에 빠져서 맛을 모를 때가 있어요. 어릴 때 밥 먹으면서 말도 못 하게 한 밥상머리 교육이 참 좋은 거예요. 시간이 갈수록 선조들이 지혜로웠다는 것이 느껴져요. 오로지 한가지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본다는 것이.
선생님 : 그러면, 그 녀석은 그렇게 얘기해. 나는 핸드폰 보면서 밥 먹었다고. (웃음) 생리적으로 여자들은 하나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을 잘 해. 그렇게 살지 뭐. 알 될 것이 뭐가 있어. 뭐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근거가 없어. 자기가 만든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