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의 이미지-‘구원과 자유’에의 열망: 박인관의 작품세계
김 광 명(숭실대 명예교수, 미학/예술철학)
작가 박인관은 1980년대 초부터 자신의 예술세계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한동안 극사실적인 ‘상황 시리즈’에 매진하다가 자유로운 내적 표현의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1989년의 첫 개인전은 원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성을 지닌 작품이었으나, 그 후 자유로운 곡선과 내적 에너지의 분출로 인해 추상성이 점차 감소하게 된다. 40여년에 걸친 작가 박인관의 작업진행과정을 크게 보면, 기하학적인 구성의 선과 면에 관심을 보이다가, 차츰 기하학적 구성이 옅어지면서 표현적 특성이 드러나는 가운데 자신의 중심된 주제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삶과 작품은 매우 밀접한 연관 속에 있으며, 주제는 작품과 작가의 삶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가치와 방향을 나타낸다. 붓질한 화면을 긋거나 물감을 뿌리고, 지우거나 덧칠하며 사용하는 재료와 기법이 ‘이미지’라는 주제로 집중하게 된다.
작가 박인관은 초기에 구상적 접근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했으나 이후 창작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비구상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가지고 있는 건조함을 극복하고자 자유로운 추상으로 변화를 시도했고,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조화를 꾀하게 되었다. 작가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통한 정서적 안정으로 무한한 창조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시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미지를 드러냈다. 기하학적이면서 정제된 구성과 표현주의적이면서 자유분방한 경향이 혼재하고 있으며, 밝은 색과 어두운 색, 기하학적인 원과 삼각형 및 사각형이 적절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러는 중에 평론가 김복영이 언급하듯, “기억의 이미지들은 무의식의 저변에서 지각으로 건져 올리는 방식에 의해 크게 부각되거나 잠복된다. 작가는 이미지즘을 전적으로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표면과 심층이라는 대립의 세계를 극복하고자 한다.”여러 기법이 혼용되면서 안과 밖의 대립이 완화되고 그 경계가 통합되는 분위기가 연출되며 주제가 더욱 심화된다.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작가 박인관의 작업은 <이미지-유년시절>에는 ‘내면에 잠재한 무의식의 발로로서 동심적인 자아’를 추구하고, 이어서 의식의 현실세상에서 관계를 맺는 여러 인간 모습을 찾아 <이미지-기억여행>에 나선다. 내면에 잠재해 있던 순수한 동심속의 자아를 추구하던 박인관은 새로운 기법과 표현 방법을 모색한 끝에, 알루미늄판 위에 스크래치를 한 후에, 오일 칼라로 페인팅을 해서 알루미늄 그림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이후 불확실한 미래의 시공간을 미리 경험하듯이 이미지를 단순화하여 그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했다. 현대적인 감각은 있어 보이나 차가운 느낌이 강해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장지 판넬에 유채, 캔버스에 혼합재료 등을 사용하고 화면을 양분하여 인물과 기억이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표현하게 된다. 작가의 이러한 예술의지와 시도는 ‘유년시절’을 거쳐 ‘기억여행’으로, 그리고 ‘시공유영(時空遊泳)’ 및 ‘시원(始原) 이미지’ 연작으로 이어진다. 이는 작가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주제가 된다. 의식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작업의 이면에 자리 잡은 미적 사유의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 근작에서는 <이미지-시원> 연작과 <이미지-새 하늘 새 땅> 연작으로 집중된다. 아마도 <이미지-새 하늘 새 땅>은 선행하는 <이미지-시원>을 변주하여 전개시킨 경우로 볼 수 있으나 그 연장선 위에 포괄된다고 하겠다. 시원(始原)은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열린 때이며, 세상의 시작을 알린다. 모든 사물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쳐 다시 시원으로 회귀하여 순환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기 보다는 중간지대 혹은 중립적인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재현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예술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고정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 등의 대립을 완화하고 융합하며 중재한다. 때로는 우리 정서에 익숙한 민화적 요소를 더해 이와 비슷한 구상으로 보이기도하나, 대체로 추상과 표현의 접점에서 자유로운 회화양식을 취한 것이다. 특히 그는 자유로움과 포용성, 유연함과 개방성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기독교적 신앙을 암시하는 상징성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해나간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닌 종교에 대한 전체적 관심의 저변에는 우주를 받아들이려는 우리의 태도가 깔려 있다. 예술과 종교 모두 인간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으로서 종교와 예술 사이에는 밀접한 친화성이 있다. 심미적· 종교적 경험이 갖는 상상적 특질은 인간 영혼의 깊은 무의식의 심연 속에 공통의 근원이 있음을 가르쳐준다.작가 박인관의 <시원> 연작은 기독교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생에 대한 실존적 고뇌의 길에서 택한 이러한 상징성이 예술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는 작가 스스로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화면에서 ‘빛’을 강조하며 기독교적 상징을 나타낸 기호적 도상들이 창조에 대한 진지한 작가의 고백을 보여준다. 작가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화면에서 전경과 후경, 대상과 배경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이미지로 귀결되는 주제는 작가의 그림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한다. 이미지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절대자의 활동을 비추는 거울이며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의 모상(模像)이다. 이미지 속엔 현재의 부재를 통해 바람직한 존재를 드러내는 소망과 기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종교적 승화는 인간의 구원이나 구제요, 예술적 승화는 자유를 향한 인간해방이다. 종교적 가치로서의 성스러움은 아름다움을 빌어 표현될 때 그 완전성을 얻는다. 미적· 종교적 충동의 공통된 뿌리는 진정한 자유에의 충동이다. 창조주의 형상(Imago Dei)을 그대로 빚어 태어난 인간은 애초부터 창조성을 발휘할 소명을 안고 있다.예술은 미적 상상력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옮겨 놓는 탁월한 기술이다. 천지창조의 순간은 하늘과 땅이 혼돈 속에 자욱한 안개에 가려져 있으며, 비현실적인 몽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시원, 곧 세상이 열리는 극적 순간을 작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렸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혼돈에서 질서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여는 계기에 빛이 개입한다.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 빛인 만큼, 빛은 진리이며, 신 자신이다. 평론가 이재언은 박인관의 작품을 평하며,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근원적 화해와 교감’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서 접근한다. 타당한 해석이라 생각된다. 재료나 기법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 작가 특유의 진지한 사유와 의식의 근저에 내재한 에너지를 예민하게 포착해 자신의 신앙심을 그림에 투영시킨 것이다.
2006년에 캐나다 토론토의 Cedar Ridge Studio Gallery에서 가진 초대전에서 Joy Hughes 관장은 박인관의 작품에 대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억의 잔상들을 일기를 쓰듯이 이미지화하고 있으며, 때로는 생략하고 구체화 시키거나 과감하게 화면을 분할하고 상이한 재료와 다양한 기법들을 이용하는 등 서로 대립적인 요소들을 작가 특유의 서정성을 통해 질서 있게 조화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환상이나 기억에 의한 상상의 이미지가 병치되고 무의식의 세계가 중첩되고 충돌하는 매력이 있다.”고 평한다. 박인관이 차용한 이미지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대개는 그림 위쪽에 산세가 그려져 있고, 화면 아래쪽에 양식화된 나무가 그려져 있어서 작품의 일부를 이룬다. 그림 아래쪽에 길게 그려진 것은 마치 섬처럼 보인다. 생명이 태동하는 물질 속에는 삼각형과 사각형의 여러 색상으로 된 띠 모양이 그려져 있다. 기독교 도상학에서 삼각형은 삼위일체를, 사각형은 여기에 인간이 더해져 완전형을 뜻한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미지-시원>(2012)과 <이미지-시원 2013> (2013)엔 처음을 알리는 생명의 분출과 역동적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미지-새 하늘 새 땅>(2018)은 태초의 모습, 원시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시간 이전의 형상이다. 태초의 것에 시간이 개입되고 빛이 비추이며 마침내 생명이 등장하게 된다. <이미지-새 하늘 새 땅 018-잃어버린 양을 찾아서>(2018)는 특히 기독교적 상징성을 담고 있다. 화면의 맨 위에는 분홍빛의 환상세계가 무지개처럼 펼쳐지고, 일곱 마리 양의 형상이 저마다 한 마리씩 조그마한 원 안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상 위에 배치되어 있다. 기독교문화에서 양은 선량한 사람이나 성직자를 상징하거니와, 높은 경지의 도덕성과 진실성을 담보한다. <이미지-시원 2011-시작과 끝>(2011)에서 작가는 마치 우주의 중심인 듯, 짙푸른 하늘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 좌우에 형상을 그려 넣어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역사가 진행됨을 알려 준다. 기독교적 상징인 알파와 오메가의 글자모습이 맨 아래쪽에 그려져 있어 시종(始終)을 관장한다.
이처럼 지속된 변화의 단초를 우리는 2008년 부산의 김재선 갤러리 초대전 이후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작가의 새로운 신앙생활에 의한 정서적 안정에 따라 작품은 밝은 화면의 구성으로, 그리고 색채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온다. 빛에 의한 내적 희열이 표출되고 영적 구원의 열망과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투영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내면에 머물던 빛의 감성이 무한한 공간으로 확산되고 조형적인 표현의 방법과 의지가 근본적으로 다시 정립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창세기의 말씀이 무한한 창조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말씀은 시원(始原)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미지로 변화된다. 작가는 “그림은 삶의 중심이자 가장 확실한 실존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작품 활동은 삶의 중심이며 가장 확실한 실존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비움과 선한 세상, 창세기의 무한한 창조의 시공, 궁극적으로 완성된 피안의 세계이다. 이는 아마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꿈꾸며 동경하는 세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