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도르
:그 이름에 걸맞는 용기를 지닌 아이들은 누구나 가르치도록 하세
먼지가 가득찬 두 눈가가 까끌했다. 허공을 떠도는 검은 재를 잡으려는 내 손이 무색하게, 소용돌이 치는 바람은 나를 무자비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뜨겁다 못해 아린 불의 열기로, 공들여 지은 천장 구조물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여져 있던 창문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모두 반토막이 나버린 조각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몸을 싣고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계단이 드디어 숨을 죽였다. 여러군데 구멍이 뚫린 탓에 쉽사리 발도 잘 내딛지 못하는 그 곳 한가운데에서, 힘없이 털썩 주저 앉은 나는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따끔거렸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내 몸을 보호하려 챙긴 그 검은 다 허물어진 계단 밑으로 떨어져 자취도 찾을 수 없었고, 임시방편이던 단단한 갑옷도 다 뜯겨져 나가 살갗이 다 드러난 상태였기에.
고요한 숲속에 홀로 갇힌 듯, 귀가 멍멍했다. 흐릿히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인걸까. 고개를 돌려 허공을 마주하는 순간 고요하던 계단이 또한번 크게 요동쳤다. 제 몸이 다 부서진 줄도 모르고 또 움직이기 시작한 계단이 허물어진 제 몸뚱아리를 씻어냈다. 아직도 내 몸뚱어리가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찬찬히 감았다 뜬 내가, 까끌한 시야 너머의 날카로운 것을 발견했다. 칼? 칼인걸까?
"위험해!!"
핏물에 젖어 영롱히 반짝이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자, 한결 뚜렷해진 시야로 칼이 아닌 사나운 뱀의 이빨이 나를 덥쳤다. 순식간이었다. 뒤늦게 날 노리고 있는 뱀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내가, 계단의 가장자리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러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뱀의 이빨이 한박자 늦게 움직이는 계단을 찍고서, 그대로 잔여물들을 내뱉었다. 뱀의 이빠에게서 멀어진 계단의 일부가 또다시 흙먼지 안으로 자취를 숨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이 계단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죽음 목숨임이 틀림없었다. 뱀의 눈초리의 끝은, 여전히 나였다.
"이건 왜 안멈추는거야! 멈출 수 있는 방법 없어? 형, 형도 모르는거야?!"
이런 긴박한 순간에도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가 뚜렷했다. 조금 전 날 깨운 목소리와 같은 것을 보니, 아니, 한참 전부터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무의식에 헛웃음이 내뱉어졌다. 정호석, 넌 왜 여기있는건데. 뒤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날 올려다 보고 있는 무리들 중 너가 있음을 확신했다. 덕분에 말끔히 씻은 듯이 돌아오는 정신에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다시 계단 한복판으로 몸을 던지자, 또 한박자 늦은 뱀의 이빨이 허공을 찍었다. 역시 또한번, 계단은 제 몸뚱어리의 일부를 잃었다.
"침착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계단이 멈춰야 마법을 쓰던지 하지. 무식하게 올라갔다가 다같이 떨어지면 어쩔건데. 네가 다 책임질 수 있어?!"
차갑고도 이성적인 기숙사장 오빠의 말에, 흐릿하게나마 욕을 읊는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는 계단은 제 몸뚱어리가 점차 사라지자 겁이 난건지, 더욱 정신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기숙사장 오빠의 말처럼, 내가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는 뾰족한 수는 나에게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뱀의 공격을 피해 계속해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계단은 모두 무너질테고, 난 손 쓸 틈도 없이 추락하게 될텐데, 운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뱀을 피해갈 순 없을게 뻔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저 뱀을 따돌릴 수 있을까.
눈치없이 흘러내려 내 시야를 방해하는 땀을 닦아내고서, 뱀과의 신경전을 벌인 내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내 몸의 스무배쯤은 돼 보이는 뱀 역시 나를 따라 찬찬히 계단을 내려왔고, 그 엄청난 무게에 계단이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이 급격히 기울어지며 모든 공간에 진동이 울리자, 창가에 남아있던 조각상이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제 위치를 유지했다. 그 중 몇몇은 움직이는 계단의 일부가 허물어져 허공이 전부인 그곳을 향해 떨여졌고, 아직 계단 위에 위치한 조각상들은 애처롭게 제 몸을 지키고 있었다. 수가 생겼다. 저 조각상만 있으면 돼.
"정호석, 저 조각상을 떨어트려!"
"뭐? 너 미쳤어?!"
"시간 없어 얼른! 내 머리 위로 떨어트려!!"
내 외침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정호석이 잠시 주춤거리다, 결국 한다는 것이 제 손에 쥔 지팡이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에 잔뜩 미간을 좁혀 보인 내가 정호석!! 하고 소리치자, 울상을 지어보인 정호석이 싫어! 너무 위험하잖아!! 죽으면 어떡하려고!! 하며 울부짖어 보였다. 처음 보는 낯선 정호석의 모습이었다. 쟤가 저렇게 나약한 놈이 아닌데. 왜 저러는거야.
한 눈 팔 겨를이 없다는 것을 자각시켜주 듯, 내가 정호석에게로 시선을 돌린 찰나 뱀의 날이 선 이빨 끝이 또다시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에 한번 더 몸을 던진 내가 계단의 끝자락에 서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계단 바닥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시간이 없어. 이대로면 금방 무너질텐데..!
내 두 눈에 띈 미세한 금이 점차 확연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찰나, 정호석을 밀어내고서 정중앙에 선 기숙사장 오빠가 주문을 외쳐 조각상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서 떨어지는 조각상이 내 머리가 아닌 뱀의 몸뚱어리를 향해 제 몸을 박았고, 그 반동으로 내 몸이 허공에 튕겨나가자 그제서야 몸을 던져 날 품에 안아받은 정호석이 거친 숨을 몰아내쉬었다. 정호석의 눈물 젖은 두 검은 눈동자가 모두 나에게로 향했다. 뱀의 기다란 몸뚱어리와 함께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움직이는 계단 탓에 흙먼지가 모든 공간을 메꿔왔지만, 정호석은 단 한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날 품에 안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내가 하지 말자고 했잖아."
".............."
"왜 자꾸 위험하게 구는건데, 겁도 없이..!"
"............."
나조차도 희미하게 들을 수 있는 정호석의 중얼거림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정호석의 말에 덩달아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한 내가 그저 멍하니 정호석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자, 뒤늦게 날아온 파편을 재빠르게 피해낸 정호석이 그대로 날 품에 안은 채 복도를 뛰었다.
겁도 없이라니.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겁많은 아이처럼 굴었다고...! 도무지 오늘따라 이해할 수 없는 말만 잔뜩 내뱉는 정호석이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을 너로 착각하여 보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정반대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너는, 내게 매번 보여주던 그 용맹한 눈빛마저도 숨긴 채였다. 정말 정호석이 아닌걸까? 그렇기엔 익숙하게 다가오는 다정함이 여전히 달콤한데, 이 달콤함마저 거짓일리 없잖아.
"...정호석."
"어? 아직 위험하니까 눈 감고있,"
"정호석."
"왜? 어디 다쳤어? 아파?"
".....왜 다른길로 가?"
"............"
"여기 기사단 모여있는 쪽 아니잖아."
너만 왜 다른 길로 가고 있는거냐고. 정호석의 품에 안긴 채 복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점차 멀어지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비명소리,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동료들의 발소리, 지겹도록 울려대는 폭탄소리. 그리고, 점차 선명해지는 고요함과 네 거친 숨소리. 분명 우린 단순한 싸움이 아닌 전쟁에 몸을 담구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용맹하게, 용기있게, 겁 먹지 않고 제일 먼저 앞장 서 싸워야할 그리핀도르가 왜? 왜 도망가고 있는거지?
"왜 도망가고 있는거야, 전장은 반대쪽이잖아."
"............"
"이제 내려줘. 정신 차린지 오래야."
"............"
"오늘따라 왜그래? 항상 용감하던 그리핀도르 정호석이었잖아. 왜 답지 않게 굴어. 어디 아파?"
"........겁나."
"....뭐?"
"무섭다고. 겁이 나 미치겠어. 너 다칠까봐."
"..............."
"지금 가면 너 위험해지는거 뻔한데 내가 어떻게 거길 가."
힙겹게 답하며 애써 미소 지은 정호석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제 몸을 떨었다. 항상 웃고만 있던 눈꼬리도 축 늘어진 채였고, 또렷히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는 평소답지 않은 눈물 방울을 잔뜩 매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방울을 대신 해,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땀방울들이 정호석의 붉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지금, 정호석이 겁을 먹었다는거야..? 정호석이?
"용기 있는 그리핀도르, 이제 안할래."
"..........."
"나한테 실망해도 할 수 없어. 나 너 다치는 꼴 못봐."
"......."
"너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해, 보잘 것 없는 겁쟁이라."
제대로 잇지도 못하는 정호석의 말이 끝나고나서야, 온몸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정호석은 지금, 겁에 질려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하고 있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들을. 단 한 번도 두려워한 적 없던, 미래들을. 이제껏 모든 일에 닥쳐올 미래따위 생각한 적도 없던 정호석이었다. 항상 용기있게, 겁 없는 무식한 놈 소리까지 들으며 적과 싸우던 정호석이었는데, 지금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잔뜩 겁에 질린 정호석이 날 애처롭게 붙잡고 있었다.
"네가 다치는게, 무서워."
"............."
"미치도록 무섭고, 겁나."
"............."
결국, 상처투성이인 그 손으로 나의 손을 붙잡은 네가 눈물을 흘려냈다. 잔뜩 겁에 질린 그 표정으로,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며. 공포에 떨면서도 날 품안에 품은 네가, 내게 고백했다. 내가 다치는 것이 두렵다고. 날 잃는 것이 두렵다고. 과연 이게 맞는 선택일까? 그리핀도르 주제에, 겁을 먹어도 되는걸까. 이토록 애처롭게 날 붙잡는 널, 따라가도 괜찮은걸까?
"도망가자."
"..........."
"안전한 곳으로."
아니, 애초에 내가 널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소재로 꼭 한번 글 써보고 싶었어요! 전 해리포터의 노예니까 ㅎㅅㅎ
첫댓글 ㅠㅠㅠㅜㅜㅜㅜㅜ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호석아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12.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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