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원주종로의료기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한국사 들여다보기 스크랩 악역을 자청한 임금 : 세조/ 독살 된 왕 : 예종
jr-m 추천 0 조회 166 13.09.13 19: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5대 문종 가계도

세종 - 소헌왕후 청송심씨 심온의 딸

제 5대 문종

장남 : 문종(1414-1462)

재위기간 : 1450.2-1452.5(2년3개월)

부인 : 3명 / 자녀 : 1남 2녀

1부인

현덕왕후

안동권씨

(권전)

1남1녀

2부인

귀인 홍씨

자식없음

3부인

사측 양씨

1녀

제6대 단종

경혜공주

 

 

경숙옹주

 

 

제6대 단종 가계도

문종 - 현덕왕후 안동권씨 권전의 딸

제 5대 문종

장남 : 단종(1441-1457)

재위기간 : 1452.5-1455.윤6(3년2개월)

부인 : 1명 / 자녀 : 없음

1부인

정순왕후

여산송씨

(송현수)

자녀없음

 

 

 

제7대 세조 가계도 

세종 - 소헌왕후 청송심씨 심온(沈溫)의 딸

제 7대 세조

차남 : 수양대군 (1417-1468)

재위기간 : 1455.윤6-1468.9(13년 3개월)

부인 : 2명 / 자녀 : 4남 1녀

1부인

정희왕후

파평윤씨

(윤번의 딸)

2남1녀

2부인

근빈 박씨

2남

덕종(의경세자)

제8대 예종

(해양대군)

숙의공주

덕원군

창원군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① 시대를 잘못 읽다

이덕일 | 제85호 | 20081025 입력

 

리더에게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이끌어갈 수도, 통합할 수도 없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인물이 권좌에 오르면 그 사회는 큰 불행에 처하게 된다.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太和殿)의 모습. 권태균 시사미디어 기자
1452년 5월 14일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승하했다. 재위 2년, 한창 때인 39세였다. 『문종실록』은 “신하가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그치지 않았으며, 거리의 소민(小民)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2년 5월 14일)고 쓰고 있다. 문종의 병은 허리 위의 종기(종氣)였는데, 이를 치료한 어의 전순의는 5월 8일 대신들에게 “성상의 종기가 난 곳의 농즙(濃汁)이 흘러나와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혀졌습니다. 오늘부터 처음으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니 예전의 평일과 같습니다”고 말했다. 거의 다 나았다는 말에 대신들은 기뻐하며 물러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 느닷없이 승하한 것이다.

『문종실록』은 “이때 사왕(嗣王·단종)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자 이홍위(李弘暐·단종)는 12세에 불과했으나 모두 그의 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개국 60년 된 조선의 헌정질서였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해야 했으나 그럴 왕대비가 없었다
.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母后) 현덕(顯德)왕후 권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며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정부의 영의정 영천황씨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순천김씨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진주정씨 정분(鄭분)이 단종을 보좌했다.

 

경주이씨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계유년(癸酉年:단종 1년)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른여섯 살 수양대군 이유(李유)가 주목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군들의 이심(異心)을 막기 위해 단종 즉위 교서에 분경(奔競) 금지 조항을 넣었다.

 

이·병조(吏·兵曹) 등의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하는 것이 분경인데, 단종 즉위교서에는 특별히 정부 대신(大臣)과 귀근(貴近) 각처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귀근 각처가 대군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경을 가장 강력하게 금지한 왕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삼군부와 사헌부의 아전(吏)들에게 권세가의 집을 상시 감시하다가 5세(世) 이내의 친족이 아닌 자가 드나들면 무조건 체포해 가두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의 법전인 『속육전(續六典)』은 종친의 정사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굳이 대군들을 분경 금지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분경 금지 조처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수양은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을 불러 “우리에게 분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행세하겠는가”라고 항의했다.

 

이는 수양이 야심을 노골화한 것이므로 의정부 정승들은 『속육전』을 들어 강하게 반박하고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은 탄핵해야 했으나 영의정 황보인은 크게 놀라 대군 집의 분경 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이것이 숱한 비극의 단서였다. 수양이 항의한 것은 자신이 사람 만나는 것을 제한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분경 금지 조처에서 해제된 것을 계기로 수양은 다양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고령신씨 신숙주(申叔舟)나 안동권씨 권남(權擥) 같은 벼슬아치도 있었고, 청주한씨 한명회(韓明澮) 같은 낙방거사도 있었다.

 

음서(蔭敍)로 종9품 경덕궁(敬德宮:태조의 개경 잠저)지기가 된 한명회를 두고 수양대군은 “예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극찬하면서 국사(國士)로까지 높이 평가했다.

 

당초 친구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보라고 권했던 인물이 한명회였다. 과거에 거듭 낙방한 한명회에게 정상적 헌정질서 속에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수양의 야심과 결탁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라고 권한 것이다. 한명회는 이미 수양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지위와 돈과 술을 이용해 숱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수양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나라의 동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단종 즉위년(1452) 9월 10일 수양대군은 스스로 고명(顧命) 사은사를 자청한 것이다.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대군이 가기를 청하니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말하자 단종은 답을 하지 않다가 선왕의 부마(駙馬)를 사은사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미 수양에게 붙은 강맹경은 부마들이 병들어서 안 된다고 반대했고, 수양대군은 거듭 자청해 드디어 사은사로 낙점되었다.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단종실록)』는 이때의 사신 길이 무척 위험한 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단종 즉위년 10월 11일자는 수양대군이 이복동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증)에게 “국가의 안위가 이 한 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매일 밤 대왕대비(大王大妃:세조비 윤씨)가 몰래 울었고, 세조도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원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사신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명에서 통상 관례에 따라 단종에게 국왕 책봉 고명(誥命)을 내린 데 대한 답례사일 뿐이었다. 쿠데타를 결심한 수양에게는 ‘이 한 번의 행차’가 중요했는지 몰랐지만 이는 그의 사정일 뿐이었다.

 

후세의 비난이 두려워 편찬자의 이름도 적지 못한 『노산군일기』는 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종친이 베푼 전별식에서 수양이 홀로 취하지 않자 양녕대군과 태종의 서자 경녕군(敬寧君)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양녕이 수양에게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도 적고 있다. 임금 이외의 인물에게 ‘천명’이란 용어를 썼다면 그 자체가 ‘역모’였다. 수양은 사신으로 가면서 영의정 영천황씨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일종의 인질로 데려갔다.

이 무렵 명나라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조선은 태종~문종을 거치며 국력이 크게 신장돼 있었다. 명의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3년 전인 1449년(세종 31년) 8월 몽골군과 전쟁에 나섰다가 현재의 허베이(河北)성 화이라이(懷來)현 부근의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패했다. 대군은 궤멸되고 영종은 생포되는 ‘토목의 변(土木之變)’이었다. 몽골군은 베이징(北京)까지 공격했다.

영종은 이듬해 몽골군이 풀어주는 바람에 귀국했으나 베이징 남지자(南池子)에 있는 남궁(南宮)에 유폐되어야 했다. 영종의 동생인 대종(代宗:재위 1449~1457) 주기옥(朱祁鈺)이 즉위했으나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수양이 사신으로 간 것은 이런 때로서 주변 국가들이 명을 우습게 볼 때였다. 그러나 양녕은 대종이 예부 낭중(郎中)을 시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하자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받았다. 예부 낭중 웅장(熊壯)이 놀라 일어나면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감탄했다고 『노산군일기』는 전한다.

 

조선 국왕의 숙부가 일개 낭중에게 통상 예법을 뛰어넘어 과공(過恭)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수양은 저자세 외교로 일관함으로써 권위가 땅에 추락한 명 왕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명의 지지를 확신한 수양은 쿠데타를 결심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태종처럼 왕위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때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태종 때는 질서를 만들던 시기이고 이때는 질서가 잡힌 시대였다. 태종~문종대를 거치며 유학이 사회의 주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그렇게 유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② 헌정질서 파괴

이덕일 | 제86호 | 20081101 입력

 

명분은 때로 실용보다 중요하다.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힘이 명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수양은 명분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종 시절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으나 수양에게 살해됐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중략)…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는 시를 남겼다. 김종서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달(단종을 상징)을 향해 울부짖고 소나무(유학자 그룹)는 달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단종 1년(1453)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안동권씨  권람· 청주한씨 한명회 등을 집으로 불러 “순천김씨 김종서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그날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수양은 집 후원(後苑) 송정(松亭)으로 수십 명의 무사를 불러 활을 쏘게 하고 술을 먹였다. 저녁 무렵 수양은 무사들에게 “오늘은 충신열사가 대의(大義)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순천김씨 김종서)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깜짝 놀란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 등은 “마땅히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역적이니 죽여 달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양이 온갖 공을 들여 키운 무사들에게조차 수양의 ‘대의’는 ‘역심(逆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노산군일기’는 수양의 말을 듣고 ‘북문 쪽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아무런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다.

다급해진 수양이 청주한씨 한명회에게 “대다수 사람이 불가하게 여기니, 장차 어떤 계교가 좋겠는가”라고 묻자, 쿠데타에 인생을 건 한명회는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할 수 없습니다. …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고, 홍윤성(洪允成)도 “군사를 쓰는 데 이럴까 저럴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해(害)입니다”라며 결행을 촉구했다.

부인 파평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수양은 가동 임어을운(林於乙云)과 무사 양정(楊汀) 등을 거느리고 순천김씨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김종서에게 “정승(政丞)의 사모(紗帽) 뿔을 빌립시다”라고 말해 경계를 느슨히 한 다음 청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보는 순간 수양의 재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내려쳤다. 아들 승규가 아비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덮자 양정이 칼로 찔렀다. 두만강 육진(六鎭) 개척의 원훈(元勳) 김종서가 이렇게 쓰러지면서 조선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시작된다.

수양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는 이때 “노산군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해 궁중의 술(內온)과 음식(內羞)으로 세조(수양) 이하 여러 재상을 먹였다”고 전하지만,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譜錄)’은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려워하는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부르는 명패(命牌)를 내리게 한 수양은 문(門)마다 역사들을 배치했다. ‘본조선원보록’은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生殺簿)’를 들고 문 곁에 앉아 있다가 ‘사부(死簿)’에 오른 대신들을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李穰),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명패를 받고 입궐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윤처공(尹處恭)·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은 집으로 쳐들어 온 역사(力士)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죽은 이현로(李賢老)는 단종 즉위년 윤9월 이미 수양에게 구타당했던 문신이었다. 감여(堪輿:풍수)에도 능했던 그는 “백악산(白嶽山)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종손)이 쇠하고 방룡(傍龍:지손)이 발(發)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의 말대로 백악산 뒤에 궁을 지으면 지손인 수양은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이다.

다음날 수양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가 되었다. 혼자서 의정부와 이·병조를 모두 차지했으니 ‘왕’이란 말만 빠진 사실상의 임금이었다.

 

살육전은 계속되어 수양의 친동생 안평대군,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 같은 왕족들과 허후(許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지정(池淨)·이보인(李保仁)·이의산(李義山)·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 등이 죽임을 당했다. 국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죽인 후 그 시신 위에서 축제를 열었다.

 

쿠데타 닷새 후인 단종 1년(1453) 10월 15일 수양대군·하동정씨 정인지·청주한씨 한확(韓確)·청주한씨 한명회· 안동권씨 권남 등 14명을 1등공신, 신숙주 등 11명을 이등공신으로 하는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되었다.

태종 즉위년(140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후 52년 만의 공신 책봉이었다. 공신의 자손들은 범죄(犯罪)해도 영원히 용서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난신전(亂臣田)이란 명목으로 나누어 가졌고, 급기야 그 가족들까지 죽였다.

처음에 가족들은 ‘변군(邊郡)의 관노(官奴)’로 삼았으나 계유정난 10개월 후인 단종 2년(1454) 8월 15일, 추석제를 지내고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停所)에서 살해령을 내린 것이다
.

 

단종의 명을 빙자했지만 “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았다”는 기록처럼 수양대군이 주도한 것이다. “이용(李瑢: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皇甫錫:황보인의 아들)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金木臺),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 그리고 정분(鄭분)·이석정(李石貞)·조완규(趙完珪)·조순생(趙順生)·정효강(鄭孝康)·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노산군일기’ 2년 8월 15일)”

39명을 추석날 사형시킨 것이다. 태종은 봉화정씨 정도전을 죽이고 아들 정진(鄭津)을 수군으로 삼았으나 재위 7년(1407) 판나주(判羅州) 목사로, 상왕 시절인 세종 1년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승진시켰다. 선 자리가 달랐기에 정도전은 제거했어도 자식은 종2품까지 승진시켰던 것이다.

단종은 재위 2년(1454) 수양에게 “숙부는 과인(寡人)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주공)으로 하여금 주(周)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끝까지 조카를 보좌함으로써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던 주공(周公)이 돼 달라는 애원이었다. 단종은 여러 차례 수양을 주공(周公)에 비유하는 글을 내렸으나 수양은 애당초 주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수양은 단종 3년(1455) 윤6월 친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세종의 서자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을 귀양보내 압박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단종은 그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고 전하지만 ‘육신록(六臣錄)’은 “밤에 수양대군이 철퇴(鐵槌:쇠몽치)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고 전한다. ‘육신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수양이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즉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위에 성공한 수양은 한명회·신숙주·한확·윤사로 등 7명을 1등공신으로 하는 총 47명의 좌익(左翼)공신을 다시 책봉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은 수양이 왕위를 빼앗을 때 ‘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양이 왕위까지 빼앗은 것은 시대가 용인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은 것이었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수양의 행위는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주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 때 집현전 등을 통해 성장한 유학자들이 이 명분 없는 쿠데타에 강력히 반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③ 사육신·생육신

이덕일 | 제87호 | 20081108 입력

 

가치관은 그 어떤 물질보다 중요하다. 세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확립한 유교적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학자들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은 잡았지만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잇따랐고, 유학자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등 숱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아침. 호조참판이자 외삼촌인 안동권씨 권자신(權自愼:현덕왕후의 동생)의 절을 받는 상왕 단종의 가슴은 뛰었다. 『세조실록』은 이때 단종이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상왕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서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에게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수양을 임금으로 책봉한다는 명 대종(代宗)의 고명(誥命)을 가지고 온 데 대한 답례였다.

 

창녕성씨 성삼문 등은 안동권씨 권자신의 모친, 즉 단종의 외조모 최씨를 통해 거사 계획을 알렸다. 단종은 긴장 속에서 거병을 기다렸으나 연회가 파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실록』이 “낮인데도 어두웠다(晝晦)”고 쓰고 있는 다음날. 성균관 사예(司藝) 안동김씨 김질(金질)과 장인인 우찬성(右贊成) 동래정씨 정창손(鄭昌孫)이 대궐로 달려가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다’면서 충격적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삼문(成三問)이 안동김씨 김질을 찾아와 “이러한 때를 맞이해 상왕의 복립(復立)을 창의(唱義)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라며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세조는 즉시 호위 군사를 모으고 승지들을 급히 불러 좌부승지 성삼문을 꿇어 앉혔다. 세조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한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 나서 말하겠다”고 답했다. 김질이 다시 입을 열자 성삼문은 “다 말할 것 없다”고 말을 막았다. 세칭 사육신(死六臣) 사건, 곧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창녕성씨 성삼문· 순천박씨 박팽년· 진주하씨 하위지· 한산이씨 이개· 문화유씨 유성원 같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과 기계유씨 유응부(兪應孚)· 창녕성씨 성승(成勝)·박쟁(朴쟁) 같은 고위급 무신들이 결합한 사건이었다.

명 사신 접대 연회에서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 뒤에 칼을 차고 시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뽑힌 것이 기회였다. 그러나 광연전이 좁고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폐지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은 칼에 잘린 핏빛의 대나무와 같았다. 무수히 많은 대나무와 죽순(생육신과 절개 있는 충신들을 상징)은 꾀꼬리(단종)를 향해 서있다. 대나무가 끝없이 죽순을 내는 것처럼 조선 유학자 사회에서 충신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두 동강 난 칼은 세조의 패륜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뜻한다.
『세조실록』은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다시 계청하자 신숙주에게 내부를 살펴보게 하고는 드디어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자 문신들이 거사 연기를 주장했다. 『육신전(六臣傳)』은 무신 유응부가 “이런 일은 신속히 하는 것이 좋고,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된다”며 결행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는 문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세조가 농사의 작황을 살피는 관가(觀稼) 때 거사하기로 연기했다.

 

그러자 유응부의 우려대로 동지였던 안동김씨 김질이 고변자로 돌아선 것이었다. 관련자들이 잡혀왔으나 아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육신록(六臣錄)』은 잡혀온 박팽년이 “내 임금(단종) 신하지 어이 나으리(세조) 신하리요”라고 말했고, 이개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리까”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탄식하며 죽어갔다.

세조 일당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박팽년이 자백한 관련자만 박팽년과 부친 박중림(朴仲林), 성승·성삼문 부자, 하위지·유성원·이개·유응부·김문기·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 등 14명이었다. 세조 일당은 관련자의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모두 죽여 대를 끊었다.

 

그러나 『선조실록』 36년(1603) 4월조는 박팽년의 유복(遺腹) 손자 박비(朴斐)는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여종을 대신 바쳐 죽음을 면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세조의 즉위 명분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영조 40년(1769) 『장릉지(莊陵誌)』의 서문을 쓴 남학명(南鶴鳴)은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육신전』을 간수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조는 공자의 말대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건 직후 세조는 8도 관찰사에게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소민들을 경동하지 않게 하라”는 전지를 보내 백성의 소요를 두려워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용안(龍眼)이란 무녀(巫女)가 ‘금년에 상왕께서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점을 친 사실이 드러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사회 불안이 계속되었다.

 

세조는 공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녀자를 종친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일례로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는 하동정씨 정인지가, 조완규(趙完圭:김종서의 측근)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은 고령신씨 신숙주가,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와 딸은 청주한씨 한명회가 차지했다.

 

조선 중기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월정만필(月汀漫筆)』이 ‘고령신씨 신숙주가 노산군의 왕비 여산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전하는 것처럼 몇 달 전만 해도 동료의 부인이거나 딸이었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나 여종으로 삼은 이들의 행위는 패륜으로 인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 토지까지 나누어 가졌다. 장물을 나눔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는 식이었다.

세조는 그해 6월 21일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는데, 『육신록』은 ‘풀로 엮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울타리를 둘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 일당은 단종의 생존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듬해(1457)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간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령신씨 신숙주는 “이유(李瑜: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고, 하동정씨 정인지가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세했다. 양녕·효령대군도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가담했다. 과거의 임금을 죽이자고 청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훗날 선조 때 쓰인 『대동운옥(大東韻玉)』이 “수상 하동정씨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광주이씨 이덕형(李德馨)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서 “그 죄를 논한다면 하동정씨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고령신씨 신숙주가 다음이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후세까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세조실록』은 금성대군과 장인 여산송씨 송현수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자)가 『음애일기』에서 자살설을 부정하면서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 장난이니, 실록을 편수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고 비난한 것처럼 조작의 혐의가 짙었다.

 

『병자록(丙子錄)』은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왕방연(王邦衍)이라고 적고 있고, 훗날 『숙종실록』에도 이 사실을 적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육신록』과 『단종출손기(端宗黜遜記)』는 금부도사가 나타나자 단종이 하늘을 우러러 “푸른 하늘이 이렇게 앎이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하고, “돗개무리(개·돼지)가 어느 면목으로 차마 일월(日月) 아래 다니느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금부도사가 엎드린 채 울자 공생(貢生:관가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랐는데, 공생은 문밖을 채 나가지 못하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육신록』 등은 전한다.

...........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端宗) 복위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뒤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는데 이때  사약을 가져간 의금부도사가 왕방연이였다. 그는 사약을 차마 단종에게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단종을 영월로 유배한 후 그 심정을 노래한 시조 1수가 전하는데, 초장이 "천만리 머나먼 길 고은 님 여희옵고/ 업셔 냇의 안자시니/져 물도 여 우러 밤길 녜놋다"이다. 그뒤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短歌)를 지었다고 전한다. 〈청구영언〉에 이 시조가 실려 있다.

............................ 



세조의 찬시(簒弑:왕위를 빼앗고 죽임)는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가치관이 붕괴되었고, 왕실은 충성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육신전』의 저자 의령남씨 남효온(南孝溫)과 5세 신동 강릉김씨 김시습(金時習)은 과거 응시를 거부해 생육신(生六臣)으로 남았다. 엄청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던 것이다.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④ 공신들의 나라

이덕일 | 제88호 | 20081115 입력

 

외적과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을 공신 책봉으로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 기여 같은 사회 내부적인 일로 공신을 책봉하면 그 자체가 사회악이다. 공신들은 반드시 특권을 요구하게 돼 있는데, 사회가 이런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조는 조선을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정조 시절 광산정씨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 명나라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했다는 압구정은 청주한씨  한명회가 자신의 호(號)를 따 세운 것이다. 사진제공=간송미술관
국왕이 되는 것을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고도 한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인데 주로 개국 시조에게 사용한다. 태종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쿠데타를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긴 세조는 사용했다. 문제는 공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위년(1455) 8월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도운 인물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책봉하라면서 “내가 화가위국하여 오늘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그 깊은 공을 생각하건대, 진정 잊지 못하겠노라”라고 칭송했다.

그해 9월 청주한씨 한명회·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확 등 8명을 1등 공신으로, 모두 46명의 좌익공신이 책봉됐다. 1등 공신은 전토(田土) 150결(結)과 근수(근隨 :수행 몸종) 7인, 반당(伴당 :사환) 10인, 노비 13구(口), 백금(白金) 50냥(兩), 내구마(內廐馬) 1필이 주어지는 등 막대한 부상이 뒤따랐다. 세조 때 공신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을 법 위의 특권층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신 범죄에 대한 세조의 원칙은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정안(政案:인사안)에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고 기록해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이 일반 양인(良人)은 물론 노비까지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 기능 때문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사헌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보면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4월의 사헌부는 ‘공신의 처첩(妻妾) 중 범죄를 저질렀으나 면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면서 “지금부터는 공신의 조부모·부모·아내 및 공신의 자손과 자식이 있는 첩(妾)까지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면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감찰권을 쥔 사헌부가 이 정도였으니 통제받지 않는 공신집단의 불법행위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공신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세조 1년 12월 좌익공신의 자제·사위·수종자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했는데 무려 2300여 명이었다.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우선 나이가 많은 자는 일 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직(檢職)을 제수했으니 공신이 아니면 벼슬을 꿈꾸기 어려웠다. 가족까지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

 

세조가 아무리 애민(愛民)과 선정(善政)을 강조해도 말장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조는 풍양(豊壤)에 거동해 술을 마시며 “여러 종친·재추(宰樞:대신)·공신은 나에게 있어서 쇠붙이의 자석(磁石)과 같아 간격이 없고, 불에 던져진 섶[薪]과 같아 기세가 성(盛)하여 막을 수 없고, 하늘에 대하여 땅이 생성된 것 같아서 의논할 수 없다(『세조실록』5년 2월 6일)”라고 자신과 공신은 한 몸이라고 선언했다.

세자도 공신의 자손들과 북단(北壇)에서 회맹하고 ‘자자손손(子子孫孫) 오늘을 잊지 말라’는 회맹문을 발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정희왕후 파평윤씨가 공신의 모친들을 내전(內殿)으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자 세조는 그 아들들을 사정전으로 불러, ‘어머니가 잔치에 나와서 그 아들을 특별히 부른 것이니 각자 실컷 마시고 배불리 먹으라”고 가족처럼 대했다. 공신 사이의 결속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조는 궁궐에서, 또는 공신의 집으로 자주 행차해 연회를 베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북부(北部)조에 “화인홍씨 홍윤성(洪允成)의 집은 숭례문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세조 2년(1456) 5월 경연에서 시독관(侍讀官) 양성지(梁誠之)가 “어두운 밤중에 민가 사이를 세자, 훈신(勳臣:공신)과 함께 행차하시니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라며 중지를 요청했으나 세조는 “밤에 공신들과 연회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공신들의 불법행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헌부나 형조에서 고소장 자체를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 드물다.

예종 때 『세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를 고치다가 원숙강(元叔康)·강치성(康致誠)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민수(閔粹)는 관노(官奴)로 떨어졌는데 민수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한 것은 실로 재상(宰相)을 두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공신 범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이유를 말해준다.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정난 2등 공신 홍윤성의 불법행위가 전해진다. 회인홍씨 홍윤성이 문 밖 시내에서 말을 씻기는 사람을 보고 사람과 말을 함께 죽였고, 늙은 할머니의 논을 빼앗고는 땅문서를 들고 와서 호소하는 할머니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 시체를 길가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광해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부溪記聞)』을 인용해 더한 이야기를 전한다. 회인홍씨 홍윤성이 곤궁할 때 30년 동안 돌봐줬던 숙부가 이조판서가 된 홍윤성에게 벼슬을 청탁했다는 것이다. 홍윤성이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자 숙부가 옛일을 거론하며 항의했고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 죽였다.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도 사헌부도 받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에 갈 때 숙모는 전날부터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세조의 행차가 이르자 크게 호곡했는데, 세조가 사람을 시켜 묻자 ‘권신(權臣)과 관계된 일이라 한 걸음 사이에도 반드시 그 말 내용이 바뀔 것’이라며 직접 말하겠다고 해서 세조는 정상을 알았으나 홍윤성 대신 그 종만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공신들의 탈법이 빈발하자 세조는 재위 3년(1457) ‘공신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의(故意)로 범죄하니 금후에는 3차까지는 논죄하지 말고, 그 후에도 범법하면 승정원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무한정 불법 허용에서 3차까지 불법 허용으로 공신범죄법이 강화된 셈이다.

세조 5년(1459) 6월 원종 2등 공신인 북청부사(北靑府使) 서수(徐수)는 백성 고현(高玄) 등이 부사의 잘못을 관찰사에게 호소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려죽였다. 형조는 참대시(斬待時:춘분~추분을 피해서 참형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으나 세조는 공신이라고 용서했다. 세조 7년(1461) 1월에는 원종 3등 공신 이백손(李伯孫)이 아내 천종(千從)이 죽자 처제 종이(從伊)와 간통했으나 종이만 처벌받았다. 원종공신이 이 정도니 정공신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세조 7년 5월에는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의 관노 화만(禾萬)이 좌익 3등 공신 황수신(黃守身)에게 부친과 조부의 땅을 빼앗겼다고 사헌부에 고소했으나 정작 옥에 갇힌 것은 화만이었다. 사헌부에서 황수신이 실제로 땅을 빼앗았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황수신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렸다. 수양대군 시절 종이었던 좌익 3등 공신 조득림(趙得琳)은 세조 7년 종복(從僕)을 대거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오다가 제지하는 시위 군사를 구타했다.

군사가 군무를 총괄하던 진무소(鎭撫所)에 고발했으나 진무는 두려워 보고도 못할 정도였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법 아래의 존재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태종이 국가권력을 천명(天命)의 실현 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했다.

 

혁명아 정도전이 계구수전(計口受田: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의 이상으로 건국했던 조선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공신들의 천국이자 백성들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 예종 목숨마저 앗아갔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⑤ 불행한 종말

이덕일 | 제89호 | 20081122 입력

 

역사는 때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태종과 세조는 모두 공신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나 공신과의 권력 분점(分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공신 제거를 선택한 태종의 결과물이 세종인 반면 오늘을 위해 공존을 택한 세조의 결과물은 후사 예종의 의문사였다.
 

 

즉위 두 달 후에 세조는 창덕궁에서 개국·정사·좌명·정난 4공신(四功臣)들과 술 마시며 춤을 췄다. 정난 1등공신이자 병조판서인 이계전(李季甸)이 조용히 “오늘 성상께서 어온(御온:술)이 과하신 듯하오니 청컨대 대내(大內)로 돌아가소서”라고 권하자 세조는 대로해서 “내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인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면서 관(冠)을 벗게 하고 홍달손(洪達孫)에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뜰로 끌어내리게 했다.

“네가 전에 진주하씨 하위지와 함께 의정부의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으니 너희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고 꾸짖고는 고령신씨 신숙주를 시켜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좌익공신 높은 등급을 주려는데 너는 원하지 않느냐”고 묻자 한산이씨 이계전은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하면서 목 놓아 통곡했다. 세조는 상(床)에서 내려와 이계전과 신숙주를 잡고 술을 따라주고 춤추게 했는데, 『세조실록』은 ‘파할 무렵이 밤 2고(鼓:오후 9시~11시)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 연회 장면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명분은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權臣: 영천황보씨 황보인· 순천김씨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산이씨 이계전을 끌어내린 이유는 의정부 서리(署理)를 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라고 하는데,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하는 체제다.

반대로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의 권한이, 육조 직계제는 국왕의 권한이 강하게 돼 있었다.

 

개국 초의 의정부 서사제를 태종이 재위 14년(1414) 육조 직계제로 바꾸었는데, 세종이 재위 18년(1436) 다시 의정부 서사제로 바꾸었다. 피의 숙청으로 왕권에 대한 위협이 없었고, 영의정 장수황씨 황희(黃喜)가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를 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세조 영정: 세조는 불교에 심취해 불경을 간행하는 간경도감에도 대납권(代納權)을 주었다. 해인사 소장
세조가 즉위 직후 의정부 서사제 폐지와 육조 직계제 부활을 명하자 병조판서 한산이씨 이계전과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 등이 반대했는데, 세조는 주창자인 하위지의 관을 벗기고 곤장을 친 다음 사형에 처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권력을 강화하고 싶은 것은 세조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들도 우대하고 왕권도 강화하려는 모순된 길을 택했다.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던 세조는 끝내 공신들을 버릴 수 없었다. 세조는 공신들에게 정치적 특권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이득까지 나누어주었다.

 

공신전(功臣田)과 이른바 난신(亂臣)들의 처첩·노비와 전토를 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보상이 대납권(代納權)이었다. 백성들에게 부과된 전세(田稅)와 공납(貢納)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代納)인데, 적은 경우가 두 배이고 서너 배로 걷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납을 방납(防納)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수령·아전과 짜고 백성들의 직접 세금 납부를 막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성종 때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대납자는 장형 80대와 도형 2년에 영구히 관리로 서용하지 않고, 대납을 허용한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임금의 명령을 어긴 율)로 논한다’고 대납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인 세조 7년(1461) 1월 호조는 “『경국대전』에 공물은 쌍방의 정원(情願)에 따라 대납하되 수령이 정한 값에 의하여 수급(收給)한다”고 조건부 허용임을 밝히고 있다. 백성들과 대납자 쌍방이 원하면 대납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원 세금보다 몇 배를 더 내는 대납을 원할 백성은 없었지만 공신·종친들의 경제적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예종실록』 1년 1월자는 “처음에 세조께서 무릇 민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타인들이 경중(京中:서울)에서 선납하도록 허락하고, 그 값을 민간에서 두 배로 징수하였는데, 이것을 대납이라 한다”고 전한다.

같은 기록은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고 전한다. 대납제는 공신들에게 고을 전체 세금의 몇 배의 이익 착취를 법적으로 허용한 제도였다.

『세조실록』에는 대납의 고통에 대한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경국대전』대로 ‘백성의 정원(情願)에 따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그 폐단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납 금지였으나 세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조 7년(1461) 3월 세조는 “근자에 효령(孝寧)대군과 충훈부(忠勳府:공신 관할 부서)에서 공물 대납 전에 그 값을 먼저 거두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밝혔다. 세금을 선납하고 후에 거두는 대납도 백성들의 고통이 막심한데, 먼저 서너 배의 세금을 받아 그중 일부를 떼어 세금으로 내겠다는 후안무치의 청이었다.

세조는 쿠데타를 거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성군(聖君)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성들의 수령 고소를 허용하고 자주 분대(分臺:사헌부 감찰)를 보내 수령의 탐학을 조사하게 한 것은 그의 애민(愛民)사상의 발로다.

 

그러나 그는 태생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재위 13년(1467)에 설치한 원상제(院相制)는 쿠데타 명분인 왕권 강화책마저 실패로 돌아갔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백옹(白옹)·황철(黃哲)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능성구씨 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집현전과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한 후 권한이 대폭 강화된 승정원에 실세 공신들이 출근해서 업무를 보았으니 왕권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세조가 원상제를 실시한 것은 공신들의 지지 없이 세자가 왕위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종 즉위 직후 원상은 고령신씨 신숙주·청주한씨 한명회·능성구씨 구치관 외에 죽산박씨 박원형(朴元亨)·삭녕최씨 최항(崔恒)·회인홍씨 홍윤성(洪允成)·창녕조씨 조석문(曺錫文)·안동김씨 김질(金?광산김씨 김국광(金國光) 등 9명으로 늘어난다.

.............

광산김씨 김국광1415(태종 15)~ 1480(성종 11).

 

본관은 광산.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아버지는 감찰 철산(鐵山)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부정자·감찰·봉상시판관 등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60년 오랑캐[兀良哈]가 침입했을 때 함경도경차관으로 적을 회유했다. 그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 편찬을 주도하고 병조판서·우찬성에 올랐다.

 

1467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 그뒤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1477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아우와 사위의 부정사건에 대한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일찍이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 


세조는 또한 죽기 6개월 전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인사청탁)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에 설치한 것”이라며 분경을 허용했다.

사실상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 세조에게 단종과 사육신 등은 영원한 콤플렉스였다. 세조는 재위 3년 조석문에게 내려주었던 단종의 후궁 권중비(權仲非)를 재위 10년(1464) 방면했다. 전 군주의 후궁을 신하의 노리개로 내려준 데 대한 뒤늦은 후회였을까? 한 해 전인 재위 9년(1463)에는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른바 난신(亂臣)의 처첩과 딸들을 방면하고 다른 노비로 충당케 했다.

 

사망 넉 달 전인 1468년 5월에 세조는 술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가 잠저로부터 일어나 창업의 임금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형벌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한 가지 일이라도 원망을 취함이 없었겠느냐? 『주역(周易)』에 ‘소정(小貞)은 길(吉)하고 대정(大貞)은 흉(凶)하다’고 하였다.”

『주역』 둔괘(屯卦) 구오(九五)에 나오는 이 효사(爻辭)에 대해 왕필(王弼)은 『주역주(周易注)』에서 ‘작은 일에서는 곧으면 길하지만 큰일에는 곧아도 흉하다’고 설명했다. 별로 좋지 않은 효사로서 세조가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연려실기술』은 청주한씨 한명회에 대해 “만년에 권세가 떠나자 슬퍼하며 적막하게 탄식을 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고 『해동악부(海東樂府)』는 신숙주에 대해 “59세로 임종할 때 한숨 쉬며, ‘인생이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고 마는가’라고 탄식했으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하였다 한다”고 전한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금지하고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宰樞:대신)를 막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한다”고 선포했다가 재위 1년 남짓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잘못된 쿠데타로 만든 그릇된 체제의 유산이 그 후계자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제8대 예종 가계도

세조 - 정희왕후 파평윤씨 윤번의 딸

제 8대 예종

차남 : 해양대군 (1450-1469)

재위기간 : 1468.9-1469.11(1년 2개월)

부인 : 2명 / 자녀 : 2남 1녀

1부인

장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

1남

2부인

안순왕후

청주한씨

(한백륜)

1남1녀

인성대군

 

제안대군

현숙공주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2호 | 20090920 입력

 

같은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태종은 공신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예종은 이 공신 집단을 해체하지 않는 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예종이 왕 노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육신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세자 예종은 공신들의 노리개로 떨어진 사육신 가족들을 석방시켜야 세조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① 쿠데타의 업보

 

조선 중기의 역관 조신(曺伸)이 쓴 『소문쇄록(소聞<7463>錄)』에는 세조와 한명회·신숙주가 함께한 술자리 이야기가 나온다.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으면서 자신의 팔도 잡으라고 말했는데 신숙주가 힘껏 잡는 바람에 세조는 “아프다. 아프다(疼疼)”라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이를 본 세자의 낯빛이 변하자 세조는 세자의 이름(晃:황)을 부르며 “나는 괜찮지만 너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밤이 늦어 귀가한 한명회는 청지기를 신숙주의 집으로 보내면서 “범옹(泛翁:신숙주)이 평일에 많이 취했어도 술이 조금 깨면 반드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책을 본 후 다시 취침하는데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즉시 잠을 자라고 전하게 시켰다. 청지기가 보니 과연 신숙주는 책을 보고 있기에 한명회의 말을 전했다.


소문쇄록은 “임금이 술이 깨자 내시를 보내 신숙주의 집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잠을 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술이 취했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의심해 내시를 보낸 것이다. 이 일화는 세조 정권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왕권 강화를 명분으로 쿠데타로 즉위한 세조는 권력을 공신 집단과 나눌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자 세조는 공신 집단과 더욱 강하게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육신의 사당인 의절사 숙종 7년(1681)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으며, 정조 6년(1782)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사육신은 정조 때 국가 제사 대상인 배식단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급기야 세조는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면서 공신들을 법 위에 있는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왕조 국가의 기본질서인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이로써 무너졌다. 세조는 사망 1년 전인 재위 13년(1467)에 원상제(院相制)를 실시했다. 백옹(白<9852>) 등의 명나라 사신이 오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에게 승정원에 나가 집무하게 한 것이 원상제의 시초인데, 사신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을 실세 공신들이 장악하게 한 것이니 왕권이 둘로 나뉜 셈이었다.

세조 후반으로 갈수록 공신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져 재위 14년(1468) 3월에는 “분경(奔競)을 금한 것은 본시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 때문이었다”면서 분경까지 허용했다. 분경은 인사청탁인데 ‘어두운 밤에 애걸하는 자’라고 호도하며 공신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한 것이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은 이렇게 국가의 기본적인 공적 체제마저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조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한명회가 세웠다는 한강가의 압구정.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은 현실의 권력을 누렸으나 조선시대 내내 시비에 휘말렸다. 간송미술관 제공
재위 14년 7월 19일. 세조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 등 공신들을 불렀다.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변 직후 책봉한 정난(靖難)공신,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직후 책봉한 좌익(佐翼)공신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병석의 세조가 “내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모든 공신이 “전하께서는 곧 병을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습니다”라고 반대했다. 국왕이 전위하고자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관례지만 반대의 또 다른 요인은 세자와 권력 분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었다.

 

세조와 공신들이 함께 다스리는 집단 지도체제를 세조 사후에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했다. 공신들은 세자 즉위 후 자신들의 권력이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왕권 강화 지시로 해석한 세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신들이 전위에 반대하자 세조는 대신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리청정과는 달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행랑)에서 고령군 고령신씨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제한적 대리청정이었다.

고령신씨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계기로 형성된 구공신(舊功臣:정난·좌익공신)의 대표이고 이준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新功臣:적개공신)의 대표였다.

 

청주한씨 한명회·고령신씨 신숙주· 하동정씨 정인지 등이 구공신의 핵심이고, 이준· 의령남씨 남이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

 

대리청정을 맡게 된 세자는 부왕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예종의 「지장(誌狀)」에는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이 나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에 있어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왕의 병을 낫게 하려면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령(大赦令)이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다음 날 대사령을 내려 7월 20일 이전의 죄는 대역(大逆)·모반(謀叛), 조부모·부모 살해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했다. 그러나 세조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세조는 8월 1일 호조판서 교하노씨 노사신(盧思愼)에게 수릉(壽陵)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무덤이 수릉인데 『세조실록』은 이때 “세조가 눈물을 뿌렸고, 이 사실을 들은 여러 재추(宰樞:재상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권력무상의 회한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생의 애착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대사령을 내린 지 한 달여 만인 8월 27일 다시 대사령을 내렸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자는 납부하지 못한 세금을 탕감하거나 깎아주고 내전(內殿)에 불상을 모셔놓고 기도도 올렸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여서 9월 들자 병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충(蝗蟲)이 추수를 앞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까지 나타났다.

드디어 세자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조가 만든 업보(業報)를 푸는 것이었다.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문제였다. 16년 전인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고, 13년 전인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는 성삼문·유응부 등의 가족들을 나누어 가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의 여종이 되고 성 노리개가 된 이들의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대사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그해 9월 3일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하동정씨 정인지·동래정씨 정창손·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회인홍씨 홍윤성· 안동김씨 김질 등의 공신들은 계유정변 관련자 친족들의 방면(放免)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 관련자 친족들에 대해서는 “병자년(丙子年:세조 2년)의 난신(亂臣)의 일은 세월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급히 논(論)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세자는 “만약 난신에 연좌된 자를 모두 방면한다고 하면 어찌 세월의 오래되고 가까운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육신 사건 관련자의 친족들도 모두 방면하자는 뜻이었다. 세자는 “공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에게 나누어준 자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세조실록』 14년 9월 3일)”라고 덧붙였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는 괜찮지만 공신들의 재산으로 전락한 사육신의 친족들을 석방하려고 하면 공신들이 싫어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사위 안동김씨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시켰던 봉원군(蓬原君) 동래정씨 정창손(鄭昌孫)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세자는 계유정변과 사육신 사건 피해자의 친족 일부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이때 좌익 3등 공신 좌의정 죽산박씨 박원형(朴元亨)은 동부승지 온빈한씨 한계순에게 계유정변 때 사형당한 양옥(梁玉)의 누이 의비(義非) 대신 다른 여종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세자는 “일이 이미 의논하여 정해졌는데 되돌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거절했다. 9월 7일 세조는 다시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했고 두 달 전처럼 공신들이 반대했으나 세조는 “운이 간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데 너희들이 내 뜻을 어기려고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며 꾸짖었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세조는 이날 면복(冕服)을 직접 세자에게 내려주며 “오늘 당장 수강궁(壽康宮:창경궁)에서 즉위하라”고 명했다. 세조 14년(1468) 9월 7일 세자가 수강궁에서 즉위하니 피로 점철되었던 세조 시대가 가고 예종 시대가 막이 열렸다. 다음 날 세조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 세자의 후궁이었던 한백륜(韓伯倫)의 딸 소훈(昭訓) 한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명했으니 그가 안순왕후(安順王后)이다.

 

예종은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으나 세종과는 전혀 다른 정국이었다. 태종은 숱한 비난을 들어가며 대부분의 공신을 대거 제거해 깨끗한 조정을 물려준 반면 세조는 거대한 공신 집단이란 짐을 고스란히 예종에게 넘겨주었다. 이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예종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린 ‘의령남씨 남이의 죽음’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3호 | 20090926 입력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에게 공신은 필요악이었다. 재위 후반 세조는 신(新)공신, 구(舊)공신과 삼각 축을 형성했다. 세조는 공신들과 권력을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이를 거부했다. 예종은 신구 공신을 상호 견제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공신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남이의 옥사였다.
남이 장군 부부 묘와 남이 장군 초상 남이 장군 부부 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왼쪽 사진). 남이의 부인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천거한 권람의 딸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사당에 걸린 남이 장군 초상화다(오른쪽 사진). 매년 10월 1일 사당에서는 남이 장군 대제를 연다.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모셨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② 新-舊 공신 권력투쟁

세조는 사망 넉 달 전인 재위 14년(1468) 5월 공신들과 술을 마시면서 “누가 원훈(元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훈(舊勳)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신훈(新勳)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구훈은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구공신이고, 신훈은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신공신이었다. 진압 사령관이었던 귀성군 이준(李浚)과 대장이었던 신천강씨 강순(康純)·의령남씨 남이(南怡) 등이 신공신의 핵심이었다. 국왕과 구공신, 신공신은 권력의 삼각 축이었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 때 청주한씨 한명회와 고령신씨 신숙주가 모반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나오자 둘을 가둔 적이 있었다.

세조는 구공신과 신공신을 적절하게 대립시켜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예종은 현실을 무시하고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정사(政事:인사권)는 나라의 큰 권한인데, 사사로운 곳으로 돌아가 공(公)을 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공신들의 인사 관여를 금지시켰다. 그는 백관의 감찰을 맡는 사헌부 관리를 정청(政廳:인사관청)에 참여시켜 인사 청탁을 뿌리 뽑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자광의 글씨 ‘봄이 오니 강촌에는 일마다 새롭다’며 자연을 노래했던 유자광은 남이를 모함했다는 혐의에다 서자에 대한 질시까지 겹쳐 대대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앞으로 위장(衛將)이 2부(部)를 거느리고 인사에 대한 모든 분란을 금지하라. 정청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비록 종친·재추(宰樞:재상)·공신일지라도 즉시 목에 칼을 씌워 구속하고 나중에 보고하라. 만약 숨기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족주(族誅)하겠다.”

인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구속할 것이며 이를 숨기면 족주(온 집안을 죽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귀성군 이준과 우의정 김질이 함께 나서 “족주하는 법은 너무 과합니다”고 항의했고, 예종은 “족주를 극형(極刑)으로 바꾸어라”고 한발 물러섰다.

 

신공신 이준과 구공신 김질이 공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공동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예종은 구공신보다 신공신, 그중에서도 의령남씨 남이를 싫어했다. 세조는 죽기 한 달 전인 재위 14년(1468) 8월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李廷馨)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세조가 벼슬을 뛰어넘어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더니 당시 세자였던 예종이 그를 몹시 꺼렸다”고 전하고 있다.

예종은 “남이는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재종형인 중추부지사 한계희(韓繼禧)의 말을 듣고 즉위 당일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좌천시켰다. 예종 즉위 당일부터 남이에 대한 구공신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공세는 예종 즉위년 10월 24일에 발생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 영광유씨 유자광(柳子光)이 밤늦게 승정원에 나타나 ‘급히 성상께 계달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입직승지였던 한계희의 동생 한계순(韓繼純)은 즉시 예종과 만남을 주선했다. 영광유씨 유자광은 예종을 만나 의령남씨 남이를 고변했지만 모호한 고변이었다. 이날 저녁 남이가 유자광의 집을 방문해 “혜성(彗星)이 아직까지도 없어지지 않는데 너도 보았느냐?”고 묻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세조 와병 때 생긴 혜성은 예종 즉위년에도 사라지지 않아 장안의 화제였으므로 유자광이 보지 못했다는 답변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신(유자광)이 『강목(綱目)』을 가져와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석에 ‘광망(光芒)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친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남이가 탄식하면서 ‘이 또한 반드시 응함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혜성의 의미를 『강목』에서 찾아 ‘장군이 반역한다’고 해석한 인물은 의령남씨 남이가 아니라 영광유씨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조금 후에 남이가 ‘내가 거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남이가 기다렸다는 듯 ‘거사’를 말했다는 것인데, 유자광은 “신이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이미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고 갔습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술기운에 이 말 저 말 했다는 뜻이다.

 

유자광의 고변은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낸 거대한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못했다. 예종은 남이가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 오는 듯 군사를 동원해 도성을 지키게 하고 청주한씨 한계순에게 의령남씨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에 접어들었지만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을 수강궁 후원 별전(別殿)으로 급히 모이게 했다. 종친과 대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끌려 나온 남이는 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몰랐다. “근래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느냐?”는 예종의 질문에 남이는 “‘신정보(辛井保), 이지정(李之楨)과 만나 북방(北方)에 여진족이 준동하면 내가 진압하러 가게 될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또 유자광의 집에 가 이야기하다가 곁의 책상에 『강목』이 있기에 혜성이 나타나는 구절 하나를 보았을 뿐 다른 것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강목』에서 ‘장군이 반역한다’는 주석을 뽑은 유자광이 남이를 반역으로 꾄 혐의가 있었다.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예종은 유자광을 불렀는데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본래 신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평생 남송(南宋)의 악비(岳飛)를 자처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다. 악비는 금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운 남송 장수로서 한족(漢族)에겐 충의의 대명사였다
. 남이가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신문했다.

순장(巡將) 민서(閔敍)는 “남이가 ‘천변(天變:혜성의 출현)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일어날 것인데, 나는 먼저 주륙(誅戮)을 받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간신이 누구냐’고 묻자 ‘상당군 한명회’라고 답했다. 남이는 세조 사후 구공신 세력이 자신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의령남씨 남이는 ‘왜 청주한씨 한명회를 언급했느냐’는 질문에 “한명회가 일찍이 신의 집에 와 적자(嫡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에 그가 난(亂)을 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고 답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백이었다. 한명회가 말한 적자는 예종이 아니라 고(故)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예종은 한마디로 일축하고 남이의 측근 장수들을 계속 고문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 끝에 ‘남이가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남이가 ‘산릉에 나아갈 때 중로에서 먼저 한명회 등을 없애고, 다음으로 영순군(永順君)·귀성군에게 미치며, 다음에는 승여(乘輿:임금)에 미쳐서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자백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의령남씨 남이는 혐의를 시인하고 같은 신공신인 신천강씨 강순을 당류(黨類)로 끌어들였다. 인조 때 박동량(朴東亮)이 쓴 『기재잡기(寄齋雜記)』나 광해군 때 김시양(金時讓)이 쓴 『부계문기(<6DAA>溪聞記)』에는 강순이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지자 ‘당신이 수상(首相)이 되어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구원해 주지 않았으니 원통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당여(黨與)를 대라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79세의 노인 강순이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고 항의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리수가 많은 옥사였다. 『부계문기』는 아직도 남이가 죽은 죄명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예종은 남이·강순·문효량 등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남이 계열의 무장들에게 수사를 확대했다. 남이가 여진족 건주위를 칠 때 종사관이었던 조숙(趙淑)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 지르다 죽어갔다. 예종은 “참형된 사람의 부자는 모두 사형으로 연좌하라”고 지시해 그 부친과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그리고 37명의 익대(翊戴)공신을 책봉했다
. 1등공신 다섯 명은 영광유씨 유자광· 고령신씨 신숙주·청주한씨 한명회·신운(환관)·한계순이었다. 아무런 관련 없어 보이는 한명회·신숙주가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이 옥사의 배경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그 재산과 70여 명의 처첩을 익대공신이 나누어 가졌다. 옥사의 배후가 자신임을 드러낸 셈이었다.

 

의령남씨 남이의 옥사는 구공신의 신공신 토벌작전이었다. 예종은 신공신을 몰락시킴으로써 훗날 구공신이 자신에게 칼을 겨눌 때 견제할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 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예종이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자 구공신은 반발했다.

 

 

힘보다 뜻이 컸던 군주의 운명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4호 | 20091001 입력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명분뿐만 아니라 개혁 대상의 저항을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어야 성공하는 것이다. 예종은 공신 집단의 해체라는 분명한 개혁 목표와 실천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② 개혁 능력의 한계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각종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奔競)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代納權)이 있었다.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런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 이런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직후 종친·공신들의 분경을 금지시키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김질의 항의를 받고 본인만 극형(極刑)시키는 것으로 물러섰으나 이후에도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는 사헌부의 서리(胥吏)와 조례(<7681>隷: 관청 소속의 하인)들을 보내고, 무신들의 집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드나드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들은 예종보다 공신들이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반면 무인들은 우직하게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다. 예종 즉위년(1468) 10월 19일 공신들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무인인 선전관들이었다. 고령군 신숙주의 집에서는 함길도 관찰사 박서창(朴徐昌)이 보낸 김미를 체포하고, 우의정 김질의 집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이 보낸 주산(周山)을 체포했다. 귀성군 이준과 병조판서 박중선(朴仲善), 이조판서 성임(成任)의 집을 드나드는 인물들도 체포했다.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 분경하는 것도 선전관이 체포한 것을 지적하면서 “분경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의 책임”이라면서 사헌부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하옥했다. 사헌부가 공신들의 눈치를 봤다는 뜻이었다.

①김홍도의 밭갈이 백성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공신들의 대납권 때문에 몇 배의 세금을 더 내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②정인지의 詩句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사진가 권태균
신숙주는 ‘박서창이 글을 보내 위문하면서 표피(豹皮) 한 장을 보내기에 받지 않았으나 김미가 체포된 것’이라면서 예종에게 사과 겸 해명을 했다. 예종은 “경은 무엇을 혐의하는가? 다만 박서창의 과오이다”라고 달랬으나 신숙주는 큰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더구나 예종은 이 사건을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김미를 비롯한 분경자들을 친국(親鞫)했다. 김미는 박서창의 반인(伴人: 수행원)이었으며 주산은 지방 관청의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경저인(京邸人)으로서 기껏해야 이서(吏胥) 아니면 서인(庶人)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천인들에 불과했는데 국왕이 직접 친국한 것이다.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함길도는 1년 전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던 곳이다. 이때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가 이시애와 연결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두 사람이 투옥되었던 적이 있었다. 예종은 함길도의 이런 특수성을 거론하며 김미를 꾸짖었다.

“네가 임금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진상물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또 무슨 물건을 가지고 권문(權門)을 섬기느냐? 작년에 그 도(道: 함길도) 사람들이 신숙주·한명회 등이 몰래 불궤를 꾀한다고 말해 여러 사람들이 의혹해 관찰사·절도사 및 수령들을 다 죽여서 인심이 편하지 못한데, 네가 이를 알면서도 지금 다시 이렇게 해서 인심을 흉흉하게 하느냐?(『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9일)”

형식은 김미를 꾸짖는 것이지만 내용은 고령신씨 신숙주와 청주한씨 한명회를 꾸짖는 것이었다. 예종은 관찰사 박서창을 체포해 국문하고 그 자리를 한치형(韓致亨)으로 교체했다. 병조판서 박중선의 집에서 체포된 김산이 깨진 그릇을 고치는 칠장이(漆工)라는 사실을 알고 석방시켰으며, 이조판서 성임(成任) 집에서 잡힌 여종 소비(小非)는 수륙재(水陸齋: 불가의 제사)에 쓸 과실을 빌리러 갔다는 말을 듣고 석방시켰다.

 

예종이 이들을 직접 국문한 것은 사헌부나 의금부에서 공신들의 위세 때문에 부실 수사를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예종이 천인들을 친국했다는 사실에 공신들은 경악했다. 공신을 직접 벌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이 천인까지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경하기는 어려웠다.

예종은 공신들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배징(倍徵), 곧 두 배였고 보통이 서너 배였다. 개인의 세금을 대납하는 것이 아니라 『예종실록』에 “대납하는 무리들이 먼저 권세가에 의탁하여 그 고을 수령에게 청하게 하면서 후한 뇌물을 주면, 수령들은 위세도 두렵고 이익도 생각나 억지로 대납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백성들이 감히 어기지 못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군현 단위로 대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액수가 막대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대납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해로우니, 이제부터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를 물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 몰수한다. 공사(公私) 모두 대납을 금한다”라고 선언했다. 『예종실록』은 “대납(代納)하여 쌀로 바꾸는 것은 모두 거실(巨室)에서 하는 짓이었으므로, 능히 혁파할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세조가 공신과 종친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게 한 제도였다. 대납의 폐해는 막대했다.

“대납으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 여염(閭閻: 민간)에서 고통스럽게 여기고,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런 대납을 금지시켰으니 『예종실록』이 “임금이 즉위 초에 먼저 대납의 폐단을 제거하니, 선정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라고 평가한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예종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대납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10월 21일에는, “이제 대납을 금했는데도 수령이 전과 같이 수렴(收斂: 받아들임)한다면 더욱 가혹한 것으로서 능지(凌遲)함이 가하다”라고 선포했다. 수령이 전처럼 대납을 허용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납이 없어지지 않자 예종은 방을 붙여서 대납 금지의 뜻을 널리 알렸다.

“지금부터 대납하는 자는 즉시 극형에 처해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입법의 본뜻을 살피지 않고 그대로 이익을 취하는 자가 있다고 진달하는 자가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하는 자는 마땅히 목을 베겠다.(『예종실록』즉위년 12월 9일)”

대납 금지에 대한 예종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공신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선납했으나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조에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예종 1년 1월 27일 ‘이미 대납하고도 값을 다 거두지 못한 자는 기한을 정해 거두도록 하자’고 요청했다. 예종은 윤2월 그믐까지 한시적으로 받으라고 허용했다. 『예종실록』은 “임금이 즉위 초에 특별히 대납을 없애게 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매우 기뻐했는데, 이때에 이런 명령이 있자 백성들의 바람이 조금 이지러졌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윤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대납을 매년 저절로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가업처럼 여기던 종친·공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재위 1년 4월에는, “금후로는 무릇 군무(軍務)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議親: 임금의 친척)을 물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재신·공신이라도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라고 명했다.

 

공신들의 면죄권에도 손을 댄 것이다. 양민을 천민으로 만든 자는 교형(絞刑: 교수형)이었다. 재위 1년 5월에도 예종은 “관찰사의 소임은 본래 1도(道)를 통찰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신·의친·당상관에 구애된다. 앞으로 민생에 해를 미치는 자는 공신·의친·당상관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직단(直斷)하여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예종 1년(1469) 11월 사헌부 조례들이 하동군 정인지의 집을 드나드는 자를 체포하려 하자 정인지의 가동(家<50EE>: 종)이 사헌부 조례의 옷고름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헌부의 정인지 국문 요청에 대해 예종은 “공함(公緘: 서면질의)으로 탄핵하라”고 명령했다. 예종과 공신 세력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구공신의 견제 세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예종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급서 미리 안 듯, 일사천리로 구체제 복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5호 | 20091010 입력

 

국왕 독살 여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후 체제를 살펴봐야 한다. 거대 정파와 대립하던 국왕이 급서하는 것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거대 정파가 권력을 독차지할 경우 독살설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탄생한 공신집단들은 예종이 자신들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크게 반발했다. 예종과 공신집단 간의 갈등은 예종의 급서로 해소되고 구체제로 회귀했다.
예종의 창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계비 안순 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와 합장묘다. 원부인이었던 장순 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생존했다면 예종도 더 오래 왕위에 있었을지 모른다. 사진가 권태균
독살설의 임금들 예종④ 거대한 음모

예종이 분경(奔競: 인사청탁)을 금지시키라고 보낸 사헌부의 서리(書吏)와 조례(<7681>隷)가 정인지의 가동과 몸싸움을 벌인 날짜가 재위 1년(1469) 11월 4일이었다. 다음 날 예종은 “금년 겨울이 아주 추우니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금부와 형조에 전지를 내려 11월 5일 새벽을 기준으로 중대 범죄 이외의 죄수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공신들을 압박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임금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개혁 대상으로 몰린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반발할 명분이 없었다. 백성들은 즉위 초부터 시작된 분경 금지, 대납 금지, 공신 특권 제한에 크게 환호하고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예종은 재위 1년 11월을 넘기지 못하고 급서했기 때문이다.

 

 

『예종실록』에 그의 병명이 처음 등장하는 날은 예종 1년 11월 18일이다.

내가 족질 때문에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체된 일이 없느냐? 내가 무사는 활쏘기를 시험하고, 문사는 문예(文藝)를 시험하되,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책문(策文)하려고 하는데, 경 등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종은 자신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틀 전(16일)에는 후원에서 입직한 군사들을 직접 열병했다. 사흘 전(15일)에는 전라·경상·충청도의 관찰사와 절도사 등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근자에 무뢰배들이 휘파람을 불며 산야에 모여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부도한 일을 자행한다. 빨리 계책을 내어 체포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자. 네 번째 줄에 “왕이 훙서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왕의 옥체가 이미 변색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예종의 급서와 자을산군의 즉위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족질로 정사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말한 다음 날(19일)에는 교태전으로 환어했고, 20일에는 기인(其人)제도에 대해서 한명회·신숙주와 의견을 나누었다. 21일에는 도승지 안동권씨 권감이 속미면(粟未<9EAA>)을 올리자 음식을 내려주었고, 22일에는 간부(奸婦)와 짜고 본 남편을 죽인 정금(鄭金)을 사형시켰다. 24일에는 호조에서 경기도 양주 고을의 미곡(米穀)을 채워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고, 25일 예조에서 누각(漏刻: 물시계)을 제조해 관상감에 내려달라고 청한 것도 그대로 따랐다.

 

이처럼 예종은 정사를 놓은 적이 없음에도 18일자에는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삭녕최씨 최항 등의 공신들이 편찬한 『예종실록』의 수수께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6일자에 비로소 “임금이 불예(不豫: 임금의 병환을 뜻하는 말)하니 새벽에 서평군(西平君) 청주한씨 한계희와 좌참찬 풍천임씨 임원준 등을 불러 입시하게 했다”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의학에 정통한 문신이었다.

 

이날에야 예종이 아픈 줄 알았다는 듯이 백관들과 정희 왕후의 족친들이 문안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다음 날인 27일 예종은 귀화한 여진족 낭장가로(浪將家老)가 다른 여진족 마금파로(馬金波老)를 접대할 음식을 적게 준비했다는 이유로 예조 정랑(正郞) 신숙정(申叔楨)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북평관(北平館) 동구(洞口)에서 낭장가로를 기다렸다가 체포해 가두되 마금파로에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구체적인 명을 내렸다.

 

비록 같은 날짜에 “임금이 불예(不豫)하므로 승지 등이 모여서 직숙하겠다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는 기사가 있지만 위독한 상태의 사람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 다음 날(28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날의 『예종실록』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일이 착착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임금의 병이 위급하므로, 한계순과 정효상을 내불당에 보내 기도하게 하다→②승지 및 증경 정승과 의정부·육조의 당상이 문안하다→③죄인을 사면하고 여러 도의 명산대천에 기도하다→④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임금이 자미당에서 훙(薨)하다→⑤승정원에서 장례의 모든 일에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물품을 쓰게 하다→⑥권감이 여러 재상과 의논해 당일에 (신왕이)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의논하다→⑦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거애하다→⑧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임금(성종)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예종실록』 1년 11월 28일)」

예종이 급서했으므로 조정은 발칵 뒤집혀야 했다. 그러나 조정은 정해진 일정표가 있는 것처럼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당일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다. ⑥번 기사의 세부 사항은 도승지 권감이 “대저 제복(除服)하고 널(柩) 앞에서 즉위하는 것이 전례지만 지금은 이런 전례를 따를 수 없으니 마땅히 당일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다”라며 사왕(嗣王)이 당일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문종은 세종 승하 엿새 후에 즉위했고, 단종은 문종 승하 나흘 후에 즉위했다. 문종과 단종은 세자였음에도 즉위까지 여러 날 걸렸는데 예종에게는 세자가 없었다.

『예종실록』은 예종 사망일 새벽 승정원에 8명의 원상(院相)이 모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령신씨 신숙주· 청주한씨 한명회· 능성구씨 구치관· 삭녕최씨 최항· 회인홍씨 홍윤성· 창년조씨 조석문·무송윤씨 윤자운· 광산김씨 김국광’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정전(思政殿)으로 가자 미리 짠 듯 승전(承傳: 왕명을 전함) 환관 안중경(安仲敬)이 예종 사망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원상들과 도승지 안동권씨 권감은 하동정씨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딸 의숙 공주의 남편인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태비 정희 왕후 파평윤씨에게 “주상(主喪: 차기 국왕)을 빨리 정해야 한다”고 아뢰게 했다.

 

느닷없이 정인지의 아들이 등장해 원상들의 의견을 대비에게 전하고 명을 받는 승지나 환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정희 왕후 파평윤씨가 원상들에게 “누가 주상자(主喪者)로서 좋겠느냐?”고 묻자 원상들은 정희 왕후에게 공을 넘겼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 중 한 명이 후사가 되어야 했다. 네 살의 제안대군이 불가하다면 16세의 월산군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희 왕후는 뜻밖에도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을 거명하면서 “그를 주상(主喪)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당연히 큰 술렁임이 일어야 하는데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진실로 마땅합니다(允當)”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속 조치를 논의할 때 신숙주는 대비 정희 왕후에게 “외간(外間)은 보고 듣는 것(視聽)이 번거로우니, 사정전 뒤뜰로 나가서 일을 의논하고자 합니다”고 말했다. 사정전에서 보고 들을 사람은 승지나 사관(史官)밖에는 없었으니 이는 기록으로 남으면 안 되는 의논이란 뜻이었다.

 

이 날짜 『성종실록』은 “위사(衛士)를 보내어 자을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을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고 전하고 있다. 정희 왕후와 공신세력 사이에 사전 조율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희 왕후와 공신들은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을 세우기로 미리 합의했던 것이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틀 후인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 9명의 원상(院相)과 승지 등은 염습을 마친 후 빈청에서 대왕대비에게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 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 국왕의 죽음)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반드시 병환이 오래되었는데도 외인(外人)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라면서 어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시신의 변색은 약물 중독 때 생기는 현상임에도 정희 왕후는 어의 안동권씨 권찬(權<6505>) 등을 옹호하고 나섰다. 원상들의 어의 처벌 주청은 형식에 불과해서 다시는 어의 처벌을 주청하지 않았으나 사헌부에서 계속 어의 권찬 등의 처벌을 요청했다. 정희 왕후 파평윤씨는 모든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대행왕이 일찍이 발병을 앓고 있어서 의원이 뜸질로써 치료하기 위해 ‘두 발을 함께 뜸질을 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대행왕은 ‘병 나지 않은 발까지 함께 뜸질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안동권씨 권찬(權<6505>: 어의)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사헌부에서 거듭 올린 처벌 요청을 정희 왕후는 묵살했다. 놀라운 것은 불과 두 달 후인 성종 1년(1470) 2월 7일 권찬을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는 점이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 왕후 파평윤씨가 원상들과 상의해 정사를 처리하던 섭정 때였다. 권찬의 파격 승진은 예종 급서의 배후를 말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조가 만든 공신 지배구조를 해체하려던 예종은 이처럼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공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제7대 세조 가계도 

 

세종 - 소헌왕후 청송심씨 심온(沈溫)의 딸

 

제 7대 세조

차남 : 수양대군 (1417-1468)

재위기간 : 1455.윤6-1468.9(13년 3개월)

부인 : 2명 / 자녀 : 4남 1녀

1부인

정희왕후

파평윤씨

(윤번의 딸)

2남1녀

2부인

근빈 박씨

2남

덕종(의경세자)

제8대 예종

(해양대군)

숙의공주

덕원군

창원군

 

세조 - 정희왕후 파평윤씨

제 8대 예종

차남 : 해양대군 (1450-1469)

재위기간 : 1468.9-1469.11(1년 2개월)

부인 : 2명 / 자녀 : 2남 1녀

1부인

장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 딸)

1남

2부인

안순왕후

청주한씨

(한백륜 딸)

1남1녀

인성대군

 

제안대군

현숙공주


 

 

 

덕종- 소혜왕후 청주한씨 (한확의 딸)=인수대비

제 9대 성종

차남 : 자을산군(1457-1494)

재위기간 : 1469.1-1494.12(25년 1개월)

부인 : 12명 / 자녀 : 16남 12녀

1부인

공혜왕후

청주한씨

한명회의 딸

자식없음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1남1녀

3부인

폐비

함안윤씨

1남

4부인

명빈 김씨

1남

5부인

귀인정씨

2남1녀

6부인

귀인 권씨

1남

 

제11대 중종

(진성대군)

신숙공주

제10대

연산군

 

무산군

 

안양군

봉안군

정혜옹주

진성군

 

 

 

* 7대 세조 +  정희왕후 파평윤씨

 -장남: (추존:덕종)의경세자+소혜왕후(=인수대비) 청주한씨(한확)

                         - 장남 : 월산대군
                         - 차남(자산대군)9대성종 + 1부인 공예왕후 청주한씨(한명회)

                                                          + 3부인 제헌왕후 함안윤씨(폐비)- 10대연산군
                                                          +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11대중종(진성대군)
                                                                                                                                                                       

* 차남 (해양대군)8대예종 + 장순왕후 청주한씨(한명회) - 인성대군(조기사망)

                                         + 안순왕후 청주한씨(한백륜)- 제안대군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