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스 테오도라키스 Mikis Theodorakis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명곡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단순히 <저항가요>로 규정하기보다는 보다 폭이 넓은 우리 식으로 하자면 <아리랑>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좀더 옳은 해석이겠지만, 전체적인 가사 내용을 음미해보면 '기차를 타고 떠난 돌아오지 않는 연인'이 조국을 위해 뭔가 큰 일을 하기 위해 떠난 투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 출신 예술가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는 아마 나나 무스쿠리와 조르주 무스타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고 FM영화음악을 즐겨 듣던 이들이라면 반젤리스, 그리고 좀더 연배가 있는 이들에게는 멜리나 메르쿠리(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조금더 관심을 기울이시면 여기저기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하게 되죠..바로 이 곡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입니다. 영화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이라면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년)와 안소니 퀸 주연의 <그리스인 조르바>, 멜리나 메르쿠리 주연의 <죽어도 좋아(페드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형사 서피코>,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이 정도 알고 있다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셈이죠. 1925년생인 테오도라키스는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운동가로도 주목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어난 그리스 내전 중에 좌파로 활동했고, 그런 이유로 결국 조국을 떠나 프
랑스에 거주하면서 음악 활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독일의 침공 이후 그리스의 국내외에서는 항독 투쟁이 매우 거세게 일어났고, 그리스 국내외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세력들은 대개 좌파였습니다. 44년 11월 그리스는 해방되었고,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을 봉쇄하려는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의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해 이들 나라에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을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정쟁(政爭)이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군부 쿠데타 등이 일어나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등장하는 등 서구민주주의의 고향은 오랜 세월동안 군홧발 아래 놓이게 됩니다.
Mikis Theodorakis - Strose to Stroma sou & Zorba (live,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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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se To Stroma Sou (Make Your Bed) & Zorba - Mikis Theodorakis 지휘
테오도라키스는 1961년 조국 그리스로 돌아와 <희랍인 조르바> 등의 음악을 작곡하지만 1967년 4월 발생한 파파도풀로스의 우익 군사 쿠데타로 인해 70년까지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의 모든 음악은 그리스 안에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제작한 정치적인 영화 (1969년)의 음악은 감옥에 갇힌 테오도라키스가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작곡한 곡들을 이용한 것으로 그해 영국 아카데미는 감옥에 갇힌 테오도라키스에게 음악상을 안겨 주어 그리스 정부에게 항의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좌파라는 이유로 그리스에서 그의 음악이 금지곡이 된 것은 이해한다 손 치더라도
우리나라까지 한동안 그의 음악이 금지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국내 라디오에서는 그의 음악들을 즐겨 방송해주었는데 그의 정치 성향이 알려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음악들은 금지곡이 되었고, 5공 시절에는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이 삭제된 채 방송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에는 그리스 출신의 샹송 가수이자 테오도라키스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던 조르주 무스타키가 방한했을 때는 자신의 앨범에서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곡들이 모조리 삭제된 데 대해 항의하는 해프닝도 있었죠. 하기사 이런 해프닝이 어디 테오도라키스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일이었겠습니까? 그는 또한 클래식 음악가로도 널리 인정받
았는데 그가 작곡한 제1모음곡은 1957년 모스크바의 competition에서 그랑프리를 수상(이 때의 심사위원은 쇼스타코비치와 한스 아인슬러 등)했고, 1963년에는 교향곡을 작곡해 영국에서 시벨리우스상을 받았습니다(이 때의 심사위원은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등). 테오도라키스는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음악인 <제우스 찬가>를 작곡하는 등 유럽에서는 손꼽히는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윤이상 선생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 축하곡으로 <심청>이 공연된 적이 있지만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그를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
고 투옥해버렸죠. 결국 윤이상 선생은 반성문을 쓰기 전에는 귀국할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조처 때문에 결국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독일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의 본원으로 칭송 받는 그리스이면서 치열한 내전과 무자비한 폭력, 군부 쿠데타를 경험한 그리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조국 그리스의 민주화와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우리 가슴에 깊이 와 닿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Agnes Baltsa - To Treno Fevgi Stis 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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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Zorba Alexis Zor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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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기차는 8시에 떠나고(To Treno Fevgi Stis Okto)’라는 명곡으로 우리나라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그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의 암울했던 현대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인물이다. 애수 어린 선율 속에 겉으로는 연인의 이별을 그리고 있는 이 노래는 그리스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기도 하며, 이후 그는 군부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 조국에서 추방당해 망명의 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스의 국민 작곡가로 불리며 세계의 존경을 받아 온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1925년, 그리스의 유서 깊은 지역인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비잔틴 성가와 그리스 민속 음악을 배우며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쌓
았다. 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이 침공했을 때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전쟁 이후 좌파와 우파로 나뉜 내전 속에서는 좌파에 가담해 혹독한 시련과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음악 속에도 반영되어 그리스의 음악 전통을 바탕으로 한 대단히 민족적인 곡들을 쓰게 되는데, 67년부터 시작된 군부 정권의 독재 치하에서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금지곡 처분을 당하고 구속과 고문 끝에 국외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군부 정권이 끝나고 난 뒤에야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부주키의 울림이 담긴 레베티카 음악의 전통에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하며 시대의 아픔과 조국의 슬픔을 담아냈고, 칠레의 시인 네루다(Pablo Neruda)의 시를 오라토리오로 표현한 ‘Canto General(모두를 위한 노래)’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Maria Farantouri - Los Libertadores (Canto General) (모두의 노래중 '해방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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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여기 나무가 온다. 폭풍의 나무, 민중의 나무
나뭇잎이 수액을 타고 오르듯 영웅들은 대지로부터 솟구쳐 오른다.
바람은 무성한 나무숲에 부딪쳐 아우성치고,
마침내 빵의 씨앗이 또다시 대지에 떨어진다.
여기 나무가 온다. 알몸뚱이 주검을,
매질 당해 만신창이 된 주검을 먹고 자란 나무,
창에 찔려 죽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재가 되고
도끼에 목이 잘리고 말에 묶인 채 갈가리 찢기고
교회의 십자가에 못 박힌 처참한 몰골의 주검을 먹고 자란 나무.
여기 나무가 온다. 뿌리가 살아 숨쉬는 나무
순교자들의 주검에서 초석을 뽑아내고
그 뿌리로 피를 마셨던 나무
땅바닥에서 눈물을 뽑아내 우듬지까지 끌어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 나누어주었던 나무
보이지 않는 꽃이었고 때로는 땅 속에 묻힌 꽃이었으며
또 때로는 떠돌이별처럼 꽃잎을 밝게 비췄다.
사람들은 가지에서 단단해진 꽃부리를 따 모아
목련이나 석류처럼 손에서 손으로 건넸다.
그러자 갑자기 꽃부리는 대지를 열고 별에 닿을 만큼 커졌다.
이것은 해방된 자들의 나무. 대지의 나무. 구름의 나무
빵의 나무. 화살의 나무. 주먹의 나무. 불꽃의 나무.
암울한 우리 시대의 격랑이 집어삼키려 날뛰지만
그 돛대는 꿈쩍 않고 힘의 균형을 잡는다.
때로는 가지들이 분노에 꺾여 다시 떨어지고
불길한 재가 고래(古來)의 위엄을 뒤엎는다.
이렇게 모진 세월을 넘고 이렇게 고통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은밀한 손이 무수한 판들이
민중이 부서진 파편들을 지켜냈고
변치 않는 나무 동체를 숨겼다.
민중의 입술은 뿌리와 한길을 가며 사방으로
뻗치고 갈려나간 거대한 나무의 잎이었다.
이것은 나무, 민중의 나무. 해방된 모든 민중의 나무. 투쟁의 나무
그 머리칼을 들여다보라.
새롭게 태어난 그 빛을 만져보라.
고동치는 그 열매가 매일매일 빛을 퍼뜨리는
공장에 손을 깊숙이 넣어보라.
그대의 손으로 이 대지를 높이 세워라.
이 찬란함에 동참하라.
그대의 빵과 그대의 사과를
그대의 가슴과 그들의 말(馬)을 움켜잡아라.
그리고 국경에서, 그 나뭇잎들의 경계에서 보초 서라.
그 꽃부리의 끝을 지켜라.
적의를 품은 밤을 함께 지새워라.
신 새벽의 순환을 지켜라.
별이 쏟아지는 신정을 호흡하라.
나무를, 대지 한폭판에서 자라는 나무를 떠받쳐라.
다섯 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무용곡, 오페라 등 클래식 작품들도 남겼으며,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알리기도 했다. 그리스의 존경받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대표작을 영화로 만든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들려주었던 그리스 전통의 향기가 담긴 부주키의 선율들은 지금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는 그리스 배우들이 주연하거나 해외의 인권 운동 관련 영화들에서 인상적인 음악을 남겼는데, ‘죽어도 좋아’라는 번안 제목으로도 유명한 영화 [페드라]나 [계엄령], [Z] 등의 음악을 맡으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많은 음악들은 격랑의 그리스 현대사에 맞서 싸우며 만들어 낸 것이었고, 그리스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을 주었던 것이기에 음악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Maria Dimitriadi - To Treno Fevgi Stis 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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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은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체 앉아만 있었네
남긴 체 앉아만 있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었네
"진실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
1974년 7월, 작열하는 한 여름의 태양 아래 그리스의 아테네 공항에서는 장엄하고 격정적인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심장을 태울 것 같은 강렬한 울림으로 조국에 돌아온 음악, 바로 <영혼의 행진>(March of the spirit)이었다. 그리스의 위대한 민중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5년~ )가 국외로 추방되기 1년 전 1969년 유배지 자투나(Zatouna)에서 만든 오라토리오(Oratorio)다. 이 음악은 조국의 하늘 아래서는 단 한 번도 연주되지 못했다. 그리스의 운명과 함께 국외로 추방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스를 7년간 암흑 속에 몰아 넣었던 군부독재의 몰락으로 해외에서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던 레지스탕스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 땅에 속속 귀환하는 순간 이 음악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Angelos Sikelianos - March of th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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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os Sikelianos - March of the Spirit
그리스의 상징적 반체제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도 역사의 장강을 따라 도도히 흐르는 자신의 음악이 마중 나온 가운데 마침내 다시 꽃 피는 민주주의의 고향,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의 삶과 음악이 뿌리내려 있고, 그 모든 것이 영혼의 샘물로 음악이 되어 솟아나는 곳으로. 테오도라키스에게 그리스는 어떤 나라인가. 발칸 반도의 끝에서 이글거리는 지중해를 내려다 보는 나라.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던 나라. 숱한 신화와 함께 헬레니즘 문화의 근원이 되어 서양 문화를 태동시킨 곳. 많은 국가와 민족이 그리스 영토를 정복했지만 그리스의 정신과 문화만은 정벌하지 못했던 곳. 하지만 유럽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내전과 쿠데타, 무자비한 폭력과 억압이 지배했던 절망의 나라였다.
"진실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비극적인 그리스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군부독재에 항거했던 그의 삶과 예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민중을 껴안고, 민중을 움직이게 하는 음악, 민중을 민주주의의 강물을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도록 공명하는 음악, 바로 그가 불굴의 정신으로 실천해 온 음악이었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기에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그의 음악은 그리스의 정신이며 뿌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 국민의 가슴속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정의의 몸부림으로 승화되어 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불잉걸을 지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시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조국은 물론 해외에서 그리스 레지스탕스들의 고독한 영혼의 지휘자였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삶과 투쟁
1925년 7월 29일, 그는 소아시아의 키오스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테오도라키스의 관심은 음악이 전부였지만, 불의가 지배했던 그리스의 정치상황은 그를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시대는 그를 반정부 저항투쟁의 일원이 될 것을 요구했다. 이 젊은 음악가에게 마르크스주의만큼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은 없었다. 독일군이 점령하던 1943년, 그는 아테네음악원에 입학한 후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들었다. 아테네 음악원 최초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기까지 그의 선택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고, 또한 반응해야 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수차례의 투옥과 석방이 거듭되면서 그의 삶과 예술은 항상 고난과 시련이 뒤를 따랐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1만명의 좌익 빨치산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에게해 섬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후 사면과 유배, 억류와 구금이 잦았고, 그때마다 우익반동정권이 휘두르는 칼날에 젊은 날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됐다. 1946년, 왕정제가 부활하고 보수세력이 이끄는 정권이 그리스를 장악했다. 외세에 의존한 이 반혁명 정권은 민중의 증오 위에 군림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50년 아테네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954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떠났다. 찾은 곳은 파리음악원. 그곳에서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며 정규 음악수업을 받기에 이르렀
다. 위안이라면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의 조국 그리스는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암울한 정치상황에 침묵할 수가 없었다. 민주화 투쟁과 정치투쟁에 나서면서 민중음악과 클래식음악을 병행해 나갔다. 1963년 5월 22일, 폴라리스 미사일의 그리스 배치를 반대하는 반핵평화 시위에서 이 모임을 주도한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그레고리오스 람브라키스(좌파민주주의당 의원)가 우익정권에 의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람브라키스의 죽음은 그리스 민중을 분노의 광장으로 이끌었다.
Maria Farantouri - To Yelasto Pedi 미소짓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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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Farantouri - To Yelasto Pedi (미소짓는 소년)
"람브라키스는 살아 있다! 민주주의 만세!" 아테네에서 거행된 람브라키스의 장례식에는 100만 명 이상의 그리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이 암살사건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제트'다. 'Z'는 고대 그리스어로 "그는 살아있다"를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도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빛난다.) 람브라키스의 정치적 동지였던 테오도라키스는 그후 청년운동(Lambrakis Democratic Youth)을 조직하고 적극적인 반정부 투쟁을 전개한다. 이런 가운데 1964년 의회선거에서 테오도라키스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람브라키스의 죽음의 진실도 밝혀졌다. 단순 사고사로 은폐시키려던 우익 정부의 음모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승
리에 불과했다. 불과 몇 개월 후 1967년 4월 21일,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모든 진실이, 모든 노력이 피바람에 휘말리고 말았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를 비롯한 모든 좌파들의 음악은 국내에서 연주하거나 방송하거나 판매하는 것이 일체 금지되었다. 쿠데타가 발생한지 하루만에 1만명이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날 이후 모든 자유와 인권은 탄압과 억압의 이름으로 극도로 유린되었다. 그리스 민중의 삶은 항상 쿠데타 정부가 들이대는 총구 앞에 걸려 있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멈춰 버렸다. 1967년 8월, 지하 투쟁을 전개하던 테오도라키스도 체포됐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의 불타
는 창작열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의 음악은 투옥과 자투나(Zatouna) 유배, 오로포스(Oropos) 군 집단수용소에 갇히면서 더욱 유명해졌고, 빠른 속도로 민중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0년 4월, 자유를 박탈당했던 테오도라키스는 군부에 의해 조국 그리스에서 추방되고 만다. 그의 구명운동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세계 여론의 맹렬한 지탄의 대상이 된 그리스 군정이 궁여지책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의 음악도, 반정부 민주화 투쟁도 그리스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라키스의 투쟁은 해외에서 더욱 불이 붙었다.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그의 유랑공연은 지칠줄 몰랐다. 그야말로 '영
혼의 행진'이었다. 1천회가 넘는 그의 해외공연은 조국의 흙내음과 태양을 못잊어 하는 그리스인 레지스탕스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그가 유랑하는 동안 군부독재타도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해외 저항세력은 속속 모여들었다. 이미 그는 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리스 없이는 살 수 없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젊은이들이 플라카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는 광경을 다시 볼 수 있다면...나의 궁극적인 꿈은 나의 국민 앞에서 다시 연주하는 것이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이 위대한 민중의 음악가가 그렇게도 절실히 염원하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다. 1974년 7월, 그리스 민중과 망명자(추방자)들
이 목타게 기다리던 군사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해외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그는 민주주의가 다시 시작되는 조국의 품에 안겼다. 민중 속에서, 옥중에서, 망명지에서 그리스 민주주의 부활을 음악으로 노래했던 테오도라키스는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1975년 국회의원 선거와 1978년 아테네 시장선거에서 낙선되기도 했으나, 여러 차례 그리스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정에 참여했다.(1981~1986, 1989~1993) 임기 중인 1983년에는 레닌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 2년 동안 콘스탄틴 미초타키스 정부 밑에서 국무담당장관을 지냈다.(이러한 역정은 그의 동갑내기 멜리나 메르꾸리와 많이 닮아 있다. 1989년 총선
에서 보수파로 출마한 전력 때문에 멜리나 메르꾸리와 미묘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93년 모든 공직생활을 접은 그는 현재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면서 국제평화와 인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7년 그리스와 터기 양국 간 영토분쟁으로 전운이 감돌 때, 터키의 대표적인 아티스트 줄푸 리바넬리와 함께 평화지대인 니코시아 사이프러스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공동음악회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9년 나토의 코소보 전쟁 개입을 반대했고, 2003년 미국 부시 정부가 주도한 이라크 전쟁을 강력히 규탄했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지지하는 운동에도 앞장섰다.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지명되기도 했다.
Andre Rieu - Zorba's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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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리스의 정신, 그리스 음악의 산 역사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음악의 산 역사이다.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을 비롯하여 영화음악과 고전음악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작품 활동으로 그리스 현대음악의 이정표를 세운 음악의 국보(國寶)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리스 민중의 고결한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서정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선율과 웅장하고 폭발적인 사운드가 특징이다. 피로 얼룩진 그리스의 현대사와 민중의 단결, 반파시즘, 진정한 민주주의의 열망을 음악에 담아냄으로써 그리스의 음악예술이 시대와 호흡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음악을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에게 되돌려 주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1,000여 곡이 넘는 민중가곡 외에도 교향곡, 발레곡,
오라토리오, 오페라 등 정통 클래식 음악으로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 <미소짓는 소년>(To gelasto pedi), <5월의 어느 날>(Mera Magiou) 등은 민족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의 의지를 뜨겁게 달군 저항음악의 상징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특히 칠레의 시인이자 혁명가인 파블로 네루다의 대서사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가슴에 저며드는 저항과 서정의 칸타타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2), 오라토리오 <영혼의 행진>(March of the spirit), 발레곡 <알렉시스 조르바>(Alexis Zorba) 등은 음악현대사에 길이 남을 역작들이다. 그의 음악을 향한 정열적인 투혼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Maria Farantouri - Asma Asmaton (Mauthau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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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Farantouri - Asma Asmaton (Mauthausen)
그리이스의 유대인계 극작가 '이아코보스 캄바넬리스(Iacovos Kambanellis)'는, 20세의 청년시절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악명높았던 나치수용소 '마우트하우젠 (Mauthausen)'에 포로로 갇혔다가 생존한 시인입니다. Iacovos는 그후 1960년대초부터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 4편의 시를 모아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에게 전하면서 곡을 붙여줄것을 부탁합니다. 4편의 시를 받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이 시를 읽자마자 곧 비장한 마음으로 곡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로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Iacovos의 그 싯구절이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았고 미키스 본인도 나치에
의해서 감금을 당했던 시련을 가지고 있어서 이 시에 대한 공감이 매우 크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생각했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후대들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음악으로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네편의 시에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인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이 음악들을 연주하려하였으나, 당시의 그리이스 정부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이 음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인 1995년에 이르러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적 동반자 마리아 파란두리의 음성으로 레코딩하게 되어 영원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고, 이 미키스의 'Mauthausen'은 그가 남긴 수많은 명작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 파파고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함
How beautiful my love is In her everyday dress And a little comb in her hair No-one knew how beautiful she is Young girls of Auschwitz Young girls of Dachau Have you seen my love? We saw her on a long journey She no longer had her dress Nor the little comb in her hair | 그녀의 일상적인 드레스를 입은 내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작은 빗 아무도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어린 소녀들 다하우의 어린 소녀들 내 사랑 봤어요? 우리는 긴 여행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드레스를 더 이상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머리에 있는 작은 빗도 |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유태인 소녀를 애도하는 노래이며 영상의 배경은 옛 나치수용소 '마우트하우젠'이며, 음악은 그 네편의 시중 첫번째 작품을 음악으로 옮긴 것입니다. 테오도라키스는 많은 영화에 주옥같은 음악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영화음악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로는 쥘 다생이 감독한 멜리나 메르꾸리 주연의 <일요일은 참으세요>와 <페드라>, 마이클 카코야니스가 감독한 안소니 퀸 주연의 <희랍인 조르바>,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한 이브 몽땅 주연의 <제트>와 <계엄령> 등이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을 지탱하는 뿌리는 민속악기 부주키(Bouzouki, 긴 목과 8개의 줄이 달린 류트계의 발현악기)와 전
통음악인 렘베티카(Rembetika)이다. 부주키는 가장 솔직한 그리스 민중의 감정표현 도구다. 테오도라키스에게는 자신의 음악과 민중 사이를 잇는 영혼의 통로였다. 그리고, 그는 클래식 음악이 전공이었지만 2년여 동안 머물렀던 자신의 고향 크레타섬에서 그간 잊고 있었던 음악을 비로소 만났다. 크레타의 민속과 문화, 그리고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크레타인들의 음악에는 바로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뿌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 민족음악의 정수인 '렘베티카'였다. 렘베티카는 중산층과 지식인들이 외면했던 밑바닥 인생들의 노래로 '하찮게 여기던 음악'이었다. 오랜 기간 억눌려 있던 렘베티카는 테오도라키스와
또 한사람의 위대한 아티스트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에 의해 완벽하게 새로 태어났다. 그리스 민중이 겪은 집단적 경험을 렘베티카에 서양음악의 어법을 결합시켜 그리스의 풍부한 선율성과 서정성 그리고 뛰어난 민중적 요소를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을 '예술적'이라는 뜻의 엔테크노(Entekhno)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에서는 민중의 침묵을 깨우고, 세계와는 예술음악으로 소통했다. 결국 렘베티카는 그리스 민주화의 당위성을 어떤 정치구호보다도 더 강력하게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다. 테오도라키스는 민중의 애환이 짙게 배인 전통가락에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접목시켜 장엄하고 스케일이 큰 렘베티카를 작곡하여 그리스 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오늘날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한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자리잡았다는 당대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테오도라키스 음악의 최고 해석자, 마리아 파란두리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옥중에서 작곡한 렘베티카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체포와 구금, 추방이 다반사였던 당시의 그리스 시대상황이 수채화처럼 다가오는 노래다. 이 노래에는 압제자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기본적인 삶의 권리까지 빼앗겼던 그리스 민중의 아픔이 서려 있다. 시적 상징은 60년대 후반 암울한 시대 상황이지만, 이미지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터키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은 그리스의 애달픈 운명이 혁명의 길을 떠나는 레지스탕스 애인을 배웅하는 애달픈 감정에 오롯이 실려 있다. 민속악기 부주키(Bouzouki)의 애상적인 선율이 노래의 감동을 더해 주고 있다.
Maria Farantouri -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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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기차는 8시에 떠나갔습니다
카테리니를 향해
11월은 카테리니행 기차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지나가지 않겠지요
11월이 올 때마다 카테리니행 기차를 추억합니다
우연히 레프테리에서 우조(oyzo)를 마시고 있는 당신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밤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오지 않겠지요
당신은 비밀을 안고 그것을 아는 자를 추억합니다
밤은 다른 장소에는 찾아오지 않겠지요
기차는 8시에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흘로 카테리니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수처럼 찌르는 안개 속에서
당신은 홀로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 레프테리 : 아테네의 번화가 타베르나에 있는카페 이름
** 우조 : 그리스인들이 즐겨 마시는 허브향이 강한 술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뮤지션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마찬가지로 1967년 그리스에서 추방되어 7년 동안 세계 각지를 유랑하면서 노래를 통해 군부독재에 저항하고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호소했던 마리아 파란두리(Maria Farantouri, 1934년~ )이다. '지중해의 존 바에즈'라는 찬사를 오히려 훌쩍 뛰어 넘는 그리스 최고의 지성파 여가수인 파란두리는 작곡가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을 가장 이상적으로 해석한 걸출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적 동지
이다. 지금도 그리스의 자유와 평화, 희망의 상징으로 예우를 받고 있으며, 그리스를 대표하는 국민가수다. 치열한 내전과 무자비한 폭력, 군부 쿠데타를 경험한 그리스.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조국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 음악을 작곡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근대사와 너무나 닮은 그리스 역사를 보아서일까. 아니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독일 하늘 아래에서 돌아가신 세계적인 음악가 고 윤이상 선생이 자꾸 떠올라서일까.
Maria Farantouri - Mera Magiou Mou Misep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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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키스의 <5월의 어느 날>(Mera Magiou)은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회상하며 그의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다. <내 조국이 가르쳐준 노래>로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영화 <제트> 테마음악에 노래말을 단 <미소짓는 소년>(To Gelasto Pedi)은 마리아 파란두리가 음반을 기획하고, 기타리스트 존 윌리암스가 기타 선율을 맡았다. 다른 악기 없이 기타 하나만으로 세기의 명곡이 되었다. 영혼을 울리는 파란두리의 목소리로 가슴 저미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Nana Mouskouri - Mera Mayou (5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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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5월의 어느날에 너는 떠나 버렸지
아들아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봄날에
나는 너를 잃었구나
너는 테라스에 올라서서
너의 눈속 가득히 햇빛을 받아 마시곤 했었지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너의 큰세상에 대해 내게 얘기하고
우리가 함께한 어느날, 내게 약속도 했었지
하지만, 네가 사라진 지금
나의 빛도 또한 사라져버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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