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이 하지 못하는 행위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가 가식假飾 혹은 외식外飾이다. 그것은 인간만이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는’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좋거나 싫고,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either or’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들은 선한 척 웃음 지으며 다가가 상대방의 뒤통수를 쳐 잡아먹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야생동물 중에는 ‘척하는’ 녀석들도 있긴 하다. 어떤 벌레는 살짝 건드리면 죽은 척한다. 일부 나비와 같은 곤충들은 포식자에게 잡히면 죽은 척한다. 이 같은 행동은 포유류나 조류, 어류 등에서도 발견된다. 과학적으로 “긴장성 부동화”라고 하는 이러한 행동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마지막 본능적 행위이다. 어렸을 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길 옆 콩밭에 여러 마리 꿩 새끼—새끼 꿩? 어린 꿩? 아기 꿩?—들이 있는 걸 보고 다가가 잡으려 하자 종종 달음박질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그중 한 마리를 내가 기를 쓰고 쫓아가자 궁지에 몰린 그 녀석이 콩잎 한 장을 입에 물어 제 얼굴을 가리고 발라당 누워 죽은 척, 혹은 “나 없다~”라고 말하는 듯이 행동했다. 내가 손을 뻗어 잡으려 하자 다시 재빨리 도망쳐서 나는 결국 녀석을 놓치고 말았다. 또 다른 어떤 동물들은 목의 털이나 깃털을 한껏 부풀려 세워 자신의 몸이 실제보다 더 큰 척하거나 더 센 척해서 위험에 대처하기도 한다. 그들의 가식은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이 하는 가식은 동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가식은 일차원적인 척하기에 머물지 않고 ‘—연하고’ ‘—체하는’ 등으로 발달한다. 다른 동물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걸 할 능력이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점잖은 척, 겸손한 척한다. 특히 자기보다 더 낮거나 더 약한 사람에게 짐짓 겸손한 척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이중 플레이를 하는 걸까? 내심 자신이 더 강하고 더 유능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거기에 자신이 착하기까지 하다는 걸, 점잖고 겸손하기까지 하다는 걸 보여주어 이중, 삼중으로 훌륭한 존재라고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걸까?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십대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끔찍이 싫어하는 단어는 phony(가짜, 속어로는 ‘짜가’)이다. 그는 “난 그 말이 들릴 때마다 토할 것 같다”고 말한다. 아마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아오면서 내 양심을 다소 불편하게 하는 세 개의 영어 단어가 있다. 그것들은 snobbery와 condescension 그리고 pedantry이다. snobbery는 ‘신사연함,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 뻐김’ 정도로 번역된다. 또한 condescension은 ‘짐짓 겸손한 척하거나 생색을 내는 태도’로, 그리고 pedantry는 ‘학자연하는 태도’를 뜻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듣거나 그런 상황에 처해도 토할 것 같지는 않고, 무덤덤하며 심지어 나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하는 데 다소 익숙하기도 하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 약간 불편하고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영어 단어와 우리말 표현이 의미상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snob, snobbery(혹은 snobbism)이다. 우리말로는 ‘속물’과 ‘속물근성’으로 대응되지만, 영어와 우리말의 의미가 서로 정확하게 조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한사전에 snob은 ‘지위나 재산만을 존중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 교만한 사람’, 혹은 ‘신사연하는 속물’이라고 뜻을 풀어서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서 snobbery는 흔히 ‘속물근성’이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속물’은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을 가리키며, 속물근성은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을 뜻한다. 한편 영어사전에서 snob은 ‘자기보다 높은 사회계급인 사람만 좋아하고 존중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사회계급이나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그리고 snobbery는 ‘낮은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에 대해서 짐짓 겸손하게 구는 속성’으로 정의되어 있다.
두 번째로 나를 신경 쓰게 만드는 표현은 condescension인데, 그것은 ‘짐짓 겸손하게 구는 태도’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인데, condescension은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 오히려 남에 대해 자신의 우월감을 내심 즐기면서 자신의 능력을 짐짓 낮추는 척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건 ‘우월감을 의식하면서 짐짓 겸손하게 굴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인 condescend의 변형이다. 그래서 condescension과 snobbery는 의미상 밀접하게 연결된다. 차이라면 sbobbery가 좀 더 사회 계급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고, condescension은 개인적인 태도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학문 연구를 업으로 하는 교수였는데, 거기에서 비롯된 양심의 불편함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게 영어 단어 pedantry 혹은 그 형용사형인 pedantic이다. 그 단어들은 ‘아는 체하는, 학자연하는, 현학적인’ 혹은 그런 태도를 나타낸다. 자신이 가진 학문적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보다 더 낫게 보이게 하려고 태도나 외모를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언행으로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상해 보이는 어떤 종류의 옷을 입는다거나 안경을 낀다거나, 지적으로 보이게 할 것 같은 빈티지 가죽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멘다거나, 어떤 그럴듯한 전문 용어를 특히 외국어를 즐겨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 등 무수히 많은 수법이 있다. 그건 교수나 학자로서 정당한 품위와 존엄을 갖추는 태도와는 다르다. 바탕이 되는 내실이 없는 외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20-30년 전까지만 해도 교수는 사회에서 제법 폼 잡는 직업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여수의 돌산도라는 곳에 다른 대학의 영문과 교수였던 내 친구와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곳 밭에서 농사짓거나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분들과 우연히 이야기를 하게 되었었다. 그분들은 내 친구나 나를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대하는 듯했다. 한편으로 불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으쓱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은 전남 강진이 고향인데, 그는 늘 나를 ‘나 괴수’라고 부른다. 자기 고향 동네에서는 교수를 괴수라고 불렀단다. 괴수는 ‘악당의 우두머리’인데, 나는 그럴 깜냥이 못된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스납(snob)의 태도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 세 가지 어휘들에 있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 어휘들이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자신의 우월감이나 약자에 대한 멸시적인 태도가 아니라, ‘짐짓 겸손한 체하는’이라는 부분 혹은 더 압축해서 말하면 ‘짐짓’이라는 부사이다. ‘짐짓’은 ‘속마음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사회생활에서 종종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한다.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니 그걸 일소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척하는’ 건 사회생활을 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 종의 기본 태도이다. 예쁜 척, 귀여운 척, 얌전한 척, 점잖은 척, 강한 척, 센 척한다. 그게 거의 사회생활의 기본 태도처럼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한 치 오차 없이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상대방에 따라서 언행과 태도를 바꾼다. 그걸 사회적 처신이나 페르소나라고 하나 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려고 한다면 그건 정상적 사고라고 볼 수 없다. 아마도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우리나라의 법정스님, 테레사 수녀님과 같은 분들은 ‘척하지’ 않고 수정처럼 투명한 삶을 사셨는지 모른다. 아마 그분들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조금은 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obbish나 condescending, pedantic이라는 영어 단어들은 나에게 늘 불편한 표현들이다.
첫댓글 교수라 생각하고 괴수라 부르는건데…
예^^
*풍자 만화 속 표현 번역: 뒤쪽 벽의 족자에 "신사라면 누구나 문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 고르세요."/ 손에 든 종이에 "당나귀가 시키는 미국 사람들 교육."/ 발판 옆면에 "19세기의 모든 영국 스납. 진짜임."
*교양없는 미국사람 모습과 표정이 재미있죠? 그땐 미국인들이 돈만 가진, 귀족이 되고 싶어하는 스납으로 여겨졌고. 영국 사람들이 그걸 조롱하고 있는 그림 같습니다.
콩잎 한 장 물어 자기 얼굴 가리고 벌러덩 누워 '나 없다'하는 아기꿩, 너무 귀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