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의 전제이자 결론인 공성(반야바라밀)
BCA에 기술되어 있는 보리심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공성(śunyat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샨띠데바는 연기(pratītya-samutpāda)를 공성이라고 해석한 중관학파의 사상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고, 나아가 자신이 전수받고 이해한 공성 사상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보리심 사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성의 지혜, 즉 반야(prajñā)에 대한 이해는 BCA의 구성에서는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지만, 보리심론의 전개에서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샨띠데바는 그의 Śs에서 『허공장경』(Gaganagañja-sūtra)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갈라진 틈새를 통해 바람이 들어오듯이, 그와 같이 마음의 틈새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마라(māra)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므로 항상 보살의 마음은 어떠한 틈새도 없어야만 한다. 여기서 이 틈새가 없는 마음이란 모든 형태의 인식으로부터 생긴 공성의 성취이다."
즉 보살은 공성을 체득한 바탕 위에서 보리행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샨띠데바의 공성 사상은 BCA 9장「반야바라밀」장에서 밀도 있게 설명되고 있다. 그는 공성을 모든 번뇌와 고통의 치료제 혹은 해독제로 파악한다.
"고통을 일으키는 사물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공성은 고통을 가라앉힌다.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기겠는가!"
고통의 해독제로서 공성은 구원론적(soteriological) 성격을 지닌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공성이 구원론적인 이유는 행위 주체로 하여금 인생의 근원적인 전환, 다시 말해 '종교적 회심'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스트렝(Streng)은 공성이 세 가지 측면에서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며 그 목적을 성취한다고 말한다. 인식론적 측면인 '깨달음으로서의 공성'과 심리학적 측면인 '자유로서의 공성', 그리고 존재론적 측면인 '관계성으로서의 공성'이 행위 주체의 삶 속에서 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스트렝의 분석은 비록 반야계 경전에서 기술된 해탈로 들어가는 세 가지 입구(三解脫門)와 정확하게 상응하지는 않지만, 무자성과 연기를 내용으로 지닌 공성의 진리를 존재론적(=空삼매)·인식론적(=無相삼매)·심리학적(=無願삼매)으로 표현하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구원론적 성격을 지닌 공성은 공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공성의 지혜와 실재 속으로 들어가서 인생의 궁극적인 전환을 위한 실용적인 수단이다.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함으로써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들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허구적으로 조작된 실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샨띠데바는 이러한 맥락에서 보리심의 생기와 성장을 위한 전제이자 결론인 공성의 지혜에 대하여 9장 전체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한다.
총10장으로 이루어진 BCA중에 철학적 내용이 담긴 9장은 전체적으로 중관학파와 불교내외의 다른 학파들과의 논쟁으로 채워져 있다. 총168개의 게송 가운데 단지 25개의 게송(1∼5, 32∼34, 149∼168) 정도만이 논쟁이 없는 부분이다. 논쟁의 대부분은 유부(Sarvāstivāda)와 비바사사(Vaibhāṣika)와 같은 실재론자들과의 대론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음으로 유가행파(Yogācāra)와의 대론이 차지한다. 불교 외부의 다른 학파와의 논쟁으로는 상키야(Sāṃkhya) 학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니야야-와 이세시까(Nyāya-Vaiśeṣika) 학파와 미맘사(Mīmāṃsā), 그리고 짜르바까(Cārvaka)와 같은 유물론자들과의 논쟁도 일부분 이루어져 있다.
BCA 9장을 보리심론의 전제이면서 결론인 공성을 중심으로 개괄하면, 먼저 '반야의 필요성'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 '두 가지 진리설'을 제시한 후, '환(幻)의 비유'와 '자기인식(svasaṃvedana) 이론' 그리고 '4념처'(catuḥ-smṛti-upasthāna)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일체가 실체로서의 자성(svabhāva)이 없는 공임을 드러내 보이고, 그 공성의 획득을 위해 '공성의 수습'이 필요함을 설하고 있다. 공성의 수습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7장인 「BCA의 보리심 수행」부분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보리심론의 핵심적인 전제이자 결론인 공성을 '두 가지 진리설'과 '무아설', 그리고 '마음의 자기인식설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