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한국의 선종사 개관
선종의 전래傳來
불교의 전래1와는 다르게 선종은 신라인이 직접 중국에 가서 수선 전등해오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선이 들어온 것은 28대 진덕왕(650년) 때로 중국 사조도신(四祖道信, 580~651)의 법을 받고 귀국한 법랑法朗 선사에 의해서이다. 법랑의 제자 신행(信行, 704~779) 역시 중국에 들어가 신수(神秀, ? ~ 706)의 제자 지공志空의 법을 받고 귀국해 지리산 단속사에서 화문化門을 여는데, 이때가 36대 혜공왕 때인 765년이다.
그 이전에도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원효(元曉大師, 617~686)대사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나, 중국에서 활약한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2 선사가 혜능 이전 중국의 선종을 주도한 것을 보면 중국 선종과의 교류도 긴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도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상 선사가 귀국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전래 초기는 정치적으로 호국불교의 성격을 뛰고 있어 아직 선종을 받아들일 토양이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혜공왕 때 이후 선풍이 일기 시작하여 56대 경순왕에 이르는 약 200년간을 한국 선의 황금시대라고 할 만하다.3
선종의 전개展開
신라新羅의 선을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하는 데, 중국 선과는 달리 한국은 같은 계열의 법을 받아왔음에도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신라의 선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용어는 고려 시대에 생긴 말로 고려 중기까지 살아남은 선문을 말하고 있을 뿐으로, 신라시대에는 구산선문에 포함되지 않은 선문도 존재하였고, 고려시대에 개산된 선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4
신라의 선문은 크게 북산계北山系와 남악계南岳系로 나눈다. 이는 <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5의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6이란 기록에서 기인하는데, 북산계를 말하는 북산의는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道義선사를 말하고, 남악계를 말하는 남악척은 남원 실상사 홍척洪陟 선사를 말한다.4 도의와 홍척은 함께 마조(馬祖道一, 709~788)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에게 법을 이은 선사였으나, 신라 선에 미친 영향은 서로 달랐다.
도의 선사는 가지산에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옮긴 후 15년간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세속에 초탈한 선풍으로 선 우의사상인 순선純禪으로 발전, 사굴산闍崛山의 범일梵日 선사와 성주산聖住山의 무염無染 선사 등으로 이어져 북산계를 형성하였다.
반면 남악계 홍척 선사는 국사의 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흥덕왕興德王과 의강宜康태자의 귀의를 받는 등 지배적인 권위를 유지하며 도시 불교적인 성격을 띄었다. 선과 교학의 조화를 추구,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하려고 노력하여, 그의 사상을 융선融禪이라고 하는데, 동리산桐裏山의 도선道詵 선사와 쌍계산雙溪山의 혜소慧昭 선사 등으로 이어져 남악계를 형성한다.
이런 경향은 후에 우리나라 불교계의 두 줄기 큰 흐름으로 발전하는데, 융선 사상은 고려사회에 영향을 끼쳐 선교 쌍립시대로 발전하였고, 순선은 조선시대 조사선풍으로 이어져 한국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고려시대는 선과 교가 회통하는 시기로 신라에 없었던 천태종天台宗이 성립되어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가 갖추어진다.7 산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신라의 산악불교가 고려에 오면 도시불교화 하는데, 초기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도 판각되었다.
선과 교가 함께 화회和會하는 과정은 후삼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념통일에 부심했던 의천義天이 송으로부터 천태종을 가지고 들어와 송도松都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구산선문 중 오대 산문을 천태종으로 통합하여 독자적으로 승과를 실시하는 등 산문선의 승려들을 통합하려 하였다.8 이 움직임은 당시 선승에게 영향을 주어 선의 입장에서도 선교화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으로 나타났다.
지눌의 선은 그 제자 혜심(慧諶, 1178~1234)에 이르러 기본사상이었던 화회사상보다는 지눌사상의 일부였던 경절사상徑截思想만을 강조하여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하는데, 그 후 조선시대의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에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사선풍이 강했던 것은 확실하다.
한편, 고려 말에는 선의 우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천책天頙은『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등장시켜 조사선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徹底시켰다는 지금 보면 다소 허황된 이야기를 유포시켜, 석가를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나아가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발상에서 출발하였는데, 부처와 범부를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 사상은 서산西山대사의 『선교석禪敎釋』으로 강조되기도 하였고, 조선 후기 백파긍선白坡亘璇의『선문수경禪文手鏡』에도 나타나 150년간의 선문논쟁으로까지 이어진다.9
조계종의 성립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다. 수선사(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정혜결사 운동은 고려 후기의 선을 크게 부흥시켰으며, 특히 그의 삼문三門10에 의한 독창적인 선사상은 당시 서로 대립해 있던 선과 교를 서로 융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지눌은 처음『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의하여 뜻을 체득하였으며, 뒤에『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고 안목이 열렸다고 한다. 이는 멀리는『육조단경』을 스승 삼고 가까이는『서장書狀』으로 벗을 삼아 조계와 대혜의 심법을 스스로 발견하여 그 마음을 전했다고 할 수 있다.11 지눌의 자각의 체험은 교재를 통하여 이루어졌지 중국 선종을 직접 가서 수선 전등하지는 않았다.
지눌의 사상체계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는데,12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수심결修心結』,『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등은『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될 정도로 그의 사상은 우리 불교사에 우뚝하다. 지눌의 선풍은 이후 조계산 수선사 진각眞覺국사 혜심으로 이어져 16명의 훌륭한 국사를 배출하는 등 오늘날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승가 교육과 수행의 전당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혜심은 그때까지 존재하는 모든 공안들을 모아 1226년 30권에 달하는 선문공안집『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펴낸다.『선문염송』은 현재 조계종 공식 선공안집이다.
태고보우 선사는 임제의 18세 법손法孫인 석옥청공 선사로부터 법을 받아왔고, 이 법은 환암幻庵, 구곡龜谷, 벽계碧溪, 벽송碧松, 부용浮蓉으로 이어져, 현재 한국의 승려들은 부용의 두 제자인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법손이라고 할 수있다.13 태고보우 선사와 동시대의 인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는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과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있었는데, 경한 선사는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본으로 알려진『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술하였다.
정리하면 보조지눌이 선풍을 일으켜 조계종의 기초를 세웠지만, 태고보우와 백운경한, 나옹혜근 등 중국유학승이 임제종을 실제로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명맥이 희미해진 것을 근세 경허 선사에 이르러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하겠다.14 그러나 경허 선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는 있지만, 깨닫고 나서 나는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셨으니15, 성철 스님의 논리로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임제종이 아닌 새로운 <한국 토종선>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성철 스님이『한국불교의 법맥』에서 밝힌 한국 조계종의 법맥은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 심법까지 직접 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 임제종 법맥을 이은 태고보우를 종조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경허 선사도 성철 스님도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조지눌이 실제 유학파가 아니어서 임제종 종통이 아니라고 한다면 성철 스님도 스스로 깨달았으므로 임제종 법맥이라는 주장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임제종 간화선의 수행체계 또한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근대 한국 불교
조선시대 불교는 ‘승과의 폐지’와 ‘승니의 도성출입금지’ 등으로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 억압과 천시는 출가자의 급감으로 나타났고, 자연히 승려의 수준 또한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학敎學의 부진, 교단의 쇠퇴 등으로 말미암아 상층사회에 포교의 기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의례불교만이 남아 성행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교단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 여말선초 10만 명에 달하던 승려 수가 1909년에 이르면 6천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급감하게 된다.16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비롯된 거사불교의 흐름이 개화사상가에게 이어지고, 개화사상과 더불어 유교를 대신하여 불교가 부각되면서 종단조차 없이 명맥만을 유지하던 불교계는 은둔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화를 고민하게 된다.17 출가 수행자에게는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바로 불교의 혁신이요 도약이었고, 결정적으로 1895년 시행된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은 한국 불교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적 특수성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을 도리어 불교 중흥의 계기로 받아들여, 식민지 시기 급격히 친일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18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마시키고자 일본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그 정책에 호응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진종 대곡파와 일련종을 필두로 일본불교의 주요 종파들이 경쟁적으로 조선 포교에 나서게 된다.18 이후 정토종, 조동종, 임제종 등이 가세하여 1910년 한일 합방시 이미 68개소의 각 종파의 포교소와 출장소를 한국에 둘 정도로 다양한 종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원종과 조동종 등은 한국불교를 그들과 통합하려는 시도도 하였는데, 이에 자극 받아 석전 스님과 만해 스님이 한국 불교는 임제종 정통이라 통합 할 수 없다는 <임제종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조선시대부터 존속하였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없애는 데 기여하는데,19 물론 근대화한 일본 불교가 한국 침략의 한 방편으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도성 출입 해금의 건의도 이루어 졌다고 보겠다.20 그러나 일본불교의 진출은 우리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자각하는 계기를 준 면도 없지 않았다.21
해방 후 제국주의 일본에 동조하여 민족의식을 저버렸다는 반성과 함께 왜색 불교를 청산해야 한다고 일본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 비구의 싸움 등 혼란이 야기되었고, 많은 학승들이 쫓겨나고 일본에서 출가하고 배운 승려들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어야 했다.22 효봉 스님을 길러낸 석두 스님이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대처했다는 이유로 해방 후 그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의 분위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도 독립운동가로만 잘 알려져 있지 그가『조선불교 유신론』이나 재래식 경전을 현대식으로 바꾼『불교대전』을 써서 조선 불교를 개혁하려던 스님으로서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일본에 다녀 온 후 말년에 「승니의 가취嫁娶」라는 글을 쓰고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비판만 하였지 그의 업적은 조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종단을 정화한다고 종조로 모시던 태고 보우를 조계종은 보조 지눌로 바꾸고 태고사를 조계사로 명칭을 변경하는데23, 만암 스님 같은 분은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하시면서 반대하시다 종정 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셨다.
일본 학자 충본극기沖本克己는 한국불교의 특징을 유학승에 의해 전해져 뿌리내린 구산선문의 다양한 불교 형태가 비교적 큰 변화 없이 유지 보존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서 한국의 선종을 관찰함으로써 당나라 시대의 선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24 단편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오랜 동안 정체되어 있는 우리나라 불교의 단면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우리나라 불교는 구산선문의 선풍과 보조지눌의 선풍도 희미해져 수행의 구심점을 잃고 인도 티베트 불교 등이 유행하는 등, 좀 심하게 얘기하면 중국 선종형성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측면도 있다.
참고한 책과 글
1) 한국 불교 역사는 시대적으로, 삼국시대 수용보급기(준비기), 통일신라시대 교학발전기(흥륭기), 고려시대 선교양종흥융기(난숙기), 조선시대 쇠퇴기, 그리고 근현대의 개화확산기로 나눈다. (노권용,「석전영호 대종사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 이 시대 구분은 선종의 역사와도 대부분 일치한다.
2) 최석환 지음『정중무상평전』과 변인석 지음 『정중 무상대사』참조. 『정중무상평전』에 의하면 최석환은 2001년 8월 무상이 중국 오백나한 중에 한 분임을 밝혀내고, 그해 10월 허베이성 백림선사에 <조주고불선차일미기념비>를 건립하여 마조가 무상의 제자임을 공식화 하였다고 한다. 중국 오백나한은 석가모니부터 중국 제공(濟公, 1148~1209)선사까지 인도와 중국 성인들을 망라하고 있는데, 그중 선승은 307위 달마존자와 455위 무상존자 둘 뿐이다.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는 신라왕자로 알려진 신라승 무상으로 중국 초기 선종을 이끌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신라 구산선문의 초조가 되는 것이다.
무상 선사 외에 입당 귀화한 선승으로 조안照安, 혜청慧淸, 진각眞覺, 현눌玄訥 등이 기록에 보이는데, 선수행의 여건이 신라보다 당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3) 이희익,『선禪과 한국문화재韓國文化財』p. 130. 이희익, 『선禪과 과학科學』pp. 84~85.
4)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14~15, pp. 77~78.
5) 보물 제137호, 지증대사적조탑의 희양산지선대사비명.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대사(824∼882)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다.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이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이었는데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분'이었다고 한다. 지선智詵스님은 신라 헌강왕 5년(879)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를 창건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波를 열었다.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은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이른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이 지증 대사비에는 신라시대 선종이 유래하는 과정과 지증 대사의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6)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 후 구도승求道僧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김益州金 진주김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谿寺의 혜소慧昭, 신흥언新興彦, 용□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등인데, 보리菩提의 종사宗師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남동신,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한국고대금석문 Ⅲ,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p. 174~211.)
7) 양종兩宗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을 말하는데, 오교양종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고려사高麗史』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에 보이고 있다. 오교와 오교양종은 거의 같은 의미를 쓰였다. 그것은 성립종파라고 하기보다 전 불교나 전 불교의 승려, 혹은 불교의 총칭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았던 불교 종파들이 타의에 의해서 통합되다 보니 종파뿐 아니라 선교 양종의 구분도 없어져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는 초토화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다.
참고로, 오교는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에는 법상종法相宗, 계율종戒律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으로 되어 있으며,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자은종慈恩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으로 되어 있다. <대각국사묘지명>과 『태종실록』에 나타난 종조宗祖는 법상종과 자은종은 진표(眞表, 8세기), 계율종과 총남종은 자장(慈藏, 7세기), 열반종과 시흥종은 보덕(普德, 7세기), 법상종과 중도종은 원효(元曉, 617~686), 원융종과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으로 되어 있다.
8)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진단학보, 『고달사지 발굴 그리고 전시』(여주군 향토사료관 발행) 각주 참조.
9)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일지사, 1991.
10) 삼문三門은 고려의 유학자 김군수金君綏가 지은 지눌스님의 비문에 등장하는 말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을 말한다. 이는 보조선의 수행법으로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성적등지문이라고 하고, 화엄사상을 도입해 원돈신해문을 세우고, 선지를 내세워 경절문
경절문을 세운다는 뜻이다.
11) 이능화李能和,『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과 이종익李鐘益,『조계중흥론曹溪中興論』 (퇴옹성철退翁性徹, 「태고종통론太古宗統論」『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인용).
12) 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百日法門』, 장경각. 성철 스님은 이 책에서 지눌의 사상이 저작에 따라 달라진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셨다.
13) 퇴옹성철退翁性徹, 「태고종통론太古宗統論」『한국불교의 법맥』, 장경각.
14) ‘불교영상’에서 나온『현대 고승열전 평전』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나라 임제종은 양기방회의 양기파와 황룡해남의 황룡파 중 양기파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양기파는 대혜종고의 대혜파와 호구소룡의 호구파로 갈라지는데, 그 중 호구파의 법맥을 받아온 고려 말 나옹을 거쳐 청허를 주류로 내려오다가 한동안 암흑기를 보낸 뒤, 근세 경허(鏡虛: 1849~1912)에 이르러 다시 문풍을 진작시키게 된다.
15) 경허 스님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셨지만 이후 “나로서 용암 장노의 법을 이어 그 도통을 정리하고, 만화 강사로써 나의 수업사를 삼음이 옳다”하면서 청허의 12대손이며 환성의 8세손이라고 법맥을 정리하셨다.
16) 서재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60.
17) 한상길, 「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앞의 책, p. 53.
18) 류승주, 「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 불교」앞의 책.
19) 서재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강석주 외,『불교 근세 백년』, 민족사 (2002).
20) ‘승니 도성출입 해금’에 대해 일본 승려 사노의 활약이라는 설과 내무 대신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해제 된 후에도 완전히 철폐된 것은 몇 년 후로 이능화는 단발이 보편화되면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구별이 모호해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금은 사노의 건의와 개화파의 결정으로 단행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상황의 변화, 개화파와 연결된 불교계의 자각, 기독교의 팽창에 대한 한일 불교계의 위기의식, 유교적 정치이념의 쇠퇴, 외세에 맞서 불교를 신장시키고자 했던 조정의 의지, 민권의식의 향상 등과 같은 복잡한 인과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재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92).
21) 당시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서구열강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독립을 보존하고 동양의 평화와 질서를 아시아인 스스로 확립하자는 '아시아 연대론'이 대두 되고 있었다.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 삼국 중 한 나라가 망하면 다른 나라의 존립도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불교라는 종교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국가가 힘을 합쳐 서구열강과 그들의 기독교에 맞서야 한다는 연대론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구 열강을 등에 업고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연대론은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일본불교계의 조선포교가 정치적 목적뿐 만 아니라 조선 불교의 발전을 도모한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또 서구세력과 기독교에 맞서기위한 종교적 연대감 때문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서재영, 「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
22) 청담스님도 일본 병고현 송운사에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하였다.
23) 조계종은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조계산에서 이름을 따 조계종이라 하였는데, 원래 불교 선종 교종 종파와는 관계없이 이름만 빌려온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과 함께 해방 후 혼란기 때 생긴 종파들이고 그때 등록된 단체이다. (김용옥,『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1989).
24) 충본극기沖本克己, 『새롭게 쓴 선종사』, p. 279.
첫댓글 족보까지 알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