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턱식은 순사 스타일
13회 - 김병기
시시한 연주회
2012년 8월 25일 서울 종로구 초동교회에서 황덕식 가곡 연주회가 있었다.
황덕식은 주로 부산과 경남에서 중등교사로 근무했다. 서울은 지인들이 적을 것 같아 순사 13회 동기 중에서 몇 사람은 스스로 참석했다. 나이들어 별로 하는 일이 없는 나는 한가하기 때문에 오후 5시 정각에 연주회장에 도착했다.
헌데 어안이 벙벙했다. 지하철 입구에서 부터 안내문이 붙어있고 교회 정문에는 화려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이 통례인데 어느곳에도 아무 것도 없었다.
연주회장을 잘못 찾아왔나 싶을 정도로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2층 난곡홀이라는 곳을 들어가 보니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청중들이 우글거려야 하는 연주회장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낭패스러움을 넘어 황당했다.
황덕식이 순사 13회 동기동창을 공식적으로 초청하지 않은 이유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기 때문이 아닌가 유추되었다.
시골 간이역 전에서 하는 군의원 후보자 선거유세처럼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의자에는 청중이 70여명 앉아 있었다.
아무리 튀겨잡어도 90명이나 100을 넘지 않아 읍단위 유치원의 학예회 같은 풍경이었다.
출입구부터 즐비했어야 하는 큼직한 화환과 축하 화분이 하나도 없고 연단을 꽉 메꾸어야 할 악단들도 없었다.
행사 팜프렛도 부족하여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팜프렛을 목을 빼고 곁눈질해서 구경해야 할 형편이었다.
연락했던 순사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안도되었다.
연주회의 내용은 황덕식이 작곡한 노래를 한사람씩 나와서 부르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여자들이 많았고 맛이 가버린 것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었다.
그래도 입은 옷만은 모두 그럴 듯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무대복을 입었고,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파여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할때는 두손으로 가슴을 가려야 했다.
등짝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바라보는 남성들이 숨을 죽이게 했다.
하지만 노래가 끝날 때마다 치는 박수만은 참으로 요란했다. 선거 유세장에 동원 된 박수부대처럼 무대뽀로 치는 것 같았지만
'잘한다' '앵콜'등의 추임새를 넣어가며 소리지르는 것으로 보아 땡무식자들은 아닌것 같았다.
처음부터 청중들의 모양새가 좀 기이했다. 남자들은 머리를 빗지 않아 노숙자처럼 더부룩한 사람이 많았고 세계 3대 테너의 파바로티처럼 수염을 길렀으며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미화원같기도 하고 천주교 추기경 같기도 한 가운을 입었으며 뒷머리는 대개 꽁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 청중들은 진하게 화장을 해서 늙수구레한 얼굴을 지우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첼로 등 큼직한 악기를 든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요란스럽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서로 친숙한 사이들로 보였다. 전문 음악인들로서 열광적인 한국 가곡 팬들이었다.
순천 스타일. 순사 스타일
아무리 크래식이라 하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무료했다. 더구나 사범학교 입학 전부터
가는 귀가 먹은 나는 20년 전부터 보청기를 끼고 있는데 그날 따라 습도가 높았다. (보청기와 습기는 상극)
나는 또 1998년 부터 틀니를 끼고 있다. 때문에 노래는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큰소리로 말을 하면 틀니가 튀어나올까 봐 입을 앙당물고 건성으로 박수를 치다보니 너무 지루했다.
우리, 아니 남자들이 순수읍악이든 대중음악이든 음악회에 갈 때는 여성 출연자를 보는 것이 큰 재미의 하나다. 이효리나 아이돌 가수들이 가랭이를 쩍쩍 벌리며 춤을 추고, 돌아서서 엉덩이를 살살 흔드는 것을 볼 때마다 고해 같은 인생살이가 카타르시스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언제부터 음악회에서 여자들은 웃통을 벗어제끼고 연주하며 꾈탱이를 벗고 노래하고, 남자들은 한여름에도 겹겹이 껴입은 정장을 하고 노래하는 전통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현명한 음악 관습이다.
패티 킴이나 소녀시대가 사루마다만 차고 출렁이는 몸매를 과시하며 노래하면 남자들이 침을 흘리면서도 박수를 치지만, 나훈아나 조영남이 훈도시만 걸치고 꾀벗은 몸을 흔들면서 '화개장터'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른다면 그 누가 박수를 치겠는가.
또 말이 나왔으니 덧 붙이지만, 예능이 강한 순사 여학생들은 참으로 노래를 잘하고 나이보다 훨씬 젊다. 여자 나이 70이 되면 거의 벌레 먹은 낙과처럼 쪼그라들어 버리 는데 순사 여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수 expo 에 다녀오면서 얇은 옷을 입은 여학생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13회 여학생은 물론 선후배 여학생들 모두 살결이 허옇고 중년 여성처럼 몸매가 피둥피둥 했다.
그것은 교사 자격증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했으며 연금을 받는 행운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격렬한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생존의 오디션을 치뤄야 하는 보통 사람들, 연금 없는
사람들의 고통 서린 몸매와는 확실히 달랐다. 아, 위대한 순사여, 거룩한 모교여, 예찬하지 않을 수 없구나.
연주회는 황덕식이 작곡한 30곡을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조촐하고 작은 음악회였다.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가 이야기 했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는 진한 여운에 휩싸이는 연주회였다.
50년 만에 보는 황덕식은 180cm가 넘는 꺽다리였다. 첫인상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연상되기도 했고 국회에서 책상 위를 날아다니는 통합 진보당의 강기갑 의원과 흡사 했으나 멋대가리 없는 안경을 걸친 것이 영락없는 시골 면사무소의 호적계장이였다.
이런 것들은 반 100년 세월의 무상함과 우리의 달라진 인생 유역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젊고 예쁜 여성들만 양쪽에 세우고 사진을 찍어대는 것은 분명히
순천 스타일이었고, 섹시하고 풍만한 여자들만 만나면 음험한 웃음을
계속 보내는 것은 역시 순사 스타일이었다.
운명을 작곡하는 키큰 유동나무
사범시절 황덕식은 뜃때반, 양철반이라고 놀렸던 악대반에서 나팔을 불었다. 황덕식이 불었던 나팔은 별로 무겁지 않은 뺏다 박았다 하는 '용개나팔'이었다. 악대반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뱀처럼 온몸을 감고 올라가는 거대하고 무거운 나팔을 부는 미련한 음악 노동자도 있었고 양 김흥식 처럼 큰 솥뚜껑 같은 것을 양손에 들고 있다가 클라이막스 때 한번 부딪치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약은 사람도 있었다. 콘닥이라고 불렀던 지휘자는 신영하 선생님의 4촌 동생 신우하가 맡았는데 지휘고 뭐고 할 것 없이 긴 막대기를 빙빙 돌리기만 하고 여학생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멋부리는 것이 지휘자의 전부였던 악대반이었다.
고향 하동 부근의 국민학교에 근무했던 황덕식은 검정고시를 통해 중등학교 음악교사가 된 후 맹렬한 작곡활동을 시작했다. 이십여년 전부터 작품이 유명 성악가들에게 불려지면서 황덕식이란 이름이 음악적 실체를 얻어 예술상품으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번 가곡 연주회는 50년의 음악인생을 한꺼번에 몰아 쓴 황덕식의 음악이력서 였다. 연주회는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았지만 예술성이 소용돌이치는 사무사(思無邪)의 장강(長江)이었다.
황덕식은 유명하다는 것과 유능하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청중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악기가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도 3분 남짓한 작품으로웅변하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목소리에는 황덕식의 혼이 서려 있지만 우리 사범시절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유서 깊은 교회에서 울려퍼진 황덕식의 음악 속에는 숭고한 신(神)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180cm의 키보다 더 큰 황덕식의 음악 성취도는 키 큰 유동림이 되었구나.
부끄럽지만 한국은 옹졸하기 짝이 없는 학력사회고 옹색하기 그지없는 연고사회다.
"나는 운명과 싸워 이길 것이다"고 소리치면서 청력 잃은 베토벤이 교향곡 '운명'을 작곡 했듯이 황덕식은 가난, 학력, 소외감 등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가면서 참회록을 쓰듯 재능하나로 자기의 운명을 작곡해 왔다. 그래서 한국의 유수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이 모든 것은, 예술의 신학기를 순사에서 맞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황덕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또 황덕식은 폐회의 인사말에서 오늘 이 자리가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이라고 감격했다.
전문가가 실명을 걸고 말할 때는 확신과 긍지가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인간은 100살을 못 살지만 황덕식의 작품은 영원히 불려질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금언이 순사의 이름으로 거증될 것이다.
국제적 언론매체로 우뚝 선 순사카페
황덕식의 가곡 연주회에 13회에서는 김소중 김병기 김순옥 송춘강 강춘지 등
다섯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음악대사전을 편찬한 김형주 선생의 동생인
김소중은 빼어난 배구 선수였을 뿐 아니라 풍금도 잘치는 음악 매니아였다.
사범시절 급장이었던 김소중은 학급 통솔보다는 여학생들 동정 파악하는데 노심초사 했으며 이번
연주회 참석때도 오로지 여자 중에 누가 오느냐가 관심사 였다. 그렇기에 연주회장에 제일 먼저 참석했고 여자 출연자만 나오면 코딱지가 튕겨나오도록 웃어제끼며, 가창력에 김소중은 백발의 청춘이며 노년의 소년이다.
사범 시절에 군계일학의 피아노 실력을 보였던 강춘지에 대해서는 딴곳에서 언급되어 있어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다른 여자 참석자 김순옥 송춘강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 할수가 없다.
이 글이 등재되는 재경순사 총동창회 카페는 4만 여개의 전국 고등학교 동창 클럽 중 1등을 하고 있으며 전국 초중고대학 동창 클럽 16만 여개 카페 중에서 4위를 하고 있다.
(본 카페 2012.9.1일 이홍기씨의 글, 번호 8391)
따라서 순사 동창회 카페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이미 세계적인 언론매체로 확실하게 정립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런 까무러치는 결과가 나오도록 순사 카페를 키우는 데는 창설자 이장로와
전문 경영인이나 편집인이라 할 수 있는 김순옥 이경자 송춘강 이홍기
네사람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사이버 세상을 전혀 모르는 컴무식자라거나 순사 출신이라도 동창회 카페에 참여하지 않은 동문만이, 아니 참여하더라도 관심이 덜한 동문만이, 우리의 재경순사 카페가 국제적 언론 매체로 우뚝 선 사실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자랑스럽고, 부끄럽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는 데는 무한대의 이 인터넷 공간도
오히려 협소하구나.
여자(女子)는 만들어진다.
대처나 메르켈 같은 외국 여걸이나 한명숙 박근혜 등 국내의 여성지도자를 보면서 우리는 순사가 키워낸 알파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70이 넘은 김순옥 이경자 송춘강은 50년 전에 폐교된 지방 실업학교의 동창회 가페를 디지털미디어의 세계적 소통도구로 육성시켰다.
이것은, 아니 그것은, 흘러간 물로도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다는 21세기의 기적으로
문명사적 초과학 인 것이다.
능력을 열정으로 발효시킨 긍정적 사고의 제도화이기도 하다.
또한 80을 바라보는 늙은 여자들도 남편에게 잔소리 하는 것 말고도 할일이
많다는 것을 전세계에 선포하는 할머니 doctrine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던가.
김순옥은 광양의 국민학교 시절, 부반장까지 했던 재원이었으며
이경자는 구례중학교 시절에 구례 농고생이 두사람이나 졸졸 따라다니며 열렬히 구애하였으나
눈도 거들떠 보지 않을 만큼 콧대가 셋으며,
송춘강은 벌교 중학교 2학년에서 수준이 약간
떨어진 광양중학교 (이장로 정진 재학중이었음) 3학년으로 월반한 수재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순사의 대표적 알파걸 세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싹이 파랗던 것'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순사카페는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는 보도매체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기록해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이번 뜻 깊은 황덕식 가곡연주회에서 여자 출연자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렇지만 만약
나이를 거꾸로 뱉어가는, 아직도 탱탱한 몸매의 김순옥 송춘강이 웃통을 벗어제끼고
온몸을 흔들면서 한곡 뽑았다면, 전 청중이 기립박수 치는 사태가 나타났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브라함 링컨이 그랬던가.
"40 넘으면 자기 얼굴과 몸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아, 또 어떤 똑똑한 여자는 말했지
"여자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송춘강:
김병기씨!
제목부터 멋있는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귀, 치아까지 안 좋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글 쓰는
재주와 기억력을 주셨으니 역시 신은 공평하신 분이시네요.
'황덕식 음악회'갈 때 꽃다발을 가져가야겠디고 생각했는데
늦어서 찾아가는 길만 신경쓰다 보니 깜박했습니다.
도착해서는 음악에 심취 되 또 깜박했습니다
몹시 아쉬웠습니다.그리고 미안했습니다.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건강 하십시오.
이경자:
김병기씨, 몸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필력은 누구 못지않게 예리하고 훌륭합니다.
녹슬지 않은 병기님의 필력이 오래오래
우리 순사카페의 위상을 놉혀주리라 믿습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세요.
김병기:
경자,잃어버린 계절이 잊혀지지 않은 것은 누구 때문일까.
50년 전 혼자 써놓고 못나서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나는 지금도 마음 밑에
눌려 두고 있는데,
그대 우리 앞에 싸이의 말춤을 추며 건강하게 나타났을 때,
나는 심장에서 끄집어낸 그 편지를 이제라도 전해야겠네.
여러 친구들의 그리움과 수줍음을 함께 담아서.
김순옥:
김병기, 내가 부반장했다고 누가?
나 반장만 했는데, 올려주기는 커녕 깎아내리지 말기요. ㅎㅎㅎ
사람을 울렸다 웃겼다. 재주도 좋군.어찌되었거나 그대의 필력엔 늘 감탄....!
그대의 수고로 그나마 음악회장이 쓸쓸하지 않았던 것 고맙게 생각했어요.
댓글에서 보듯 황덕식도 그 점 고마워하는 눈치가 역역하던걸!
의리의 싸나이들 소중이 병기, 보기좋았어요. 그리고 글 재밌네요
볼거리쪽으로 옮겨드립니다.
김병기:
노골적으로 말하면,순사시절 김순옥씨는 우리들 좀 노는 13회 남학생들의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다.
뜀박질을 잘했다거나 창가를 간들어지게 잘 불렸다는 이야기는 '취중진담'이거나
늙어서야 털어놓은 '야담과 실화'류 일 뿐이다.
사범졸업앨범을 보니 김순옥씨는 무척 사색적이고 우수에 젖어 있는 포즈다.
당연하다. 남학생들의 관심권 밖에 있었으니 얼마나 고독했겠는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아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김순옥씨는 이런시를 되뇌면서 '비탄의 강'을 건넜으리라.(김순옥은 여린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김순옥씨여, 세월은 흘렸다.
진부하지만 그데에게 딱 들어 맞는 말 이 있다. 대기만성.
그대는 지금 학습력이 탁월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일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대는 지금 stone henge 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큰바위 얼굴이 되었다.
이홍기:
김 선배님! 뛰어난 글재주를 사장시키지 마시고
자주 자주 동문 카페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세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현력과 독특한 위트는
많은 분들에게 젊음과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묘약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병기:
이홍기씨의 전성시대를 언제로 봐야 할까.
남들이 부려워 했던 파리 총국장 시절일까. 도단위 기관장을 했던 광주 방송국장
시대일까.
그렇지만 한국 최고 인터넷 미디어의 거시지표를 그려가는 지금도 그때 못지 않는
황금기 아닐까.
아니 제3 ,제4의 황금기를 창출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오늘이 더욱 뜻깊은 창조의
새벽이 아닐까.
나도 순사 여학생들을 몸살나게 했던 사범 시절이 제1차 전성기였기에
제2차 전성시대를 위해 자전거를 배우고,풍금을 배우고,이글을 내손으로 올릴 수 있는
워드 작업을 배워서 이장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려고 하오.
김순옥,이경자,송춘강 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려고 하오.
이번 추석에 몇번이나 다짐했오.
박달순:
김병기씨!
"황덕식은 순사 스타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저는 오히려 이글은 "김병기 스타일"이라는 생긱을 했습니다.
재치있고 유머가 있으면서도 연주회에서 있었던 모든 상황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글의 내용을 읽는 동안
저절로 미소가 떠나지 않은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황덕식 음악발표회[작곡] 소식 전해 주었는데 참석하지 못한점 미안해요.
좋은 글솜씨 녹슬지 않게 기회닿는 대로 여러 곳에 투고도 하여
재능을 꽃피워 보시기 바랍니다.
김병기:
돼지 쌍판보고 잡아먹지 않듯이, 박달순이란 촌스런 이름을 갖고도 '이풍진 세상'을
헤엄치는 데는 큰지장이 없었다는 것이 요즘 증명되고 있다.
전에도 말한일이 있지만 박달순씨의 글을 보면 감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정제된 언어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놀랄 때가 많습니다.
순사 시절, 법원 광장에 모여 공식 집회를 할 때,
할말은 다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연설하던 박 순천시장의 모습이 연상 되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니 이름은 유치하지만 '박달순은 역시 시장 딸 스타일'이다.
아니다. 이런 무림의 고수가 된 데는 어렸을 떄 보성북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엄혹한
내공을 쌓았던 결과 일 것이다.
김진영:
반가워요. 역시 김병기다운 멋진 글 잘 읽었네요.
저로서는 혹시나 오해를 받을까 싶어서 감히 함부로 쓸 수 없는 내용도
머뭇거리지 않고 서슴없이 쓸 수 있는 김병기의 배짱이 부럽기까지 하네요.
황덕식 작품발표회에 김병기가 함께 간 사진을 보고
김병기가 음악에 대하여 무엇을 안다고 거기에 갔을까 했더니
이런 멋진 글을 쓰기 위해서 갔던 것 같군요.
동문들과 동기들에게 공감을 주는 좋은 내용의 멋진 글 자주 올리세요. 보청기, 틀니
조심하구요.
김병기:
내가 무안군(당시) 하의도에서 교사 생활을 할 떄 '양성' 했던 제자들은 지금도 나의
음악수업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한다.
"바다 건너 저곳에서 우리꿈을 펼치자"는 하의 국민학교의 교가를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부르게 했으며, 2학년 담임 이었지만 졸업식 노래를 개사 한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서울'서 만나세" 를 날마다 부르게 했다.
제1회 소파상을 받았다는 고연욱이라는 교장(서울로 진출해서 교장 근무 했음)은
"김선생 미쳤오. 음악시간에만 노래를 부르게 해!풍금치며 교과서대로 가르쳐야지
아무 노래나 하루내내 불러자치면 옆 교실은 어떻게 공부할 것이요" 이렇게 수 없이
질책했다.
아,나의 음악사랑은 무당의 작두사랑보다 더 엄숙하고 치열 했다.
나는 콩나무 대가리는 볼 줄 모르지만 어린 섬소년 소녀들의 꿈과 소망을 볼줄 알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