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분쟁은 축의 이동
교회의 분쟁은 축의 이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었던 장로들은 후임목사의 지지를 통해 교회내 중심세력으로서 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다 보니 원로지지파 장로들은 자연히 주변으로 밀려난다. 결국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 원로의 힘의 축이 주변으로, 후임의 축이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후임의 축이 정치적인 축으로 중심이 되었다면 오래가지 못하고 흔들리고 만다. 이러한 축이 흔들리는 것은 결국 후임목사의 자질 부족때문에 기인한다. 처음부터 원로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원로의 섭정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로의 섭정을 알아 챈 후임들은 오자마자 원로에 대해서 드라이브를 건다. 원로의 등살에 못사니 원로의 약점을 건드려 원로의 입김을 차단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착한 원로에 대해서도 후임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드라이브를 거는 악한 후임목사들도 있다.
후임목사의 자질부족
후임으로 온 목사들은 악한 원로이든 선한 원로이든 원로의 지대한 도움에 힘입어 오게 된다. 원로들이 섭정을 하기 위해 약한 후임을 데려온 경우도 더러 있다. 대체로 하나님은 원로의 그러한 의도를 알아채고 원로가 잘못 선택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원로가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목사가 오게되어 원로를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를 떠나도 그 교회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원로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원로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후임목사도 원로처럼 인위적인 방식으로 원로에 대해 대항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되는 셈이다. 대부분이 섭정을 시도하려했던 원로들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후임으로 청한다. 결국 후임자는 원로가 행한 것 만큼 잘하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창조하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실제로 10,000여명 이상 교회를 만든 사람들은 종교 천재들 이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다.
따라서 축의 변동으로 인해 오는 갈등도 있지만 대체로 교회분쟁은 후임목사 자질과 윤리의식, 설교, 리더십, 당회원과의 인화관계 등의 부족에 기인한다.
후임의 착각
후임목사는 전임이 평생 가꾸어 놓은 것을 짧은 시간에 물려받아 그 기득권을 누린다. 그러다보니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인물처럼 여긴다. 거지가 왕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처럼 한번도 대형교회를 담임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갑자기 맡게되면 뭇사람들이 떠받드는 탓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신의 측근들만 챙기게 되고, 설교시 성도들이 아멘하고 경청하니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등극한 것으로 착각을 한다.
설교단에서는 영적 인간, 단밑에서는 정치적 인간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대체로 정치적인 힘의 행사를 하게된다. 활동범위를 넓히고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하기도 하고, 자신을 보위할 측근을 만들기 시작한다. 심하면 대구 H교회 목사처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가리지 않고 출교, 제명 처분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하다보니 고소고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며,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게 되고,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하기도 한다. 영적 인간이 정치적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설교할 때는 영적 인간인데 설교단에서 내려오면 정치적 인간으로 변한다.
전임이 대형교회를 이루기까지는 눈물젖은 빵을 먹고, 6.25전쟁으로 인한 생사의 고투와 삶이 반영된 영성이 뒷받침되어 오늘의 교회를 이루었다. 그들은 삶의 노래를 통한 영성을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임자들은 노력없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호박은 더 익혀야 할 설익은 호박이었다.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후임은 오자마자 전임이 받던 억대 연봉, 고급 승용차, 평생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막강한 판공비, 고급주택이나 호화아파트 등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니 마치 전임목사(원로)인 것 처람 착각을 하게된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목사의 말 한마디면 움직이기 때문에 전임목사의 권위가 있는 것 처럼 착각을 한다.
장로들의 항거
신혼기간이 지나면 장로들과 성도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후임목사의 도가 지나치면 대들게 되는 것이다. 후임목사는 자신의 입지와 지위에 대해서 착각을 했던 것이다. 감히 당회원들이나 성도들이 대들지를 몰랐다. 후임목사가 오정현 목사처럼 교회를 더 성장시킨다면 설교가 부족하든지, 다른 요소들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냥 넘어간다.
후임의 버티기 한판
그러나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거나 설교나 영성, 윤리가 부족하면 교인들의 불만은 봇물터지듯 터지기 시작한다. 먼저 당회부터 그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당회원들은 쓸데 없는 이유를 갖고서 시비를 걸어온다. 선천적으로 못된 당회원도 있지만 대체로는 목사의 비상식적인 목회에 대해서 거부하게 된다. 그러면 목회하기가 사실상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계속 버티고 있다면 본인과 교회만 힘들게 된다.
후임자가 계속 버티기 위해서는 영적인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 앉은뱅이를 고치던가, 한번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감동을 한다거나, 교인이 매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거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해야한다. 단지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는 본인과 교회만 힘들게 된다. 여수 S교회 목사도 버티다 버티다 최근 당회의 압박에 그만두게 되었다. 타교회는 성장하는데 S교회만이 정체나 답보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임의 위기탈출의 정치적 전략
그러다보면 대형교회 후임목사들은 인간적인 수로서 정치적인 속셈을 하게된다. 자신의 측근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전위부대를 만든다. 당회를 장악하거나 식물당회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죽는 방법이다. 오래가지 못한다. 교인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심령도 파괴되어 결국 교회는 정체나 답보상태 아니면 퇴락상태로 남게 된다. 목사 혼자만 유익을 얻고 있다. 교회는 담임목사의 반대파들만 양산하게 된다.
보통 대형교회의 후임목사는 영적으로 대처하는 것보다 후임반대파를 대처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술수를 사용한다. 정치적인 방법을 택하면 자기 지지세는 확보하지만 교회가 죽게 된다.
후임목사, 퇴각은 없다, 버티기 한판이 최선
대부분 대형교회에서 교회분쟁이 생기면 마음을 비운 목회자를 찾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울 확률보다도 적다. 끝까지 자기 지지세를 확보하고 반대파를 제압하려만하지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다. 교회가 박살이 나도 안물러선다. 그들의 사전에는 후퇴는 없고 버티기 한판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안에는 영성이 없고 정치만 남아있기 때문에 설교는 하되 자신에게는 신앙이 없다. 얼굴은 철면피로 무장을 한다. 수치심도 창피한 것도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후안무치로 변한다.
신앙은 자신을 비우고 희생을 각오하는 것인데 교회와 성도들의 희생만 강요하고 자신은 복지만을 누리려 한다. 이는 홍수에 마실물이 없듯이 홍수목사시대에 생수목사가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명예와 물질, 권위, 자존심을 버릴만한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교회와 기독교가 고난을 당한다. 더군다나 억대 연봉을 받는 대교회에서 희생자의 목사를 찾기란 임영수목사 이외에 찾기 어렵다. 그는 영락교회, 주님의 교회도 다 버리고 별소득없는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우리시대의 불행은 작은 임영수목사가 없는 것이다.
후임의 정치적 접근 교회가 파행으로 치달아
대형교회에서 교회분쟁이 생기면 임목사처럼 버리고 산속으로 가든가 자신의 심령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즉 영성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대부분이 정치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과 교회가 갈등구조로 파괴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목사들의 이기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측근정치를 하고, 원로반대파를 결성하고 영성보다도 정치적으로 일을 해결하려 한다. 원로는 후임흔들기를 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성도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후임반대파의 지지세 결집
이러다 보니 원로파는 담임반대파가 되어 세를 결집하고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하면서 예비군의 노래를 부르면서 세를 결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임목사 지지파들이 이구동성을 하는 얘기들은 “세워놨으면 그만이지 왜 흔드냐”는 것이다. “원로도 은퇴했으면 그만이지 왜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이다. 그리고 “자신이 데려왔으면 지지를 해주어야지, 왜 내칠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소망교회와 광성교회는 유사한 형태이다.
후임은 적어도 3년은 인내를 해야
그러나 대다수 시각은 후임의 리더십을 지적한다. 온지 3년이 안되어서 원로와 갈등을 일으킨 것은 후임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원로가 흔들더라도 3년을 못참느냐는 것이다. 3년만 잘 버티면 원로의 욕망은 드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신임목사를 지켜준다는 것이다. 3년만 원로를 잘 섬기고 교회를 무리 없이 끌어나가면 될 텐데 너무 일찍 원로에 대해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원로파가 자동적으로 약화될텐데 그것을 못 참았다는 것이다.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못된 원로들도 많이 있다. 시카고에 있는 가나안장로교회처럼 원로가 끝까지 기득권을 쥐는 것이다. 이러한 원로들은 과감히 퇴출되어야 한다. 후임을 세워놓고 별 하자가 없는데 후임을 흔드는 원로들은 교인들이 합세해서라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원로에 대해 미리 드라이브를 걸었던 대부분의후임목사들은 교회 분란을 발생시키거나 자신의 입지약화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된다.
후임목사들 실권 약해져, 인사권 없어
후임자는 대부분이 자신의 사람들을 심기 위해 자신의 부목사들을 추천한다. 그래서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 채운다. 그러나 후임자의 리더십이 약화되면 인사권을 당회에게 빼앗기게 된다.
소망교회는 담임목사의 부목사에 대한 추천이 좌절되었다. 이는 김목사의 목회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문안교회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새문안교회도 부목사에 대한 담임목사의 인사권이 없다. 점점 대형교회가 세대교체하면서 당회가 그간 담임목사가 했던 일을 대신 하게 된다. 1세대의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지나고 2세대로 오면서 지도력을 상실한 담임목사들은 점점 실권을 당회에 넘겨주게 된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분쟁을 보면 차세대 목사가 1세대 목사들이 행했던 리더십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고, 당회는 그간 눌려있었다가 새로운 후임을 맞이하면서 당회가 목회자의 실권을 가져가고 있다.
후임목사의 돌파구
우리 교계에서 원로와 갈등을 일으키는 후임목사들이 싸움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원로보다 윤리적으로 앞서고, 영적으로 더 투철하게 무장되고, 재정과 행정에 있어서 투명해야 하며, 계보를 형성하지 않고, 사소한 약점을 노출시켜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하며, 교인들로부터 영적인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 자신만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부목사와 당회원들로 인한 계보정치는 또 다른 갈등만 양성할 뿐이다.
후임목사 당회장악은 정치가 아니라 영성으로
후임목사는 교인뿐만 아니라 대의정치의 일환인 당회(국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국정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장로교 정치에서 목사가 당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목회는 계속 어려운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당회를 장악하지 못한 후임목사의 탈출구는 영적으로 교인들이라도 장악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당회도 장악하게 된다. 처음부터 정치적으로 당회를 장악하려다 보니 당회도 장악하지 못하게 되고, 교인들도 장악하지 못하게 된다.
목사가 교회를 정치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한계이다. 목사는 당회원들과 교인들에게 설교와 기도, 삶으로 감화를 주어서 영적으로 장악해야 한다. 그것은 원로목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이다. 원로가 흔들어도 하나님 앞에 굳건하면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미친척 하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원로를 흔들고 후임편을 들어준다. 살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사는 단순한 논리이다.
후임목사, 하나님보다 원로를 두려워 해
이성곤 목사 역시 무리수만 쓰지 않았더라도 예장 통합에서 제명당하지 않고 목회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광성교회를 송두리째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면직목사로서 반토막만 장악했다. 원로에 의해서 흔들린 것이 아니라 원로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스스로 흔들린 것이다. 원로를 주적으로만 하다 보니 결국 원로의 영이 면직으로 몰고갔던 것이다. 그러나 원로는 실제의 적이 아니라 가상의 적이었다. 이목사가 스스로 두려워 한 것이다.
이는 이목사가 영적인 수가 아니라 정치적인 무리수를 썼기 때문에 면직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스스로 자충수를 둔 것이다. 신앙적으로 당당한 후임은 원로가 흔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원로가 흔들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같이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원로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으면 원로가 흔들리게 된다.
후임이 사는 길은 원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싸워야 해
자신의 실수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갖고, 원로에게 무조건 과녁을 겨누어서는 안된다. 흔드는 원로, 못된 원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원로한테 흔들리는 후임이 문제이다. 신앙이 흔들리기 때문에 원로한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처방안으로서 계보 만들기를 하고 무리수를 쓰는 것이다.
즉 영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후임이 살아날 길은 영성으로 가야한다. 측근들은 정치를 영성으로 착각하게 되고, 신앙으로 받들어야 하는데 감정적 열심으로만 받들고,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하는데 의리와 감정에 가려 선악분별과 영분별이 잘 안된다. 이미 신앙의 형식을 띤 감정, 의리, 인간적 속성, 기득권, 주도권의 내용물이 침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하면 목사를 앞세우고 이면에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서로 소문을 만들어내고 선입견을 만들어 상대방을 타켓으로 한다. 이것이 대형교회들의 현주소이다. 한국교회는 어디를 가나 그 분쟁양상이 비슷하다.
교인들, 영분별 할 필요가 있어
그러므로 원로와 후임간의 알력과 갈등이 있는 교회에서 후임목사, 부목사, 장로들은 어떤 계보나 계파, 기득권, 현실적 속셈, 정치적 술수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진리의 기준,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서 바른 정신과 판단을 갖고서 움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후임지지파나 원로지지파, 후임반대파들도 모두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의 영적 분별을 해야한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지 인간의 영이 역사하는 지를 말이다. 영분별은 행함과 절차준수, 상식적인 판단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전두한이 대장임직받을 때 "내가 대장이 된 것은 인사법상으로나 절차상으로 불법이었다"고 했다.
후임목사, 원로가 흔들더라도 흔들리지 않으면 결국 원로가 흔들려
결론적으로 후임목사들은 원로로 인해 흔들리지를 말고, 흔들린다면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며, 신앙이 굳건하면 오히려 흔드는 원로가 흔들린다는 것을 명심해서 원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흔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무리수를 쓰지않고 꾸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간다면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를 영성으로 극복해야지 상대방이 정치를 구사한다고 더 단수높은 정치를 구사한다면 목사의 수명은 짧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영성
예수는 정치에 의해서 희생당하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정치로 맞서지 않고 부활이라는 영성으로 맞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예수는 자신이 한 말처럼 죽으면 산다라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후임목사는 이러한 예수의 영성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예능교회의 조건회 목사는 원로를 등에 업으면 업는 사람 마음대로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돌아가신 김기수목사는 평생 부목사 자세로서 원로목사를 모셨다고 했다. 후임이 살아야 원로도 살고 교회도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