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덕운(德運) (사학징의 p.148~150) * 토마스, 福者
포청초 : 저는 본래 홍주(洪州) 사람입니다. 경술년(1790) 10월에 진산(珍山) 윤지충의 집에 갔다가 십계를 처음으로 배웠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미혹되었습니다. 작년 10월에 광주(廣州) 의일리(義一里)로 옮겨가 살면서, 교중의 동정을 탐문하려고 지난 3월에 사기 그릇을 지고서 상경하였습니다. 길에서 빈 가마니에 시신을 싼 것을 만나, 누구의 시체냐고 물어보니, 곁에 있던 사람이 홍낙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 서로를 아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는 너무 놀라고 참담하여 그 원통한 죽음을 조문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그 아들 홍재영(洪梓榮)의 무리가 배교하였다고 하므로,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따라서 같지 죽지 않은 것을 준절히 꾸짖고는 서소문 밖으로 가서 최필제의 시신을 염습하였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결코 배교할 마음이 없고, 다만 속히 죽기를 원하는 것 외에는 달리 드릴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형추문목 : 너는 윤지충에게 수학했고, 주문모에게서 세례를 받아, 요서에 깊이 빠져 죽더라도 변치 않겠다고 했다. 감히 홍낙민이 사형을 당한 뒤에 멋대로 시체에게 가서 조문하였고, 홍재영의 배교를 준절하게 나무랐다.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사술을 깊이 믿어 흉악한 무리와 체결한 앞뒤 정황을 감히 숨겨 감추지 말고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렸다.
승관초 : 저는 본래 홍주 사람으로, 경술년(1790)에 진산의 윤지충에게서 사서를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비록 세례는 받았지만 사호를 받지는 못하였고, 여러 해 동안 사서에 깊이 홀려, 밤낮으로 강습하였습니다. 작년 10월에 광주 의일리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금년 3월에 같은 무리들의 동정을 탐지해보려고 사기 그릇을 등에 지고 상경하다가, 일이 청파(靑坡)를 지날 때 싸여 있는 시신 하나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시체냐고 묻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홍낙민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무리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 말을 듣고는 몹시 놀라고 참담하여 그 시신을 조문하였습니다. 그 아들 홍재영이 배교했단 말을 듣고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과연 그가 아비를 따라 함께 죽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소문 밖으로 가서 최필제의 염습한 시신을 찾아냈습니다. 주문모에 이르러서는, 제가 평생 한번 보기를 원했지만 서로 만나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윤지충이 사형을 당한 뒤에도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 않고 사서에 더욱 미혹되어, 심지어 사형을 당해 죽은 홍낙민을 조문하여 곡하고, 최필제의 염습한 시신을 찾아냈으며, 바른 길로 돌아온 홍재영을 도리어 꾸짖었으니, 이는 제가 요사스런 말을 깊이 믿어 바른 도리로 여긴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제 비록 형벌에 임하였으나, 어찌 등져서 버릴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속히 죽기를 원합니다.
결안초 : 윤지충에게서 사서를 배워 밤낮으로 강습하여 여러 해 동안 미혹되었습니다. 윤지충이 사형을 당한 뒤에도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길에서 홍낙민을 조문하였고, 최필제를 찾아 염하였으며, 홍재영의 배교를 도리어 꾸짖었으니, 이는 제가 요언을 몹시 믿어 바른 도리로 안 까닭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제 비록 형벌에 임하였으나, 어찌 바꿔 고칠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빨리 죽기만을 원합니다.
32. 홍인(洪鏔) (사학징의 P.150~152) * 레오, 福者
포청초 : 저는 포천 땅에 살고 있습니다. 금년 2월에 사학으로 포천 감옥에 갇혔다가, 경기 감영으로 압송되어 왔고, 포청에 옮겨 수감되었습니다. 저는 홍교만(洪敎萬)의 아들로, 신해년(1791)에 아비의 가르침을 곁에서 듣다가 따라 배워 깊이 미혹되었습니다. 제 아비가 사형을 당해 죽은 뒤에는 사학에 대한 이야기만 들으면 마음이 놀라고 뼈가 떨려서 실제로 영원히 버려 원수처럼 보았습니다. 황사영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삼촌인 황석필(黃錫弼)과 전에 이미 친숙하였기 때문에 작년에 한번 보았을 뿐이고, 그 뒤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홍익만은 저의 서오촌숙(庶五寸叔)으로, 본래 양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0년 전에 상경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 또한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저희 부자와 함께 여러 차례 주문모가 첨례하는 자리에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체포령이 떨어진 뒤에는 각자 흩어졌으므로 간 곳은 알지 못합니다. 이 밖에는 달리 더 아뢸 말이 없습니다.
형추문목 : 너는 홍교만의 아들이자 홍익만의 조카로, 요서를 몹시 믿어, 집안의 일로 삼았다. 서울과 지방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밤낮으로 어지러이 헤아려 애쓴 것은 지극히 흉악하고 몹시 패악스런 계획이 아님이 없었다. 주문모의 첨례에 같이 참석하고, 황사영의 종적을 가리워 숨긴 정황이 남김 없이 탄로 났으니, 이제 엄한 신문 아래 혹여라도 꾸며 둘러대지 말고 하나하나 바른대로 고하렸다.
승관초 : 저는 포천 땅에 살면서, 아비를 따라 사서를 배워, 여러 해 동안 깊이 미혹되었습니다. 금년 2월에 본현에 갇혔다가 포청으로 이송되어 갇힌 채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깊이 빠진 까닭에 능히 바르게 간할 수 없었고, 제 아비가 마침내 사형을 당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저의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연전에 주문모가 사학을 강론하는 자리에 같이 참석하였다고 한 것은 비록 제가 한 말은 아니지만, 홍교만이 아비가 되고, 황사영을 벗으로 삼았으니 어찌 사형을 면하겠습니까?
결안초 : 저는 사학에 깊이 빠져 여러 해 동안 깊이 미혹되었습니다. 아비가 전하고 아들은 익혀, 미혹된 고집을 바꾸지 않다가 감영과 고을에 체포되어 포청으로 이송되어 갇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종숙되는 홍익만을 통해 흉악한 역적 황사영과 사귐을 맺어, 작당하여 뒤얽혔다고 세상이 지목한 바가 되었으니, 저의 죄상은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33. 권상문(權相問) (사학지의 P.152~154) * 세바스티아노, 福者
포청초 : 저는 양근의 한강포(寒江浦)에 살고, 과거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 생부인 권일신이 살아있을 때 사서에 깊이 미혹된 까닭에 곁에서 듣다가 따라 배워, 또한 점차 미혹되었습니다. 신해년(1791) 11월에 제 생부께서 형조에 붙잡혀 들어가 여러 달 갇혀 있다가 한 차례 형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미처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서울에서 죽은지라, 저는 마음이 떨리고 뼈가 서늘하여 사학을 버리고 감화되어 정도로 돌아왔습니다.
을묘년(1795) 봄에 주문모가 와서 한 집에 머물고 있다가 전주로 옮겨 간다는 말을 듣고는 제가 여전히 예전을 잊지 못하는 뜻이 있다 보니, 발을 싸매고 가서 만나보고 의심나고 어두운 부분을 강론하였습니다. 사호는 애초에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또한 이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문모가 전라도로 내려 갈 때, 서울에 사는 사학 괴수 최인길과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과, 지방에 사는 사학의 무리인 윤유일, 이존창 등이 한 마음으로 데려 갔는데, 저는 제 집으로 도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한 무리는 이웃에 사는 김원숭(金源崇)과 조동섬(趙東暹), 윤유일, 윤유오(尹有五) 형제, 이준신(李俊新) 등으로, 평상시에 종종 서로 모여 강론하며 연마하였습니다. 주문모가 상경한 뒤 장차 다시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주문모가 머물러 있는 곳을 자세히 알 수 없어서 윤유일의 아비에게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을묘년(1795)에 지황과 윤유일과 최인길 등이 주문모를 데리고 달아나고는, 자취를 감추고 종적을 비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황사영은 저와는 집안으로 의리가 있어서, 경술년(1790)에 황사영이 진사가 되었을 때 한 차례 가서 보았고, 계축년(1793)에 제가 상중에 있을 때 또한 와서 조문하였으나, 그 뒤로는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제 양부인 권철신이 사학으로 이번에 사형을 당해 죽었고, 생부인 권일신은 또 형벌을 받다가 죽음에 이르렀으니, 마음을 고치고 뜻을 바꾸는 것이 사람의 떳떳한 정리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뉘우쳐 깨닫지 못하고 깊이 미혹된 것은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작년 6월에 본 고을에서 사학하는 무리를 체포할 때 저 또한 갇히게 되었고, 올 2월에 여러 죄수를 함께 경기감영으로 잡아 올릴 때 저도 같이 잡혀 와서 네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습니다. 지금 3월에 본군으로 다시 내려가서 세 차례 형벌을 받았고, 4월초에 감영에 다시 올라왔다가 또 포청에 옮겨와 갇혔습니다. 모두 사학의 소굴 중 한 죄인입니다.
형추문목 : 너는 권일신, 권철신을 아비로 삼고, 이존창과 황사영을 한 무리로 삼았으며, 사학 괴수 주문모에게서 세례를 받고 사호를 받았다. 앞뒤로 강습한 것은 윤리를 없애고 하늘의 상도를 끊는 서화(書畫)가 아님이 없었고, 밤낮으로 헤아려 연마한 것은 모두 도당을 널리 퍼뜨릴 계획 뿐이었다. 본 군(郡)에서 체포될 때 증거가 다 드러났고, 포청에서 심문하는 중에는 실정을 덮어 가리지 못했다. 네가 비록 입술이 석 자라 하더라도 지금 이 엄한 신문 아래 어찌 다시 전부터 흉악한 일을 행한 정황을 발뺌하는 일이 있겠는가?
승관초 : 저는 양근 땅에 사는데, 신해년(1791) 이전부터 집에 사서가 있었으므로 생부와 양부를 따라 사학을 섭렵하여 깊이 미혹되었으나, 세례를 받고 사호를 받는 것은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허다한 정황은 이미 모두 포청의 공초에서 바른대로 진술하였습니다. 주문모를 찾아가서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는 사실 제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생부와 양부가 이미 사학으로 죽음을 당하였고, 또 황사영과 더불어 상종하였으니, 제가 어찌 사형을 면하겠습니까?
결안초 : 신해년(1791)년 이젠에 집에 사서가 있어서 생부와 양부를 따라 섭렵하였고, 그것이 그릇된 줄은 알지 못해 깊이 미혹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척과 친족이 모두 더러움에 물들지 않음이 없어, 세상이 지목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감영과 고을에서 형벌과 신문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아비가 사학을 한 죄로 죽음을 당하였는데도 제가 또 극악한 사적 황사영과 상종하였으니, 어찌 사형에 해당함을 면하겠습니까?
35. 김일호(金日浩) (사학징의 P.154~157) * 하느님의 종
포청초 : 저는 본래 양근(楊根) 사람입니다. 지난 기미년(1799)에 서울로 이사하여 살면서 경학을 공부하였는데, 서학이 좋다는 말을 듣고 정인혁의 약국에 가서 『천주실의』를 얻어 차츰차츰 깊이 미혹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강습하였습니다. 교중의 여러 사람과는 친숙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최필제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의복과 여러 도구를 맡겨 두었고, 정약종의 집을 왕래하며 사책(邪冊)을 빌려 보았으며, 황사영의 거처에서 교유하며, 의심나고 모르는 것을 강학하고 연마하였습니다. 매번 첨례일이 되면 교중의 무리들과 함께 육회(六會)에 참석하여, 오직 널리 행하는 것을 책무로 삼았습니다. 봄철이 되어 옥사가 크게 일어나 수많은 우리 무리들이 거의 다 죽음에 나아가므로, 스스로 범한 바를 생각해보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는지라, 기미를 알아 달아나 숨은 것이 지금에 일곱 달이나 되었습니다. 기왕의 죄가 사형을 당한 여러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비록 만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달리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형추문목 : 너는 시골의 미천한 부류로 감히 술사(術士)라 일컬으며 서울과 지방을 출몰하였고, 행동거지가 어긋나고 비밀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집에 자취를 의탁하고, 황사영의 무리와 사귐을 맺어, 사술에 깊이 빠져 밤낮으로 살펴 연구한 것은 특히나 너무도 음흉하다. 감히 봄 사이에 체포령이 내린 뒤에도 일곱 달이나 달아나 숨어 바로 붙잡히지 않았으니 진실로 이미 흉악하다 하겠다. 이제 엄한 신문 아래 전후에 흉악한 정황을 혹 터럭 하나도 숨겨 감추지 말라.
형추초 : 저는 양근에 살며 경학을 업으로 삼고, 또 의술을 알아 서울과 지방 할 것 없이 사대부의 집을 왕래하면서 혹 병을 돌봐주고, 혹 경전을 의론하였습니다. 기미년(1799)에 경성에 머물러 지낼 때, 사학이 사람을 미혹시킨다는 말을 듣고, 정인혁의 약국으로 가서 『천주실의』를 찾아 보았더니, 그 담긴 뜻이 유학의 도리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천당과 지옥에 대한 주장도 있었으므로 제가 간혹 글로 그것이 그릇됨을 풀이하였습니다. 황사영은 제가 또한 실제로 정인혁의 약국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글로 그 사설을 쪼개어 깨뜨렸습니다. 정약종은 사는 곳이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저절로 친해졌는데, 말이 사학에 이르면 매번 의리가 상반되어 말을 주고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흉악한 무리들은 실제로는 서로 친하지 않았으니, 제가 사학에 깊이 빠졌다는 말은 실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제가 만약 수상한 형적이 있었다면 그 많은 사대부의 집에서 그 행동거지를 알지 못하고 받아들였겠습니까? 이른바 일곱 달 동안 달아나 숨었다는 것은 제가 작년 10월에 해주 감영의 책실(冊室)에 내려 갔다가, 금년 4월에 막바로 충주로 갔던 것입니다. 제 일로 친하게 알고 지내던 김의범(金義範)이 포청에 잡혀가서 갇혀있다는 말을 듣고, 지난 달 초 3일에 포청에 자수하였는데, 공문이 이송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포청의 초사를 들어보니, 모두 제가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빌건대 밝게 조사하여 분간해서 잘못 걸려드는 폐단이 없게하여 주십시오.
가형문목 : 네 앞뒤 행적은 출몰이 간사하고 비밀스러워 진실로 이미 너무도 해괴하고 패악스럽다. 게다가 최필제, 정약종, 황사영, 정인혁 등 네 명의 사적과 더불어 요서를 구해 보거나, 함께 머물며 어지러이 악행을 함께 한 죄상이 이미 포청의 공초에서 탄로 났다. 뿐만 아니라, 또 체포령이 내린 뒤에도 7개월 동안 달아났던 제반 정황은 더더욱 흉악하다. 그리고 자백을 바쳐야 할 때에도 감히 문득 진술한 것이 바뀌었다는 등의 주장을 내세워 어지러이 벗어나 면할 계책으로 삼고자 한 것은 하나하나 교활하고 간악하다. 이제 다시 신문함에 있어 감히 앞서처럼 꾸며 둘러대지 않도록 하라.
승관초 : 제가 최필제, 정인혁, 정약종, 황사영 등 네 명의 사적과 더불어 여러 해 동안 상종하며 사서를 강론했던 것은 그 책 속에 취할만한 말이 많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깊이 미혹되어, 육회(六會)의 첨례에 참석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앞선 공초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연장해 보려고 말이 바뀌었다는 주장으로 어지러이 공초를 바쳤습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시 처음의 마음을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학에 죽기를 원할 뿐입니다.
결안초 : 저는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바른 도리로 알아, 정인혁, 최필제, 정약종, 황사영 등 네 사적과 혈당을 맺고, 육회에 동참하여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여러 해 동안 강습하였습니다. 포청에서 자백해놓고, 본 형조에서 공초를 변경한 것은 잠시 살아보려는 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설에 깊이 물들어서 끝내 고쳐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비록 형벌에 임하였지만 실로 마음으로 기꺼워하는 바입니다.
35. 장덕유(張德裕) (사학징의 p.157~161)
포청초 : 저는 본시 양인으로 남대문 박 이문동(里門洞)에 살다가 지난해(1800)에 대묘동(大廟洞)에 부쳐 살았습니다. 병진년(1796) 봄 사이에 처음으로 김종교(金宗敎)에게서 사서를 배워 밤낮으로 강습하였습니다. 저는 누각동(樓閣洞)에 사는 김국빈(金國彬)과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이 이제 7년입니다. 김국빈은 가산을 탕진하고 동서로 떠돌던 자인데, 또한 사학을 하였기 때문에 종종 상종하였습니다. 금년(1801) 3월 20일 쯤 김국빈이 또 제 집에 왔습니다.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김국빈이 말했습니다. “올해 정월 그믐께 종기약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여주로 내려갔다가, 감옥 안에서 이름은 알지 못하는 이생원(李生員)으로 불리는 사람을 보았고, 인하여 계속 머물렀다네. 그때 경기 감영에서 엄중한 공문이 이르러, 본 고을의 사학 죄인 10여명을 붙잡아 올려보냈네. 그래서 내가 황황하고 겁이 나서 읍내의 여관으로 달아나 며칠 머무를 때, 느닷없이 김한빈을 만났다네. 김한빈은 한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醴泉) 땅으로 내려간다더군. 그리고 상복 입은 사람은 내게 자기 집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본 뒤에 동쪽으로 내려간다고 하더군. 그가 향해 가는 곳에 대한 뜻을 서로 약속하고 돌아왔다네. 지금은 노잣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서, 시기를 놓치고 말았네.” 이것이 김한빈이 제게 말하고 간 전부입니다. 또 황사영 집안의 소식을 제게 묻길래, 제가 황사영이 도망가 숨은 뒤에 여종과 사내종들이 모두 체포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그 집안 또한 참혹한 지경을 면치 못하였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또 김국빈에게 상경이 늦어진 이유를 물어보자, 김국빈의 말 속에 여주 읍내에서 충청도 내포에서 사학을 하다가 달아난 남녀를 많이 만났는데, 교우라서 차마 멸시하지 못하고 한 마음으로 서로 상의해서 가평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 남짓 되는 땅으로 데려가, 편안하게 지내게 해주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떠나려 할 때, 제가 어디로 가려느냐고 물으니, 김국빈은 장차 가평 땅으로 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황사영이 간 곳은 그저 김국빈이 수작하는 말을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이미 주문모, 정약종과 사생을 함께 하기로 한 약속이 있습니다. 다만 빨리 죽기를 원할 뿐, 이밖에는 실로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형추문목 : 너는 사학의 도당 중에서도 가장 심복으로 일컬어진 자이다. 그리고 황사영의 종적을 덮어 숨기려던 형상이 이미 포청의 초사에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감히 주문모, 정약종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꺼내고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에 나아가겠다고 한 것은 너무도 흉악하다. 이제 엄한 심문 아래, 앞뒤의 정황을 하나하나 사실대로 고하렸다.
형추초 : 저는 본래 갓을 만드는 총모장(驄帽匠)으로 남대문 밖 이문동(里門洞)에 살고 있습니다. 병진년(1796)에 김종교에게서 사서를 처음으로 배웠고, 지금까지 강습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사호를 받는 것은 애초에 하지 않았습니다. 사학의 도당은 한 사람도 서로 친한 자가 없고, 다만 김국빈(金國彬)과 서로 친해 종종 상종하였습니다. 금년 3월에 김국빈이 제 집에 와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그가 하는 말이, 금년 정월에 여주 땅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점에서 황사영과 김한빈을 만나 보았는데, 예천(醴泉) 땅을 향해 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포청에서 공초를 바칠 적에 김국빈의 말로 대답을 올렸습니다. 포청의 공초에서, 제가 주문모, 정약종과 더불어 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다만 속히 죽기만을 원한다고 운운한 이야기는, 애초에 제가 꺼낸 말이 아닙니다. 제가 정약종, 주문모와는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사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실로 너무도 맹랑한 일입니다. 제가 사서를 처음 배울 때는 바른 도리로 알았습니다. 이제 분부를 받들고 보니, 전날에 배웠던 사서가 이적금수의 일임을 황연히 배워 깨달아 다시는 마음으로 물들지 않을 것을 맹서합니다. 이른바 예수(耶穌)는 개 돼지라고 입으로 말하여 맹세의 말로 삼아, 이제부터 이후로는 감화되어 바른 길로 돌아오겠습니다. 삼가 밝게 조사하여 처분하여 저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가형문목 : 너는 이미 황사영과 더불어 사생을 함께 하겠다는 말을 포청에서 어렵지 않게 공초하였다. 이제 자백을 바쳐야 할 때가 되자 눈앞에서 벗어나 보려는 꾀를 내려고 감히 감화되었다는 따위의 말로 시일을 지연시키는 묘방으로 삼으려는 것은 그 정황을 살펴보건대 더욱 지극히 흉악하다. 감히 전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다시금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렸다.
승관초 : 제가 사학에 깊이 미혹된 연유는 앞선 공초에서 바른대로 고하였습니다. 감히 살기를 꾀하려는 계획을 내어, 감화되었다는 등의 말로 얼버무려 공초를 바쳤습니다. 이제 다시금 엄한 신문 아래서 어찌 감히 계속해서 우물쭈물하겠습니까? 저는 과연 주문모, 정약종과 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앞선 공초에서 예수를 욕하여 욕보이는 것으로 바쳤으니, 이것은 제가 교주를 배반한 죄여서 후회 하나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속히 죽기를 원합니다. 이 밖에 달리 드릴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결안초 : 저는 김종교에게서 사서를 배웠고, 요설을 몹시 믿어 바른 도리로 알았습니다. 과연 주문모, 정약종과 더불어 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여 놓고도, 감히 살아날 꾀를 내어 예수를 욕하고 욕보이며 감화되어 바른 길로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거짓 꾸며 공초를 바쳤습니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사교에 죄죄 얻음을 이제와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사학의 죄로 속히 죽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