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05위 복자 순교자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7) 기록에 남겨져 있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
지금까지 대략적인 일본 기리시단사의 변천과 사적 중에서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소개해왔는데, 여기에서 언급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록에 남겨지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모두 여기에 적어 두고자 한다.
마끼젠시아 1613년 아리마 영내에서 일어난 박해 때 체포되었다. 이때의 영주 아리마 다다스미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한, 신자였으면서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 박해를 적극적으로 행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청해서 영지를 바꾸고 아리마를 떠나버린 자이다. 마끼 젠시아는 이 다다스미 측실(側幸)의 시녀였었다. 이 측실도 그리스도교를 몹시 미워하며 싫어했다. 시녀들 중에 신자가 있으면 찾아내어 몹시 학대했다. 특히 신앙심 이 두터운 마끼젠시아는 성안의 탑 속에 감금되어 8일 동안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고통을 받았다. 9일째가 되는 날, 포박은 풀렸지만 빗물 이외엔 주지 않았다. 이때에 밤중이면 고귀한 부인들이 나타나 먹을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윽고 그녀는 감금에서 풀려 어느 관리 집에 맡겨졌지만, 세속을 버린 증표로 머리를 자르고 그 후로는 기도 생활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마누엘 양친이 조선인이었다고 하니, 요즈음 말하는 재일교포 2세에 해당 할은 지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고 벙어리였다. 다다미 직공으로 20세 때 쓰루가(驗河)에서 에도(江湖)록 갔으며, 프란치스꼬회 성당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신자들의 생활 태도를 보고 감화를 받았다. 고향 사람인 친구로부터 몸짓 손짓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배우고 습득하였다고 한다.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후 마누엘은 고향인 스루가로 돌아갔지만, 그가 기리시단이 되었다고 크게 노한 양친 이 그를 쫓아내고 말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신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1614년 3월 27일, 장군이 스루가에서 오오사까(大販)로 향한다고 하여 그에 앞서 마누엘은 여섯 동료들과 함께 이마에 십자가의 낙인을 찍히고 손가락을 절단시키는 고문을 받았다. 고문받은 후 그는 감옥에 갇히지만, 사홀 후 병으로 인하여 출옥하게 된다. 성사를 받기 위하여 오오사까까지 걸어갔으며 거기서 배로 나가사끼에 갔다. 나가사끼에서는 큰 사랑으로 신자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베드로 유우조오(有造) 1619년 7월 19일, 오오무라(大村)박해 때 사로잡혀 있던 신자들에게 참외 두개를 차입(差入)해주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자택에서 하인인 토마스고사꾸(小作 조선인)과 함께 참살되었다. 본래는 영주(領主)의 회 계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로사리오회)의 회원이었다.
안드레아 고꾸베에(黑兵衛) 1622년 겐나의 대순교가 있던 해에, 도미니꼬회 선교사를 구출하기 위한 배를 준비하고 있던 같은 회의 전교자 루이스야끼지가 체포됨으로써 그와 관련된 선원 네 사람이 붙잡혔는데, 그중의 한 사람으로 참수되었다.
시꾸스토 간자에몽과 아내 가타리나 1624년 동북지방에 박해의 거센 바람이 몰아쳤는데 그때 아내와 더불어 순교했다.
바오로 1630년 아마구사(天草)의 사끼(志被)에서 바다속으로 빠뜨리는 극형으로 순교했다.
요한 1633년 아내와 더불어 디 에고 신부가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이었다는 이유로 화형 선고를 받고 순교했다.
토마스 1643년 3월 21일, 구덩이를 파고 거꾸로 매다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노예로 팔리어 캄보디아로 끌려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또한, 1626년 나가사끼의 박해가 한창 심했을 때, 한 무명(無名)의 조선인 신자가 체포되어 배교 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부인하였다. 그때 한 말이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는 내 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온 지 30년이 됩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주 많은 쌀을 먹었습니다. 일본의 곡물(穀物)로 자란 내 몸은 장군님께 돌려드림이 당연합니다. 내 몸을 던져 장군님의 뜻대로 죽을 수 있지만, 영혼은 땅 위의 임금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임금님께 바치겠습니다.
최근 일본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진 기리시단사(천주교史) 연구의 문헌 중에도 조선인 천주교 신자에 대한 기술이 있다.
군 나이 도마라고 하는 28세가량의 청년으로, 사가(位賀)에서 세례를 받았는데,1612년에 내려진 이에야스의 금교령 이후 신자 색출의 손길은 사가에까지 뻗쳐 1614년 체포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세례를 받은 후로는 이 그리스도 교리의 빛을 숨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양친과 아내를 인도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또한, 신앙을 더욱 깊게 하려고 신심회(信心會)에 입회하였고, 세례를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젊은데 열심히 함 때문에 신심회를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체포되어 관리로부터 배교를 강요받았고 협박도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사 가의 영내(領內)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부친도 처음에는 배교를 강력하게 거부했지만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배교의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고 아들에게도 타이름(說論) 되어 나가사끼까지 가서 신부님께 고백하고 다시금 신앙을 되찾았다. 도마와 그의 아버지는 사가로 가서 아버지의 되찾은 신앙을 모두 들 앞에서 표명하고 관청에 가서 배교의 서명을 돌려 줄것을요청했다. 그러나 돌려받지 못했으므로 네 번이나 찾아가서 반환요구를 했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를 다니면서 신앙을 도로 찾았음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실행하기 전에 관청의 호출을 받아 배교의 서명을 돌려받았다. 그리고서 영내에서 추방되어 나가사끼로 갔다. 몹시 궁색해져서 여비도 떨어지고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되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은 지금 어디에도 없다.
자료: 일본 안의 한국인 그리스도 교인들 [김옥희.이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