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아카데미 12월 모임 후기(8회차)
O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합스부르크전. 외규장각 전)
O 일시: 12월10일 목요일 오후 1시
O 참가회원: 김병추. 최현숙. 조병규. 최정란
◈지난 주 갑작스런 한파 주의보와 흐린 날씨로, 간간이 뿌리던 눈발도 그치고, 오늘은 포근한 겨울 날씨였다.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모두 모였다.
기획전시관 입구에 있는 커다란 이번 전시의 시그니쳐 그림인 벨라즈케스의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앞에서 인증샷을 하였다.
15세기-20세기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르네상스, 바로코 미술 시기의 대표 소장품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회화, 공예, 갑옷, 테피스트리등과 빈 미술사 박물관 대표 소장품 96점의 전시품이 소개되었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틴토레토, 베로네세, 안토니 반 다이크, 얀 스테인 등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서양미술 거장들의 명화도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했던 조선의 갑옷과 투구도 이번 전시에 선보이게 되어, 수교 130주년 기념의 의미도 되새기는 전시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
합스부르크 황실이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함으로 인해 제국이 해체되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 지배했던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지함으로써 모든 제위와 왕위를 상실하고 특권이 소멸했지만, 여전히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명문가이다.
▲ 가문의 발상지인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성채
합스부르크 왕가는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1273년부터 왕정이 몰락한 카를 1세의 1918년까지 약 600년 간 유럽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기도 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30년 전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도 깊이 관련돼 있다.
16세기 카를 5세(제위: 1519년 ~ 1556년)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선황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 있어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다른 왕조들처럼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게 아니라 수십~수백 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에 무너졌다. 근친혼으로 인한 악성 인자의 누적 탓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등장했으며, 결국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다. 뿐만 아니라 불임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선대 왕들과는 다르게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 라는 라틴어 시구가 유명했을 정도. 이런 혼인 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렇게 온 유럽에 합스부르크 피가 흐르는 귀족이 없는 데가 없는 경지에 이른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족보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 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 <시녀들- 1526. 벨라즈케스. 프라도미술관 소장>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LasMeninas>(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스페인의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하면 할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를로스 2세까지 가면 근친혼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위 전시회의 배경이 되었던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공주> 와 같은 옷을 입은 그림으로 레오펠드1세 황제인 외삼촌과 결혼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으므로 매년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합스브르크는 서양 미술를 대표하는 걸출한 예술가들의 후원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루벤스, 벨라즈케스. 반 다이크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가문의 후원은 함스브르크 사람들이 가진 예술 사랑과 예술품 수집에 담은 남다른 철학 덕분이다.
▲ “우아한. 생생한. 다채로운. 정교한” 소장품들만 전시. 이번 전시의 테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전투 때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다.(아래사진)
▲ 루돌프 2세의 ‘리본장식 갑옷’- 안톤 페펜라우저. 1571년경
▼ ' 보석 모자이크’ 방식으로 만든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은 이 시기 루돌프 2세가 수집한 작품이다. 16세기 후반~17세기 초 활동한 예술가 조반니 카스트루치가 보석 판들을 깎은 뒤 조립해 제작했다. 피렌체(이탈리아)에서 대대로 보석 모자이크를 만들던 그의 가문은 아버지 대에 프라하로 공방을 옮긴 뒤 수많은 걸작을 쏟아냈다. 마노와 보헤미아 지역에서만 나는 벽옥을 사용해 은은한 색채를 낸 이 작품이 단적인 예다.
루돌프 2세는 이런 풍경 작품을 주로 가구 위에 놓아 장식했다.
▲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조반니 카스트루치 17세기>
▼우리 동아리 팀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이었다.
이 방은 프라하에 수도를 두고 활발한 수집 활동을 벌인 16세기 루돌프 2세 황제 시기를 다룬다. 루돌프 2세는 자신의 탁월한 안목으로 진기한 예술품을 수집, ‘예술의 방’이라는 곳에 전시했고, 이는 현재의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기초가 되었다. ‘십자가 모양 해시계’ ‘누금 장식 바구니’ 등 다양한 공예품을 만나볼 수 있다.
루돌프2세는 ‘예술가의 방”에서 외국사절들을 맞이하는 등, ‘예술가의 방’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를 원했다.
이 방은 당시 ‘세계의 극장’으로 불릴 정도로 회화, 공예품뿐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입수한 화석과 암석, 각종 자연물을 소재로 그린 삼화와 같은 진기한 수집품도 전시되었다. 루돌프2세의 ‘예술과의 방”은 자연과 예술이 모인 소우주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 루돌프 2세의 컬렉션 중 하나인 <누금 장식 바구니>과
▼ <십자가모양 해시계> 1619
▼재료가 작고 단단할수록 정교한 조각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 석영이 변해 만들어진 옥수(玉髓·칼세도니)가 바로 이런 물질이다. 고대에는 무기로 쓰였을 만큼 단단하고 크기도 작다. 옥수로 만든 조각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는 그래서 “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 조각가 조반니 암브로조 미세로니(1551~1616)가 1600년께 옥수 한 덩어리를 깎아 만든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이 소장한 수많은 걸작 조각품 중에서도 예술적·기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가락과 머리카락 등 작은 부분까지 정교하게 묘사했고, 절묘한 구도와 자세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백미는 다양한 색상이다. 광물이 원래 갖고 있던 유백색·적갈색·회색·노란색 부분을 그대로 살렸다. “재료의 본성을 뛰어넘는 물건을 만든다”는 당대 사람들의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그는 생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미세로니 공방’을 이끌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조각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조반니 암브로조 미세로니(1551~1616)
▲ <마노그릇>- 루돌프2세의 컬렉션-예술가의 방'
그릇 바깥 면을 두르는 소용돌이 띠무늬와 정교하고 얇게 깎은 가장자리는 오타비오 작품의 특징이다. 이 그릇의 금속 장식은 ‘HC’라는 머리글자 쓴 제작자가 한 것으로 작품의 받침대에 서명이 남아있다. 이 제작자의 특징은 그릇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도금 은제 장식에 투각 장식이 된 긴 암술대 모양의 장식을 더하는 것이다. 밀라노 출신 석공 마세로니는 루돌프 황제의 요청을 맏아 프라하에 공방을 차렸고, 프라하가 유럽 석조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에 일조했다.
▼티롤의 암브라스성’
남다른 수집벽으로 유명한 페르디난도 2세의 예술품 방이다.
대대로 티롤은 합스부르크의 대공들이 다스린 지역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연결하는 곳에 있으면서 이탈리아와도 접하고 있어 로마제국 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결과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화적으로 르네상스가 꽃피게 된다.
▲ <페르디난도 대공의 초상화>
▼화환 속 남자 (얀 리벤스 .1620년경)
미소를 띈 젊은 남성이 화환에 둘러싸여 있다. 화환은 튤립. 수선화. 카네이션. 장미. 한련. 물망초. 히아신스. 아네모네. 은방울꽃. 나팔꽃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꽃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은 얀 리벤스는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였다.
▲ 브뤼헐 가문과 꽃 정물화
폴랑드르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 1세는 소작농과 전원의 삶을 그린 풍경화로 브뤼헐 화가 가문을 이끌었다.
그의 둘째 아들 안 브뤼헐 1세는 아버지의 명성을 잘 이어간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히 정물화를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꽃다발 정물이 가장 유명해 ‘꽃의 브뤼헐’이라고도 불렸다.
▲ <고종의 갑옷과 투구 1892년경>
1892년 12월8일 극동항해를 준비중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호 순양함 ‘카이세린 엘리자베드’의 사진(아래 사진)이다. 이 순양함은 1893년 10월 우호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동아시아에 구축할 새로운 거점 하나로 한국을 점 찍고 대형 순양함을 끌고 조선을 찾았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조. 오 수호통상조약은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인정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순양함 <카이세린 엘리자배트>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위 사진)는 이 순양함함에 실려 오스트리아로 갔고, 1894년 2월10일 황제의 수집품으로 등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48년부터 68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렸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민족주의가 급부상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시대를 열어 대외적 안정을 도모했다.
한편 1857년에는 수도 빈의 도시확장 프로젝트를 명령하여 도시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너비 57미터, 길이 5킬로미터에 이르는 반지 모양의 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만든다.
▲ 과거 빈의ㅡ모습이다. 성슈테판 대성당을 중심으로 다각형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랜 세월동안 빈을 보호하던 성곽을 돌격전에서 포격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뀜에 따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빈은 합스브르크 왕가가 몰락할 때 성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넓은 도로를 만들게 된다.
▲위 지도에 있는 지도에 있는 넓은 도로가 그때 만들어졌다. 그 도로를 링 슈트라세(Ringstrasse)라고 부른다.
▲도로를 따라 도시 빈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물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빈미술사박물관이다.
▼한편 상설관 특별전시실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라는 전시명으로 외규장각 의궤 전체(297책), <서궐도안> <효종상시호 옥책> 등 국가지정문화재 및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의궤 도설로 복원한 궁중연향 복식 등 460여 점 등도 전시중이다.
1.왕의 책, 외규장각의궤 –“의식의 궤범“(儀式의 軌範)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이다. 왕에게 올린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관청에 나누어 준 분산용(分散用)으로 나뉜다. 외규장각 의궤는 몇 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어람용이다.
▼어람용 의궤는 비단과 놋쇠 등 최상의 재료를 사용해서 정교한 솜씨를 지닌 장인. 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 등 전문가가 만들었다. 내용 면에서는 상세함이 가장 큰 특징이다. 행사 진행과정과 참여인원, 사용한 물품 내역을 일일이 적고, 기물의 형태나 행차 모습 등 글자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항들은 그림으로도 그려 넣었다.
▲ 『장열왕후존숭도감의궤』, 1686.숙종. 어람용, 외규63
▼2.예(禮)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
의궤는 국가 의례나 행사에서 모범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었다. 모범적인 의례란 바른 예법을 잘 따른 의례이며, 의궤는 예법을 실제로 행사에 적용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의 경험을 모은 것이다.
조선의 왕은 바른 예법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고자 했다. 왕과 왕실의 위상을 세우는 의례, 신하를 예우하고 백상의 삶을 돌아보는 의례를 잘 치름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따르기를 바랐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의궤다. 예법으로 바른 정치를 실현코자 한 조선의 의례 경험과 퉁치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다.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1784년(정조8) 어람용/외규21
조선시대 왕세자를 정하는 의례를 ‘책례’라 했는데, 궁궐의 정전에서 성대하면서도 정중하게 거행했다. 왕통을 계승할 사람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식이다. 중요한 일인만큼 책례가 끝나면 기록도 철저하게 남겼다. 책례준비 과정에서의 논의 내용, 업무 분장에서부터 각 기물의 배치와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의 왕세자 동선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의례 때에는 왕세자임을 증명하는 상징물로 옥으로 만든 도장인 옥인, 왕세자 책봉의 글귀를 적은 죽책과 교명을 하사한다. 이 상징물에 대한 내용도 의궤에 포함되어 있다. 크기, 재질, 무게는 물론 어떤 형태인지 알기 쉽도록 도설도 추가하였다. 이 도설은 실제 옥인과 똑 같은 모습이다.
▼3.질서 속의 조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예를 실천함으로써 함께 만드는 질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안락함. 조선이 의례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내용이다. 그 이상이 잘 구현된 기사년(1809)의 왕실 잔치 의례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구간이다. 외규장각 의궤 중 영국국립도서관이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 1809년, 순조9)’를 실제와 똑같이 복제하여 관람객이 직접 넘겨보며 어람용 의궤의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1809년(순조9),어람용,복원제작(현소장처:영국 국립도서관)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는 1809년(순조 9) 순조가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관례(冠禮) 60주년을 축하하는 궁중연향(宮中宴享)인 진표리와 진찬에 관한 기록이다.
1월 22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순조가 혜경궁에게 전문(箋文)과 치사(致詞), 표리(表裏)를 올리고, 2월 27일 진찬을 올렸다. 순조는 진찬도감(進饌都監)을 설치하지 않고, 예조에서 전담하도록 전교하였다.
따라서 의궤도 내각(內閣)에서 편찬하였다. 1795년(정조 19)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범례를 따랐다. 3월 22일에 혜경궁에게 1건, 3월 23일에 순조에게 1건을 올렸다.
혜경궁은 1744년(영조 20) 1월 11일에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가례를 거행하였고,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1월 22일에 관례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1750년(영조 26)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다. 진찬의궤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고, 진표리와 진찬의식을 함께 정리한 의궤라는 점에서 유일한 가치가 있다.
현재 영국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동일한 행사를 기록하였지만, 체제나 내용이 조금 다른『혜경궁진찬소의궤(惠慶宮進饌所儀軌)』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모란도병풍>
▲혜경궁이 진표리진찬때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모란도병풍이다. 진표리(동지, 원단(元旦)이나 임금의 탄신일 따위의 경사스러운 날에 임금에게 옷의 겉감과 안감을 바치던 일)장면을 그린 그림<진표리도進表裏圖>에서 혜경궁의 자리는 전각 안에 마련되었다.
그 뒤에 모란꽃이 가득한 병풍이 있다. 8폭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여 뻗어나간 가지마다 커다란 꽃송이가 만개한 모습을 그렸다.
모란은 부귀와 영화의 싱징이다. 조선왕실은 상서로움과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양한 의례 용품에 모란무늬를 장식했다. 특히 모란 병풍은 왕실 경사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혜경궁의 자리에 펼친 모란도 병풍으로관례( 冠禮 )60주년을 축하하는 경사스러운 날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 12월은 몸과 마음이 번잡한 달이기도 합니다. 송년과 신년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두가지 특별전을 마무리하고, 우리 박물관 동아리 팀은 새해 발전을 위한 시간과 덕담을 나누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올 한 해도 정을 나누며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협조해 주신 박물관동아리 선생님들 김병추 선생님, 조병규 선생님, 최현숙 선생님. 문난희 선생님께 감사와 무한한 애정을 드립니다.
글.사진/최정란
옮긴이/문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