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사해점촌의 사람들
신라에서 귀족이 아닌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평민들의 생활을 알려 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신라촌락문서'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마을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서원경(오늘날의 청주)에 있던 촌락 네 개 모습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촌락의 이름과 영역이 기록되어 있고, 사람, 논과 밭, 소와 말뿐만 아니라 뽕, 잣, 가래나무의 수까지 적혀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바로 나이에 따른 사람 수다. 네 개 촌락 가운데 하나인 사해점촌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살펴보자. 남성은 하인을 포함해서 60명이고, 여성은 70명이야. 여성이 10명 더 많다. 그런데 다른 나이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수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 20~59세에서는 여성이 훨씬 더 많다.
사해점촌 마을의 사람 수
사해점촌 마을의 사람 수연령남자(명)여자(명)
1~9세 | 10 | 8 |
10~14세 | 12 | 9 |
15~19세 | 8 (하인 1) | 11 (하녀 1) |
20~59세 | 30 (하인 1) | 42 (하녀 5) |
합 | 60 | 70 |
다른 마을도 사해점촌과 비슷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수는 비슷한데 일하는 연령층에서 남성들 수가 적은 까닭이 뭘까? 아마 남성들이 군대에 갔기 때문일 거다. 또 죽은 남성들도 있었겠다. 남성들 수가 적으니까 여성들이 살림을 책임지고 꾸리느라 일을 많이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 개 촌에 노비는 모두 25명. 전체 인구 462명 가운데 5.4퍼센트다.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에서는 노비가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비는 독립된 한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세금을 매길 수도 없고 군인으로 뽑거나 나랏일을 할 때 부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신라촌락문서'에는 60세를 넘은 사람이 없다. 노인층 인구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오늘날보다 사람들 수명이 짧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등짐을 진 토우신라 시대에 만든 토우다. 짐을 잔뜩 지고 있다. 평민들은 농사짓느라 허리 펼 날이 없었다.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백성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지만 하루하루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 주고 얼마쯤 곡식을 받아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다. 흉년이 들어 품팔이도 하지 못하면 부잣집 종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 시절 효녀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지은의 이야기가 있다.
분황사 동쪽 어느 마을에 지은이란 처녀가 살고 있었다. 지은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장님이었지. 가난한 살림에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시느라 서른둘이 되도록 결혼을 못 했는데, 흉년이 들어 품팔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은은 생각 끝에 스스로 부잣집에 들어가 종이 되겠다고 했다. 종이 되고 몸값으로 쌀 열 섬을 받았다. 지은은 쌀을 주인집에 맡겨 놓고 날이 저물면 집에 와서 밥을 지어 어머니에게 드리고 새벽이면 그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지은을 앉혀 놓고 물었다.
"전에 거친 음식을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에는 좋은 쌀밥을 먹어도 창자를 찌르는 듯이 마음이 아프구나. 어찌 된 일이냐?"
어머니가 호되게 꾸짖자 지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니, 내가 빨리 죽는 게 낫겠구나."
어머니와 지은은 서로 부둥켜안고 슬프게 울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백성들이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라 사해점촌의 사람들 (펌)
첫댓글 어디에서 누가 이런 통계를 뽑아냈을까......
요즘 드러나는 통계도 정확하다고 믿을 수 없는데
당시 이런 세세한 통계자료를 작성했다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놀랍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