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정 동 식
언론보도에 의하면 제14호 태풍 '난마돌‘이 우리나라를 스치면서 영남권에 적잖이 피해를 주었고 대부분의 일본 열도를 강타해서 난리가 난 모양이다.
앞서 추석 전에 지나간 ’힌남노‘가 많은 비로 큰 피해를 입힌 것과는 달리 ’ 난마돌‘은 바람이 더 무서웠다고 한다.
골프장 철탑이 무너지고, 태풍의 중심권과는 거리가 상당한 충북에서도 지붕이 날아갈 정도였다니 강풍의 위력이 대단했나
보다. 9월에 울산과 포항에 아픔을 잔뜩 쏟아붓고 간 두 녀석의 태풍도 가을바람일까? 아니다.
계절적 요소는 충족했지만 고온다습한 바람이니 단지 가을에 분 바람일 뿐이다.
불청객이 지나가자 30도를 오르내리던 늦더위가 하루 사이에 달라져, 이젠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산바람이 이불자락을 여미게 한다.
가을바람은 선선하고 서늘해서 좋다.
산소를 듬뿍 머금은 시원한 바람은 차일피일 미루었던 계획을 다시 실천하도록 독려하고.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어루만지며, 나태해진 일상을 원상으로 돌려놓는 구심력을 발휘한다.
계절이 바뀔 즈음이면 주부들은 바쁘다.
여름이불을 세탁하여 보관하고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춘추용 이불을 끄집어내어 안방과 자녀들 방에 배치한다. 입는 옷은 수시로 찾아 입으니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나 치매가 진행 중인 장모님에게는 손길이 많이 가고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거실과 의자의 방석도 가을, 겨울 겸용으로 바꾸었다.
각 방에 있던 선풍기도 분해해서 날개를 닦고 비닐 커버에 씌워 베란다 창고에 보관하는데
자그마치 5대나 된다. 다른 집에 비해 과히 적지 않은 숫자다.
그 이유는 선풍기를 1인당 하나씩 사용하고 거실 에어컨의 용량이 적어 복지(?)를 골고루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년 선풍기 정비를 아내가 도맡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자인 내가 처리해야 맞지만 내 손은 뭔가를 만지기만 하면 고장을 내는 ㄸ손인지라 미덥지 못한 아내가 먼저 나서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정해지게 되었다.
아직 선풍기 청소는 하지 않았으니 설령 못 쓰게 되더라도 조만간 한 번 시도해 보리라 고민 중이다.
가을바람은 소중한 사람과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초가을쯤 되었을까? 1학년 2학기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수학 선생님이신 박영수 선생님이 느닷없이 악보를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산~들 바람이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아아아 너~도 가~면 이~ 마음을 어~이해’ ♬ ♫
현제명 작곡가의 산들바람이라는 가곡이다.
우리 교과과정엔 음악시간이 별도로 없었다. 그래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노래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물론 피아노 반주도 없고 선생님이 한 소절 하시면 우리가 따라 하는 방법으로 배웠다.
수학 시간과 산들바람! 이 특별한 조합이 선생님과 친구들을 그립게 한다.
10여 년 전에 장효식이라는 시인을 만났다.
의성의 모 카페에서 맥주를 간간이 마시면서 밤이 깊도록 담소를 나누었다.
‘가을바람에게’라는 자작시를 낭송해 주었는데 마지막 연이 가슴에 와닿았다.
‘바람아 바람아 낙엽이 무진장 떨어지더라도
나 같은 시인한테는 오지 마라
어눌한 말, 투미한 표현으로 몇 마디의 혀를 적어본들
어느 마음인들 달랠 수 있겠느냐’
이 시를 통해 시인의 겸손함과 서정적 내면에 동화되어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가을바람은 또한 우정을 돈독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이다.
올해는 23일이 추분이다. 들판에 곡식이 익어간다. 산자락 과수원엔 먹음직스러운 홍시가 서리를 맞으며 숙성을 거듭하고,
계절을 달리는 가을바람은 조개구름을 벗 삼아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간다.
자연은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줄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 중이다.
풍요로움은 가을바람에서 시작되어 계절의 끝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갈바람은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곱디고운 단풍을 낙엽으로 승화시킨다.
새로운 것 하나를 얻기 위해 또 다른 한 가지를 버리는 진리를 가을바람은 알고 있다.
어둡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건강한 씨앗을 잉태하여, 절처봉생지에서 경이로운 만남을 이루어지게 하는
가을바람은 정녕 위대한 축복이다.
나는 가을바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리 신바람 나는 가을이라 하더라도 집안에 칼바람이 불지 않게 하려면 당장 선풍기 청소를 서둘러야겠다.
올해부터는 더 이상 추풍선(秋風扇)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2022.9.22.
첫댓글 쾌청한 하늘에서 불어 오는 쾌적한 가을바람이 늘 불어오면 좋겠습니다. 가슴이 확 트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
벌써 두 편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정말 시작이 반입니다. 꾸준히 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퇴고를 하시기바랍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