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민요에 빠지다
최 순 태
전) 대구광역시 공무원
2018 문학예술 수필부문 신인상 등단
한국문학예술가협회 회원
오류 문학회 회원
상록 수필문학회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e-mail : stchoi96@hanmail.net
노래는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어도 한바탕 소리 지르며 목소리를 내뱉으면 마음이 후련해진다. 나는 성악을 하면서 나의 선생님으로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을 마음속으로 정했다.
외국의 테너 중 전설적인 성악가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국내 음악가로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박세원 테너를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으로 가사 전달력이 좋은 스테파노와 이태리 유학 중 벨칸토(bel canto) 창법을 배워 완벽하게 구사하는 박 교수를 본받아 나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심혈을 기울이는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벨칸토의 의미는 “아름다운 노래”이다. 이탈리아식으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창법이다. 평소 노래 부를 때 록 가수처럼 고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창법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선호하는 나의 성향과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고운 목소리를 가진 스테파노의 가곡은 내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만들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부른 이태리 가곡 중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우선 Core’ Ngrato(무정한 마음)은 사랑에 실연당한 남자의 슬픈 노래이며,
Rondine alnido(제비는 돌아오건만)은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건만 사랑하는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통함을 나타낸 노래이다. 마지막으로 Ideale(이상)은 내 사랑이여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노래이다.
성악 레슨을 받으면서 집에서 나름대로 노래 연습을 하면서 우연히 유튜브에서 박세원 성악가의 이태리 민요 음악 파일을 발견하고 듣게 되었다. Musica Probita(금단의 노래)를 비롯하여 Vergin, Tutto Amor(사랑 가득한 성모) 등에 이르기까지 총 14곡의 주옥같은 이태리 민요를 감상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때로는 고뇌를 느끼며, 그들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멀리 떠난 임을 잊지 못하는 애달픈 심정과 연인 사이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와 사랑 가득한 성모를 찾는 등 아름다운 가사가 나를 사로잡았다.
집에 있을 때나 혼자서 자동차를 타고 고향에 갈 때마다 아름다운 민요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따라 불러 보았다. 그의 노래는 정확한 발음과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매료시켰다.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려면 단지 듣기만 해서는 안 되고, 직접 소리를 내 보아야 내 것이 됨을 깨닫고 이태리 민요의 완성도를 높여 보리라 다짐하였다. 끊임없는 발성연습을 통하여 목을 틔우는 과정을 되풀이하였다. 유명한 파바로티도 하루 종일 발성연습만 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선 악보 구입이 시급하였다. 경제적인 부담이 많아 돈을 들이지 않고 악보를 구할 수 없을까 고심하던 중 인터넷에서 IMSLP(International Music score Library Project), 즉 “국제 악보 도서관” 이란 무료 악보 사이트를 찾았다. 그 사이트에서 나는 외국의 어지간한 클래식 악보를 무료로 열람할 수 있었다.
한 곡 한 곡 악보를 다운로드하였다. 다운로드한 악보를 프린트하여 수시로 보면서 노래를 듣고, 직접 불러보았다. 각 단락이 끝나는 시점까지 악보를 보면서 틈날 때마다 노래를 익혔다.
특히 가사는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의 의미를 알아보고, 조그마한 메모지에 이태리어 가사를 적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암기하였다.
처음에는 막막하였으나, 한글로 번역된 노래 말을 음미하며 감정을 느끼고 노래의 맛을 살리려고 무던히 노심초사하였다. 길을 걸어가면서 입으로 노래를 중얼거릴 정도로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만만치는 않았다. 긴 가사와 수시로 변하는 음정을 따라가자니 대단히 힘들었다. 한 곡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하였다. 음정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피아노를 치면서 계속해서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내 나름대로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나의 노래를 남에게 들려줄 기회를 찾기는 어려웠으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즐기고, 그것으로 인해 기쁨이 배가되면 그만이고, 만족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14곡을 완성하는데 여러 달이 걸렸다. 때로는 맨 처음 암기했던 가사와 음정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복해서 다시 익히는 과정을 되풀이하였다.
때로는 내가 왜 이다지 노래에 집착하는지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사람은 본인이 좋아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유명한 성악가가 아니고, 성악을 직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나는 노래 부르는 일이 즐겁다.
요즈음 이제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19도 정점을 찍고 서서히 물러나려고 한다. 지금부터 미루어 왔던 각종 모임도 서서히 시작될 것이다.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 이제까지 배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비록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2022. 5. 27)
그리운 친구여
최 순 태
2019년 겨울 유행한 코로나19는 우리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모교를 졸업한 지 5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2016년 여름 졸업 40주년 행사가 모교에서 은사님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사회적 격리로 인해 동기 모두가 모이는 행사는 사실상 어려웠다.
약 1개월 전 동기 부친의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이 그동안 중단되었던 전국 동기모임을 총동창회 회의 및 회장의 취임식을 계기로 모이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지금 모교의 총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B 모 동기의 회장 연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반가운 친구도 만나고 회포를 풀기로 하였다.
서울에 사는 동기들이 전세버스를 마련하여 참석한다는 소식에 대구에 있는 우리 동기들도 약 10여 명 정도 참석하였다. 총동창회가 열린 그날은 날씨마저 화창하여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대구에서 우리들을 실은 버스가 모교에 도착하자 전국 각지에서 동문들이 이미 당도해 자리하였다.
일부 동문들은 교주이신 최송설당 할머니 묘소를 참배하고, 학교 뒤편 동산인 송정을 둘러보았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송정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다소 인공이 가미되어 있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송설역사관 앞 연못인 청연지에는 온갖 수생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송정에 위치한 홍연지에는 수련이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배롱나무 꽃이 절정이었다. 다소 아쉬운 점은 송정에 벚나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학창 시절 산에 올라가 벚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었던 추억의 장소가 없어졌다.
11시로 예정된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 강당인 세심관으로 이동하였다. 식순에 따라 회의가 진행되던 중 나는 한없이 벅찬 가슴을 억누르지 못했다. 학교의 발전된 모습과 동문들의 단합이 잘 되는 것 같아 흐뭇하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동문들을 실은 버스는 김천의 대표적인 명소를 찾아 떠났다. 오늘의 문화해설을 담당할 문화관광해설사는 동문 출신으로 전직 소방서장을 역임한 분이었다. 퇴직 후 무엇인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을 거쳤단다. 버스에서 답사 일정을 설명하면서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가끔 유머를 섞은 퀴즈를 내면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내가 학창시절 주입식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머로 푸는 퀴즈가 대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굳은 탓인지 아니면 반드시 원리원칙만 추구하고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마음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해설을 들으면서 가끔은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을 순수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린이가 느끼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해야겠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첫 번째 목적지인 구성면 상원리 소재 방초정으로 향하였다. 방초정은 꽃과 초목이 어우러진 정자란 의미이며, 팔짝 지붕에 정자 가운데 온돌방이 있는 특이한 구조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니 지면과 달리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정자 아래에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있었다.
정자 바로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2개의 섬이 조성되어 수양버들과 배롱나무 꽃으로 어우러져 황홀하였다. 일명 최 씨 담이란 이 연못은 그 옛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최씨의 남편은 피신하고, 본가에 있던 최씨 부인은 시가에서 죽으려고 가던 중 왜적을 만나자 몸이 더렵혀지지 않으려고 연못에 투신하였고, 그녀를 따르던 노비도 함께 뛰어들었다는 애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방초정 옆에는 이를 기리는 최씨 부인과 노비의 비석이 있다. 연못 바로 앞의 논에는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서서히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연안이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숭례각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가례중해 판목이 있었는데 조선의 대학자 이의조가 저술한 가례중해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었다.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475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판목의 크기는 개당 46 ×55cm이고, 1995년 정면 3칸, 측면 2칸, 면적 8.85평의 맞배지붕으로 한식 건물인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였다. 이 판목은 김천 직지사에 자생하는 느티나무를 원목으로 제작하였다는 사실이 숭례각 주위의 관광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연안이씨의 종손이 손수 나와서 보호각 문을 열고 목판본을 보여 주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보면 목판 1개의 제작가액은 요즈음 시세로 1매당 약 300만 원이며, 총 1억 원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다. 종손은 이 목판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앞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떠날 때 종손께서 우리 일행에게 드링크 5박스를 선물하였다. 종손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다음 일정으로 일행은 부항댐으로 이동하였다. 가뭄 때문인지 댐의 저수량이 줄어 수면이 많이 낮아져 있었다. 호수에는 녹조가 가득하였다. 해설사는 부항댐의 조성 내역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어 이곳의 명물인 출렁다리를 건넜다. 시작 부분에서는 별로 출렁거리지 않았으나, 중간 부분에서 흔들림이 심했다.
우리 동문들은 6.25 동란 때 댐 주위에 빨치산 활동을 하는 공비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 당시를 회상하였고, 동문 간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불령산 청암사를 향하여 버스는 달렸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사찰로 들어갔고, 도중에 그 옛날 나의 선배인 학우들이 여름방학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의 공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경치 좋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학업에 열중하기 위하여 각자 소지품을 지고 절까지 이동했다고 한다.
청암사에는 교주이신 최송설당을 기리는 붉은 글씨가 절 입구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청암사의 대시주인 송설당을 고마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청암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승려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계곡이 절을 세로로 2등분하여 청아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용한 절이었다.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참배하기 위하여 돌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일부 동문은 대웅전 정중앙에 위치한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 종무소에서 바라보던 스님이 주의를 주었다. 일반 참배객은 오른쪽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중앙계단은 스님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청암사는 조선 숙종 시절 폐위된 인현왕후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3년을 기다리다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복위하였다. 이곳에는 왕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관광일정을 마치고 우리들은 김천 시내의 어느 식당에서 재단 이사장님과 동창회장을 모시고 저녁을 먹는 시간을 가졌다. 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사장님은 동창회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흐뭇하게 여기고 자신도 일하는데 힘이 난다고 말하였다.
코로나19로 3년 동안 만나지 못한 동기들을 만난 오늘 화창한 날씨에 서로의 우정을 다지는 소중한 자리였다. 인생을 사는데 친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속마음을 틀어놓을 수 있는 3명의 친구를 가지는 일은 행복하다고 하였다. 내년에도 이러한 행사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귀가하였다.
(2022. 09.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