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기유(己酉1909)년 설날 대성께서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쓰사 흰병에
물을 담은 뒤에 양지(洋紙)에 글을 써서 권축(卷軸)을 지어 병 입을 막아
놓고 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아 두셨고
(大巡典經4장 129절),
사흗날 고사(告祀)를 지내게 하신 것이다.
(大巡典經4장 131절)
한국미륵사상연구회 (진해원 현무경) : 1912년 가을
김형렬과 장기동은 임자
(壬子1912)년 10월 27일이 칠성도수(七星度數)에 맞는 날이라고 결정
하고 이날 친자(親炙)종도들과 천제를 올리고 문명을 열기로 하였다.
10월 25일 천제를 올리고 증산대성께서 남기신 문명을 열어 보려고 고
수부(高首婦)의 방에 들어간 사람은 고수부님, 김형렬, 차경석, 장기동,
김자현, 김준상, 김갑칠이었다. 이때 개봉한 문명이 현무경(玄武經)이다.
겉표지는 북쪽을 향하여 소지하였다. 장기동은 고수부께 현무경의 필사
(筆寫)를 청하니 고수부께서 허락하시어 필사를 한 후 증산대성의 친작
현무경은 원래 위치에 놓아두었다.
미륵불교 : 1913년 봄
계축(癸丑1913)년 봄에 태운은 대흥리(大興里)에 가서 고수부(高首婦)
를 뵙고 현무경(玄武經)을 등본(謄本)하여 와서 그 오묘한 이치를 잠심
추구(潛心追求)하더니 이해 가을에 장기동(張基東), 장기준(張基準)이 찾
아오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본소(本所)에 와서 고수부께 뵙고 이로부터
교단 일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甑山敎史64쪽)
### 정의도 두문동성수 ###
1. 정의도
1) 정의도 그려 붙이심
4장 71절
(무신년) 사월에 공신(公信)의 집 벽에 정의도(情誼圖)를 그려 붙이시고 구릿골로 돌아오신 뒤에 백남신(白南信)에게서 돈 천량(千兩)을 가져오사 김준상(金俊相)의 집에 방 한 간을 수리(修理)하고 약방(藥房)을 차리실 새 공우(公又)로 하여금 고부(古阜)에 가서 장판을 사오라 하사 깔으시며 가라사대 이는 고부 선인포전(古阜仙人布氈) 기운을 씀이로다 하시고 목수 이경문(木手李京文)을 불러 약장(藥藏)과 궤(櫃)를 짜이심에 장광척촌(長廣尺寸)과 짜는 방법(方法)을 낱낱이 가르치시고 기한(期限)을 정하여 주시며 그 기한을 넘기지 말라 하셨더니 목수가 기한에 마치지 못하거늘 천주 목수로 하여금 재목(材木)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 앞에 꿇어 앉게 하신 뒤에 기한 넘겼음을 꾸짖으시며 한 봉서(封書)를 주어 불살리시니 문득 번개가 번쩍이는지라 목수가 몸을 떨며 땀을 흘리더라 다시 명하사 속히 짜라 하시니 목수가 손이 떨리는 증수(症수)가 나서 한달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마치거늘 천주 목수에게 일러 가라사대 약장에 번개가 들어야 하리니 너는 몸을 정히 씻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여 청수(淸水) 한 그릇을 약장 앞에 놓은 뒤에 성심(誠心)으로써 절하라 하심에 목수가 명하신 대로 하니 문득 맑은 하늘에 번개가 크게 치는지라 약장과 궤를 약방에 들여놓은 뒤에 갑칠(甲七)을 명하사 날 마다 이른 아침에 방을 깨끗히 쓸게 하시며 문을 닫고 사람의 출입(出入)을 금(禁)하시고 스무하루(二十一日)를 지낸 뒤에 비로소 방을 쓰실새 통감 서전 주역(通鑑書傳周易) 각 한 질(一秩)과 철연자 삭도(鐵硏子削刀) 등 모든 약방기구(藥房器具)를 장만하여 두시고 가라사대 주역(周易)은 개벽(開闢)할 때 쓸 글이니 주역(周易)을 보면 내 일을 알리라 하시니라
2) 두문동성수
무신년 갑자월 신묘일에 신경수의 집 벽 위에 두문동 성수를 그려 붙이시고~
3) 정의도 및 두문동성수의 이동
(미륵천도회 증산의 삼대연원과 정통도맥 글에서 부분 인용)
8. 현무경 법맥(法脈)을 유춘래(柳春來)에게 위임함
1920(庚申)년 4월 5일에 현무경 개학치성(開學致誠)을 봉행(奉行)하는 자리에서 김경학(金京學) 연원장(淵源長)에게 허락을 받으시고, 7일 임오(壬午)일에 고흥인(高興人) 유춘래(柳春來), 여수인(麗水人) 최내경(崔乃敬), 낙안인(樂安人) 김중숙(金仲淑) 삼인(三人)에게 현무경 법방(法方) 7일 공부를 하교(下敎)하셨는데, 7일째 되는 날 공부를 결공(結工)하고 나서 장사수(張師首)께서는 춘래장(春來丈)에게 금후(今後)로는 자네가 알아서 가르치라고 하명(下命)하시었다.
1921(辛酉)년 8월에 김석정(金石井)을 문공신(文公信)의 집에 보내시어 정의도(情誼圖)를 찾아오게 하시고,
또
김경학(金京學)을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보내시어 두문동(杜門洞) 성수도(星宿圖)를 찾아오게 하시니,
원래 천주(天主)께서 두 제자(弟子)의 집에 양도(兩圖)를 각각 부벽(附壁)하실 때에〔금후(今後) 찾는 자에게 뜯어 주라. 만일(萬一) 네가 자의(自意)로 뜯는다면 멸문지화(滅門之禍)가 있으리라.]고 엄명(嚴命)하시었다고 하였다. 장사수께서 모든 법맥(法脈)을 유춘래장(柳春來丈)에게 연임(連任)하시고 1922(壬戌)년 3월 22일에 43세로 선화(仙化)하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초빈(草殯)하였다가 1954(甲午)년 3월에 전북(全北) 김제군(金堤郡) 황산면(凰山面) 남양리(南陽里)에 이빈(移殯)하고, 1989(己巳)년 4(己巳)월 5(己巳)일 기사시(己巳時)에 장사수(張師首)의 문하인(門下人) 제자들이 그 공덕(供德)을 추모(追慕)하고, 업적(業績)들을 길이길이 후학(後學)들에게 기리고 전하고 져 추모비(追慕碑)를 건립(建立)하였다.
...... 과연 저 정의도와 두문동성수는 친필일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의 필사본일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