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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150주년 역사신문 편집 1편
1. 대원군, “러시아 막아주면 신앙 자유 허용” 제안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병인박해 역사신문’을 연재합니다. 가장 많은 신앙 선조가 순교한 병인박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고, 얼마나 많은 분이 시련 속에서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살펴봅니다.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 과거 시점으로 기사를 전합니다. 기사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순교자 증언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인용 또는 정리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러시아 남하를 막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천주교 측에 비밀 제안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아울러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의 제안을 “조선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나라와 종교가 다르므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거절한 사실도 확인됐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Simeon Francois, 장경일, 파리외방전교회) 주교는 18일 대원군이 자신과 안면이 있는 관리를 통해 비밀 접촉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사실을 같은 날 작성한 편지를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자 알브랑 신부에게 알렸다. 편지에는 “대원군이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내 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이교도 관장을 통해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덧붙여 그는 “조만간 조선에 자리 잡을 길을 생각해내고야 말 러시아가 이 나라를 위협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다”며 “이 위험은 시급히 예방해야 한다”며 우려했다. 러시아는 지난 2월 두만강 접경 도시 경흥에서 조정에 통상을 요구한 바 있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고, 또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드러났다. 베르뇌 주교는 “대원군은 천주교를 좋은 것으로 알고, 서양인 선교사 8명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며 “그의 아내 또한 교리문답과 기도문 몇 가지를 익혔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자신에게 청했다”고 밝혔다.
베르뇌 주교는 현 조정 상황에 대해 “천주교에 가장 극단적 조치를 취할 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대신이 됐다”며 “호의적인 사람들과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복잡한 심경을 알브랑 신부에게 토로했다.
비밀 접촉, 왜 성과 없었나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의 남하만 막아주면 천주교 박해를 종식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각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중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 때문이라는 게 가장 신빙성 있는 해석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를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물리치고자 ‘이이제이’ (以夷制夷, 오랑캐의 힘으로 다른 오랑캐를 처치한다) 방책 차원에서 프랑스인 베르뇌 주교와 접촉한 게 분명하다.
러시아는 1860년 영국ㆍ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할 때 이를 중재한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 연해주 땅을 차지했다. 이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는 올해 2월 국경을 넘어와 경흥에서 통상과 국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바 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서양 국가들의 위협이 한반도에 미친 첫 번째 사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국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대책 마련 차원에서 베르뇌 주교와 접촉한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는 조정 내에 위기의식을 고양시켰다. 조정은 현재 북병사(北兵使)와 해당 지방관에게 러시아인을 도운 자를 찾아 죄를 묻고, 국경 일대 특히 연변 각처의 경계 강화 조치를 통보해 놓은 상태이다.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된 것은 1856년 애로우호 사건부터다. 이 사건으로 시작된 제2차 아편전쟁은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이 청나라 북경을 점령하고 북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마무리됐다. 조약 내용은 △ 외교 사절 북경 주재권 확인 △ 외국인 중국 내 여행 권리 인정 △ 그리스도교 선교 자유 인정 △ 구룡반도 영국 할양 등이었다.
일본의 경우 1853년 미 함대가 내항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한 것을 계기로, 그 이듬해 미·일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에 문을 열게 됐다.
1848년 조선에도 외국 선박이 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함경도 바다에 자주 출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뭍에 내려 물을 긷거나 고래를 잡아 식량으로 삼는 수준이었을 뿐 통상 요구는 없었다.
흥선대원군 국내 실권 장악
흥선군 이하응(44)이 지난해(1863) 12월 대원군(大院君)으로 임명된 후, 어린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조씨에게 모든 정책에 관한 실권을 비공식적으로 위임받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 2월 최고 의결기구인 비변사의 역할이 대폭 조정된 막후에는 실질적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된 흥선대원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삼포왜란(1510) 이후 국정을 총괄해 온 비변사의 역할을 외교ㆍ국방ㆍ치안 등으로 대폭 축소하고, 일반 행정사무는 행정기구인 의정부로 이관한 것도 대원군의 작품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지난 4월 안동 김씨 세력인 영의정 김좌근이 실각한 배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입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1820년 출생, 헌종의 7촌 아저씨, 철종과는 6촌인 왕족이다. 그는 사도세자 사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주정꾼 행세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는 철종이 후사 없이 병에 걸린 것을 알고 조 대왕대비의 동생 조성하에게 접근, 조 대왕대비와 은밀히 접촉하며 둘째 아들 명복의 존재를 알렸다. 또 지난해 철종 승하 후 원로 대신 정원용ㆍ조두순과 긴밀히 접촉, 둘째 아들 명복을 보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대원군’은 선왕이 후사 없이 승하한 경우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할 때, 새 왕의 생부에게 주던 존호다. 지금까지 덕흥ㆍ정원ㆍ전계군은 모두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존됐지만 흥선군은 유일하게 생전에 대원군으로 봉해졌다.
2. ‘천주교 허용’ 기대감 고조···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리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승지 남종삼(南鍾三, 요한, 49)이 ‘러시아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있는 서양 주교를 이용하자’는 방아책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46)에게 전달하자 대원군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이 알려졌다. 다블뤼 주교는 한양에 거주 중인 한 신자가 “이 사실이 신자들 사이 급속도로 퍼져 종교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며 “한양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할 정도로 신자들이 기뻐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흥부사 윤협은 지난해(1865) 9월 ‘서양인 수십 명이 강을 건너와 감영에 가서 러시아의 공문을 전달하겠다고 하였으나,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뜻으로 타일러 보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같은 해 11월에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한 사실이 있다고 함경 감사 김유연이 조정에 알렸다.
이러한 일련의 러시아 통상 요구가 대원군이 남종삼의 방아책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계의 일반적 견해다. 남종삼은 기자에게 “대원군이 내게 ‘주교가 러시아의 조선 점령을 막을 수 있느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자 ‘그럼 주교와의 직접 만남을 주선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원군 지시에 따라 좌의정 김병학(金炳學, 45)에게 방아책 내용을 알렸고, 김병학도 그 내용을 유심히 읽고 숙고한 후 “좋소”라는 짧은 대답만 남겼다고 말했다.
이번 일에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고종 임금의 유모 박 마르가리타씨는 “부대부인 민씨께서 ‘남편에게 편지(방아책)를 보낸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전갈을 베르뇌 주교의 복사인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남종삼은 홍봉주로부터 부대부인 민씨의 뜻을 확인한 후 방아책을 작성해 대원군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종삼은 대원군과의 만남 후 이 사실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이에 따라 김계호(토마스)가 황해도 일원을 사목 방문 중인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안토니오)이 내포 지방 당진 신리에 거처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를 찾아가 남종삼의 방아책 제안과 대원군의 면담 요청 사실을 알렸다.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에,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에 각각 한성부에 도착해 현재 모처에서 대원군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타임머신 2016> 남종삼은 누구인가
남종삼(1817~1866, 요한)은 남인계 학자 남탄교의 아들로 1817년 태어나 백부인 상교(아우구스티노)의 양자로 입적했다. 22세 때인 헌종 4년(1838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와 승지를 거쳐 고종 때에는 왕실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또 1861년 조선에 입국한 리델 신부의 우리말 선생이었고, 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교류하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홍봉주(토마스), 이유일(안토니오), 김면호(토마스) 등이 1865년 말 ‘이이제이 방아책’을 흥선대원군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상소문을 작성해 대원군에게 올리는 한편, 프랑스 주교와의 회동도 건의했다.
때마침 청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확산되자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방아책을 접고,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이것이 ‘병인박해’의 시작이다. 남종삼은 1866년 3월 경기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함께 순교했다. 유해는 절두산 순교 성지에 안치돼 있으며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시성됐다.
교회 지도자들, “흥선대원군 믿을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될 것이란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 교회를 사목하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은 대체로 대원군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쉽게 오지 않으리라” 전망했다.
조선대목구장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은 지금까지 우리 신자들에게 관여하고 있지 않은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면서 “대원군의 성격이 격하고 잔인하며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겨 만약 천주교를 공격하는 날이면 무섭게 박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경새재 연풍 산막골에서 영남권역을 사목하고 있는 페롱 신부는 “대원군이 포악함과 탐욕, 생명 경시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잃고 있다”며 “옛 대궐을 짓는 데 수만 명의 백성을 인부로 동원하고 국고를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론 신학교장 푸르티에 신부도 “현재 조선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 즉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서 “맹렬한 박해를 우리에게 가해 신자와 선교사가 세상에서 없어지게 할지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공주에선 신자 두 명이 고문받다 순교
1월 26일 공주 지방 옥사에서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이 요한이 교살형으로 순교했다.
내포 출신인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이 요한은 경상도 문경 지방에서 공공의 안녕을 교란한 죄로 체포됐다가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져 고문을 받다 사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장은 이들에게 배교하면 석방을 약속했지만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고 고문을 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문초를 받으면서도 △ 천주의 기본 진리 △ 천주의 존재 △ 천주의 계명 등을 설명했다고 관아의 한 관계자가 증언했다.
또 이 요한은 관장에게 “당신들이 우리 사지를 나뭇가지에 매서 잡아 빼고 우리 몸을 갈기갈기 찢고 우리 뼈를 가루가 되도록 부숴 놓는다 해도 우리는 배교하지 않겠다”며 한사코 배교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모두 중인 계급의 천주교 집안 사람들이다.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아버지에게 회장직을 이어받아 열성적으로 봉사해 모든 사람의 애정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이 요한도 3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 가운데 3명이 순교자로 알려졌다.
3. 대원군 태도 돌변에 주교와 신자들 대거 잡혀가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따라 회동을 기다리고 있던 베르뇌 주교가 2월 23일 전격 체포됐다. 제4대 조선교구장인 베르뇌 주교는 이날 복사 홍봉주(토마스)와 함께 한양 인근 은신처에서 체포돼 광화문 육조거리 우포도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은 베르뇌 주교 체포를 시작으로 25일 정의배(마르코) 회장을, 26일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27일에는 볼리외(경기도 지역 사목 담당) 신부와 도리(용인 손골 담당) 신부를 잇따라 잡아들였다. 아울러 포청은 베르뇌 주교 체포에 앞서 19일 모방 신부의 복사였던 최형(베드로, 52)과 전장운(요한, 55)을 불법인 천주교 서적 간행 혐의로 체포했다.
천주교 성직자들과 주요 평신도 인사들의 전격 체포는 대원군 이하응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따른 것으로 관측통들은 분석했다.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급선회한 데는 △대원군이 교회와 접촉하게 된 계기였던 러시아인들의 통상 요구가 사라진 데다 △지난 1월 청나라 주재 조선 사신의 보고가 주효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사신은 조정에 “청나라 조정이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신들은 대원군에게 천주교와 교섭한 사실을 비난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라고 거세게 압박했고, 위협을 느낀 대원군이 대신들 의견에 따랐다는 것이 조정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반면, 정치적 이유에서 박해가 시작됐다는 외부의 의견도 있다. 청나라 북경 프랑스 공사관 전속 의사 마르탱(C. Martin)씨는 “조선 내 선교사들이 정치에 개입됐기 때문에 갑자기 박해가 시작됐다"면서 “조선의 문호 개방을 원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에 교회가 연루돼 탄압을 받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탱씨는 조선 선교사들과 접촉한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자제했다.
한편, 신앙의 자유를 기대했던 천주교 신자들은 갑작스러운 박해에 큰 충격에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신자들은 마을에 머물고 있는 서양 신부 때문에 위험이 닥칠 것을 염려해 선교사에게 떠나달라고 청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던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서양 신부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며 “틀림없이 서양 군사들이 신부들의 원수를 갚으려 조선으로 와 내 아들을 죽일 것”이라며 비통해 했다고 임금의 유모 박 마르가리타씨가 전했다.
베르뇌 주교 체포 과정에는 밀고자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확인됐다. 밀고자는 베르뇌 주교의 심부름꾼이던 ‘이선이’로, 그는 배교 후 석방을 조건으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서양인 선교사들의 거주지 정보를 포청에 넘겼다.
현재 승지 남종삼(요한)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 명령이 내려진 상태이다.
베르뇌 주교는 고문에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23일 체포돼 우포도청에 수감 중인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강도 높은 신문과 가혹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베르뇌 주교 고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자 포졸 서인겸(야고보)과 그의 친척인 포졸 서신겸은 주변인들에게 베르뇌 주교의 신문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는 “떠나라고 한다면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겠느냐”는 관장의 질문에 “강제 추방을 하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다른 선교사들의 행방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계속되는 배교 권유에는 “영혼을 구하는 종교를 전하려고 왔는데 그 종교를 배반하라니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두어라”면서 “나는 당신 손안에 있으며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졸 서인겸은 베르뇌 주교가 26일과 27일 등 여러 날 동안 무자비한 형벌을 받았다고 상세히 증언했다. 서인겸은 “포졸들이 몽둥이로 베르뇌 주교의 다리를 매질하고 옆구리를 찔러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으스러지는 등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베르뇌 주교는 반복되는 고문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승지 남종삼은 지명수배자로 경기도 일대에서 피신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서양 주교를 이용해 러시아 남하를 막자’는 방아책을 전달했던 승지 남종삼(南鍾三, 요한, 49)이 현재 경기 지역에서 피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2월 말 한양에서 8㎞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남종삼을 만난 장 필립보씨는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의 체포 소식과 남종삼 또한 지명수배됐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을 느낀 남종삼은 서울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고 밝혔다.
남종삼과 동행했던 한 하인도 “남종삼이 2월 1일부터 3주간 아버지 남상교(아우구스티노, 84)가 있는 충청도 제천 산골 마을 묘재(충북 제천 봉양읍 학산리)에서 머물다 서울로 가던 중 장 필립보를 만났다”며 “남종삼은 그 자리에서 하인 6명을 돌려보내고 관리 표지를 뗀 채 몸을 피했다”고 증언했다. 하인들의 정보에 의하면 남종삼은 현재 장 필립보씨와 만난 곳에서 12㎞가량 더 떨어진 경기 고양 인근 마을에 몸을 숨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은 25일 사교를 믿은 혐의로 남종삼을 지명수배했으며, 관할 부서는 그의 뒤를 쫓고 있다.
4. 휘광이의 칼날에 순교의 붉은 꽃이 피어나니…,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신부 · 남종삼 등 잇따라 처형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ㆍ볼리외ㆍ도리 신부 등 4명이 7일 한양성 밖 남쪽 한강 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같은 날 남종삼(요한)ㆍ홍봉주(토마스), 9일 전장운(요한)ㆍ최형(베드로) 또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서양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의 처형은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형집행자인 휘광이는 고함을 지르고 춤을 추면서 수 번에 나눠 칼로 선교사들의 목을 벴다. 이들의 잘린 머리는 1m가 넘는 기둥에 걸려 3일 동안 군문 사방에 전시됐다. 남종삼과 홍봉주의 시신 또한 서소문 밖 네거리에 3일간 본보기로 포졸들의 감시 속에 방치돼 있었다.
이에 앞서 6일 주로 국사범을 다루는 의금부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서양인 선교사 4명에게 조선인들에게 사학을 가르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고종 임금에게 윤허를 청했다. 또 남종삼과 홍봉주 등에게는 천주교를 믿어 국법을 어겼고 서양인들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고종은 의금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형집행을 명했고, 다음 날 즉시 시행된 것.
아울러 사법기관인 추국청은 체포ㆍ수색 과정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들을 태우고, 팔도 전역 관리들에게 ‘사학 서적을 모두 걷어들여 해당 감영에서 태워 없애라’는 행정 지시를 내렸다.
추국청은 또 선교사들의 은신처 정보를 제공한 이선이에 대해 “사교를 배반할 것을 맹세했고 더는 신문할 단서가 없다”며 석방했다.
서양 선교사들을 새남터에서 처형한 것에 대해 조정은 사제들을 왕권과 국가를 위협하는 반역자, 바로 ‘대역 죄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새남터는 어영청 군사 교육장일 뿐 아니라 일반 형법이 아닌 군율로 국사범을 처형하는 장소이다.
베르뇌(한국명 장경일) 주교는 1854년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 1856년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조선교구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 사목 서한 「장주교윤시 제우서」를 반포하는 등 체계적으로 교회를 이끌며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또 한양에 인쇄소를 설치, 교리 문답ㆍ기도서ㆍ의식서ㆍ신심 생활 입문서 등을 출간해 성직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신자들이 교리를 익힐 수있도록 했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 사제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배론 성 요셉 신학교에 이어 제2의 신학교 설립을 계획했으나 박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현장 돋보기
천주교도들이 처형당한 7일 새남터 형장은 서양인 사제들을 구경하려는 군중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그중 많은 사람이 선교사들을 비웃고 그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르뇌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는데 이제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참으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주교와 신부들이 형장에 도착하자 휘광이 한 명이 선교사들의 양쪽 귀 아래에 화살을 꽂았다. 다른 휘광이들은 그들의 얼굴과 머리에 물과 석회를 뿌렸다. 그리고는 휘광이 여섯 명이 긴 칼을 쳐들고 쉴 새 없이 선교사들 주변을 돌다가 멋대로 치고 싶을 때 칼을 내리쳤다. 이윽고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ㆍ볼리외ㆍ도리 신부 순서로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제들은 이국땅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이들이 고문을 이겨내고 겸허히 칼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알려줄 사람이 없어 걱정된다던 ‘천국의 길’에 그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대왕대비 조씨 ‘사교를 금지하는 교서’ 반포
대왕대비 조씨가 10일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조정은 한문과 한글로 작성한 교서를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음은 교서 전문이다.
“요즘의 서양인 사건은 참으로 일대 변괴이다. 몇만 리 밖에 있는 흉악한 종자와 추악한 무리가 팔을 내 휘두르며 출입하고 사술(邪術)을 제멋대로 행하였으니 그를 끌어들인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가 붙어살게 한 곳이 있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나라에 원망을 품고 있으며 제 뜻을 잃은 무리들과 반란 음모를 꾸미기 좋아하는 무리가 서로 굳게 엉켜서 음흉한 모의를 꾸며서 우리 백성들의 떳떳한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교화를 어지럽혔으니 천도(天道)로 용납할 바가 아니며 왕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제 그들을 차례로 체포하여 크게 처단하였으나 소식을 몰래 통하고 무리 지어 널리 퍼뜨릴 것이 염려되고, 또한 법망을 피해 자취를 감출 우려도 없지 않다. 도회지의 큰 거리나 산간 벽촌의 마을을 막론하고 그가 비록 우리나라 옷을 입고 우리나라의 모자를 썼다고 하더라도 얼굴 모양이며 말과 행동이이미 우리나라 사람과는 다르니 응당 알지 못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안으로는 형조·한성부·양사(兩司)·좌우변 포도청, 밖으로는 팔도와 사도(四都), 감영과 고을, 진영과 역참에서 각자 단속하고 특별히 더 체포하여 기어코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리나 백성들 가운데 만약 고발하는 사람이나 체포하여 바치는 자는 그 공로를 표창해 주고 수고를 갚아줄 것이며 또한 특별히 뜻을 보일 것이다.
만약 뒤얽혀 서로 호응하면서 숨겨두고 아뢰지 않다가 끝내 특별한 조사에서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베어 죽여야 할 것이며, 사람들도 역시 다 같이 그를 처단하게 될 것이다. 먼저 이러한 내용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서 거리와 마을에 붙여 모두 잘 알게 하라.”
5. 다블뤼 주교와 위앵 ·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 장주기 등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효수
3월 30일 충청 갈매못 형장에서 휘광이가 다블뤼 주교 목을 치고 값을 흥정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와 위앵ㆍ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황석두(루카)ㆍ장주기(요셉) 등 5명이사교를 전교하고 선교사를 보호하는 등 국법을 어긴 죄목으로 3월 30일 충청도 보령 갈매못 수영 군사 훈련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날 형 집행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군관의 통솔에 따라 진행됐다.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고문으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포졸들에게 끌려왔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형장에 모인 군중들은 이들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하지만 위앵 신부는 자신들을 조롱하는 이들에게 “나는 젊어서 죽는 것도 칼을 받아 죽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지만, 저 불쌍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괴롭습니다”라고 애처롭게 말했다.
다블뤼 주교가 제일 먼저 처형됐다. 희광이는 다블뤼 주교의 목을 잘리지 않을 정도로 한 번 내리치고, “돈을 더 많이 주지 않으면 계속하지 않겠다”면서 군관에게 흥정을 시도했다. 그 사이 상당량의 피를 흘린 다블뤼 주교는 두 번 더 칼을 받고 순교했다.
이어 위앵ㆍ오메트르 신부는 두 번씩 칼을 받고, 황석두ㆍ장주기는 단칼에 목이 잘렸다. 이들의 시신은 4일간 형장에 버려진 채 있다가 그 근처에 사는 이들에 의해 형장 모래사장에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형 집행은 본래보다 2일 앞당겨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형장 인도를 맡은 포졸들은 “본래 이웃 읍내에 들려 천주교인들에게 모욕을 주고 늦게 형장으로 갈 계획이었다”면서 “다블뤼 주교가 대화 내용을 듣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에 함께 죽어야 하니 당장 형장으로 가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해 어쩔 수 없이 30일에 맞춰 형장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다섯 순교자가 처형된 날은 교회 전례력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3월 7일 이후부터 처형된 날까지 23일간 조선대목구장을 역임했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역대 서양 선교사 중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로 한국어에도 가장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조선교회와 순교자에 대한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저술해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 연구에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앞서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 정의배(마르코)ㆍ우세영(알렉시오) 등 4명이 사교를 전파한 죄목으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왜 새남터 아닌 충청 수영 갈매못 형장이었나
대역 죄인인 서양 선교사들을 새남터 형장이 아닌 충청 수영 갈매못에서 처형한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반역죄에 준하는 국법을 어긴 죄인들은 보통 한양 새남터 형장에서 처형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은 왕권을 모욕하고 국가 기강을 흐린 죄로 모두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와 신자들은 같은 죄명을 받고도 한양에서 100여 ㎞ 떨어진 충청 수영 갈매못에서 처형됐다.
이를 두고 정계 관계자는 “고종 임금의 대혼례가 가까워진 상황에서 수도에서 사형을 집행하면 나라에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을 우려한 대신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지난 2월 15일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 상황이며, 고종 임금의 대혼례는 5월 5일 치러질 예정이다.
다른 일각에서는 고종 임금이 정치 일선에 새롭게 나서는 시기에 처형일이 맞물려 지방에서 형을 집행했다고 주장도 나오고 있다. 3월 22일 선왕인 철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대왕대비 조씨가 3월 29일 수렴청정을 그만두면서 고종 임금이 명목상 국정 최고결정권자가 됐다.
의금부의 한 고위 관리는 “이와 비슷한 시기인 3월 23~24일 다섯 죄인에 대한 사형 판결이 났다”며 “이런 시기에 한양에서 참수형을 집행하는 것은 꺼려지는 부분이 많아 해읍정법에 따라 천주교인들이 잡힌 충청도에서 형을 집행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내놨다. 해읍정법(該邑正法)이란 본래 살았던 거주 지역에서 형을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더불어 천주교인에 대해 사형 선고가 내려진 때에 고종 임금이 병을 앓고 있어, 한양에서 참수형을 집행하면 치료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해 지방에서 처형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조선 내 서양 선교사 얼마나 남았나
2월 23일 조정에서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이라는 ‘포고령’을 내린 후, 약 한 달 만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 12명 중 베르뇌ㆍ다블뤼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순교했다.
현재 체포되지 않은 서양 선교사는 리델ㆍ페롱ㆍ칼레 신부 등 3명이다. 3월 중순 리델 신부가 충청도 진밧(충남 공주 사곡면 신영리)에서 목격돼 포졸들이 출동했으나 잡지 못했다고 충청 감영 관계자는 밝혔다. 칼레 신부도 경상도 문경, 충청도 연풍 등지에서 포졸에게 발각됐으나 근방에서 거주하던 신자들 도움을 받아 다시 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 감영 포졸들은 선교사의 뒤를 쫓고 있지만, 신자들은 체포하지 않고 있다. 천주교 박해로 인해 백성들에게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줘 모내기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계속된 가뭄 조짐에 “천주교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탓”이란 말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있어 당분간 천주교 신자 체포 및 처형은 소강상태를 유지할 전망이다.
6. 박해 일시 소강상태, 그러나 조만간 재개될듯... 리델 신부, 중국으로 피신… 프랑스 로즈 제독에게 조선의 참상 알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사목하던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가 박해를 피해 지난 7월 중국으로 피신한 것이 확인됐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리델 신부 서한에는, 그가 신자 11명과 함께 7월 1일 충청도 신창 용당리를 출발해 7일 중국 산둥 해안 체푸항에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리델ㆍ페롱ㆍ칼레 신부는 지난 3월 다블뤼 주교와 동료 선교사들이 체포돼 순교할 때살아남았다. 리델 신부의 중국 피신에 대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측은 세 신부가 조선 교회의 박해 참상을 외부에 알리고, 구제책을 마련하기 위해 리델 신부를 대표로 뽑아 중국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8월에 작성한 이 서한에서 리델 신부는 “(중국에) 가져간 소식은 유럽 거류민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면서 “중국 해안에서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로즈(Roze) 제독을 천진에서 만나 그에게 도움을 받기로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약속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서한에서 밝히지는 않았다.
리델 신부 일행은 전나무로 만든 작은 배를 이용해 중국으로 간 것도 확인됐다. 쇠 대신 나무못을 사용하고 풀을 엮어 돛을 만든 작은 배로, 리델 신부는 이 배를 ‘성 요셉 호’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서한에서 “배를 마련하는 데 상당히 어려웠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당시 새 궁궐 건축에 사용할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한양 군사들이 배를 징발하고 있었기에 리델 신부의 고백처럼 신자들이 당국에 발각되지 않고 배를 마련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아울러 리델 신부가 중국 도피 전까지 세 선교사가 함께 지냈던 사실 또한 확인됐다. 리델 신부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에 페롱 신부와 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페롱과 칼레 신부는 현재 충청도 목천 인근에 함께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현상금을 내걸고 이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체포를 위한 수색과 추적이 강화되고 있지만 일반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현재 소강상태다. 농번기인 여름 동안 전국에서 체포된 천주교도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 같은 소강상태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조정의 한 관계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든 탓에 천주교도들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다”며 “추수를 마치면 천주학쟁이들을 다시 잡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종, 천주교 배척하는 ‘척사윤음’을 내리다
고종 임금이 9월 11일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고종은 척사윤음에서 천주학은 △ 임금과 아버지를 무시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고 △ 천당 지옥을 말해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고 △ 남녀 간의 구별이 엄한데도 함께 지내는 등 성인의 도가 거의 소멸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을 바르게 하기 위해 이단의 학문을 배척한다고 선포했다.
이번 척사윤음은 지난 3월 대왕대비 조씨가 반포한 ‘사교를 금지하는 교서’의 약 8배 길이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경고보다 천주교 교리의 부당함에 현혹되지 말라는 타이름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고종의 척사윤음 반포 배경에는 지난 3월 다블뤼 주교 일행 처형 이후 6개월 만에 집행한 천주교 신자의 처형이 크게 작용했다. 척사윤음 발표 이틀 전인, 9일 고종 임금은 사학죄인 김계호(토마스)ㆍ김원익(바오로)ㆍ이연식에게 군문효수형을 내리고 한양성 밖 남쪽 한강 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처형했다. 한 대신은 “처형 다음 날 임금이 서둘러 윤음을 작성할 것을 명했다”며 “윤음을 전국 방방곡곡에 붙여 그릇된 풍습을 고치는 성과가 반드시 있게 하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제너럴 셔먼호, 평양 관민에 의해 불타 선원 전원 사망
평양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시위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2일 평양관민들에 의해 불타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ㆍ영국ㆍ중국ㆍ말레이시아인 등 승무원 24명 전원이 사망했다.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지난 8월 25일 평양 서쪽 대동강 변에 배를 정박한 후 통상을 요구했다. 조정에서 통상을 강경히 거부하자 선원들은 상륙해 약탈을 자행하고 이를 저지하려던 평양 관민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했다. 이 사실을 안 평양 관민들이 강변으로 몰려들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이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발포해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크게 다쳤다. 이에 격분한 관민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불을 질러 선원 전원이 몰살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
제너럴 셔먼호 공격을 지휘한 평안 감사 박규수는 5일 조정 보고에서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 사람들이 포와 총을 쏘며 우리 사람들을 살해해 배에 불을 질렀다”면서 “배 밖으로 뛰어 나온 사람들까지 군민들이 모여들어 때려죽였다”고 밝혔다.
고종 임금은 이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가 몰래 침입해 백성들을 살해했다”며 “그들이 죄악을 쌓은 것이 이미 오래돼 스스로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상선으로 북군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장군의 이름을 딴 증기선이다. 현재 평양 관민들은 증기선을 복제하기 위해 대동강에 침몰한 제너럴 셔먼호의 인양 작업을 준비 중이다.
7. 프랑스 군대, 조선 강화도 침략...병인양요 후 천주교에 대한 반감만 증폭
11월 11일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병인양요가 끝났다.
임시 군사 기관인 순무영(巡撫營)은 이날 조정 보고를 통해 “갑곶진에 정박하고 있던 크고 작은 이양선들이 오전에 전부 닻을 올리고 아래로 내려가 덕적진 앞바다를 지나 부평 일대로 향해 갔다”고 알렸다. 이로써 28일간의 전투가 마무리됐다.
프랑스, 학살 당한 선교사에 대한 보상 요구
이번 전쟁은 10월 14일 프랑스 로즈(Roze) 제독이 군함 7척에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화진 갑곶진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이틀 후 군사적 요충지인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민가를 불태우고, 강화부궁 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의궤와 은괴 19상자, 도서 340여 권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김포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한 프랑스 군대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11월 9일 정족산성에 매복해 있던 양헌수와 군사 300여 명의 공격으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난 프랑스군이 강화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순무영은 11월 12일 “강화성 남문을 비롯해 장년전ㆍ만령전ㆍ객사ㆍ공해ㆍ훈련원ㆍ어영청 등이 파괴되고 민가 절반 이상이 불에 타 없어졌다”면서 “갑곶포 민가에 보관해 뒀다가 프랑스군에 뺏긴 쌀이 약 400석 정도”라고 보고했다.
양국의 협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정은 10월 19일 서한을 통해 로즈 제독에게 “너희 종교를 전교하려는 것은 더욱이 안 될 일이다. 지인지덕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도망치지 말고 머리 숙여 명령을 따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이 답장에 “조선에서 학살당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러 왔다”며 △ 프랑스 선교사들 학살에 가담한 대신 3명에 대한 엄중한 처벌 △ 조약 초안을 함께 작성할 사절 파견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면서 결렬됐다.
조선, ‘천주교 전파는 문물제도 어지럽게 한다’ 비판
종전 이후 서양에 대한 반감과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호군 이항로는 11월 10일 자 상소에서 “남의 나라에 난리를 피운 오랑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서양인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면서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는 것은 자기의 패거리들을 늘려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우리의 문물제도를 어지럽히고 재물을 약탈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데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고종은 11월 24일 서양 물품 사용을 금지하는 전교를 내리면서 “서양 오랑캐들이 소란을 피우며 교역을 하자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서양 물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며 “최근의 형세로 보면 더욱 엄히막지 않을 수 없으니 수색해서 적발된 자가 있으면 의주부에서 먼저 벤 뒤에 아뢰
리델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 프랑스군에 도움 줘, 파문
지난 7월 중국으로 피신했던 리델 신부를 비롯한 최선일ㆍ최인서ㆍ심순녀 등 조선인 천주교 신자 3명이 프랑스 군대에 도움을 준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프랑스군은 지세와 수로 정찰 목적으로 지난 9월 18일~10월 3일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온 후 퇴각한 바 있다. 목격자들 증언에 의하면 리델 신부는 통역을, 조선인 신자들은 안내자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강화도 주민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프랑스 남자가 와서 여러 가지를 캐물은 적 있다”며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조정도 이번 프랑스 침공에 천주교도들이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종은 10월 17일 교서를 통해 “필시 우리나라의 간악하고 하찮은 무리가 뜻을 잃고 나라에 원망을 품었거나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망명해 그들과 오래전부터 결탁하여 몰래 내통하면서 바다를 건너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공공연히 반역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각에선 서양과의 화친을 주장하지만,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다. 이항로는 “양적을 치자고 하는 것은우리 편 사람의 말이요, 양적과 화의하자고 하는 것은 적측 사람의 말”이라며 “우리 편대로 하면 나라 안의 예의를 보존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하면 인류가 금수의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라며 강하게 다그쳤다.
고종은 10월 31일 전교를 내리며 “프랑스군이 창궐하는 것은 고금에 없었던 변고”라며 “저들과 몰래 내통하여 함께 음모를 꾸미고 돕는 자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각 관청에서 잘 적발하여 즉시 해당하는 법조문을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타임머신 2016]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 4월 14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45년 만이었다. 의궤는 조선 왕실이나 국가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한 책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프랑스는 2011년부터 5년마다 대여 합의를 갱신하는 식으로 의궤를 한국에 영구 임대 반환했다.
반환 5주년을 맞은 올해, 2월 2일 한국과 프랑스 외교부는 5년간 대여를 연장한다는 합의문을 교환했다. 이어 3월엔 프랑스국립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갱신 절차를 밟았다. 의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외규장각 의궤 전권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는 외규장각 의궤 누리집(http://uigwe.museum.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8. 한강 양화진, 신자들의 피로 물들다
병인양요 여파로 천주교 신자 박해가 다시 격화됐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데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인양요가 진행된 10월 14일~11월 24일 천주교 신자 20여 명이 서울에서 양천으로 이어지는 한강 연안의 양화진에서 처형됐다.
두달여간 신자 20여 명 처형
10월 23일 이의송(프란치스코)ㆍ김이쁜(마리아)ㆍ이붕익(베드로) 일가와 김한여(베드로)ㆍ최경원(야고보) 등 5명이 가장 먼저 양화진 북쪽 잠두봉 근처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에 앞서 10월 22일 의정부는 “사학죄인 이의송ㆍ이붕익ㆍ김이쁜 등 3명이 조사 중 사학에 물들게 된 사정을 털어놓았다”고 보고하면서 “사람을 해치는 무리와 규합해 꾐에 빠져 재앙과 난리를 도모하려 한 주벌해야 할 인물들”이라며 고종 임금에게 처형 윤허를 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고종의 명에 따라 처형이 시행됐다.
10월 25일 김중은(베드로)ㆍ박영래(요한), 11월 11일 김인길(요셉)ㆍ김진구(안드레아)ㆍ김진(베드로)ㆍ최수(베드로), 11월 16일 강명흠(베드로)ㆍ김큰아기(마리아)ㆍ이기주(바오로)ㆍ황기원(안드레아), 11월 20일 박성운(바오로)ㆍ원후정ㆍ이용래(아우구스티노), 11월 24일 성연순ㆍ원윤철(요한 사도) 등이 양화진에서 군문효수로 처형됐다.
양화진 처형자 대부분은 서양인 침략을 도운 혐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포도청은 심문 과정에서이의송이 “서양 선박이 조선에 온다는 설은 작년 12월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었다”고 진술했고, 김진구ㆍ최수ㆍ김인길도 △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는 시기를 미리 정확히 맞추고 △ 프랑스 배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고 △ 프랑스 군함이 침입한 목적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천주교 탄압 거세질 전망
국내 몇몇의 천주교 신자가 병인양요 이전부터 프랑스 군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 밝혀짐에 따라 천주교 신자 탄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의정부는 11월 21일 “서양 배가 먼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하는 무리가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형조ㆍ한성부ㆍ좌우변 포도청ㆍ팔도와 사도 및 각 진영에서는 간사한 무리들과 관계되는 자들을 모두 수색 체포해 의정부에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정부는 이날 고종 임금에게 ‘한 사람이 사학죄인을 20명 이상 잡을 경우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내어 줄 것’을 청했고, 고종 임금은 이를 윤허했다.
왜 천주교 신자들을 양화진에서 처형했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신자 처형지를 양화진으로 옮기며 포고한 글에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침략에 앞서 지난 9월 18일~10월 3일 지세와 수로를 정찰하기 위해 실시한 1차 원정에서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온 후 퇴각한 바 있다.
이전까지 베르뇌 주교, 남종삼 등 천주교 신자들은 주로 국사범 처형장인 새남터,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와 달리 병인양요 이후 새남터와 서소문 밖 형장에선 천주교 신자 처형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조정 관계자는 “처형지를 옮긴 조치에는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처형함으로써 천주교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하고, 드러나지 않은 신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프랑스군과 더는 내통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병인양요로 인해 도성 내 서양인과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있는 상황인 만큼 당분간 천주교 신자 처형이 양화진에서 계속될 전망이다.
양화진에서 처형된 대표 순교자
이의송(프란치스코, 1821~1866) - 황해도 신천 출신의 종기 의원으로 1857년 서울에 상경해 정의배 회장을 만나 천주교를 접하고,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의 처 김이쁜과 아들 이붕익도 차례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의송은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황해도 지역 12개 이상 고을에 복음을 전해 ‘황해도의 사도’라 불렸다.
김한여(베드로, ?~1866) - 상의원(尙衣院) 소속 비단 장인(능라장)이었던 김한여는 기해박해(1839) 체포됐다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해 신앙과 멀어진 신자였다. 그러던 중 베르뇌 주교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사람들을 입교시키는 등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1866년 체포된 김한여는 “천당에 가서 천일주를 먹을 것”이라며 기쁜 얼굴로 형장에서 순교했다.
김진구(안드레아, 1825~1866) - 선혜청(宣惠廳) 사령으로 일해온 김진구는 정의배 회장의 권고로1846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견진성사를 받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던 김진구는 1866년 9월 체포됐지만 “천주교는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다.
박성운(바오로, 1843~1866) - 할아버지를 통해 천주교를 접하고 신자가 된 박성운은 배움이 짧아 외울 수 있는 기도문은 많지 않았지만 충실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1866년 3월 베르뇌 주교가 순교했을 때 주교 시신을 매장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 체포된 그는 “천주교는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성호를 긋고 칼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9.봄부터 시작된 박해의 칼날에 수많은 신자들 희생
병인년, 올 한해는 한반도가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물든 해였다.
봄에 처형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사제들을 비롯해 병인양요 후 절두산에서 처형된 신자들까지 수많은 천주교인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수를 추산할 순 없지만, 지난해 조선 교회 신자가 약 2만 3000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중 상당수가 순교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대대적으로 박해가 이뤄진 지난 1년을 돌아보며, △ 서울ㆍ경기 △ 충청 △ 경상 △ 전라 등 지역별 순교자와 순교지를 살펴본다. 첫 번째는 서울ㆍ경기 지역이다.
서울
서울은 조선 교회의 수장인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담당한 지역이다. 평화신문에서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베르뇌 주교는 박해 직전까지 서울을 4구역으로 나누고, 회장을 임명해 사목한 것으로 확인됐다. 베르뇌 주교는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4명의 회장을 데리고 있다”면서 “사람들이 회장을 통해 성사를 청하면 회장이 나를 데리고 성사가 필요한 신자의 집으로 간다”고 밝힌 바 있다. 이때 회장직을 수행한 인물은 정의배(마르코)ㆍ최사관ㆍ최인서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은 조선 교회의 중심지였던 만큼 주교, 사제, 회장 등 주요 인사들이 국사범으로 처형된 장소다. 3월 7일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애르ㆍ볼리외ㆍ도리 신부, 3월 11일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경기
경기 지역은 서울 다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많은 지역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지만, 50% 이상이 수원ㆍ용인ㆍ양지 등 경기 남부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경기관찰사는 “1820년대 이후 충청 지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경기 지역으로 이주한 후 교우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비교적 박해에서 자유로웠던 송도 지역 또한 이주 신자가 늘어나면서 교세가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중 충청 출신 정여삼(바오로)과 이화실은 용인 삼배일로 이사해 살다 지난 11월 경기 광주 포교에 잡혀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정은(바오로)과 그의 손자 정양묵(베드로)도 12월 8일 체포돼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서울 대표 순교지
새남터 : 한양성 밖 남쪽 한강 변 모래사장에 자리한 군사들의 연무장. 군문이 있어 반역을 일으킨 중죄인이나 국사범을 처형했다.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형된 장소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 중에선 주교와 사제 등 지도자급 인사가 처형됐다.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이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순교했다.
서소문 밖 형장 : 태조 임금 때 ‘소덕문’(昭德門)이란 이름으로 한양 도성 서남쪽에 만든 문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가 1744년 영조 임금 때 중건되면서 ‘소의문’(昭義門)이라 이름을 바꿨다. 근처에 시장이 있어 죄인을 처형하며 일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좋아 처형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형 후 시신을 내다 버리고 있어 많은 이들이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부른다.
양화진 : 서울에서 양천으로 이어지는 한강 연안에 자리한 나루다. 병선의 훈련장이면서 동시에 이동하거나, 배를 기다리는 사람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어서 처형장으로 활용하기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정은 지난 9월 수로 정찰을 나온 프랑스 군대가 양화진까지 침범했던 것을 계기로 병인양요 중 적발된 천주교 신자 20여 명을 이곳에서 처형했다. 양화진 일대가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후문이 신자들 사이 퍼지고 있다. 대부분 극형인 참수형을 받고 순교해 양화진 잠두봉을 ‘절두산’(머리를 자르는 산)이라 부르는 사람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포도청 : 치안을 담당하는 조정 관청이다. 좌포도청(서울 동ㆍ중ㆍ남부와 경기좌도 지역 담당)과 우포도청(서울 서ㆍ북부와 경기우도 지역 담당)으로 나뉘어 죄인을 체포하고 옥에 가둬 심문했다. 서양인 선교사와 회장 등 지도자급 신자들은 지방에서 체포되더라도 서울로 압송돼 포도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여성 지도자인 박아기(막달레나)는 11월 교수형을 받고 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대표 순교지
남한산성 : 군사적 요충지인 경기 광주에 세워진 산성.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1624년 인조 임금이 후금국의 위협을 받은 이후 안쪽 둘레는 17리 반, 바깥 둘레는 20리 95보 규모로 중건했다. 현재 성 안에는 광주부 읍치가 있고, 유사시 국왕이 거처할 행궁과 사직을 옮길 우실도 갖추고 있다.
광주와 양주ㆍ용인ㆍ이천 등지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군사 훈련 장소인 연무관과 포도청에서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기해박해(1839년)부터 지금까지 순교한 신자 수만 300여 명에 가깝다.
수원화성 : 1796년 정조 임금 당시 완공한 성으로 다산 정약용(요한)이 설계했다. 수원 근교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고문을 받고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형장과 동장대 등에서 순교했다. 회장으로 수원 지역 선교에 힘썼던 김사범도 체포돼 성 안 옥에 갇혔다. 그러다 심문 중 맞은 장이 화근이 돼 순교하고 말았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즉시 처형한 신자들이 많아 이름 없는 신자들까지 포함하면 순교자 수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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