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13 동양철학 03 논어 1
[인문학 고전콘서트] 3부 논어-성인에 이르는 길 1강(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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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안녕하십니까? 홍익학당 대표 윤홍식이라고 합니다. 고전 콘서트 이번에는 3탄으로요 훈민정음이 있었죠. 그다음에 중용이 있었고, 이번에는 3탄 논어. 가장 많은 분들이 읽는 동양 고전의 대표작이죠. 그래서 논어에서 우리가 성인에 이르는 길. 진정한 공부란 뭔지? 그래서 이 공부라는 건요 진정한 공부다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난번 중용 강의를 들으셨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중용에서 이런 말이 있었죠. 중용 1장에서요 하나님이 인간한테 내려준 명령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이러는 거죠.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 안에 본성으로 살아있더라. 그리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게 따를 솔(率)자입니다. 따를 솔(率)자 본성 성(性)자,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더라. 그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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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길을 수도(修道)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도 닦으러 산에 가.” 이런 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길입니다. 인간이 걸어야 할 인간의 길을 우리가 이제 동양에서 인도(人道) 그러죠. 천도(天道)와 지도(地道)가 이렇게 대응되는 겁니다. 하늘이 걷는 길이 있고요. 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고 이런 건 하늘이 걷는 길입니다. 빅뱅을 일으켜가지고 우주가 어떻게 변해간다. 지구가 별 하나가 생성됐다 사라지고, 또 생성돼서 별 안에서 춘하추동이 펼쳐지고 이런 건 지도(地道)입니다. 인간의 길은요 생명체들의 길입니다. 생명체들이 한 해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가면서 또 종족을 유지해가면서 어떤 게 올바르게 사는 길인가 하는 게 인도(人道)인데요. 동물이나 식물의 길은 인도 안에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천도, 지도는 아니거든요. 동식물은요, 식물 동물 인간은 천지와는 또한 구별되는 개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식물도 “얘가 살았네 죽었네”가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이렇게 인간이 제일 대표합니다. 그래서 인간, 천지인(天地人)만 얘기하면요 동식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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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냐? 인간 쪽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광물은 땅에 속하겠죠. 걔는 개체성이 약하니까. 자 그런데 이 인간의 길을 누구나 알 수 있게 길을 자 수리한다는 겁니다. 지금 고속도로 낸다는 거랑 같은 개념으로 보세요. 무형의 길, 고속도로는 유형의 길이잖아요. 그래서 길을 닦기가 좋은데, 닦을 수(修)자죠. 길을 닦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요 누구나 갈 수 있게 아스팔트로 아주 그걸 10차선 20차선으로 넓게 해 놓으면요 인간이면 누구나 이리 오시겠죠. 그래서 이 수도라는 것은요 내가 내 안에 있는 본성을 내가 열심히 따라가지고 따르는 게 인간의 길을 걷는 거고, 그 길을 내가 열심히 걸어서 남들한테 그 뭐죠 모델이 되는 걸 말합니다, 수도(修道)는요. 남한테 모델이 되면요,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그 길이 안 보여요. 길 아는 사람이나 느끼겠죠.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열심히 온몸으로 그걸 표현해 주면 다른 사람들이 그 길을 유형적으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렇게 하는 거라고.” 그게 수도(修道)입니다. 그걸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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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교육(敎育)이라고 한다. 이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 이게 이제 중용 1장을 지난번 했던 건데 이게 논어에도 전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예에요. 유교 얘기하는데 기독교 얘기하기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런 걸 제일 표현을 잘했어요. 예수님한테요 제자들이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아버지는 형체가 없죠. 안 보여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했기 때문에 형체가 없어요. 형체가 없는 세계인데 그런데 법칙은 분명히 있어요, 아는 사람한테는.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했을 때 예수님이 “내가 말하고 내가 행하는 거 보면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어떤 각오를 가지고, 이게 이제 인간 중의 인간이라고 하는 성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에요. 성인은요 무형의 아버지 뜻대로 사는 게 본업이기 때문에 “천명대로 사는 게 내 양식이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거 보면 아버지가 뭘 어떻게 생기셨고 무얼 명령하셨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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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이제 인간 중의 인간인 성인(聖人)이에요. 보세요. 성인 성(聖)자 귀 이(耳)자에 입 구(口)자입니다. 이게 이제 맡길 임(壬)자인데요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은 천명(天命)을 듣는 거예요. 천명이 일반인한테는 안 들려요. 우리 마음속에서 늘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안 들려요. 그걸 예민하게 듣고 남한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성인이에요. 정확하게 설명해줘요. 그럼 뭘까요? 이 천명이 전혀 어렵지 않죠. 동양에서는 천명은요 간단합니다. 여러분 아주 잘 아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에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명령어가요 5개가 입력되어 있습니다. 동양에서 오행으로요. ①사랑하라 ②정의로워라 뭐죠 ③겸손하라 예절을 지켜라 그다음에 ④지혜로워라 그다음에 ⑤성실하라. 이 모든 걸 성실히 하라. 이 다섯 가지가요 우리 안에는 명령어로 박혀 있어요. 이것만 성(性)은 아니죠, 사실은. 여자 좋고 제가 이성을 식욕 성욕 권력욕 명예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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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성(性)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거든요. 마음에 살아있는 거면 성(性)이에요. 그런데 왜 그 음식남녀(飮食男女)라고 하죠, 중국에서 식욕 성욕을요. 왜 걔네들은 부정하고 인의예지신만 고급스럽다고 하느냐? 왜 철학자들은 그걸 천명에 대해 얘기할 때 그 얘기를 먼저 하느냐 하면요 우리가 제가 권해드린 명상법으로요 “모른다” 하시고 이름도 잊고 존재해 보시면 그때 남는 본성은요, 그때 작동하는 프로그램은 인의예지신만 작동합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 권력욕 물욕은요 그때 작동을 안 해요. 즉 더 고차원적인 프로그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 제가 비유 드렸었죠. 전화만 거는 게 저차원 기능이면 그걸 가지고 인터넷도 하고 훨씬 많은, 다른 사람들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데 쓰신다면 그건 고차원 프로그램이거든요. 한 제품의 고차원적 기능과 주차원적인 기능이 같이 있다는 겁니다. 단 일단 프로그램 돼 있는 건 다 성(性)인데 그 중에 하느님의 본뜻이 인간한테 그냥 명예욕 권력욕 물욕만 가지고 살으라고 했느냐 라고 철학자들은 분석을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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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더라는 겁니다. 그건 동물도 다 하더라. 동물도 서열 다툼하고 음식 다툼하고 이성 다툼하고 다 하더라. 그럼 인간만의 고유, 더 잘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느님이 하늘이 자연이 우리 인간한테 뇌를, 더 특이한 뇌를 줬을 때는 기대하는 게 있거든요. 자연은 냉정해요. 뇌를 별로 안 써도 되는 동물들은요 뇌를 최소화합니다. 왜냐하면, 뇌가 제일 인체에서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뇌를 갖다 뇌 용량을 크게 해 주는 건 자연은요 함부로 선택을 안 합니다. 가장 뇌 용량을 가장 동물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정도로밖에 안 줘요. 그리고 그 뇌에다가 그래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게 태어날 때부터 웬만한 건 다 알고 태어나요. 학습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뇌 용량을 최소화해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인간한테는 아주 두둑이 줬어요. 훨씬 우주는요 인간한테 기대하는 게 많은 겁니다. 그런데 컴퓨터 사줬더니 그거 가지고 밤새 엉뚱한 것만 보고 있는 격으로 좋은 뇌를 줬는데, 자연이, 엄청나게 에너지를 소모해 먹으면서요 지구 자원을 빨아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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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짓이라고는 오히려 자연을 망치는 쪽으로 하고 있다면 자연이 화내겠죠. 유교는 이 발상에서 시작합니다. 성인이 나와야 우주가 편해진다는 겁니다. 우주의 완성은 인간에서 완성이 되고 그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주는 영향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예. 그런 느낌으로 이제 이 논어를 읽으시면요 이게 유교의 제일 핵심입니다. 그 성(性)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했죠. 그거를 제가 다시 설명 드릴게요. 우리 사단노트 그 앞에 보시면요 이 부분을 제가 설명을 해 놨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려놨습니다. 요 그림 하나 이 신(信)은 성실할 신(信)자입니다. 인(仁) 사랑이고요. 우리 안에 이런 명령어들이 들어요. 사랑하라 예절을 지켜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성실하라. 이게 우리 마음입니다. 순수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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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더 거친 마음이 하나가 있어요. 우리 에고의 마음. 이것도 마음인데 같은 마음인데요. 같은 마음인데 이것을 우리가 논어나 유교에서 인심(人心)이라고 하고요. 이것을 맹자는 양심(良心)이라고 불렀고 이것을 도심(道心)이라고도 부릅니다. 도(道) 그대로 마음이거든요. 우주적 프로그램이요 그대로 작동할 때 마음이에요. 그래서 에고와 참나 요즘 용어로 참나라고 하죠. 이 참나가요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비유 드리는데요. 에고는요 이 인심(人心)은 차가운 쇠공 같아요. 차가운 게 본성입니다. 차가운 게 맛이에요. 에고는요 절대로 그 본성을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성인의 에고도 부처님 에고도 공자님의 에고도 차가워요. 진짜 차갑기 그지없는데 자 참나는 불입니다. 이 비유를, 이게 지금 참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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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쇠공이 차갑게 있다면요 쇠공의 프로그램들만 작동하겠죠. 그때는 무슨 작동을 하냐면요 나한테 유리한 것만 좋아합니다. 그걸 제가 이 쇠공의 이런 프로그램을요 한마디로 호리피해(好利避害) 그러거든요, 동양 고전에서. 이익은 좋아하고 해는 싫어합니다. 나한테 좋은 것만 추구해요. 이걸 제가 이름을 붙이기를 소아적 효율성 그럽니다. 나 자신에게 효율적인 거만 추구해요. 지금 자본주의 경제학의 대전제입니다. 인간은 소아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학이 안 맞는데 이렇게 인간이 효율적이다라고 하는데 안 맞는 게 실제로 머리가요 그렇게 냉정하지 못하다 보니까 효율적으로 못 움직여요. 근시안적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인간이 경제학이 문제가 되는 데를 찾아보니까 이 부분도 커요. 인간은 뜨거운 불을 또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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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의 마음으로 움직이면요 호선오악(好善惡惡). 지하철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내가 죽게 생겼는데 뛰어내리는 마음도 있어요. 이건 경제학적으로 지금 이 부분을 많이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행동주의 경제학이니 뭐 이렇게 연구해가지고요 새로 그런 부분을 많이 집어넣으려고 해요. 이것(소아적 효율성)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인간의 마음이 있거든요. 이거를 대아적 효율성이라고 제가 이름 붙였습니다. 이타적(利他的) 효율성이라고 안 붙였어요. 대아적이라고 하는 건 나한테도 좋아야 되거든요. 이타적은 남한테 좋다는 얘기만 있잖아요. 이건 그게 아니거든요. 이거는요 나라는 개념이 확장돼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두 나 같아서, 지하철에 떨어진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그 사람이 나 같아서 뛰어내린 거지, 내 마음 편하자는 것도 있거든요. 그게 전혀 저 사람만 좋아하고 나는 죽어도 좋다라고 뛰어내리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타적이라고 말을 하면 혹시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도 보살이 이타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단순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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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존재. 그래야 우주가 좋아하는 건 그거거든요. 모두에게 좋아야 좋은 거거든요.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걸 추구하는 마음, 선을 추구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방송을 보다 보면 나한테 직접적인 해가 안 오지만 무도(無道)한 말, 불합리(不合理)한 말을 들으면 제가 화가 나는 겁니다. 그게 인류한테 안 좋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마음도 우리한테는 있거든요. 당장 나는 피해가 안 와도 인류 전체에 뭔가 해(害)가 오는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싫어해요. 성폭행범이 정확하게 처벌 안 받는 걸 열 받아 해요. 내 가족이 그런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호선오악의 마음은 뜨거울 때 나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작동할 때가 있고 호리피해의 프로그램이 작동할 때가 있어요. 우리 마음에서 이 두 가지를 정확히 보셔야 됩니다. 사단노트는요, 사단노트는 이 마음(양심, 도심)이 작동하게 도와주는 겁니다. 즉 보십시오. 인(仁)에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게 나옵니다. 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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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해하는 마음이요 이 에고의 세계로 푹 튀어나와요, 갑자기. 우리 안에 정의(正義)의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우리한테는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튀어나와요. 부끄러울 수(羞)자 미워할 오(惡)자니까 잘못된 걸 봤을 때 부끄럽거나 아주 화가 나는 마음이에요. 혐오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우리 안에 “무례하게 굴지 마라”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인간 에고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을 직면했을 때 갑자기 이렇게 하느님의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이게 사양지심(辭讓之心)입니다. 양보하는 사양하는 마음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지혜라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시비지심(是非之心)이 튀어나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드리면요 여러분 지금 들으시면서도요 “맞다. 그렇다. 이건 좀 그렇다” 이런 게 지금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계세요. 그게 지금 시비지심이 저 안에 있는 프로그램이 튀어나온 겁니다. 그 시비지심은 정말 공정해요. 아무리 내가 날 설득하려고 그래도 지금 제가 낮이라고 우기시면 여러분 설득 안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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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낮이라 아주 화창하죠?” 시비지심에 안 맞고 수오지심까지 자극받으실 수 있어요. “사람 불러놓고 장난을 치나?” 하는 이런. “무례한데.”(사양지심) “우리에 대해서 배려가 눈곱만치도 없구나.”(측은지심) 네 가지가 한꺼번에 열 받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정치는요 국민들의 이 네 가지 마음을 안 건드는 거예요. 이걸 안 건드는 사람은요 욕을 먹지 않고 그게 가장 훌륭한 정치입니다. 돈 많이 안 벌어다 줘도요 이 네 가지를 안 건들면 돼요. 물론 돈이 심하게 안 벌어오면 네 가지가 또, 또 나를 필요하지 않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측은지심). 무례하다(사양지심). 분노(수오지심). 이건 아니지. 개념이 없다(시비지심).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은요 늘 살아 움직입니다. 인간에 있는 이 프로그램(인의예지)이 더 본질적이에요. 이거를 우리는 공기처럼 이걸 쓰고 사시기 때문에 남한테 이걸 요구하고요, 늘. 그런데 자기는 잘 안 하죠. 근데 이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남한테 이걸 요구해요. 왜냐? 남이 이걸 안 시켜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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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곧장 해가 돌아온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에고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소아적 효율성에 이 사단(四端)을 안 지키는 사람 만나면 바로 충돌이 나요. 그래서 우리가 나는 안 해요. 왜냐하면, 내가 사단 안 지켰을 때 난 잘 몰라요. 나한테 피해가 온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둔감하겠죠. 그런데 남이 나한테 사단을 어기는 짓을 하면요 우리는 금방 알아채요. 그래서 이 야당으로 있는 분들은 늘 공정한 얘기를 해요. 사단에 늘 당하니까요, 힘이 없어서. 그런데 권력을 딱 잡고 나면요 입장이 바뀌었죠. 그러면 이제 사단을 또 무시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에서 하는 말이죠. 성공할수록 사단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더 성공의 척도같이 이렇게 된 사회예요, 지금. 위로 갈수록 사단은 안 지켜요. 사단은 아랫것들이나 지킨다. 그런데 이게 권력자들이 이런 말을 하면 좋은데 수행하는 사람들도 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길을 닦는다는 사람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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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거. 불교로 치면 육바라밀 이런 거는 하근기들이나 하는 거. 상근기는요 마음대로 해도 무애(無碍) 자재(自在) 뭐 돼도 않는 이렇게 막 개수작이죠, 그거는. 그래서 딱 냉정히 화두는 별 게 아니라 그런 소리 딱 할 때 “개수작 부리지 마라”라고 하실 수 있어야 돼요. 탁 쳐버릴 수 있어야 돼요, 화두하신 분은요. 왜? 참나의 소리입니다. 내 안의 프로그램이 그게 잘못됐다고 분노를 하시잖아요. 이거를 내가 확신이 없으니까 누르고 누르고 속으로 달래려고 하시는데요 절대 안 됩니다. 이 안에, 우리 안에는 이 프로그램이 하늘이 준 명령이기 때문에 이게 천명(天命)이고 유교에서는 이게 성(性)입니다. 이걸 이해하셔야 돼요. 논어는요 철저히 이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게 성인(聖人)의 길을 제가 말씀을 드릴 텐데 성인에 이르는 단계는 어떤 걸까요? 지금 이거 보시면 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성인에 이르는 단계는요 내 마음 안에서 사랑하라 성실하라 겸손하라 정의로워라 지혜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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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령을요 잘 듣고 더 열심히 실천할수록 성인의 단계, 단이 높겠죠. 그래서 1단 2단 바둑처럼 9단이 있다면 그 단계의 성취는요 이 우리 안에 있는 순수마음, 참나의 마음의 프로그램이 에고의 마음을요 이 에고의 마음이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게 잘 제어해서, 에고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쇠공을 없애는 게 아닙니다. 쇠공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불은 쇠공을 통해서만 우리가 사랑과 측은과 사양과 수호와 시비는 다 에고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여기는 프로그램만 있지 작동을 할 때는요 우리 에고를 통해 작동해요. 여러분 불쌍할 때 우리 온 마음으로 불쌍하지 그 순수 마음이 불쌍해하는 건 아니거든요. 불쌍해하는 마음의 근원이죠, 여기(참나)는. 참나가 있으면 우리 에고는요 측은지심을 느끼게 돼 있고 시비지심을 느끼게 돼 있고 이렇게 사단을 느끼게 돼 있어요. 이게 불타오를 때 상황입니다. 자 그때 그러면 식욕이나 성욕은 안 느끼냐? 다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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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어차피 에고는 원래 차가운 쇠공이라 다 느끼는데 이게요 남한테 피해가 가는 선까지는 안 갈 뿐입니다. 이해되시죠. 보시죠. 나의 영역이 있고 남의 영역이 있다면 제 영역이요 남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은 이 남한테는 피해가 가겠죠, 바로. 이런 짓을 안 한다는 겁니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다 있고 성인도 배고프죠. 식사하실 때 본인 배고파서 드시지 중생이 배고파서 식사하시지 않아요. 성인들도 다 똑같습니다. 단, 남의 것 훔쳐 먹진 않으세요. 사단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즉 남한테 피해가 가는 일을 안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논어의 성인의 경지를 공자님이 뭐라고 했냐면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 에고가 하자는 대로 해도 인의예지 이 천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더라 하는 단계가 궁극의 경지입니다. 즉 쇠공과 불이요 불이 꺼지질 않아서 이 쇠공이요 그전에 차갑던 걸 잊어버릴 정도로 사단을 원하게 됩니다, 에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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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시죠. 이게 성인의 경지고. 처음에는 어떨까요? 짐작해 보세요. 처음에는 이거 정도 알겠죠. 내 안에서 참나를 찾고 에고는 다스려지지 않아요, 처음엔. 명상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 참나를 찾아서 참나 안에, 참나가 어떻게 생겼다는 것까지 아는 게 한 1단입니다. 그러면 2단 3단 4단은요 이제 참나와 에고 간의 조화입니다. 즉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걸 찾는 게 견성(見性)이고 돈오(頓悟)입니다. 우리 안의 본성을 정확히 보는 거고요. 본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신다면은 에고를 닦아가는 게 점수(漸修)입니다. 업장을 닦아가고 습관을 닦아갑니다. 그래서 에고의 습관이 바뀌어요. 자 그런데 불은 쪼이지 않으면 쇠공 더로 바뀌라고 하면 바뀔 일이 없죠. 습관을, 에고의 버릇을 바꾸는 건요 뜨겁게 해 주면 절로 바뀌어요. 에고는 입장이 바뀌기 때문에. 차가워질 때는 차가워질 때 주장만 합니다, 에고가. 그런데 일단 불을 갖다가 거기다가 뜨겁게 달궈 놓으면 쇠공은요 자기 옆에 닿는 걸 불처럼 태워버릴 정도의 힘을 갖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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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지 않은 에고, 차가운 에고를 놓고 여러분들이 고민하시면 안 됩니다. 일단 지금 뜨거우신지 확인하세요. 모른다를 하세요. 성함만 내려놓으시면요 모른다 하시면 여러분은 곧장 에고 상태에서 참나 상태로 들어가시겠죠. 그러면요 여러분이 원하지 않으셔도 인의예지 프로그램이 거기서는 활성화돼서 작동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른다만 하시면 여러분은 도덕적으로 되시게 돼 있어요. 나라는 이름만 내려놓으시면 여러분은요 더 도덕적으로 변합니다. 그걸 좀 더 유도해 주는 게 사단노트지 사단노트가 여러분한테 억지로 도덕률을 주입해 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한테 원래 활성화돼 있는 이 프로그램을 자극을 줄 뿐입니다. 이해하시죠, 여기까지. 자 한번 읽어볼게요.
[논어, 성인에 이르는 길 - 위정爲政편
2-1. 무위無爲의 덕치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정치를 ‘덕德’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모든 별들이 그를 받드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
논어 2장입니다. 위정편인데요. 첫째, 제목 붙이는 방식이 2-1에서 위정이라는 말로 시작하죠. 자왈 위정(子曰 爲政) 그래서 위정편입니다.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요.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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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왈 위정이덕. 정치를 할 때 덕으로 해라. 정치를 덕으로 한다는 게 보십시오. 이걸(인의예지)로 하는 겁니다. 리더가요 이게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사람이 리더를 해야 돼요. 동양에서는 천자(天子)는 군자(君子) 중의 군자가 천자를 해야 돼요. 그래서 이 천자 자리는요 에고와 참나의 뜨거운 불이요 에고를 완전히 태워서 이 에고가 참나처럼 움직이는 경지요. 인의예지를요 사단을 적극적으로 살면서 실천하는 경지입니다. 자 이런 분을 왜 무위라고, 그 노자는 무위(無爲)라고 했고요. 공자는 덕치(德治)라고 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왜 노자는 무위라고 했냐면요? 에고가 하는 게 유위(有爲)라고 본 거예요. 에고가 “내가 잘 다스려야지. 백성들을 멋지게. 내가 멋지게 통치해서 훌륭한 임금이 돼야지.” 하는 걸 다 에고 놀음으로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도(道), 자연 그대로 다스려 봐라” 하니까 무위고요. 공자님은 그걸 덕치라고 하는 게 인간 안에 본래 부여된 하늘이 명령한 천성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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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이것을 유교에서는 덕치(德治) 그러고. 또 유교에서도 무위(無爲)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면요 이 주장이 왜 같냐면요 노자가 공자님의 선생이에요. 그래서 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옛날 걸 좋아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다가 “은근히 내가 노팽(老彭)에게 견주어 본다” 할 때 그 노팽이 노자입니다. 그거를 팽조니 막 여러 설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전설적인 인물이거든요. 공자님이 “내가 그 사람한테, 내가 우리 선생님한테 내 경지를 한번 견주어 본다” 할 때 이 노팽이라고. 주자도 노팽으로 보고요. 그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예기에 보면 노자한테 내가 배웠다는 게 네 번에 걸쳐 나옵니다. “내가 노자한테 배울 적에는.” 그때 여러분들이 오해하시는 게 노자는요 왕립도서관에서 일하시던 분으로서요 공자님보다 더 해박하면 해박했지 덜하지 않을 정도로 고대 문물에 박사예요. 그래서 공자님이 물어보러 간 거예요. 옛날 예법들을 더 알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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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나라 왕실도서관에서 일하시는 분이니까요 주역이니 뭐니 이런 거 다 꿰던 분이에요. 우리가 노자란 도덕경만 보고 이분은 아무것도 안 하시던 분이다. 텅 비움 뭐 이렇게 “텅 비움만 중시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걸 다 공부하시고 나니까 그분이 결국 “인간이 하는 짓들은 한계가 있고 자연에 맡겨야 제일 순조롭게 되더라.” 이 얘기를 한 겁니다. 공자님은요 그 사상을 그대로 취해요. 그래서 공자의 모든 사상의 근원에는요 텅 빈 자연이 존재합니다. 공자는 유위(有爲) 노자는 무위(無爲) 이런 식으로 구분하시면 안 돼요, 단순하게. 자 보십시오. 그래서 정치를 덕으로 한다는 거, 진짜 자연 그대로 한다는 건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모든 별이 그를 받드는 거랑 같다. 이게 노자의 무위랑 똑같습니다. 북극성은요. 지금 우리 북극성은 이거죠. 지구에서 지구의 남북극을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을 나눴을 때 이 북을 갖다 천구(天球)까지 끌고 가서 이게 우주의 북극점입니다. 여기 있는 별이 북극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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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별이 그걸 중심으로 돌지만 이 자리는 안 움직여요. 진짜 정치는 저래야 한다는 거예요. 리더가 가만히 있는데도 주변이 다 그걸로 변해가야 된다는 겁니다. 이러면요 일반 인간은 이걸 못 해요. 그래서 이 무위에 대해서 오해하고 리더가 엄청나게 권모술수를 써서 모략을 써가지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몰래 술수를 부리는 것처럼 많이 이해하고 이렇게 쓴 사례가 있는데요. 실제는 그게 아니라 리더가 진짜로 이렇게 만약 불타는 존재라면 어떻게 될까요? 사단이요 사단으로 불타면. 예수님이 이런 얘기하죠. “내 곁에 있어라. 나한테서 멀어지면 식을 거다. 내 곁에 있으면 같이 불타오를 거다.” 이런 얘기할 정도의 리더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 신하들이 불타올라요. 장관들만 불타오르게 하면 되겠죠. 그러면 그 장관들이 자기 밑의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하겠죠. 이래서 임금은요 자기가 사단(四端)으로 자연, 무위(無爲)죠. 사단으로 양심 그대로 살기만 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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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사람들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옆의 사람들이 감히 그 사람하고 대화하는데 이기심이나 이런 소아적 효율성만 얘기할 수가 없겠죠. 그런 성인하고 대화를 하려면요, 대화를 하게 되면 성인한테 말려서요 자꾸 자기도 도덕적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양심이 자꾸 자극을 받아서 올라오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무례한 얘기 들어도, 자 무례한 얘기를 했어요, 누가 성인 천자한테. 동양에서는 내성외왕(內聖外王) 이러죠. 안으로는 성인이고 밖으로 왕인데 무례한 얘기를 했다 치면요 “이 자식!”하고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사단노트 식으로 접근해 버리는 겁니다. “너 상대방 입장은 배려했니?” “너 언행이 무례하지는 않니?” 또 뭐 있죠. “너 양심에 걸리는 건 없니?” “네가 하는 말은 100% 실증해 본 거니? 검증해 본 거니?” 하면요 이상한 말은 쏙 들어가겠죠. 아예 말을 못 하게 돼요, 이상한 말은. 그리고 진짜 자신 있는 얘기만 하겠죠. 이게요 성인이 자기가 자기만 닦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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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사람은요 자동으로 이상한 말을 못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임금이요, 조선시대 임금들이 맨 이걸로 고민했습니다. 신하 중에 누가 군자인지 소인인지 모르겠어. 본인이 공부를 안 해서 그래요. 본인이 공부를 안 하고 본인이 소아적 효율성을 추구하니까 달콤한 얘기하는 신하가 다 군자 같아요. 그렇죠. 지금 기업들도 똑같습니다. 내 옆에서 달콤한 얘기하는 사람이요 꼭 충신 같아요. 그런데 사단노트로 한번 분석해 보시죠. 그 사람 말이 진짜 맞는 소리인지? 그 사람한테 뭔가 이득이 돼서 그러는 건 아닌지 한번 분석해 보시면요 멀리할 사람은 멀리하겠죠. 그리고 진실한 사람들을, 사단노트로 분석했을 때도 명확한 말 하는 사람들만 친하게 두면요 이 사람이 또 동기상응(同氣相應)이라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똑같은 친구들이랑 좋아해요. 그렇게 그렇게 친구들이 모이다 보면요 아주 수뇌부가, 기업이나 정부의 수뇌부가 군자들이 대아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되면요 소인들이 오히려 거기 발을 못 딛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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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반대죠. 군자들이 발 딛는 걸 아주 싫어할 겁니다. 발 한 번 디뎠다가는 집중포화를 맞을 거예요. 자기들 이익에 가장 저촉이 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까. 이거를 지금 공자님 때도 그대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정치는 북극성처럼요 내가 에고로 내가 억지로 사랑을 하고 억지로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자연 그대로 내 안에 있는 참나의 마음 그대로만 살면 돼요. 그러니까 두 세계를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참나만 그대로 닦아주면 되더라 하는 이 얘기를 한 거고요. 보십시오.
[* 논어 「위령공衛靈公」
공자님께서 이르시길 “함이 없이 천하를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다. 대체 무엇을 하셨는가? 자신을 공경스럽게 하고 바르게 남방(백성들이 있는 곳)을 향하셨을 따름이다.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논어에 무위(無爲)란 말을 공자님이 직접 하잖아요. 무위이치자. 함이 없이 자연 그대로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뿐이더라. 순임금이더라. 대체 순임금이 뭘 했겠는가? 억지로 뭘 하려고 안 했다는 겁니다. 순임금은요 그냥 공경스럽게 바르게 백성들이 있는 남쪽을 향하셨을 뿐이다. 즉 이 얘기는 백성들을 향해 앉아서 늘 공손하게 자신의 양심만 그대로 밝혀 실천했다는 겁니다. 밥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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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할 때 신하들하고 자기 최측근, 자기 옆에 있는 신하들을 상대할 때 양심에 바르게 행동했을 뿐이라는 거예요. 참나에 맞게. 그러면 그 신하들이 변해가지고 또 밑의 사람을 유유상종으로 똑같은 사람들을 두고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고 했기 때문에 천하까지도 다스렸다. 이 얘기를 합니다. 그게 이제 노자가 하는 말입니다.
[* 노자
내가 하는 것이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변화한다. 我無爲而民自化.]
밑에 노자 가보시면요. 내가 하는 것이 없으니 백성들이 변한다. 내가 억지로 하려고 하면요 “백성들을 내가 아주 잘 부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백성들은 반발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임금이 “내가 정말 너희들을 멋지게 다스려 주마” 하고 나오면요 백성들은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싫어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백성들의 내면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나 이런 게 자극을 받습니다. 자기가 볼 때는 임금이나 나나 도덕적으로, 좀 이상하긴 똑같은데 임금이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든가 이런 식으로 자꾸 접근해오면 싫게 돼 있어요. 그게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 그대로 나오면요 그런 말도 안 할뿐더러 진짜로 도덕적으로 움직이겠죠.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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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대로 안 하면서 억지로 자꾸 양심 있는 척하려고 하면 백성들이 다스려지지 않는데, 임금이 무위를 하면요 자연 그대로 하면 백성들이 절로 변하더라. 백성들도 양심이요 좋아해가지고 같이 호응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리더십은요 백성들의 양심까지 감동을 주는 리더십을 말하는 겁니다, 이 무위의 리더십은요. 이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 중용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순舜임금이야말로 ‘위대한 지혜’를 지니셨도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천박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으며, ‘악’을 물러나게 하시고 ‘선’을 드날리게 하셨다. 과하거나 부족한 ‘양극단’을 파악하시어, 백성들에게는 그 ‘중심’을 쓰셨다. 그 때문에 순임금이 되신 것이다”라고 하셨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중용에 왜 그걸 증명하는 게요 중용에 공자님이 아까 순임금은 무위(無爲)한다고 했잖아요. 아무것도 안 했다고 했는데 뭐라고 얘기하냐면요 순임금은 위대한 지혜가 있었다. 뭐냐면요 묻기를 좋아하시고. 아랫사람들한테도 다 물어요. 우리가 볼 때는 순임금이 제일 똑똑한 사람인데 천한 사람한테도 다 물어봐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왜냐하면 순임금은요 이 사단(四端)을 알기 때문에 내 하나가 아는 지혜보다는 여럿이 아는 지혜가 더 낫다는 것을 인의예지(仁義禮智)상 알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물어봐서 더 좋은 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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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요. 그러니까 그다음 말이 나오죠. 천박한 말 듣기를 좋아했다는 건요 아주 천박한 사람한테도 물어본 거예요. 아주 이런 거 모를 사람한테도 “이번 정책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하니까 뭐라고 뭐라고 말하고 했겠죠. 나는 마음에 안 들고 어쩌고 뉴타운이 됐으면 좋겠고 우리 집이 중요하고 이런 얘기를 했는데 천박한 말을 들었어도 그 사람 안에서 버릴 건 버리되 사단에 안 맞는 건 버리되 사람도 지금 먹고살기, 돈 때문에 내몰려 있구나 이런 걸 또 읽어낼 수도 있죠. 요게 이제 차이입니다. 순임금은 취할 건 다 취해요. 그래서 악을 물러나게 하고 선을 드날리게 하셨다. 악한 소리는요 이 대화를 통해서 아까 같이 사단을 가지고 지적을 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사람 안에서 악한 마음은 줄어들게 만들고 선한 것은요 밖으로 자꾸 퍼지게 밖으로 나오게 하셨다. 그러니까 순임금하고 대화를 하면요 “왜 내 입에서 이런 멋진 말들이 나오고 있지?” 하는 상태로 백성들이 자꾸 스스로 변하게 느끼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거 억지로 한 게 아니죠. “야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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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지.” 이게 아닙니다, 사단노트는. “부모님 마음은 헤아려 봤어?”라고 물어봐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안에서 뜨끔해가지고 이게 작동을 하게 돼 있어요. 그 사람 안에 있는 측은지심이 작동을 해서 그 안에서 되게 도(道)스러운 얘기가 나오게 돼 있어요. 이게 성자(聖者)입니다. 성자 옆에 가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돼 있어요. 이런 일이 안 벌어진다면 사람도 여전히 공부자(工夫者)예요. 그리고 인간인 이상 실수를 많이 할 거고요 악의가 있건 없건 뭔가 문제를 많이 일으키게 돼 있습니다. 근데 성자는요 그 사람 옆에 가면 이렇게 같이 악한 마음은 자꾸 쪼그라들게 돼 있고 선한 마음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게 별 게 아니라 여러분이 담배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 옆에 가면 같이 담배가 정말 맛있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 얘기하다 보면요 나도 막 술을 먹어야 될 것 같은, 술이라는 게 정말 해탈을 주는 음식같이 느낄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진짜로 이거(인의예지) 좋아하는 사람 옆에 가면요 정말 이거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시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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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물러나고 선은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에고의 소아적 효율성은 자꾸 뒤로 수축하고 대아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꾸 튀어나오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순임금은 그런 분이었다. 이렇게 잘해 놓고 무위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걸 전혀 못 하면서요 “나는 무위야. 난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신하들 네들이 다 해라. 책임은 네들이, 다 너들이 진다.” 이렇게 나가는 분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남한테 대할 때는 이랬고요. 그다음에 어땠냐면 사단노트를 본인이 분석해 보셔가지고, 이렇게 이해를 드리는 게 쉽겠죠, 사단노트를 늘 분석하셔서요 조금이라도 과하거나 부족한 양극단을 피하시고 백성들한테는 꼭 중도(中道)에 맞는 것만 쓰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순임금이 된 거다. 순임금은요 인의예지 프로그램으로요 늘 분석하셔가지고요 이건 좀 과한데 하면 안 하고요 이건 좀 부족한데 해도 안 하고 딱 맞는 것들만 하셨자는 겁니다. 가장 인의예지에 합당한 것들만 하셨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얘기 드리면 이런 겁니다. 인(仁)을 과하게 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인(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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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는 지금 의(義)는, 인(仁)과 의(義)는 반대 얘기를 하거든요. 인(仁)은 “품어 주자. 불쌍하다.” 의(義)는요 “그래도 걔가 잘못했다. 문제가 있다.” 이 얘기 중에 문제가 있는 애를 측은지심만 만약에 가지고 쓰면요 그래도 불쌍한데 하고 껴안아 주다 보면 애가 방종해져요. 반대로 사랑의 감정은 자꾸 낮아지고 정의감만 가지고 어떤 애를 처벌하면요 살벌해져요. 그래서 옛날 선비들은 항상 의(義)만 따지면 살벌해지고, 인(仁)만 따지면 방종해진다는 게 있어요. 이게 과불급(過不及)이에요. 뭔가 안 맞죠. 그 딱 중간이 좋다는 겁니다. 딱 적절한. 그래서 이 네 가지, 동서남북을 탁 치면요 가장 적절한 어떤 대안이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걸 쓰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거 간단하게 100분 토론 같은 것만 봐도요 이 사람은 과한 주장을 하고 이 사람은 부족한 주장을 해요. 보면 둘 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듣고 있는 내 마음에서는요 “이래야 되겠군” 하는 게 딱 나와 버립니다. 과부족을 알면요 중간이 우리 마음에서는 탁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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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순임금은요 남하고 대화할 때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아니라 과부족을 딱 가르쳐주거나 선과 악을 싹 보여주면 우리가 탁 뭔가를 택하게 돼 있어요. 이런 게 백성을, 백성의 양심을 자극해 주는 겁니다. 백성의 양심은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겠죠. 백성의 양심은, 양심은요 타고난 마음이고 이 마음의 작용은 크게 둘로 나눠요. 지적인 작용 ①양지(良知)와 행적인 작용 ②양능(良能)이 있습니다. 능력. 자 능력. 이때 보시면 시비지심(是非之心)만 양지입니다. 나머지 3개는 양능(良能)이에요. 사랑하고 양보하고 분노하고 하는 거 능력입니다, 마음의. 그리고 시비지심만은 양지(良知)예요. 탁 아는 거죠. 맞다. 틀렸다가 분명해요. 지금도 제 얘기 들으시면서 “맞다” 하는 것도 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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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의심스럽다”는 것이 있을 거예요. 이걸 어떻게 막을 수가 없어요. 내 안에서 “내가 가진 자료로는 그게 설득이 안 된다”라고 말해버리면요, 내면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상대방의 양심을 각성시키려면요 먼저 양지(良知)를 각성시켜야 됩니다, 상대방한테. 이 얘기가 맞게 들려야 돼요. 그러면 상대방이 알아서 나오겠죠. 그러니까 이런 사단노트를 가지고요 상대방을 또 분석을 도와주고 나도 그렇게 분석을 하면 내 양지도요 “맞다. 맞다” 하는 말이 나오게 돼 있고 상대방 안에서도요 같이 호응해서 나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똑같이 시비 판단을 하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만 제시해 주면 나오게 돼 있어요. 물을 갖다가 끓여서 100도의 온도에 끓여지는 거를, 100도 온도에 물이 끓는 걸 보여 주고 “물은 100도에 끓는 겁니다. 그렇죠?”라고 했을 때 아니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니까 꼼짝 못하게 말을 해 주는 게 이게 “넌 이렇게 믿어라”가 아니고요 “자 이런데 어떻습니까?”라고 하면 상대방에서는요 “맞다”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을 자꾸 사단에 맞게 해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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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아니라고 할 도리가 없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사람의 양지가 밝아지죠.
[* 논어 「자한子罕」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모를 뿐이다! 어떤 이가 내게 와서 (진리를) 물으면, 나는 마음을 텅 비우고, 그 (질문에 관련된)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의 결과를 남김없이 밝혀서 설명해줄 뿐이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논어 자한편 보시면요 공자님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가, 제가 모른다 하시라고 했는데요. 공자님도 모른다의 달인입니다. 보세요. 오유지호재(吾有知乎哉). 내가 아는 게 있겠는가? 무지하다. 난 아는 게 없다. 나는 모를 뿐이다. 나는 선입견을 전혀 안 세워놓고 그대로 모르는 상태로 있다. 보십시오.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제가 여러분한테 모른다만 하시면 여러분 도덕적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러분이 모른다고 안 하시면요 여러분의 마음 뭔가를 들고 계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뭔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에 여러분의 고유의 지적 작용이 방해를 받아요. 여러분은 지금 이게 찜찜한데요 여러분은 “야 여기에다 내가 투자한 게 얼마인데 맞아야 돼.” 에고는 이런 집착할 수 있죠. “이 말이 맞아야 돼. 난 지금 여기다 많이 걸었어, 이미.” 그런데 내면에서는 “찜찜하다”라고 계속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 그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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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 내가 들고 있던 선입견을 딱 내려놓으시면 여러분 내면의 고유의 목소리가 커지겠죠. “찜찜하다.” 그러면 하지 마셔야 돼요. 즉 양심의 소리는 이미 항상 여러분 안에서 울려 퍼지는데 여러분이요 욕심과 무지 때문에 편견 때문에 막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모른다를 하신다는 얘기는요 자연 그대로의 판단에 그대로 따르는 상태입니다. 자연에 원래 있던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공자님이 “내가 아는 게 있겠는가? 나는 모를 뿐이다”라고 한 얘기는요 나는 지금 선입견이나 어떤 나의 아집을 하나도 안 세우고 있다는 겁니다. 가장 공정한 상태라는 겁니다. 양심이 극도로 활성화된 상태예요. 그때 누가 와서 내게 진리를 물으면 나는 마음을 텅 비우고. 한자 보십시오. 공공여(空空如). 빌 공 빌 공. 텅 비워놓고 질문에 대해서 거울처럼 비춰질 뿐이라는 겁니다. “이건 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하면 딱 내 마음을 텅 비워놓고요 그 사람 말 딱 들었을 때 그 순간 선입견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사람한테 뭐 얘기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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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닙니다. 텅 비워놓은 상태에서 나의 양지(良知)가 하는 말을요 그대로 들려주는 겁니다. 이렇게 해라가 아니에요. “내 양지가 뭐라고 하냐면 양극단을 두들겨 설명해 줬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거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겁니다”라고 이 얘기만 해 주는 겁니다. “선택은 그쪽 몫이니까요.” 왜냐? 선택은 그쪽이어야 그쪽 양심이 밝아지니까요. 안 해줘요. 이게 아주 훌륭한 코칭 기법입니다. 정확히 얘기를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라고만 해서 그 사람이 하면 그 사람은 의식이 발전이 안 돼요, 양심이. 자 여러분한테 이미 양지가 있습니다. 당신도 마음을 텅 비우고 판단해 보세요. “상대방 배려해 봤습니까?” “언행은 무례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명확합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양심에 걸리는 건 없으니까?”라고 물어봐 주면 여러분 안에서 양심이 뭐라고 얘기를 해버리죠. 마찬가지로 공자님은 “이렇게 하라”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거고,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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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시나리오 최악의 시나리오. 아니면 아까 같이 과한 시나리오 부족한 시나리오를 얘기해 주면 양극단 두들겨줬죠. 그러면 듣는 사람 마음에서 이미 “이래야 되겠군” 하는 게 잡히겠죠. 그게 양지(良知)가 계발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100분 토론을 보셔도 헛것은 아니에요. 왜냐? 과한 얘기랑 부족한 얘기를 들으시는 중에 여러분 안에서 “이래야 되겠군” 하는 게 뭔가 떠오르셨다면 여러분은 100분 토론을 들으시면서 양심이 각성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스승은 그렇게 인도해 줘요. 그래서 듣는 사람이요 점점 그 먹이를 하나씩 물다 보면요 성장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요. 아주 멋진 답을 공자님이요 찾아온 사람한테 “너는 이렇게 모월 모시에 어디 가서 뭐해.” 사람들은 그 대답을 원하죠. “저 주식 투자할까요? 말까요?” “무슨 주 내일 가서 뭘 얼마를 사.” 이걸 원합니다. 노예의 도덕이 돼요. 이런 식으로는 도덕이 늘지를 않아요, 양심이. 노예정신만 늘어요. 이제 누가 말 안 해주면 꼼짝도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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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요 아무리 험한 일에서도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고 빠져나올 수 있는 이제 능력이 생겨요. 이렇게 구별이 됩니다. 자 지금 논어의 얘기를 제가 해 드린 이유가 공자님이 쓰신 방법이 순임금이 쓰신 방법 그대로예요. 순임금도 공자님처럼 천박한 사람하고 대화를 나눌 때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니까 그 천박한 사람도요 악한 게 쏙 들어가고 선한 게 자꾸.. 그 순임금이랑 공자님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화를 나눈 사람의 양지가 극도로 활성화돼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맞네요. 이건 하면 안 되겠네요.” 하고 본인 입에서 나와요. 이게 훌륭한 리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정치를 하신 분이요 세종대왕이 이렇게 하셨어요. 세종대왕은 신하들한테 강요를 안 해요. 자유롭게 대화를 시켜놓고 그런데 이렇게 사단식으로 접근을 하니까 신하들 입에서 “임금님 하시죠.” 아주 그냥 기득권도 “개혁하시죠.”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게 이렇게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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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을 해냅니다. 설득하시려는 분이 이걸 모르고 설득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인의예지를 모르고 설득했다. 그거는 자기만 설득했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강요죠. 분위기상 그래야 될 것 같아서 한 거고, 세종대왕 때 정치하신 거 보면요 진짜로 사단식으로 접근해서 끌어냅니다. 늘 그게 먹히는 건 아니죠. 신하들도 천차(千差)니까요. 근데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해나가세요. 눌러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이런 리더가 앞으로 지금 21세기도요 전 세계에서 찾는 리더상이 세종대왕은 몇 100년 전이죠. 그때 보여줬어요. 이거는 무슨 얘기냐면 순임금은요 몇 천 년 전인데도 보여줬어요. 인간이 원하는 최고의 리더상은 똑같아요, 어느 시대나. 내 양심 안 거들면서 나를 리드해 주는 리드해 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리더를 논어에서는 추구하고요. 그러려면 양심을 모르고서는 안 된다. 양심은 나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만백성들의 원리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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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원리와 내 원리가 하나라고 알고 내 것부터 밝혀 나가는 거죠. 그러면 남의 것도 밝혀줄 수 있다. 이런 느낌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2-1이 좀 길어졌죠. 2-2 볼게요.
[2-2.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시경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덮으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시경 300편을 한 마디로 덮으면요 내가 한 마디로 요약을 해 주면. 시경(詩經)에는 시가 당시 300편이 실려 있는데, 보십시오. 이 시경에 있는 시는 여러분 이 논어를 읽고 되게 훌륭한 내용인가보다 하시면 안 돼요. 이 내용 보면 요즘 대중가요집이랑 거의 똑같아요. 내 사랑 어디 갔나? 뭐 이런 거 있죠. 되게 사랑타령입니다. 근데 그걸 뽑아놨어요, 공자님이. 그걸 엄선해서 300편 정도를 추려서 경(經)이라고 붙였습니다. 뭐냐면 인간의. 도를 닦는 사람이요 이것만 알면 안 돼요. 인의예지만 알면 아주 무서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겠죠. 제가 만약에 인의예지로 여러분을 찍어 누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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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에 맞지도 않고요, 그게. 여러분 아주 힘들어져요. 인의예지를 가지고 잣대를 가지고 꼭 구석구석 자기는 안 재고요 남을 재고 다녀요.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조선시대 때 이런 쪽으로 많이 갔었어요. 문제가 됐어요. 자기 며느리를 죽여서 연료로 만들 정도예요. 막 그렇게 내몰린 시대가 있었어요. 그렇게 안 되려면요 공자님은 절대 싫어했어요, 그걸. 뭐냐면 이 에고에 대해 아주 해박하게 알기를 원했어요. 에고가 느끼는 슬픔 분노. 그래서 이 시경은요 에고의 모든 감정에 대해 노래를 했는데 왜 그런데 엄선한 기준이 있어요. 아주 문란한 시는 뺐어요. 즉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는 시들만 추린 겁니다. 에고의 아주 자연스러운 발로만 그린 거예요. 실연당해서 괴로워 죽겠다. 이게 자연스럽잖아요. 이걸 엄단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남을 해치는 지경까지 간 게 아닌 것들만 뽑았다는 겁니다. 그런 감정은 다 괜찮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해요. 논어에 보면 공자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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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경 안 읽은 놈이랑 얘기를 하면 담벼락이랑 얘기하는 거 같애.” 감정을 하나도 모른다는 거예요, 인간의 감정을. 대화가 안 되겠죠. 산에서 도 닦고 왔다고 딱 하는데 전혀 뭐 대중가요 듣고 감흥이 하나도 없다. 인간이 아닌 거죠. 되게 무섭죠. 그래서 선문답에 그런 거 있죠. 어떤 할머니가 어떤 스님을 열심히 봉양했는데 할머니가 더 대단하죠. 그 스님을 시험한다고 자기 딸을 붙여봤어요. “크 나는 목석과 같다.” 하니까 할머니가 빡 돌아서 “내가 어만 거에다가 이렇게 돈 들었구나” 해서 스님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와요. 인간으로서 그런 기본적 감정이 없는 그런 죽은 목석을 키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게 진짜 도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되게 자연스러운 에고의 감정을 사단을 통해서 균형만 잡아주는 게 유교에서는 성자입니다. 감정 죽이지 마세요. 감정하고,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감정하고 싸우지 마시고요 모른다 하시면 인의예지 프로그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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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화되니까 그 마음으로 그냥 균형만 잡으세요. 균형이 늘 핵심입니다, 논어에서는. 이 시경 얘기도 그거고요.
[2-3. 스스로 바로잡게 하라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정치상의 법률과 명령으로만 인도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덕德’으로 인도하고(사단四端의 확충, 명명덕明明德) ‘예절’로 가지런히 해야만(사양지심辭讓之心의 확충),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다(수오지심羞惡之心의 확충)”라고 하셨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2-3 유명한 얘기죠. 공자님이 정책과 법률과 명령만으로 만약에 사람들을 인도하고, 형벌로 말 안 들으면 잡아넣지 뭐. 보십시오. 이렇게 다스린다는 건요 국민들을 이렇게(소아적 효율성) 본 거예요. 이게 한비자가 주장했던 정치 방식입니다. 진시황이 그걸 택했었어요. 뭐냐면 한비자가 한 말이거든요. 이거요. 인간은 호리피해(好利避害)의 존재이다.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고 해를 싫어하니까 잘하면 상 주고 못하면 벌 주면 통치되게 돼 있다고 했더니, 진시황의 아들 대에 바로 망했죠. 인간이 이렇게 안 되거든요. 상을 줄 때도요 그냥 주면 안 돼요. 이렇게 예의를 갖춰줘야지 좋아하죠. “옜다 상이다” 하고 100만 원 던져주면 이게 또 이게(인의예지) 작동하죠. “나를 지금 뭘로 보고.”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인간은 그렇게 돌아가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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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중국에서 진시황 때 한비자 법가 사상을 한번 충분히 써보고 망하고 난 뒤에는 한나라 때부터 다시 유교를, 대아적 효율성을 어떻게든 이제 더 앞에다 걸어요. 이걸(소아적 효율성) 추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겉은 이걸(대아적 효율성) 걸어요. 지금도 그럽니다. 자본주의도요 자본주의는 솔직히 지금 한비자랑 똑같아요.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는데도 겉에다 그렇게 안 하죠. 우리는 가족이고 우리는 한 식구고 자꾸 딴소리를 해요. 인의예지를 걸어야만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뭐 주인 같은 뭐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손님이 왕이네” 막 자꾸 “너를 난 위할 거네” 막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이걸(소아적 효율성)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요 인간이 싫어한다는 거를 역사적으로 실험해서 체험한 겁니다. 그 뒤로는 절대 중국 2000년간 인의예지를 앞에다 걸지 이걸(소아적 효율성) 앞에다 안 걸어요. 이걸 걸면 다 싫어한다는 걸 알아요. 망해버렸으면 해요. 저 집안 망해버렸으면. 자기들만 이익을 얻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거잖아요. 그러면 그 얘기는 나한테는 피해가 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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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얘기잖아요. 인간은 싫어하게 돼 있어요, 그걸. 그래서 지금 이 얘기는 공자님이 한 얘기가 그걸 얘기한 겁니다. 이게 예언이 아니라 인간은 이렇게 하면 망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만 소아적 효율성만 가지고 교육을 시키면 어떤 효과가 나느냐?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즉 법을 지금 같은 상황입니다. 법망에 안 걸리면요 재수, 그걸 아주 만족해하지 “내가 그래도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라고 생각 안 한다는 겁니다. 이 양심은 활성화가 안 돼 있으니까요. 수오지심을 활성화시켰으면 아예 죄를 안 저질렀을 텐데 수오지심이나 이런 측은지심을 활성화를 안 시켜놓고 죄를 지은 다음에 잡아다가 그걸 처벌만 한다는 식으로는요 처벌 피하면요 “다행이다” 하고 자기 양심엔 전혀 반성을 안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 부끄럽게 만드는 게 이제 훌륭한 정치라고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러려면요 리더부터 잘해야겠죠. 그래서 그다음 얘기가 그겁니다. 덕(德)으로 인도하고, 임금이 양심을 잘 지켜서요 백성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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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자꾸 지킬 수 있게 유도하는 겁니다. 이게 아까 노자가 말한 진정한 무위(無爲)예요. 임금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이렇게 양심을 회복하자는, 우리 같으면요 “사단노트를 전 국민 전 가정에 보급하라” 하는, 사실은 저의, 저의 호리피해(好利避害)의 마음도 조금 있습니다마는. 예. 그 세종대왕이요, 똑같은 마음입니다. 세종대왕이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요 만화로 만들어서 보급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보급을 했는데 그게 한문으로, 그때는 한글이 없었어요. 한문으로 한 편에다가요 삽화를, 스토리를요 한 그림에 다 그린 만화식이에요. 그걸 가지고 한문을 써서 보급했는데 문제가 한문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으니까 백성들은 못 읽어요. 그래서 한문 아는 사람이 설명을 해줘야 돼요. 그래서 세종대왕이요 삼강행실도 보급해보고, 윤리문제, 그때도 패륜 사건이 났거든요, 부모를 죽이고 하는. 세종대왕이 가슴 아파서 삼강행실도를 돌렸는데 한문이 통하지 않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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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직설(農事直說) 같은 기술서를 보냈는데 정작 농사짓는 사람들이 못 읽어요. 법조문을 못 읽어서 피해가 나요. 이런 사건들 때문에 한글을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윤리, 기술이나 정보 그리고 법률문제 때문에 송사사건 때문에 한글을 만들어요. 측은지심이 끝장이죠, 세종대왕. 백성들이 불쌍해서, 남 같지 않아서 잠 안 자고 연구를 해서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임금이 주장해서 만든 거예요, 신하들은 다 머뭇거릴 때. 그러니까 이런 경우가 덕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나부터 해서. “내 양심이 못 견디겠다.” 임금부터 해서요. 덕으로 인도한다는 게 사단을 확충하는 거고요. 대학에서는 이걸 명명덕(明明德)이라고 합니다. 뭐냐면요 이거를 지금 보십시오. 이거를, 이거를 대학이라는 책에서 명덕(明德)이라고 그래요. 이것도 하나 알아두시죠. 내 안에 있는 광명한 덕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명(明)은 동사예요. 내 안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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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명한 양심을 밝혀야 된다. 이게 천자의 덕목이에요. 대학 책 보면 명명덕(明明德) 하는 게 천자(天子)입니다. 양심을 천하에다 밝히는 게 천자의 임무예요. 가정에다 밝히는 것은 가정에서 문제고요. 가장으로서 가정에서 명덕을 밝힌다. 이거는 가정 내의 문제고. 직장에서 명덕을 밝힌다. 그러면 그건 직장 내의 문제고요. 천하에서 한다 그러면 이거는 대통령이나 이런 천자의 그 어떤 덕목이에요. 이렇게 덕으로 인도하고. 그러니까 덕으로 인도한다는 건 이게 아닙니다. “국민들 사단노트 쓰라 그래.” 하면서 자기는 안 지키는 이런 게 아니고요. 자기부터 잘해서 이제 신하들을 인도하는 거고요, 국민과. 예절로 가지런히 해준다. 예절은 사양지심(辭讓之心)의 문제인데요. 왜 사양지심을 지금 공자님은 자꾸 얘기하냐면 측은지심이나, 보십시오, 사랑의 마음 분노의 마음은요 표현될 때는 꼭 사양지심으로 표현돼요. 이게 오행 중에 불의 성질이라 밖으로 표현하는 건 다 예(禮)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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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도 예(禮)에 맞아야 되고요, 에티켓에. 분노도 예절에 맞아야 돼요. 적절한 분노여야지 과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밖으로 표현되는 건 예절로 표현되기 때문에 양심을 계발하되 밖으로 표현이 적절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사양지심을 적절히 계발해서 밖으로 언행이 적절하게 나가게만 해 주면 백성들 스스로가 부끄러운 줄 알고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다. 백성들의 수오지심이 자극받아가지고요 감히 죄를 못 짓게 되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죠. 만약에요 지금요 이런 교통법규나 여러 가지에 대해서 안 걸려서 “안 걸리면 장땡이다”라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잖아요. 굿 다운로더(Good Downloader)니 이런 거 하지만 사실은 “안 걸리면 됐고, 걸리면 재수가 없는 거다” 이런 식으로 국민들이 판단하게 만드는. 이거는 이제 그 어떤 사안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되게 중요한 사안들이 남한테 피해가 많이 가는 부분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국민들이 판단하게 만약에 방치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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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잘못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그것에 대해서 양심교육을 시켜줘야 되는 거죠. 부끄럽게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인간이 본래 갖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자극만 주면 원래 계발이 되게 돼 있다는 게 이제 유교의 입장인 거죠. 부끄럽게 만든다고요 나는 부끄럽다든가 이런 거 최면을 걸어서 이렇게 세뇌시키고 하는 게 아니고요 인간한테 원래 그게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요 아주 악인들도요 거짓말할 때 보면 눈깔이 돌아가고 이렇습니다. 양심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게요. 머뭇거린다거나 이게 딱 태연하게 하는 사람은요 진짜 이제 사이코패스 아주 그런 아주 심한 사람들은 그래도 좀 덜하겠지만, 그래도 달라요. 사람은 되게 거짓말하기 힘들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여러분도 잘 못하시잖아요. 할 때 이게 다 티나요. 자기는 최대한 평정심을 갖고 한다고 하지만 거짓말 탐지기 하면 걸리죠. 심장 박동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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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려지는데요. 이게 양심이 있다는 근거입니다. 인간은요 이렇게 안 하려면 되게 한번 큰 결심을 하셔야 돼요. “내가 정말 우리 새끼들 때문에 내가 양심을 잠시 꺼둬야겠다.” 이런 비장한 각오가 없으면요 하기 되게 힘들어요. 하고 나서도요 마음 편하게 못 주무실 걸요. 자신의 어떤, 진짜 힘들어서 했더라도 편치 않은 게 이게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래서 범인들 중에 상당수가 자수했을 때, 자수했을 때가 아니라 자수하거나 잡혔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힘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수오지심이 느껴지면요, 보십시오, 인간이 수오지심을 느낀다는 얘기는요 자기가 한 잘못이라면요 처벌을 빨리 받을 때 평안이 와요. 그러니까 미뤄두고 있는 것뿐이지 자기는 알아요. 빨리 처벌을 받아야 평화가 오겠다. 이게 인과법칙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주에 인과법칙이 있다. 어디 있냐? 왜 죄인이 잘 살지 않냐? 죄인 속이 편치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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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인과법칙이 있다는 근거가 이겁니다. 겉으로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이게 냉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잘못, 양심에 딱 어긴 순간 자기로부터 벌써 부정당해요. 자기의 양심으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요. 이제 남한테 드러나게 될 때는 남한테 지탄을 받게 돼 있어요, 쇠고랑을 안 차더라도. 예. 그 상태가 이미 처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과법칙이요 절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도 있다는 걸 아니까 되도록이면 죄 안 짓고 사시잖아요. 한번 죄를 저질러 놓으면 그것 때문에 시달려야 된다는 거 아시니까 되도록 안 어기실 겁니다. 이게 양심이 더 발달되면요 요즘 애들이요 친구 때리고 잠바 뺏어가죠. 이거를 “친구 잠바 뺏지 마라”만 자꾸 가르쳐서 될 일이라는 거죠.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이 발달되면요 친구 잠바를 못 뺏게 되어 있죠. 잠바 잃어버리고 집에 갈 그놈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고, 친구 입장에서 자기의 악행을 한번 돌아보면요 이런 감각만 발달해 있으면 못 한다는 겁니다,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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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잠바 안 입고 말지”로 결론이 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사단노트를 제가, 우리가 권장 드리는 건요 이런 식으로 평소에 자기 양심을요 계속 자극을 주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딱 중요한 순간에 죄를 못 짓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잠바 뺏지 마라. 잠바 뺏지 마라.” 이러면요 “신발은 괜찮나?” 전혀 엉뚱한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겠죠. 자기 합리화를 해 버린다는 거예요, 에고가. 에고가요 애써 외면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이상한 짓을 해요. 이런 것까지도 자기가 정확히 마음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걸 못 알아차리는 분들이요 지금 되게 당당하게 성자라고 사람들 가르치는 분들 많아요. 우리 눈에는 다 보이는데요, 사단에 지금 어긋나 있는 것들이. 사단노트 조금만 분석해 보세요. 부작용이요 남의 사단 어기는 게 다 보여요. 막 이제 나의 수오지심이 자극받아요. 지적을 해 줘야 될 것 같은. 그때 신나게 지적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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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에서 또 멀어집니다. 일단 자기 분석부터 하세요. 남 지적은 나중에 하시고요. 그런데 그 부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남이 하는 이상한 짓도 잘 보이실 겁니다. 그 눈으로 만약에 어디 도인이네 하고 앉아 있는 사람 가서 보시면요 다 어긋난 게 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도 수준을 알 수가 있어요. 본성을 못 밝혀서 그래요. 어떤 특수 분야의 기술자지 전문가지 달인이지 도인은 아닌 거예요. 도인은요 보십시오. 도인은 여러분이 도인이라는 말을 앞으로 이렇게 쓰세요. 도인은 양심의 달인을 도인이라고 합니다. 양심 이외의 것들의 달인은요 그냥 달인이라고 하시면 돼요. 그 분야의 달인이지만 천명(天命)의 달인, 아까 말씀드렸죠. 천명, 하느님이 사랑해라 정의로워라하고 해 주신 인의예지를 우리 안의 본성이고 이걸 따르는 게 도(道)인데 도인(道人)이라는 사람은 이거에 아주 해박한 사람입니다. 이 경우 어떤 게 사랑이고 어떤 게 정의고가요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이 도인인 거죠.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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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마음을 막 이렇게 긁어놓고 전혀 모르고. 자기 입에서 틀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증거가 없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인의예지에 다 어긋나 있어요. 그러면 이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서로를 보면요 서로를 또 사양지심에 맞게 지적을 해 주세요. 그렇게요. 그래서 예절 바르게 서로가 서로를 서로가 자극을 주면서 사단(四端)을 함께 해 나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한번 보시고. 5분 쉬고 예 다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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