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전라남도 해남군 산정리 산골마을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구슬치기를 하도 잘해서 ‘대장’ 소릴 듣던 개구쟁이였습니다.
놀기만 잘한 게 아니라 공부도 잘했습니다.
-한신대 오영석총장과 산골소년-
특히 주산을 잘 놓아서 ‘셈본’ 시간을 제일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보다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도 모두 중학교에 간다는데
소년은 하릴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넌 중학교엘 못간다.
오늘부터는 지게를 지고 풀을 베어라”.
소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습니다.
기운이 장사라서 장날 씨름판에 나갔다 하면 송아지를 몰고 왔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수십마지기 논밭과 산을 술과 노름으로 다 날리고 머슴이 됐답니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공부는 비쩍 마르고 힘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힘좋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마땅하다”.
국민학교 졸업 후 2년동안 소년은 아버지 말씀대로 지게를 지고 풀을 베었습니다.
책이라고는, 글이라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소년은 세살때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다녔답니다.
1955년 그해 여름. 열다섯살 소년은 여름성경학교에 가서
한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가르침을 듣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시다”.
소년은 꼬박 40일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라고. 그리고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전상서’란 제목으로.
“하나님 전상서. 저는 지금 공부를 무척 하고 싶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갈증이 나서 못견디겠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 길이 열린다면 신명을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처럼 도와주십시오…”
겉봉에도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표값이 없어서 우표는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도회지 목포에 나갔습니다.
골목골목 상점을 헤집고 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야간중학교만 보내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애원을 했답니다.
100군데도 넘게 돌아다녔지만 애석하게도 일자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체통에서 ‘하나님 전상서’를 발견한 우체부는 한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어느 고학생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지만 배달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궁리 끝에 상관인 우체국장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국장은 고심끝에 자신이 다니던 해남읍 교회 이준묵 목사에게 편지를 전했습니다.
목사님은 소년을 읍내로 불렀습니다.
편지를 쓴 지 5개월 후쯤. 소년은 그렇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이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편지를 보고서 이처럼 감동한 것은 처음이다.
앞으로 내가 너를 지도하고 안내할 테니 그대로 따르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평생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은인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소년은 목사님네 과수원에서 기거하며 틈틈이 과수원일을 도우면서
꿈에도 그리던 중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매일 시오리길을 통학하며 정말 눈물나도록 고맙게 공부를 했습니다.
‘영어를 마스터하겠다’는 굳은 작심으로 통학길 내내 손바닥을 훑어보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단어장 대신 손바닥에 날마다 열개씩 영어 단어를 써서 외운 것입니다.
줄곧 우등생·장학생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소년은 의사를 꿈꿨습니다.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배의 한마디가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올바른 의사가 되려면 먼저 신학을 배워라. 슈바이처 박사도 그랬다”
. 그래서 후기대 입시를 한번 더 거쳐 지금 한신대의 전신인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62학번. 학교에서 등록금을 받지 않아 이상했는데 누군가 말했습니다.
“오영석, 넌 1등으로 입학했으니 안내도 된다”고.
문익환 교무처장이었습니다.
과수원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옮겼지만 해남 목사님의 보살핌은 여전했습니다.
수시로 학비며 용돈이며 옷가지를 챙겨 보내주시며
따뜻한 격려말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헤밍웨이를 유난히 좋아했던 대학생. 청년이 된 산골소년 오영석은 역시 ‘피눈물나게’ 공부를 했습니다.
철학·문학·신학, 그리고 영어·히브리어·라틴어·독일어까지.
책을 볼 때는 언제나 ‘하나님 전상서’를 떠올렸습니다.
‘지금 이 공부가 내게 어떻게 주어진 것인데, 얼마나 소중하게 얻은 것인데…’.
청년은 대학 4학년때인 65년에 또 한번의 중요한 인생 전환점을 겪습니다.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투옥됩니다.
서대문구치소에서 2개월을 복역한 후 강제징집. 감방에서 만난 소매치기·시계따기 등
‘잡범’들이 들려준 화려한 무용담은 성경보다 재미있었답니다.
청년은 거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습니다.
“악인에게도 선(善)이 있고 위대한 성인에게도 악(惡)이 존재한다.
그것을 망각해선 안된다”.
이전까지는 의사가 최종 목표였지만 그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청년은 고향의 해남읍 교회에서 3년간 목회자로 일하다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고 84년 모교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 총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신대 오영석 총장(59).
그 옛날 ‘하나님 전상서’를 썼던 소년은 이제 대학 총장이 되었습니다.
몇시간 동안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털어놓은 오총장은
“그때 우체국 직원이 어째서 편지를 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도 늘 생각해본다”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뜻이 있어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얘기를
[출처] -한신대 오영석총장과 산골소년- |작성자 keith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