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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이야기 사진 스크랩 몽골 기행산문 11 - 남쪽사막,노래 부르는 모래 무덤까지
바다해 추천 0 조회 36 08.11.13 13: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쪽 사막, 노래 부르는 모래 무덤까지

 

 

박태일


사막 없이 몽골을, 몽골 없이 사막을 생각하기 힘들다. 몽골을 아예 죄 사막으로 여기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옴느고비, 곧 남쪽 사막은 그 전형을 간직한 곳이다. 그래서 쏘련 지배기부터 일찌감치 옴느고비는 몽골 관광에 중심 걸음길을 만들어 왔다. 몽골을 찾는 외국 관광객 열 사람 가운데서 네 사람은 들린다는 곳이 옴느고비다. 이 점은 세월이 바뀌고 주류 관광객이 자본주의권 나라로 바뀐 요즈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몽골 자국민에 의한 이 지역 관광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옴느고비 아이막은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먼저 인구 밀도가 낮은 몽골에서도 가장 낮은 곳이다. 1평방킬로미터에 0.28명이 산다. 또 제일 넓은 아이막이다. 덥고 메마르기로도 으뜸이다. 더울 때인 7월에는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다. 가장 추울 때인 1월에는 -42도까지 내려선다. 혹독한 추위와 한파가 이어진다. 조드라 일컫는 이  한파는 집짐승이고 사람이고 가림없이 덮친다. 따라서 한 차례 조드가 지나간 뒤에는 사막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몽골 낙타 또한 이 지역에 가장 많다.

아이막 소재지 달란자드가드는 구르방새흥 산발치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406미터 높이니 몽골 평균 해발보다 낮다. 울랑바아타르에서는 553킬로미터 남쪽으로 내려선 곳이다. 아이막 안에는 비행장이 세 개나 된다. 달란자드가드 비행장에다, 널리 알려진 홍고린엘스 모래 지역에 줄친고비캠프 비행장, 그리고 어유털거이 금광지역에 한 곳이 더 있다. 공항이라 해도 힘을 들여 비행장을 잘 닦을 필요는 없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그냥 내리면 되는 사막 들이 바로 활주로다. 비행시간은 울랑바아타르에서 90분 남짓 걸린다. 외래 관광객이 끊기면 사람이 아예 머물기 힘들지 모를 지역인 만큼 아이막 전체가 교통 채비에 유다른 셈이다.

끓는 신기루, 흐르는 신기루. 때로 야생 말이나 야생 낙타가 그 속으로 뛰어들곤 하는 남쪽 사막을 내가 찾은 때는 8월 29일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앞둔 날. 울랑바아타르 도심 서쪽 드라곤센터 장거리버스 승강장에서 둔드고비를 거쳐 옴느고비로 가는 정기 버스를 탔다. 러시아제 승합차 푸르공보다 더 큰 중형 버스였다. 첫 차는 매일 아침 8시에 출발한다. 승차표는 하루 앞날 사두어야 하며, 값은 13300투그릭이다. 당일에 자리가 남아 있다면 살 수도 있는데 2800투그릭이나 더 붙어 16100투그릭을 받는다. 재미있는 계산법이다. 아마 정기 운행에 따른 부담을 줄이면서 안정적으로 손님을 모으는 꾀인가 보다. 차 안에는 미크로버스와 달리 자리 번호가 붙어 있다. 그래서 하루 앞날 표를 산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바람에 당일 일찍 나와 앞자리를 차지했던 이들은 불만스런 낯빛으로 다시 뒷자리로 옮겨간다. 열네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선 차가 울랑바아타르를 벗어나 토브 아이막 조옹모드 길과 둔드고비 아이막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닿는 데는 5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 포장길도 끝이다.

10시 무렵 한길가 식당 마을에 이른다. 모두 내려 아침을 사먹기 시작했다. 마을 뒤쪽 우물가에서는 말들이 물을 마시고 있다. 곁에서 어른과 아이가 수레로 물통을 끌고 와 물을 퍼 담는다. 그 가까이로 몽골에서는 보기 힘든 돼지가 몇 마리 보인다. 한 가족인 듯 새끼들과 어미 돼지다. 돼지는 사람이 주는 2차 먹이를 먹어야 자란다. 그러니 유목을 나날살이로 삼은 몽골에서는 키우기 힘들 뿐 아니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반사막에서 놓아 기르는 집돼지를 보게 된 셈이다. 무엇을 찾아 먹는지 물이 질척거리는 우물 가까이 이저 곳을 줄기차게 헤치고 다닌다. 잡식성이니만큼 아마 풀뿌리라도 뜯어 먹는 것인가. 다시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토브 아이막 지역도 이미 사막에 가깝다. 동몽골 스텝 쪽과는 다르다. 거친 흙이 온데 드러났다. 그 사이로 먼지를 흩으면서 들길을 달리고 또 달려 1시 30분, 드디어 둔드고비 아이막 소재지 만달고비에 이르렀다.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채우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내려 가까운 식당에서 요기를 하기 시작한다. 나도 소젖차인 수태채 한 잔에 골야쉬를 시킨다. 골야쉬는 서양에서 들어와 몽골식으로 바뀐 고기 요리다. 우리의 고기덥밥 같은 것인데, 다만 고기를 잘게 볶지 않고 덤성덤성 덩어리째 푹 삶아내는 게 다르다. 잘 삶아 연해진 고기 덩어리에 밥, 거기다 야채 샐러드까지 곁들여 한 접시에 담아내는 양고기 골야쉬는 짜지만 않다면 어디서 먹더라도 한 끼 식사로 그저 그만이다.

만달고비에서 100킬로미터 남쪽 얼비트라는 곳에는 많은 바위그림이 있다. 옴느고비 여행에 앞서 이리저리 알아보았으나 들리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던 곳이다. 밥을 얼른 먹은 뒤 짬을 내어 그곳에 대해 물어 보았다. 만달고비에서도 거기까지 가기 힘든 점은 마찬가지였다. 지프차를 빌려 타고 가서 한뎃잠을 자면서 보고 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방학이 되거나 개학 무렵에는 가끔 학생을 실어 나르기 위해 그리로 오가는 차편이 마련되기도 한다는 풀이가 덧붙는다. 잠시 쉬는 사이 옴느고비 달란자드가드로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새로 차에 오른다. 짐을 차 위에 올려 싣기도 한다.

2시 20분. 만달고비를 떠나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 더위를 뒤로 밀어내며 차는 달리고 달린다. 9월을 앞두고 가쁜 햇살에 말라 시든 느낌이 뚜렷한 달래 풀밭 또한 끝이 없다. 저렇듯 많은 달래를 뜯어 먹어 양, 염소 고기에서는 달래 냄새가 난다지 않는가. 차 안에는 출발 처음부터 끝까지 유행노래를 틀어놓았다. 따라 흥얼거리는 사람, 눈감고 즐기는 사람이 여럿이다. 노래가 없으면 어떻게 긴 여행을 할지 궁금한 사람들. 6시 무렵 드디어 옴느고비 척더어워 마을에 이른다. 옴느고비로 들어선 지 20킬로미터는 된 듯싶은 곳이다. 다시 버스에 기름을 넣는다. 척더어워에서는 만달고비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이 탄다. 달란자드가드 기숙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초중고 학생들이다. 그들을 태우고 보내느라 어버이들이 바쁘다. 가져가는 짐 가방도 많다. 나무 가방도 있고 쇠로 만든 것도 있다. 종이 포갑지를 잘 이용해 만든 가방도 눈길을 끈다. 모든 재화를 한껏 활용하고 아껴 만든 것이다. 손때까지 듬뿍 묻은 가방들이 정겹다. 이제 달란자드가드까지 135킬로미터 남았다.


사막 도시 달란자드가드


달란자드가드 시장 정류소에 버스가 이른 때는 저녁 9시다. 울랑바아타르를 떠난 지 12시간이나 걸렸다. 미리 연락해 둔 엥키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전화를 하려니 차에서 먼저 내린 한 아주머니가 손짓을 한다. 자신이 바로 엥키란다. 울랑바아타르로 나가다 썩더어워에서 되돌아 온 것이다. 일본인 관광객 몇 명이 더 온다는 연락을 받고 하는 수없이 걸음을 되돌렸단다. 그렇지 않아도 버스 안에서 흘깃흘깃 내 쪽을 바라보는 낯빛에 무슨 뜻이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행 체빌레를 일찍부터 알아보았던 게다.

그녀의 게스트하우스는 3층에 있는 자기 아파트를 손질한 것이었다. 큰 방 둘을 관광 철이면 침대를 몇 개 들여 손님을 받는다. 스페인 젊은이 둘과 프랑스 남자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스페인 두 남녀는 자전거여행을 떠난 사람, 프랑스 여행객은 옴느고비에 두 번째 걸음이란다. 혼자 등산을 즐기러 왔다. 그들이 한 방을 쓰고 나와 체빌레는 다른 방을 쓰기로 한다. 한 사람에 4000투그릭. 저녁을 먹지 못해 엥키가 이끄는 대로 식당이 있다는 곳으로 갔으나 문을 연 데가 한 군데도 없다. 하는 수없이 되돌아와 라면을 끓인다. 엥키도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 같아 함께 들자고 하니 스스럼없이 먹는다. 내일 관광을 위한 차편을 엥키에게 미리 부탁했다. 나는 옴느고비의 전통적인 관광지 몇 군데를 집중적으로 밟다 오는 1박 2일 걸음을 짰다. 엥키는 적게 잡아 이틀 밤이 필요하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지도로 본 내 깜냥에 하룻밤으로도 될 성 싶었던 까닭이다. 조용한 남쪽 사막 도시 달란자드가드에서 맞는 첫 밤이었다.


독수리 입으로 들어가다


잠을 설쳤다. 다시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운 뒤 예약한 지프차를 기다렸다. 하루에 빌리는 ?으로 40000투그릭을 받는다. 기름은 이틀분 76000투그릭어치를 싣는다. 차에 들어가지 않는 기름은 따로 준비한 빈 통에다 채웠다. 사막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기름과 물, 그리고 간단한 대용식은 필수품이다. 기사는 뜻밖에 몸이 뚱뚱한 일흔 살 바양지그 씨였다. 은근히 장거리 여행이 염려가 되는 나이다. 오기로 했던 젊은 기사가 사정이 있어 못 오게 되었다니 불평할 수도 없는 일이다. 

첫 길은 욜린암, 이름 그대로 독수리 입이다. 거기까지는 왼쪽으로 고르왕새흥 산 묏줄기를 쳐다보면서 달란자드가드에서 북서쪽으로 달린다. 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넓게 일어난다. 드문드문 관광캠프가 보인다. 1시간 남짓 달려 달란자드가드에서 62킬로미터 떨어진 고르왕새흥 국립공원 들머리에 이르렀다. 출입 통제소까지 오르는 오른쪽으로 작은 박물관, 기념품 가게가 줄을 이었다. 그 앞에는 규화석이나 공룡알 화석을 늘어놓아 손님을 잡는다. 고비고르왕새흥 국립공원은 1993년에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 동서로 400킬로미터, 남북으로 평균 80킬로미터 벋어 있는 지역이다. 고비알타이 용맥 끝자리다. 고르왕새흥은 ‘세 개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국립공원 동쪽에 치우쳐 있는 세 산으로 말미암았다.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가운데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을 따로 가진 이 셋을 묶어 고르왕새흥이라 일컫는다.

공원은 다시 지리적으로 세 구역으로 나뉜다. 동쪽과 가운데 그리고 서쪽이다. 공원 동쪽은 험한 산을 낀다. 가장 높은 산은 고르왕새흥 세 산 가운데서 달란자드가드에 가장 가까이 있는 2825미터 ‘왼쪽 아름다운 산’이다. 그 안에 욜린암이라는 이름난 골짜기를 품고 있다. 공원 가운데 지역 또한 널리 알려진 홍고린엘스 모래 언덕이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180킬로미터나 벋은 곳이다. 홍고린엘스는 세계에서 가장 크게 움직이는 모래 무덤. 공원 서쪽 지역은 전형적인 사막 지형이다. 서쪽으로부터 고비알타이 용맥이 가라앉은 곳과 고르왕새흥 산악지대 사이 완충지대에 넓게 펼쳐 있다.

들머리 박물관은 입장료로 1000투그릭을 받는다. 모름지기 세계 대표 공룡 발굴 지역답게 꾸몄다. 공룡 뼈 화석에다 희귀 짐승 박제품이 볼 만하다. 게다가 여러 명승지 사진도 곁들였다. 박물관 관리인이 손수 만든 수제품 조각도 기념품으로 판다. 욜린암 골짜기 안에 드문드문 앉아 파는 이들 것보다 솜씨가 낫다. 들머리에서 차로 10킬로미터 좁은 골짜기를 다시 따라 들어서면 주차장이다. 거기까지 이르는 경관도 욜린암 안쪽 못지않게 빼어나다. 아르쯔라는 키 작은 땅 향나무가 뒤덮은 늘 푸른 등성인가 하면, 치솟은 돌벼랑이 번들번들 물빛을 되비추는 곳도 있다. 주차창에서 욜린암 골짜기 안으로는 말이나 낙타를 빌릴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 나는 12000투그릭을 주고 오가는 말을 빌리기로 했다. 2.5킬로미터 남짓 들어서면 여름에도 빙하가 남아 있는 곳에 이른다. 사람들은 보통 거기까지 갔다 돌아온다. 

욜린암은 1965년부터 보호지역이 되었다가 지금은 더욱 엄격하게 다루는 장소로 바뀌었다. 높은 데는 거의 200미터까지 솟아 있다. 여름철에는 그 골짜기 꼭대기에서부터 네 개의 폭포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낌새를 느낄 만한 곳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폭포가 질 만한 벼랑에는 물이 오래 흘러내린 흔적 같은 것이 깊게 파져 있다. 욜린암 좁은 골짜기 길은 모두 40킬로 남짓 이어져 있다고 한다. 작은 시내가 그 길과 나란히 끊어졌다 이어졌다 따른다. 맑은 날에도 햇살이 이내 끊겨 어두운 그늘 동굴을 만드는 골짜기다. 욜린암이라는 이름 그대로 독수리 깊은 입안에 갇혔다는 느낌이 즐겁다. 그래도 독수리는 보이지 않는다. 일찍부터 몽골 사막 대표 경관으로 알려진 곳답게 첨탑같이 솟은 벼랑, 햇살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듯한 가파른 벼랑을 타고 풀을 뜯으며 내려오는 양, 염소떼가 아침 역광을 받아 곱다. 물기가 알맞게 남아 있는 너럭돌이 한 여름인데도 차가운 빛을 되비추며 산을 환하게 밝힌다.

관광객이 타는 말은 몸에 익은 대로 줄기차게 간다. 서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어 고삐를 잡아도 스스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한다. 말을 타고 갈 수 있는 끝자리에 닿는다. 여름에도 겨울 빙하가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곳이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 얼음골을 지나 골짜기를 걸어가 보기로 했다. 물길은 더 좁혀졌지만 골짜기는 더 넓어지기 시작한다. 꽃들을 마구 피워 놓았다. 1킬로미터 남짓 더 들어섰을까. 골짜기 길이 이제는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한다. 작은 어워도 보인다. 꼭대기에 얹어 놓은 말대가리 뼈가 희다. 그 주인이 오래 아꼈던 말이라는 뜻이다. 거듭 따라가면 아마 산을 벗어나는 길과 만날 것이다. 나는 거기서 걸음을 멈추었다. 독수리 입안에서도 목젖까지는 내려가 본 셈인가.

돌아 나오다 기념 조각품을 깎아 파는 사람들 일손을 한참 동안 지켜본다. 군데군데 한 사람 또는 두세 사람이 모여 있다. 혼자 앉아 일하는 소녀도 있다. 나오는 걸음에 확인한 사람만 모두 9명이다. 관광이 한창일 때는 훨씬 많은 이들이 노점을 차리고 있을 것이다. 공원지대 안팎에서 얻은 듯한 작은 돌판에 새긴 집짐승 그림이나, 손바닥에 들어갈 만한 작은 조각상을 판다. 내 짐작대로 독수리 험한 입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음에 말은 더욱 빠르게 발굽을 찼다. 고삐를 잡고 좀더 찬찬히 싶어도 말은 금방 몸을 틀어 내뺀다. 꼼수가 늘었다. 늦여름이라 관광객이 드문 골짜기를 벗어나 금방 말과 낙타 주인들이 모여 쉬고 있는 주차장에 닿는다.


바람소리 골짜기와 구르즈라민 절터 


욜린암 골짜기를 나오다 들머리 못 미쳐 왼쪽으로 둥그네로 가는 고갯길이 열려 있다. 둥그네란 바람소리라는 뜻이다. 욜린암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바위 골짜기지만 재미가 쏠쏠하다. 커다란 돌산을 요자형으로 길게 판 듯하다. 바닥과 옆이 모두 돌이다. 바닥으로는 물이 흘러내린다. 천천히 차를 몰아 골짜기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어워가 있는 한 곳에 차를 세워 사진을 찍는다. 반대쪽에서 올라오고 있던 독일인 관광객들도 어워 사진을 찍노라 법석이다. 그들은 가까이서 점심을 먹을 요량인지 아예 짐을 풀기 시작한다. 어워가 있는 그 좁은 골짜기 길로 한 소녀가 양떼를 몰고 빠져 나간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게 하여 그들 뒤를 따른다. 골짜기를 나서면서 양떼는 두 옆 벼랑까지 기어오른다. 먼저 와 있던 양떼들과 뒤섞이기도 한다. 한 어린 아이가 어디선가 달려와 제 양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뛴다.

둥그네 골짜기를 빠져 나오는 데는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골짜기가 툭 트이면서 오른쪽은 자르갈란트니토르라 불리는 언덕배기다. 그곳 허물어진 절터로 차를 돌렸다. 기사가 잘 아는 유목 게르가 한 채 있어 거기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구르즈라민히드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었던 자리다. 규모는 크지 않았던 듯싶은데 1930년대 사회주의 폭압으로 허물어진 외벽 두어 개가 보인다. 그리고 이즈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라마탑 하나가 그 곳이 절터임을 알리고 섰다. 부서진 지 70년을 넘은 터나, 뒹구는 돌무더기와 흙벽돌에는 옛 사람 냄새가 진하다. 가까이 무리로 쉬고 있는 말이 풍기는 냄새까지 섞여 묘한 편안함을 준다. 날벌레 탓에 말이 꼬리를 칠 때마다 물씬거린다. 이저리 폐허 둘레를 돌다 조그만 기와 조각 하나를 기념으로 주워 든다. 둥근 점 무늬가 여러 개 박힌 것이다. 

준비한 점심을 먹기 위해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두 아이가 조심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젊은 부부가 삶아 내온 양고기를 칼로 비져 먹는다. 함께 내 놓은 아이락도 맛이 좋다. 쉴 만큼 쉰 다음 일어서려니 1.5리터짜리 아이락을 두 통이나 건넨다. 지니고 온 사탕봉지와 몇 푼 종이돈을 아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으로 답례를 하고 나는 그곳을 나섰다. 시각은 3시를 넘겼다. 휴식이 길었던 셈이다. 이제 홍고린엘스 모래 바다까지 165킬로미터를 남기고 있다.


사막 농사꾼 간복드 씨


차가 폐사지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 한 고개를 넘자마자 탁 트인 바양탈 솜이 나타난다. 이름 그대로 풍요로운 들이다. 여름 바양탈은 전혀 사막 같지 않다. 멀찍이 고르왕새흥 묏줄기를 둘러쳐 놓고 한껏 푸름을 키워낸다. 차가 마을 가까이 다가가니 잘 가꾼 나무까지 눈에 든다. 옴느고비 아이막에서도 푸성귀 농사를 일삼는 곳답다. 사막이 아니라 어느 정원에 든 느낌이니 희한하다. 헐벗은 사막을 마음에 두고 온 나는 바양탈 들에 들면서부터 마음이 마구 부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 풍경만 풍요로울 뿐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겪을 삶이 매우 팍팍하리라는 점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바양탈 솜을 지나 바양달래 솜 지역으로 거듭 길을 당긴다. 멀리 고르왕새흥 산줄기를 등에 지고 달리며 보니  오랜 세월 허리까지 모래더미가 날아와 묻힌 자리가 뚜렷하다. 아마 먼 뒷날 저 산들은 목덜미까지 모래더미에 내주게 되리라. 그때쯤이면 이 사막 풀밭은 어떻게 달라질까. 들에는 달래꽃이 마구 피었고, 멀리 산 밑으로는 아그 향초가 졸음 오는 듯한 연푸른빛으로 마음껏 부풀었다. 목부가 양떼에게 물을 주고 있는 우물을 하나 거쳐 투훈박 마을에 이른다. 쇠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집이 보여 그리고 차를 몬다.

어린 딸과 젊은 부부가 이제 풋 익은 수박 하나를 따고 있었다. 딸이 먹고 싶어 해 올해 첫 수확을 즐긴다는 풀이다. 굳이 수박을 갈라 내게 맛을 보여준다. 키운 것들을 오가는 관광객에게 팔기도 한단다. 사막 한 가운데서 감자와 토마토, 참외에다 수박, 케일까지 만나게 되다니 뜻밖이다. 마을 건너 멀리 투훈박 호수가 보인다. 봄여름 내내 거기서 물을 길어다 가꾼 푸성귀다. 참외도 하나 따서 굳이 내게 건네준다. 가족들을 사진으로 담는다. 코흘리개 딸은 따로 몇 장을 더 찍었다. 울랑바아타르에 돌아가서 내가 크게 키워 보내줄 사진을 받게 된다면 아마 좋은 기념이 되리라. 둘러보아 디섯 평 밖에 되지 않을 텃밭을 돌보는 사막 농사꾼 간복드 씨. 무슨 돈벌이가 되랴마는 제 즐거움이 없이는 하기 힘든 멋진 사막 취미임에 틀림없다. 


홍고린엘스로 가는 하늘


바양달래 솜 투훈박 마을을 지나 다시 홍그린엘스 모래가 길게 벋은 고원으로 올라서는 길은 사막이 아니다. 바양달래, 곧 풍요로운 바다다. 풀들이 푸른 물결처럼 한껏 살진 들이다. 그만큼 물도 풍족하다는 뜻일 게다. 이곳 사람들이 농사에 욕심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게다가 여러해살이 나무까지 가꾸어 겨울을 나게 하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아까보다 더욱 가까워진 고르왕새흥 산줄기로 오랜 세월 바람에 날려 와 산 아랫도리를 감으며 만들어진 모래 치마가 더욱 뚜렷하다. 산줄기 6부 능선까지 바싹 올려다 입었다. 그 금을 경계로 위아래 푸름에 빛깔이 다르다. 산봉우리 쪽은 세월의 주름을 한껏 잡은 채 하늘로 더 어둡게 치솟았다. 조금씩 홍고린엘스 모래 무덤의 발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양달래에서 홍고린엘스로 넘어가는 목에 차를 세운다. 산과 산이 이어져 만든 커다란 모래 언덕, 실상 푸른 들로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모래 사구가 벋어 있을 언덕이다. 그리고 언덕 한 끝은 고르왕새흥 산 동쪽 끝과 만난다. 그 높직한 언덕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풀밭이 같은 높이로 죽 벋어나가고 있다. 홍고린엘스는 그 초원 곁을 따르며 길게 똬리를 푼 용의 등껍질같이 뭉클거린다. 작은 게르가 한 채, 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산다. 너무 어려 보여 안쓰럽기까지 한 어머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에게 과자를 쥐어준다. 게르 지붕에는 갓 잡은 듯한 양고기가 붉은 덩어리째 널려 있다. 허수아비가 하나 게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서 있다. 몽골에서 처음으로 보는 허수아비다. 집짐승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꾀다. 사막과 허수아비, 그리고 그 허수아비의 숱한 자손일 듯싶은 바람 소리까지 정겹다. 생김새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몽골 전통 옷인 델 천 조각을 걸친 것만 빼면.

하늘에 노을빛이 감긴다. 차가 달리는 왼쪽으로 따라오는 홍고린엘스 모래 더미 모습도 점점 붉은 빛깔을 되비추기 시작한다. 홍고린엘스 서쪽에 있는 게르캠프까지 들길을 마냥 달릴 참이다. 나이든 기사 반지그 씨는 내가 걱정한 대로 지친 낯빛이 뚜렷하다. 마음이 급한지 운전이 거칠어진다. 길게 파인 마른내를 지날 때마다 러시아제 지프차인 짜리스는 크게 흔들린다. 머리를 앞 유리에 부딪칠 정도로 오내림이 심한 곳도 있다. 아픈 내색을  못한 채 더욱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사막에서 다치면 일이 커진다. 계속 앞만 보고 손잡이를 더욱 꽉 잡는다. 

8시가 되어서야 게르캠프에 이르렀다. 홍고린엘스 서쪽이다. 모래 더미 곁으로 시내까지 흐르는 이곳 둘레로  관광 캠프가 몰려 있다. 내가 들어선 곳은 지역민이 임시로 만든 것이다. 게르 네 개로 꾸려 나가는데 여름 손님을 받노라 한동안 바빴을 안은 지저분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막 여행이 주는 묘미다. 주인 바아상후와 그 아내가 반가워한다. 여름에만 손을 치는데 손전화도 없어 연락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막 여행 기사들은 잊지 않고 이곳에 들린다. 급한 저녁밥은 참치 통조림을 곁들인 라면으로 때운다. 어느새 모래 언덕은 분홍빛 노을로 물씬 물들었다. 낙타 한 떼가 짙어가는 노을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마 제 집을 찾아가는 길이겠다. 커다란 몸집을 한 녀석들이 기우뚱기우뚱 쌍봉을 거느린 채 사막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본다. 

옆 게르에는 어제 왔다는 영국 젊은이들이 오종종 모여 쉰다. 늦게까지 노래를 부르고 즐겁게 떠들던 그들도 조용해졌다. 내일 사막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간다고 한다. 우브르항가이 쪽으로 길을 잡아 하라호린을 본 다음 동쪽으로 울랑바아타르로 들어가는 먼 걸음이리라. 젊은이다운 모험심을 엿볼 수 있는 여행 일정이다. 하루 늦게 이른 나도 내일 아침엔 사막의 모래 무덤이 들려주는 노래 소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따로 게르를 하나씩 차지한 기사와 체빌레는 벌써 골아 떨어졌다. 멀리 다른 관광캠프의 불빛, 그리고 뒤늦게 들어오는 차의 앞등 불빛이 또 그 속으로 이어진다. 어떤 차는 내가 머문 캠프에서 더 서쪽으로 하냥 간다. 이 밤에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이 밤은 또 사막 어디까지 흘러갈 참인가. 


모래 무덤 노래 무덤

 

8월 31일.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여름 사막은 아직 어둡다. 게르 뒤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 개도 깼다. 캠프에서 키우는 낙타도 일어났다. 나는 몸을 푼 뒤 홍고린엘스 모래 언덕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떠난다. 날이 채 새지 않은 들에 얕은 시내가 촉촉하다. 들과 모래 언덕 사이에 갇혀 흐르는 시내는 그 너비만큼 풍요롭다. 둘레에 풀이며 나무까지 잘 자랐다. 캠프에서 모래 언덕까지 1킬로미터 남짓, 물길을 피해 달리려니 걸음을 구불구불 잡을 수밖에 없다. 몽골 대표 경관 가운데 하나인 홍고린엘스는 특별하다. 오랜 세월 날아온 모래들이 커다란 언덕을 이루고 마침내 모래 용으로 살아난 언덕. 다시 서쪽으로 멀고도 길게 바람과 맞서서 몸뚱이를 비틀고 있는 곳. 거기에 오르기 좋은 때는 아침과 저녁 무렵이다. 한낮에는 덥고 뜨거워 오르기 힘들다. 그러니 사람들은 보통 홍고린엘스 가까이에서 하루 묵는 일정을 짠다.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 쪽 능선을 타기로 했다. 가파른 모래 능선은 오르기가 쉽지 않다. 대여섯 발 떼고는 한참 쉬고, 다시 떼고는 쉬는 걸음걸이를 거듭한다. 자칫 다시 미끄러져 내려갈 판이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없었던 관광캠프인 도신과 줄친이 한 눈에 들어온다. 모래 능선 위로 지난밤이 만들어 놓았는지 새들 발자국이 부드럽다. 띄엄띄엄 걸어간 모래의 기억. 부드러운 모래 살결은 밟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오르다 쉬고 오르다 쉬며 한참만에 꼭대기에 오른다. 드넓은 모래 용의 등어리 한 비늘 위로 올라선 셈이다. 울퉁불퉁 솟았다 가라앉았다 다시 솟아오른 비늘, 용의 등줄기가 멀리 벋었다. 한 번 꿈틀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어떤 소리가 날까. 모래 무덤 그 밑은 어떤 빛깔의 여의주들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

바람이 많은 날에는 모래가 바람에 날려가며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어디 그것만 노래 언덕의 목소리랴. 더 아름다운 것은 높은 위에서 아래로 모래가 제 살을 밀고 내려가면서 켜켜로 만드는 소리다. 커다란 관악기를 튼 듯한 목소리를 내면서 모래가 빠르게 음악을 끌고 내려간다. 흔히 비행기 엔진음을 닮았다고 하지만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다. 부우부우, 모래와 모래가 세월과 세월이 부딪치고 땅과 하늘이 부딪친다. 몽골 사람들은 허미라 해서 목청뿐 아니라, 배로 가슴으로 노래를 부른다. 여러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그들. 그러니 이 커다란 자연이 합창을 베푸는 일도 그저 몽골답다. 조심조심 모래 꼭대기 능선을 따라 밟는다. 멀리 영국 젊은이들 차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옛날 지었다 비운 캠프 터가 환하다. 풀들이 그 둘레를 따라가며 더 무성하게 피어 사람 자취를 잊지 않고 있다. 거기도 푸른 노래 숲이다.

홍고린엘스는 달란자드가드에서 180킬로미터, 하루에 오가기 어렵다. 연붉고 환한 모래 빛깔은 하루 내내 햇살을 받으며 빛깔을 바꾼다. 노래 소리도 시각마다 다를 것이다. 고르왕새흥 세 봉우리 가운데 오른쪽 아름다운 산’ 가까이서부터 발톱을 키운 모래 언덕은 서쪽으로 점점 자라나면서 걸어 왔다. 그 길이만도 거의 180킬로미터 유역을 이룬다. 너비는 6-12킬로미터. 위에서 보면 길고 아름다운 신생대의 커다란 고동들이 무리지어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겠다. 모래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은 15-30미터가 된다고 한다. 내가 서 있는 더 서쪽이다. 숱한 세월 언덕에서 천천히 모래가 물어 나르는 노래. 여름에는 물새떼가 날아온다는 습지와 시내가 높은 데서 보니 더욱 뚜렷하다.

오를 때는 한참 걸렸지만 내려올 때는 마냥 쉽다. 모래 위에 앉아 밑으로 내리꽂히다시피 미끄럼을 타면 될 일. 이런 일에는 아이 어른이 따로 없다. 이미 몸이 풀린 상태여서 모래 언덕 아래서부터 게르까지 들길을 다시 달려 간다. 게르 둘레에 있던 낙타들은 벌써 더 먼들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가볍게 아침을 먹은 뒤 게르를 나선다. 아마 다시는 만나기 힘들 주인 부부다. 10시. 사막 초원을 북동쪽으로 가로질러 바양작으로 갈 참이다. 긴 모래 용은 조용하다. 아침에 왼 낯선 한국인이 밟다 간 등어리 비늘 쪽도 곧 바람이 매끄럽게 다듬어 놓을 것이다. 그러면 그 위로 늘 그렇듯 새와 뭍벌레 발자국이 새로 지나가리라. 사람이 남긴 자취를 자연은 쉽게 용서한다. 사막에서도 자연은 관대하다.


바양작 땅 밑으로 공룡들이 기어 다닌다


홍고린엘스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다시 달린다. 바양작에 가기 위해 볼강 솜을 거쳐야 한다. 어느덧 험한 산길을 탄다. 고르왕새흥 산 서쪽 끝자락을 넘는 셈이다. 검은 화산암 골짜기를 벗어나니 새로 들이 펼쳐진다. 이제 그들 가운데를 달리면 될 일. 차는 가다 쉬고 가다 쉬면서 두 시간을 달려 한 마을 가까이 이른다. 사막 한가운데 기념품 좌대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 오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차가 나타나자 마을에서부터 오트바이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마른 우물터가 보인다. 한때 마을이 있었다는 뜻이다. 일찌감치 우물을 지탱했을 듯한 시멘트 구조물이 보인다. 지금 마을은 새로운 우물을 찾아 큰 길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서 있다. 사람들을 만난 걸음에 낙타 젖 아이락을 살 수 있을까 물어니 없단다. 기념품 판매대에는 이저 곳에서 주워 놓은 이쁜 돌로 가득하다. 쓸 만한 것이 뜨이지 않았지만, 1000투그릭짜리 돌을 하나 사서 가방에 넣는다.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사람들 또한 아이 몇만 남겨둔 채 마을을 향해 오트바이로 되돌아간다. 들은 온통 달래 꽃밭이다. 몽골 들을 차지하고 있는, 특히 사막과 반사막 초원에서 왕성하게 제 꽃빛을 자랑하고 있는 달래 풀밭에 내려 한참동안 돌아다닌다. 이 많은 달래를 더 쓸 만한 것으로 가꿀 길이 없는 것일까. 집짐승 먹이나 달래 장아찌 말고도 새 활용법이 있을 터인데. 멀리 고르왕새흥이 보인다. 어제 바양달래 솜을 달리면서 보았던 용맥의 뒤쪽이다. 시간은 12시가 지나고 1시가 넘는다. 배가 고팠지만 볼강에 가서 사 먹기로 하고 그냥 달린다.

1시 45분, 볼강 솜 소재지 볼강 마을에 이르렀다. 한 식당에 들어갔으나 음식이 없다. 그 옆 게르 식당에서 주인이 나와 구운 만두인 보츠가 몇 개 남았다고 일러준다. 자그만 게르를 식당으로 쓰면서 다른 음식은 하지 않는 까닭인지 단출하다. 보츠를 마련할 동안 바깥에 나와 마을 근경을 사진기에 담는다. 웬 아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가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며 막는다. 당찬 녁석이다. 볼강은 달란자드가드에서 95킬로 북서쪽에 있다. 요즘은 차강사르, 곧 설날 축제를 크게 벌여 이름이 높다. 이틀에 걸친 차강사르 축제 때는 낙타 달리기와 낙타 폴로 경기까지 한다. 푸성귀 농사도 유명하다. 지난 주에 그 동안 키운 야채들을 달란자드가드 시장에 다 내어 놓았다 한다. 아쉽다. 맛있는 사막 오이를 씹을 수 있을 기회를 놓친 셈이다. 보츠 다섯 개로 점심을 때우고, 차에 돌아와서 지니고 온 빵과 주스로 다시 배에 기별을 준다.

바양작은 볼강에서 18킬로미터 더 동쪽, 달란자드가드에서는 북서쪽으로 65킬로미터 떨어진 골짜기다. 붉은 황토 등성이가 나타난다. 전망대 쪽에는 벌써 많은 관광객이 와 있다. 거의 유럽 사람들인데 나이가 많아 보인다. 바양작은 미국 서부의 그랜드캐년과 견줄 만한 곳이나 규모가 훨씬 작다. 2억년 앞선 시기 바다였던 땅이다. 지각 변동으로 떠올랐다 다시 바람비에 깎여 지금과 같은 독특한 풍광을 빚고 있다. 그런데 바양작이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특이한 풍광뿐 아니다. 고생물학 쪽 값어치가 놓은 지역인 까닭이다. 완벽한 공룡 유물이 자주 발견된다. 갓 태어난 새끼 공룡까지 있다. 울랑바아타르 국립자연사박물관에 거의 2층 높이로 전시되어 있는 커다란 공룡이 바로 이곳에서 발굴된 것이라 한다. 1920년대부터 세계 곳곳에서 공룡, 매머드 학자와 뼈 사냥꾼이 드나들었던 곳이니 이름이 들날 수밖에. 나는 전망대 음료수 가게에서 소녀가 팔고 있는 카스 맥주를 하나 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함이 몇 시간만에 편안한 느낌을 안겨 준다.


할머니의 차츨을 받으며


쉴 만큼 쉰 다음 3시 40분 바양작을 출발했다. 가까운 곳에 몰쩍엘스라는 모래 언덕이 있지만 그 곳은 계획에서부터 넣지 않았다. 시간은 넉넉했으나 달란자드가드 시장 구경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서둘러 간다면 활기찬 남쪽 사막 시장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양작을 나선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한 마을이 나타난다. 거기도 야채밭을 크게 일구고 있다. 게르 몇 채가 눈에 뜨인다. 내려서 수박과 참외를 산다. 나이 든 할머니가 재배한 것인데, 맛은 없었지만 즐거운 기념품이다. 나처럼 지나가는 외국 관광객이 잠시 들러 밭을 둘러보면서 푸성귀를 사기도 한단다. 게르 한 옆에 거둔 양파가 널려 있다. 볼품없는 것들이어서 상품으로 내지 못한 모양이다.

다시 마을을 벗어나 달리다 한 게르에 차를 세웠다. 반지그 씨가 아내에게 줄 우유를 사기 위해 잠시 들린 곳이다. 유목 게르를 찾게 되면 가벼운 절차가 이어진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앉아서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환담을 하는 순서다. 게르 가족은 집짐승을 1000 마리 가까이 키우는 부자 목인이었다. 나는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게르 바깥으로 나와 사진을 찍노라 바쁘게 움직인다. 다행히 개는 작은 놈인데다 사납지도 않다. 하늘에는 푸른 바람 소리가 지나가고 구름 벼랑이 천천히 기울어진다. 독수리가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떠밀려 멀리 맴을 돈다.

출발하려니 주인 할머니가 차에다 차츨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우리 전통으로 보자면 영락없는 고시레다. 달란자드가드까지 우리 일행의 걸음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각별한 마음 표시다. 지프차 네 바퀴마다 소젖을 뿌린다. 그리고 차가 떠나면 차 뒤에서 다시 차를 향해 뿌릴 것이다. 진지하게 차츨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 이렇듯 경건하게 차츨을 하고 난 다음이니 몽골 손들의 먼 길이 늘 평안하지 않을 수 있으랴. 차가 아니라 말을 타는 경우에는 구두가 놓인 자리에 소젖을 뿌린다고 한다. 격식이 사뭇 굳은 셈이다.

차는 할머니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떠난다. 왜 몽골에 있는 러시아제 지프차 짜리스는 하나같이 회색일까. 차가 달리는 사막 이곳저곳에 가끔 죽어 있는 집짐승의 대가리 뼈가 보인다. 하얗게 마른 그들의 지난 삶은 지금 가까운 어느 풀, 어느 곤충의 구멍 속을 더듬거리며 떠돌고 있을까. 죽음에도 길이 있다. 오르고 내리는 땅금이 멀다. 달란자드가드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항 곁을 지난다. 엥키게스트하우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브실호텔 앞에서 반지그 씨와 지프차를 보낸다. 어제 앵키의 집이 불편하여 잠자리를 바꾼 까닭이다. 오래 된 곳이어서 시설은 볼품없다. 다른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이른 탓인가. 어둡고 조용하다.


다시 달란자드가드의 밤


호텔에 짐을 풀고 바삐 시장으로 나갔다. 아직까지 파하지 않았다. 몽골 다른 데와 달리 차량 가게가 장마당을 이루었다. 다른 곳에서는 붙박이 상점이나 천막을 이용해 전을 따로 펴는데, 이곳은 미니버스인 러시아제 푸르공을 줄 세워 대어놓고 뒷문을 열어 손님을 기다린다. 푸르공 안이 가게인 셈이다. 줄 지어 붙어 서 있는 푸르공이 이채롭다. 재미 있다. 떠돌이 상점다운 맛이 더하다. 고정된 시장 건물을 짓지 않고 푸르공을 이용하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모르긴 해도 훨씬 유목민 전통에 어울린다. 낙타 아이락 가게를 찾아 물으니 벌써 다 팔렸다 한다. 하는 수 없이 말 아이락을 한 통 산 뒤, 식당에 들러 늦은 저녁밥을 시킨다. 밥값이 보통 1800-1900투그릭이다. 관광객으로 살아가는 도시답게 물가가 비싸다. 그럴 수밖에. 

달란자드가드의 전기 사정은 나쁘다. 일본이 달란자드가드에 화력발전소를 지어주기로 했다고 하니 앞으로는 사정이 나아질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일본이 그런 도움을 주는 것은 몽골에서 가장 큰, 옴느고비 어유털거이 금광을 차지한 뒤 나빠진 몽골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일이라고 비쭉거린다. 지금 쓰고 있는 달란자드가드 전기 공급 시설은 한국인 기업이 맡아서 마련했는데, 한때 거기에 잘못이 있어 전기가 제대로 돌지 않는다는 음해 기사가 신문에 난 적도 있었다. 정작 달란자드가드에 와서 보니 밤 11시까지만 전기가 오고 그 뒤부터는 꺼버린다. 사설 전기시설을 쓰는 집들만 늦게까지 환하다. 달란자드가드, 외국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도시, 그 화려함 뒤에 묻힌 구비가 많은 게다. 남고비 깊은 바닥에 널려 있다는 석유며 금이며 천연 심층수를 제대로 끌어 올릴 수 있을 날은 언제일까. 달란자드가드에서 크다고 알려진 호텔인데도 전기가 끊겨 준비 해 놓은 촛불을 켠다. 호텔 4층 방에서 불 꺼진 도시를 내려다본다. 가끔 달려가는 차들이 불 꺼진 도시 옆구리를 앞등 불빛으로 비춘다. 멀리 사막의 달과 커다란 송신탑 붉은 불빛이 만나 이루는 묘한 정적, 그리고 탁자 위 작은 불꽃이 무겁다. 지금 달란자드가드를 밝히고 있는 것은 그들뿐인 듯싶다. 곧 달도 가라앉을 것이다. 나는 촛불을 끈다.


남쪽 사막에서 돌아오는 먼 길


9월 1일 아침 6시에 기침한다. 밤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울랑바아타르로 출발하는 미니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엥키에게 자리 예약을 해 두었더니 7시 무렵 전화가 왔다. 지금 정류장에 나가면 차를 탈 수 있단다. 아침도 거른 채 후닥닥 채비를 마치고 택시를 타 달란자드가드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그런데 예약해 둔 버스는 사람이 차서 벌써 떠났다지 않는가. 개학 때라서 울랑바아타르로 나가는 학생이 많을 터라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다음 버스에 사람이 차기를 마냥 기다릴 일만 남았다. 엥키 집에서 하룻밤을 더 묵었던 프랑스 사람도 짐을 챙겨 정류소 문간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개학하는 날이어서 예쁘게 교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한길을 졸랑졸랑 걸어간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어 멀리서 아침 행진곡이 들려온다. 첫차를 놓친 뒤 다음 버스에 올라가 사람 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찰지 모른다. 10시가 되어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오늘 안으로 꼭 돌아갈 요량이라면 프랑스 사람과 아예 차를 통째 빌려 울랑바아타르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그가 뜻을 같이할 경우에만 될 일. 프랑스 사람은 화가 난 얼굴빛이다. 달란자드가드 시내가 조용하다. 울랑바아타르로 나간다는 두 사람이 온다. 그러나 그들도 이내 사정을 알아채곤 다른 차를 찾으러 떠나버린다. 출발 시각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울랑바아타르에 이르는 시각이 늦어질 것이다. 기다리는 시각에 버스 사무실에서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한다.

10시 40분이 되어서야 차가 출발한다. 예약해 둔 손님을 찾아가며 한 사람씩 태운다. 그들의 짐도 실린다. 시장에 들러 또 손님을 태우기 위해 차가 섰다.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다. 낙타 아이락을 파는 곳으로 뛰어가 얼른 한 통을 샀다. 1500투그릭, 다른 아이락보다 비싼 쪽이다. 그런데 시장에 머문 푸르공은 한참이 지나도 가지 않는다. 일행 가운데 한 젊은이가 볼 일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젊은 아내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그를 찾아온다. 12시가 되어서야 차가 달란자드가드를 출발했다. 아침 7시에 차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선 지 5시간이 흐른 뒤다. 탄 사람은 기사를 넣어서 모두 열넷이다. 물론 프랑스 사람까지 포함한 수다.  

3시에 척더어워에 이르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달란자드가드에서 14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노고태셜(야채국)을 시켰다. 나는 달란자드가드 시장에서 산 낙타 아이락을 꺼내 기사와 함께 나누어 마신다. 맛이 좋다. 보통 말젖으로만 아이락을 만드는 줄 알고 있지만 모든 집짐승의 젖은 다 아이락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11월말까지도 나온다. 사막에 와 귀한 낙타 아이락을 맛보려 했는데 그 바람을 이루었으니 흐뭇하다. 차 안에서 다시 작은 중국 사과 한 알과 오이 반 개로 점심을 마무리한다. 프랑스 젊은이는 비스킷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는 눈치다. 외국인이라야 나와 그 뿐이다. 내가 사과 한 알을 건네니 그는 사양한다. 차는 척더어워를 30분 쯤 머문 뒤 다시 출발했다.

서다 가다 차는 사막길을 마냥 달린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그 뒤였다. 출발하기 앞서 시장에서 한참이나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던 그 부부의 남편이 술을 꺼낸다. 몽골 증류주인 아르히다. 앞좌석 남자들과 한 잔 씩 나눈다. 달란자드가드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는 이였다. 아이가 하난데 그 아이도 기갈이 보통 아니다. 화가 나니 어머니를 주먹으로 마구 때린다. 젊은 여자가 혼줄을 내면서도 아이를 못 이긴다. 아이가 보챌 때마다 젖을 물린다. 그녀 남편이 마주 앉은 프랑스 사람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술 취해 벋은 발에 프랑스 사람의 가방이 닿았던 것이다. 그것을 치우라는 요구였다. 선글라스를 낀 채 얼굴이 불콰해진 젊은이는 그리 술이 세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정도 술에 벌써 차 안에서 주정을 부리는 꼴이다. 프랑스인 사람은 전혀 몽골말을 모르는 이였다. 그는 매우 화가 났는지 안경을 벗고 말하라고 젊은이에게 따진다. 차안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아내가 말렸으나 젊은 경찰의 행패는 프랑스 사람이 가방을 옆으로 옮기고서야 멈추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채 마주 보고 행패를 부릴 용기는 없었던가 보다. 끝까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아직 아이가 하나밖에 없는 젊은 나이다. 벌써 술에 몸이 가버린 꼴 아닌가. 제 아이와 아내가 보는 자리에서, 그것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경찰이라는 이가 일터 바깥에서 부리는 행패를 보니 버릇이 들어도 되게 나쁘게 든 셈이다. 다행이 사태가 누그러졌다. 나도 불쾌해서 마주 앉은 그 젊은 부부 쪽은 보기가 싫어졌다. 집어넣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어두워지고 있는 데도 다시 꼈다.

저녁 8시 만달고비다. 옴느고비로 내려갈 때 점심밥을 먹었던 그 식당에서 다시 저녁밥을 시킨다. 말고기 골야쉬가 짜다. 수태채도 마찬가지다. 하는 수없이 수태채에 말고기를 씻어 씹는다. 먹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새벽 몇 시에 울랑바아타르에 이를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차는 가다 서고 가다 서면서 어둠 한가운데를 달린다. 가끔 마주 지나가는 차도 있다. 기사가 피곤하면 쉬고, 손들이 볼 일을 보도록 쉬고, 차 고치느라 쉰다. 예정했던 첫차로 출발했더라면 이렇게 늦어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차를 한 차례 놓치는 바람에 시간이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난 것이다. 같이 탄 프랑스 사람도 낯빛이 더욱 굳었다. 젊은 경찰 녀석에게 난처한 행패를 겪은 뒤부터 불편한 낌새를 숨기지 않았다. 한숨까지 보탠다. 울랑바아타르 잠자리는 어디로 정해 두었는지, 몽골말을 전혀 못하는 데다 안내자도 없는 여행이어서 자꾸 마음이 쓰인다. 자다 말다 불빛에 나타났다 흩어지는 바깥 길만 내다본다. 밤이지만 여름 사막은 춥다. 옷깃을 여민다.

눈을 뜨니 울랑바아타르다. 새벽 다섯 시. 서쪽 장거리버스 정류소인 드라곤센터에 내리면서 프랑스 사람에게 작별 악수를 청한다. 봉 보야쥬. 기사가 그를 숙소까지 잘 데려다 주기를 바라며 나는 울랑바아타르 새벽 어둠 속으로 급히 몸을 실었다. 3박 4일, 짧은 남고비 여행 끝에 보는 울랑바아타르의 무거운 어둠이 검은 모래 천막처럼 보이는 것이 이변이라면 이변일까. 8월에 나섰다 9월에 돌아온 남고비 여행의 끝은 어두웠으나 기숙사로 향하는 내 마음은 더욱 밝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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