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픈 가족사> 속편 - 60년대 교원노조운동과 선친 이야기
(경칭 생략)
60년대 교원노조와 그 중심인 선친의 이야기는 지난 반세기 동안 햇빛에 바래지고 지워져
지금은 달빛에만 은은히 비쳐져 나오는 한 줄기 신화가 된지 오래이다.
너무나 혹독한 탄압을 받아 거의 80년대 말까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0년2월 출옥하신 이후에도 사회안전법에 묶여 멀리 출타할 경우 반드시 사전 신고해야 만하는 반 영어의
몸, 예전으로 치면 위리안치 상황으로 조용히 지내시다 87년2월에 선친 돌아가신 후에야,
89년에 선친과 함께 교원노조운동을 열렬히 하셨던 이목 선생(서울상대 필자 선배)의 방대한 저서
<한국교원노조운동사>가 <푸른나무>사에서 출간되었고, 90년11월9일에 <한겨레신문> 오상석 민권사회부기자(당시)가 선친에 대한 취재를 과천 어머님 집에서 필자와 함께 자리해 처음 하였다.
(신문연재 후, 단행본으로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3권에 수록, 92년5월15일 1쇄 이후“스테디”셀러).
그 후 <우리교육> <신동아>(2004년10월호)등 잡지에 간헐적으로 취재기사가 나왔고 작년(08년)에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가 필자를 호출하여 필동 사무실에서 대담, 녹취 취재하였다.
워낙 고초를 겪는 환란의 시기에 경찰, 정보부에서 가택수색 하며 선친에 대한 모든 자료를 앗아갔기 때문에
(심지어 사진까지), 이런 취재는 전적으로 모친과 필자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제 어머님 마저 돌아가셨으니!
* * *
<나의 슬픈 가족사> 를 읽어보신 <모놀>인들의 궁금증이 풀리도록,
또 범초의 힘들었던 반생을 알리고도 싶어 아래와 같이
<과거사위원회(약칭)> 에 제출한(2008년) 선친의 연보
(** 범초의 주는 지금 <모놀>에 이 글을 올리며 단 것임)
와 현 서울대 교육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남동생과 필자를 <신동아> 이남희 기자가“인터뷰”한 것을
골간으로 한, 또 필자가 이 기자와 동행하여 대구를 방문해 옛 아버님의 동지들 이목 선생과 신우영 선생을
만나본 이야기인 <신동아> 2004년10월호의
「또 하나의 잊혀 진 과거사, 419 한국교원노동조합,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민주화’열망한 참교사다.”」
란 제목의 기사를 축약해 소개합니다.
* * *
김문심(金文燖) 선생 연보(年譜)
(편의상 경칭 생략)
1912년 4월20일(음력)
평안북도 초산(楚山)군 초산면 앙토리(央土里)에서 문주김씨(文州 金氏) 부 김정범(金貞範)
모 경주최씨의 4남3녀 중 3남으로 탄생. 당시 부친 김정범은 평안도지방의 대지주였음.
1924년 7월21일(음력, 12세)
용맹을 떨치던 만주 독립단 최항신(崔恒信)부대에 군자금(당시 일화 일만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건넨 것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고문후유증으로 부친 김정범 별세.
1932년(20세)
경신중학을 수석졸업하고 조도전(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동경유학(당시 조도전 대학은 예과 3년 본과 3년제). 중학시절 가장 친한 친구는 노산 이은상의 동생인 이길상(화학의 권위자, 연세대대학원장을 지냈음)이었음. 이해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 천장절 행사(일본천황생일축하)에 윤봉길의사 폭탄투척의거. 전날 4월28일 밤, 백범 김구선생과 도시락폭탄을 만드는 등 상해 불란서조계에서 의거준비를 한 김문희(金文熙) 선생(호 해산, 백범일지 참조)은 김문심의 4촌 형님임. 김문희 선생은 1893년생으로 20여세에 우체국근무를 하던 중, 동지 최창윤 등과 함께 일제의 압록강상류개발, 금광개발자금을 털어 만주 독립단에 합류하여 무장투쟁에 헌신하였음(당시 우체국은 은행지점이나 마찬가지). 해방직전 만주벌판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측됨. 윤봉길의사의 상해 천장절 의거사건으로 선친은 항일독립정신을 더욱 투철히 하여 동경유학에 임했을 것으로 짐작됨.
1938년(26세)
조도전(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일제의 금융조합 이사발령을 단호히 거부하고(일제앞잡이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모교인 경신중학
교사로 교육자의 길을 택함. 당시 경신중학은 일제의 탄압으로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음.
경신중학 교사 장자을(애국지사), 양주동(국문학자) 등과 함께 신사참배거부 운동을 펼침.
1941년(29세)
평양정의여고, 동경상모여자대 출신의 김용아(개성김씨)와 결혼. 명륜동3가에 집 마련하고 걸어서 경신중학에 출퇴근. 이 무렵 문주김문에서 초산농업학교(해방 후 초산중학교)를 설립함. 43년 장남(범초)태어남.
1946년(34세)
집안에서 세운 초산중학교 교장으로 금의환향. 북한 정권은 선생을 초산군 인민위원장에 임명하였으나
초산군에 진주한 소련군행패를 일지(日誌)형식으로 기록하다 조상 대대로 마을 성소(聖所)인 소나무
숲이 울창한 초산 당산(堂山)에서 소련군이 학(鶴)사냥까지 하는 것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초산지구
소련군사령관에게 달려가 만행을 기록한 일지를 내보이며
<해방군이라 칭하며 진주한 당신네 소련군은 일제점령군이나 마찬가지!> 라며 강력 항의함.
이에 당시 평안북도지구 북조선노동당책임비서였던 김일(뒤에 부수상)이 급거 초산에 와,
선생에게 <소련군사령관에게 사과하라!> 며 설득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여,
선생은 인민위원장 직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당함.
1947년(35세)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친지의 주선으로 당시 5년제인 안주고급중학교 부교장(교감)에 취임.
625사변 발발, 학교를 지키기 위해 피난가지 않고 지내다 북진한 국방군선발대에게 잡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던 중, 부교장 사택으로 작은 아버지인 선친을 찾아온 국방군 조카 김형로(범초와 사촌간, 육사7기, 대위로 북진, 당시 북측군대는 인민군, 남측군대는 국방군이라 하였음)의 권유로 월남을 결심하고 식솔을 거느리고 걸어서 평양까지 옴.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소위 1-4후퇴 피난민이 되었음.
1951년(39세)
해방직후 월남해, 충청남도 화산(계룡산 기슭, 유성온천근처)에 정착해 있던 김문걸(金文傑, 漢學者)
중형(仲兄)의 배려로 화산 노루쟁이란 마을에서 고구마, 호밀 농사지으며 피난생활.
1952년(40세)
동경유학시절 절친한 친구 최재형
( ** 崔在瀅, 서울대 백락청 교수의 외숙부. 경주 최부자 집 가계로“와세다”시절 선친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625때 대구서 <성락원>이라는 고아원을 사비로 운영, 516 이 나고 선친이 무기징역수가 된 후
전 식솔을 데리고 미국이민 가 작고하셨음)
선생의 주선으로 경북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취직. 이후 경북여고, 대구상고, 대구농고 등 재직.
1958년(46세)
담임을 맡은 대구상고 1년생 안호준(나중 서울공대 나와“세타”생산업 <군자실업>으로 크게 성공)등
2명이 월북기도하다 강화도에서 체포되는 사건발생, 배후사주, 간첩혐의로 군특무대(당시 특무대장은 악명 높은 김창룡 중장, 몇 년 후 허태영 대령에게 암살당함)에 의해 서울로 압송됨, 모진 고문을 당하며 두 달간 신고(辛苦)끝에 무혐의 방면.
1960년(48세)
고교생들의 228의거(** 당시 경북고생인 장남*범초*이 친구들과 적극주도, 현 정정길 청와대 대통령실장이 당시 학생회장), 315부정선거 등을 거쳐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몰락. 419 직후 교원노조운동이 대구에서 처음 자연발생적으로 촉발(觸發)되어 그 중심에 섬(**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북도연합회 위원장).
당시 민주당실력자 조재천이 비밀리에 참의원 의장직(민주당 정권은 내각책임제로 민의원, 참의원 양원제)을 주겠으니 민주당공천으로 참의원 입후보하고 교원노조운동을 그만두라는 회유가 있었으나 <나는 교육자로 정치에는 관심 없다!> 며 단호히 거절. 교원노조가 전국조직으로 급성장.
729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정권도 일본교원노동조합의 자금을 받았다는 등 용공조작하며 교원노조탄압에 나섬. 민주당 정권은 교원노조와해를 노려 선생에게 벽지인 안강농고로 좌천발령을 냈으나 교원노조원의 단식투쟁 등 강력반발로 인해 대구농고로 발령변경(경북고등 전교생이 교원노조지지 단식농성).
1961년(49세)
장면 정권 하, 반공법, 집시법개정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며 사회당(대표 최백근),
사회대중당(대표 김달호) 등 혁신계정당, 민민청, 민자통 등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개정반대투쟁에
적극 나섬. 4월2일 시위현장에서 학생운동 이끌던 경북대 학생위원장 정만진 등과 함께 체포되어
<42데모 주동자>라 하여 4년 구형받음.
구속 중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소위 혁명재판소(서울 필동, 박창암 소장)로 압송 당함,
과거 죄까지 소급해 기소하는 급조된 혁명특별법6조에 걸어 반국가단체수괴,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 무려 10여 개의 죄명으로 사형구형 받음, 제자들 연판장 탄원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언도
(**당시 혁명재판소장 박창암 씨도 훗날 소위 <반혁명분자>라 하여 투옥, 박정희에게 이용만 당하고
배신당함, 장도영, 이주일, 김동하, 길재호, 김용태 등 516거사 핵심인물은 거의 다 박정희가 배신,
3선 개헌, 유신과정 등에서 제거했음).
민족일보 조영수 사장, 사회당수 최백근 등 수많은 민주진보인사가 한 번의 재판으로 사형 당함.
서대문형무소에 2년여(수형번호 705), 이후 대구교도소로 이감됨.
1962년(50세)
3월 장남(**범초), 경북고 졸업하고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진학, 이후 장남의 서울 옥바라지.
1964년(52세)
대구교도소로 이감됨, 기차로 장거리 출퇴근하는 부인 김용아(516과 동시에 대구여고에서 김천근처
아포중학으로 좌천당함) 여사가 1970년2월 출옥 때까지 옥바라지 함.
1968년(56세)
차남, 서울사대 교육학과에 진학.
1970년(58세)
2월25일, 대구교도소에서 10년 만에 출옥하였으나 사회안전법에 묶여 부자유, 당시 어머님 사시던
대구 대명동 공무원아파트에 칩거. 10월26일 장남(**범초), 이00와 결혼. 12월 장녀 결혼,
사위 조00(전 경남모직 사장, 장남과 경북중, 서울상대 입학동기)
1971년(59세)
장남의 아들(첫 손자) 태어남. 장남의 수유리, 돈암동 집에서 생활(** 매달 형사들이 한 두 번 집을
방문"체크"함, 보호관찰 보고서 잘 써달라며 장남은 형사들에게 용돈을 늘 쥐어 줌).
부인 김용아 여사는 김천 농남중에서 김천여고로 전근 가며 농남중학에 <금오장학재단>을 설립.
그동안 2녀 서울산업대에, 3녀 서울여대에 진학하여 장남 집에서 학교 다님.
1972년(60세)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회갑연, 차남 서울사대 대학원 진학.
1975년(63세)
부인 김용아 여사, 김천여고 교감이 됨. 장남(**범초)이 김천황금동 시립도서관 옆에 마당 너른 토방
집을 마련해 드려 부인과 조촐한 생활. 차남 교육개발원(KEDI)재직 시 서울사대입학동기인 강00과 결혼.
1976년(64세)
차녀 결혼, 사위 배00(서울사대, 서울대경영대학원 수료, 현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1977년(65세)
장남(**범초), 00화학(주)무역부장으로 입사하였으나 연좌제로 여권을 내주지 않아 면직당할 위기에
현역 서기관 두 분(** 서울대경제과 동창으로 훗날 김영삼 정권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한이헌과 정보부5국장 - 이 분과는 한 사람 보증 세워오면 자기가 무조건 보증 서겠다는 언질이 있었기 때문에 담판지어 보증을 받아 냄)이 보증을 서서 여권이 나옴, 이후 장남은 여러 기업체에서 주로 해외“세일즈”로 활동하며 근무.
1978년(66세)
부인 김용아 여사 서울명동 한일관에서 회갑연. 차남, 미국“플로리다”주립대학에 장학금 받아 유학
(** 여권 내는데 당시 교육개발원 원장이었던 이영덕 박사가 보증을 섬).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시대 마감.
1980년(68세)
3녀 결혼, 사위 이00(당시 현대건설 사원)
부인 김용아 여사 김천여고 교감 직에서 명예퇴직하고 퇴직금으로 서울 도곡동에 아파트를 마련,
수 년 동안“프랑스”문학사를 번역하며 칩거생활(유고가 된 번역원고 만 여 매).
1982년(70세)
차남, 철학박사학위(교육철학전공)를 따 미국서 귀국하여 정신문화원(현 한국학연구원)교수가 됨.
차남은 전두환 정권 5공 통치철학을 만들어 내라는 요구와 회유를 완곡히 거부.
1983년(71세)
사회안전법에서 마침내 풀려나 여권발급 받아 부인 김용아 여사와 함께 미국여행,
이민 가 LA에 살던 동생 김문거(金文炬, 동경 중앙대 졸, 이민 가기 전 서울신문부장)를 20여 년 만에
만나 3개월 동안 미국 곳곳을 두루 견문함. 귀국직후 전립선암 진단받고 투병생활에 들어감.
장남(**범초), 판교공원묘역을 미리 마련해 둠.
1985년(73세)
차남, 서울대학 사범대학교육학과 교수가 됨.
1987년(75세)
5년간 암과의 긴 투병생활(주치의는 막내 사위 이00의 친구 이정균 내과원장) 끝에 2월6일 오전 10시경
서울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서거함. 구라파 출장 중이던 장남의 귀국<당시 00물산 상무로 해외출장이
잦음>을 기다려 5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판교공원묘역에 안장됨.
(이상 선친의 살아계실 때의 말씀과 스스로 겪은 기억에 의거해 기록했음, 연도에 작은 착오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 외는 사실 그대로임. 2008년 6월18일 아침, 장남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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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의 발굴 취재 축약임)
「또 하나의 잊혀 진 과거사, 419 한국교원노동조합,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민주화’열망한 참교사다.”」
44년 전‘교육 민주화’를 부르짖던 최초의 교원노조가 있었다. 교사가 이승만의 자유당 유세에 동원될 만큼,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던 시절이었다. 조직원 2만 명. 전국 단위로 성장한 교원노조는 1년 만에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사라졌다. ‘516 혁명 재판부’가 교원노조를 용공이적단체로 몰아 강제 해산시켰기 때문.
숨죽이며 살아온 교원 노조 교사들과 유가족이 이제 서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교조보다 30년 앞선 이들의 투쟁은‘명예 회복’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 * *
17대 국회 개원일인 지난 6월7일. 삼엄한 경비 태세의 국회 정문 앞에 1인 시위를 벌이는 한 노인이 있었다.
밀짚모자를 눌러 쓴 그의 꼿꼿한 자세는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안경 너머로 비친 단단한 눈빛이 세월의 풍상을 짐작케 할 뿐이다.
‘17대 국회는 군사문화의 뿌리 516 군사 쿠데타 진상규명 특별조사 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
419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 대표자.’
그의 목에 걸린 피켓을 뒤로 한 채, 국회의원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올 여름은 유난히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를 달궜다. 그러나 불볕더위도 매일 1인 시위에 나선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강기철
(** 시위당시79세, 선친보다 13세 연하로“아놀드-토인비”<역사의 연구>를 번역. 철저한 개신교인으로 선친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그 방대한 <역사의 연구>번역본을 출간하자마자 선친영정에 처음 바치기도 했다. 범초 주)
419 한국교원노동조합(이하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다.
44년 전의 교원노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이토록 옛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얼까.
어떤 분노가 그를 이토록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가슴을 쿵쾅거리는 호기심. 419 교원노조와의 첫 대면이었다.
419 교원노조는 419혁명 직후 민주화의 물결과 함께 ‘학원 민주화’를 열망하던 교사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러나 교원노조에 몸담은 1500명의 교사들은 516 군사 정권에 의해‘용공세력’으로 몰려 일제히 해직됐다.
졸지에‘수괴’가 된 노조 간부급 교사들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납득할 수 없는 의혹 제기와 고문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교사도 있었다.
‘교육 자주화’와‘학원 민주화’를 꿈꾸던 교사들의 순수한 열망은 채 1년도 안 돼 철저히 파괴됐다
강씨는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로, 혁명재판부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사회안전법이란 족쇄에 묶여 10년이 넘도록 경찰의 감시도 이어졌다.
1960년 당시 국학대학 사학과 강사로 재직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매일같이 옥바라지를 하던 아내는 그가 옥에 갇힌 지 1년도 안 돼 심장 마비로 숨졌다.
아들은‘연좌제’적용을 받아 군 장교에 지원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만 한 가장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진실 규명’ 의지는 강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419 교원노조 사건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살아있는 역사요. 정치적 음해와 조작으로 수십 년간 그 진상이
밝혀지지 못했지. 나는 몸이 아플 틈이 없소. 뒤늦게나마 용공조작된 교조 사건을 알리고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니까. 갈 길이 멉니다.”
‘신동아’가 419 교원노조에 몸담았던 이들의 삶을 추적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마지막 증언’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419 교원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역시“이목(82세, 419 교원노조 사무국장, 전교조 자문위원)씨 외에
연락이 닿는 관련자가 없다”고 했다.
군사 정권 시절‘빨갱이’란 멍에로 살아온 세월 속에서 교원노조 관계자들은 자신의 이력을 감추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사실 일부 노조 관련자들은‘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제도적-정치적
한계 때문에 울분을 삼켜야 했다. 그들의 삶이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신동아’는 40년 전 혁명재판부의 공소장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옥고를 치른 교원노조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찾아냈다. 이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기억하는 사무치는 아픔의 흔적들이었다.
다음은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419 교원노조사(史)다.
419와 함께 탄생한 교원노조
1960년 2월28일 대구. 자유당과 야당의 선거전이 한창인 일요일이었다. (중략)
당시 경북여고 교사였던 여학룡(81)씨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초롱거리는 눈망울로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학생의 질문에 쉽게 말문을 열 수조차 없어서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데이. 하필 야당의 강연회가 있는 일요일에 모든 학생들을 등교시킨 이유가 뭡니꺼.
거짓말은 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정의를 말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율배반
아닙니까. 선생님 비겁합니더.” “그래. 느그들이 내 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던 여씨에게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변명하기 급급한 다른 교사들과 달리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경북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등에 재학 중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일요일 등교 지시 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경북도청 앞까지 학생들의 행진이 이어졌다.
교사들은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막아서는‘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했다.
‘대구 228 학생 시위’로 불리는 이날의 궐기는 교사들의 양심에 파문을 일으킨 신호탄이었다.
이후 치러진 315 부정선거는 교사들을 더욱 자괴감에 빠뜨렸다.
전국 곳곳의 교사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
교실 환경 정리를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이승만, 이기붕의 사진을 게시할 것을 강요받았다.
수업 참관 명목으로 학부모를 동원, 자유당 시책을 선전하며 정-부통령의 당선에 대해 홍보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교장 교감이 직접 가정을 방문해 선거운동까지 펼치거나,
일부 교사가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등 부정선거의 보조 요원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는 이렇듯 교사들의 치욕스런 경험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419 혁명은 교원노조 탄생의 기폭제가 됐고,
“교육이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교사들의 열망은 한층 강해졌다.
“419 의거로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사들의 결의가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당면과제는 교원의 권익 향상이 아니라‘교육의 민주화’였다.
419 전, 선친 대구상고 재직시, 모친 경북여고 재직 시 대구상고 교정에서 찍은 사진.
대구 봉덕동에 큰 감나무 있는 집도 사시고. . .이 때가 두 분,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한겨레 신문에서 펴낸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3권에 올라 있는 사진을 찍은 것)
********
(중략)
2 만 명 가입과 정부의 탄압
당시 419 교원노조 본부가 파악한 전국의 조합원은 2만명에 이른다.
강기철씨는 “정부 탄압이 본격화된 이후, 이들은 노조 회원 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 수가 한 때 4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 교원 수가 10만 명이 채 안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419 교원노조의 기세는 대한교육연합회(이하 대한교련-한국교총의 전신)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조는 당시 대한교련의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교원 노조로부터 어용단체로 몰린 교총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000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19 혁명 이후 5만 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교총 40년사’)
이는 교총을 탈퇴한 교사들의 상당수가 교원노조에 가담했다는 추정이 가능함을 방증한다.
그러나 많은 교사들의 커다란 공감을 안고 출발한‘419 교원노조’는 ‘합법성과 필요성’이란 논란의
도마에 오르게 된다. 당시 노동조합법에는 교사들의 노조 결성을 막을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신성한 교사들이 어찌 노동자를 자처하느냐”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
1960년 7월5일자 ‘동아일보’는 ‘교원노조는 필요 없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현재 교원노조의 동향을
정찰한다면 교원들의 복지향상에 목적을 둔 것처럼 위장하고 실인즉 모 정당의 학생조직의 전위로 되어
정치적 도구화하고 있는 경향도 없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학계 대표 이종하 대구대학 교수(** 선친의“와세다”후배, 범초 주)나 민주당 조재천 의원 등이
이구동성으로 교원노조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교원노조의 필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조 의원은“현행법으로 교원노조를 결성할 수 있고 교사들 권익옹호를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원노조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부 역시 교원노조의 활동을 끊임없이 막아섰다.
“자연 발생적 현상이니 교원노조를 방임하겠다”던 허정 과도 정부는“불법이니 해체시키겠다”고 곧
태도를 바꾸었다. 이후 들어선 민주당 장면 정권은 노동조합법을 개정, 교사의 노조 설립을 금지하고자 했다.
“제복 근무를 하는 소방관, 형무관, 경찰관 등은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고 못 박는 노동조합법 제6조에
‘교사’라는 항목을 끼워놓고자 했던 것.
이에 9월26일 교조를 탄압하는‘노동조합법 개정안 철회’와‘노동조합법 개악 반대’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이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3일 간 이어졌다.
72시간의 단식투쟁 끝에 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폐기처분했다.
(** 지금의 이명박 정권 대통령 실장인 정정길 씨가 당시 경북고학생회장으로 필자와 더불어
전교생을 교원노조지지 단식농성에 참여토록 했음. 당시 교장은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인 김영기).
당시를 회상하는 이목 씨의 말이다.
“우리는 투쟁을 하면서도, 결코 수업을 거르지 않았지요. 수업은 교사의 가장 큰 사명이니까.
요령 피울 줄 모르고 단식을 진행하던 교사들이 쓰러져 갔어요. 1300명의 교사 중 74명이 의식불명으로
교단에서 쓰러지고, 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이증석 동지가 숨을 거뒀습니다. 겨우 32세의 나이였는데….”
단식 투쟁으로 숨을 거둔 이증석씨의 아들 이원배(한반도 재단 운영이사, 이사장 김근태)씨는 당시
일곱살 바기였다. 이씨의 집안은 선친의 죽음으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았고, 그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됐다.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되자, 그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가 “아버지의 못 다한 꿈이 30년 만에 이뤄졌노라”
며 눈물을 떨궜다고 말했다.
419 교원노조는 합법성 수호 투쟁은 물론, 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교육행정관료 숙청,
사학재단비리 척결 등 학원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2대 악법으로 불리던‘반공임시특별법’‘집회-시위운동에 관한 법률(데모 규제법)’의 입법화 움직임에 반발하는 데도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이들의 당당한 기세는 예상치 못한 폭풍을 만나 1년 만에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용공 분자로 몰린 1500명
1961년 516 쿠데타와 함께 출범한 군사정권은‘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집권과 동시에 포고령을 내려 혁신계 제정당-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이들 간부들을‘용공분자’로
몰아 전격 체포했다. 이 중에는 정치 단체와 관련이 없는‘419 교원노조도 포함돼 있었다.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교원노조의 간부들이 하루아침에‘용공 인사’로 둔갑했다.
5월17일 교원노조 대표 강기철 씨의 구속에 이어 전국의 조합간부 1500명이 학교에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혔다.
이 중‘수괴급’ 54명이 서대문 형무소에 압송돼 혁명재판을 받았다.
당시 치안국에서 발표한 용공분자 2000명 구속이란 통계에 따르면 75%가 교원노조에 속한 사람들인 셈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노조 간부들이 극심한 고문 속에 간첩 내지 용공 혐의자로 조작되는 동안 문희석 문교부
장관은 6월8일 “교원노조가 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던 음모가 발각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신문 결과 혐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자, 이번에는 월남한 교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간첩 혐의를
추궁하는 조사가 벌어졌다.
당시 경기도 연합회 위원장이었던 실향민 이동걸씨는 출옥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억울함과 절망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한 그는 고초를 당하기 전, 인천 경기 수산고의 훈육주임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기본 법률로는 처벌할 근거가 없던 이들에게 새롭게 씌워진 올가미는‘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였다.
제정일로부터 3년 6개월 이전까지 적용이 가능한‘소급법’이었던 이 법률은
‘반국가 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기타의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에 의거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교원노조가‘2대 악법(**데모 규제법, 반공임시특별법, 선친주도,
선친은 516 직전 이미 장면정권 때 42데모 현장에서 구속수감 중이었음. 범초 주) 반대 투쟁에 참가했다’는
것과‘서울대 민통련이 주장한 남북학생회담안을 환영한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기철씨는 “민주당 정권이 제정을 추진한 2대 악법은 419 정신을 역행한 반민주 악법이라는 이유에서
다른 정당과 사회단체, 언론단체도 함께 반대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남북학생회담에 대해서는 교원노조가 지지하거나 동조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
이 대목에서 강대표의 목소리는 고조됐다.
“당시 교원노조 강령에는‘우리는 4월 혁명 정신을 받들어 투철한 반공이념 하에 민주학원 건설의 선봉이
될 것을 기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어요.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에도 가입한 조직을 용공단체로
모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조작 아니오.”
삼엄한 군사 정권의 등장과 함께, 교조를 지지하던 이들도 등을 돌렸다. 이목 교사는 혁명 재판에 끌려
다니던 중 처음 교원노조의 합법성에 동의했던 조재천 민주당 의원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민주당의 경찰 정보가 어떠했기에 교사들을 정치재판에 회부합니까?”(이목)
냉랭한 표정의 조 장관으로부터 한 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이 선생, 전국에 교원들이 얼마인데(그 당시 통칭 20만) 그들이 단결하면 그 조직에 당해낼 정권이 있나요?”
이목 교사는“우리는 정치운동 단체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지만, 조 장관은“그것이 정치”라며 돌아섰다.
이것이 교원노조가 처한 현실이었다
(** 장면정권의 실세인 조재천은 민주당 정권시절, 선친께 참의원 의장을 주겠다며 교원노조에서 손 떼고
민주당정부를 함께 잘 꾸려나가자는 제안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음, 범초 주).
1961년 11월16일. 유독 칼날 같은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혁명재판소 심판 제3부 김정운 재판장에 의해 강기철씨는 징역 15년(구형 15년),
신동영(총연합회 선전부장, 당시 38세, 작고)씨는 징역 10년(구형 12년), 이목씨는 징역 10년(구형 12년),
신우영(경북지부 부위원장)씨는 징역 5년(구형1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교원노조 사건으로 기소된 여학룡(대구지부 부위원장)씨는 징역 3년에 5년간 집행유예,
2대 악법 반대 연대투쟁 사건에 기소된 김문심(** 필자의 선친, 교원노조 경북도 연합회위원장, 당시 50세)씨는 무기징역(구형 사형)이 선고됐다. 재판정에는 숨 막힐 듯한 고요가 흘렀다. 재판은 단심으로 끝났다.
하루아침에‘간첩’이란 굴레가 이들에게 씌워졌다. 지옥 같은 고통이 시작됐다.
강직한 지조의 김문심
당시 혁명재판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문심씨와 그의 가족에겐 그 누구보다‘모진 풍파’가 몰아닥쳤다.
부정과 타협하지 않던 대쪽 성품의 그에게 더욱 가혹한 시절이었다.
1960년 5월29일, 대구농고의 교사였던 김씨는 경북교조의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나이 쉰. 노조의 교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장이 비교육적 행태를 보이면 뒤에서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당당히 면전에서 바른 말로 지적했다.
그의 당당함은 자유당 문교부 관리들과 교장, 교감의 미움을 샀지만, 동료교사들에겐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게다가 "와세다"대 정경학부 출신으로, 당시 얼마 되지 않는 유학파 엘리트였다.
‘일본 교원 노조’모델을 참고한 419 교원노조의 강령, "캣치프레이즈", 구호 등도 거의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419 직후 벌어진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이끈 이유로, 그는 혁명 재판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북한 출신’이었고, 동료에게 신망받는‘핵심’이었다.
혁명재판부에게 그는‘제거대상 1순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친을 잘 알고 있는 박정희와 김종필은
516거사가 성공하는 즉시 16명을 사형시키기로 했는데, 그 중 선친이 1번이었다고 함,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로 516후 <516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낸 김영기 교장도 선친과 잘 아는 사이, 범초 주).
1961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된 김씨는 감형조치로 징역생활 10년만인 1970년 2월25일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의 나이 예순이 되던 해였다.
김씨의 장남 김00 씨는 선친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꼭 한 번 서대문형무소에서 목격했다.
항상 흔들림 없었던 아버지의 눈물에 김 씨는 슬픔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공기가 채 가시지 않던 2월, 늘 하던 대로 새벽같이 아버지가 계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습니다.
꼿꼿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그날따라 부어 있었고, 머리칼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어요.
놀라‘고문을 당하셨냐’고 묻자, 교도관이 제지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10년 만에 출소한 김씨에게 또 다른 감옥이 따라다녔다.
사회안전법에 묶여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것.
김씨는 울분을 삼키며 프랑스 문학사를 번역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당시 교원노조에서 함께 활동하다 권력과 타협해 출세한 동료의 연락은 아예 받지도 않았다
(**예컨대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을 함께 했던 윤길중 씨가 배신하여 군사정권에서 국회의장이 되어 전화가
와도 받지도 않았다. 건국대 총장을 지내고 군사정권에서 출세한 조일문 씨도 마찬가지로 두 분 다 선친의
절친한 친구였었다. 범초 주).
불의의 세상 속에 스스로를 유배한 김씨는 5년 동안 전립선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1987년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김씨의 가족에게도 고통은 함께 했다. 김문심씨의 부인, 김용아씨(1999년 작고)는 인고의 삶을 살았다.
경북여고 가사 교사로 근무하던 그녀는 남편 구속 이후, 집에서 기차로 2시간이나 떨어진 아포중학교로 쫓겨났다.
네 시간(**기차 타는 시간만)이나 걸려 출퇴근을 하고, 대구구치소로 이감된 남편을 면회하는 고달픈 삶이었다.
(중략)
이후‘연좌제’의 족쇄는 이들 가족을 망령처럼 괴롭혔다.
여권을 발급받는 것도, 취업을 하는 것도 힘겹기만 한 삶이었다.
세월은 흘러 민주화가 이뤄졌고, 가족들은 40년 전의 ‘고통’의 터널에서 조금은 헤어 나온 듯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대한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
장남 00씨는“현 정치권의 386 인사들을 보면 자신들이 지나온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높게 평가하면서 정작
그 토대를 마련한 196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외면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전교조로 뛰어든 이목
한편 419 교원노조의 명맥을 이어간 인물도 있었다.
1960년 당시 경북 교조 부위원장과 총연합회 사무국장직을 맡았던 이목씨는 전교조의 출범에 함께 참여했다.
혁명 검찰부에 의해 5년간 옥고를 치른 이씨는 출소 후에도 못다한 교원노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도 전교조의 원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8월에는‘남북교육자통일대회’ 행사 차 북한의 금강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의 역사를 남기고자 1989년‘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를 발간한 것도 그다
(**이목 선생은 서울상대 필자의 선배로 당시 대구 경북사대부고 선생으로 선친의 교원노조운동에 조영진
선생과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신 분으로,‘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는 그의 심혈을 기울인 금자탑 같은
귀한 저서, 이번 취재에 필자가 동행하여 실로 오랜만에 대구서 만나 뵈었음. 범초 주).
82세의 고령에도 불구, 이씨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고통스런 과거를 응시하면서도 좀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1960년대 당시 사흘마다 경찰이 찾아와 장판까지 뜯어서 집을 샅샅이 뒤지곤 했지. 집 앞에 문패조차
달 수 없는 상황인기라. 무엇으로 얽혀 누명을 쓸까봐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만날 수도 없고, 늙어서도
여권을 신청할 때마다 국가정보원에서 검토하느라 남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 평생 감시당하는 삶을 살았지"
이씨는 현재 전교조의 구성원들에게‘살아있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죽여 살아온 많은 419 교원노조 교사들은, 사회와 연을 끊고 살아왔다.
노조 경북지부(**지부가 아니라 교원노조경북도 연합회, 범초 주)의 부위원장을 지낸 신우영씨.
그에게는 40년 전의 불행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구 동구 지저동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씨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당뇨 합병증과 싸우고 있다.
9월 초 갑작스런 기자의 전화를 받고, 그는“옛 얘기는 꺼내서 무얼 하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교원노조 활동은‘무덤까지 가져갈 아픔’인 듯했다.
1960년 혁명재판부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신씨는 3년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당장 먹고 살 궁리에 급했다. 그가 영어의 몸이 되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친척과 이웃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친구 사업을 물려받은 뒤 경제적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1980년대에 부도를 맞았다.
현재 병마와 싸우는 신씨를 찾는 가족은 없다. 하나 뿐인 아들은 어디에 살아있는지 연락처조차 알 길이 없다.
신씨의 아내, 지용분씨(78)는 기자에게 “이 집을 방문한 손님은 처음”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신씨는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듯, 그제 서야 가슴 속에 품어 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가슴 속에 묻고 살아온 세월이요.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바른 목소리를 냈다고,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자부하고 있어. 그런데 고향에 내려가면 모두 나를 ‘빨갱이’라 부르며 상종도 하지 않았지. 구속된
나를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어요. 이가 갈리게 세상을 증오했지. 이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건장한 체격과 당당함으로 동료를 이끌던 신씨는 40년 세월의 풍파에 몸도 마음도 모두 쇠한 듯했다.
(**필자가 이남희 기자와 동행면담, 신선생은 <일생 중 김문심 선생 모시고 교조운동 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라 하셨다. 필자는 그의 병들고 초라한 모습에, 또 선친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었었다. 범초 주)
빨갱이로 외면당한 세월
대구교원노조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여학룡(82) 교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영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1960년 당시 경북여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친 그는, 대구교원노조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1960년 4월29일 대구의 각급학교에 전화연락을 하고, 뜻있는 교사들의 모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1964년 출소한 그에게‘살아남는 것’은 가장 큰 과제였다.
풍비박산 난 집안사정과 공납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 자녀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파면 당한 이후 동료 교사들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집종업원 일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제자가 중국집에 왔다가 물을 따르는 여씨를 보고 깜짝 놀라 도망가는 일마저 있었다.
‘사면초가’에 처한 그를 구한 것은 신문사 일이었다. ‘대구일보’의 업무국장직을 맡기도 했었다.
전교조가 탄생하고 합법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는 가슴 속에 감춰둔‘419 교원노조’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었다.
끝없는 망설임의 과정이었다.
그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1961년부터 지금까지 모아둔‘교원노조’ 관련 기사와 혁명재판 관련 서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행여 경찰에 압수될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까, 땅에 묻고 숨기며 간직한 자료였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나는 학생들에게 떳떳하고 양심적인 교사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내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도, 정치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지요. 지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교조에
비해 그 존재조차 유명무실한 우리의 투쟁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통의 세월은 비단 수년간 옥고를 치른 이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419 교원노조 활동으로 파면된 1500명의 교사들에게도 비참한 삶은 이어졌다.
교육부는 심사를 거쳐 파면된 교직원들을 선별 복직시켰으나,
사건이 터진지 3년이 지나도록 400명의 교사들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낙향해 농사를 짓거나 아내를 접대부로 보낸 사람에서부터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까지. . . . .
비참하게 스러져간 이들의 삶은 일일이 글로 담지 못할 정도다
(**여학룡 선생은 당시 필자의 모친과 경북여고에 함께 재직하셨다, 선친과 모친을 잘 아시는 어른. 범초 주).
소설가 조성기씨 역시 419 교원노조 경남지부 위원장을 지냈던 선친 조인식(1980년 56세로 작고)씨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1960년 5월 실종된 줄만 알았던 그의 아버지는, 육군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해직되고 말았다.
이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1983년 발표된 자전소설‘야훼의 밤’에는, 조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내 아버지는 교원노조 활동으로 용공 세력으로 몰리고 감시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알콜 중독으로 점점 미쳐가고 있습니다. 소설을 본 선친의 지인들은‘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다만, 교원노조 사건으로 한 가족사가 얼마나 무참히 무너질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 또 대표작 장편<늘 푸른 소나무>의 저자 중견작가 김원일은 대구농고 때 선친이 담임, 노태우대통령 때
청와대 문예인 초청이 있었는데 마침 대통령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친복권문제를 얘기하자 묵묵부답이었다고 함,
노태우 대통령은 경북고등 때 선친에게 영어를 배웠음, 작가 김원일은 필자와 동년배로 가끔 소숫잔 기울이며
선친 회고담에 젖는다. 선친을 "모델"로 한 장쾌한 인물소설을 쓰고 싶다며 자료를 달라고 하지만. . .답답할 뿐.
- 나의 기억을 전해줄 따름이다. 지금 쯤 쓰고 있는지! 범초 주)
교원노조 소외시킨 민주화 보상법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419 교원노조 사건은 여전히‘명예회복’ 절차에서 한참을 비껴나 있다.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이들의 존재는 철저히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교원노조 사건을 비롯, 소위 혁명재판부가 처리한 정치 사건들은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조처라는 나름의 명분에 가려 재심의 길이 봉쇄됐다.
제3공화국 헌법부칙 제4조, 2~4공화국 헌법부칙 제11조에는 재심의 길을 막는 명문이 박혀 있다.
교원노조사건은 헌법부칙조항으로 인해 18년 동안 유료광고로 그 진상을 밝히는 것마저 보도지침에 매여
금지당할 정도였다.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은 요원하기만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516은 군사 쿠데타’로 규정하자,
강기철씨는 국회를 상대로‘516 진상 규명 특별조사위원회’구성을 청원하려고 했다.
이 때 34명의 여야 국회의원이 지지성명에 참여했고, 당시 정대철 민주당 의원은‘교조 사건이야말로
쿠데타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라 규정했다
(**정대철 전 의원의 선친 정일형 박사는 필자의 모친 정의여고 시절 은사,
그의 모친 이태영 여사도 모친에게 각별한 정을 갖고 계셨다. 범초 주).
그럼에도 청원은 불발되고 말았다.
전교조가 불법단체로 규정된 상태에서 30년 전 교원노조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이하 민주화 보상법)의 탄생에 기대를 걸었지만,
419 교원노조는 역시 진실 규명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씨는 2001년 11월
“민주화 보상위원회로부터 교원노조 사건과 관련, 투옥된 것은 3선 개헌 발의일 이전의 일임으로 보상법을
적용받을 수 없다”는 통지문을 받았다. 다음해 2월 재심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문심 선생의 장남(**범초)은 이 대목에서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 516 혁명의 주체인 김종필 자민련 전 대표와의 정치적 야합이,
516 혁명 직후 벌어진 용공조작 사건의 진실 규명을 교묘히 막았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강씨는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소송을 검토하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소송, 교원노조 간부들을 얽어맸던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6조의
위헌을 묻는 헌법 소원, 사회안전법에 의거한 보안 처분에 대한 원인무효소송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변호사가 소송을 포기해 명예 회복을 향한 노력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이제 공은 17대 국회와 노무현 정부로 넘어왔다.
‘과거사 진상 규명’의 의지를 밝힌 참여 정부가 과연 지금껏 진실규명에서 소외돼온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40여 년간 역사 속에 묻혀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은‘생의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신동아」2004년 10월호)
* * *
** 오호통재라!
1960년대의 민주화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은 아직도 법이 가로막고 있다.
김종필은 김영삼, 김대중 정권 탄생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516당시 또 그 이후 60년대의 그 참혹한
만행이 백일하에 들어나는 것을 평생 우려하는 516쿠테타의 장본인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 다 516의 수장인 김종필과 야합함으로써 탄생한 정권,
당시 60년대 민주화운동기간은 잡아 빼야한다는 김종필의 끈질긴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법조문 부칙에 69년까지의 재심청구, 보상 등 진실규명은 안 되도록 못 박혀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도 <과거사위원회(약칭)>는 만들었지만 국회에서 법 개정까지는 힘이 못 미친 것이다.
선친과 각별했던 친구 이길상, 이은상 형제, 또 선친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영기 516장학재단 이사장,
윤길중, 조일문 같은 516 출세자들의 외면, 변절, 매정함이 범초에게는 가장 가슴 아팠었다.
선친 옥에 계실 때, 찾아들 뵈었으나 그 쌀쌀한 냉대에 두 번 다시 찾을 마음이 생기질 않았었다.
이때 지식인들의 교활함, 변신, 배신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그런가 하면 선친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분 최재형 선생이 전가족(부인과 2남 6녀)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간
사연 또한 가슴을 치는 일이다(최재형 선생은 성낙원이라는 큰 고아원을 사비로 운영했음).
또 필자가 대학졸업 후 연좌제로 취직이 여의치 않자 선친"와세다"후배 동창인 최문환 선생 (졸업 당시 상대학장이자 필자의 은사, 나중 서울대총장 재직 중 별세) 이 강력 추천해 <삼호그룹> 에 첫 직장으로 들어간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다 고인이 되셨고 최문환 총장의 3남이 필자와 상대 경제학과 동기로 절친했으나 역시 7년 전 고인이 되었으니!
대학 졸업한 1966년부터 몇 해 동안 낮에는 회사 근무하고 저녁에는 가정교사 하면서 동생들 하나 둘 서울로
진학시키고 그 후 시집 장가 보낸 일이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꿈만 같다!
선친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선친을 알고 나를 아는, 이 시대를 올곧게 살아가는 많은 양심가들의 관심과 경애를 지금 껏 받고 있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선친의 가호라는 생각을 나는 굳게 갖고 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선친 선물인 것이다.
그동안 이곳 <모놀>에 글로 소개된 신영복 교수, 김정남 선생, 신경림 시인, 작가 현기영, 작가 김원일, 신남휴, 송재소 동문 같은 분들이 그런 이 시대의 대표적인 양심인 것이다. 그런 분들이 나를 좋아하고 대접해 주는 데에는 내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그분들이 선친의 삶을 잘 알고 존경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들을 존경하며 어울리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세상 회한과 슬픔 속에서 온갖 간난을 극복하며 살아남은 내가 남은 여생 할 일은,
선친과 같은 훌륭한 삶에, 그 억울했던 일생에 달빛이라도 비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맑아지고 정의로워 지는데 일조를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 범초.
첫댓글 예전 사상계가 신동아가 되었지요, 담담히 엮으신 선친의 이력,잘 몰랐던 과거사, 마음고생 심했을 가족분들,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맑아지고 정의로워 지는데 일조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수향님, 고맙습니다!
범초님을 통해 기막힌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거대한 권력앞에 정의로운 외침이 힘없는 메아리가 되어 진정한 민주화를 외치신 그분들과 가족 주위분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생체기를 남겼습니다. 가슴아픈일입니다. 범초님의 바람이 꼭 성사되시길 기원합니다. *^^*
419당시의 사람들의 의기로운 기운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 . 60년대의 그 참담한 민주화 역정이 아직도 거의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언제 당시의 진실들이 햇빛을 보게 될지, 제힘은 미약하기만 하고. . .지금으로선 암담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