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굴과 공굴다리에 얽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공굴’과 ‘공굴다리’라는 말이 있다. 철도나 도로의 교량을 말하는 말로 통용(通用)되고 있는 말인데, 이 말은 우리나라 말도 사투리도 아닌 일본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日本)이 미국(美國)에서 수입한 외래어(外來語)를 재수입한 일본의 외래어라 할 수 있다.
일본인(日本人)들이 우리나라를 병합한 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고착화하고, 중국(中國)을 침공하기 위하여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면서 하천을 건너는 교량을 건설할 때 ‘콘크리트(concrete)’를 주로 사용했는데, 일본인들은 ‘콘크리트’를 ‘공구리’라고 일컬었다.
공 굴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인(日本人)들을 따라 ‘콘크리트’를 ‘공구리’라고 했고, ‘공구리’로 만든 다리와 그 아래 굴같이 생긴 공간(空間)을 ‘공굴’이라고 이르게 되어 지금은 마치 그것이 우리나라 말인 것처럼 각인(刻印)되어 있다.
한술 더 떠서 우리들 경상도(慶尙道) 사람들은 그 것이 마치 철도나 도로의 교량(橋梁)을 이르는 경상도사투리라도 되는 양 추억담(追憶談)을 구성하는 용어로 활용하기도 한다. 노동판에서는 ‘콘크리트 타설작업’을 ‘공구리 친다’라고도 한다.
그러나 ‘공구리’는 ‘콘크리트’의 잘못된 표현일 뿐 우리말도, 경상도사투리도 아닌 일본(日本)에서 쓰던 일본인들의 외래어에 불과하며, 일제(日帝)의 우리나라 침략(侵略)과 함께 따라 들어 온 일본말이라 할 수 있다.
경상도(慶尙道)에서도 지방에 따라서는 ‘공굴’이란 말이 교량아래 쪽에 만들어지는 공간(空間)이라는 점을 들어 한자와의 합성어(合成語)로 빈공(空)자에 ‘굴’이라는 글자를 합하여 ‘공굴(空-)’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그냥 ‘다리’라고 해야 한다. 한문자(漢文字)로 표기하면 교량(橋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굴’ 또는 ‘공굴다리 밑’은 그냥 ‘다리’와 ‘다리 밑’이라고 하면 된다.
공굴다리
어쨌든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굴다리’와 ‘굴’, 저수지의 ‘배수공(排水孔)’ 등을 모두 ‘공굴’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은 아니다.
--------------------------------------
‘공굴다리’에는 이런 저런 얘기들이 숱하게 쌓여있기도 하다. 옛적 어린이들은 무료할 때마다 호기심(好奇心)으로 “엄마, 나는 어떻게 생겨났어요?”라는 뜬금없는 질문(質問)을 하면, 대개의 어머니들은 “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라고 답변을 해 주시곤 했었다.
이런 어머니의 농담조 말씀을 들은 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당당한 혈통(血統)으로 자기 집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주워온 자식이라는 절망감(絶望感)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얄궂은 출생의 비밀(秘密)은 오랫동안 어린 가슴에 남아 어머니나 다른 가족들이 자신에게 섭섭하게 대할 때마다, 자신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되살아나 의욕과 자신감(自信感)을 잃고, 고뇌(苦惱)에 빠지기도 했었다.
겨울이면 매운바람의 끝자락이 한 바탕 거친 소리를 내며 교각(橋脚)을 감싸 도는 음산한 저 다리 밑, 저녁 무렵이면 시가지(市街地)를 떠돌던 거지나 노숙자(露宿者)들이 가마니나 ‘보루박꾸’를 쌓고 덧대어 잠자리를 꾸미는 더러운 다리 밑에서 자신을 주워왔다는 것이 한없이 서럽기도 했었다.
공굴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 말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증험적(證驗的) 전래어(傳來語)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나무람의 일환으로 말하는 이 말은 실재(實在)의 ‘다리 밑’에서 일어난 실제(實際)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을 알아본다. 우선 이 말에 등장하는 ‘다리 밑’은 지금의 경북 영주시 풍기에서 부석으로 가는 길에 소재하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를 지난 직후에 만나는 ‘청다리’를 말한다.
소수서원
예로부터 서원(書院)들이 많았던 이 동네에는 공부하러 오는 젊은 유생(儒生)들이 넘쳐났는데, 그래서 남녀 간의 연사(戀事)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당시의 ‘청다리’ 근방에는 서원(書院)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여종들이 많이 살았는데, 한창 젊은 혈기(血氣)가 뻗치는 유생들이 그녀들을 집적거리기도 했고, 좀 더 대담한 유생들은 그 마을 처녀와 눈이 맞기도 하여 임신(姙娠)을 시키기도 했었다.
공굴
결과가 이렇게 되면, 유생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된다. 일을 저지른 유생(儒生)은 고민 고민 끝에 처녀와 미리 짜고, 그 사생아(私生兒)를 다리 밑에 버려둔 뒤 자기가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주운 것처럼 연극(演劇)을 꾸미곤 했었다.
자기 아기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불쌍한 아이니 거두어 키우자”고 부모에게 청원(請願)을 하는 것이다. 유생의 부모들은 자식의 그런 수작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체 자기 손자나 손녀로 거두어 키웠다. 물론 적자(嫡子)가 아닌 서출(庶出)의 신분으로서였다.
아무리 사련(邪戀)에서 돋아난 핏줄이지만, 제 자식을 내칠 수는 없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세월(歲月)이 흐르면서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청다리’에서 주워온 자식이 얼마나 많았기에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는 말이 전국에 유포(流布)되어 각지의 전래어(傳來語)로 정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짐작이 되는 일이다.
공굴다리
‘청다리’에는 이렇듯 아기들의 울음으로 늘 시끌시끌했지만, 조선조(朝鮮朝) 초기부터 음산한 소문이 떠돌아 밤이면 인적이 끊기기도 했었다.
당시의 유생(儒生)들과 이들 유생들의 아기를 가진 처녀들이 이 다리에 아기를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음산한 소문을 역이용(逆利用)한 덕분이기도 했다.
밤에는 이 다리에 귀신이 나타난다하여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연(事緣)을 알아본다.
조선조 초기, 이 동네에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모의한 사실이 관노(官奴)의 밀고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리고 그 뒤 이 다리가 있는 ‘순흥’에는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쳤다.
어린 임금의 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했던 수많은 선비들의 피로 ‘청다리’아래 흐르던 죽계천의 물은 40리에 걸쳐 핏빛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도 죽계천변에 있는 마을인 동촌리는 ‘피끝’이라고도 부른다.
청다리(죽계제월교)
(옛적에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이후 떼죽음을 당한 원혼(冤魂)들이 밤에 ‘청다리’를 건너는 행인들을 해코지한다는 소문(所聞)이 퍼져 이곳 사람들은 해만지면,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 했었다.
부득이 건너야 할 때는 동백꽃을 입에 물고, 소꼬리를 붙들고 건너야 한다는 비방(秘方)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청다리’ 귀신(鬼神)이 동백꽃의 붉은 빛을 보고 무서워서 해코지를 못하도록 하려 함이고, 소꼬리는 벌벌 떠는 나그네가 그걸 잡고 걸어가면 소꼬리 앞에 몸체 없는 소가 끌어준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
이제 향리(鄕里)의 ‘공굴다리’로 가본다. 그 시절 향리의 ‘공굴’과 ‘공굴다리’는 필자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靑年期)에 걸친 추억의 현장이기도 하다.
가을이 되면 7번국도 괘릉천(掛陵川) ‘공굴다리’ 옆 들판에서 양손에 사이다 병 하나씩을 들고 메뚜기를 잡아 병 속에 넣고, 너무 많이 잡아 병이 다 차면 벼줄기를 훑어 잡은 메뚜기를 꿰어 들고, 논두렁 밭두렁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공굴다리’ 구멍이 뻥뻥 뚫린 활성천 철로(鐵路) 길을 껑충껑충 뛰어서 건너다가 ‘다리 밑’을 내려다보면, 아득하게 내려 보이는 냇물이 갑자기 어슬어슬 소름이 끼치게도 했었다.
동해남부선 공굴다리
그러나 이렇듯 추억을 담고 있는 ‘공굴’과 ‘공굴다리’는 일제(日帝)의 침략도구(侵略道具)로 변신하여 우리 민족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전국의 각 지방에는 ‘공굴’과 관련된 저항시적(抵抗詩的) 민요(民謠)들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경상도(慶尙道) 지방에서 구전(口傳)되는 ‘아리랑’ 민요에 “낙동강 칠백리 공굴 놓고, 하이카라 잡놈이 손찔한다.”는 가사가 있다. ‘공굴’은 콘크리트, ‘하이카라’는 일본식(日本式) 조어로 ‘양복쟁이’를 가리킨다.
국도 2호선이 만들어지던 시절, ‘공굴다리’를 놓는 공사판에서 양복차림의 일본인(日本人) ‘십장’이 뼈만 남은 우리 민족 인부(人夫)를 발길로 걷어차면서 “바가야로”라며 욕설(辱說)을 퍼붓는 모습을 그린 노래다.
일제가 만든 동해남부선
일제는 조선(朝鮮)의 물자수탈과 군사적(軍事的) 목적을 위해 1904년부터 폭 8~10m의 ‘신작로(新作路)’를 닦고 수많은 ‘공굴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1번 국도는 주로 값싼 중국인(中國人)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건설했고, 2번 국도는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을 토벌하다 붙잡은 조선인 ‘폭도(暴徒)’들을 시켜 만들었다.
여기에서 잠시 1번국도와 2번국도의 개요(槪要)를 고찰해 본다.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회원님들은 무엇이든 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덧붙인다.
우리나라 국도 제1호선(木浦-新義州線)은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경기도 파주시를 잇는 일반국도이다. 남북이 분단(分斷)되기 전까지는 전체 노선 약 1068km, 판문점을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 이어주는 도로였으나, 여기에서는 분단 이후 우리나라의 일반국도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콘크리트 다리
국도 제1호선의 일부 구간은 조선(朝鮮)시대부터 주요 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구간은 정조(正祖)시기에 놓인 시흥로(始興路)와 겹치며, 서울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던 조선시대의 의주로(義州路)는 중국과의 사신왕래에 사용되는 주요도로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지금의 국도 1호선과 겹치는데, 의주로(義州路)는 책문을 넘어 ‘베이징’까지 이어진다하여 ‘연행로(燕行路)’라고도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행로(燕行路)’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신이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 내왕하던 길을 말하는데, 사행로(使行路)라고도 한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수도 북경(北京)의 옛 이름이 연경(燕京)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색당파(四色黨派)를 일삼던 부패한 조선조 군신(君臣)들의 무능과 주색잡기로 우리나라 세자(世子)의 책봉까지 이 길을 따라 ‘뙛놈’들의 승낙을 받아야 했다.
그뿐인가. 금수(禽獸)보다 못한 ‘호로놈’들에게 금이야 옥이야 기른 우리들의 딸들을 노리개로 진상(進上)하기 위하여 아픈 다리를 이끌고 울며불며 걸어갔던 굴욕(屈辱)과 치욕(恥辱)의 길이 이 길이다(더러운 ‘짱깨놈’들).
콘크리트로 만든 철교
화가 나서 다시 1번 국도로 간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들어 일제는 목포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의 도로를 정비하여 국도 1호선으로 명명하였다.
“신작로(新作路)”라 불린 새 도로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대로(大路)를 사용하였으나, 여러 구간에서 이전의 도로망(道路網)을 버리고 새로 조성하였다.
이는 일제(日帝)가 기존 도읍 사이의 지리적 관계보다는 직선도로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1번국도(평택지역)
일제는 이렇게 놓인 국도 1호선을 이용하여 서울 이북구간은 만주(滿洲) 침략의 이동로(移動路)로, 호남구간은 우리에게서 징발한 쌀의 운송로(運送路)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다(더러운 ‘왜놈’들).
국도 1호선은 6.25전쟁 이후 그 구간이 임진각(臨陣閣)까지로 잠시 한정되었다가 지난 2000년에는 경의선(京義線) 도로 연결공사로 개성공업지구(開城工業地區)와 연결되었다.
국도1, 2호선 시작점 기념비(목포시)
한편 국도2호선은 신안~부산선(新安-釜山線)으로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경상남도(慶尙南道)를 거쳐 부산광역시 중구를 잇는 일반국도이다.
남해안권 도시를 잇는 주요국도로 남해고속도로(南海高速道路), 경전선과 선형이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는 기점(基點)이 국도 제1호선의 기점과 같은 목포시였으나, 신안군으로 기점이 변경되었다.
국도 2호선
일제(日帝)가 만든 도로(道路)와 철도, 그리고 그 밑에 만들어진 ‘공굴다리’는 도로와 철도의 기능보다는 간악한 일제의 수탈(收奪)과 침략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공굴다리’의 비애(悲哀)를 담은 ‘아리랑’ 한 토막을 음미해 본다.
아 리 랑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다 날 넘겨 주소
불국사 연실봉 신작로 되고
자동차 타고서 임차자 가자
아죽가리 피마자 열지마라
촌놈의 가시나 갈보질 간다
낙동강 칠백리 공굴 노코
하이카라 잡놈이 손찔한다
(이하 생략)
|
‘공굴다리’에는 그에 얽힌 사연들도 수 없이 많다. 6.25 이후 수많은 피난민(避難民)들이 ‘공굴다리’ 밑에서 노숙(露宿)을 하며 생명을 부지했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공굴다리’ 밑에서 태어나 길거리를 누비며 연명해 왔다.
김두한이 거지생활을 했던 수표교 ‘공굴다리’
아련한 추억들도 ‘덕지’가 되어 쌓여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 7번국도 자갈길로 등교하다가 갑자기 ‘속나구(소나기)’가 쏟아지면 ‘공굴다리’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기도 했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가린 것이 없는 들판 도로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면, ‘공굴다리’ 밑 둔치에서 용변을 보기도 했었다.
그뿐인가. 도로변 참외밭에서 참외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들키면, 죽으라고 내달려 ‘공굴다리’ 밑으로 숨어들었고, 여름철에는 동네 형들을 따라 ‘공굴다리’ 밑에서 천렵(川獵)을 하여 배를 불리기도 했었다.
‘공굴다리’ 밑 천렵
앞서 가던 젊은 아낙이 소변을 참지 못해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공굴다리’ 밑으로 내려가면, 도둑고양이처럼 뒤따라 들어가 걷어 올린 치마 밑을 훔쳐보기도 했었다.
나이 많은 형들은 밤마다 사귀는 동네 처녀와 ‘공굴다리’ 밑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었고, 한 여름 삼복(三伏) 때는 동네 어른들이 영양탕(營養湯)을 끓여 보신을 하기도 했었다.
‘공굴다리’에서는 잔혹(殘酷)한 학살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6.25 당시 미군(美軍)에 의해 양민학살(良民虐殺)이 자행된 충북 영동군 노근리 경부선 철도 밑 ‘공굴다리(노근터널)’가 그 현장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관총(機關銃) 난사 자국이 터널 벽면에 선연히 남아 당시의 참상(慘狀)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었다. 휑하니 뚫린 비좁은 공간에서 피란민(避難民)들이 당시 얼마나 처절한 참상을 겪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1950년 7월25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에 지프를 타고 나타난 2명의 미군(美軍)과 우리나라 경찰관(警察官) 1명은 주민들에게 급히 짐을 꾸릴 것을 지시했다.
500여명의 주민은 인민군(人民軍)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대구(大邱)와 부산(釜山)으로 피신시켜 주겠다는 미군의 말을 믿고, 그들의 인솔 하에 서울-부산 국도를 따라 도보(徒步)로 피란길에 올랐다.
이튿날 ‘노근리’ 철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4~5명의 미군이 피란행렬(避難行列)을 막아서면서 어디론가 무전(無電)을 하더니 곧바로 미군전투기(美軍戰鬪機)가 날아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현장은 바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공중에서의 기총소사(機銃掃射)가 끝나자 이번에는 길 양쪽에서 총탄(銃彈)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란민중 상당수가 그대로 철로(鐵路) 위에 쓰러졌다.
노근교 '공굴다리'의 기총소사 자욱
(삼각표와 동그라미표를 한 곳이 총탄자욱이다)
나머지 주민은 철도 밑 ‘공굴다리’로 대피했으나, 곧이어 ‘굴다리’ 양쪽 입구에서 또다시 기총소사(機銃掃射)가 시작됐다.
미군들은 ‘공굴다리’ 인근 야산에 기관단총(機關短銃)을 걸어놓고 터널 안쪽은 물론이고 대피하기 위해 뛰쳐나오는 피란민들에게 무차별로 총탄을 퍼부었다.
피란길에 올랐던 500여명의 생존자(生存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대전지방철도청은 ‘공굴다리’ 보수공사(補修工事) 명목으로 대부분의 총탄자국을 ‘시멘트 몰탈’로 덮어버렸다. 유족(遺族)들은 “학살의 증거를 없애려는 행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분노하고 있다.
-----------------------------------------
필자가 향리에 살 때 활성리에 소재하는 활성천의 ‘활성교(活城橋)’ ‘공굴다리’ 밑은 치도부역(治道賦役)을 위한 자갈 채취장(採取場)이기도 했었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도 소개한바 있지만, 비포장(非鋪裝)도로였던 7번국도는 일제시대(日帝時代)부터 도로가 통과하는 부락의 주민들이나 그 도로(道路)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부락민들도 집집마다 일정 거리만큼을 분담(分擔)하여 수시로 자갈을 깔고, ‘벳꾸밧꾸(울퉁불퉁한 지면)’를 매우는 등 유지(維持) 보수의 의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이를 ‘치도부역’이라고 한다. 10여m씩의 도로를 할당받아 ‘치도부역’을 했는데, 부역(賦役)을 나갈 때는 부녀자(婦女子)와 어린이 등 전 가족이 총동원(總動員)되다시피 하기도 했었다.
7번 국도(영지초등학교 입구)
동리별로 날짜를 정해 봄과 가을 한차례씩 아침 일찍 ‘초백이’에 보리밥을 터지게 담고, 김치 짠지조각을 듬뿍 담은 ‘옹찰이(옹가지의 사투리)’나 바구니를 이고 지고 자기가 맡은 도로변으로 나갔다.
하천바닥을 파서 철사(鐵絲)로 만든 ‘자갈치는 채’로 자갈을 치면 모래는 빠지고, 자갈만 남는데 이 자갈을 자기가 할당(割當) 받은 도로변에 일렬로 쌓아놓고 감독관(監督官)의 점검을 받았다.
이때의 감독관은 면사무소의 면서기(面書記)들로 거의가 일제 때부터 근무하던 ‘일제(日帝) 출신’ 면서기들이었다.
자갈이 부족하면 ‘활성교’와 ‘괘릉교(掛陵橋)’의 ‘공굴다리’ 밑, 또는 그 아래쪽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철로 ‘공굴다리’ 밑 하천(河川) 바닥이나, 인근 산비탈에 있는 굵은 돌을 망치로 깨트려 자갈을 만들어 깔기도 했다.
이렇게 쌓아둔 자갈무더기는 장마나 홍수(洪水)가 지나간 후 도로바닥이 울퉁불퉁하게 패면 도로바닥에 골고루 깔아 노면(路面)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공굴다리’의 약칭인 ‘굴다리’라는 이름은 상호에도 등장한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공덕5거리에 가면 김치찌개로 유명한 ‘굴다리식당’이 있고, 충남 아산 온양(溫陽)에 가면 반세기동안 운영되고 있는 ‘굴다리식품’이 있다.
그리고 회원님들께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겠습니다만, 서대문(西大門) 신촌 ‘공굴다리’ 옆에는 유명한 ‘굴다리집’이 있었다.
세브란스병원과 이화여대 굴다리 옆의 판자촌(板子村) 가운데에 있었는데, 최근 신촌역 민자역사(民資驛舍) 개발과 함께 부지일대는 공원(公園)으로 조성되고, 지금은 사라진 비운(悲運)의 술집이다.
‘굴다리집’의 마당엔 몇 개의 둥근 탁자(卓子)들이 있었고, 균형(均衡)이 맞지 않는 기우뚱한 탁자들 위로 역시 균형이 맞지 않는 파라솔이 세워져 있었는데, 중력(重力)의 균형에 완벽하게 몸을 맡긴 비닐들이 우비(雨備)처럼 탁자와 사람을 덮어주곤 했었다.
'공구리'로 만든 부산의 영도다리
|
첫댓글 맞아요..공굴다리에 얽힌 얘기는 참말로 많을 것입니다. ㅎㅎ 공굴다리의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인줄 몰랐네요...무심코 많이 썼더니...다 일본의 잔재라니....기분이 야릇하네요.....그래도 그말을 쓰야 옛추억이 살아나는 신세가 되었으니...어쩔도리 없네요...말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ㅎㅎ
저는 간이 작아서....철뚝길의 공굴다리는 못 건넸습니다. 동해남부선 상행선으로 입실역 못가...큰 다리가 있는데...
그 철길위로 걸어가자면 침목 사이로 강바닥의 시퍼런 물이 어찌나 무섭던지...요사이는 강물이 다 바닥 났지만...옛날에 물도 많았지요...ㅎㅎ
도로 부역 하는거...기억 납니다...저도 한두번 해 본 거 같고요....자갈 주워다 놓고.. 길 고루고 .....했지요...
활성 공굴밑에 (주어리 공굴 : 활성입구를 어른들은 주어리라고 불렀슴) 걸비들이 많이 살았지요. 활성 공굴 지날때는 무서워서 숨도 안쉬고 내달렸지요. 불국장에서 소팔아 돈가지고 오다가 보면 제일 무서분데가 괘능 능갓하고 활성 공굴입니다.
소판돈 틀린 사람도 마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에 연안에 살던 우리 친구는 주위에서 추구리면 그 높던 연안 큰 공굴다리 위에서 다리밑으로 뛰어내리기도 했죠. 연안 작은 공굴도 있었지요..저는 소풀 한망태기 차면 말방 공굴다리 밑에서 많이
쉬고 놀고 했습니다.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