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 경제상 [21회 고급 27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337DF4856FDE15A22)
정답: ③
* 조선 후기 경제상
모내기, 담배 등을 통해서 조선 후기 경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 지방의 정기시장인 장시는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을 확대되어 농민들의 농업경영 방식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상품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 조선 후기에 소작 농민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을 내던(정률제, 타조법)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정액제, 도조법)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③ 조선 초기에는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를 위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2) 조선 후기(17세기 이후)의 경제상 [25회 고급 26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E704D56FDE2BB16)
정답: ④
* 조선 후기(17세기 이후)의 경제상
- 출전인 경세유표(정약용 저)와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적 작물의 모습에서 조선 후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또한 해외 원산지 작물인 고추, 고구마, 감자 등도 전래되어 구황작물로 재배되었다.
상업에 있어서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私商)이었다. 사상 중 선상인 경강 상인은 한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동전인 상평통보(1678)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① 고려 말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1363)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목화 재배가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다.
② 15세기 후반부터 장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③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시전).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⑤ 고려 성종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로 철전인 건원중보(996)를 만들게 되었다. 자급자족적인 경제 구조로 인해 주로 다.주점이나 음식점 등에서 사용되었고, 유통은 부진하였다.
(3) 상업적 농업이 유행한 조선 후기 경제상 [30회 22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135024E56FDE2F31C)
정답: ①
* 상업적 농업이 유행한 조선 후기 경제상
출전인 경세유표(정약용 저)와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적 작물의 모습에서 조선 후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또한 해외 원산지 작물인 고추, 고구마, 감자 등도 전래되어 구황작물로 재배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고, 유통 경제가 발달하자 지방 장시나 포구에서의 상거래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보부상들은 장날이 순환하는 것에 따라 장사를 하면서 각 장시들을 연계하여 하나의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17세기 중엽부터는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며,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인 개시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가 이루어졌다. 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하는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광산 개발도 활발해졌는데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작업 과정은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동전인 상평통보(1678)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① 고려 시대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996)를 만들었으며, 숙종(1095~1105)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저포)를 사용하였다.
(4)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진 조선 후기 경제상 [29회 29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224E34956FDE32824)
정답: ①
* 상평통보가 널리 쓰여진 조선 후기 경제상
조선 후기에는 수리 시설이 확충되며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여기에는 보부상들이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이외에도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팔았다. 또한 해외 원산지 작물인 고추, 고구마, 감자, 토마토 등도 전래되었다.
농업과 함께 상업도 발달하여 18세기 이후 송상, 경강 상인 등의 사상(私商)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송상은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대외무역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한강을 무대로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숙종 때에 허적 등의 건의로 주조된 상평통보(1678)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① 고려 시대에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5) 풍속화가 유행한 조선 후기 경제상 [27회 고급 26번]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45C5056FDE35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