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후광 김대중 전대통령님이 활짝 열어놓은 남북 통일의 길을 따라 10월 14, 15일 양일간 평양을 방문하여 아리랑공연도 참관하고 북한의 동포들도 만나고 왔습니다. 후광마을 회원 여러분과 그 감격을 같이 하고자 글을 올립니다.
1. 평양 방문하기 까지.
9월 30일(금) 오전에 북한에 올해부터 3년간 2000대 씩 등하교용과 출퇴근용으로 북한에 ‘통일 자전거 보내기 운동’을 주관하는 구미YMCA 총무로부터 10월 14, 15일 양 일간 시간 좀 내줄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
벌서 약속이 잡혀 있어 곤란하다 그러니 평양 관광과 봉수교회 방문이 있는데 같이 좀 갔으면 하여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아! 평양,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냐. 얼른 말을 바꿔, “갈수 있다” 그러고는 이미 잡혀있던 약속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나의 평양 방문은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불현듯 다가왔다.
사실, 10월4일부터 16일 까지 11일간 매일 민간인 150명을 여행사에서 모집하여 평양 관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주민 접촉이나 방문지가 제한되어 있어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갈까 말까 갈등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겨레 하나 되기 운동본부(겨레하나)와 YMCA전국연합에서 주관하는 평양참관에는 관광 외에 평양봉수교회 방문과 조선 그리스도교연맹(조그연)의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보낸 ‘통일 자전거’에 불편함이나 문제점이 없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양으로 떠날 때 까지 나의 설레임과 조바심은 어린시절 소풍가기전의 들뜬 기분 그것 이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저)를 다시 한번 읽고 최근의 북한 답사기도 인터넷에서 뒤졌다. 그냥 가기보다는 평양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빈약한 자료를 보충하기위해 서점에 가보니 북한여행관련 책자들은 너무나도 없었다. 아니면 내가 무지하고 서툰 탓인지........ 북한관련 책들이나 소식들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어야 민족 동질성과 문화적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모르고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통일이 된 후에도 갈등과 반목이 오랜 세월 존재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하겠다.
외래교수(경북대)로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수업시간에 다음주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강의를 못 할 것 같다고 하니 많은 학생들이 환호하면서 의아해 했다. 개원의가 북한을 방문한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북한을 평범한 일개 소시민이 갈수 있다는 것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학생들에게 통일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올수도 있으니 전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할 의료인으로서 돈벌이 공부만하지 말고 북한의 공중보건과 의료전달체계에 대해 미리 공부하여 통일 후 남북 모두에게 적용될 공공의료 정책 개발에도 관심을 가져 달라는 부탁과 함께 북한의 의료시설지원이나 봉사활동도 참여하여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2. 인천공항
지방(경북 구미시)에서 출발하는 우리일행은 다음날 오전 9시에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에 인천공항행 리무진버스를 탔다.
올라가는 차안에서 북한도 한나라 한민족인데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공항이나 대구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4일 오전7시였다. 3시간 30분이 걸렸다.
주린 배를 간단한 식사로 채우고 모임 장소인 3층 출국장으로 급히 갔다.
우리보다 일찍 출발하는(8시 출발) 평양 참관단과 우리 일행(45명)과 같은 비행기로 출발하는 다른 참관단(전체 300명)들이 섞여 인천공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대충 북한에서 주의해야할 사항이나 약간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단일기(통일기), 방북 허가증, 여행신분증, 여행안내책자, 비행기표를 받고 공항을 빠져 나갔다. 휴대폰은 공항에서 회수하여 도착하면 반환 해준다고 하여 이름표를 붙여 제출하였다.
북한방문은 국내여행인지 해외여행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어중간한 형태였다.
검색이나 출국심사는 해외여행만큼이나 철저히 행하여 졌다. 그러나 공항의 면세점이나 면세구역으로의 이동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메모지와 볼펜을 구입하려 면세점에 가니 평양 방문객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면세점으로 구입하러 갈려니 중무장한 경찰이 이동을 제지하는 것 이었다.
그때서야 북한여행은 국내여행에 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0명의 방북단을 실은 아시아나 1338호 비행기는 출발 시간보다 조금 지체된 9시30분경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비행경로는 직선으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 상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해의 해상항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한상공으로 들어가는 경로다. 우회해도 평양까지는 1시간 남짓한 가까운 거리다.
10시30분경 드디어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내는 북한영토를 잠시라도 더 보려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접하는 북한 땅, 가슴이 찡하게 울리고 뜨거운 무엇이 북 받혀 오는 느낌 이었다. 이렇게 빙 돌아와도 1시간이면 오는 이 땅을 갈라진지 60년 만에 왔으니 어찌 아니 감격스러우랴.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열린 길 다시 막히지 않게 소중히 가꾸고 지켜 나가야겠다. 아니 더 넓은 길로 칠천만 온 겨레가 자유롭게 오가는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여자 승무원도 북한이 첫 방문인지 연신 창밖을 내다보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큰 도시나 높은 건물은 눈에 보이지 않고 들판은 가을걷이가 끝난 듯 하였다.
입국심사도 비행기입구에서 여행신분증에 붙은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는 것으로 간단히 진행되었다.
3. 평양순안공항.
평양 날씨는 전형적인 맑은 가을 날씨였다.
순안공항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2대의 한국 국적기가 있었다. (KAL 1대, 아시아나 1대)
고려항공의 여객기는 150석 내외의 작은 항공기로 4대쯤 보였다.
공항청사는 회색빛의 건물로 중소 도시의 철도 역사를 상상하게 하는 정도의 60~70년대 건물 이었다.
몇 해 전에 아들과 같이 몽골공화국을 갔을 때의 울란바타르공항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 사회주의국가의 건물은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회색빛의 중후한 느낌의 건축물들 이었다.
공항청사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방문단은 약속이나 한 듯이 활주로에서 이리 저리로 돌아다니며 순안공항의 모든 것을 사진 찍기 시작했다. 공안들도 별로 제지하지 않았다. 한 20분을 그렇게 소모한 후에 검색대를 통과하여 공항 밖으로 빠져나와 준비된 45인승버스에 차례대로 승차 하였다.
공항검색도 고성능 방송용 캠코드 외에는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가방을 열어 정밀검사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또한 북쪽이 남쪽의 참관단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그 만큼 신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시내까지의 길은 잘 포장된 고속도로였다. 고속도로 이지만 중앙분리대가 없고 많은 차량은 아니지만 가끔씩 차량이 통행했다. 차창너머로는 논과 밭, 얕은 구릉의 연속 이었다.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평양은 시내로 들어오니 금수산 의사당, 개선문, 보통문등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보였다. 고층건물도 많았어나 간판이 없어 어떤 건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선군정치니, 김일성부자를 기리는 구호가 붉은색의 글씨로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마다 붙어 있었다.
4. 대동강과 양각도 호텔
옛적부터 물이 맑아 <옥류>, <청류>로 불리는 대동강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며 평양을 동서로 갈라 서해로 들어간다.
대동강을 건너면서 우리는 1968년에 나포된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대동강변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푸에블로호가 전시된 위치는 100여년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격침을 기념하는 격침비 바로 옆이다.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서 푸에블로호의 대동강 전시를 기념하였다.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샤만> 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 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 "미제야 함부로 날뛰지 마라."
이글을 보고 21세기는 미국의 전리품보다 외세를 물치고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했다는 기념비가 서 있기를 바랐다.
우리 일행은 대동강의 섬인 양각도에 지어진 양각도 호텔에 짐을 풀었다. 양각도 호텔은 1995년에 지어진 45층의 현대식 특급 국제호텔로 1001개의 객실과 유희, 봉사시설의 부대시설을 가지고 있다. 최고층에는 상해의 동방명주탑과 같이 회전하는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2층 대식당에 뷔페식으로 차려진 점심식사는 사회주의국가의 근검절약정신을 잘 반영하듯 간소했다.
김치는 남쪽에 비해 젓갈이 적게 들어가서 시원하고 국물이 넉넉한 것이 특징이었다.
몇 가지 야채(상치, 오이, 양파), 빵, 생선 튀김(명태), 닭찜과 맑은 조개미역국이 점심 메뉴였다.
음료수로 맥주(대동강맥주)와 생수(신덕산샘물과 00000)는 병으로 무료로 제공되었다.
밀감단물(오렌지쥬스) 과 포도쥬스도 비치되어 있었어나 다소 싱거운 것이 원액이 아니라 어릴때 먹던 쥬스분말을 태운 것 같은 맛 이었다.
점심 식사후 호텔주변을 산책하며 사진 촬영을 했는데 저 멀리 주체사상탑, 인민대학습당, 능라도 5.1경기장등이 아스라이 보였다.
5. 만수대창작사.
우리 일행의 첫 방문지는 북쪽의 가장 크고 저명한 미술창작단체인 만수대창작사였다.
창작사 입구 마당에는 김일성가족들의 교시와 조각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북쪽의 어느 곳이나 공통적이다.
전시판매장 1층에는 보통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2층에는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예술품에 까막눈인 나에게는 전혀 식별이 안되는 작품이었다. 판매도 하는데 가격이 부담되면 에누리도 해준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있었다.
안내원은 작품 한점이라도 더 팔려고 상세히 작품을 설명해 주었다. 북한사회도 점점 장사에 익숙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구에서의 마중과 떠날 때의 배웅은 진솔하고 따뜻한 마음이 전해 와서 좋았다. 우리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만수대창작사 >
⊙ 설립년도 : 1959년 11월 20∼30여명의 조각가들이 집체적으로 제작한 천리마동상의 제막식이 만수대창작사의 출발점이었다.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술창작단체로서 7만㎡의 대지에 연건평 4만㎡의 건물에 있다.
⊙ 활동사항 : 주체사상탑, 만경대소년학생궁전 등 평양시내의 대표적인 조각품들은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단의 집단창작품이며, 평양지하철과 각종 공연장의 대형벽화들은 벽화창작단의 집단창작품이다.
⊙ 기 타 : 만수대창작사에는 창작, 조직사업(운영기획), 제작, 작품보금, 판매 등을 각각 담당하는 5명의 부사장이 있으며, 조선화, 유화, 벽화, 조각, 도안, 수예, 공예, 도자기, 출판화(인쇄) 등 모두 9개의 창작단이 조직되어 있으며, 60개의 창작실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화창작단 소속 미술가 100여명 등 현재 약 1,000여명의 미술가와 2,000여명의 종사원이 소속되어 있다. 창작방식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집체적 창작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작의 경우 보통 2, 30여명이 한 그룹이 되어 집단창작을 한다.
북한주민이 이해하지 못하고 좋아하지 않는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추상화는 그리지 않으며, 수묵화는 전문미술인 사이에 기량전시방식으로 만수대창작사의 기량전시실에 전시, 소개될 뿐 밖에서는 전시하지 않는다. 또 이 창작사에는 전시판매장도 있다.
6.평양학생소년궁전
대리석의 웅장한 건물로 청소년들의 방과 후 과외 학습장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우리 일행의 버스가 도착하니 제복을 깨끗이 차려 입은 여학생 한명이 다가와 환영 인사와 함께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학생들 주변에는 여자선생님도 같이 서 있었다. 이 학생은 북한의 중학교 2학년 학생이라 했다.
발레, 피아노, 서예, 조소, 수예, 동양화, 가야금, 무용, 수영장등을 둘러보고 학생들의 예술 솜씨도 보았다.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는 학생을 뽑아 특기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엄청난 재능과 실력을 보여 주었다. 이래서 사회주의국가가 예술이나 공연이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 주체사상탑.
대동강변에 백색의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전통 석탑건축양식의 높이 170m의 탑이다. 탑신이 150m이고 탑신위의 봉화가 20m이다.
주체사상탑에서 직선으로 대동강건너에 있는 인민대학습당 그리고 김일성 광장을 연결하는 선이 평양의 최고 중심선이 된다고 한다. 인민대학습당에서 주체사상탑을 보면서 주체사상에 대해 공부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설립했다고 한다.
전면에는 농민을 상징하는 낫을 든 여인, 지식인을 상징하는 붓을 든 학생,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를 든 근로자를 조각한 거대한 청동 조형물(3인군상)이 인상적이었다.
탑의 뒤편에는 각국에서 보내온 격려문이나 휘호들을 적은 돌들이 붙여져 있었다.
8. 아리랑공연.
아리랑공연은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공연한 것을 광복60년, 당 창건60년, 6.15공동선언 5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만든 것으로 우리민족의 근래 100년 역사를 형상화한 장대한 서사극이다.
‘아리랑’은 민족의 정서와 넋이 담겨 있는 민요 아리랑을 주제로 ‘민족의 운명사와 세시풍속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대집단 체조이자 예술 공연이며 환영장, 서장: 아리랑, 제1장: 아리랑민족, 제2장: 선군아리랑, 제3장: 행복의 아리랑, 제4장: 통일아리랑, 종장: 강성부흥아리랑 등 13경으로 구성되어있다.
공연은 크게 집단체조와 배경대<카드섹션>로 이루어진 집체적 예술 공연으로 연 인원 10만 명(실제 인원은 6만 명)이 참가하고 있다. 배경대도 2만 명이나 된다. 일부 전문 예술인외에는 모두 평양의 학생들과 어린이, 시민,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리랑을 연출한 사람은 북한의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피바다가극단의 김수조(74세) 총장이다. 일행 중 한분이 김총장이 남한에서도 공연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어나 10만 명을 수용할 능력이 없어 거절했다는 이야기와 이번의 아리랑 공연은 좀 시끄럽고 떠들썩할거란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로 남북한 전체가 공연을 연결고리로 냉전구도를 깨는 떠들썩한 난장이었다는 말씀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저녁 식사 후에 대동강 능라도에 있는 15만 명을 수용하는 5.1경기장으로 갔다.
버스가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을 알아본 북녘의 동포들은 경기장 밖을 내다보면서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갔던 통일기(한반도기)를 흔들며 답례를 했다. 경기장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관객들이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열렬히 환영인사를 해 주었다. 수십만이 외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했다. 이런 통일의 열기를 이어간다면 금방이라도 통일될 것만 같았다. 아니 우리는 이미 통일된 듯 했다. 경기장안에서 우리는 벌서 하나 된 민족이었다.
공연의 내용은 글재주 없는 저의 글로는 감동을 다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용은 DVD로 제작 된 것이 있으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원하시는 분은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구하는데 까지 구해 보겠습니다.
이 공연은 우리 민족의 통일이라는 신앙에 대한 종교의례로 느껴질 정도의 감동과 우리 민족만이 펼칠 수 있는 대단위 예술작품입니다. 아마 제 평생에 가장 큰 감동과 전율까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공연을 보는 것으로 직장을 이틀씩이나 비우고 들어간 여비를 상쇄하고도 남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칠천만 겨레가 손잡고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9.양각도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리랑공연을 보고 온 일행들은 똑같이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 감동의 여운이 끝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또 평양의 하루 밤을 잠이나 자면서 보낼 수 없다는 여행객들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호텔의 맨 위층은 회전식 식당으로 창문전체가 유리로 되어 바깥 경치를 잘 볼 수 있게 되어있다. 평양은 광고판이나 네온사인이 별로 없어 솔직히 야경은 별로였다.
하루에 북한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가능한 많은 것을 알려고 했다. 음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평양소주(25도), 맥주, 백두산 들쭉술(40도)등 여러 가지 술을 시켰고 안주도 소 발통찜(우족찜), 대동강 숭어찜, 은지송어구이(Foil에 싼 송어구이)등을 시켰다.
몇 가지 안주에서는 전혀 다른 안주가 나왔다. 김치전을 상상하고 김치지지게를 시켰더니 김치찌개가 나왔고 그 유명한 평양순대를 생각하고 시킨 고기순대는 소세지가 나왔다.
낙지불고기를 시키니 오징어불고기가 나왔다. 북쪽에서는 오징어가 낙지인가???
몇 십년 사이에 고유명사도 이렇게 변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루 빨리 하나되어 갈라진 글과 말도 통합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술값이나 안주가격이 엄청 싸다는 것 이었다. 제일 비싼 대동강 숭어찜이 겨우 4000원 이었다. 다음번에 평양 갈 때는 술은 내가 쏜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아리랑공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공연단들의 고생이나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대다수는 평생 기억에 남는 공연을 봤다거나 평양에 온 경비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통일된 조국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평양 오기 전에 서울,경기등 서해지방에 비올 가능성이 많다는 예보를 들었다. 비가 오면 아리랑공연은 취소되고 다른 공연으로 대치된다고 했다. 아리랑공연 없는 평양방문은 앙꼬(단팥)없는 찐빵인 셈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엄청 맑은 하루였다.
식당에서 우리 좌석을 담당하는 봉사원(접대원)은 26세의 부지배인이라고 했다. 일어, 중국어 등은 잘한다고 했고 우리의 짓굳은 질문에도 재치있게 잘 피해 갔다. 솔직하고 진솔한 마음이 우러나는 태도였다.
아직 미혼이고 결혼은 능력있고 진실되고 잘 생긴사람하고 하고 싶다고 했다. 남이나 북이나 결혼관은 똑 같다는것을 느꼈다. 요즘의 결혼은 연애와 중매가 반반 정도라는 이야기와 함께 먼저 신부집에서 신부가족과 신부 친구들을 데리고 결혼식을 한후 신랑집에서 똑같이 결혼식을 한번 더 한다고 했다. 신혼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젊은 남녀에겐 역시 결혼 이야기가 제일 편하고 재미있는 말걸기다.
원래 영업마감시간이 12시까지인데 손님이 있을 때까지 영업을 계속한다고 했다.
사회주의국가도 서비스정신은 있었다. 그래서 우리일행은 다른 손님이 없을 때까지 마음껏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론 봉사원이 술도 따라주고 이야기도 같이 했다.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인 북쪽의 아리따운 봉사원이 따라주는 술이 어찌 꿀 맛이 아니겠는가.
봉사원에게 서울도 꼭 한번 방문해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머지않는 장래에 다시 올거란 이야기도 빼 놓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넘어서 우리는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엄청나게 긴하루였고 감격과 흥분속에서 정신없이 지낸 하루였다.
10.만경대 옛집에서......
어젯밤의 과음으로 늦잠을 잤다. 벌써 집합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고양이세수만하고 아침도 못 먹고 차량에 탑승했다. 몰래 뒷문으로 살며시 탔다. 일등이라고 박수받기 싫어서......
오늘 첫 방문지는 만경대, 김일성주석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곳이다. 일만 가지 경치를 바라 볼 수 있다고 해서 만경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변에는 만경대 혁명사적관, 가족들의 분묘 등이 있고 옛집은 안채와 바깥채로 되어 있는데 안채는 부엌과 방으로 되어있고 바깥채는 자그마한 세 게의 헛간으로 되어있다.
헛간에는 각종농기계와 베틀, 문래등이 전시되어있고 조부가 사용하던 것이다.
안채의 벽면액자에는 김주석 조부모의 사진과 가족사진 등이 있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광복후 처음 고향집에 돌아와 할머니와 포옹하는 것을 찍은 사진이다. 그 만큼 감격적이고 가족의 사랑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안내원의 설명은 증조부가 산당지기로 들어와 어렵게 생활을 시작 했었고 광복후 김주석이 집에 돌아와 첫날 묵을 때 이부자리가 모자라 바깥채에서 멍석 깔고 거적 덮고 잤다고 했다.
그리고 김주석이 출세해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가자고 했어나 만경대 옛집에서 그냥 사시다가 돌아 가셨다고 했다. 요즘 남한에서 제일 큰 화두인 강정구교수의 만경대정신이 안내원의 입에서 나올 것을 기대했어나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북에는 만경대정신이란 말이 없는 것 같다.
만경대는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대통령의 생가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시골촌집이다.
강정구교수는 여기에서 무엇을 느껴 ‘만경대정신’이라는 학문적 창작물을 만들어 방영록에 서명하여 필화사건을 겪고 주체사상 신봉자로 매도당하는지 궁금했다.
강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경대는 ‘지역’입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김일성 생가가 있는 지역이지만 조금 더 아는 사람은 셔먼호를 격퇴시킨 곳입니다. 반침략 반외세 민족자주의 상징인 곳이죠. 또 만경대는 김일성의 증조부되는 사람이 소작인으로 힘든 삶을 살아간 장소로 가난한 농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김구선생이 방북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김일성의 생가가 있으므로 주체사상과 연결할 수도 있지만 북한 전문가에게는 다양한 배경과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곳이 만경대라는 곳입니다.” 라고 한다.
또 방명록에 서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것은 일기다. 일기를 보는 것은 프라이버시 침해다. 봐서도 안되지만 설령 봤더라도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인하고 써야한다. 객관적으로 거치지 않고 자기들의 추측으로 글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장한 것을 읽을수 있었다.
강교수는 만경대 정신이 항일독립운동을 한 김일성 집안의 내력과 항일독립 유자녀를 가르쳐서 민족정기를 세우는데 일조한 만경대학원의 정신을 기려서 만경대정신이라고 서명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주체사상이 포함되지 않는다.
만경대에서 나는 비록 가난하게 자라더라도 제대로 된 역사관과 민족의식을 가지면 왜놈의 앞잡이 노릇하지 않고 목숨 걸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우리의 독재자 어느 분과 많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11.칠골교회와 북한의 기독교.
봉수교회(1988년 건립)에 이은 두 번째 교회인 칠골교회는 1989년 평양 만경대구역 칠골동에 건립됐으나 봉수교회에 비해 규모나 내부 시설이 허술하여 1992년 증축 되었다.
특히 이 교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의 이름을 따 ‘반석교회’라고도 불린다. 칠골교회 주변에는 강반석 기념공원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시설은 남쪽 방문단에게 잘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김주석의 태어난 장소는 만경대가 아니라 외조부 강돈욱 장로의 집(칠골)에서 생모 강반석이 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주석은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 손잡고 주일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했고 그 교회가 칠골교회라는 이야기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간부들이 칠골교회가 있던 옛 자리를 찾아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시대 김주석이 왜놈에게 잡혀 감옥에 있을 때도 뇌물을 써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목사라고 자서전(세기를 넘어, 1968년)에 기록했다.
외육촌인 강양욱목사(1983년 사망)는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고 조그련 위원장인 강영섭은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시골교회를 연상하는 칠골교회(담임목사 황민우)는 총 150석 정도의 규모로 교인은 일백명정도이고 평상시 60~70명 정도가 예배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가대는 올해 3.1민족대회때 남한에 오기도 했고 여러번의 외국 공연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 평양 참관단은 원래 평양봉수교회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어나 봉수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지원(40억원)으로 예배당을 재건축하기 때문에 방문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북한기독교를 총괄하는 3층 규모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2층 규모의 목사관도 있다.
1,2층 합쳐 모두 450석 규모이고 교직자(목사, 전도사, 장로)는 30명 정도이며 신자는 300명 정도이고 주로 50대 이상이다.
현재 북한의 기독교 신자는 1만3000여명이 등록되어 있고 교직자는 300여명이고 친교공동체인 가정교회가 500여개 있다. 또 북한에서 유일한 평양신학원에는 38명의 학생이 공부하며 교수는 두 교회의 목사님들이 주로 담당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칠골교회에 도착하자 조그련의 관계자분들이 마당에서 환영해 주셨다. 종교의 불모지인 북녘 땅에도 이렇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했다. 조그련 관계자, 목사님등과 일일이 손을 잡고 포옹을 했다. 같은 민족,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니 성가대와 몇 명의 신자들이 박수와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로 환영해 주었다. 예배는 칠골교회 담임목사의 인도로 시작되었고 방북단의 대표도 설교를 했다. 북녘 땅에서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찬송가를 부르고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예배 중에 ‘아멘’소리가 끈이질 않았다. 전부 감격에 겨워 울먹이고 있었다. 사상과 이념보다 인간의 마음과 애정이 더 위대한 것을 느꼈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순간만은 하느님에게 갈라진 우리민족이 반목과 질시를 끝내고 서로 믿고 도우며 신뢰하고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살수 있기를 기도했다. 같이 한마음된 절실한 기도를 하느님은 꼭 들어주시리라 믿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갈라진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꼭 다시 뭉쳐야 하겠다.
예배 마지막에 조그련 오경우서기장의 제의로 예배당에 모인 모든 사람이 일어나서 서로 손을 붙잡고 ‘반갑습니다’를 합창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북녘 아주머니 손을 꼭 쥐었다. 입가에는 함빡 웃음을 담고.......
정말 놓기 싫은 손이었다.
<반갑습니다>
기쁨에 넘쳐 뜨겁게. 작사, 작곡 리종호
1. 동포 여-러분- 형 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 갑 습-니다-
얼싸안고좋아 웃음이요 절싸안고좋아 눈물일세
-어허허 어허 허허허 늴리리야---
(후렴)
반갑 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 습-니다- 반갑습-니다-
2.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정다운 그 손목 잡아 봅시다
조국 위한 마음 뜨거우니
통일잔치날도 멀지 않네
어허허 어허허 허허 늴리리야
(후렴)
3. 동포여러분 형제여러분
애국의 더운피 합쳐 갑시다.
해와 별이 좋아 행복이요
내 조국이 좋아 기쁨일세
어허허 어허허 허허 늴리리야
(후렴)
1시간 정도의 예배후 우리 일행은 교회 마당에 나와 우리가 보낸 통일 자전거는 이상이 없는지 물어보고 확인했다. 사실 우리는 자전거 이상유무와 검사를 위해 자전거를 만들어주신 공장의 사장님과 기술자도 데리고 방북했다. 북쪽 관계자는 가정예배소와 신자들에게 골고루 배분했고 아직까지 이상은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너무나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흥에 겨워 교회 마당을 통일자건거로 한바퀴 돌아보면서 이 자전거로 휴전선을 넘어 남쪽까지 그냥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분단의 사슬을 뚫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댓글로그인하지 않고 이 글을 읽었다가 너무 좋아서 댓글을 달기 위해 다시 로그인했습니다. 선생님의 방문에 초석이 되어 초석님까지 북한을 방문하셨군요. ^^ 세세하게 쓴 글에서 동포를 향한 초석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캐캐묵은 색깔로 분단을 이용하는 무리가 있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첫댓글 로그인하지 않고 이 글을 읽었다가 너무 좋아서 댓글을 달기 위해 다시 로그인했습니다. 선생님의 방문에 초석이 되어 초석님까지 북한을 방문하셨군요. ^^ 세세하게 쓴 글에서 동포를 향한 초석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캐캐묵은 색깔로 분단을 이용하는 무리가 있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글재주가 없어 그 감동을 다 못 전한것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의 작은 마음만 이라도 읽어 주시고 감격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찮아도 허락없이 벌써 퍼갔지요^^
감사합니다...초석님의 평양방문기는 통일편지를 쓰는 관촌중학교 친구들에게 작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김대중 대통령님의 평생 숙원이었던 통일과 관련된 글이고 혹시 못 보신 회원님들을 위해 공지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초석님...
우리회원님들의 소망을 초석님이 이루셨네요 우리회원들도 근년간엔 함께 북녘여행길이주선되길 바라며 종 아님 깨서 애써주시고 그때 초석님께서 선행자 역활을해주시면 더욱보람되고 알찬 방문여행이 될것같습니다 초석님께서 선구자가 되시어 회원님들께 생생한 현상을 소개하셔서 보람입니다
정말 진한감동으로 잘앍었씁니다......저희들도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보고 싶씁니다....
저는 평양소주가 먹고 싶네요,후광마을 사람들과 크~~~
종아니님, 만리님,소머리님, 남해님.....평양소주가 옛날에 먹던 그맛이 느껴지는 25도짜리라 아주 찡하게 가슴에 느껴집니다. 머지않아 대동강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북녘의동포랑 같이 손잡고 한잔할 날이 올것 같습니다. 하루 빨리 이날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초석님, 아리랑 공연과 칠골교회에서 예배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테이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빨리 배워서 동영상올리겠습니다. 저 아직 동영상 올리는것 모릅니다.ㅠㅠ 자꾸 공부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