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차이
로마 황제 테베리오가 다스린 지 15년째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유다 광야에 낙타 털옷을 걸치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른 예언자가 나타났다.
사제 가문 출신으로서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린 그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으며, 요르단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3,3) 하고 선포하였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삽시간에 유다와 예루살렘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처럼 요한은 광야에서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요한의 말에는 기적적인 마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으며 당시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 왕은 그를 존경하는 민중이 그의 말을 들음으로 해서 소요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 그를 제거해 버리려 했다"고 한다.
결국 헤로데 왕은 "정의"를 외친 그를 제거해 버리고 만다(마르 6,14-29 참조).
그후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가셔서"(마태 4,12) 공생활의 첫발을 내디디신다.
그분 역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외치며 전도를 시작했지만 그분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요한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요한이 전한 하느님의 모습은 구약의 노여움과 심판과 형벌의 이미지였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그는 하느님의 심판이 곧 닥쳐오리라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 달랐다.
그분이 보여준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의 하느님" 이었다.
오직 사랑의 하느님을 증명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친 것이다.
그분이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 이야기(루가 15,3-7 참조), 한 푼의 돈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여인의 이야기(루가 15,8-10),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루가 15,11-32 참조)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요한이 광야에서 "홀로" 고행극기를 하면서 살았다면,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그는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19)
그분은 더불어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며 "사랑의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리고 사실은 그분이 곧 하느님이셨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 김지영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