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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연을 섬기며 살 수 없는 도시, 사람이 사람과 경쟁하여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 그래서 늘 바쁘고 고달프기만 한 도시, 그 메마른 도시를 떠나 황매산 작은 산골에 터를 잡아 작은 흙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산 지 벌써 11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수십 년 동안 화려한 도시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연말이라 이런저런 모임과 술자리가 많은 때에 크리스마스가 있어, 예수님 탄생을 늘 지친 몸과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귀농 후 공소에서 처음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가장 먼저 가는 길이 달랐다. 버스가 하루 두 번밖에 다니지 않는 깊은 산골이라, 여럿이 짐차를 함께 타고 20분 남짓 달려야만 하는 거리에 공소가 있었으니 말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에 스무 명 남짓 되는 교우들이 모여 공소 예절을 마치고 난 뒤, 떡국을 끓여 먹었다. 한평생 고된 농사일에 안 아픈 데가 없는 늙고 병든 교우들과 함께 나눠 먹은 떡국 맛은 한해 내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도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양로원’ 같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공소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 냄새’는 마치 잘 끓인 된장국 냄새보다 진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기 예수님, 고맙습니다.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식구 같은 작은 공소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여태 도시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남보다 편하게 살아보겠다고 온갖 거짓과 핑계를 둘러대며 살았습니다. 자연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는 말씀을 수십 번 수백 번 듣고 들었지만, 그 소중한 진리를 얄팍한 머리로 알아들었습니다. 단 한 번도 가슴으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모든 생명을 품어 살리는 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돈과 권력과 황금을 다 준다 해도 흙 한 줌과 바꿀 수 없는데도, 흙을 더럽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렇게도 어리석고 못난 제가 흙과 함께 한평생 살아온 농부님들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애에 가장 큰 행복이고 가장 큰 기적입니다.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주신 아기 예수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성모님 태운 멕시코 당나귀 '동키'
정말지 수녀(마리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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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멕시코 찰코 소녀의 집에서 지내던 때입니다. 찰코 소녀의 집은 마리아수녀회가 극빈 가정의 소녀들을 위해 만든 무료 기숙학교입니다.
졸업하고 가족과 사회로 돌아가는 졸업생들은 남아 있는 후배와 수녀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작은 동물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하얀 토끼 한 쌍과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거북이 여섯 마리,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두색 앵무새 한 쌍, 칠면조 두 마리, ‘울리와 불리’라는 이름의 타조도 아장아장 걸어와 우리 가족이 됐습니다.
이중 제게 성탄절의 추억을 선물해준 ‘동키’가 있습니다. 동키는 갈색과 짙은 회색의 털을 지닌 순한 눈빛의 당나귀입니다. 온종일 빈둥빈둥 돌아다니며 풀을 뜯다가, 심심하면 세상이 떠나갈 듯 우는 당나귀입니다. 멕시코에서 당나귀는 너무 흔해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소녀의 집에서는 1년에 한 번 꼭 해야 할 역할이 있어 한 해 동안 놀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남미 풍습에 따라 12월 16일 주님 탄생을 준비하는 9일 기도를 시작해, 마지막 날에는 성 요셉과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모실 곳을 찾아 집집이 문을 두드리는 상황극을 합니다.
소녀의 집에서도 학생들이 수염을 붙이고 긴 옷을 입은 요셉과 작고 예쁜 소녀가 성모님처럼 푸른 수건을 쓰고 당나귀 위에 얌전하게 앉아 학생들의 기숙사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 바깥의 사람들과 집 안의 사람들은 함께 노래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당나귀는 성모님을 태운 채 요셉이 이끄는 대로 걸어갑니다. 한 해 동안 내내 놀다가 성탄절 포사다(posada, 아기 예수를 낳을 곳을 찾아다녔던 요셉과 마리아의 여정을 기념하는 전통) 기간에 제일 늠름하고 멋진 모습으로 우리 앞을 뚜벅뚜벅 걷던 동키 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당나귀 등에 조심스레 앉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어루만지며, 요셉 성인이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는 성모님 모습이 연상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낸 날
이수동(미카엘, 서울 천호동본당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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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성탄절이 다가오면 나는 가슴 속 아련한 추억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곤 한다.
34년 전 1981년 대림 시기에 갑자기 여의었던 어머니(요안나) 때문이다.
늦둥이 막내로 자라,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마지막 두 학기만 남겨두었던 내게, 임종도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선종은 말 그대로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그 자체였다. 고1 때 세례를 받았지만 입시 준비를 핑계로 성당을 멀리했다가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회개하고, 대림 시기에 냉담을 풀고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미사를 봉헌했던 그 날이 엊그제였는데, 그 미사가 어머니와의 마지막 미사였으니….
경황없이 5일장을 치르고 맞이했던 그해 성탄절은 어머니의 삼우날이었다. 오전에 산소에 다녀와서 홀로 성탄절 저녁 미사에 참석했던 때 성모님 옆에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었다. 그리고 모든 장례절차가 마무리되고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면서 웃는 얼굴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힘들어할 때 눈에 띈 것이 바로 묵주였다.
그 후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지향으로 시작한 묵주기도는 내 신앙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취업과 결혼, 명예퇴직과 재취업 등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헌혈, 성경통독, 평일 미사, 십자가의 길 기도 등으로 범위를 넓히면서, 항상 부족하지만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도록 성모님은 어머니 대신 나를 도와주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1981년 성탄절에 나를 위해 아기 예수님께 바쳐진 예물이었던 것 같다. 주님은 이 예물을 어여삐 여기셔서 어머니를 천국으로 불러주셨음은 물론 부족한 나 역시 당신의 도구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내가 늘 당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도록 하고 계신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와 흠숭을 받으소서! 아멘!
하느님의 선물 '한국행 항공권'
라니 (필리핀 이주민, 의정부교구 광적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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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필리핀 사람 라니(Lani)입니다.
4년 전인 2011년의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홍콩에서 일하면서 믿음직스럽고 제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파키스탄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남편에게 “크리스마스는 같이 보내고 싶다고, 꼭 내 곁에 와야 한다”고 졸랐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기에 돈도 부족하고 한국에서 홍콩으로 오는 비행기 표도 없다”는 이유로 저를 달랬죠.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저도 모르게 공항으로 가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도 남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결혼 생활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우울함을 느꼈습니다. 항상 옆에서 함께 해주던 남편의 사랑이 너무나 그리워 친구들과의 약속까지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 앞에 오니 그 작은 셋방이 왜 그렇게 크고 외롭게 느껴지던지…. 열쇠로 문을 열기 전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희 사랑이 영원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폭죽과 함께 남편이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주님이 부활하여 제 앞에 서 있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가 안겨 펑펑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는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힘든지 알면서도 내 옆에 와달라고 응석 부렸던 저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울면서 흐느꼈습니다.
그때 남편이 저에게 전해준 크리스마스 선물. 바로 한국행 항공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한마디. “우리 한국에서 같이 살자.”
새로운 나라, 낯선 곳의 두려움 따윈 남편이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에 저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그렇게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응답 같은 저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대한민국, 저희 부부는 지금도 이곳에서의 생활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단명 9개 받은 아기'의 소생
김동연 엘리사벳(서울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수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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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성탄 고깔을 쓴 아기 얼굴의 이모티콘이 카톡으로 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우리의 복덩이 아기 얼굴이 들어간 이모티콘이었습니다.
이 아기가 우리 병원에 온 건 지난해 10월 15일 오후 4시쯤이었습니다. 전 다음 날 일찍 강의가 있어 대구 편 KTX를 타러 나가는 길에 아기와 마주쳤습니다. 아기는 호흡이 힘들었고 매우 창백해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헤모글로빈 3.6의 생존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폐동맥고혈압 등 무서운 진단명이 9개가 붙은 아기였습니다.
의사는 두려운 눈동자의 아빠에게 며칠이 고비일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었고, 저는 ‘들어가서 혈관 확보를 도와줄까?’ ‘아냐! KTX 놓치기 전에 나가야 할까?’ 하는 천사와 사탄의 속삭임에 갈등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몸은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눈시울이 빨간 아빠의 눈빛이 저를 잡았습니다. 아기는 “도와주세요. 제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기를 만진 순간 혈관이 하나도 안 보여 ‘아, 아기도 잃고 기차도 놓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소아과 선생님이 “기도하세요! 저도 기도 삽관할 때 기도했어요!”라고 말씀하셨고, 기도하며 혈관을 잡았습니다. 10일간은 아기가 힘들 것 같다고 의료진들은 혀를 찼습니다.
아기의 부모는 참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아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예쁘다고 말해줬습니다. 아기는 3주가 지나자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 퇴원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도착한 아기 이모티콘은 어떤 아기보다도 예뻤습니다. 아기는 현재 잘 크며 아기 모델도 하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부서원 모두가 같이했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장천공 된 복막염 아기가 응급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에도 매번 아픈 아기들은 태어납니다. 우리는 아기를 믿고 사랑해줍니다. 그리고 기도해줍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선물이라는 것을, 살고 죽는 것은 그분의 뜻이라는 것을 배운 성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기에게 인사하고 싶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좋아하는 선생님과 함께 성가를
진명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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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43년 전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시간을 돌려 봅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자란 제게 12월에 맞는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친근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십 리 벚꽃길이 유명한 화개장터를 지나면 오랜 역사를 간직한 쌍계사가 있고, 산을 향해 8㎞ 정도 더 올라가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출가해 성불했다는 칠불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가 자리한 곳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그런 주변 환경 조건 때문에 학교에서 봄ㆍ가을 소풍을 가도 사찰 아니면 그다지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지역 곳곳에 전통과 문화를 담은 테마가 있는 장소가 많아졌지만 그 시절은 그랬습니다.
그런 시골 중학교에 음악 선생님이 부임해 왔습니다. 어느 과목보다 음악을 좋아했던 제게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도 대학생 같은 여자 선생님이었기에 호기심이 컸습니다. 그 음악 선생님이 좋아서 음악 시간에 노래도 더 열심히 했고, 선생님이 좋아하는 일이면 다 하고 싶었습니다.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저는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못하고 교실에서 음악책만 가지고 놀았던 덕분에 친구들보다 더 많은 노래를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 시골 마을에도 작은 교회도 생겼습니다.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저는 교인이었던 선생님을 따라 교회 구경을 갔습니다. 생소한 교회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했던 것은 바로 성가였습니다.
요즘은 노래 한 곡 기억 못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생님과 친구 몇 명과 함께 마을을 돌며 불렀던 성가곡이 기억 저편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좋아했던 음악 선생님 덕분에 40년이 훌쩍 지난 요즘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성가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종교의 다름을 떠나 아기 예수 탄신을 진심으로 감축합니다. 삶의 무게가 그다지 가볍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모여 앉아 감사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그런 크리스마스가 되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