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고통을 떠나서 완전한 즐거움과 행복을 얻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나고 죽는 것이므로 생사의 고통을 떠나서 생사가 없는 세계에 이르면 고통이 사라져서 즐거운 행복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고 한다. 불교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生·老·病·死의 無常한 현실의 고통을 자각하여 그 해결을 위해 출가하였고, 6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苦行과 難行을 겪고서야 비로소 그러한 고통의 현실로부터 해탈하여 安心立命의 세계를 열어 보이셨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야할 길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모든 것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의 선언이고 행복한 삶으로 지향하게 하는 것이며 妙有의 세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통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상황이나 상태를 새로운 세계로 바꾼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현실 그대로 행복할 수 있다는 방법을 깨달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현실 그대로 행복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無常한 현실은 無我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측면에서 一切苦일 수 도 있고, 긍정적인 면에서 열반적정의 평화와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相卽한 緣起의 비밀한 世界이고 妙有의 세계일 것이다.
이 번 학기 {법화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불교의 전반적인 논리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소주제로 선정한 [卽非의 論理]는 매우 어려운 주제로서 어쩌면 불교 전체의 세계를 연구하여 피력해야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에 의해서 開顯된 2천6백년 전의 불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敎相과 敎義 모두가 妙有와 相卽 또는 卽非의 妙理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초기불교와 불교의 최종적 발달 단계의 敎相과 敎義가 相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異端임과 동시에 불교 이외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본 학기 {법화경}의 강의를 함에 있어서 이러한 敎相의 전반적인 相卽의 입장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이를 전문적이고 세부적으로 정밀하게 연구하여 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강의 시간과 화면의 제약과 불교의 初學徒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광범하고 난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금강경}에 나타난 논리를 중심으로 살펴 {법화경}의 이해를 돕는데 일조를 삼고자 한다.
이를 강의함에 있어서 먼저 불교의 논리구조를 불교논리학인 因明論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논리구조에 입각해서 가능한 불교의 전반적인 것을 개관하면서 언급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 반야 공사상의 전반에 대해서는 모두 언급할 수는 없고 용수보살의 [八不中道說]에 의해서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의 구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Ⅱ. 妙有와 卽의 論理
1. 불교의 기본적인 논리구조
불교의 전문적인 논리학은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인명논리학이다. 이는 용수보살의 中道實相의 論理와 세친보살의 因果論을 더욱 발전시켜 유식의 실상을 규명하려는 불교학문이다. 이것이 陣那와 法稱에 의해 A.D.6-7세기 인도에서 창출된 논리학과 인식론의 체계이다. 이것은 바로 학문을 함에 있어서 논리적 근거들에 관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찾는 것을 말하며, 올바른 지식의 근원들과 올바른 지식의 조사 그리고 진리와 오류에 관한 올바른 판단의 가르침을 찾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전문적인 논리나 진리·지식의 참과 거짓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기술된 내용들을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뱐야사상을 표출하는 {금강경}이나 中論에 나타난 논리구조를 고찰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이에 대해서 먼저 서구에 禪을 전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선사이자 철학자인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는 처음으로 '卽非의 論理'를 창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卽非의 論理"는 {금강경}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해낸 禪의 논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선의 논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전반적인 이해 구조는 이와 같은 논리로 전개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상적인 것 즉 無爲의 세계는 有爲의 세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일단 번뇌가 止滅한 무위의 세계는 有漏의 번뇌가 가득한 有爲의 세계를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스즈키는 {금강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 즉 "般若波羅蜜은 곧(卽) 般若波羅蜜이 아니다(非). 그러므로 般若波羅蜜이라고 이름한다.",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곧(卽) 중생이 아니다(非). 그러므로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등에 나오는 "卽非"라는 표현 속에서 불교의 기본적인 논리적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님(非)으로써만 산일 수 있고(卽), 물은 물이 아님으로써만(非) 물일 수 있듯이(卽), 일체 사물의 대긍정(卽)의 세계인 선(禪)은 부정과 차별로서의 "非 즉 부정"을 전적으로 포함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양적인 포함이 아니라, "非"인 그대로 "卽"이라는 말이다. 긍정을 뜻하는 "卽"과 부정을 뜻하는 "非"는 단순한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대립하기에(非) 도리어 대립하는 그대로 동일하다고(卽)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 방식이야말로 불교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것이 스즈키의 지론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마음 그대로 부처이다'(卽心是佛), '마음 그대로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는 것과 반드시 동일하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卽은 긍정을 非는 부정을 나타내므로, 양자간에 어떠한 관련성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상 그 특징은 '긍정 즉 부정', '부정 즉 긍정'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卽非의 論理"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대립'(非)이 그대로 '동일'(卽), 差別이 그대로 一致라는 말이다. '卽'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형식논리적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卽'에는 "있는 그대로"의 뜻이 들어있다. 또 '卽'은, 스즈키에 의하면, "[직접적으로], [매개를 용납하지 않는], [눈으로 본 그대로 귀에 들린 그대로]를 뜻하는 것으로, 순간적, 직접적, 지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 "卽"이란 문자는 주역의 주석에서 "卽就也"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卽"은 이루다·나아간다·좇다·따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卽心是佛, 卽心卽佛이라고 말할 때 '卽'은 마음과 부처 사이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因果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자기 동일성을 직접 깨닫는다는 직접지각의 체험적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卽'은 부정으로서의 '非'와 대립하고 있는 또 다른 것이 아니다. 가령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할 때는 마음과 부처는 상대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 상대적인 차원을 부정하는 말이 '非心非佛'이다. 그러나 이 부정은 단순한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卽心卽佛"이라는 절대 긍정의 사실이다. 부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긍정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하나가 매개물을 통하여 다른 하나를 보는 형식적인 경험이 아니다. 본래 서로 다르던 것이 나중에 비로소 합일된다는 뜻도 아니다. 부정이 그대로 긍정, 다시 말해 "非心非佛이 卽心卽佛이고, 卽心卽佛이 非心非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卽 그 자체로 非"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절대긍정은 상대부정과 대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 그대로 긍정인 것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심경}의 '卽'이야말로 色과 空이라는 대립의 세계(非)가 그대로 동일성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불교의 중도사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핵심 어구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眞空妙有'라는 대립과 차별과 부정(非)을 그 자체로 포함하는 대긍정(卽)의 세계에 대한 중도의 실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 말일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서구를 지배해온 형식논리로 보자면 "부정이 부정인 그대로 긍정"이라는 것, "…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니기도 한 것"은 불가능하다. 전통적인 서구의 논리학은 "A는 A이다"는 同一律에 근거해 있는 '존재의 논리'이다. 서구의 논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A는 A일 뿐이지 결코 ∼A가 될 수 없는 A이다라는 것은 矛盾律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A이면서 동시에 ∼A인 것, A도 아니고 ∼A도 아닌 그 '중간치'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 排中律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A는 언제나 ∼A와 불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서양논리에서 그것은 무엇보다 A를 A되게 해주는 것을 空이 아닌 有라는 존재의 개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A를 A되게 해주는 것이 空이 아니고 有인 한 A와 ∼A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다.
칸트의 이성적 관념론을 계승하여 변증법을 깊이 있게 다룬 헤겔도 결국 이 존재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이성은 卽自(正)·對自(反)·卽自對自(合)라는 변증법적으로 止揚된다 해도, 矛盾律까지는 극복하지만, 排中律은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에게도 실재의 卽自的 '긍정'과 對自的 '부정'은 배타적 대립의 상태가 아니다.
모든 유한한 현상은 이미 자체 안에 자기부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런 대자적 상태에서 자기 특유의 존재성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기부정이야말로 자기긍정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헤겔은 부정을 통한 긍정을 보면서, 일반적인 형식논리, 특히 矛盾律을 넘어선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즉자적 긍정과 대자적 부정이라는 자기 모순을 극복, 止揚하고자 부정의 부정을 통한 '자기복귀'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부정은 과연 진정한 의미의 부정인가? 정립과 반정립이라는 대립의 상태를 宥和시켰던 피히테와 셸링의 변증법을 조금 더 심화한데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헤겔에게서조차 부정은 철저한 부정이 되지 못하고 배타적 대립성의 완화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왜일까? 존재의 자기부정을 말할 때조차도 그 부정은 철저한 '非存在'가 되지 못하고 결국 '존재'로 남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존재로 남는 한, 헤겔이 말하는 '타자적 존재'의 '자기 복귀'란 결국 완전한 것이 못된다.
그러기에 헤겔에게서 A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A인 것, A도 아니고 ∼A도 아닌 것은 설자리가 없다. A와 ∼A의 '中道'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排). 서양 논리학에서는 이 '中道'를 보지 못하는 것을 당연시해왔으며, 헤겔에 이르러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서구의 논리처럼 과연 그렇기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스즈키 다이세츠는 이러한 사실을 문제삼으며 동양적 논리, 불교의 선적 논리,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괄하는 논리, 대긍정적 합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를 추구한다. 그것을 "卽非의 論理"라 부른 것이다.
卽非의 論理라 해서 동일률을 부정하는 논리는 아니다. 도리어 "A는 A"임을 밝히는 동일률을 그 근저에서부터 긍정하고자 하는 논리이다. 어떤 논리든 A를 A로 긍정할 수 있는 논리, 즉 同一律 혹은 自同律을 원리로 한다. 따라서 서양의 논리에서나 卽非의 논리에서나 "A는 분명히 A이다". 그런데 卽非의 논리에서는 주어로서의 A와 술어로서의 A 사이에서 하나를 더 본다. A의 부정, 즉 ∼A이다. A가 참으로 A인(卽) 것은 A가 A가 아니기(非) 때문이라는 것이다. A가 A 아닌 이곳에서 A는 참으로 A가 된다. A→∼A→A라는 말이다. 화살표로 표시하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단계적인 논리구조가 아니다. A가 ∼A와 대립하는(非) 그대로(卽) A라는 것이다.
"非"라는 대립성 안에서 그 대립성 그대로 "卽"이라는 동일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A=∼A=A이다. 그런 점에서 스즈키의 "卽非의 論理"는 "A는 A이다"를 긍정하는 동일률이되, '卽非적 동일률'이다. 달리 말하면 "卽非的 自己同一"이다. 卽非적 자기동일의 원리에서는 '대립'이 '동일'로 수평적인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립이 그대로 동일이라는 것이다. 대립이 그대로 동일이기 위해서는 그 대립을 구성하고 있는 부정으로서의 '아니다'는 非가 단순한 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절대긍정인 卽으로 화해야 한다. '非'가 그대로 '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非'란 근본의 모순을 말한다.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의 대립을 말한다. 즉, 생사의 세계, 춥고 더운 세계, 절대로 상용(相溶)하지 못하는 항쟁을 말한다. '卽'이란 이 절대적으로 상용하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동일성이라는 장면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동일성이라는 것―'卽'―이 별도로 있고 그것과 상용하지 않는 것―'非'―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非'가 그대로 '卽', 다시 말해서 절대로 서로 '非'하는 것, 그것이 바로 '卽'인 것이다. '卽'과 '非'는 그대로 동일한 것이다. 한편으로부터 다른 편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동한다고 한다면, '卽'도 '非'도 없어지고 '卽非'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非'가 '卽'으로 수평적인 장소 이동을 함으로써 '非'를 구성하고 있는 대립적 현실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립을 그 대립으로 남겨두면서 동일성을 확보하는 논리가 '卽非의 論理'라는 것이다. 실천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대립(非)의 근저로부터 그 대립의 세계를 구성하는 고유의 자아란 없다는 사실이 열리면서, 대립적 현실 그대로 용납되는(卽)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혼의 내적이고 심원한 고민의 한 복판에서 도대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 머리 위로 한 줄기 빛이 비쳐오는 것과 같다. "A는 ∼A이다" 혹은 "A는 B이다"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인간적 理性과 悟性의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 때에야 우리는 결국 "A는 ∼A"임을 깨닫고, 일상적인 의미의 논리란 일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상시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던 것도 도리어 사물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卽非의 論理'는 단순한 이론이나 형식논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논리라는 말을 쓰지만, 추상적 '형식'이 아니라 실재의 '작용' 그 자체이다. 이는 바로 '체험'을 논리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논리 즉 대승불교의 논리는 반야를 지향하는 '煩惱卽菩提, 生死卽涅槃, 一卽多요 多卽一'인 것이다. 이는 또 中道라고 말하고 緣起 혹은 空의 논리라고도 한다. 이러한 卽非의 妙理는 바로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보살정신을 낳고 自他不二의 입장에서 보살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妙有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존재 그대로 살리면서 존재 그 자체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자체의 본질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個人我라는 상대적 관념을 止揚하여 우주적으로 확대된 宇宙我로의 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며 無常한 현실 그대로에서 無常한 현실 그대로를 인정함으로 해서 自性이 없는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보편성과 특수성, 개별성과 일반성이 相卽할 수 있고 질적인 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실재적이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 실천의 중심과제로서 수행의 실천을 중시한 선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러한 불교 논리의 특징은 현상적으로 보면 만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들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그 별개처럼 보여지는 현상의 이면을 보면 세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한 상관관계성을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이 연기법의 깨침에 의해서 萬法同體의 大我를 증득하게 된다. 여기서 '대아'라는 것은 "三世의 평등한 法性에 遊戱하며 일체 세계에 유포한 것으로써 몸을 삼는다."는 바로 그러한 法身佛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萬法同體의 大我의 경지에서는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사이에는 추호의 간격도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풀·나무·곤충 등을 포함한 정적이거나 동적인 모든 존재가 자기의 본성인 최고의 진실로서 체험된 것이므로 그것들 속에는 텅 빈 자아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이 추호의 간격도 용납될 수 없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를 "卽"의 논리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卽"이나 만법동체의 大我에는 어떠한 형태의 상대적 개념도 배제될 뿐만 아니라 그들 萬法의 사이에는 豪釐의 틈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자비의 정신은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 자비정신에 의하여 보살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체험적이고 형식논리상 비논리적인 현상의 인식세계는 비단 대승불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 초기불교의 존재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2. 顯敎의 敎相에 나타난 妙有와 卽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불교의 기본적인 논리구조는 현실 그대로 卽自的인 입장에서 自內證적 自覺을 전제로 한 苦의 止滅인 열반을 향한 卽非의 論理이다. 이에 대해서 초기불교에서는 먼저 존재의 실상을 四大 또는 五大로 피력한다. 그 내용은 일체의 존재 양상을 인간의 內·外的 상호관계에서 설명함과 동시에 이를 時機에 상응하여 中層적으로 설명한다.
이를 이른바 三科라하고 關係論的 입장에서 自內證의 내용을 緣起說로 설명한다. 또한 인간 삶의 현실의 입장에서 四諦說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敎相이라할 수 三法印 또는 四法印에 입각한 敎義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확충되고 발전하면서 부파불교에서는 法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대승불교에서는 실천적 인간의 구현으로 육바라밀을 설하면서 그 바탕에 無自性적 般若·空·中道의 緣起思想으로 나타낸다.
또한 중기대승에서는 현실 긍정의 입장에서 존재의 근저에 있는 주체를 唯識으로 설정함과 동시에 如來·眞如·法性·法界·佛性·如來藏·法身설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인도불교의 최종단계라 할 수 있는 밀교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여 수용하면서 이른바 五大說을 그 기저로 하여 五相成身觀과 五字嚴身觀을 수행하고, 三業을 적극 활용하여 卽身成佛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敎相들은 각각 독자성을 가짐과 동시에 相卽의 敎義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相卽의 敎相이 妙有라는 敎義로 어떻게 나타내어질 수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의 수많은 敎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無我에 입각한 中道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여 평화로운 세계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테마가 어떻게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법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四聖諦였던 것이다.
여기에 中道의 敎相이 집중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八正道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석존께서 태어난 당시 인도의 사상계는 매우 복잡하고 형이상학적 존재의 규명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석존께서는 이에 대하여 침묵만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중요한 敎相의 과제는 존재 즉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인식론적이고 연기론적 관점에서 일체는 十二處에 포섭된다고 설하신다. 어느 날 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一切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일체는 12가지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이니라"고 답하신다. 이것이 十二處說의 내용이다. 불교의 重層的인 교리 조직에서 가장 기초적인 敎說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언가 미진한 점이 있다. 즉 一切를 인간의 감각과 사유의 대상에 국한시킴으로써 개별적인 세계가 어떻게 공통의 세계로의 확대가 될 수 있느냐이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緣起·中道적 相卽의 妙有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불교는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12처에 포섭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12처는 하나도 항구 불변하는 것이 없다고 본다. 덧없이 生·住·異·滅하고, 生·老·病·死하며, 成·住·壞·空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발생하려면 반드시 因과 緣이라는 두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말하여 '6識은 6根을 因으로 하고 6境을 緣으로 하여 일어난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6識說이다. 18界는 12處의 세계관에 6識이 발생함으로써 띠게 된 입체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한편 6根과 6境도 모두 地·水·火·風의 四大 요소로 분석된다. 그렇게 되면 18界는 다시 地·水·火·風·空·識의 六界로 파악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6識說에서 6界說에 이르는 교리들은 12處의 세계로부터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탐구해 들어가 그 근원적인 모습을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는 불교 흥기 당시의 사문들이 과학적인 물질분석을 통해 우주의 근원과 인간을 탐구해 들어간 작업과 일맥 상통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비판하였다. 잠시 이 내용을 살펴보자.
부처님의 생존 당시 印度 思想界의 世界觀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轉變說'과 '積聚說'을 들 수 있다. 챤도갸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梵'이라는 초월적 實體를 상정하여, 그 하나의 實體가 자기 전개라는 變化를 통해 世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轉變說의 이론은 '一切는 브라흐만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世界의 中心을 창조주인 '梵'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단지 그 被造物에 불과한 것이다.
후에 여기에서 創造主이며 能造者인 '梵'이 곧 '我'로서 內在한다는 '梵我一如'의 사상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唯物論思想의 元祖라 할 수 있는 積聚說은, 四大要素를 中心으로 그 물질적 요소의 일부가 우연히 결합해서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또한 한결같이 인간을 세계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無因 無緣의 四大(地.水.火.風)要素가 결합되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인간도 형성되었다는 唯物的 積聚說을 비판하고, 또한 정통 바라문교에서 神이 만든 존재 가운데의 一部分으로 인간을 상정하는 尊祐化作論을 비판하며, 게다가 오로지 前生의 業에 의한 因果律 法則으로서만 세계와 인간이 형성되었다는 宿命論的인 자이나교의 태도까지 배격하고 있다. 다시 말해 十二處說을 바탕으로 한 佛陀의 緣起的 世界觀은, 이에 단순한 唯心이나 唯物的인 입장이 아니다. 諸法의 實相을 說破한 '無我'에 입각한 '相卽'을 바탕으로 형성된 中道說이다.
하여튼 이러한 교설이 밀교에서 말하는 地, 水, 火, 風, 空의 五大가 객관적인 실재인 理法身이고, 識은 주관적인 실재인 智法身이다. 그리하여 五大는 물질 세계를 있게 하는 영묘한 것으로서 胎藏界曼茶羅로 표시하고, 정신적인 존재인 識大는 金剛界曼茶羅로 나타낸다.
다음에 5蘊說은 이러한 요소설에 입각해서 인간 존재의 구성 형태를 해명한 것이다. 5蘊은 色·受·想·行·識의 다섯을 가리키는데, 그 바탕이 되고 있는 色은 4大要素를 '나'라고 집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4大 요소가 결합한 일시적인 형체(色)를 항구 불변적인 나로 집착하면 이로부터 개체를 형성하는 受·想·行·識이 발생하여 인간 존재의 근간(蘊)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四諦說은 5蘊說의 이러한 인간관에 입각해서 삶의 가치를 제시한 敎相이다. 5蘊으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는 그 자체가 苦이다. 이 괴로움은 5蘊이 集起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滅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바른 正見을 갖고 종교적인 길(道)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4제는 이러한 苦·集·滅·道의 네 가지 뚜렷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4제를 닦으면 預流·一來·不還·阿羅漢의 4果를 차례로 얻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들을 聲聞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6識說에서 6界說에 이르는 敎相들은 분석적인 관찰로 우주의 근본을 탐구해 들어간 일종의 우주론이라고 보겠고, 5온설은 그에 입각한 인간론이요, 4제설은 생의 생활론 도는 수행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바탕에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우주적인 힘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業說이다. 이 業說을 불교에서는 우주창조의 힘으로 보고 있다.
이 교리 조직은 우주의 근원과 생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는, 보다 심화된 인간 이성의 교설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이러한 敎相은 敎義的으로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에 業說의 해명은 우주의 근본 요소에 대한 의식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며, 그것이 뜻하는 생의 가치 또한 안락한 生天을 얻는 데에 머물러, 생사의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四諦를 닦으면 차례로 4果를 얻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 소개하였는데, 이러한 길을 완성하였을 때 明이 발생한다고 한다. '明'이라는 말은 '實在하는 것, 발견되는 것'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에 대한 無知가 無明이며 이러한 무명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을 때 이것에 緣하여 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憂悲苦惱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十二緣起說이다. 그렇다면 '明'은 불교의 요소설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밝힌 것이며, 12연기는 이에 입각해서 인간의 생사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밝혀 준 인간론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다. 무명에서 연기한 인간의 생사 현실은 실체가 없다. 따라서 空이다. 그러나 허무와는 다르다. 헛된 세계의 괴로움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滅盡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는 有라고도 못하고 無라고도 못한다. 따라서 中道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의 12연기를 깨달은 사람을 벽지불승 또는 연각승이라고 부른다.
3. 대승불교에 나타난 卽非의 論理
모든 존재를 관계론적으로 설명한 학문이 연기론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연기관계의 구성요소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 설명한 존재의 유기적인 관계에 중점을 두면서 존재의 개별적 구성요소를 전 우주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敎相과 관련된 부파불교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五蘊에 주목하여 五位七十五法說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三世實有 法體恒有'라는 존재의 일반현상과 요소의 영원성에 입각해서 설명하는데 반해서, 唯識學에서는 唯心論적 입장에서 마음의 연기적 관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부파불교와 유식불교에서는 모두 마음의 작용면에서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물론 불교의 존재에 대한 모든 설명은 마음을 떠나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점적 설명의 구체성이 마음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마음을 體 또는 性·相·用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면서 相과 性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작용을 識의 轉變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초기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5온·12처·18계 등의 心·意·識을 통합한 마음을 부파불교에서는 [5위 75법] 중에 心王法과 46가지 心所法으로 구체화하고, 유식불교에서는 [5위 100법]중에 8가지 인식의 주체와 51가지 심소법 등의 더욱 세밀히 발전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心·意·識을 유식 三性이라고 하여, 진리에 대한 망각으로 인하여 집착된 번뇌망상인 遍計所執性, 온갖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依他起性,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며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것]을 圓成實性이라고 설명한다.
이와는 반대로 三無性이 있는데, 변계소집성의 망상은 허공의 꽃과 같이 체상이 없다는 相無性, 의타기성과 같이 인연에 의하여 성립된 삼라만상은 自然生이 아니고 생겨나되 고정적인 自性이 없다는 生無性, 일체의 有無의 相을 떠나며 진리의 가장 뛰어난 바탕인 동시에 無自性한 勝義無性 등을 말한다. 이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卽非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三性은 有의 입장이고, 三無性은 空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中觀思想과의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中觀思想에서는 眞諦와 俗諦로 나누어 分別心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분별심은 대상을 인식할 때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 偏見과 邪見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중관사상이다.
중관은 곧 正觀 또는 中道라는 의미로 生·滅·斷·常·一·異·來·去 등의 극단에 치우친 사견을 시정하고 중도적인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中"은 인식의 대상이며 "觀"은 대상을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것은 破邪顯正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破邪"는 사견을 없애 고해의 중생을 구하는 것을 말하고, "顯正"은 정법의 진리를 밝혀 깨달음과 행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이론인 [八不中道]인 '不生·不滅·不一·不異·不常·不斷·不來·不去'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의 바탕에는 緣起 즉 空思想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中道實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기는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相依相關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空"이며 空은 곧 中道를 말하는데 이는 바로 조화·어울림·더불어·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올바른 존재의 인식은 無執着·無所得·無所住이므로 모든 고정된 관념을 타파하는 것이고 無我를 증득하여 自他不二의 보살도의 자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Ⅲ. 나아가는 말
이상과 같이 불교의 "卽非의 논리"에 입각하여 불교 敎相에 나타난 相卽의 내용들을 개관해 보았다. 이와 같이 불교의 敎義들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이 곧 긍정이고 긍정이 곧 부정인 緣起的 相卽의 세계를 피력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반야경 특히 {금강경}의 無自性 空의 사상은 有의 입장에 빠진 부파불교의 교의를 본래의 초기불교인 無我로의 복귀이며, 조화로운 인연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관사상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윤회와 수행의 주체에 대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萬法唯識 唯識無境이라는 유식불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卽身成佛의 밀교의 敎相에 전승되어 卽非의 논리인 妙有의 세계를 지향에 간다.
이 妙有의 세계가 바로 妙法이며, 모든 존재가 眞空이기에 萬法이 그대로 一法인 것이다. {법화경}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피력한 최상의 경전으로 반야사상에서 부정된 논리를 대긍정의 논리로 전환시킨 내용으로 꽉 드러차 있다. 이를 계승한 것이 바로 卽身成佛이라는 밀교의 敎相에 나타난다. 이상의 내용은 불교를 이해하는 논리구조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지해야할 내용이다. 이것이 성불로 가는 첩경이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여 답답해 하기 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불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삼계화택에 놀고만 있는 어린아이는 죽음의 문턱에서 반드시 후회하면서 다른 생의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 모른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모른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불자가 되도록 하자.
첫댓글 모든존재가眞空妙有진공묘유이기에,만법이일법이다.....법화경한권다읽었네요...감사합니다_()_법보시하시여복혜구족하소서..._()_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