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일원 교우들이 교난이 있을 때마다 잡혀와 심문받던 동헌
충주시 성내동에는 관아 공원이 있다. 조선 고종 7년 충주 목사 조병로가 남산의 창룡사의 일부를 뜯어다가 세운 동헌이다. 이곳에는 청녕헌, 제금당, 산고수청각 등축성 사적비 등이 소재하고 있다. 청녕헌은 충주 목사의 집무실이다. 제금당은 조선조 조병로가 신축한 영빈관이다. 산고수청각은 충주 목사 조병로가 신축한 것으로 복수간으로 사용되었다.
충주 동헌은 충주 일원 교우들이 박해가 있을 때마다 잡혀 와 심문받던 곳이다. 순교하기를 결정한 교우들은 동헌에 있는 노거목(老巨木)에 묶여 죽음을 대기하고 있었다. 관아 공원 내에는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하여 이곳이 순교자들의 넋이 서린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세종 31년(1449년) 관찰사가 충주목의 판목사(判牧事)를 겸하도록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으며, 세조 4년(1458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영춘, 단양, 제천, 청풍, 괴산, 음성, 연풍 7개 군현의 군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충청북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즉 충주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이 남한강 물길로 쉽게 통할 수 있는 서울과 경기도 양근(현 양평)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인 뒤, 이웃과 친지들에게 이를 전함으로써 처음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음성 출신으로 충주에서 살다가 영세 입교한 이국승(李國昇, 일명 성겸, 1772~1801, 바오로)이 공주에서 순교하고, 이기연(李箕延, 1739~1801)과 이부춘(李富春, 1734~1801), 이석중(李石中, ?~1801) 부자, 권아기련(權阿只連, ?~1801, 일명 이아기련) 등이 충주에서 순교하였으며, 20여 명의 신자들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충청북도 지역에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의이주로 복음이 확대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다시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진천의 산간 지대에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였으며, 충주 지역에서는 방축골(현 진천군 덕산면과 음성군 맹동면의 경계), 충주시 신니면의 광벌(광월리), 음성군 감곡면의 늘거리(문촌리) 등에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충청북도 출신 신자들은 이들 외에도 아주 많았다. 충주 출신으로 최용은 암브로시오 회장은 충주 맛마로 출신으로 안동, 상주로 이사해 살다가 청주 포교에게 잡혀 청주 진영에서 심문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치명하였다. 방축골 출신 김성서(파비아노), 민윤명(프란치스코) 회장도 치명자이며, 광벌 출신의 목 요셉과 그 조카 목 아우구스티노, 권중문 안드레아·권 요셉 형제는 충주 가리울에 이사해 살다가 그곳에서 살던 박 서방과 같이 충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
▒ 관아 공원(官衙公園)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터에 조성한 공원이다. 중앙공원이라고도 부르며, 청녕헌(淸寧軒)과 제금당(製錦堂)등 옛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관아 건물들은 1870년(고종 7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중건한 것이다.
그 후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충주시에서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후 그 일대를 공원으로 꾸몄다. 충청 감영문과 산고수청각, 축성사적비 등이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수목과 어우러져 있어 고색창연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신유박해·병인박해 때 순교한 충주의 천주교 신자들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에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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