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하나(1576년)에 급제한 이순신은 흔히 삼수갑산이라 불리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으로 관직 생활 첫발을 내디뎠는데, 임기를 마친 후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진해 한성으로 돌아왔다. 훈련원은 군사 조련을 담당하는 중요 기관이었으므로 병조가 직접 관리했다.
병조의 인사권은 정5품 병조 정랑에게 전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이순신이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아 갔을 때 병조 정랑 자리에는 서익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친척을 승진 서열까지 무시하면서 불법 승진시키려 작심한 서익은 이순신에게 인사 관련 문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순신이 거부했다.
“낮은 자를 순서마저 바꿔가면서 승진시키면在下者越遷 본래 승진할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則應遷者不遷.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是非公也. 관련 규정을 고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且法不可改也.”
종8품 봉사가 자신보다 여섯 등급이나 높은데다 인사 전권을 휘두르는 막강한 정5품 정랑에게 맞서는 형국이 빚어졌다. 이조 정랑과 병조 정랑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정승들도 눈치를 살피는데, 이순신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무가내였다.
“궁벽한 산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이지.”
병조와 훈련원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체로 그렇게 평했다. 더러는 ‘젊은 사람이 기백이 대단하군. 나이가 서른넷이라지? 아무렴! 세상 떼 덜 묻은 청년 관원 시절에라도 저렇게 당당해야지! 아니면 언제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익이 무서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관아 구석이며 나무그늘 아래에서 가만가만 속삭였다.
이순신의 저항은 친척을 부당 승진시키려던 서익의 계획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결국 서익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통이 뻗친 서익은 화풀이로 이순신을 멀리 충청 병영으로 내쳤다. 삼수갑산에서 한성으로 올라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이순신은 그런 곡절을 거쳐 충청도 서산의 해미 읍성 군관으로 밀려났다. 군관이 봉사와 같은 종8품이기는 해도 중앙 조정의 종8품과 시골 주둔 군대의 종8품을 동급 벼슬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이순신은 해미 읍성으로 쫓겨나면서 명성을 얻었다. 류성룡은 뒷날 《징비록》에 ‘선비들이 이 일로 차츰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라고 썼다. 선조가 이순신의 이름 석 자를 처음으로 듣고, 또 기억하게 된 것도 서익 사건 덕분이었다.
“그 뒤에도 그대는 이순신을 칭찬하느라 입술에 침이 마를 겨를이 없었소.”
선조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류성룡을 바라본다. 짐짓 류성룡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조아린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선조가 류성룡에게 ‘그 뒤에도 그대는’ 하고 지난 일을 회상하는 데에는 이순신이 종8품 군관으로 있은 지 열 달 만에 종4품 발포 만호로 날아오른 일 때문이었다. 8계급이나 승차한 놀라운 벼락출세였다.
종8품, 정8품, 종7품, 정7품, 종6품, 정6품, 종5품, 정5품, 종4품……. 숫자를 세기도 힘들 만큼 엄청나게 치솟은 승진이었다. 이 역시 류성룡이 선조에게 건의하여 이뤄진 결실이었다. 선조는 지금 그 일을 돌이켜보고 있는 것이다.
1580년 7월부터 1582년 1월까지 18개월 동안의 발포 만호 재직은 이순신의 첫 수군 근무였다. 뒷날 지명이 고흥으로 바뀌는 흥양의 발포는 반도의 끝에 위치했다. 폭풍 승차를 한 만큼 이순신은 마음에 부담이 컸다. 주변의 시기와 모함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에도 자신을 두고 ‘얼마나 대단한지 지켜보겠다.’면서 벼르는 고관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전라도 관찰사 손식도 그런 눈으로 이순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식은 주변 인사들로부터 이순신에 대한 온갖 참언을 많이 들은 나머지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슴속에 가득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는 도내 순찰을 다니다가 능성(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닿았을 때 이순신을 호출했다.
조선 시대에는 육군과 수군의 구분이 따로 없어서 육군 또는 수군에 소속되어 있던 중 수군이나 육군으로 발령이 나면 그리로 옮겨갔다. 지방의 군대는 육군 ‧ 수군 가릴 것 없이 모두 관찰사 예하였다. 즉 관찰사는 행정권만이 아니라 지방의 육군 사령관인 병사와 수군 사령관인 수사를 지휘하는 군사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력자였다. 이순신은 부랴부랴 말을 달려 손식이 머물고 있는 능성 관아로 갔다.
이순신이 읍을 올리자 손식은 대뜸 김종서 등이 편찬한 《진서陣書》의 특정 부분을 지목하더니 ‘강독해 보라!’ 하고 지시했다. 엄청난 뒷배를 업고 벼락출세를 한 자인 만큼 실력은 바닥을 헤매고 있을 터, 다중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노림수였다. 이순신은 카랑카랑하면서도 잡티 없는 음성으로 병법서를 도도히 읽고 현란하게 그 뜻을 풀어내었다.
‘이 자를 보게?’
손식은 내심 뜨악했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곧장 철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관찰사가 왜 발포 만호를 불러 병법 강독을 시키는지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짐작하는 바인데, 이렇게 순순히 이순신을 공인받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손식은 이순신에게 다른 주문을 내놓았다.
“장수가 병법을 외기만 했지 전술 전략으로 활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리? 팔괘진八卦陳과 오위연방진五衛連方陳을 직접 그려 보라!”
팔괘진은 《삼국지》 제갈량의 팔진법을 가리키고, 오위연방진은 수양대군이 저술한 《진법》에 실려 있는 많은 진도陣圖 중 하나이다. 이순신은 평소에 각종 병서 연구에 골몰했는데, 특히 1592년 3월 5일 류성룡이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을 보내오기 전까지는 《삼국지》, 《손자병법》, 《진법》 등을 펼쳐놓고 씹어 삼키기라도 할 기세로 정독을 거듭했다. 병서 안에 나오는 진도들을 직접,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려본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이순신이 두 진법의 그림을 너무나 정묘하게 그려내자 손식은 자신의 본래 의도마저 잊은 채 감탄을 연발했다.
“어찌 이토록 정교하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是何筆法之精也!”
관찰사 뒤에 도열해서 전말을 지켜보던 상하 관리들도 일제히 놀란 눈으로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정승과 판서들에 줄을 잘 대어 불과 한 달 사이에 종8품 군관에서 종4품 만호로 치솟은 ‘정치 군인’으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어느 누구와 겨뤄도 밀리지 않을 탄탄한 능력자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를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깝도다恨我不能初知也.”
손식의 평가를 무난히 통과한 이순신은 그 후에도 성심껏 최선을 다해 일했다. 하지만 인간만사는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결과까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계속)
* 한문은 《이 충무공 전서》의 원문으로, 이 내용이 소설가의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 이곳에 옮겨 실었습니다. 그러나 각주가 너무 많으면 읽는 데 불편해지므로 이후에는 (같은 목적에서) 한문을 덧붙이는 경우일지라도 출처 각주는 붙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