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제 문제의 「독주항 구간」을 확인하러 가야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문을 뒤로 하고 지금까지 걷던 만경강 본류의 둑으로 되돌아가려면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합니다. 건너면서 보니 예전에 쓰던 낡은 다리가 발밑으로 보입니다. 사람 하나 정도가 겨우 다닐 만큼 폭이 아주 좁은 다리입니다. 이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이 다녔던 다리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비록 사용하지 않지만 철거하지 않고 둔 것은 얼마나 잘 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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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길에 올라서서 큰 다리(삼례교) 아래를 지나면서 보니 역시 예전에 쌓은 높고 튼튼한 축대가 믿음직스러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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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공수로의 둑길을 따라갑니다. 발아래 넓은 수로를 다소 지저분한 물이 흘러가는데 이 물은 아마도 대간선수로를 타고 내려온 물 중에서 남는 수량을 만경강으로 흘려보내는 통로인 듯. 이 통로만 해도 직각으로 교차하는 더 작은 물길보다 한 층 높은 위치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복층 수로」 한 군데를 드디어 경험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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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정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참 특이하게도 마을공동의 소득사업이 오래도록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농가레스토랑 건물도 특이하게 지었는데 오늘은 마침 결혼식이 있어 잔디밭에 사람이 허옇게 깔렸습니다. 신부도 예쁩니다.
남의 결혼식 피로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얼른 지나쳐 「양수장」을 들릅니다.
기계장치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이 일제 때의 시설은 가동하지 않게 된 지 오래이지만, 건물의 외형은 이른바 근대건축 양식으로 다소 심플한 아치형 창문틀이라든지 붉은 벽돌 따위가 이색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무슨 수리를 하는지 출입을 금하고 있군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팻말만 확인하고, 「수도산」으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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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다시 와보는 곳이지만, 수도산 정상까지 오르는 시멘트 계단길은 여전히 힘들고 숨차고, 그러면서도 레트로 취향의 낭만이 있군요.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각 도시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사업을 꽤 열심히 했던 모양으로, 제가 어릴 때 고향 동네 뒤에도 수도산이 있었습니다. 수원지에서 물을 퍼올려 높은 곳의 탱크에 담았다가 일시에 흘려보내야 멀리까지 또한 높은 곳에까지 물이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요. 전기모터로 수압을 높이는 요즘에는 쓰지 않는 ‘고릿적’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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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수도산의 탱크에 물을 가득 채울 때까지는 가정의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지요. 물을 주는 시간에는(하루 세 번 정도였던가?) 한 동이라도 더 받아두려고 온 식구가 매달려 교대로 물동이를 지키며, 한 방울이라도 허비할세라 얼른얼른 새 동이로 바꿔 대곤 하던 일, 그러다가 물줄기가 점점 약해지고 급기야 수도꼭지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며 물이 끊어지면 찾아오던 허무감… 그때는 물세를 걷으러 동사무소에서 아저씨 한 분이 늘 가가호호 다녔습니다. 종이 영수증을 끊어주기도 했지요. 저희 집에서는 거의 매번 “다음에 다시 와 주세요”였지만.
수도산 정상에서는 만경강의 모래톱이며가 잘 내려다보인다고 정국장이 미리 광고를 많이 했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결혼식 하객들이 이곳까지 가득 메우고 있어서 전망 좋은 곳은 접근조차 할 수 없네요.
이제는 쓰지 않게 된 저수조 구조물 옆에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비낙안은 “비비정 앞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떼”라는 뜻으로 만경8경의 하나라 합니다. 비비정은 장비(張飛)와 악비(岳飛) 두 호걸충신 무장의 이름을 딴 정자라 하는데, 나중에 기문(記文)을 좀 읽어봐야겠습니다.
「히말라야 시이다」(이 수종도 일제 때 유행하던 나무입니다. 학교 운동장이든 가로수든 어디든 이 나무였지요) 그늘에 앉아 잠깐 쉬며 땀을 들입니다.
다시 출발. 이제 정말 독주항을 찾아갑니다.
수도산 언저리를 관광지 공원으로 개발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여 미니 골프장도 있는 등 손을 많이 대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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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지역을 빠져나가 삼례역 신 역사 가까이를 지나는 중에, 또 한 번 물길과 수문을 만납니다. 바로 이곳이 대간선수로의 한 목이 됩니다. 진행방향 오른쪽에서 물길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수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과하면서 내려다보니 물이 도수거를 꽉 채운 채 도도합니다. 건너가서 삼례역 방향을 버리고 오른쪽 밭둑길로 올라섭니다. 이 밭둑을 따라 들어가면 돌부처가 있습니다.
돌부처는 처음 이 구간(독주항)의 수로를 팔 때부터 함께 했던 사연이 깃든 신물(神物) 비슷한 존재라 합니다.
아래에 그 이야기를 소개한 전익수리조합의 사진과 설명을 함께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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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정 개거 시의 돌부처 : 전익수리조합의 도수거(導水渠)는 먼 옛날(古昔) 비비정의 산기슭을 돌아 조성되어 있었는데 만경강 물흐름이 산기슭을 스치며 수로를 파괴하므로 새로운 수로가 필요함.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 삼례의 부자 백대석이라는 사람이 이 큰 개거(開渠)공사를 함에 즈음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꿈속의 암시에 따라 송아지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개거하여 겨우 공사의 완성을 봄. 그 연유로 이 산에 독주정(犢走頂)이라는 이름이 있음. 당시 출토된 돌을 모시고 있었으나 이 돌부처[石地藏]는 본 조합의 공사 전까지 소재불명이던 것을 수로확장공사에 즈음하여 다시 발굴해낸 것임. 장래 당우(堂宇, 집)를 지어 보호하고 제사도 지낼 예정임.”
그렇다면, 유추해 볼까요?
이 사진이 1921년경(어우리보 수문 개축 당시)에 찍은 것으로 본다면 백대석의 공사는 1770년대(숙종)가 되지만, ‘옛날부터 있던 수로’라고 했으니 역시 훨씬 앞선 광해군실록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광해군 때(1614년), 막힌 40리 수로를 닷새 만에 준설한 공으로 포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지요. 포상 받은 이들은 정3품으로 승진[加資]하는 등의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들은 공무원이었고 따라서 수로와 농토가 국가소유였을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 설명에서 한 가지 잘못 된 점은 독주‘항(項)’을 독주‘정(頂)’이라 쓴 것입니다. 項[목]이어야 옳지요. ‘꼭대기’를 뜻하는 정(頂)일 수는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네 지명 관습에 익숙지 않고 글자도 마침 서로 비슷해서 잘못 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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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알아두면 쓸데적은’ 잡생각들 :
①지난 글에서 인용한 동아일보 1937년 8월 20일자 보도 중 “150년 전 배씨”는 ‘백대석’의 잘못이 아닐까? 수리조합의 일본인 직원은 우리말의 「받침」을 잘 발음하지 못했다. 따라서 ‘백’을 ‘배’로 틀리게 발음한 것을 동아일보 기자가 그대로 썼을 것이다.
②1937년 지도(위)에 의하면, 전주천 합류지점인 삼례까지의 만경강 상류 이름은 ‘고산천’이었다.
③「석지장(‘이시지조오’)」은 일본말 단어이다. 그들은 돌을 깎아 작은 지장보살상을 많이 만들어서 길가에 늘어세워 놓기를 즐겨하고, 때로는 옷이나 모자를 만들어 씌우기도 하면서 숭앙한다. 우리네는 지장보살을 그다지 높이지 않는 데 비하여 확실한 문화의 차이라 할 것이다.
④일본말 단어, 모르면서 함부로 갖다 쓰지 말자. 자칫하면 문화침략 당한다. 「굴할」(堀割)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나는 이를 ‘개거(開渠, 도랑을 개설함)’라는 우리말 단어로 고쳐 썼다.
잡생각 그만 두고, 하던 투어를 계속 합니다.
돌부처는 말이 좋아 돌부처지 억지로 봐줘서 사람이 앉은 모양이고 대충 보면 아무것도 아닌 돌덩이입니다. “장차 당우를 지어 모시고 제사도 지내겠다”던 약속은 어디 가고, 남의 밭 가운데 조금 쌓인 흙더미 위, 초라한 시멘트 상자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진 찍고 설명 좀 듣고, 금반마을을 통과합니다.
살짝 언덕을 오르는데 이 정도를 ‘산’이라 불러야 할까요? “이 ‘산’에 독주항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라…
시멘트로 복개되어 그 위에 무질서하게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다소 지저분한 곳이 독주항의 일부 구간인데, 돌부처에서 금반마을 경로당까지, 독주항보다 다소 높은 위치에서 나란히 걷습니다.
금반마을은 「마을에서 땅 파다가 금반지가 나와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썰’일 뿐 반지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소리가 비슷하다고 함부로 갖다 붙이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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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복개한 독주항 수로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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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안길을 잠깐 걸어 내려와 다시 독주항 둑길을 따라잡습니다. 금마교라는 작고 좁은 다리가 물길 위에 있고, 더 걸어가면 복개한 수로 위를 걷게 됩니다.
복개가 끝나는 지점의 다리 끝에서 「왼쪽은 말랭이, 오른쪽은 대부뚝」이라는 길안내 표지목을 만납니다. ‘말랭이’라 했으니 역시 이 낮은 언덕을 산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겠네요. ‘대부뚝’은볼 것도 없이 ‘대(大)봇둑’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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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이미 석탑천의 큰 봇둑(사실은 수문)이 보입니다.
폭 15미터나 되는 수로를 가득 채운 물이 발 아래로 당당히 흘러내려오고 있습니다.
대 봇둑은 석탑천(수로)의 물이 (백대석 이전의) 옛 수로로 가지 못하게 막고, 동시에 새로 뚫린 독주항 수로로 보내는 Y형 갈림목에 서 있습니다. 워낙 석탑천의 폭이 40미터가 넘으니 수문이 큰 데다 새 수로(독주항)로 보내는 수문도 만만치 않게 큽니다. 이것이 처음 개통되었을 때는 정말 대봇뚝이라 할 만 했겠습니다.
두 기능을 함께 하는 수문은 가운데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굽어있어 관리하는 사람이 수문 위를 왔다갔다 하기에 편해 보이고 모양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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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의 수로는 지금은 막혀있는 폭넓은 도수거를 타고 비비정 정자 바로 아래까지 큰 각도로 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구간은 만경강 본류의 수면높이와 비슷한 낮은 땅인데다 전주천 물까지 합해지니 툭하면 강물에 잠기고 도랑에 흙이 차고… 정말 그랬겠네요. 그랬던 것을 동네 산을 가로질러 ‘송아지가 가르쳐 준’ 코스로 지름길(1.2 킬로미터)을 새로 냈으니 ‘부농(富農) 백대석’이 끼친 공헌은 지대합니다.
지형과 함께 당시의 상황 설명을 종합하면 이곳이 독주항 맞는 것 같기는 해요. 단지 왜 이곳에 지명이 남아있지 않은지, 훨씬 상류 쪽 엉뚱한 곳에 '독촉골'이 있는지가 찜찜할 뿐입니다.
어우리 취수문을 출발한 만경강 물이 이곳 독주항을 거쳐 삼례역 뒤편으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 16킬로미터.
“전주에 40리 옥야(沃野)가 있사온데… 상(上)께서 포상함이 어떠하시온지요?” 광해군에게 상소하던 신하의 기특해하는 표정이 저절로 연상되는 순간입니다.
전익수리조합이 비비정 수문을 개량하던 당시 사진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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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비비정 수도 출구쪽. 지금은 수위가 높아져 아치 출구의 반쯤이 물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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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대수로에서 중수로로 물이 나누어지는 곳. 어디쯤인지?)
(위 : 삼례읍 후정리 인근. 공사 준공 직후 모습.)
오늘의 투어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