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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진도) / 이용주
(내가) 태어나 스무 해를 살아 온 진도(珍島)! 이름이 주는 한문 풀이 보배 섬이다. 전국의 섬 크기 순위로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이며 면적은 약 360㎢로 진도읍 포함, 세월호 사건 속 맹골군도가 속한 조도면에 이르기까지 1읍 6개 면이 있다.
내가 살았던 50여 년 전만 해도 인구가 13만 명 넘은 거로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3만 명을 채웠다 다시 빠지는 작은 인구를 가진 섬으로 변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배움을 위해 자식들을 도회지로 보냈지만 한번 떠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정착해 버리니 나이 많으신 분들만 농사짓고 자식들 위에 늙도록 일만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로 아는데 모든 섬, 사람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나 자신도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부득이 고향을 떠났지만 나고 자란 고향은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고향! 두 글자는 항상 설레이고 가슴 절여 오는 언어 그대로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외국에 나갔을 때 애국자가 된다. 고향의 봄이나 아리랑을 들 때면 더욱 그렇듯 나 또한 내 젊은 날의 가장 많은 아픔과 행복이 섞여 있는 그곳을 모를리가 없다.
부친이 일곱 살 때 일찍 돌아가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되려고 무척 효심을 했으나 벗을 수없는 가난이라는 암초 앞에서 힘들었고 헤매었던 유년기 시절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항상 반에서 가장 가난한 두 사람에게 주었던 옥수수빵 조그만 거 두 덩어리, 합쳐봤자 붕어빵 하나도 안 되는 거로 먹고 싶었지만 참고 여동생 갖다주려고 가방 깊은 곳에 넣어 놓고 누가 가져갈까 봐 수업 끝나고 10분간 쉬는 그 순간에도 소변 참아가며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추억의 시간이라고 유추해 본다.
집에 오면 손가락 내밀며 달라는 동생에게 전한 뒤 맛있게 먹는 모습 보면서 침만 꼴깍했던 그 시절의 얘긴 나만의 전유물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국민학교) 4학년 때 납부금 (사천회비)을 못내 교실에 못 들어갔고 고등학교 때에도ᆢ 서러운 마음이 큰데 주번 선생님은 밖에서 서성이고 못 들어가고 있는 내게 도망(빠구리)쳤냐며 머릴 내리친다. 순간 설움이 복받쳐 흘러내리던 뜨거운 눈물을 다 닦지 못했었다.
중학교에도 들어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학교 수업 마치면 옥수수, 단수도 따다 팔았고 아이스께끼라 하여 지금의 아이스크림을 나무통에 넣어 속에 비닐 깔아 팔기도 하며 중학교는 겨우 마쳤으나 고등학교 가는 건 태산을 밟는 것만 같았던 느낌이었다 친척 작은아버지가 교무주임으로 계시면서 입학에 도움을 주셔 입학 후, 3년간 신문 돌리기를 해서 겨우 졸업하기에 이르렀지만, 그 시절 얘긴 꺼내기조차 싫다.
그때 꿈이 고향 옆 육지인 해남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으로 그 꿈 이루기 위해 신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돈도 벌고 육지 구경이 가능한 호재였으니까 학교 수업 마치면 해남까지 신문을 가지러 가는데 광주고속 타고 벽파에 내려 배 타고 해남 황산면 옥동까지 가서 가져와 밤늦도록 비가 오건 눈이 오건 170부를 돌려야 했는데 진도라 하면 떠오는 진돗개가 집집마다 있어서 구독자 이름도 알아야 하지만 개한테 물리지 않기 위해 개 이름도 알아야만 했다.
신문 170부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 빠질 듯 아팠고 당시엔 기름기가 많아 옷에 다 묻어 시커멓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나면 수고비로 3,000원을 받아 들고는 어머니 잡수실 과자 봉지 하나 들고 달릴 땐 돌부리에 넘어져 피가 나도 아픈 줄도 몰랐다. 그 돈으로 책 한 권 사보고 싶어서 큰맘 먹고 산 동시집 한 권! 제목 "이곳으로 좀 오십시오" 지은이 김신철 전 한국 아동문학회 회장을 지내시다 작고한 분으로 내겐 스승이 되었고 당시 근무처였던 혜안 여. 중고를 나중에 찾기도 했다.
47년간 인연이 지금도 가족과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난 시인, 동시 작가, 수필가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이다. 배가 고파 산을 찾으면서 으름, 맥암. 다래같은 걸 따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으며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그 길도 함께 걸어 산악인도 되었을 것으로 안다. 한국 아동문학회 가입 28년, 부회장(부이사장) 세 번째 연임하기 까지 만 13권의 지은 책과 4,300회를 넘는 산행 경력 52년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이 있었기에 꿋꿋이 견뎌오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회초리도 한몫했지만, 군대 휴가 나와 말실수했다고 회초리를 들었던 나의 어머니는 회초리가 아닌 사랑의 매를 드셨던 것이다.
살아 온 얘기 자서전 몇 권을 써도 부족하겠지만 그런 시간이 주어지길 마음속으로 빌고 있지만 하나씩 둘씩 잊혀져 가는 그 시절의 얘기는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고향 뒷산인 북산을 고교 시절에만 1,000회 이상 찾았던 게 산악인으로 발돋움한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암벽 전문학교 수료와 더불어 산악회 4개를 만들었고 세계 4대륙 최고봉을 오르기도 했으며 산악 행정을 13년간 맡았었던 경력으로 하여금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산인· 시인· 철도 공무원 기장 등 1인 4역을 한다며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도 소개되었던 현실로 다리 연결을 해온 고리가 아니었을까?
옛 조정의 나랏일을 맡았던 분들의 귀양 터로 그분들의 자손들이 지켜 온 진도였기에 말 그대로 보배 섬으로 손색이 없으며 예술가들의 본향이 아닐까. 노래를 배운 적 없는 아낙네가 모내기하며 부른 노랫가락이 명창과 다를 바 없으며 학교 근처에도 못 가신 옛 어른들의 집 문 칸 앞엔 동양화가 걸려 있었듯 나 자신 평생 학원 한 번, 사사 한번 받은 적 없는데, 글 쓰고 있으니 그 핏줄들의 영향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는 시인으로, 그림 한 점 그리는 흉내만 냈지만 꿈을 가 진전은 없었는데 물론 노력의 대가가 있었겠지만 모두 고향이 주는 색깔을 타고 널 위를 밟았기 때문이리라.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을 X세대 그 이후 Y세대에 이어 Z세대에 이른 지금, 1960년대 이전의 탄생자, 즉 저를 포함한 꼰대 시대를 거친 옛날 사람이 되어있다는 걸 느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름을 넣어 불 밝힌 호롱불 곁에서 책 읽다 눈썹 태워 먹고 30W 전깃불이 들어오자 희한한 세상이 도래했다고 너무나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캄캄하고 어두웠지만, 그 아래에서 독서를 즐겼던 시절은 너무나 좋았었기에 신문 돌린 돈으로 콩알만 한 라디오 하나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밭일을 도울 때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던 그 날들도 결코 잊지 못한다. 1970년 갓 지나 진도에 흑백 텔레비전이 들어왔는데 우리 동네 부잣집 친구네에 세 번째로 집에 설치되어 구경거리가 되었다.
흑백티비· 바보상자라고 부른 텔레비전이 동네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당시의 인기 드라마 <여로>였는데 장욱제, 태현실 주연으로 그걸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몰렸다. 처음엔 안방에서 보다가 비좁아 마당에 덕석을 깔고 보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앞 자릴 차지하게 된다. 시청하다 하루 빼먹으면 그 장면이 궁금해 전날 본 동네 사람한테 물어서 연결 고리로 삼았던 지금은 웃음거리도 아니지만, 당시엔 엄청난 화두였다.
배가 고파 방학만 주면 난 더 시골 마을 외갓집으로 달린다. 오로지 목적은 단 하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밥 속에 흰 쌀밥이 있다는 매력적인 뜻이 있어서였다. 12킬로를 걸어 외갓집 억 도착하면 방학 한 달을 살았다. 시골이라 고구마 캐고 농약하고 콩을 캐기도 하는 등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보리밥과 쌀밥 반반 섞인데다 콩이 들어있어 그걸 먹으며 행복했던 시절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낚시질과 저수지에서 목욕하는데 제일 즐거웠지만 8월.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일할 땐 너무나 뜨거워 견디기 힘들었음도 기억해내며 평생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글 쓰는데 아무런 제약업이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한다. 너무나도 많은 추억과 과거 얘깃거리가 많아 무엇부터 쓸지를 고르면 안 될 것 같아서ᆢ 가급적 잊지 못할 날들로 압축시키고 싶은 것은 가슴속에 너무나 가득 찬 과것날이 그리움으로 남은 탓일 게 다 신문 돌리던 때의 얘기로 다시 가 본다, 개 이름을 외워 친하면 물리지 않아 좋았는데 당시에 물린 자국의 상처가 지금도 다리에 수없이 많다.
신문 다 돌리고 오면 배가 고팠지만 먹을 건 별로 없었다. 당시 보리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면 다해졌지만, 음식 중 최고는 멸치였던 걸로 안다. 난 멸치를 생선이라 않고 고기라 불렀고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작년 12호 시집 발간 때 멸치라는 제목의 시도 포함되어 있다 소풍 갈 때 멸치가 유일한 반찬으로 그나마 멸치 먹는 날은 명절과 소풍 두 번, 생일날이었으니 그날들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신문 돌리고 와서 초등학교 3학년짜리 1시간 공부시키고 나면 자정에 이르는데 잠은 못 자더라도 숙제는 마쳐야 했다. 당시엔 숙제도 참 많았다. 숙제 안 하면 당시 연속바닥이나 엉덩이에 줄이 나도록 얻어맞는다. 당시엔 체벌은 정당화되었고 부모님들은 잘못해서 맞았으니 더 맞아야 한다고 맞장구치던 시절이라 아프고 상처가 나도 숨겨야 했다.
새벽 2시에 일 마치고 5시엔 일어나 고향 뒷산인 200m 넘는 북산을 다녀와 그도 모자라 양 옆집과 뒷집 앞까지 마당을 다 쓸었다. 부지런한 청년이라고 칭찬은 많이 들었지만, 그로 인해 수십 년 지난 지금도 잠 3시간 이상을 못 자는 습관으로 전환되었다. 군대에서 몇 시간 좀 더 잤던 게 지금껏 내 생애 제일 많이 잔 시절로 기억한다. 고교 3년간 북산을 1,000회도 더 다녔다, 이때 날 좋으면 신안군과 멀리 제주도까지 보인다는 말을 들으며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꿈을 꾸었다. 고향을 등지는 데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고 싶어졌다.
해남 땅을 밟았으니 목포 광주· 서울 그 어느 곳이라 동과 하고 싶었고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한다. 역사서와 세계사를 통달하는 외로운 투쟁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매주 주말마다 신문을 보낸 더 지방의 마을을 찾아서 자전거로 수금을 하러 다니며 고향의 산속에 이르는 길까지 그리며 3년 만에 고향 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바다 수심· 동네 논 숫자까지 그리며 그 작품은 지금의 재산목록 1호로 보관하고 있는데 47년이 지난 세월로 반백 년 되는 50년째에 고향(군청이나 읍사무소에)에 1원도 받지 않고 희사하려고 한다.
당시 면장이 방문하여 지금의 돈 백만 원 넘게 주고 사겠다고 팔라고 했지만 노우 했었고 동양화가도 되고 싶어 당시 지금도 유명한 남종화의 대가로 알려진 소치 허련의 달력을 보고 그냥 그려본 작품 하나도 액자화 되어 집에 걸려 있다. 당시에 물감 하나도 없어 쓰레기장 뒤져 버린 물감하나 주워 한군데 얕게 색칠해 놓은 게 참 다행이라며 위안 삼은 작품을 쳐다보며 가끔 쓴웃음 지으며 혼자 웃어본다.
산에 홀로 올라 먼 육지를 바라보며 외롭고 고달픔, 배고픔을 달랠 길 없어 눈물 하염없이 흘린 적도 많았다. 나는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그때의 기억으로 내 자식들한텐 다시금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생각도ᆢ 고교 졸업 이틀 전, 나는 프린트 필경사로 취직했다 나중에 광주에선 옵셋기도 만졌으며 인쇄 공부도 했었고 야학생들 모아 화장품 사무실에서 공부도 가리켜 검정고시에 응하게 하는 당시의 제일 중· 고등학교통신학교(제일 강의록)에서 교무주임을 맡았던 일도 있다.
평생 학원 한 번 간 적도 없고 모든 것은 독학을 했기에 인생사 자체는 남들보다 몇 배나 고달팠고 서울 와서 전세방도 못 구해 역에서 잤던 시절을 거쳐 100만 원짜리 15평 중 쪽방에서 전세를 살았을 때의 기분이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입대도 어머니 혼자 계시니 빼 주겠다 했지만 우선 징집 원을 내서 일찍 제대했고 군청에서 재무과장이 찾아와 임시로 8개월만 근무하면 특채로 공무원이 된다 했었지만, 농사를 짓는 한이 있어도 떳떳하게 시험 봐서 들어가겠다. 하여 결국 서울시 지하철 운영사업소에 합격하여 서울시 지방직 공무원이 되어 36년간 재 직후 정년 퇴임했다.
군 입대 직전, 어머니 모시고 유달산 여행을 떠났는데 어머니와 함께 유성각까지 함께 오르며 맛있는 거 사 먹었던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고생만 하시다 저런 세상을 떠나신 천사 내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떨칠 수 없다. 고교 시절 3학년 때 광주에서<언어 교양 대학>라는 당시의 대한민국 최고의 교수로 알려졌던 양주동 박사, 김찬삼 교수·김양호 선생 등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좋은 배움을 가졌다. 특히 세계 일주 여행을 하시며 책을 펴내신 그분의 제자인 김일우 선생님이 중학교 지리 교사로 오시면서 내 인생은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대한민국이 아닌 세계로 떠나자!! 지금은 세계의 산을 22회 다녀왔고 수십 개 나라를 찾았으며 모든 꿈을 다 이뤄 큰 욕심 다 버리고 작은 욕망마저 버리려 애쓰고 있다 광주 갔을 때 동네 동생을 찾았는데 연탄가스를 많이 마셔 위태로운 생명 속에서 난 다시 살았다. 죽을 고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모질고 끈질긴 삶의 고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 세포가 다 죽어 기억력도 떨어져 한동안 헤맸던 시절을 극복하고 오뚜기처럼 일어선 내 인생의 삶은 자체가 영화요 연극이며 한 페이지였다 머리 나빠진 관계로 남한테 숨겨가며 무척이나 노력도 했고 독학으로 모든 것을 대처하며 살기 위해 안 해본 것 없는 자신의 투쟁은 지금도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목숨 부지하고 고향을 다시 찾아 군대 가던 날! 사십칠 년 만이라 했던가 눈 내리고 유난히 추웠었는데 어머니하고 작별의 시간은 너무나 혹 돈 그 자체로 눈물 터뜨린 어머니, 손 흔들고 뱃고동 소리 난 후에 배 안에 들어와서 폭포수를 이뤘던 그 날들도 또한 잊지 못한다. 친구들과 조카들이 사흘간 어머니 곁을 지켰던 과거 그날들 모두 아픈 과거였지만 극복하기까지 힘든 시간도 있었으나 이젠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최전방 GPO라는 강원 화천 땅, 북한군과 가까이 대치하며 내 인생의 가치는 커졌고 세상이 내게 무얼 요구하고 나는 또 무엇해야 하는지 답이 보이는 거 같으니 손녀딸 둘을 거느린 할아버지가 되어 13번째 작품 동시집 제목은 "할아버지 의미소"로 이름 지어졌다
보급 행정을 맡아 당시엔 제일 빠른 전역일 34개월을 겪는 동안 돌팔이 차드까지 했는데
이는 지하철 본사에 불려가서 그곳에서도 순위를 만들었으며 사장상을 처음 받기도 했다(84년 1월 1일 자로 공무원에서 공사로 바뀌며 준공무원이 됨) 공무원 발령받아 또다시 서울로 떠날 때 어머니는 기침을 1시간씩 하는 환자셨는데 결국 모셔와 입원과 함께 처방 탓인지 6개월 시한부 판정 후 30년을 더 사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막노동해 단돈 7만 원 갖고 유일한 발령장 하나로 오늘을 맞기까지 고스톱 한번, 주식 한번 안과 살아온 바보 생활이었지만 후회는 없고 외국 등 가고자 했고 이루고자 했던 계획을 모두 달성해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자식들은 살아 온 얘길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그걸 알기에 혼자만 기억하는 처지지만 아무렴 어떤가? 고향!! 언제 들어도 설레고 뭉클한 그 고향을 15년 가까이 찾지 못했다. 생활이 그렇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핑계를 넘어 곧 찾을 것이다. 70이라는 나이에 근접한 내 현실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는 그저 좋고 아름다운 언어일 게 다 문학가와 산악인을 병행하며 퇴직했지만, 지하철 승무원에 가장까지 1인 4역을 한다는 다큐멘터리 방송 여러 차례와 더불어 많은 사람이 인식해줘 난 부끄럽고도 고마울 뿐이다
소중한 유년 시절의 배고픔과 가난을 딛고 일어섰지만 지금도 현실에선 부자는 아니나 결코 가난한 사람도 아님을 기쁘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이 있을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은 고향이 병원 산부인과라고들 한다. 웃을 일도 맞지만 그만큼 고향이라는 정서를 모르는고 살고 있지만 가난한 시골 초가지붕 아래서 태어난 우린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다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기 보름 정도 전부터 우린 들불놀이·연날리기, 팽이치기 등 몸으로 때우며 살아왔던 그 날들을 글로 재탄생(자서전)시키는 그 날을 맞고 싶으며 고향에 대한 정서를 마치고자 한다.
끝으로, 하찮은 고향 얘기 일지라도 읽어 주셔서 고맙고 한 번쯤은 지난 과거와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을 한 번쯤 기억하시며 쓴웃음이라도 지어 보시길 기원하며 모처럼 기억해 낸 저 자신도 이 순간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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