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은 경기도 광주출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다. 1789년(정조 14) 증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797년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로 서학(西學)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전교에만 힘썼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동생 정약종(丁若鍾)은 옥사(獄死)하고,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沙里)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을 하였다. 저서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하여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동이(東易)? ?논어난(論語難)?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만 현전한다. 유배에서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직접 조사․채집한 내용을 수록한 책으로, 1814년에 3권 1책으로 쓰여졌다. 제1권에는 비늘이 있는 인류(鱗類) 70종, 제2권에는 비늘이 없는 무인류(無鱗類) 42종 및 조개류 69종, 제3권에는 잡류(雜類) 46종으로 대별되어 있다. 항목별 설명은 한자명(漢字名)․방언․형태․습성․맛․이용법․어구․어법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산 어류에 대한 연구는 1403년(태종 3)에 출판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토산부(土産部)」에 23종의 어류를 기록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후 하연(河演)이 1424년~1425년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 「토산부」와 1469년에 속찬한 ?경상도지리지? 「토산부」에 21종의 어류에 대하여 그 이름과 산지가 소개된 바 있다. 그 후 ?자산어보?에 101종의 어류와 수산 동식물을 합쳐 227종에 대한 형태 및 약성(藥性)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이는 어류에 대한 단행본으로는 최초의 일이다. 특히 중국의 각종 수산고박물지(水産古博物誌)를 두루 인용하여 수산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필독서라 할 수 있다. 1998년에 신안군에서 ?자산어보?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玆山魚譜는 자산어보? 현산어보?
무척이나 잘난 동생이 그런 대로 잘난 형을 우습게 하기도 하고, 더욱 빛나게 하기도 한다.
정약전(丁若銓.1758-1816)은 어쩌면 이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동생이 그 유명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니 말이다. 사실 동생 약용이 아니라면 약전이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얻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반면, 그런 동생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약전을 논할 때면 언제나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으로 알려져 있는 ’玆山魚譜’가 거론된다. 강진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한 동생 약용과 비슷하게 약전 또한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때 약용과 함께 유배 조치되어 흑산도(黑山島)에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 흑산도 유배생활에서 남긴 저서 중 하나가 바로 ’玆山魚譜’. 글자 그대로는 ’玆山’의 물고기 계보라는 뜻이다. 여기서 玆山은 중의적이다. 약전의 호일때는 자산, 흑산도의 별칭일 때는 현산으로 읽힐 수 있다.
한데 문제는 이 玆山魚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익숙한 표기는 물론 ’자산어보’지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최근 발간된 계간 역사비평 2007년 겨울호(통권 81호)에 ’다산은 ’현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고 불렀다’는 한국과학사 전공 신동원 KAIST 교수의 역사논설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근자에 그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기 시작한 ’현산어보’를 논박한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玆山魚譜를 자산어보라고 읽어야지 왜 현산어보로 읽느냐”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 교수가 동원한 인물은 그 저자인 약전이 아니라 그의 동생 약용이다. 약용이 남긴 어떤 글에서도 ’玆’를 ’현’으로 읽은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 교수는 왜 玆山魚譜 당사자인 정약전을 동원하지 않고 정약용을 이용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신 교수도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玆山魚譜가 자산어보가 아니라 현산어보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2003년 전 5권의 방대한 전서(全書)로 발간된 ’현산어보를 찾아서’였다. 이 책은 서울 세화고 생물교사인 이태원 씨의 역작이다.
이 교사는 이 전서를 통해 玆山魚譜에 수록된 수산동식물 200여 종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약전의 숨결이 묻은 곳을 샅샅이 뒤졌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그 고된 결과물이었다.
한데 이 교사는 자기 저서에서 玆山魚譜는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 교수가 이번 글에서 지적했듯이 그 이전에도 이미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의 교육활동과 성과’(1998)라는 논문을 통해 이를 가장 먼저 주장했고, 김언종 고려대 교수 또한 2001년 출간한 ’한자의 뿌리’에서 이에 동조하기도 했다. (김언종 교수는 나중에 종전 주장을 철회하고 ’자산어보’로 돌아섰다.)
신 교수는 玆山魚譜를 ’자산어보’로 읽어야 함에도 ’현산어보’라는 읽기가 “그렇게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태원 씨 저서를 “신문,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라면서, “한국의 출판상업주의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신 교수는 더 나아가 玆山魚譜의 ’현산어보’ 읽기가 “그간 무지 때문에 오독한 것을 바로잡았다는 학계의 성숙함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고, 아직까지도 무지함을 깨우치지 못한 대중에 대한 자부심 또한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산어보’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한 이태원 씨의 전서는 당시 그에 대한 각종 언론사 서평을 보면, 玆山魚譜에 등장하는 수산동식물 200여 종을 직접 찾아 헤맨 저자의 열정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 언론과 결합한 출판상업주의 때문에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 이태원 씨는 玆山魚譜의 흔적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시 산림정책의 폐해를 논한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라는 고문서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산에들어옛사람을보다] 흑산도 선유봉과 정약전
선유봉에서 바라본 바다.
벗이라곤 저 바다, 물고기 뿐/고독의 역작` 자산어보의 고향
이 책을 일컫는 수사는 몹시 화려하다. '이 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서'라거나 '당대 세계 최고의 어류박물지'라 불리곤 한다. 어떤 책인가.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 '현산어보'라 읽기도 함)다. 어디서 썼는가. 그가 15년 간 유배를 산 흑산도(黑山島)에서다. 고독한 낙도에서의 유배란 거의 지옥이었으리. 그러나 정약전은 바다 속 어류와 교제해 희귀한 명품을 생산했다. '자산어보'는 유형(流刑)의 지옥 바다에서 건져 올린 기발한 월척이다.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흑산도 예리(曳里)에 도착한다. 바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예리항 일원은 여행자들로 출렁인다. 이 발랄한 관광 지구 한 모퉁이에 자산문화도서관이 있다. 정약전을 기리는 기념 공간이다. 정약전의 흑산도 귀양은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에서 비롯됐다. 신유사옥은 천주교도 제압이라는 명분으로 분장된 권력 쟁탈극이었다. 이 난폭한 정치적 공격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추락했고, 그의 아우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전은 정약용처럼 빛나는 저작들을 무진장 쏟아내지도 않았으며, 당대 문사들과 사교하는 도락을 누리지도 못했다. 생의 황금기를 유배의 겨울로 소진했던 그는 마치 독 안에 갇힌 쥐처럼 흑산도의 고독 안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약전의 학식은 부실한 것이었는가. 아니다. 정약용이 매번 원고의 감수를 청탁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머리는 지식으로 충만했다. 연구자들은 정약전의 학문이 정약용에 손색없는 당대 최고 수준의 것이었으리라 유추한다. 경학은 물론 지리.음악.천문학 등에 박식한 준재였음을 승인한다. 이 이채로운 지적 엘리트의 사유 세계와 시대 정신이 옹골차게 농축된 품목이 바로 '자산어보'라는 위대한 저작이다.
작은 사진은 사리마을 사촌서당.
예리를 벗어나 사리(砂里)에 있는 정약전의 유일한 유적인 사촌서당(沙村書堂)에 입장한다. 복성재(復性齋)라 부르기도 하는 이곳에 정약전이 살며 마을의 학동들을 가르쳤다. 조선의 유배객들이 흔히 그랬듯 정약전 역시 서당 아르바이트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한편, 본능에 속할 학자적 자존심을 다해 후학 양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여기서 불후의 걸작 '자산어보'를 썼다.
그나저나 '자산어보'는 무엇으로 그 탁월함을 인정받는가. 이 책은 총 226개의 표제 항목으로 분류한 각종 수산 동식물들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법 등에 대한 매우 방대하고도 엄밀한 사실적 기록을 담고 있다. 중국의 문헌을 정리하고 고증하는 종래의 저술 방식을 극복, 해양 생물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심지어 해부까지 해서 얻은 놀라운 성과물이다. 일테면 50개가 넘는 청어의 척추 뼈를 일일이 세어 맞춘 그의 집요한 과학에는 현대 생물학자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한다.
사촌서당 뒤편의 소로를 따라 선유봉(仙遊峰, 307m)으로 향한다. 소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들이 러시아워의 지하철처럼 초만원을 이룬 푸른 숲 사이로 어렵사리 산길이 이어진다. 정약전이 선유봉에 올랐다는 기록이나 일화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전이 이 산에 오르지 않았을 가망성은 제로다. 그는 얌전히 방안에만 머무는 꽁생원이 아니었다. 분방한 탐구심으로 팽배한 행동파였다. 조선의 소나무 정책을 통렬히 비난하고 개선책을 제시한 '송정사의(松政私議)'라는 걸 쓸 만큼 산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암동마을을 거쳐 심사리재에 닿은 뒤 선유봉을 오른다. 산의 사방 팔방에서 바다가 떠오른다. 마치 거대한 연꽃이 수면 위로 부상하며 벌어지듯이 몸을 여는 먼 바다의 나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선유봉 꼭대기에 오르자 바다는 이제 차라리 추상적 무한 지평으로 진급한다.
정약전은 광막하고도 신비한 저 해양의 묘경(妙境)을 바라보면서 어떤 상념에 잠겼을까. 유배의 고난을 견딜 지혜를 바다에 청원했을까. 창망한 바다의 표면적에 상응할 통 큰 호연지기를 배양했을까.
아마 그는 번번이 눈시울을 적셨으리라. 바다 건너 강진땅에 머문 유배 동기이자 정신의 반려인 아우 정약용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두 형제는 마치 부당한 결별을 강요당한 연인들처럼 몽매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나 정작 상봉하지 못한 채 그 형이 먼저 한 줌 풀 거름으로 돌아갔다. 정약전의 부음(訃音)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오! 현자(賢者)가 그토록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그 원통한 죽음 앞에 목석(木石)도 눈물을 흘릴 텐데 다시 말해 무엇하랴!"
정약전 [丁若銓]
1758(영조 34)∼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매심(每心).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신. 항진(恒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해(志諧)이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다.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덕열(德烈)의 딸이다. 약용(若鏞)의 형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했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서울에서 이윤하(李潤夏)·이승훈(李承薰)·김원성(金源星) 등과 깊이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여 심취하였다. 이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더 깊이있게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자,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여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또, 서양 학문과 사상에 접한 바 있는 이벽(李檗)·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을 통해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려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입게 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되고, 그는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저술로 울적한 심정을 달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16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 ≪자산어보 玆山魚譜≫를 비롯, ≪논어난 論語難≫·≪동역 東易≫·≪송정사의 松政私議≫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만이 전해오고 있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되었던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이를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 및 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명저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참고문헌≫ 純祖實錄
≪참고문헌≫ 日省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丁茶山全書
출처다음
첫댓글 존 정보에 잠시 쉬어 갑니다^^
네~~~ 행복한한해되세요
어제 tv에서 자산어보에 대하여 오락프로그램에서 봤어요.시기적절하게 올리셨네요..
네~~~저도 잠시 접하고서 옛날 배운생각이나 올렸습니다
즐거운 한해되세요
새삼배우고갑니다
네~~~점심식사 맛있게 드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