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8 로뎀나무 아래서 / 이종철 목사
엘리야는 모든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만큼 많은 기적을 행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고, 갈멜 산 정상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 명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을 신봉하는 아합 왕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 마지막은 죽음을 보지 않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서술되고 있는 엘리야는 이런 전설적인 영웅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4절입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신앙의 대용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죽여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이 이런 연약함을 보일 때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실 신앙인들만이 아닙니다. 어떤 유명인이나 매우 큰 부자이거나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작스런 자살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아니 그 사람도 그런 아픔이 있었나 하고 놀라게 됩니다. 사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권능이 너무도 커서 인간 엘리야를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위기에 몰리자 엘리야의 본모습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왜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렸을까요?
첫째는 지나친 일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 신봉 세력과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 첫 번째 대결은 3년간의 가뭄을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함께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엘리야도 가뭄과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아합 왕의 포위망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잠시 머물기도 하고, 북쪽의 사르밧으로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궁내대신 오바댜는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18:10)고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랜 피신 생활은 긴장으로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다 갈멜 산 정상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온 종일 부르짖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지만 죽은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혈혈단신 그들과 대항하여 홀로 싸웠습니다. 백성들은 구경만 할 뿐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들을 태웠습니다. 승리한 엘리야는 백성들과 함께 그곳에 있던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도륙하였습니다. 이어서 엘리야는 비가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엘리야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일곱 번 기도하자 작은 조각구름이 지중해 쪽에서 떠올랐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되어 내렸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엘리야는 마차를 타고 가는 아합을 앞서서 달렸다고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 하여도 많은 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엘리야도 많은 일에 지쳤습니다.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워크홀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에 미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일에 미친 사람은 일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마치 자전거가 계속 달려야 하는데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란 것이 기계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돌리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사람은 병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 하나님이 안식을 제정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출31:17)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평안하였다는 단어는 영어로 ‘refresh’ 입니다. 다시 신선한 것을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칠 일째 쉬어서 새 힘을 공급받는데 인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쉬지 않고 일만 하게 되면 신선한 것을 받지 못해 우리 몸의 세포가 죽고 병에 걸리고 맙니다. 우리 영혼 또한 쉬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창조력 있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오랜 사역과 긴장이 풀어지자 오늘 한꺼번에 폭발했다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실패의 경험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제는 바알 세력들이 물러가고 여호와 신앙이 회복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반동의 기운이 더 강해졌습니다. 1절과 2절에 그 상황이 설명되어 있는데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 아직은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을 피해 다시 달아나야 했습니다. 유다의 남쪽 끝인 브엘세바의 광야까지 달아났는데 갈멜에서는 무려 20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엘리야는 혼자 조용히 죽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브엘세바에 자기 사환을 남겨놓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하룻길을 행한 후에 로뎀나무 아래서 쉬었습니다. 로뎀나무는 싸리나무와 비슷한 나무입니다. 그 밑에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정도의 그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엘리야는 자기 스스로는 죽지 못하고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했고 그렇게 기도하다 지쳐서 쓰러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죽을 만큼 힘들게 하는 것은 인생이나 사업의 실패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고 자신의 무능력함이 극에 달할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주로 이런 결정을 많이 합니다.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니 이분도 자살을 시도하려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의도에 지금의 순복음교회를 지을 때의 일입니다. 거대한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만 1차 오일쇼크가 터져 은행들이 문을 닫고 모든 돈줄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줄 돈이 없어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만 했고, 집에는 돈 한 푼 가지고 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식들은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아내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산다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죽음이 더 편하고 아름다워 보이기조차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리려 하였는데 갑자기 벌떼 같은 소리가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죽을 만한 용기가 있거든 그 용기로써 살아보라. 죽는 것은 언제나 죽을 수 있는데 사는 것은 한 번밖에 못산다. 그러므로 살아보라!” 결국 그 위기를 이기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일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사업에 실패하거나 무력해질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엘리야 또한 위기에 처했는데 엘리야가 위기를 극복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 또한 교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어루만지며”
지쳐서 쓰러져 자고 있는 엘리야를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어루만지며”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영어로는 ‘터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터치했습니다. 하나님은 곤히 잠든 엘리야를 걷어차지 않았습니다. 쥐어박지 않았습니다. ‘너 내가 그렇게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왜 그 모양이야’ 하며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루만져 주었을 뿐입니다. 아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가 몸을 다독여 주었을 것입니다. 외롭고 힘들 때는 곁에서 돕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왜 그래!”하며 책망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지.” 하며 교훈을 주는 것보다, 그냥 곁에서 위로하고 받아주며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힘들 때 이처럼 어루만져 주는 관계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이 서로 힘들 때 이처럼 서로 어루만져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완악한 우리는 이 때를 틈타 오히려 상대방의 속을 긁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분노와 생각을 표출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힘들 때 필요한 것은 교훈이나 책망이 아닙니다. 이해와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고 받아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취하신 하나님의 조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이것을 먹고 다시 엘리야가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후에 다시 엘리야를 깨우며 다시 먹을 것을 줍니다.
인간에게 먹고 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령충만도 배가 고프면 이루기 힘이 듭니다. 배가 부르고 몸이 편해야 하나님도 보이고 감사도 기쁨도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두통을 앓습니다. 두통이 나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나고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그러다 두통약을 먹고 좀 지나면 갑자기 머리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강 같은 평화가 임하는 것 같고 성령으로 충만한 느낌입니다. 그만큼 우리 몸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영혼은 함께 갑니다. 몸이 편해야 영혼도 편합니다.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경험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했으면 열심히 기도하든지 전도하든지 그랬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며 모두 디베랴 바다로 몰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밤새도록 수고를 했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 육지 쪽을 보니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바로 부활한 예수님이셨습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이 예수님 앞에 서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유구무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는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부활을 경험하고도 어찌 그럴 수 있어’ 하고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일을 하고 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입니다. 이미 잘못은 알고 있습니다. 보다 필요한 것은 쉬고 먹으며 새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사실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시면서 발생했던 기적입니다. 그 장면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0-31)
열두 제자들은 파송을 받아 두루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능력도 행하고 전도도 행했습니다. 이 와중에 잡혔던 세례 요한이 목이 잘리는 위기가 있었습니다. 지치고 긴장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명령은 한적한 곳에 가서 음식을 먹으면서 쉬어라였습니다.
여러분들 또한 잘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쉬는 것은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잘 쉬고 잘 먹어야 우리는 기쁨으로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 이 휴식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이 200년에 걸쳐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근 50년 만에 달성하였습니다. 지난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매우 빠르게 달려온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을 상징하는 단어가 “빨리빨리”입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처럼 급했던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양반의 나라입니다. 양반은 비가 와도 천천히 걷지 뛰지 않습니다. 쌀 뒤쥐에 거미줄이 쳐져도 공자왈 맹자왈 하며 경전을 읽었던 것이 우리 조상들입니다. 가무와 음주를 즐겼던 놀이 문화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기도 못되어 빨리빨리 민족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고도성장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성장 시대에 맞는 우리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삶의 여유를 찾았으면 합니다. 빠르게 성장하느라 부실해진 우리 정신과 마음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의 연간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OECD 최고입니다(2010년 기준).
OECD 평균보다 2.5개월 더 일하고, 가장 적게 일하는 네덜란드보다 4.5개월 더 일합니다. 그에 비해서 노동생산성은 더 떨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휴식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며 함께 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속도를 늦추고 안정적으로 다져가는 것이 필요할 때입니다.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두 번째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비교의식이나 지나친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은 일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생깁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입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낀 순간 다른 사람들 특히 위대한 열조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비교했던 열조는 누구였을까요?
다윗이었나요,
기드온이었나요,
여호수아였나요,
아니면 모세였나요?
아니면 광야에서 목이 곧고 불평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던가요?
엘리야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였고 이 때문에 더 좌절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나의 동료, 학창시절의 나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잘나가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무력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각자는 각자의 인생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만족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비교하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비교하십시오. 과거의 나와 비교하십시오. 과거의 나보다, 나는 얼마나 발전하고 성숙했는지 비교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가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지나친 책임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엘리야는 거듭해서 나만 홀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18장 22절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19장 10절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9장 14절에서도 또 한 번 “오직 나만 남았거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힘들었던 것은 역사의 모든 짐을 자신이 홀로 지고가고 있다는 과도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은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9장 18절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 혼자가 아니라 7천 명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서 이끌어 갈 엘리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후라는 사람을 세워서 아합 왕조를 끝장 낼 계획을 세우십니다. 이방 나라지만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세워 아합 가문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선 사람들입니다. 엘리야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지나친 책임감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지나친 책임감은 우리로 지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는 분도 우리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의 문제도 우리가 가정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교회 문제가 발생을 했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대신 학교 강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해 말까지 강당을 비우라는 통고가 떨어진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배들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장소를 찾으려는 데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건물을 가지지 않은 교회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궁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이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지? 주님의 교회가 아닌가?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이 할 고민을 왜 내가 하지?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힘드시죠?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랬더니 마음도 편해지고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더랍니다. 그래서 교회를 4개로 나누기로 결정을 합니다. 중견 교회가 한꺼번에 4개가 생긴 것이지요.
우리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역사의 주인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과도한 책임감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주어진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필요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우리 인생을 보다 진취적으로 모험적으로 계획할 수 있습니다. 망하면 하나님이 망하지 내가 망하냐의 자세라 할 것입니다. 자기 것 아닌데 마음대로 쓰면 어떻습니까?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마지막 주신 주님의 처방법은 운동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 해소에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40일을 걸었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보(藥補)보다는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行補)가 낫다” 약으로 몸을 보신하기보다는 제대로 음식을 먹는 것이 낫고, 음식보다는 걷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적당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운동은 우리의 긴장을 해소시킵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합니다.
운동으로 자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몸을 함부로 하여 우리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우리 인생이나 하나님께 짓는 큰 죄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어루만짐을 받고 잘 먹고 잘 쉬고 운동도 하고 나니까 엘리야에게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기 위하여 호렙 산으로 출발했습니다. 엘리야가 리프레쉬(refresh) 된 것입니다. 여름휴가철입니다. 잘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몸과 영혼에 신선한 바람이 들어와 새 힘을 얻고 새 목표를 향해 다시 달릴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