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성적 사유와 주변부 타자의 담론
- 배명란의 수필세계 -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배명란 수필집의 큰 강줄기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배명란의 상당수 수필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중요성이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이를 달리 자연 친화적 수필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조적이며 전통적이며, 저항적이며 휴머니즘적인 글들이 생태수필을 뒤따르고 있다. 주변부 타자의 저항적 담론층에 속하는 수필들도 큰 맥락에서 에코필리아를 지향하고 있다.
배명란의 생태 수필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발견, 전망 또는 신뢰가 그것이다. 첫 번째, 발견의 장은 자연의 근본이자 바탕인 초록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배명란에게 있어서 자연의 발견은 원시적 삶을 의미하며,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뜻한다. 생명의 발견 안에는 유년의 추억이 있고, 꿈이 나래를 펴고 있다. 그녀는 초록의 체온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전망 또는 신뢰의 공간은 수필가 고유의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생태 사회를 보여주어 인류에게 그런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상상력의 보고를 의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인식으로 또 하나의 희망이 될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이다. 따라서 배명란의 수필집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인간 중심주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문학을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수필은 단순히 환경문제,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를 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보며 녹색의 가치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오동나무 싹을 키워 서래섬의 산책길에 심고, 그 나무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모습이 눈물겹다. 수필 <내 나무>는 생태적 합리성에 대한 개념이 없는 공원 관리소 풀 베는 아저씨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베어져나가는 나무들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동시대 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허무와 환멸이다. 풀을 베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작은 나무들이 생명을 잃어가는 현장을 생태적 합리성으로 비판하면서 그녀는 인간의 부주의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수필, ‘그들은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저절로 싹트고 자랐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저절로’는 시민들에 대한 생태적 상상력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개념을 가리키기도 한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낱말의 다의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연상과 상상의 즐거움을 안겨주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 수필집은 모두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 자연친화와 환경생태 보전에 관련된 글들로, <내 나무>, <산책길 단상>, <서래섬 단상>, <접시꽃>, <숲마을>, <가루받이>, <사십 년 지기>, <서래섬의 실루엣>, <내부수리> 등이 있고, 세태비판과 전통성 회복 및 주변부 타자의 저항담론을 담은 수필들 <양돈기>, <장닭>, <닭농사>, <행복지수 높이기>, <아이바라기>, <소나무 뒤의 무지개>, <내 삶을 지키는 단어>, <어떤 출산>, <소꼬리를 잡다>, <운수 좋은 날>, <운수 없는 날>, <화장>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은 <어머니의 망향가>, <대쪽>, <어머님의 유산>, <오빠에게 바치는 애가>, <작은 아버지>, <내 강아지>, <영재교육>, <개학 없는 방학>, 마지막으로는 자조적 성격의 글과 죽음에 관련된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장례식 단상>, <어머니를 추모하며>, <빚> 등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체험적 예화와 삽화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되면서, 생태사회를 위한 문학의 역할에 대한 물음,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지성적 사고 등이 펼쳐져 있다.
II. 클릭
작가는 자연 풍경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자연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익숙한 배명란에게 나무 꽃 풀 숲 등은 에코필리아의 핵심 질료들이다. <내 나무>, <접시꽃>, <숲마을> 등의 수필에서 보듯 글의 제재가 거의 자연물과 상관화된 것들이다. 자연은 그녀에게 사색의 시공으로 연결된 문학의 터전이요, 꿈의 삶터다. 배명란은 꽃과 나무와 숲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풀향기에서 생명의 피솟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씨앗에서 풀로’, ‘풀에서 꽃으로’, ‘꽃에서 나무로’, ‘흙에서 산책로’, ‘산책로에서 공원’, ‘공원에서 섬’ 등으로 시선을 넓혀가며 다른 이들과 자연의 향기를 함께 향유하고자 생태계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성스럽기조차 하다. 자연생태로부터 순수를 배우고, 푸른 서정을 호흡하며 살고자 이름 없는 곳에 꽃밭을 만들고 꽃길을 조성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그녀다. 자연에 삶의 지혜를 묻는다. 자연 속 제물상에서 ‘인내’를 만나고 삶의 ‘섭리’를 발견하길 좋아한다. 이처럼 배명란의 수필은 자연친화적인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생태수필가’다. 인간은 결국 대자연이란 문학의 온상만은 끝내 일탈할 수 없었음을 이 수필집은 보여준다고 하겠다. 생의 참된 의미나 조화의 과정을 여유있게 관조하고 수필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 구체적인 자연물 그 이상의 제재는 다시 없다.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으로서 자연은 배명란 작가에게 에코필리아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모태로 해서 생명활동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것이며, 자연의 질서가 삶의 질서라는 것을 수필을 통해서 깨닫는다고 볼 때, 배명란에게 자연물은 순리의 삶을 가르치는 스승인 셈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하는 것이 자연이다. 배명란 수필의 가치는 자연 안에서 조화의 소중함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을 발견하는 데서 빛난다. 자연의 메시지는 절대자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배명란의 시선과 사유가 푸른 서정의 경계를 넘어 자연의 숨소리와 그 맥박, 그 의도를 점철해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음은 수필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 식물성적인 사유와 에코필리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연생태계와 공존하려는 생태적 합리성이다. 배명란의 수필들은 주제의 재료이기도 한 제목에서 이미 생태적 중요성을 다분히 암시하고 있다. 제목은 하나 같이 구체어로 되어 상징성이 크다. 생태적 합리성과 상상력을 주제지향성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네 이웃, 공원 및 산림 관리인과 일부 시민들의 안이한 생태인식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비판의 눈길은 작가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축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중심적이어서 인간 외 다른 존재의 울음에는 무관심할 뿐이다. 그러나 배명란의 수필에는 주변부 타자 특히 자연에 대한 가치고양이 물결치고 있다.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생태의식이면서 그 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솜씨에 있다고 하겠다. 생태는 곧 생명이다.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생태 수필을 통해서 수필을 쓰는 행위는 모순된 현실을 박차고 나오는 탈출구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동나무는 하루가 달랐다. 어쩌면 저렇게 잘 자랄까 싶었다. 산책 때마다 들여다 보는데 볼 때마다 키를 키우고 굵기를 더하고 있었다. 잎도 커져서 아이들 소꿉놀이에 쓰는 우산도 할 수 있겠다싶었는데 어느 날 무참히 베어져 있었다. 장마철 지나고 풀이 무성해지자 풀과 함께 오동나무까지 베어버린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오동나무, 내게 좌절이란 없다고 선언하듯이 곧 다시 줄기를 내고 키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기뻐하기도 잠시 또 다시 베어지자 풀 베는 분들의 처분만 바랄 수 없었다. 나는 한강 관리사무소에 찾아갔다. ‘꽃은 베지 않아서 고맙다. 오동나무도 베지 않으면 더 고맙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당당자로부터 풀 베는 아저씨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지만 기대는 하지 말라는 대답을 들었다. 곧 자라서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줄 터이니 잘 부탁한다고 간곡한 부탁을 하고 왔지만 나무는 또 베어져서 그 해에만 모두 세 차례나 잘렸다. 다음 해에도 자라다 베어지기를 몇 번 더 하는 아픔을 겪고도 뿌리가 살아 있는 오동나무는 다시, 또 다시 줄기를 뽑아 올려 생명을 이었다.
- <내 나무> 중에서-
위의 수필은 길가에 심어져 자라다가 한 해 여러 번 베어지기를 반복하는 나무를 화소로 생명의 중요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산책길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줄 나무가 잘려져 나가는 데는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한 해에도 몇 번씩이나 된다’고 말한다. ‘풀 베는 아저씨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지만 기대는 하지 말라'는 진술을 통해 근대 이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근거가 되고 있는 ‘정합적 이성’을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만을 따지는 ‘정합적 이성’ 논리는 개발지상주의를 가져왔고, 우리 삶은 인공미로 가득 찼던 것이다. ‘잘 부탁한다고 간곡한 부탁을 하고 왔지만 나무는 또 베어져서 그 해에만 모두 세 차례나 잘렸다. 다음 해에도 자라다 베어지기를 몇 번 더 하는 아픔을 겪고’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주변부 타자인 오동나무 한 그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수난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저항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무엇이부족할까. 빈 그늘에 두고 물도 잘 주고 분무도 자주 하고 거름도 가끔 주는데, 혹 꽃을 피우지 못하는 까닭은 항상 따뜻한 거실 탓일까. 온도변화가 큰 베란다에 두었을 때 꽃이 피지 않았던가. 어줍잖은 실력으로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본다. ‘추위를 이기는 어려움을 겪어야 저는 꽃대를 만들 수 있어요. 군자란도 그러잖아요.’ 행운목은 항변하고 있으려나. 식물도 어려움을 겪어야 향기로울 수 있는지. 남은 세월도 함께 행복하려면 더 많은 관심과 실험이 필요할 것 같다. 관심은 앎을 낳고, 앎은 올바른 보살핌을 낳으리라. 그리하면 꽃으로 보답하려나. 녹색으로, 공기정화로 제 몫을 하는데 꽃까지 보여달라고 다그침은 욕심일까. 오랜 불임이지만 애완이며 반려인 행운목과 오십 년, 육십 년 지기가 되는 길은 기다림과 잦은 눈맞춤이리라.
- <사십 년 지기> 중에서 -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녹색을 보고 숨쉬고 먹어야 건강하다고 한다. 거대 문명을 건설하기 전에는 자연 속에서 먹고 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인간이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일 법하다. 작가는 길거리에서 사온 행운목을 사십 년간 키워오고 있다. 그래서 이 친구를 ‘사십 년 지기’라고 한다. 제목짓기에서부터 문학성을 놓았다. 줄기에서 잎을 출산하는 데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느림의 미학뿐만 아니다. ‘식물도 어려움을 겪어야 향기로울 수 있는지. 남은 세월도 함께 행복하려면 더 많은 관심과 실험이 필요할 것 같다.’는 작가의 깨달음은 이 작품의 존재 의의이며 가치인 것이다. 식물과의 ‘잦은 눈맞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변화의 질주 속에서 행운목을 집에 두고 거실에 두었다 베란다에 두었다 실험을 하면서 꽃을 피우게 하는 열성은 지니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행운목은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의 말대로 우리 도시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 애완이고 반려인 것이다. 그녀의 수필은 삶의 옆에 또는 삶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생활이며, 그 삶의 체험이 자신의 수필 속에 절실하게 투영되어 있어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작년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60대 남자분이 접시꽃이 씨앗을 뿌려서 자랐다는 말을 듣고 “그렇군요. 이꽃밭의 주인이시네요. 씨가 날라왔나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가꾸는 흔적이 보였습니다. 정말 좋은 일을 시작하셨어요. 저도 꽃가꾸기를 좋아하니 함께 해도 될까요?”하셨다. “주인이 어디 있나요. 함께헤 주시면 고맙지요” 동참자가 생기니 좋은 점이 많다. 꽃 종류가 늘고 때로는 잡초 뿌리들을 뒤집어주어서 풀 제거하는 일이 수월하다. 남이 시작한 일에 선뜻 나서서 동조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나는 든든한 조력자, 후원자를 만난 셈이다. 암 투병하는 친구를 위해 함께 머리를 깎는 반 친구들처럼, 일인 피켓 사위에 함께 서주는 동료처럼, 나의 뜻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어 힘이 난다. 더구나 누구라도 함께 가꿀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더 좋으리라.
-<산책길 단상> 중에서
“나는 꽃씨를 보면 무조건 받아둔다. 어려서부터 집 둘레를 돌아가며 받아 둔 씨앗을 뿌리고 돌보는 일이 내 놀이였다.”로 서두를 시작하는 이 수필은 그녀의 사상이 얼마나 생태지향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학교 꽃밭은 전적으로 배명란 작가가 꽃씨를 뿌리고 가꿨다. 공기 좋은 농촌에 산다고 다 자연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과욕에 쪼들려서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로우면 이는 자연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다. 진짜 자연을 아끼는 사람은 자연을 스스로 가꾸고 보살핀다. 배명란은 꽃가꾸기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꽃씨를 뿌렸고, 서래섬 산책길을 걸으면서 꽃씨를 뿌린다. 꽃밭을 해마다 늘려나간다. 힘 들기도 하지만 그들도 하나의 생명이라는 인식 때문에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연에 귀속되어 흙을 밟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집 주위 공원 공유지 빈 터에 꽃밭을 가꾸며 자연과 함께 하며 흙과 사귄다. 입양되었던 아이가 이제야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안 것처럼 거대한 탑에서 나는 연기와 기계에 둘러싸인 인간들이 녹빛 자연을 그리워하며 하나둘 흙과 친해져야 한다는 생태담론을 이 수필은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생태담론의 의의는 본래 자연에 기대어 살던 인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본연적인 끈을 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 예측되는 우리들의 문제는 자연과의 단절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절 이후의 우리의 선택이 문명이기라는 게 문제다. 작가는 꽃밭을 볼 때마다 돌봐 달라고 손 내미는 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강 공유지 꽃밭 가꾸기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말해준다.
“뭐 하시는지 여쭤 봐도 돼요?”
내 또래쯤 될까. 더 젊을 까. 서래섬 둘레를 힘차게 걷던 여자분이 멈춰 서며 내게 물었다. 마포대교 쪽의 하늘이 보랏빛에서 짙은 회색으로 바뀔 때, 길어온 물을 뿌려가며 분꽃이며 접시꽃 국화 등의 잎을 씻고 있을 때였다. 흙탕물이 넘쳐 흙옷을 두껍게 입은 꽃들이 숨을 못 쉬어 죽을 까봐 씻어준다 했더니, 서래섬 관리자가 호스로 물을 부려 씻어 줘야지, 왜 당신이 씻느냐 한다. 쫄쫄 흘려가며 씻는 것이 시원찮아 보였을까.
“심은 사람이 씻어야죠. 관리소 측에서는 풀만 깎고 이런 일은 관심이 없어요.”
“관리소에서 하는 줄 알았어요. 서래섬을 걷는 사람을 위해서 이 꽃밭을 가꾸시는 거잖아요. 제가 꽃을 보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시를 낭송해 드려도 될까요?” 한참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대뜸 시 암송의 제안이라니.
- <서래섬 실루엣> 중에서 -
자연과 인간의 삶은 끈끈한 핏줄로 연결된 일종의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인간 경제활동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에 되먹임 작용을 한다. 배명란이 행동하는 양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그녀의 ‘잎 씻어주기’는 어떤 차원에서 씨를 뿌리는 것과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꽃들이 숨을 못 쉬어 죽을 까봐 잎을 씻어준다는 것은 문명 이기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평자는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배명란 작가가 이런 생태 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꽃잎을 씻어주면서 꽃을 가꾸다가 만난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대로 그녀는 자연을 가꾸는 데 여념이 없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시낭송을 해주는 분의 여린 음성이 마음을 두드리고, 풀잎 둔덕 위를 굴러 강물에 누운 가로등 불기둥을 흔들고 올림픽대로의 차소리도 잠재워 버렸다. 이렇게 자연을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작가 주변에 많이 모여 들기를 기원해 본다.
2. 긍정미학의 향기와 순수의 숨결
한 작가에 대한 고찰은 그가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 정신을 심층적으로 살핌으로써 그 삶이 갖는 존재의 의의를 규명하는 것이 바른 방법론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작가로서의 존재적 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떤 성격의 작품이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배명란은 사물에 대한 예민한 촉수로, 자기만의 독특한 긍정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건강한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화장>,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갖고 싶은 것>, <내 강아지> <영재교육>, <개학 없는 방학>, <소꼬리를 잡다> 등 일곱 편으로 살펴 본 그녀의 수필세계는 긍정미학으로 구축된 질박한 삶의 축제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수필은 긍정의 마인드로 사물을 보고 있다는 측면에서 문학적 가치를 갖는다. 그녀는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의 길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인간 정신의 본질과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파헤치는 서정 수필을 주로 써왔다. 지금까지 그녀는, 무엇보다도 긍정미학의 실천을 통해서 순리대로를 강조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화장>에서 그녀는 '돌이켜보면 마스카라 망신이 오히려 잘된 일이었지 싶다. 기본만 바르니 황금 같은 아침시간을 내 집 애들 돌보고, 집 대충 치우고 학교아이들 빨리 만나러 총알처럼 나갈 수 있었지 않았는가'라며 삶의 순간순간을 긍정적인 소망을 갖고 노력하였다.
작가에게 있어서 삶의 원초적 동기는 이 순수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순수는 작가를 감사하는 생활에서 노력하는 생활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순수가 바탕이 된 그녀의 글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수필의 여러 매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솔직성이다. 진솔한 자기 고백에서 그녀의 순수한 삶은 맹물 같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인생사의 흔한 한 축을 과거라는 시공에 놓고 그 시절의 순수를 그리워하고 있는 그녀의 글은 출발점도 귀착점도 한마디로 ‘나’라는 인생 그 자체다. ‘나’에서 출발하고, ‘나’를 표현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은 긍정미학의 결정체라 하겠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타인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마음,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통합하고자 하는 배명란의 예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공명상자를 울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배려가 있을 때다. 배명란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순수로 살고자 한다. 한마디로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다. 수필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비워서 생긴 여유를 즐기며 지난 세월을 걸러내기’ 때문이다. 녹색과의 잦은 눈맞춤으로 얻은 이득이 회화적인 색채감으로 잘 드러나 있다는 게 배명란 수필의 최대 장점이라 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리하고 보니 평소에 모르던 사실을 꺠닫게 되었다. 다른 이도 그러겠지만 나는 예쁜 것, 눈이 즐거운 것을 밝힌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았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좋아하여 아이들과 오래 살았다. 꽃과 나무 숲을 좋아하는데 숲속 같은 동네에 살며 내 마음대로 시간 되는 대로 가꿀 수도 있다. 볼거리 구경거리들을 좋아하는데 가까운 곳에 그런 곳이 다 있다. 나의 여행에 가족들의 지지가 있고 좋은 친구들과의 협력이 있으니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퇴직 후 귀여운 아이들을 보지 못하여 한동안 울적했는데, 요즘은 내가 사회 일 학년이다. 선배들에게서 퇴직 후의 새 삶을 배우는 ‘퇴직 일년차’이기 때문이다. 잘 배우는 아이들처럼 나는 배우며 살기를 희망한다. 배우려고 노력하는 종안에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것이고, 그것은 떠나보낸 젊음의 아름다움을 대신하지 않을까.
-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
이 작품은 그녀의 글 중에서도 어찌 보면 가장 수필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을 창작한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한 조명이요, 이를 통하여 자기실현에 이른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수필을 그림자의 인격화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수필적 자아인 ‘나’를 철저히 탐색하고 규명함으로써 그 ‘나’를 그려내고 ‘나’를 초월하여 인간 본연의 본질인 보편성에 접근하고자 하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작가는 늘 배우며 살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전체 내용에 견주어 보면, 상당히 암시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제재로 해서 내면을 드러내어 그림자와 마주보기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치료효과를 극대화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았으니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자각은 그녀의 긍정적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결말부 마지막, ‘내가 누리고 산 것들에 대한 또 다른 보답 방법을 찾으면서’는 매우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유와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수필은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이 작품에 제시된 것들은 작가의 내면풍경을 잘 보여준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고, 꽃과 나무가 만들어내는 경치를 좋아하고, 특히 꽃 가꾸기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좋아했으니, 이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는 작가를 보면, 꽃은 그녀에게 운명인 셈이다. 현재 작가는 직장을 퇴직하고 사회 초년생으로 살고 있다. 이 수필 속에는 일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에 젖는 작가의 긍정적 세계관이 노출되어 있어 감동을 준다.
자리가 나면 연락한다 해서 아이들 귀국날짜는 정하지 못하고 나만 다음 날 돌아오기로 했다. 아이들이 저학년일 때 같은 학교 다니던 나는 발리 가야 한다면서 먼저 가는 일이 많아 서운했다는데 비행기도 저희끼리 타고 오라니 눈물이 나더란다. 더 머물면서 영화관 과학관, 바다구경에 신이 났던 작은 아이는 집에 가는 일은 누나만 따르면 되니 그랬을까. 큰아이의 입장이 되어 보니, 내 반 학생들 염려하느라 내 집 아이들 안위에 눈 감앗던 냉정함이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나 없어도 학교는 잘 돌아갈텐데 왜 그렇게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내 아이는 내가 돌봐야 하지만 교감선생님이라도 대신 가실 게 아닌가
- <소나기 뒤의 무지개> 중에서 -
작가가 자신의 아이들보다 항상 일을 우선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들이 입대한다고 연가를 신청하는 동료교사를 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되돌아보는 것을 발단부로 해서 자신의 성향을 드러낸다. 이 작품이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변부 타자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했던 모성의 따뜻한 온기보다는 자립심을 강조하면서 늘 혼자 할 수 잇다는 믿음을 가졌다. 나중에서야 부모 역할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미안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반추하는 일을 잊지 않는 작가이기에 더욱 독자의 애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아이들보다 먼저 맡은 반 아이를 걱정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속한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사건을 예화로 제시한다. 결말부에서 가서 이런 자신의 태평주의 내지는 긍정주의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개척하는 용감이’로 자라게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런 전화위복의 결과를 ‘소나기 뒤의 무지개’로 형상화하는 전략은 매우 문학적이다. 이런 제재 상관화 전략은 주제의식의 형상화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작업이라 하겠다. 아이들로부터 ‘우리 엄마는 진정한 프로’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작가는 그래도 겸손하게 그것의 의미를 칭찬에 무게를 두지 않고, 서운함에 둔다. 이는 자신을 늘 낮추고, 자신의 반성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순수의 심정이 아닌가 여겨진다.
내게 손자가 생기니 할머니 생각을 더 하게 된다. 그리고 내 할머니처럼 손자를 불렀다. 예부터 할머니들은 귀여운 손주를 왜 강아지라고 불렀을까. 어린 자식이나 손주를 귀엽게 이르는 말로 ‘강아지’라고 했다는데 거기에 ‘내’가 붙으면 더 다정한 말이 된다. 어떤 이는 귀한 자식을 나쁜 것들로부터 보호하고 오래 살게 하기 위해 험한 이름을 붙여 준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 품을 파고 들며 재롱을 떠는 새끼들 중에 가장 귀여워서가 ᄋᆞ닐는지. 거기에 어감까지 부드럽지 않은가. 이름은 만인이 부르니 내 소유가 아닌 느낌이지만 ‘나의’의 소유 의미 때문일까. 할머니는 ‘워이’의 대답과 ‘내’를 붙여 ‘워이, 내 경아지’로 할머니만의 말씀으로 만들었다. 여러 할머니들의 ‘강아지’를 들어 보았지만 내 할머니의 그것만큼은 감칠 마시ㅣ이 없었으니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가. 어린 날, 동네 할머니들 중에서 왜 우리 할머니가 제일 예쁘냐 여쭈었을 때 활짝 웃으며 ‘니 할미라 그렇단다.’와 같은 맥락일까.
- <내 할머니> 중에서 -
호칭의 문제를 인문학적 사유로 추적하고 있는 글이다. 어떤 호칭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중요한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삶을 혈육의 정으로 투시하는 그녀의 긍정적 삶의 태도에는 따스함과 순박함이 병존해 있어서 정감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그녀의 수필이 강한 호소력을 갖는 데는 때묻지 않은 순수서정에의 갈구가 뒷받침되고 있다 하겠다. 수필 문학의 생명은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데 있다. 주제의식의 올바른 의미화는 제재를 중심으로 해서 주제를 겨냥할 때 구축된다. 위 인용 단락은 이 작품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주제의식의 의미화에 앞서 자신의 할머니는 왜 자신을 부를 때 강아지라 불렀을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자신에게도 손주가 생겼다. 한 여인의 손주 사랑이, 다시 되물림되는 현실에 크게 공감하면서 우리는 문학적 감동에 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규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자세와 실천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드러나는 법이다. 사랑하면서 건강한 정신으로 사는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작가는 호칭을 통해서 잘 형상화했다고 하겠다. 할머니의 일과 중에 가장 보람있는 일이 손자와 마주보며 웃는 일이라고 하는 대목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여미게 하는 것이다. 진솔한 인간성의 표출,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감동에 이르지 못한다. 가슴에 꽃씨를 가지고 살다시피 했던 젊은 시절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했고, 이런 휴머니즘이 짙은 수필을 잉태했다고 하겠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엄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주신 몸과 맘으로 착하게 살다 우리도 엄마 뒤를 따라갑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시려나.
잘 있거라 내 아이들, 정든 사람들,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물러갑니다.
우애하며 건강하게 잘들 살다가 먼 훗날 전국에서 다시 만나세.
<어머니의 망향가> 중에서-
배명란 작가의 어머니는 1989년 봄, 큰오빠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그곳 요양원에 계셨으니,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여든아홉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고향 뒷산에 모셨다고 한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통증이 오기에 그녀는 어머니를 하늘에 묻고 스스로를 위로받는다. 이 수필은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걸 말해준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글에서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배명란의 수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에는 진한 그리움의 향기가 단연 으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노래를 화두로 해서 어머니의 고통스럽고 한 많은 삶을 들려주고자 한다. 이러한 정서는 ‘어머니를 돌보아 드리려고 퇴직도 앞당겼다.’는 진술에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지냈던 석 달의 과거를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국의 요양원에서 매일 애국가 4절까지를 불렀던 기억을 어머니의 사랑과 섞어 반추하고 있다. 어느 자식이든 모든 인간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배명란 수필에서 어머니는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 달려가는 피안의 세계였다. 자신을 생전에 끔찍이 아껴주었던 어머니께 퇴직을 앞당겨서라도 효도하고 싶어했지만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를 애틋하게 기억하며 그리움으로 가득 찬 심사를 유감없이 토로하고 있는 작품이 <어머니의 망향가>이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어머니다. 출가외인인 여성에게 더욱 어머니의 품은 안락한 둥지와 같다.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도 더러 보이는데, 배명란의 글에서는 유독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선연하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녀의 가슴 안에 뚜렷한 사랑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얼굴을 작가는 어머니의 오동나무에 투영시키면서 그리움에 젖기도 한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이다. 그 흙 위에 씨를 뿌리고 생활하며 결국에는 흙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그녀의 수필은 식물성적인 푸르름이 존재하는 사랑의 집 안을 배경으로 하기에 감동을 준다고 하겠다. 항상 아니 영원히 자연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작가 배명란이 우리 주변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늘 서정적 정조에 깊이를 더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장례식을 치루면서 그녀는 <어머니를 추모하며>라는 추도사를 읽는다. 식물성적인 푸르름의 향기를 맛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꽃씨의 순수가 사라지면, 오직 폭풍의 언덕처럼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바람만 불 뿐이지 않는가.
3. 저항성과 기적이 있는 삶의 공간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작가는 저항성을 나타낼 수 있다. 저항은 정신적 건강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더 나은 세상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수필의 비판적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살림살이가 힘들어 질수록 감각은 예민해진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배명란은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수필 역시 문학적 감동은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에서 나온다. 배명란은 독자에게 연상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상관성 있는 제재를 선택하고 그 제재와 자신의 체험을 버무려 그 속에 주제를 잘 구현하는 작가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 영원한 주제인 사랑과 죽음에 대한 탁월한 인식이 돋보인다. 어쨌든 인간에게 생사의 문제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배명란 수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생사에 대한 사고와 감성이 유례없이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수의 작품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혜의 시간이 그려진다. 배명란이 자신의 수필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대 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이 배명란 수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중되고 있는 셈이다. 정신적으로 안주할 수 있는 과거와 약속된 미래에의 가능성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릴 때 일반적으로 죽음의 의식은 싹을 틔우게 된다. 지올코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삶에 마지막 종말로서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의 현실적인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유난히 정이 많은 작가에게 있어 죽음은 유난히 아픈 기억이 되어 뇌리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감동이 있는 장례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장례식을 상상해 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시간을 허락받을지 모르지만 내 자식들은 나를 어떤 어머니였다고 기려줄까 나라의 동량을 양성하면서 보낸 육십 평생 속에 내 아이들도 잘 키우기 위해 정성들인 세월이 겹쳐 있다. 가장의 긴 우환 속에서도 바깥일과 집안일에온 힘을 기울인 눈물의 날도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엄마는 일이 먼저였다’고 아쉬웠던 기억들을 들춘다. 이제부터 살아갈 남은 날에는 어떤 이야기들을 담아 아쉬움이 없는 인생을 만들까.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물으면 ‘더 사랑할 걸, 더 봉사할 걸, 더 즐길 걸.’하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나는 거기에 하나 더 ‘더 배울 걸’을 넣겠다. 배워야 사랑도 봉사도 즐기는 일도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장례식 단상> 중에서 -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 작가는 퇴직을 하고 봉사활동으로 장례미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조사 없는 장례식의 문제를 건드린다. 장례절차 없는 고별의식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배명란의 주장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도 어느 곳에도 시원한 답변은 없을 것이다. 인간사에서 절실한 관심사와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장례식 단상>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장례식이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날 때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젊은 사람의 죽음은 죽음 이상의 공포가 내재되어 있다. 다윗 왕도 아들 압살롬을 잃었을 때 머리에 재를 얹으며 성루에 올라 심히 통곡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생과 수고로 얼룩진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한 번 죽으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인간적인 정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것은 이별의 예감과 그것으로 받는 충격의 아픔이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얼마나 삶을 백팔십도로 바꾸어놓는지 우리는 이 작품으로 알게 된다. 인용 예문은 감동이 있는 장례식을 보고 싶다는 생각 하에 작가가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해보는 대목이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기에 이러한 과정은 영혼을 살찌게도 한다. 남은 자식들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하는 불안감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다. 만남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이 존재할 수박에 없고, 그것을 운명으로 수용해서 보편화하지만 생각하면 야속하게 느껴져 가슴에 거센 물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물으면 ‘더 사랑할 걸, 더 봉사할 걸, 더 즐길 걸.’하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나는 거기에 하나 더 ‘더 배울 걸’을 넣겠다.’는 다짐의 문장은 최고의 압권이다. 이 수필의 마지막은 한 평생의 긍정적인 평가를 염원하는 작가의 희망사항이 눈시울을 뜨겁게 적신다. ‘배우기를 즐기며, 이웃을 사랑하고, 한 번뿐인 삶도 향유할 줄 알았던 사람으로’ 평가받길 바라는 마음이 찐한 여운을 자아낸다. 살아있기에 절절한 그녀의 기원은 비록 ‘정작 나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겠지만’이란 가정절 때문에 더욱 눈물 젖은 절규로 들린다.
아버님이 손자를 또 바라실 때 더 이상의 지성이 필요 없는 분이 손자 문제에는 왜 저렇게 고루하실까 생각했다. 아버님의 아들 셋이 각각 남매를 낳았고, 여섯이 결혼하여 열두 자녀를 기른다. 평균 둘씩을 기르는 셈이지만 아직 우리 아들은 아이가 하나이다. 이제는 내가 아버님처럼 바란다. 출산율이 낮은 우리나라가 걱정되어 우리 집안이라도 한 사람 더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 마리의 벌새에 비유되려나. ‘쓰지신이치’ 씨의 우화에 나오는 벌새 한 마리는 초원에 불이 나서 모두 도망쳐도 강물을 몰고 와 불길 위에 끼얹었다지 않는가. 간절히 바라서 마침내 둘째를 얻은 그 엄마처럼 우리 손녀에게도 동생이 생기기를 바란다. 이 시대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만큼 큰 애국이 어디 있으랴. 그리된다면 나는 한 번 더 손주 키우기에 줄어드는 체력이나마 거들겠지만 아버님처럼 교육비 제안은 할 수 없어 안타깝다. 사교육 공화국인 우리나라의 요즈음 교육비는 학부모가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 없도록 큰돈이 든다지 않는가.
<아이바라기> 중에서 -
행복 속에서 인간은 지향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욕심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며 평화로와질 것이다. 이 수필은 정부의 인구문제 정책 실패를 지적하면서 ‘아이 하나 더 기르기 운동’을 제안하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 돌보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발단과 결말의 수미상관적 구조와 주제의식의 간접화다. 그녀는 ‘잘 될 집에서는 어떤 소리가 나야 하는가. 옛 어른들은 아기 울음소리와 책 읽는 소리라고 하였다.’는 전개예고를 발단부 첫문장으로 놓고, 결말부에 가서 ‘미래를 기대하려면 아이들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무조건 낳으라고만 하면 안 되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봐준다고 한다. 그녀야말로 탁월한 혜안으로 황홀한 미래를 여는 작가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작가는 한 작품이 실존적 불안이나 죽음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고지 사각의 모서리가 닳아질 때까지 서대문 수필교실에서 수필시학을 갈고 닦았던 연유라고 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출산율이 낮은 우리나라가 걱정되어 우리 집안이라도 한 사람 더 보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 마리의 벌새에 비유되려나. ‘쓰지신이치’ 씨의 우화에 나오는 벌새 한 마리는 초원에 불이 나서 모두 도망쳐도 강물을 몰고 와 불길 위에 끼얹었다지 않는가’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필 쓰기를 삶의 한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필이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나는 한 번 더 손주 키우기에 줄어드는 체력이나마 거들겠지만 아버님처럼 교육비 제안은 할 수 없어 안타깝다.’ 는 사교육비 지원 여부는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다고 하겠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가는 작가다.
아이들의 폭력문제로 온 나라가 걱정이다. 좁은 땅 곳곳에서 일어나니 잘못 키운 어른들 책임인가 싶어 눈 둘 곳이 없다. 기운 센 아이들이 힘이 약한 아이를 괴롭히다 죽음에까지 몰고 간다. 그들을 어떻게 교화시킬까. 산나물과 같은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아이들에게 닭을 기르게 하면 어떤 결과를 얻으려나. 키우며 관찰하는 동안 장닭의 약자 섬김을 배우고, 텃세를 부리는 닭들에게서는 자신들의 모습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괴롭히는 사람이 아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엉뚱한 처방일까. 인성을 가졌을 테니 적어도 축성으로 남지는 않으리라.
- <장닭> 중에서 -
작가는 장닭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삶까지도 포갠다. 작가는 장닭의 희생과 헌신의 미덕에서 교육적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폭력문제를 결부시킨다. 장닭이 하는 것을 보고 약자 섬김의 자세를 본받아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이 뭔가를 느낄 수가 있다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장닭의 생태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교훈적인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닭의 섬김과 텃세를 연결시켜 아이들의 폭력문제를 정서적으로 풀어낸 것은 배명란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관조가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뭘까.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도시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을 안겨준다. 닭은 사위의 보신으로만 알고 있을 정도로 아직도 도시인에게는 낯설다. 청소년들의 폭력은 금방 터져 버릴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죽음의 위기로까지 몰고 가는 폭력문제를 유년시절의 기억을 소환하여 치료제로 쓰려는 마음씨도 그 구성전략도 대단해 보인다.
괴롭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사회적 약자가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이 수필만큼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절제된 감정으로 서글픈 현실을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어떻게든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배명란의 글쓰기는 인간적 향기를 보여준다. 폭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오래 지켜봐야 했던 배명란에게 장닭의 약자보호정신이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산나물과 같은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는 표현은 폭발적인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교육자적 인성을 간결한 문학어로 처리한 대목에서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언어의 디자이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배명란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그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채워주는 작가인 것이다.
요즘은 산업 현장처럼 동물사육장도 분업화되어 있다고 한다. 새끼돼지도 전문 종돈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니 우리집의 새끼돼지 실패담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도시의 골목 상권이 사라지듯이 타산이 맞지 않는 농가의 소규모 가축기르기도 설 자리를 잃었을까. 사라진 집짐승소리와 아이들 소리 다음으로 어르신 발걸음 소리마저 끊기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된다. 추억 속 내 유년의 고향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듯이 농촌의 향기도 다시 살아넘치기를 바란다.
<양돈기> 중에서 -
배명란은 <양돈기>를 통해 어릴 때 들을 수 있었던 소리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내면에는 영롱한 소리들로 가득 차있다. 배명란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전통성의 지향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마을의 소리다. 이 수필은 사라져버린 소리들, ‘사라진 집짐승소리와 아이들 소리 다음으로 어르신 발걸음 소리’를 소환하는 글이다. 한마디로 토포필리아수필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타향살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수필들이 귀소본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닭농사>, <행복지수높이기>, <내 삶을 지키는 단어>, <소꼬리를 잡다> 등이 입증한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배명란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향토성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III. 로그아웃
세상의 모든 것이 배명란의 수필 안에 놓여져 있는 소도구다. 사랑도 아픔도 이 안에 어우러져 있는 일종의 소품이라고 볼 때, 수필은 하나의 우주다. 수필을 쓸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감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먼저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된다. 배명란 수필의 강점은 사건이나 사람 그리고 사상에 대한 묘사와 단상이 마치 그림을 보여주듯 매우 구체적이다. 수필을 쓸 때 여러 가지 자연물이 소재가 되는 수가 많다. 그만큼 수필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지는 문학이며, 자연물을 문학화하여 표현한 것이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연물을 소재로 수필을 쓰고자 할 때는 우선 자연과의 일체감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수필집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배명란의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수필은 등불 같은 수필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의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행자가 되어 숨겨진 그들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작품들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잊고 있었던 자기에 대한 응시를 통해 무거운 아집을 버리는 일이나, 꽃씨를 갖고 빈 터를 찾아내는 것 모두가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다.
자연과 생명에 자아에 대한 천착은 바로 중심 바깥으로 던져진 존재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삶의 변증인 것이다. 그녀의 수필이 주는 맛은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길러 올려진 언어가 진정성의 분위기를 뛴다는 데 있다. 배명란의 글은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주제지향성을 ‘생태’와 ‘생명’으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 행위는 대상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인식 대상과 행위가 바로 사회 현실이고 역사 현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그녀가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제 만물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배명란은 생태주의라는 주제에 맞게 제재를 하나로 통일하고,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해서 인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기법으로 좋은 수필을 탄생시켰다고 하겠다. 문학이 문학다워야 한다는 것은 언어예술로서의 문학 정체성을 작가가 확고히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어쨌든 생태와 생명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배명란 수필가가 생태라는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토속적이며, 전통적인 우리 것의 미학성 찾기에도 눈길을 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당위적 명제와 진리를 찾고 있기에 그녀의 글은 품맛과 손맛, 그리고 눈맛까지 두루 낸다. 수필가의 정신적 건강함이 한국수필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길 바라며, 이번 출판을 계기로 해서 더욱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