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를 가다듬고
오랜 공직생활을 마감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한 일이라곤 먼길 떠나시는 장인을 배웅해 드리고, 딸을 출가시킨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게 없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퇴임식 때 슬쩍 곁들였던 고별사가 인생 2막에서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평소 갈망하던 글쓰기 공부를 위해 부랴부랴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을 한 게 집에 나이로 예순넷이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과제물부터 한계에 부닥친다. 난데없이 이름만 아는 동서양 철학자의 책들 중에 한 권을 선택하여 독후감을 써야 한다.
지시된 책 중 그나마 안면이 있는 논어나 맹자와 같이 분량이 엄청난 동양 고전은 시간 관계상 도저히 소화할 수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서양 철학서 중 가장 얇은 책인 풀라톤의 《메넥세노스》를 선택했다. 다행히 내가 근무했던 업무와 연관된 전몰자 추모사에 관한 내용이다. 인터넷으로 같이 구입한 풀라톤의 《파이드로스》는 난해하여 책꽂이로 직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과제를 마치고 출석 수업 가는 날, 갑자기 20대 중반에 방송대 출석 수업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방송대에 지역대학이 없어 협력학교인 B 대학교에서 그 대학의 교수가 출석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행정학과는 현직 공무원이 주를 이루고 있어 연령대가 다들 젊은 편에 속했다.
나이가 지긋한 지도 교수는 교실의 당연한 연장자로 평소 학생들을 가르치던 습관대로 강의를 해라체로 일관했고, 질문을 할 때도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강의가 한창 무르익자 학생들의 집중도에 흥이 난 교수가 칠판에 난해한 철학 용어를 쓴 후, 그날의 일자에 맞는 학번의 학생을 답변자로 택해 호기롭게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 정황에 맞지 않게 머리가 허연 사람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는 게 아닌가. 일순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고, 교수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도 젊은 학생들 속에서 그런 곤란한 처지에 놓이지나 않을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서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모두 내 나이 또래의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들이 교실을 점령하고 있어서다. 강의 시간에 들어서는 교수도 복장이 자유스럽고, 말투는 좀 퉁명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스스럼이 없다. 이런 분위기는 참 오래간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살아있네~ ’다.
출석 수업이 끝나고 10일 동안의 공부시간이 주어진다. 이게 머리에 피를 말리는 일이다. 우선 강의 시간에 일러준 시험 범위에 책과 필기한 노트를 조합하여 가상 답안을 만들어서 쓰기와 외우기를 반복해야 한다. 요즘 나의 형태는 분명히 뭔가를 하려고 베란다에 나가서는 용무를 몰라 쩔쩔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과목당 A4 용지 1매 반 분량을 세 과목이나 달달 외워서 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늙어 가면서 이런 일을 왜 하지?’ 하며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드디어 시작된 출석 시험 첫 시간은 정신 력 과의 싸움이다. 머리에 기억한 내용은 술술 잘 떠오르는데 정작 답을 써야 하는 손은 긴장이 돼서 사시나무 떨리듯 한다. 매끄럽지 않은 책상에 책받침 없이 글을 쓰니 괴발개발 내가 봐도 가관이다. 그래도 공부한 보람은 있어 글씨는 처참해도 출제자가 요구한 답은 잘 작성한 것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이 되어 둘째, 셋째 시간 모두 무난하게 친 것 같다. 기말시험은 고쳐서 틀린 게 많아 걱정했지만, 전체적으로 성적이 괜찮게 나왔다.
적응기를 무사히 마치고 2학기에 접어들었다. 1학기 때와 같이 과제물 세 과목이 여전히 어렵다. 그런 중에도 ≪현대 소설론≫의 과제는 잠재해 있던 나의 문학적 감성을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김정현의 소설≪아버지≫를 읽다가 딸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 부분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앞에 앉은 학생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아마 딸 가진 부모 입장에 동질감을 느껴서 주인공에게 더 몰입되어갔는지 모른다.
과제물을 쓰고 난 뒤 아내에게 읽으라고 권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책을 돌려주면서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아내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장인의 딸 입장에서 그렇게 울었을 것 같다. 이렇게 모두가 공감하는 감성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걸 보니 문학도로서의 자세는 갖춰 가는 모양새다.
‘론’을 배우고 익히며
이제 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3학년 1학기의 교과서를 받고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전공과목의 책 제목이 ≪문학비평론≫과 같이 무슨 ‘론’으로 되어 있고 질적 수준이 아주 높다. 책 부피만 해도 ≪고전시가론≫은 다른 교재의 거의 1.5배 분량이다.
그리고 숙명처럼 날아든 과제명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과제물을 아예 논문 형식으로 작성하라거나 한 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해서 제출하라는 식이다. 이중 ≪도전소설강독≫은 “경판본 고소설 ≪홍길동전≫을 읽다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는“ 천비 소생 홍길동. 그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사는 연산군 시절 다수의 힘없는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평민 처녀 음전. 그들 사이에 연분홍빛 사랑이 싹틀 무렵, 채홍사에게 징발된 그녀가 생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대목에서는 안타까움에 할 말을 잃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투(被投) 되기로 작정 되어 있었다면, ‘저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현재의 삶에 대한 고마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공과목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양과 목인≪신화의 세계≫를 통해 혼돈의 세상 카오스를 거쳐서, 신화의 마지막 영웅 오디세우스를 만난 것이다. 외눈박이 식인 거인과 맞닥뜨려 ‘아무것도 아닌 자(Outis)’가 되어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노래로 사람을 홀리는 사이렌과 죽음의 소용돌이일 카리브디스를 헤쳐나가는 등,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함께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우치는 소중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이번 출석 수업은 본부에서 출강 오신 학과장님의 간결한 말씀으로 요약이 되겠다. “우리 학과는 졸업할 때 한글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평소 글을 쓰다 보면 맞춤법, 특히 띄어쓰기가 정말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교수님의 명쾌함에서 용기를 얻는다.
이제 1학기 마지막 관문인 기말고사를 준비한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난이도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 하던 요약 노트를 더 정성 들여 정리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거의 예외 없이 적중하는 법이다. 기말시험을 치르고 난 학우들의 얼굴을 보니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덩달아 놀란 가슴을 요약 노트 덕분에 쓸어내린다.
2학기는 교재≪고전소설론과 작가≫에 게재된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관에 대해 학습의 심도를 높인다. 방송강의, 워크북은 물론 ≪금오신화≫도 구입해서 읽어 본다.
그가 주장하는 귀신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금오신화≫ 다섯 편 중 하나인 〈남염부주지〉에서는 지옥의 대왕인 염마 와 경주의 유학자 박생을 동원해, 극락이니 저승이니 하는 별세계가 따로 없고 이승과 저승은 같은 세상이라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상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저승의 역사는 정말 오래된 것 같다. 기원전 8세기경 고대 희랍 시인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이미, 저승의 신인 하데스와 머리가 셋 달린 저승 지킴이 개 케르베로스를 거론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승을 소재로 한 시리즈물 영화가 상영되어 보고 왔더니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모두들 저승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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