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호-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 편지: 썩어 버린 만나와 소금 기둥 만일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소리로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어쩌면, 서로의 생각을 소리로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살짝 감추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을 읽어 내는 신기한 시금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적나라하게 우리의 마음을 읽어 내고 우리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가, 같지 않은가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하신 십계명 중의 열 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 라는 계명입니다. 이 열 번째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과 생각으로 지키는 법입니다. 탐심과 탐욕은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니까요. 이 열 번째 계명으로 생각을 비추어 보면 금방 우리의 생각이 모습과 색깔을 드러냅니다. 썩어 버린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배고프다고 원망과 불평을 토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천사의 음식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만나는 깟씨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이슬처럼 내리던 만나를 거두는 데는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 법칙은, 만나는 매일 한 번만 아침에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꼭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만일 욕심을 내어 많이 거두어 놓으면, 그다음 날 아침, 그것은 영락없이 썩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마치 열 번째 계명처럼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누가 욕심을 가진 사람인지 드러나게 했습니다. 만나를 거두던 사람들은 배웠습니다. 탐욕은 썩게 한다는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움켜쥔 것은, 만나가 썩듯이 항상 손에서 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탐욕의 이유 사람들이 탐심과 탐욕을 가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족감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없다고 느끼는 부족감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또한 자신의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족감에서 탐심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품는 지나친 열망과 투기가 탐욕을 일으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모든 만물이 가지고 있는 개체의 고유한 미(美)를 알지 못하는 데서 탐욕은 기인합니다. 각 개개인은 모두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아름다움과 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가 세상의 아름다운 조화와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가진 그 어떤 것은, -그것이 개성이든, 성격이든, 분위기든, 재능이든, 혹은 됨됨이나 품격이든지를 막론하고 결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는 감격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인식이나 감사의 부재로 탐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져도 항상 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어도 항상 풍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고 더 많이 가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 다른 사람의 것을 비교하면서 점점 더 많은 욕망과 탐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욕망은 근원이 채워지지 않는 한, 마치 밑바닥이 없는 웅덩이 같이 채워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욕망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십시오! 마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처럼 어둡고 캄캄한 입을 크게 벌려 더, 더 많이 채워 넣어 달라고 보채고 있는 것을&. 충만의 미학 존재의 근원이 되는 신의 임재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하나님을 만난 경험 속에서 그 신성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사람은 늘 부족감 속에서 허전하고, 외롭고, 공허하고, 허기진 감을 느낄 것입니다. 가지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찾은 듯한 느낌, 그래서 꽉 채워진 듯한 느낌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일체를 이룬 경험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충만함을 경험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누어 줄 수 있는 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 그런 사람은 외로워하거나,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거나, 존경을 갈구하거나, 동정과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과 귀중함을 깨달은 사람, 자신이 이 우주와 이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 그 놀라운 희소가치를 깨달은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존재한다 할지라도 나를 위해 예수께서 오셨을 것이라는 신비한 사랑의 진실을 신뢰하는 사람은 탐욕을 가지지 않습니다. 존재의 빈곤은 늘 허전함을 가져다주며, 그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외부의 어떤 것, 물질이나 부 그리고 명예나 인정, 권력이나 소유 같은 것들로 채우기를 갈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사는 경험, 신성에 참여하는(벧후 1:4) 환희 속에 사는 경험, 그 충만함 속에서 호흡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탐심이나 탐욕과는 먼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탐욕의 소금 기둥 탐욕의 반대는 자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달아 찾은 자족감 ,곧 일체의 비결 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탐욕은 있는 그대로 를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옵니다.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강박관념에서 옵니다. 탐욕은 필요 이상 움켜쥐려는 데서 옵니다. 탐욕은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이야기는 탐욕의 삯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차마 버리지 못해서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그녀의 이야기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움켜쥐는 것은 썩게 합니다. 탐욕은 우리로 점점 죽어 가는 소금 기둥이 되게 합니다. 썩어 가는 사해바다에 허무하게 서 있는 소금 기둥이&. 오늘도 살아 있지만, 마음이 탐욕으로 굳어진 소금 기둥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질투와 욕심으로 똘똘 뭉친 딱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자족과 감사로 색칠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충만의 아름다운 색깔로 덧입히십시오! 탐욕의 어두운 빛깔이 당신의 삶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하도록&. 탐내지 말라. 는 계명은 오늘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비추어 환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생애의 빛에서 기독교회의 역사가 과연, 요즈음 우리가 바라보는 이러한 교회의 형편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세상과 교회의 표준이 별다를 것도 없고,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별다른 경계선도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결론짓고 마는 것일까요? 성경은 믿는 자들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기대는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결국에 가서 교회를 정결케 하시는 사업을 이루게 되실까요? 유대인들이 여전히 지키는 대속죄일(Yom Kippur) 절기는 기독교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깨끗함을 원합니다. 마음이 정결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배드릴 때에 우리는 그러한 소원을 찬송으로 담아서 하늘로 올립니다. 그리스도인들 소원 중의 하나는 죄의 용서와 그 파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원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서 끝나 버리고 마는 그러한 정도의 복음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힘에서 해방해 다시는 종노릇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진정한 복음을 말입니다. 성경의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여 깨끗하게 하고 그 위에 인치는 역사를 이루는 능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를 이해하는 대목이 바로 성막 제도에 나오는 대속죄일의 경험입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가정과 영성: 마음의 성소를 정결케 하는 방법 성경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소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세워지는 마음 성소는 어떻게 지어질까? 구약 시대에 성소가 어떻게 지어졌는가를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 성소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를 알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2-8) 성소를 짓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해서이다. 눈에 보이는 지상 성소를 짓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몫이 있었고 하나님의 몫이 있었던 것처럼, 마음 성소를 짓는 일에도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구분되어 있다. 성소를 짓기 위한 첫 번째 일은 성소를 지을 예물을 즐거운 마음, 즉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것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소를 짓도록 가져오라고 하신 재료들의 항목을 보면 그 당시 최고로 비싼 고가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지을 때 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한다고 하셨을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바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가? 돈? 명예? 자존심? 아니면 우리의 자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바로 그것을 드려야 우리의 몸 안에 마음 성소가 지어지게 된다. 마음 성소를 짓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성소에 거하시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직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직 마음 성소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이다. 성소에 관한 성경 연구를 할 때마다 나오는 단골 질문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 왜 우리가 성소를 공부해야 합니까? 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마음에 성소를 세우는 것은 동일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 땅에 성소가 세워진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성소(sanctuary) 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거룩함 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죄와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성소라는 단어 속에는 죄로부터의 분리, 즉 구원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나와 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 예수님의 이름 속에 담겨진 의미, 즉 죄로부터 구원 ,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모두 성소를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으면,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서 성소를 짓게 되고, 그러한 방법으로 지어진 성소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거하신다. 성소의 정결을 유지하는 방법 우리의 몸 안에 성소를 짓는 방법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성소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에 마음 성소가 세워지면, 그 성소는 정결하다. 처음에 중생을 경험하면, 그 속에는 알고서 품는 죄도 없고, 알고서 품는 부도덕함도 없다. 그러나 마음 성소를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들로 지어도 성소 주변에는 여전히 보기 흉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육체이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이기적인 본성이다. 이스라엘의 성소가 주변에 이방인들과 우상 숭배자들이 가득한 광야에 세워졌던 것처럼, 마음 성소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 속에 세워진다. 마음 성소가 타락한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늘 성소의 정결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마음 성소의 정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창문과 방문을 잘 닫아서 더러운 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잘못해서 더러운 것들이 들어왔으면 오염이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빨리 밖으로 버리고 청소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 성소의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육체의 죄된 본능을 잘 처리하고 다스려야만 정결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와 죄된 본능은 더럽고 악한 것을 좋아한다. 죄와 부도덕을 사랑할 뿐 아니라 술을 좋아하고 마약을 좋아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건강에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계속해서 몸에 공급해 주면 육체의 죄된 본능은 점점 극성을 부리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말했던 것이다(고전 10:31).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마음 성소 주변에 진 치고 있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우리는 모두 사망의 상태에서 부활하여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죽지 않은 사람은 부활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죽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죽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예수님처럼 죽어야 한다.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 이런 모습으로 죽으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들은 나의 이 희생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저들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단의 괴수로 보지만 믿음으로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죽는 사람은 반드시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올 때, 육체가 나를 죄로 끌고 갈려고 할 때, 이렇게 죽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을 대충 박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난과 시련의 십자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실패한다. 이 문제는 저 사람 때문입니다. 내게도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내게도 자존심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부활도 없고 생명도 없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도 하고 양심의 가책도 받는데, 어쩔 수 없이 죄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 다음과 같은 로마서 7장의 경험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과 생명이 없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예수님처럼 죽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지만, 선을 택하기 원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그 결정을 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 사람은 나의 희생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저 사람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당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4가지 경험 마음 성소가 정결한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까? 바울은 로마서 8장에 그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원치 않는 죄에 끌려다니는 경험을 뼈저리게 했을 것이다. 늘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어쩔 수 없이 죄에 빠지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그런 경험을 토대로 로마서 7장을 실감 나게 기록하였다. 선을 행하고 싶지만 결국에는 악을 행하고 마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드디어 영혼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에게 로마서 전체를 낭독해 달라고 부탁하면, 틀림없이 8장 1절을 가장 크게 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바울의 생애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간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요즘 기독교에서 떠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값싼 간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승리의 약속들이 나온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4) 십자가에서 육체를 못 박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승리의 경험이다. 바울은 1절부터 11절까지 놀라운 승리와 약속들을 나열한 후에, 12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래서 라는 말은 언제 사용하는가? 결론을 말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11절까지 나열한 승리 경험과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12절 이후의 말씀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이고 핵심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과 승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2절부터 바울은 승리할 수 있는 4가지 방법을 순서적으로 설명했다. 12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첫 번째 방법 : 육신에게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모두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빚을 져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대신 죽으셨다. 바로 이것이 빚진 자가 육신(죄된 본능)에게 져서 살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다. 육신에 빚을 졌으면, 육신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빚을 지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3, 14절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두 번째 방법: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데, 영으로 죽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여러 번 해 봤는데 잘 안 되던데요. 자아와 육체의 요구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는지 아는가? 내 노력으로 해서 그렇다. 내 의지로 해서 그렇다. 내 노력과 내 의지로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금욕주의이고 율법주의이다. 나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육체의 요구를 쳐 내려고 애쓰는 것은 잘되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실패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영으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몸의 행실을 죽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에게 큰 빚을 진 자의 심령이 되어야 한다. 빚진 자는 겸손하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두 손을 조아린다. 너무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른다. 이러한 심령으로 성령의 호소를 받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여러 번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했지만, 빚진 자의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항상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 일 수 있었다. 빚진 자의 심령 하에서는 결코 율법주의나 값싼 자유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15절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세 번째 방법: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전에는 주인이 무서워서 떠는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다는 뜻이다. 주인이 무서워서 순종하고 주인이 주는 대가를 기대하고 일을 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사울 이라는 바리새인으로 살 때에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바울은 그때 전혀 빚진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함과 헌신에 대하여 빚을 진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 빚진 자로서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사니 이제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 몰래 숨어서 나쁜 짓을 하면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다. 아버지가 계명으로 금해 놓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달려가서 죄를 고백하면 될 텐데 그 죄를 포기하기 싫고, 또한 포기할 수도 없어서 죄를 꼭 붙잡은 채 아버지 눈치만 살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죄를 포기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다.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늘 원치 않는 죄에 끌려다녔기 때문에 눈치만 살필 때의 무서운 하나님이 이제는 바울에게 아버지로서 느껴지게 된 것이다.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계명과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삶 속에 맺혀지게 되었다. 16절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네 번째 방법: 우리의 경험이 여기까지 오면 그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너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 날마다 성령께서 이런 확신을 주신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놀라운 확신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8장의 서두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 없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 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바울의 복음을 정말 잘못 이해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양자의 영 앞에서 살펴본 로마서 8장 15절의 양자의 영 은 어떤 것일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18절부터 한 말씀씩 살펴보도록 하자. 18절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돼지우리가 좋은 사람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싫은 사람만이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은 소원이 생기게 된다. 탕자는 아버지께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지만,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돼지우리 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께 돌아가기 원하게 된 것이다. 탕자의 마음속에 아버지께 대한 빚진 자 의 심령이 생긴 것이다. 19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는 아들이 되려고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 품꾼이 되려고 돌아왔다. 스스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엎드려 자신을 이 집의 종으로 받아달라고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탕자는 참된 양자의 영 을 받았다. 양자의 영 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왜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될까? 자신이 너무나 엄청난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양자의 영 속에는 무서워 떠는 종의 정신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와 정신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거나 아버지를 배반할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깊이 뉘우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여러분의 영은 양자의 영인가? 아니면 두려워 떠는 종의 영인가? 20절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때부터 제대로 된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부둥켜안는 사이가 된다. 이 말씀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안아 준다. 그래야 아들도 용기를 내서 아버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측은해서 껴안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해서 품에 안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철저하게 빚진 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21절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탕자의 비유 속에는 참된 양자의 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 이라고 하는데도 아들은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감당치 못하겠 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조금 의로운 일을 했고 조금 순종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다. 빚을 탕감해 주신 아버지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늘 넘치지만, 아버지의 희생과 용서로 인하여 늘 겸손한 태도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빚진 자의 심령을 갖게 되는 것이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이다. 부활의 경험이다. 생명을 얻는 경험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어떤가?누가복음 15:24에서 맏아들은 집 떠난 동생이 돌아오던 날에도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맏아들은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완벽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하여 종들에게 명하여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큰아들은 그것을 너무나 싫어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29)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죽으라고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이 없었다. 라는 것이 맏아들의 마음이다. 맏아들의 마음 어디에 양자의 영 이 있는가? 어디에 빚진 자의 심령이 있는가? 아버지의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부자의 정이, 형제의 정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아들인데 속으로는 그 영혼이 썩어 가는 모습이다. 이 말씀이 한국말 성경에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처럼 일했 다고 번역되어 있다. 큰아들은 양자의 영이 아니라 무서워 떠는 노예의 정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면 형벌을 받으니까 노예처럼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환심을 얻기 원했던 것이다. 큰아들은 일한 양에 비례해서 아버지가 관심을 두고 대가를 지불해 주길 기대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노예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행한 헌신과 희생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나에게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이만큼 자비와 친절을 베풀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대가와 공로를 기대하는 마음은 양자의 영 이 아니다. 그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다. 큰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작은아들을 다시 맞이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눅 15:24) 죽은 아들이 부활하여 다시 나타났다. 생명이 없던 아들이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얻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빚진 자의 심령으로 서게 되었다. 드디어 양자의 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기쁘겠는가? 송아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잡아야 했을 것이다. 탕자가 돌아오면 하늘 아버지와 온 하늘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잔치를 베풀며 기뻐할 것이다. 성경은 말세에는 성소가 정결케 되는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단 8:14) 다니엘서 8장에 나오는 2,300주야 예언은 말세에 마음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살아남는 이들 44호 참조). 또한, 그러한 경험을 가져다줄 수 있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 성소는 정결케 되어가고 있는가? 마음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은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반드시 육체가 못 박혀야만 한다. 이것은 힘든 경험이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높은 표준을 따라가기 힘든가? 빚진 자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늘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전하는 기별이다. 건강: 유전자와 협력하는 건강법 운동을 많이 하는 여자는 유방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통계를 입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 UCLA 대학에서 쥐들에게 유방암을 일으키는 발암 물질을 주사한 다음, 어떤 쥐는 운동을 시키지 않고 어떤 쥐는 운동을 시키면서 결과를 지켜보았더니 운동을 시킨 쥐들의 유방암 발병률이 낮았다. 그런데 동일한 실험을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시했더니 그 결과가 반대로 나왔다. 그래서 같은 실험을 제3의 장소인 예일 대학에서 해 보았더니 UCLA에서 했던 결과와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결과들을 토대로 시카고 대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매우 흥미 있는 실험을 하였다. 우선 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그룹은 먹기만 하고 운동은 하지 못하게 했다. 두 번째 그룹은 쳇바퀴를 넣어 주어서 운동을 하고 싶을 때마다 쳇바퀴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의 전체 운동 시간을 계산해 보았더니 하루에 2시간 정도 운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운동 기구를 넣어 주고 2시간씩 고정적으로 운동하게 하였다. 두 번째 그룹의 쥐들처럼 똑같은 시간 동안 운동을 시킨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유방암 검사를 해 보았더니 결과는 두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서 유방암 발병률이 가장 낮았다. 역시 운동이 유방암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은 유방암의 발병률이 가장 높은 쥐들은 세 번째 그룹에 속한 쥐들이었다는 점이다. 운동 기구에 올려놓고 고정적으로 매일 2시간씩 운동을 시킨 쥐들이 암에 가장 많이 걸린 것이다.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억지로 운동을 했는가, 아니면 자유의사에 따라서 운동을 했는가에 따라 놀라운 차이가 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생명의 조물주인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가 지적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함으로써 교회에 다니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해야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하거나, 두려움으로 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피조물들은 운동하는 목적과 동기와 방법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 먹고 마시는 모든 문제가 이러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억지로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억지로 뛰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뛰는 사람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왜 동일한 시간 동안 운동하고, 동일한 식품을 먹어도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까? 왜냐하면 세포와 유전자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와 목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뛰는 것이 운동이 될 수도 있고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체 속에 생명의 법칙을 새겨 놓으셨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법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면 건강을 축복으로 받는 것이고, 거절하거나 무시하면 주어진 축복을 잃어버리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새겨 놓으신 생명의 원칙은 먹고 마시는 것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원한, 미움, 증오, 거짓과 같은 것을 마음에 가득 담은 채 건강해지기 위해서 억지로 운동하고 건강식을 하는 것은 생명의 법칙에 위배된다. 그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건강에 결정적인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기를 쓰고 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것이 생명의 법칙에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큰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보다 나보다 힘든 상황에 있는 환자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몸과 마음의 치료에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세포와 유전자는 우리의 진심을 인식한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지, 자비가 있는지, 동정이 있는지 알기 때문에 세포와 유전자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와 협력하여 움직이게 된다. 운동을 해도 억지로 하거나 짜증을 내면서 하면 효과가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건강식을 해도 감사와 풍요로운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 효과가 절감될 수밖에 없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7:22)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창조 교실: 변신의 귀재 카멜레온 색깔을 주변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마치 투명 인간처럼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카멜레온이지요. 도마뱀류로 나무 위에서 살며 긴 혀로 먹이를 잡아먹는 카멜레온은 빨강, 노랑, 초록 등 몸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꿔 변신의 귀재로 불리지요. 큰 머리에 같은 길이의 네 다리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릴 수 있는 강한 꼬리를 가지고 있으며, 평균 몸길이는 20~30cm입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색을 사용합니다. 보호색이란 몸 색깔을 주위 환경이나 배경의 색깔과 비슷하게 해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는 동물이나 먹이가 될 동물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멜레온은 몸 색깔을 어떻게 바꿀까요? 신기하게도 카멜레온은 피부에 여러 종류의 색소를 가지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 색깔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결은 바로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색소포에 있습니다. 색소포는 피부에 있는 색소 주머니로서, 주위 환경에 따라 그 크기가 변합니다. 푸른색을 띠던 카멜레온이 노란 바탕으로 움직이면, 푸른 색소포의 크기는 작아지고 노란 것의 크기가 커집니다. 그러면 카멜레온의 몸 색깔은 노란색으로 탈바꿈하게 되지요. 또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거나 다른 카멜레온에게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싶을 때 몸 색깔을 바꾸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카멜레온 종류는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갑자기 붉게 변하지요. 수컷들이 다투고 나서도 색이 바뀌는데, 승자는 이겼다는 표시로 밝게, 패자는 어둡게 만든답니다. 이 밖에 기온이나 태양빛의 세기도 영향을 끼칩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밝아지고, 햇빛이 강한 한낮에는 어두워집니다. 카멜레온에게 그렇게 여러 가지 색깔을 띨 수 있는 색소포를 넣어 주신 분은 누구실까요? 아름다운 색깔을 좋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얼굴에 늘 밝은 빛을 띠고 웃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신앙: 1부 - 재림 전에 이루어져야 할 영혼의 정결 대속죄일이란 단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좀 생소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에 몇 번 기록되어 있을 뿐인,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듯한 이 대속죄일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그 대속죄일의 기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며, 대속죄일의 경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속죄일과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대속죄일과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대속죄일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흥미 있는 주제를 함께 연구하여 신앙에 유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에미 카미켈의 저서 중에 나오는 의미 깊은 예화가 하나 있다. 그가 한번은 인도의 대장장이에게 당신이 금을 연단할 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지혜로운 그 대장장이는 대답하기를, 예, 금 속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연단합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이느냐를 가지고 결정합니다. 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재림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시대의 징조와 예언은 재림의 임박성을 알려 주고 있다. 자원의 고갈과 지구 수명의 단축 그리고 자연의 파괴 등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움에 대한 경종을 울려 주고 있으며,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지구 상의 경악할 만한 문제들은 이 지구의 죄 역사가 빨리 끝나고 새로움을 입어야 함을 주지시켜 주고 있다. 이런 시점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 감격스럽고도 두려운 재림의 날, 곧 여호와의 날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성경의 마지막 예언의 성취와 종말론적인 접근을 접어두고라도, 인간은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서 사건과 사고가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며,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이 예수님을 만나는 재림의 날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연단된 순금 속에 얼굴이 투명하게 그대로 비치듯이, 당신의 표정에, 언어에, 억양에, 행동에, 삶에 예수님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가? 성경은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습 속에 주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준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재림 전에 이루어져야 할 정결 사업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와 중보 사업을 마치고 재림하시기 전에, 각 영혼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곧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결정되기 전에, 우리들은 영혼의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사업을 마치신 후,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 22:11)는 선고를 하시면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가 더 이상 없고 그분의 중보 사업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직 하늘에서 중보 사업이 마치기 전인 은혜의 시간에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영혼의 정결함을 입고, 성령의 충만하심과 인침을 받으며, 주님의 임재 속에서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 성소에서 예수님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서야 한다. 곧,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품성은 피 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과 그들 자신의 꾸준한 굴복과 협력으로 말미암아 죄악과의 투쟁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회개 기도가 아직 주님께로 올라갈 기회가 있는 동안, 회개한 사람들의 죄를 위한 중보가 드려지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혼을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늘의 기록책이 펼쳐지면서 심판이 시작될 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우리의 대언자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생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건을 제시하신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리고, 모든 사건이 세밀히 검토될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 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구약의 표상적인 제도에는 매우 흥미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대속죄일이다. 이 대속죄일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속죄와 중보 사업 그리고 심판의 끝과 영혼의 정결함을 입는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표상으로 주어진 것이다그러므로 우리가 대속죄일에 대하여 연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더 상세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마지막을 위해 더 잘 준비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자세하게 대속죄일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자. 신앙: 2부 - 요약하여 연구해 보는 성소 제도 대속죄일의 개념을 이해하고 공부하려면 성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성소 제도를 떠나서는 대속죄일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성소 제도 구약의 성소는 왜 생겼는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약속의 자손 메시아의 출현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하시기 위해 그들을 구원하시고 출애굽시키셨다. 또한,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동행하시고 친히 인도하기를 원하셔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 속에 그분의 모습을 감추시고 그들과 함께 험한 여정의 길을 같이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과 더 직접적으로 교통하고 그들 중에 상주하기를 원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거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성소를 건축하게 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친히 성소의 구조를 보여 주시고, 그 크기와 형태와 사용할 재료들과 그 안에 비치해야 할 모든 기구에 대하여 상세한 지시를 해 주셨다. 손으로 지은 성소는 참 것의 그림자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히 9:23,24) 이었다. 이 땅의 성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후 죄인을 위하여 봉사하기로 되어 있는 하늘 성소의 축소판이었다. 2. 성소의 필연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한 일환으로 성소가 지어졌지만, 성소 제도가 반드시 있어야 했던 필연성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들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고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계시와 교육이 인간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구원의 청사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간의 구속 사업을 어떻게 이루고 계신지에 대한 정확한 청사진이었다. 즉, 성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또한 어떻게 우리가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는 자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성소의 모든 기구와 재료와 모형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예수께서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구세주의 역할을 담당하시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 제도를 통하여 죄의 악함을 깨닫고, 장차 오실 구세주를 믿는 믿음으로 죄를 해결하기를 원하셨다. 또 매일 드리는 제사뿐만 아니라, 일 년에 한 번 그 한 해 동안의 모든 죄를 속하는 예식이었던 대속죄일의 의식과 표상을 통해서 어떻게 죄의 정결함을 받으며, 어떻게 죄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는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구속의 방안으로서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 3. 성소 개요 성소 뜰: 예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역을 상징해 주는 제도이다. 성소 뜰에는 희생 제물을 죽여 태우는 번제단이 있었고, 씻는 물두멍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죄의 용서와 씻어 주심을 상징한다.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의 경험을 상징한다. 성소: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첫째 칸 성소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고 그 희생의 유익을 믿는 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시는 사역을 의미한다. 이 성소 안에는 금 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었는데, 이 기구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를 용서하시는 일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인도해서 진리대로 사는 자가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교육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 첫째 칸은 신앙의 경험에서 성화 를 상징한다. 지성소: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었고, 법궤 위에는 시은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 영광의 빛인 쉐키나가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죄인이 성소의 과정들, 즉 성소 뜰의 칭의 경험과 성소 안의 성화 경험들을 통과하여 지성소의 하나님 영광의 광채인 쉐키나 앞에 설 수 있게 되도록 고안된 것이 성소 제도의 최종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쉐키나 라고 불리는 영광스러운 빛으로 지성소에 임재하셨으며, 죄를 용서받고 정결해진 인간만이(죄를 회개하고 속죄한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뵈려면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며, 완전한 구원이란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죽지 않고 영원히 같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 앞에 나아가기 위해,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기 위하여 죄는 어떻게 용서받는 것이며, 결국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결론이다. 신앙: 3부 - 대속죄일이란 무엇인가?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죄하고 정결하게 함을 입는 날이었고, 일 년 동안의 삶을 종결짓는 엄숙한 심판의 날이었으며, 이 날의 판결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생명이 유지되느냐, 잃어버리느냐를 결정하였다. 대속죄일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낯선 단어일 것이다. 아마 어떤 독자들은 왜 월간지의 많은 페이지를 대속죄일 이라는 구약의 케케묵은 의식에 대하여 할애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대속죄일은 재림이 가까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으며, 대속죄일의 경험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으려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대속죄일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 월,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 일 차 속죄할 것이니라. (레 16:29,30,34) 1) 대속죄일 개요 구약의 성소 제도에서는 매일 드리는 성소 봉사와 일 년에 한 번만 드리는 지성소 봉사가 있었는데,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이 지성소 봉사를 대속죄일이라고 부른다. 대속죄일은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죄하고 정결하게 함을 입는 날이었고, 일 년 동안의 삶을 종결짓는 엄숙한 심판의 날이었으며, 이 날의 판결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생명이 유지되느냐, 잃어버리느냐를 결정하였다.레위기 16장을 읽어 보면 대속죄일에는 두 가지 유형의 정결케 하는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물건들, 즉 거룩한 곳과 단과 같은 성소와 기구를 정결케 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16,19,30절). 거룩한 곳, 성소가 정결케 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성소 자체나 기구에 어떤 죄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 로 인하여 더럽혀진 것들을 정결케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16절). 성소와 번제단이 부정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들 때문이었고, 이러한 부정은 한 해 동안 매일 드리는 봉사를 통하여 쌓여 왔다.매일의 제사에서 아침저녁으로 양이 희생되어 그 피가 번제단 주위에 뿌려졌는데, 죄인이 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 때에 상징적으로 죄는 죄인에게서 양으로 옮겨졌으며,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7번 뿌릴 때에, 상징적으로 죄는 다시 성소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의 의식은 일 년 동안 성소 안에 쌓여 온 모든 죄들을 도말하여 버림으로써, 성소와 제사장과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예식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이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성소와 또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갔다. 바로 지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한 해 동안의 죄를 결말짓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제단과 성소에 뿌려진 피로서 남아 있는 그들의 죄의 기록이 하나님 앞에서 재검토되는 최후 심판의 날이었다. 대제사장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권속들을 위하여 먼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시은좌 동편과 그 앞에 일곱 번 뿌리고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할 수 있었다. 그다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 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 였다(레 16:15,16). 2) 두 염소 대속죄일에는 특히 두 염소 새끼를 성막 문으로 끌어와 제비를 뽑는 일이 있었는데,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 여 뽑았다. 1. 여호와의 염소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로 드려졌다. 대속죄일에 속죄제로 바쳐진 여호와의 염소 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 해 동안 바쳐진 모든 제물은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곧 죄 없는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 자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대속죄일의 염소 안에서 그분은 정결하고 죄 없는 자,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서 상징되었으며, 그것은 죄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했다. 왜냐하면 그 염소의 피는 죄가 전가된 피가 아니고, 깨끗하게 하는 역할, 곧 성소와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죄가 전가되지 않은 이 깨끗한 대속죄일의 피로 드디어 상징적으로 모든 죄의 기록이 깨끗이 씻어 도말 되는 것이었다. 대제사장은 이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시은좌 동편과 그 앞에 일곱 번씩 뿌리고, 나오면서 성소의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뜰로 나와서는 번제단 주위에 뿌리고, 그 네 모퉁이 뿔에 발랐다. 그렇게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의 기록들을 다 말끔히 씻어 도말하시는 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 아사셀의 염소 그다음에, 지성소에서 모든 의식을 다 끝마치고 나온 대제사장은 밖에 묶여 있는 아사셀 염소 위에 안수를 통하여 모든 죄를 옮기고 전가하는 의식을 행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모든 죄를 원래 죄의 창시자였던 마귀에게 옮기는 것을 뜻했다. 모든 죄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하고 죄를 도말한 경험이 있는 자들만 자신들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떠넘길 수가 있었다. 죄를 전가한 아사셀 염소를 정한 자 의 손에 맡기어 광야로 끌고나가 죽게 만드는데, 이것은 천년기 동안 황폐한 지구에 홀로 갇혀 있다가 죽게 될 사단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아사셀 염소 는 마귀 를 상징하는 것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아사셀 염소 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교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적인 해석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아사셀 염소의 의식은 대속죄일의 의식이 끝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 의식을 끝으로 드디어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 끝마치게 된다. 신앙: 4부 - 대속죄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성소 제도의 매일 제사에서, 죄인이 죄를 지으면 희생 제물을 통하여 용서함을 받았고, 제사장이 그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뿌렸다. 그런데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죄를 고백했을 때에 그들의 죄가 용서를 받아 왔다면, 왜 대속죄일 날 다시 죄를 조사하고 씻어야 하는 일이 필요했을까? 여기에는 매우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다. 대속죄일의 깊은 의미들을 함께 살펴보자. 1) 휘장에 남아 있던 피와 대속죄일 성소 제도에서, 제사장이 죄인의 죄를 전가한 희생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릴 때에, 아침저녁으로 드려진 번제의 피를 단 위에 뿌림으로, 또 번제단 뿔과 분향단에 희생 제물의 피가 발라짐으로, 백성들 죄의 기록이 성소에 남아 있었다. 죄인은 용서를 받았지만, 그 죄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대속죄일까지 성소와 휘장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고 쏟고 바른 기구들을 정결케 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죄를 고백했을 때에 그들의 죄가 용서를 받아 왔는가? 그렇다. 그들은 확실하게 용서를 경험해 왔다. 그렇다면 왜, 대속죄일 날 다시 죄를 조사하고 씻어야 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 이유는,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조사하는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죄의 용서가 조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의 표상에 따른 상징적인 의미를 분석해 보면, 죄인이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정말 그 죄가 그 사람에게서 끊어져 나갔는지 조사하는 일이 필요함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즉, 그 죄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조사하는 심판과 모든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용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조사하는 심판의 날 - 대속죄일 대속죄일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또 버리지 못한 죄가 있는지 자신들을 철저히 살피고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 어떤 지파나 종족이나 가족 중에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가진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돌로 침을 당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었다. 이 날에, 진실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또다시 바치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들의 회개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하여 대속죄일에는 전에 이미 용서를 받은 죄들의 기록들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반면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영원히 끊어짐. 을 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소는 한 해 동안 쌓여온 죄들의 기록들로부터 정결케 함을 얻었다. 그렇게 되면, 대속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 죄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대속죄일 날에 드리는 제사와 의식들은 하늘 지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 사업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죄를 기록에서 깨끗하게 지우시기 전에 각자들의 참된 상태를 살펴보시는 심판을 진행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가 정말 어떠했는지를 조사하시는 것이다. 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마음과 품성이 하나님의 계명과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기 전까지 항상 조건적인 것이다. 죄의 창시자였던 루스벨로 인해 일어난 선악 간의 전쟁과 죄가 빚어 놓은 결과가 너무 비참하고 악하기 때문에, 우주에 다시는 죄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어 하늘에서 하나님과 천사와 함께 살 사람들은 죄를 해결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책을 열어 보고 비교하여 검사하는 심판은 누가 구원을 얻어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인지 성도들을 조사하는 과정인 것이다. 3) 심판의 필요성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왜 심판이 필요한가? 그것은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공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이며, 그 사람이 정말 하늘에서 살 적합성을 갖추었는지를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우신 심판을 우주 앞에 펼쳐 놓으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또한, 죄와 반역의 역사를 마감하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품성을 조사하여 확정 짓는 일이 필요하다. 그 죄인이 정말 죄를 미워하여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지 않는지, 다시는 그런 죄를 지을 마음이 정말 없어졌는지, 또 그런 죄를 여전히 마음에 품고 살 의도가 완전히 없어졌는지, 그리고 그 죄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진정으로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죄인의 마음이 정말로 거듭나서 새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 안에 항상 거하지 않으면 옛날 죄된 생활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회개하였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어 죄의 습관으로 돌아가서 타락할 수 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한 것같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죄를 품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우상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대속죄일 날, 즉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기 전에 누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먼저 조사하시는 것이며 심판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행함으로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들이 진실로 회개한 것인지,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참된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시는 과정이 심판이며, 그 심판을 통과하면서 정말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늘에 살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며, 의롭고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 5부 - 대속죄일과 죄의 도말 대속죄일을 연구하다 보면, 마지막 결론은 죄의 문제, 곧 죄의 해결 방법인 죄의 용서와 도말 문제에 귀결되게 되어 있다.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죄의 용서에 대하여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리스도인들이 잘 아는 주제이지만, 도말은 조금 생소한 주제인 것 같다. 혹자는 죄의 도말에 대하여 잘 몰라도 구원 얻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우리의 죄가 어떻게 도말 되는 것인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죄가 도말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논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중요성이 더한 것이다. 죄의 도말 문제는 대속죄일과 직결되는 일이며, 마지막 세대의 남은 백성들이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경험이다. 대속죄일에 죄를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없이는 죄의 도말이 있을 수가 없고, 죄의 도말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의 죄의 역사를 끝내실 수가 없다. 죄의 도말 대속죄일 날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 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속죄를 상징하는 염소의 피로 모든 죄와 성소의 기구에 뿌려졌던 죄의 기록들이 깨끗하게 씻어졌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애에서도 그 경험은 적용된다. 성경은 죄의 도말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다윗은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2,9) 죄의 도말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두 가지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죄의 용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마치 우리가 그러한 죄를 전혀 짓지 않은 것처럼 잊어버리시고 깨끗이 씻으시는 일반적인 의미이다. 두 번째는 좀 더 구체적이고 마지막 최종적인 구원의 역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들을 죄의 기록책에서 지우시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뜻한다. 성소 제도와 그것에 나타난 기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이다. 1. 용서와 도말의 차이 죄의 용서 와 죄의 도말 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성소 제도를 통해서 고찰해 보면, 죄의 용서는 매일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으며, 죄의 도말은 매년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용서는 일 년 내내 성소의 봉사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이며, 죄의 도말은 대속죄일 날 한 번 단행하는 최종적인 죄의 용서를 가리킨다. 자, 그러면 실제적인 경험 속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죄의 용서란, 우리가 평상시에 짓는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이름 밑에 용서받았음. 이라고 기록을 해 두시는 것을 말한다. 심판을 거쳐 우리의 진실함과 계명을 지키는 성품이 드러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기록을 아직 완전히 지우시지 않고 기록책에 남겨두시되, 우리의 진실한 회개를 보시고 순간순간마다 지은 그 죄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분명하게 영원히 사유하여 주시는데 그 단계를 죄의 용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죄를 회개했던 때와 똑같이 유지하여서, 심판 날에 서면서 변함없이 죄를 용서받고 싶은 똑같은 진실한 마음과 동기를 가지고 있을 때, 결국 우리가 받아 온 그 용서들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지만,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다시 죄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망의 길을 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의 완전한 도말, 즉 기록책에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삭제해 버리시는 일을 심판 날까지 미루시는 것이다. 조사 심판과 죄의 도말은 주님의 재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에 언급된 것과 같이 죽은 자들은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의 사건이 심리되는 심판이 마치기 전까지는 그들의 죄가 도말 될 수 없다. 사도 베드로는 죄의 도말에 대하여 말하기를,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19)라고 말함으로 유쾌하게 되는 날, 곧 죄의 도말이 먼저 있고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심판이 마치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때 모든 사람에게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2. 죄의 도말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대속죄일 날에 치러지는 의식들에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가 정결하게 되고 깨끗하게 도말 되어 없어졌던 것처럼, 죄의 도말은 마지막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가 언제 도말 되는가? 죄의 도말은 맨 마지막에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다 끝난 후에, 한 번에 단행되는 하나님의 죄를 삭제하시는 역사이다.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죄 도말의 때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영어로는 죄의 도말임)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19,20) 베드로는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돌이켜 죄와 악에서 떠나면 죄 도말의 경험이 우리에게 이르러 온다는 조건을 말하면서, 그 시기를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유쾌하게 되는 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오는 유쾌하게 되는 날 이 무엇인가? 그날은 곧 늦은 비 성령을 받게 되는 날이다. 이른 비의 경험을 통하여 모든 죄를 승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을 고정하기 위하여 내리는 늦은 비 성령, 곧 인침을 받게 하는 늦은 비 성령을 받는 날이 유쾌하게 되는 날인 것이다(이른 비와 늦은 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살아남는 이들 월간지 122호를 참조하세요). 한국어로 유쾌하게 되는 날 이라고 번역한 단어를 영어에서는 the time of refreshing 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말은 다시 새롭게 되는 때 라는 의미로서 우리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온전하여진 기능과 용량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상태로 다시 새롭게 되돌아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판을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과 생애가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조화되는 삶이라는 것이 입증될 때, 그 죄에 대한 도말이 되고 그 죄의 기록은 영원히 삭제되는 것이다. 3. 죄 도말의 과정 죄 도말의 과정은 무엇이며, 실제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죄를 도말하는 것은 죄의 기록을 말끔하게 지워서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앞에서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실 수가 없는 분이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버리기로 약속하셨고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죄의 책에서 우리 죄의 기록을 지워 버리실 때에는 우리 마음과 두뇌 속에서도 죄의 기억을 지우셔야 한다. 그러나 하늘의 기록을 지울 때에 이 땅에 있는 장본인의 협력과 동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실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진실로 회개함과 또한 그 죄를 미워함과 또다시 그러한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그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성품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므로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거나 죄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 성품이 준비된 것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 대한 심판을 끝내시고 그의 모든 죄를 책에서 도말해 버리시는 것이다.하늘 기록에서 죄를 지워 버리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두뇌 속에서도 죄의 기록들을 다 지우시게 되는데, 그리하여 우리가 지은 죄들에 대하여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쾌하게 되는 날을 경험하게 된다. 일평생 동안 보고 들은 모든 기억이 두뇌에 저장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한다. 죄에 대한 도말이 가능하다는 실례로, 성경에 나타났던 바벨탑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반역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반역과 죄가 급속하게 세상에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갑자기 언어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그리하여 바벨탑을 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뇌 속에서 지금까지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의 기억을 지워 버리시고, 그 대신 다른 언어의 프로그램을 넣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기억들과 개성, 품성에 관한 기억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건드리지 않으셨다. 그러한 사실로 보아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릿속에 이루시는 창조의 능력을 실감할 수 있고, 죄 도말의 가능성을 본다. 신앙: 6부 - 예수님의 주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1) 하늘에도 성소가 있다 예수님의 주소와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대답은 히브리서를 연구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 이 구절들을 보아 우리가 알아 낸 사실은, 하늘에도 성소가 있다는 사실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현주소는 하늘 성소라는 것이다. 또 한 구절을 보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쫓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 8:5)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 성소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성경은, 예수께서 지금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의 피를 가지고 중보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또한,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는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 모습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3,24)라고 묘사되어 있고,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계 1:12-13)로 표현되어 예수님께서 성소에서 일하시는 모습이, 그리고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니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3-4)라는 기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몇 가지의 성경 구절들만으로도 하늘에 성소가 있으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한 다음에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곳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지상 성소 제도는 폐지되었다. 희생 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대속물로 바치시므로, 모형이었던 성소 제도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후부터는 지상에서 올려 보낸 인간들의 죄 고백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쌓이게 되었다. 하늘에는 죄는 없지만, 인간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하늘 성소의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대속죄일을 통하여 성소를 정결하게 했듯이, 지구 역사가 끝나는 종점에도 하늘에 있는 죄에 대한 기록을 씻음으로써 하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려고 역사하고 계시며, 누가 진심으로 회개하여 죄를 버렸고, 또 누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진짜 성도인지 하늘 성소에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2) 하늘에서는 언제 심판이 시작되는가? 그렇다면 언제 하늘에서 심판이 시작되는가? 사도행전 17장 31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시간을 이미 작정해 두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재강림과 심판을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심판과 예수께서 오시는 재림의 날을 분리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의 시간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경의 예언서 중의 하나인 다니엘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단 7:13)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시는 장면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어떤 일을 하려고 만나시는 것일까? 무슨 목적으로 만나시는 것일까? 몇 절 앞으로 가서 다니엘 7장 9, 10절을 읽어 보면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된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기록책을 펴고 살피는 심판을 하려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시는 장면이다. 사단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고소하며 반역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문제에 이의를 제시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고소와 이의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우주 앞과 천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셔야만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고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자를 용서하시고, 그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얼마나 공정하고 의로운 일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 7장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모여서 책들을 펴 놓고 심판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하늘 심판의 시기에 대한 시간 예언은 그다음 장인 8장에 나와 있다. 이 중요한 심판의 때는 바로 다니엘서 8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2,300주야 예언에 나타나 있다. 함께 연구해 보자. 1. 요약하여 연구하는 2,300주야(일) 예언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단 8:14) 계시를 받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난처해하는 다니엘에게, 천사는 17절부터 2,300주야(일) 예언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천사는 이 계시가 정한 때 끝 에 관한 계시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말세에 관한 계시라는 뜻이다. 성소가 정결해진다는 의미는 심판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고, 그 심판이 시작되는 시기는 말세라고 이 예언은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말세가 언제인가를 알고 나면, 하늘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자, 2,300일 예언이 말하는 말세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자. 2,300년 예언의 시작점 2,300년의 예언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그 시작점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단 9:25)이다. 그러므로 2,300년 예언의 시작점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이 다시 중건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허락하는 명령을 내렸던 해는 아닥사스다 왕 7년, 즉 BC 457년이다(에 7:7,13). 사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은 세 번 내렸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에는 성전뿐만 아니라 성읍과 도시들도 재건하라는 완전한 중건령이었다. 이 명령은 거리와 해자를 이룰 것이며 (단 9:25)라는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다. 예수님의 초림과 70주일 네(다니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7이레(7주일)와 62이레(62주일)가 지날 것이요. (단 9:24,25) 가브리엘 천사는 유대 민족을 위한 유예의 기간을 70일, 곧 490년이라고 말했다(예언 상의 1일은 1년이므로, 70x7=490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 , 즉 그리스도가 나타나기까지 62이레와 7이레를 지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62이레(주일)와 7이레(주일)는 62에 7을 더하여 69주일이 된다. 69주일은 며칠인가? 483일이다(69주일x7=483일). 예언 기간의 원칙은 1일이 1년이므로 483일은 483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시작하여 483년 후에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예언대로 AD 27년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다.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2,300년 예언의 첫 부분인 70주일 예언 속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정확한 해가 나타나 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단 9:26,27) 가브리엘 천사는 62주일 후, 즉 서기 27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끊어져 없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실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1 week)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week)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27절) -여기서 이레(week)의 절반 은 7년의 반이므로 3.5년, 즉 3년 반이 됨.- 그리하여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서기 27년 가을부터 3년 반 후인 서기 31년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이다. (2,300일 예언의 자세한 공부는 월간지 44호를 참고하세요) 말세의 시작 2,300년에서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은혜의 기간이었던 490년을 빼고 나면 1,810년이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의 시작점인 BC 457년부터 시작해서 유대인들을 위한 은혜의 기간인 490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그 후에 1,810년을 더 올라가면 1844년이라는 해에 도달하게 된다. 이 해가 바로 2,300일의 예언이 끝나는 해, 바로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 고 예언된 해였다. 이 다니엘서 8장 14절의 예언 때문에 1830년도 말기부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미에서도 예수께서 1844년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의 적용을 잘못함으로 크게 실망하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된다는 말, 즉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실 날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2. 성소 정결의 의미 그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던 그리스도인들은 2,300년 예언이 마쳐지는 종점인 1844년에 하늘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사업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이 불로 정결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있는 죄의 기록들이 도말 되어 정결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시작을 가리키는 2,300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 는 말씀을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날 사건, 즉 예수께서 재강림하심으로 지구가 구속함을 받는 사건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 다니엘 8장 1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어 모든 죄를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온 모든 죄의 고백들을 정리하신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의 생애에 나타나는 그들의 회개와 고백의 진실성을 심판하여, 의인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기록을 하늘 기록책에서 영원히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소를 정결케 한다는 말의 정확한 성서적 의미는 말세, 곧 세상 끝(재림 전)에 즈음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과 공의로우신 판단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애와 성품을 심판하셔서 그들의 죄를 하늘 기록책으로부터 완전히 도말해 버리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300주야까지니 그때야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는 말은 그때에 가서 심판하리라. 는 뜻이다. 이 세상은 2,300년의 예언 기간이 끝나면서 완전히 종말의 때에 접어들게 되었다. 2,300년의 예언은 온 인류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게 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는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 14장 7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신앙: 7부 - 현대의 대속죄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지금 하늘에서는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대속죄일 날, 즉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기 전에 누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조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셨던 비유들에도 심판에 대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왕의 혼인 잔치에서의 예복의 비유가 그중 하나이다. 비유를 보면, 이미 초청받아 앉아 있는 자들에게 왕이 들어와 그들이 예복을 입고 있는지를 조사하였다(마 22장). 예복을 입고 들어오지 않은 자는 밖으로 내어 쫓김을 받아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엄숙한 시대이다. 언제 우리 각자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1) 심판은 재림 전에 있다 요한복음 5장 28, 29절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심판이 재림 전에 있을 것에 대한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성경은 재림 때에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들을 나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재림 전에 누가 구원을 받을 사람인지 이미 결정되는 것이다. 하늘 성소에서 우리 죄의 고백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던 예수께서 하시는 심판이 그 어느 날 하늘에서 종결될 때,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는 선고가 내려짐으로써 모든 인류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계 22:11). 아직 심판이 종결되지 않았지만, 구원을 위하여 각자가 선택할 결정의 시간이 급속히 자나가고 있다. 예수께서 말세를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우리는 심판이 재림 전에 있을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노아의 때에 은혜의 시간이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던 때에 마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일주일 전인 방주의 문이 닫히던 때에 종결된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심판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질 것이다. 은혜의 시간이 끝나는 것을 지구 상의 어떤 누구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지만, 각자의 운명은 그때 영원히 고정될 것이다. 비가 오기 일주일 전 노아가 방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지켜보고 서 있던 모든 조소하던 사람들과 무관심하던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처럼 계시록도 죽은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 (계 20:12)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심판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여야 할까? 대속죄일에 정결하게 함을 받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들을 살펴보며, 우리도 영혼의 정결을 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도록 하자! 2) 대속죄일에 한 일 1.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 구약의 이스라엘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레 16: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레 23:29) 대속죄일에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는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그날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당하였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은 죄에서 정결케 되는 일과 관계가 있었다. 속죄 사업이 진행될 동안 각 사람은 그의 영혼을 괴롭혀야 하였다. 모든 일을 중지하고 온 이스라엘 회중은 기도와 금식과 마음의 깊은 반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그날을 보내야 하였다. 즉,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지 스스로 검사하였던 것이다. 마음을 살피고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일이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이었는데, 영어의 뜻은 afflict your soul 이다. 현대의 영적 이스라엘 대속죄일의 경험은 지나온 일 년 동안 자기가 지어온 죄에 대하여 다시 스스로 괴롭게 하고 스스로 슬퍼하는 경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소 제도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대속죄일의 시대이다. 지금은 임박한 재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나간 죄악들을 펴서 마음속으로부터 내어 보내야 하는 시기이다. 이 일은 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가 생겨야 가능한 일인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이해하게 되어야 죄를 버릴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과거의 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생길 때에 진정한 고뇌가 생긴다. 이것이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이다. 이 경험은 현대의 대속죄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하는 경험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자들이 겪어야 할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통과한 자들만이 흠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1,5) 대속죄일의 경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이 경험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3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라고 기록하였다. 그 말은 죄인들이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고 그 죄의 책임을 아사셀 염소, 즉 마귀에게 전가시키기 전에, 그들이 일 년 동안 회개하여 온 그 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일이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 바로 대속죄일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영혼을 살피는 일, 그리하여 마음을 괴롭게 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일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머리속에 잠재 해 있는 죄의 습관과 그 성질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생기는 일이다. 이 경험에 대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겔 36:31) 죄를 증오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밉게 보는 일이 생길 때에 우리가 죄로부터 정결케 될 수 있다. 그런데 죄를 미워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 죄를 미워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10) 2. 아무 일도 하지 않음 구약의 이스라엘 대속죄일에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금식했다. 즉, 영혼과 마음을 살피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일을 금지하였다는 의미이다. 현대의 영적 이스라엘 현대의 대속죄일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생계를 위해서 힘써야 하는 일은 인간에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고 참된 믿음 생활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일 - 직업이나 종사하는 일, 계획하는 일 등을 끊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또한 현대의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건강식을 말한다. 몸에 해로운 음식, 부정하고 피를 더럽히는 음식들을 제하고, 건강 개혁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면서 오늘날 우리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표상적 의식에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봉사를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써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것같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은혜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오늘날, 죄를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괴롭게 해야 하며 심각하고 철저하게 마음을 살펴야 한다. 하늘 성소에서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 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이 완성될 때에, 주님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다시는 그 똑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는 일을 그쳐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그 죄를 사랑하여 품는 일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심판의 사업이 마치게 되면 모든 사람의 운명은 생사 간에 결정될 것이다. 지금은 은혜의 시기이며 구원받을 만한 때이다. 심판은 지금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죽은 자로부터 시작된 이 심판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얼마나 신속하게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건이 취급될지 아무도 모른다. 엄숙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온 생애가 드러날 것이다. 은혜의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기 조금 전에 마쳐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의 일을 미리 내다보시고 요한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1,12) 기사를 마치면서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할 중대한 질문들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언제 하늘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우리 생애의 모든 기록들을 펼쳐 놓고 나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과연 진심으로 회개하였는가? 우리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드렸는가?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며 죄를 미워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변호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나는 과연 예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사랑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자신을 그분께 연합시키기를 초청하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그분의 능력에, 우리의 무지를 그분의 지혜에, 우리의 무가치함을 그분의 공로에 연합시키기를 간청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심판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든 죄를 버리고 회개한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진정한 회개와 참회 그리고 속죄하시는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죄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은 우리로 죄를 이기게 하고, 우리의 죄를 도말하게 하기에 넉넉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이 마지막 대속죄일을 위하여 온전하게 준비되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린다. 질문과 답변: 성경으로 성령을 이해한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 (고전 2:10,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 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 부인으로 꼴 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서는 안 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구제와 봉사를 통해서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이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은 생애의 빛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제16호를 무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미국 1-877-704-1004 한국 070-7569-2300 캐나다 416-431-37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