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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되찾아야 할 '예수운동'의 원형
민들레 / 박 충 구(전 감신대 교수) 2024.06.22 14:18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이 또 하나의 역작을 냈다. 저자는 신약성서 학자로, 이번에 낸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 (논형출판사 2024)은 예수에 대해 연구해온 내용을 종합한 것이라 여겨진다. 저자의 학문 여정은 한국에서는 철학, 독일에서는 유럽 신학, 그리고 중남미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 주창자 소브리노(Jon Sobrino) 문하로 해방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먼저 해방신학을 약술하고 책 내용을 소개한다.]
1. 해방신학자의 예수연구 역작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
1960년대 말부터 일어난 해방신학 열풍은 신학 역사에 은폐되어 있던, 교회가 세속정치 및 경제권력과 거룩하지 못한 야합을 해온 역사적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 열풍은 구띠에레즈(Gustavo Gutierrez), 보프(Leonardo Boff), 소브리노(Jon Sobrino),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등에 의해 남미 해방신학으로 불리어졌고, 그 여파는 유럽 미국에서는 정치신학과 여성해방신학으로,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잭(A. Bosack)의 반인종차별 해방신학으로, 인도에서는 달리 신학, 일본에서는 천민신학, 한국에서는 민중신학, 스리랑카에서는 피에리스(A. Pieris)에 의해 아시아의 가난과 영성을 다룬 아시아 해방신학으로 이어졌다.
이 다양한 해방신학들은 지구 행성에서 인류 구원을 독점한다고 자처한 기독교가 사실 세계 곳곳에서 반생명적인 정치경제권력과 거룩하지 못한 야합을 통해 가진 자 편에 서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며, 문화적으로는 차별 배제를 해온 현장을 못본 척 침묵해온 신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제기했다.
소브리노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남미 엘살바도르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소브리노는 1970년대 남미의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구띠에레즈의 해방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포악한 정권에 의해 양심적 성직자들이 살해당하는 현장을 경험하며, 불의한 현실에서 신학의 실천적 과제에 대하여 고민했다. 그 결과, 소브리노는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사회정의와 가난한 자들을 향한 편애(preferential love)를 기독교복음의 중차대한 요소라고 보았다. 그리고 개인의 죄 문제에만 몰두한 신학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을 끝없이 비인간적 정황으로 몰고가는 구조적 사회악에 대한 비판을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소브리노에게 예수는 해방자 예수이며, 그 예수는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와 연대하며 온갖 억압들부터 해방을 선포하는 소명을 수행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소브리노의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고(高)교회(high church)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고교회 전통이란 제의 중심의 예배와 성직자의 권위적 질서, 교권을 지키기 위한 교조적 미학적 신학을 사회정치적 관심보다 더 중시해온 전통을 이른다. 중세에 지어진 교회건물이나 가톨릭교회, 성공회 교회 전통은 고교회 전통의 산물이다. 이 고교회 전통은 정치권력의 권위, 경제적 풍요를 가진 자들과 나누며 형성되어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이 전통에 몰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방신학자들은 고교회 전통이 아닌 저(低)교회 전통을 새롭게 형성함으로써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와 연대하는 예수로 이해했다.
[이 시각에서 성서를 새롭게 읽는 방식이 저자가 이 책을 쓰며 적용한 방법론적 성격이라 본다. 저자가 가난한 예수, 가난한 이를 위한 예수, 가난을 편애하는 예수를 강조하는 방식은 소브리노의 사상에 깊숙이 맞닿아 있다.]
예수에 대한 이론을 기독교 신학에선 '기독론(Christology)'이라 한다.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를 교회 권위의 최상부에 자리 잡은 권세 부리는 교리적 예수로 보지 않고, 가난한 자와 연대를 나누는 인간애적인 예수로 이해한다. 예수가 살던 시대의 사회정치적 배경, 그의 언행, 그가 설교하거나 제자들과 나눈 담론들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교리적으로 채색된 예수는 진정한 예수가 아니라 '교권이 만든 예수'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를 사회계층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저변층을 찾아오시는 예수(Jesus from below)라 여긴다.
교리적 예수 이해는 예수 죽음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보편적 죄에 대한 대속적 죽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 죽음은 로마권력에 의한 십자가 형벌(刑罰)이고, 그가 (제국의 억압 착취에서 하느님 백성들이 해방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기에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 당한 것'이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의(義)와 해방을 위한 길에서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나누며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어나가는 실천적 지평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소브리노는 남미의 포악한 정치권력에 의해 순교를 당한 로메로(Oscar Romero) 주교 등 여러 순교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 제자로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의 의미를 이 땅에서 실현해가던 '참된 믿음의 증언자'이며 '실천적 모범'이라 여겼다. 하느님 나라는 지상의 나라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 인간 존엄성을 증진해 나가는 역사와 마주 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
1) 초기 예수운동의 1~ 2세대 구분
초기의 예수운동은 1세대와 2세대로 나뉜다. 사도교회 혹은 교회라는 개념 대신에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일치를 이룬 예수운동이라는 용어가 바람직하다.
초기의 1세대 예수운동은 주후 30년~ 66년(유대 독립전쟁 발발)의 기간이다.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거나 함께 경험한 이들의 증언이 예수운동의 내적 동력이 되던 시기이다. 이 당시에 기록된 문서들은 주로 초기 예수운동에 관한 증언을 남긴 야고보, 베드로, 바울에 의한 것이다. 초기 예수운동의 지도자들(야고보, 베드로, 바울)은 모두 60년대에 순교했다.
이들의 순교 후 유대독립전쟁의 여파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시기를 지나면서, 초기 예수운동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는 양상을 보이며 좀더 종합적인 자기이해를 지닌 제 2차 예수운동이 전개된다.
2세대 예수운동은 예수를 직접 만나 말씀과 가르침을 받은 증인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는 시점에서 제자들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억과 체험에 근거해 남긴 기록에 의존하여 해명될 수 있다. 그 주요 기록들은 공관 복음서와 요한 서신들이다. 1세대 예수운동에 비해, 2세대 예수운동은 조금 더 종합적인 성격으로 발전한다. 유대교와의 관계 속에 머물던 1세대 예수운동에서 2세대에 오면 유대교적 영향권을 벗어나 예수운동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간혹 기독교 신앙운동을 성서 텍스트를 선택적으로 하는 문자적 이해, 혹은 성서 이후에 형성된 교리 중심적 시각에서 이해하거나, 심할 경우 특정 목적을 위해 단선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조금 넓게 보아 다원적으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성서는 100년의 시간 공간을 아우르는 역사 속에서 다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 때문에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이르려면 예수운동이 단선적으로 전개된 게 아니라 당시 종교, 문화, 사회,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 1세대 예수운동
예수운동은 유대교에서 나왔지만 이와 결별했고, 1세기 전후한 철학(혹은 종교적 사조들)과 조우하면서 그리스 철학적 신관으로부터 구별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그 중심축은 물론 예수의 삶과 사상 속에 담긴 “하느님 나라“다. 그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편애 속에서 전개되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 착취하는 제국주의적 지배 억압에 저항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세기를 지나는 동안 본격 전개된 예수운동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갈릴리,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시리아, 로마 등지에서 예수운동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예수운동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었다. 그 일치는 초기 기독인들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 성만찬 그리고 예수 가르침에 따른 자유와 해방적 실천에서 이루어졌다.
1세대 예수운동기 당시 가장 큰 대내외적 논란은 유대교와의 상관관계에서 제기된 예수운동 정체성 혼란의 문제였다. 유대교와 예수운동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명료하게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신 하느님 관념을 공유하는 예수운동과 유대교 사이에 무수한 주제들이 차이, 다름으로 인해 다양한 갈등을 불러왔다. 유일신론적 유대교 신앙과 예수의 하느님 이해의 다름, 유대교가 보던 메시아 관념과 예수운동의 메시아 이해의 차이, 유대교적 제의와 윤리, 유대적 민족주의, 유대교의 할례, 유대교의 율법, 유대교와 로마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에서 예수운동은 유대교와 어떻게 왜 다른지 해명해야 했다.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형성돼온 (영지주의 같은) 종교철학 전통과도 예수운동이 같은지 여부를 해명해야 했다. 이런 해명과정은 예수운동이 종교사적으로 유대교에서 나왔고, 유대교적 개념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예수운동 공동체에도 유대교적 관념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필요했다. 결국 상당기간 해명 과정을 거치면서 예수운동은 유대교와 다른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유대교와 결별하게 되었다. 동시에 예수운동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셈이다.
이렇듯 다양한 변증을 거치면서 예수운동은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고린도전서 1, 22-23)”이었다.
예수운동 공동체는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세례, 교회, 자유 평등과 차별 없는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운동은 유대교의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하느님의 구원을 주장하고, 사회적 계급과 차별주의를 넘어선 평등 사상을,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세례와 성만찬을 나누는 공동체의 특질을, 개인의 죄와 구조적 악에 대한 저항공동체의 성격을 갖게 된다. 1세대 예수운동기(주후 30년~ 66년)가 끝나갈 무렵 예수운동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이 때 예수운동 지도자들은 순교를 당한다. 야고보, 베드로에 이어 바울이 64년경 순교했던 것이다.
3) 2세대 예수운동
1세기 예수운동(70년) 역사에서 중간기 무렵(60-70년)은 위태로운 시기였다. 야고보, 베드로, 바울이 이 기간에 순교했고, 예수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운동의 중심은 그리스로마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게 된다. 이 즈음 예수를 생전에 직접 목격하거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예수운동 내부에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기억을 남겨야 했고, 아울러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그 결과, 예수의 삶과 사상에 관한 기록(복음서들)이 나온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자유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글에 담았다. 예수의 생애, 죽음과 부활, 재림에 대한 기대를 담으면서 복음서 저자들은 로마제국의 황제 중심 해석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복음(즉 예수 중심의 자유 해방 메시지)을 기록한 것이다.
2세대 예수운동의 핵심은 복음서 저자들의 예수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제기된 가장 큰 질문은 ‘예수는 누구인가?’였다. 유대교와 다르고 그리스인들이 믿는 신과 다른 하느님을 믿는 예수운동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 운동의 중심인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예수운동은 해명해야 했다. 이에 대해 예수운동은 복음서와 요한서신을 통해, 하느님이 예수 속에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 역사의 구원자로 개입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들었고,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기에, 예수운동은 예수와 하느님을 하나로 여겼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통해 생명의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사랑과 생명의 하느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예수운동은 복음서를 통해 로마제국도, 죄와 악의 힘도 심지어 죽음의 힘조차도 생명의 하느님을 이길 수 없다고 증언한다. 하느님나라 메시지를 전하던 예수가 비록 죽임을 당했지만, 죽음은 예수를 죽음의 권세에 가두어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운동은 생명의 하느님인 예수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복음서에 담았다.
이제 예수의 부활사건은 과거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저항공동체'(Gegen-Gesellschaft)의 역동적 사건으로 현재화된다. 이로써 예수운동은 한편으로는 죄와 악, 사회악, 구조적 악에 저항함으로써 해방의 지평을 넓혀 하느님 백성에게 자유를, 차별에서 벗어난 평등을, 지배 아닌 섬김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수운동이 이해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동기화되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해방자이다. 그러하기에 예수운동은 예수에게서 죄 죽음 고통에서 탈출하는 자유 해방의 길을 열어, 하느님 나라로의 해방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불의한 폭력 억압을 통해 강성해진 로마제국 황제와 달리, 예수는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의 자유 해방을 기조로 삼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바로 이 이유로 예수는 로마제국에 적대적인 정치범으로 몰렸고,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은 로마제국을 향한 저항의 결과이다.
예수운동을 이해함에 있어 예수의 수난에만 관심을 갖고 저항의 역사에 침묵하고 약화시킨 교회 전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복음서에 그려지는 ‘저항하는 예수’ 없이, 바울이 그리는 십자가와 부활만 강조하는 신앙 전통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공동체는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경험했고,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주님이라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의 형성이 예수운동의 중심축이다. 그 하느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생명의 자유 해방의 지평을 여는 곳에서만 열리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을 소개했다. 신약성서는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탈출하는 자유와 해방의 길을 소개했다. 인류 앞에 제시된 두 길 모두 자유와 해방의 길이다.”
4) 예수운동 내부의 차이에 대하여
1차 예수운동보다는 2차 예수운동이 중요하다. '1차 예수운동'에서 다소 혼란스러웠던 유대교와의 차별성(혹은 연속성) 문제나 신앙의인(justification by faith) 일변도의 논리 등이 '2차 예수운동'에서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운동의 핵심은 “자유 해방의 복음“이며 당시 사회에 내재된 억압적인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복음적 실천과제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점의 하나는 하느님은 가난한 자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예수가 부자에 대해 경고 비난한 경우는 여럿 있지만, 가난한 이를 나무라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바울의 서신에는 권력에 대한 복종이나 기존 노예질서에 순응하는 논리가 다분히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바울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고, 또 박해기에 예수운동이 더 큰 박해를 받게 될 것을 그가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한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의 그런 타협적 태도는 성서 구절로 남아서, 악한 권력자들이 세속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성서적 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역사적 자유 해방의 복음이 바울에게서 영적 자유와 해방으로 (그릇되게) 축소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끝으로 예수운동의 초기 양상은 오늘의 교회보다 훨씬 평등주의적인 공동체였고, 차별이 없었다. 네로의 박해 이후 간헐적으로 지속된 박해기에도 무수한 이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 험한 시기에 사제나 직제, 계급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운동 2세대 말에 이르러 예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약해지면서 예수운동의 지속성을 위한 방안들이 제기되었으며, 그 여파로 교회가 제도화되기에 이른다. 본디 예수운동 내부에는 신분질서나 성직주의도 없었다. 죄와 억압에서 자유로워진 하느님 백성들의 평등한 공동체가 예수운동 초기의 그림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는 예수운동의 원형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나오는 말
예수운동의 역사를 보면, 이 운동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위기에도 끊임없이 시달렸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이들의 의연함이 있었기에 예수운동은 세속적 탐욕과 권력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힘에 굴복하려는 유약한 이들이 예수운동 내부에서 부단히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기독교회도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함, 그리고 내부의 유혹을 계속 걸러낼 정화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생명력 있는 예수운동 공동체로서 유의미성을 가질 수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다양성을 수용하면서도, 자유 평등의 가치를 하느님 나라의 전조(前兆)로 받아들이는 믿음 공동체가 예수운동의 근본 성격이었다. 따라서 그 실천지평은 영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운동 공동체의 속성은 이러하다.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차별당하지 않았고, 누구도 지도층으로 거만하게 처신하지 못했다. 특별한 임무나 은사를 부탁받은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지도층 행세를 하지 못했다. 공동체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거나,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고 가르는 권력구조가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 2천년 역사에서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평등이 실천된 시기는 예수운동 1세기였다.”
이것이 하느님백성 공동체의 원형이다. 해방과 평등이 실현된 공동체이다. “예수를 바라보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기 전에 우리는 예수운동의 원형에 대한 바른 이해부터 가져야 한다. 혼란 갈등이 깊은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예수운동의 본질과 원형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진 이가 있다면 반드시 초기 예수운동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704
<덧글>
초대교회 역사(예수운동사)를 밝힌 김 근 수 해방신학연구소장님의
저서에 대한 박 교수님의 서평입니다.
여기선 내용을 부득이 요약했으니 (혹 오류가 있다면 지적 바라며),
가능하면 원문이나 원저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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