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청부(殺人請負)된 女人
잠자는 거인(巨人)으로 불리는 장소가 있다.
숭산(崇山)의 소실봉(少室峰)에 자리잡은 거찰(巨刹).
천 년을 두고 숭고한 무명을 강호계에 날린 장소, 그러면서도 강호대세에는 직접 끼여들지 않는 전통을 자랑하는 장소.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전통을 지닌 영원의 대지.
대소림사(大少林寺).
소림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잔설(殘雪)더미 위로 땅거미가 지고 있다.
아아, 천년소림(千年少林)!
무사들의 야망과 희망이 영원히 맴돌고 있는 그 곳의 하늘을 지켜 보는 두 개의 사악한 눈이 있다.
"온다면, 걸려든다. 훗훗, 멋모르는 중들이 펼친 대나한진(大羅漢陳)이 아홉 개나 펼쳐졌다!"
그는 승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녹옥불장(綠玉佛杖)이 쥐어져 있었다.
녹옥불장은 바로 소림방장의 신물이다.
"인문의 피라미들! 훗훗, 오지 않아야 할 거다. 현명하다면!"
음사하게 웃는 자, 그의 눈에서는 잔혹한 마광(魔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한데, 소총사는 왜 비밀을 일부러 밝히는지 모르겠군. 하여간 배포가 크신 분이다, 그분은!"
음침하고 역겨운 눈빛, 소림방장의 눈에서 그러한 눈빛이 흘러 나오다니?
마혼십가는 벌써 소림사의 수좌마저 완전 장악했단 말인가? 천 년 소림마저…….
벌써 삼 일째다. 소림방장 고엽선사, 그가 그렇게 산하를 응시하며 보낸 지도.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길래……?
* * *
"대단하다. 다섯 시진 내내 지켜봤는데, 그 사이 단 한 번도 허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아, 저들이 모두 진정한 협사(俠士)들이라면 백도의 힘도 마혼십가에 비해 크게 뒤지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 있었다. 삐죽삐죽 솟은 첨각(尖角)의 바위산 틈 사이에.
그의 몸 주위에는 빙무(氷霧)가 형성되어 있었다.
빙무는 바람이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바윗덩어리에서 흰 안개가 흐르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다.
봉황산(鳳凰山)은 본시 바위가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천불단(天佛壇)이라 불리는 험준한 산봉우리 위, 그는 벌써 반나절 동안 그러한 자세로 머물러 있었다.
모공에서 빙무를 피어 내어 몸을 감추는 화허유영(化虛遊影)의 잠은술(潛隱術)은 대인법 중 하나이다.
스으으… 스으으…….
뿌옇게 퍼지는 흰 기류, 그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백무엽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안력으로 발 아래 분지(盆地)를 살펴보고 있었다.
천봉곡(天鳳谷)이라 불리는 거대한 분지.
그 곳에는 팔백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과 십 리 길이의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진 대방파 하나가 있다.
천하정법회(天下正法會).
전 마도(全魔道)를 응징하기 위해 뭉친 백도 최고의 조직이다.
현재 문하제자의 수는 팔만오천(八萬五千). 긴급시 명이 떨어지면 구파일방에서 십오만 고수를 파견해 줄 것이니, 잠재력은 가히 일국(一國)을 능가한다.
천하정법회는 하나의 맹(盟)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정법회에는 출신내력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무수히 많은 고수들, 이들은 삼 파를 적으로 삼고 있다.
마혼십가(魔魂十家),
인문(忍門),
사천황궁(邪天皇宮).
인문마저 정법회의 적이 되는 이유는 정법회의 장로 이상 고수 이백여 명이 인문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바로 정법회 장로들 중 태반이 마혼첩이라는 말도 되는 것이다.
정파 사람들이 있고 정파를 가장한 마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
정법회야말로 가장 번잡스러운 방파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가(魔家)는 정법회라는 유사단체를 내세워 천하백도를 한 곳에 모으게 한 후, 백도를 일거에 정복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백무엽은 죽립을 약간 기우뚱 썼다.
'하여간… 시작하자! 곧 밤(夜)이 될 테니까!'
불야성(不夜城)!
천하정법회를 두고 이보다 더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정법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장소는 무적궁(無敵宮).
그 곳은 바로 정법회의 중심지이다. 그 곳은 회랑의 길이가 총 삼 리에 달하는 거대한 철조건물이다.
둘째 장소는 구중천부(九重天府).
구중천부는 무적궁을 공작이 알을 감싸듯 포위하고 있는 모든 부위를 말한다.
그 곳에는 천여 명의 고수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당세의 백도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은 구파일방에서 나왔고, 반은 자청해서 정법회에 들었다.
정법회주는 이들을 특성에 따라 구대당(九大堂)으로 나누었다.
구대당을 모두 합쳐 부르는 이름이 바로 구중천부였다.
구중천은 삼번(三幡), 삼검(三劍), 삼뇌(三腦)로 나뉘어진다.
천번천(天幡天), 장로(長老)들의 모임.
지번천(地幡天), 호법(護法)들의 모임.
인번천(人幡天), 위사(衛士)들의 모임.
의검천(義劍天), 구파일방에서 나온 고수들의 모임.
정검천(正劍天), 독자적으로 활약을 하다가 정법회에 든 사람들 중 강북무림계(江北武林界) 사람들.
패검천(覇劍天), 강남무림계(江南武林界) 출신의 무림고수들.
비뇌천(秘腦天), 타파로 치면 순찰당(巡察堂)으로 정법회 내부의 비리를 감시하는 조직.
번뇌천(煩惱天), 중대한 사건에 대해 위결하는 기관.
정뇌천(正腦天), 정법회의 호법을 맡은 장소.
구중천부에는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강호 어디에 가도 타인의 인정을 받는 고수들이었다.
그 외에도 가장 넓은 부위를 차지하는 의풍성(義風城)이 있었다.
의풍성에는 강호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공에 조예가 뛰어난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 모여 있다.
정법회는 지극히 거대한 규모였다. 불행한 것은 정법회가 현재 마혼십가의 마수(魔手)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법회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천하정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만 개의 화섭자가 타오르고, 십만 개의 등(燈)이 번쩍거리고 있다. 또한 삼만 자루의 장검이 뽑혀진 채 불빛을 반사한다.
쭈욱 뻗어 나가고 있는 석로(石路), 높은 담장 위를 걸어다니고 있는 전포 차림의 무사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연마하는 상체를 벗은 젊은이들.
정법회는 가히 일개 시진(市鎭)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너른 대지와 수많은 누각,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기거하는데 쓰이는 금은자(金銀子)를 정법회에 희사한 사람은 대체 몇인가?
천(千), 만(萬)?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을 정법회에 바친 사람은 단 일 인(人)이었다.
만뇌천문옹(萬腦天門翁) 단리왕(段里王).
전설적인 거부(巨富)인 동시에 천하제일의 기문술사(奇門術士)인 그는 정법오우(正法五友)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정법오우가 혈화삼에게 제거되고, 구파일방이 마혼십가에 유린되었다는 것을 아는 찰나 마음을 결정했다.
-노부는 전 재산을 바쳐 의풍(義風)을 천하에 퍼뜨리라!
그는 위대한 결심을 하고 수천에 달하는 가신(家臣)들을 모두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래와 같은 명을 내린 후 단리세가를 해산했다.
-오천만 냥(兩)의 금자(金子)를 모두 정도에 바친다. 그리고 노부의 슬하 자손들은 이제 의에 죽고 의에 살게 될 것이며, 노부가 모은 이십만 권의 강호서적들은 모두 정도에 기증되리라!
-온 천하에 산재한 노부의 별장은 정도의 분타가 될 것이고, 노부의 창고에 있는 기진이보(奇珍異寶)는 구파일방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를 위해 쓰이리라!
만뇌천문옹은 지극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빈민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열일곱 살 때까지는 동가식서가숙하는 비렁뱅이 처지였다. 그는 눈 속에서 얼어죽을 지경이었는데,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세 사람이 그를 도와 주었다.
철목성승(鐵木聖僧),
강룡사태(降龍師太),
벽진자(碧眞子).
세 사람은 단리왕을 눈 속에서 꺼내 주었고, 그에게 세 가지를 주었다.
운기토납보(運氣吐納譜), 소환단(小還丹) 한 알, 은자 이십 냥.
세 명의 강호명숙은 그것을 단리왕에게 전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단리왕은 그것을 기반으로 세 가지를 이룩했다.
천하제일의 거금(巨金),
천하제일의 지혜(智慧),
천하제일의 세가(世家).
단리왕은 산학(算學)에 있어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처세술이 뛰어났고, 웅변은 소진 장의 이상이었다. 그를 만난 사람은 누구든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결국 그는 혈화삼의 살인명부에 적히게 되었고, 마혼십가의 도전을 받았었다.
단리왕은 그 싸움에서 다리 하나를 잃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날부터 마혼십가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은둔생활을 했었는데, 만년에 자신의 은인인 세 명의 노현자들이 제거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피눈물을 쏟으며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정법회의가 이루어졌고, 천하는 단리왕을 백도대부(白道代父)로 칭송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리왕의 손녀인 단리음(段里音)이라는 십구 세 미녀를 정법회의 회주에 앉혀 단리왕의 뜻을 기렸다.
?그러한 창건비사를 갖고 있는 정법회, 그 곳은 십여 년째 불야성이었다.
마혼십가와 변황의 사천황궁이 무너지지 않는 한, 불은 꺼지지 않으리라!
백도인들은 그것을 가슴 속 긍지로 삼고 있었다.
한데, 이 날 십오야(十五夜) 달도 밝은 날 여러 곳에서 불이 꺼졌다.
"제기랄, 바람도 불지 않는데 불이 꺼지다니……."
황삼서생(黃衫書生) 곽무옥(郭武玉).
그는 무당 속가제자이다. 그는 의풍성(義風城) 일대를 지키는 정법열사(正法烈士) 중 하나였는데, 그는 제 손에 들려 있던 화섭자가 꺼지자 그렇게 말하며 툴툴대는 것이다.
"모르겠는데? 왜 불이 꺼진단 말인가?"
"이상하군. 마치 유령이 지나가는 듯하지 않는가?"
"무엇인가 지나간 듯한데,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리 빨리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화단(花壇), 그 위에는 조금 일그러진 만월(滿月)이 떠 있다.
자야(子夜)가 지나가는 시작인지라 어둠도 극에 달했고, 달빛도 극에 달했다.
구중천부(九重天府)와 무적궁(無敵宮) 사이, 이 곳에는 사철 쉬지 않고 꽃을 피우는 화원이 있다.
화원을 꾸민 사람은 다름 아닌 단리음이었다.
그녀는 지하에 천산열옥(天山熱玉)을 넣어 지열을 만든 후, 속성 재배할 수 있는 미향화(迷香花)와 환영구지초(幻影九芝草), 혈라무궁화(血羅無窮花)를 재배했다.
결국 구중천부와 무적궁 사이에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원이 꾸며지게 되었다.
일대는 다른 곳과 달리 아주 고적했다.
흐트러진 천자만홍(千紫萬紅), 코끝을 감도는 야릇한 향기, 화원 위를 맴도는 기이한 아지랑이, 그리고 번득이는 두 눈.
두 눈은 오랫동안 화단 일대를 살펴보고 있었다.
'열다섯 종류의 기문진과 기관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흠, 여기서 일단 가로막혔다.'
화단 속에 납작 엎드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황갈색 장포를 걸치고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자, 그의 몸 주위에는 아지랑이가 감돌고 있었다.
'인법을 쓰고도 여기까지밖에 못 오다니……!'
바로 백무엽, 그는 야음을 틈타 정법회 깊이 잠입한 것이다.
'단리음, 뛰어난 계집이다. 훗훗, 천야농원보다도 화려하고 신비한 화원을 펼쳐 놓을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것이 깨어지는군.'
백무엽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사람 얼굴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나이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반달이 가라앉은 듯 수려한 눈썹에 육감적으로 도톰하게 발달된 입술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
눈망울이 꽤나 영롱(玲瓏)한 미소녀의 초상 아래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그림은 사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단리음의 그림임!
단리음은 깊이 숨어 외부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
이 그림은 부평령(浮坪令)이 의원 행세를 하고 정법회에 잠입해 먼 거리에서 단리음을 보고 그린 것임.>
그림을 준 사람은 설향이었다.
'단리음, 정말 아름다운 소녀다. 이 그림이 사 년 전의 것이라니… 지금은 아마 완전한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백무엽은 그림을 뇌리에 기억했다.
그는 눈을 감고도 그 얼굴을 환히 떠올릴 정도가 되자, 아낌없이 그림을 불살라 버렸다.
화륵-!
그림은 삼매진화가 일어남과 함께 순간적으로 재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화광(火光)이 잠무(潛霧)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빛마저 감추어 버리는 귀무(鬼霧), 그것은 대인법을 익힌 탓에 쉽게 피워 낼 수 있는 인무(忍霧)였다.
인법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안개를 모공에서 피우기 위해 엄청난 내력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스으으… 스으으…….
안개는 백무엽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안개는 화원을 감도는 안개와 빛이 완전히 같았다.
'묘한 화수진(花樹陣)이다.'
백무엽은 일각 넘게 진세를 살폈다.
자객에게는 두 번이 없다. 한 번 실수가 운명을 정해 버린다.
자객에게는 기회란 단 한 번 있을 뿐이다.
백무엽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축시(丑時)가 지나갈 때였다.
딱-!
아주 둔중한 딱딱이 소리가 나더니, 돌연 화원 곳곳에서 그림자 백팔 개가 떴다.
"교대!"
"신속히 합시다!"
휘윅- 휙-!
꽃그늘 속에서 휘휙 떠오르는 백팔 개의 그림자가 허공에 뜰 때, 어디선가 짤막한 음성이 터져 나온다.
"제자리로!"
"선조(先組)는 수고 많았소이다!"
무적궁 쪽에서 백팔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화살이 땅에서 위로 쏘아지고 하늘에서 땅으로 쏘아지듯, 이백십육 인은 일순간에 자리를 교체했다.
거의 탄지지간(彈指之間).
딱딱이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이전 본래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새로운 사람들이 화원 속으로 숨어들었다.
백무엽은 입을 가볍게 벌리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장소이다. 정법회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그는 강호의 격언 하나를 기억했다.
-귀신도 가지 못하는 네 곳이 있다.
정법회 무적궁(無敵宮),
옥화밀원(玉花密院),
자금성천자전(紫禁城天子殿),
사천황궁(邪天皇宮).
네 곳은 강호에서 가장 잠입하기 힘든 장소였다.
백무엽은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하고 있었는데, 그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놀랍다. 백팔 인이 모두 강기의 벽으로 맥박 소리마저 감추고 있다. 이들은 대체 어떤 무리일까?'
백무엽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화정신수궁마저 막지 못했던 백무엽을 정법회의 화원이 막고 있는 것이다.
'꽃밭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데, 여기 오래 눕게 되는군.'
백무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 눈을 감는 것은 그의 오래 된 습관이었다.
'눈을 감으면 생각이 잘 나곤 하지. 인문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것까지…….'
백무엽은 마음의 벽을 활짝 트고 공허한 심경으로 빠져들었다.
삼매몰아경(三昧沒我境).
그러는 가운데 일 각(刻)이 지났다.
그리고 백무엽의 입가에 묘한 동요가 일어났다.
'혹, 마라변환천쇄(魔羅變幻天鎖)라는 진세가 아닐까?'
백무엽은 문득 한 가지 진법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인문은 그에게 천 종의 진세를 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생각해 낸 것은 인문천종진학(忍門千種陣學)에 끼어 있지 않은 지극히 오묘한 절진세였다.
마라변환천쇄(魔羅變幻天鎖)!
생사변휴상(生死變休傷)의 문이 모두 역순(逆順)으로 되어 있는 진세이다.
백팔 개의 점(點)을 백 장 방원에 퍼뜨려, 백 장의 십 배인 천 장을 휘감아 버리는 광오한 진세.
백무엽은 문득 그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파해법은 단 하나, 금선탈각(金蟬脫角)뿐이다. 일순의 허점을 택해 나는 들어가고, 무엇인가 남게 될 것이다.'
백무엽은 손을 약간 쳐들었다.
한순간, 작약화(芍藥花) 가지 하나가 큰소리를 내며 꺾였다.
그 순간 백무엽은 환무(幻霧)로 몸을 휘감고 비스듬히 안개 속으로 날아올랐고, 도처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아홉 개의 그림자가 백무엽이 있는 곳으로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저쪽이다!"
"확인하시오!"
"무슨 일이오?"
흑포를 걸친 아홉 명의 고수들, 이들은 순간적으로 구궁진을 쳐서 백무엽이 있던 곳을 차단했다.
"흠, 꽃이 꺾였군?"
"혹, 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사해 봅시다!"
아홉은 찰나지간 사방으로 흩어지며 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땅에는 온기(溫氣)가 전혀 없소!
"누군가 누운 흔적도 없소!"
"으음, 사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소! 사람이 있었더라면 땅에 약간의 온기나마 남았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백무엽은 이백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맥(脈) 소리마저 숨기고, 피의 뜨거움마저 진기의 벽으로 차단해 버린 완전한 인(忍)의 상태.
그를 발견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같았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무적궁으로 접어들었다.
무적궁은 거대한 규모이나, 머무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장소였다.
시녀(侍女) 유화(柳花).
그녀는 차를 나르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랑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졸음을 느꼈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회주(會主)는 지하에 계십니다. 청아전(淸雅殿)이라 하는 곳이지요. 며칠째 거기 계십니다. 왠지는 모릅니다. 그분을 뵐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 음야홍(陰也紅) 어르신네뿐입니다!"
유화의 머리 위, 희고 아름다운 남자의 손 하나가 얹어 있다.
"너는 착한 아이다."
신비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임독양맥을 뚫리지 않은 사람의 심령을 찰나적으로 제압하는 제혼력(制魂力)을 지니고 있었다.
손에는 기이한 진기가 흐르고 있어, 그 힘이 유화의 신지를 일순 마비시키고 있었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느냐?"
"예!"
"그럼… 잊어라, 말한 것을!"
"예."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 너는 회주의 거처로 차를 갖고 가는 중이었다니, 그대로 하거라!"
"예."
"내가 꽃이 없다(花無)고 하면 깨어나라!"
"예!"
"꽃이 없다(花無)!"
유화는 생긋생긋 웃으며 걸어간다.
정법회주의 서비(書妃) 유화.
그녀는 천산파 출신의 미청년과 내일 새벽 은밀히 만나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한 것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통통한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십 장마다 서 있는 호법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긋 웃어 보이며.
유화는 자박자박 걸음을 내딛었고, 이상하게도 그녀가 본 사람은 모두 찰나적으로 의식을 잃고 뻣뻣이 굳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선 회선지공(廻旋指功)이 벽 속에 숨어 있던 호법들의 혈도를 점혈해 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 유화를 따르고 있었다.
* * *
그녀는 거울(鏡)을 보고 있었다.
거울은 아주 거대해서 그녀의 전신을 다 비추고도 남음이 있었다.
동경(銅鏡)인데, 테에는 구룡(九龍)이 얽히고설킨 장식이 되어 있었다.
매우 정교한 조각인지라, 언뜻 보면 살아 있는 생명체가 구리거울을 휘감고 있는 듯이 보였다.
조금 파리한 입술이다.
아아, 그 모습은 무조건 아름다웠다. 어딘지 모르게 병적(病的)인 아름다움인데, 그것이 하늘마저 뇌쇄시킬 듯 아름다웠다.
손(手), 작은 손이 핏기 없는 볼로 다가갔다.
"지난밤에도 사악한 꿈을 꾸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살결이 많이 거칠어졌다.'
여인은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다섯 손가락 중 어느 하나에 반지라도 끼어 있음직한 여인의 손인데, 하늘이 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는 지분기가 전혀 없었다.
얼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달이 내려앉은 듯한 눈썹이었다.
붓으로 그린 듯 아주 가늘고 고운 눈썹, 그 아래에는 조금 요요(妖妖)로운 두 눈이 있었다.
단리음(段里音).
방년 십구 세의 여인이다. 한데, 그녀의 자세는 처녀 같지 않게 진중한 데가 있었다.
방 안에 거울이 하나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여인의 규방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소박하고 허전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서적뿐이었다. 그것도 모두 병서(兵書)로서 육도삼락을 비롯한 병가칠서(兵家七書)가 모두 있고, 세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병법가의 저술서도 여러 권 있었다.
그 외, 기문진도(奇門陣圖)와 신복학서(神卜學書) 등 여인은 보통 손에 대지 않는 고서들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외, 벽에는 검(劍)이 하나 걸려 있었다.
검집의 장식이 아주 화려한 보검(寶劍), 검집에는 봉황(鳳凰)이 주작(朱雀)과 더불어 우비(于飛)하는 광경이 신비로운 수법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검자루는 상아(象牙), 검집은 황금(黃金)이었다.
<혈사자(血獅子)>
검자루에는 그러한 글이 음각되어 있었다.
검은 벽에 걸려 있고, 수많은 서가에는 고서가 그득했다. 그리고 작은 자단목(紫檀木) 탁자가 하나 있는데, 그 위에는 수많은 약병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태을보령단(太乙補靈丹),
적양신단(赤陽神丹),
천년삼왕단(千年蔘王丹),
송운연혼단(松雲練魂丹),
대환단(大還丹),
태청보단(太淸寶丹),
취선일향단(醉仙一香丹),
선지음양신단(仙芝陰陽神丹),
백화회혼신단(百花廻魂神丹).
도합 아홉 가지의 단약. 이것은 구중천부에 있는 고수들이 기증한 영단이었다.
그 외, 두툼한 경전 세 권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인문살해자명단(忍門殺害者名單).
인문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된 서적이다.
십년중실종자명단(十年中失踪者名單).
최근 십 년 사이 이유 없이 거처를 옮겼거나, 소문도 없이 사라진 강호고수들의 이름이 총망라되어 있는 서적이다.
세 번째 서적, 그것은 가장 두꺼웠다.
변황고수명단(邊荒高手名單).
변황의 고수들의 이름이 상세히 적힌 서적. 그 안에는 변황무림계의 거효(巨梟), 패웅(覇雄)들의 이름과 그들의 수하된 자들의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인(女人) 단리음! 그녀는 책과 더불어 소녀 시절을 보냈다.
해를 보는 것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대부분의 시간은 책과 씨름하며 지낸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선병질(線病質)적인 요염함을 지니게 되었다.
거울 안, 얼굴 가에는 아련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꿈을 믿지는 않는다만… 아무래도 이상하다!"
단리음은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절맥(絶脈)이 도진 것일까? 어이해 최근 들어서는 자꾸만 심마(心魔)가 일어나는 것일까? 장로들이 알면 좋지 않은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갑자기 웅웅거리며 검명(劍鳴)이 일어났다. 그리고 돌연 쇳소리가 나며 방 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혈사자검(血獅子劍)이 세 치 가량 뽑히며 핏빛 검신에서부터 빛이 뿜어져 나와 천장의 야광주(夜光珠)에 부딪치며 방 안을 핏빛으로 물들인 것이다.
"검이 절로 뽑히다니?"
단리음이 고개를 홱 돌리는데, 누군가 석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회주(會主), 선차(仙茶)를 갖고 왔습니다! 소녀, 유화(柳花)이옵니다!"
석문 밖에서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유화냐? 문은 열려 있다. 그러니 어서 들어와라!"
단리음은 손을 이마에 댔다. 고운 아미(蛾眉)가 역팔자로 찌푸려져 있었다.
'아아, 검이 갑자기 뽑히고… 괜히 가슴이 울렁거리는구나.'
그녀는 탄식 소리를 입 안에서 녹였다.
석문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누군가 들어섰다.
저벅- 저벅-!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단리음은 눈을 꼭 감은 채 오른손만 내밀었다.
"그것을 어서 다오! 아아, 이렇듯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는 그 차를 마셔야 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단리음의 손바닥은 아주 아름다웠다. 아쉬운 것은 손바닥이 너무 파랗다는 점이었다.
들어선 사람은 묵묵히 다가섰다.
단리음은 손을 내민 채 다시 중얼거렸다.
"음사저(陰師姐)는 무얼 하시느냐?"
"……!"
나타난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얘야, 사저는 무엇을 하시냐니까?"
단리음은 힐끔 고개를 쳐들었다. 직후, 단리음의 입이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흑… 그, 그대는?"
찻잔이 놓인 은반을 들고 있는 사람, 그는 유화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었다.
죽립(竹笠)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황포인인데, 죽립에서부터 불빛보다 밝은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누, 누구냐?"
단리음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석문 사이, 유화는 거기 쓰러져 있었다. 어찌나 절묘하게 점혈되었는지, 아주 달게 잠자는 표정으로 반듯이 누워 있는 유화.
그녀와 단리음 사이에 있는 황포인은 백무엽이었다.
"다섯 가지 의문을 풀기 전에는… 행할 수 없다. 죽이는 일을!"
백무엽은 꽤나 무뚝뚝히 말을 하며 단리음을 바라봤다.
'눈이 데는 듯하다!'
단리음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빳빳해졌다.
하지만 그녀도 정녕 보통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리도 휘청이지 않고 백무엽을 마주 노려봤다.
"어느 고인(高人)이신가? 그리고 무엇이 궁금하기에 여기까지 와서 물으려 하는가?"
"훗훗… 의문은 여기서 생긴 것이고, 나는 고인(高人)이 아니라 뻔뻔하고 무례하고 무식한 하인(下人)이다! 아주 천한 놈이지."
"으음, 의문이 여기서 생기다니?"
"본시 나는 너를 죽일 작정으로 왔다!"
"……!"
단리음은 어처구니없어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라는 동물에 대해 위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뭇남자를 좌지우지하던 여걸(女傑) 단리음, 그녀를 말 한 마디로 꼼짝 못하게 할 사람은 백무엽뿐일 것이다.
백무엽의 몸에서는 신기(神氣)와 살기(殺氣)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혈사자검이 뽑힌 이유는 그 살기 때문이었다.
"첫번째 의문은?"
백무엽은 찻잔을 왼손으로 가리켰다.
단리음은 그의 손이 아주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백무엽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너는 왜 독(毒)이 든 차(茶)를 마시냐는 것이다!"
"독, 독차(毒茶)라니?"
"훗훗… 너는 후각이 나빠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나, 나는 알 수 있다. 이 차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마약이 들어 있다!"
"마, 마약이라고?"
"그렇다. 그것은 혈시고혈마분(血屍膏血魔粉)이라는 것이다!"
백무엽은 퉁명스레 말하며 입을 가볍게 벌렸다. 하얀 이가 드러나는 것이 아주 아름다웠다.
"둘째 의문은… 너는 구태여 내가 죽이지 않아도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칠음절맥(七陰絶脈)이라는 것이다!"
"그, 그것을 네가 어찌 알지?"
"자객 주제에 약간의 의술(醫術)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으음!"
단리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칠음절맥이라는 것은 그녀의 첫째 비밀이었다.
단리음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여인이었다. 강호에 소문이 나기는 절세고수라고 났으나, 전혀 달랐다.
그녀는 의자 하나 들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시한부 생명이기도 했다.
"셋째 의문은 너같이 현명한 계집이 어이해 자신의 마각(馬脚)을 개방을 통해 우리에게 알렸느냐 하는 것이고!"
"……."
"넷째 의문은 왜 너의 눈에 정기(正氣)와 요기(妖氣)가 함께 떠도느냐 하는 것이며……."
"뭐, 뭐라고?"
"훗훗… 마저 들어라, 다섯째 의문까지! 그것은……."
백무엽은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단리음은 산악이 다가서는 듯한 압도감을 느꼈다.
"다섯째 의문은 네가 죽을 경우, 누가 정법회주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누, 누구냐? 너는 어이해 이상한 말을 하느냐?"
단리음은 손을 뒤쪽으로 내밀었다.
금색줄 하나, 그녀는 그것을 힘껏 잡아당겼다. 한데, 그것은 언제인지 모르게 끊어져 있었다.
"미안! 허락 없이 네 것을 잘라서! 그렇지만 그것을 당길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잠을 깨어 소란을 피울 것이니, 자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줄을 자른 사람은 백무엽이었다.
줄에는 종이 매달려 있다. 종이 당겨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 청아전(淸雅殿)으로 몰려온다.
수백 군데의 사지(死地)를 거친 백무엽인지라 직감적으로 금줄의 효용을 알아채고 격공강기로 미리 그것을 끊어 버린 것이다.
'의문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빨리 풀어야 한다.'
백무엽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죽립을 쓰고 있으나, 얼굴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를 잘 봐라, 단리음! 내 눈을!"
번쩍 쳐들려지는 얼굴 한가운데에서, 두 줄기 섬전(閃電) 같은 청광이 폭사되어 나오며 단리음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최, 최혼술(最魂術)을 쓰려는구나! 으으……."
그녀는 상체를 휘청거렸고, 백무엽은 그 순간 좌수를 내밀어 그녀의 맥문을 낚아챘다.
@쩌릿-!
단리음은 팔이 떨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눈을 뜬 채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그녀가 이미 백무엽의 인혼최혼공(引魂最魂功)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단리음은 정말 약골이었다.
'지혜롭기는 하나, 약하다. 그리고 회주이기는 하나, 다분히 형식적이다. 역시 이것은 함정이었다. 방자한 것들, 감히 인문을 농락하려 하다니.'
백무엽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인문의 칼을 빌려 단리음을 죽이려 한 것이다.
'꼭 찾아 내어 새벽이 되기 이전에 죽여 버리겠다.'
백무엽은 아주 차게 웃고 있었다.
단리음은 꿈을 꾼다.
그녀는 채운(彩雲)을 타고 날고 있었다. 그리고 꽃비가 떨어지며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역하지 못할 절대자의 목소리가…….
"차(茶)는 누가 준 것이지?"
"음야홍(陰也紅), 나의 사저이시다!"
"음야홍은 어디에 있는, 누구냐?"
"구중천부주(九重天府主)이다. 정법서열 제이(正法序列第二)이지. 벙어리이나, 무공이 강하다. 그녀야말로 정법회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그 후, 어찌 되었느냐?"
"차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고, 절맥체질도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그래서 늘 하루에 세 잔씩 차를 마셨다!"
"음야홍의 지위는?"
"나의 후견인(後見人)이다. 나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죽을 경우, 정법회를 맡을 것이다."
"그녀는 최근 어떤 일을 했느냐?"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나, 나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정법회에 받아들였다."
백무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차(茶)를 마시고 있었다.
지독한 독이 든 차!
다른 사람은 그 차를 마시면 마약 중독자가 된다. 그 차의 독성을 이길 사람은 백무엽 한 사람뿐이었다.
"마혼십가는 정법회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 단리음은 불쌍하게도 절맥체질인데다, 악독하게 조종당하고 있다!"
백무엽은 차를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불행히도 독의 해독약은 없다. 해독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마음(心)일 뿐이다. 마약을 들지 않는다면 엄청난 금단(禁斷)의 고통이 따른다!"
백무엽은 중얼거리며 붓을 취했다.
얼마 후 그는 사라졌고, 쪽지 한 장이 남았다.
<차를 마시고 싶을 것이나, 이제는 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녀는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기필코!
물론, 또 다른 사람이 차를 줄지 모르나 참으시오. 참아야 살 수 있소.
그리고 여기 칠음절맥을 치유할 수 있는 비전 약방문을 하나 적어 두겠소.
나를 믿지 않아도 좋으나, 부디 내가 말한 대로 하기 바라오! 왜냐하면 그대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천하를 위하는 일이니까!
이 글을 적는 사람은 무화(無花).
바란다면 조속히 찾아뵙겠소. 그 날, 지금의 무례를 사죄하겠소.
지금은 때가 아닌지라 이 정도만 말하고 가겠소.
허락 없이 낭자의 몸을 만진 무례를 용서하기 바라오.
무화(無花)>
묵(墨)이 마르기 이전, 단리음은 의식을 차렸다.
그녀는 글을 보며 피부 위에 소름을 돋웠다.
"무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만 명이 동시에 쳐들어와도 들어오지 못할 이 곳까지 들키지 않고 왔을까? 그리고… 나는 정말 독에 당한 것일까?"
그녀는 손바닥에 땀을 쥐었다.
'무화… 아아,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녀의 애검(愛劍) 혈사자(血獅子)는 검집만 남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백무엽은 검을 꺼내 갖고 간 것이다.
<곧 찾게 될 것이니, 걱정 마오. 나를 믿는다면 당분간 신호를 내지 마오!>
벽에는 그런 글이 파여 있었다.
용사비등한 신필,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글만 보고도 글의 임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단리음은 묵묵히 있었다.
'모르겠군. 생면부지의 자객이 말한 대로 움직이게 되다니… 나도 모르겠군. 지금 나의 이 마음을!'
그녀는 어떤 얼굴을 아련히 기억했다.
한 번 보면 영원히 지우지 못할 얼굴. 그 얼굴은 죽립에 묻혀있던 백무엽의 진짜 얼굴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단리음은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창백한 뺨에 아름다운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나의 관상이 아주 좋다고. 나는 한 마리 천룡(天龍)에게 납치될 용모라고!"
단리음은 화사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가 바로 천룡일지 모른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