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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괴물 백과 사전 시리즈로, 이전에 정리하지 못한 괴물들을 추가로 정리한 증보 71~80편 항목으로 올리는 한국의 괴물 들입니다.
괴물을 정리한 기준은 이전과 같습니다. 즉, 기록과 기록자, 기록시기가 분명한 18세기 이전에 확인된 각종 괴물들만을 정리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에 기록된 괴물, 작자가 불분명한 문헌에 기록된 괴물,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 기록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괴물 등등은 모두 뺐습니다.
비슷한 괴물들끼리는 기록을 합쳐서 하나의 보다 묘사가 풍부한 괴물로 정리했고, 반대로 이름이 같은 괴물이라도 현격히 모습과 습성이 다른 경우에는 다른 괴물로 분리해서 싣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괴물에 대한 설명은, 책에 언급된 그대로의 설명을 옮기는 것에 더하여, 다른 기록에 나오는 비슷한 괴물의 묘사, 비슷한 전설, 비슷한 괴물의 그림, 공예품의 모양 등등을 참조하여 덧붙인 것들이 있습니다.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기도 하고, 시대 상황을 파악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토론하거나 주석, 해설을 달아볼만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아쉬운대로, 일단은 일부에만 간단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대신 모든 괴물들의 그 기록 출전을 밝히고, 언제 어디서 목격되었는지를 최대한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괴물의 이름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제가 임의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피했습니다. 대신에 원전에서 괴물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을 최대한 그대로 발췌해서 옮겨 쓴 것을 항목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가능한 한 한자도 같이 표기했습니다.
이 자료에 괴물들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낸 그림을 곁들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대로, 일단은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들 중에서 분위기가 비슷하게 맞는 부분 일부를 발췌하여 참고해 볼 만한 자료로 같이 실었습니다.
71. 취모 (翠毛: 푸른 비취 빛 털이라는 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청채 해태 연적, 공공누리1)
깊은 산에 사는 아주 커다란 짐승인데, 본 사람이 없으므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다만 아주 기다란 파란 비취색 털로 뒤덮인 집승이라 나무 가지에 털이 빠진 것이 걸려 있는 흔적으로 나타난다. 털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이 걸려 있다. 그렇다면 발바닥에서 어깨까지의 높이만 2미터에서 3미터 정도는 될 것이므로 대략 기린이나 코끼리 크기 정도는 되는 짐승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만하다.
봄, 여름에 진흙에 빠진 이 짐승의 발자국이 발견되는데 앞 뒤의 크기는 차이가 없지만 크기는 한 자 반, 곧 40~50 센티미터 이상이라고 한다. 털은 자세히 보면 짙은 푸른 색이고 길이는 말꼬리 정도이고, 굵기는 가는 노끈 정도라고 한다. 나무 껍질을 물어 뜯기도 한다. 아주 깊은 산 속만을 돌아 다니는 있는 짐승이라 나이가 많은 승려도 단 한 번도 이 짐승을 본 적은 없다고 하는데, 금강산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온다.
* 털이 걸린 위치가 높은 것으로 보아 덩치가 매우 거대한데, 앞 뒤 발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잘 달리는 네 발 짐승의 모양일 듯 합니다. 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털이 많이 나고 북실북실하면서 긴 짐승일 듯 합니다. 나무 껍질을 뜯는 다는 것을 보면 이빨도 무척 크거나 억센 듯 하다고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흔적은 발견되지만 아무도 실체는 본 적이 없는 짐승, 사람의 눈에 절대 발견되지 않으면서 깊은 산 속 어디인가에 있기는 있는 짐승이라는 특성이 재미로 전설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무서운 몸집이나 특이한 털, 이상한 색깔이라는 이 짐승에 대한 묘사는 "산예" 항목에서 언급한 사자를 한국 전설 속에서 환상적으로 상상한 모습과 닮은 느낌도 약간은 있어 보입니다.
72. 장량이 (張兩耳:두 귀를 펼쳤다는 말)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자용, 공공누리1)
물에 사는 커다란 뱀 모습의 짐승인데 공격할 때는 물결 가르는 소리를 크게 낸다. 머리에 귀가 둘이 있어서 귀를 활짝 편 모양으로 달려 든다. 그 뱃속에는 또다른 물고기가 본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눈이 두 개 있다고 한다. 그것은 여어(黎魚) 혹은 가물치인 듯 하다. 그 뱃속의 모양이 껍데기인 뱀 모양을 조종하는 듯이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큰 연못 물풀 사이에 숨어 살지만 사람에게 당한 원한을 아주 오랜 기간 잊지 않고 사람을 공격한다. 이것의 쓸개는 좋은 약이 된다. 사람에게 공격 받아서 생긴 칼날 조각 같은 것을 몸 한 곳에 가진 채로 오래토록 살아가는 수도 있다.
박명현(朴命賢)이라는 군인이 1589년 경에 근 연못 가에서 놀다가 커다란 여어, 내지는 가물치를 발견했는데, 작은 활촉 깎는 칼로 찔렀더니 물고기가 뛰어 오르며 피해 칼날이 부러뜨리고 도망쳤다. 17년 후, 같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물소리가 들려오길래 돌아 보니, 두 귀를 펼친 커다란 뱀이 공격해 오기에 재빨리 피했다. 그리고 말채찍으로 뱀을 공격하고 주변 아이들이 돌을 던져 뱀이 늘어졌는데, 누가 뱀 쓸개는 약이 된다고 해서 배를 갈라 보니, 눈동자 둘이 있고 거기에 칼이 들어갔을 때 쇠 부딛히는 소리가 들리기에 살펴 보니 17년전 공격했던 칼날이 박혀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 사이에는 여어(黎魚) 혹은 가물치가 뱀이 된다고도 하고 뱀과 통한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온다.
* 여어라는 말은 직역하면 까만 물고기라는 뜻인데, 가물치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연못의 물풀 사이에서 발견했다는 첫 대목을 보면, 여기서도 가물치 또는 가물치를 닮은 물고기로 보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머리 부분에 이상하게 튀어 나온 부위 같은 것이 있는 뱀 종류가 세상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비슷한 짐승이 다른 물고기를 삼킨 모습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뱀인데 귀가 있는 형태라는 점에서는 "인갑여전" 항목과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가물치과 뱀과 결합한 형태 또는 가물치가 뱀과 비슷한 이상한 것으로 변신한 형태로 아주 오랫 동안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가 복수하려 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으며, 복수하려는 마음을 오래 품고 있었다는 점이 무섭다는 쪽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물치가 변한 형태라는 것을 보면 전체 모습이 새카만 색이고 물고기를 조금 더 닮은 모양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며, 뱃 속에 가물치의 눈과 입 모양을 닮은 형체가 그대로 들어 있어서 꿈틀거리거나 따로 움직인다는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싶습니다.
73. 산발지지 (散髮至地: 풀어 헤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라는 말)
(태상감응편도설언해 중 삽화)
귀신의 일종으로 발뒤꿈치까지 닿는 긴 감색 옷을 입고 산발한 머리가 매우 길어 바닥에 닿을 정도인데 그 머리카락 사이의 두 눈이 고리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당당하게 사라져 달라고 말하면 큰 바람을 일으키며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다. 가까이에서는 노린내가 아주 강하게 난다.
조선 전기 성수침이 서울 백악산의 청송당에 있을 때 황혼 무렵에 홀로 있을 때, 이것이 갑자기 나타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지만 답이 없었고 가까이 오라고 하자 가까이 왔다고 한다. 도적이라면 가져 갈만한 물건이 없고, 귀신이라면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른 법이니 빨리 가라고 하자 사라졌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온다.
* 긴머리를 풀어 헤친 전형적인 옛 귀신 형태에 속한다고 할만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늘어 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이상한 눈빛이 보이는 형태는 최근 영화 속에서 특히 유행한 형태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다만 입고 있는 옷이 흰 옷이 아니라 감색 옷이라는 점은 특이합니다. 특별히 말을 하지 않고 문득 홀로 있는 사람을 겁주며 나타났다가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또 말 없이 사라진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봉두귀물" 항목에서 설명한 전통적인 귀신과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더 신비롭고 한편으로는 당시 기준으로는 특이한 모습인 느낌입니다. 강한 바람과 냄새가 있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 귀신의 홀연한 등장과 사라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바람과 냄새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봄직도 합니다.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74. 도전복 (倒箭箙)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조도 중 발췌)
대단찮아 보이는 간단한 파랑새, 곧 청조(靑鳥) 모양의 새다. 그러나 화살을 아주 잘 피해서 도저히 맞힐 수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크기는 제비보다 조금 작은데, 금산에 있었다고 한다. 도전복은 이 새의 별명인데, 말 뜻 그대로 풀이하면 화살통을 엎는다는 뜻으로 활로 쏘아 잡으려면 잡을 듯 잡을 듯 놀리듯이 못 잡게 되어 화살만 낭비하게 되는 새이므로 "화살통털이"라는 말이다. 사간공(司諫公)이 아주 품질이 좋은 남읍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 즉 남읍전죽(南邑箭竹)을 이용해서 한 발을 쏘아 이 새가 화살을 피하게 하고 뒤이어 한 발을 더 쏘면서 새가 움직일 방향을 예측해서 쏘아서 결국 맞추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온다.
* 사간공은 "어우야담"의 저자인 유몽인의 조상인데, 사간공이 남겨 둔 화살을 사용한 사람은 모두 무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파랑새 곧, 청조는 중국 고전에서 신선 서왕모가 황제에게 뜻을 전하는 사자로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어서 흔히 조선시대의 시에서도 사신이나 사자를 상징하는 말, 또는 신령스러운 것의 뜻을 전하는 사자를 상징하는 말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효에게 관음보살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나타난 새로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새로 청조가 나타나기도 하고, "동국여지승람"에도 통청군 바닷가의 금란굴 안에는 관음보살이 있는데 청조가 그곳을 드나들고 있다는 전설이 실려 있습니다. 한편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는 죽은 귀신의 뜻을 전하는 동물로 청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화살을 극히 잘 피하며 화살 쏘는 사람들을 놀리듯이 하는 도전복 이야기에도 이런 식으로 어떤 알 수 없는 신령스러운 것이 보낸 사자라는 느낌이 있어서 사람들이 더 잡으려고 애썼다는 것으로 상상해 볼 여지도 있겠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어우야담"에는 새끼를 뱀에게 잃은 학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 불러오는 제비 보다는 크고 비둘기 보다는 작은 다른 청조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이 청조는 홀연 나타나 홀연 사라지는데, 뱀의 머리 위에 앉으면 뱀이 턱이 빠지면서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역시 작은 새인데 그 새가 머리 위에 앉으면 그것은 죽게 된다는 점에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분위기는 여러 청조에 관한 이야기나 도전복 이야기와도 통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75. 백죽모 (白竹帽: 흰 대나무 모자라는 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 신중상, 공공누리1)
사람의 모습인데 머리에는 대나무로 만든 흰 모자를 쓰고 있고, 얼굴이 검고 수염이 매우 많이 나 있다. 흰 모자에는 새끼줄로 만든 끈이 있어서 턱에 걸쳐 쓰게 되어 있다. 귀신의 일종인 듯 한데, "사장(舍長)"이라는 칭호로 부르는 자신의 우두머리를 떠 받들고 있고, 수십명의 그 무리를 이끌고 있는 앞잡이 같은 역할을 한다. 사장이라고 하는 귀신은 전설 속에서는 여자인데, 역시 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는 원정(圓頂)이라는 둥근 모자 형태이고 옷차림은 백납(白衲) 차림이라고 하여 스님들이 입는 옷 비슷한 흰 옷을 입은 듯 하다. 이것의 무리는 숫자가 많은데 머리를 마구 풀어 헤치고 누더기 옷을 입은 남녀의 모습으로 매우 시끌벅적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사장과 함께 무리지어 집에 한번 찾아 오면, 밥과 고기를 내어 놓으라고 난리를 치며 밤새 집안을 헤집어 놓는다. 그러는 중에 집의 가구를 부수어 놓고 온통 집을 더럽혀 놓으며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사람을 때리기도 한다. 사람이 도망쳐서 다른 집에 가 있으면 죽을 때까지 따라가는 수도 있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사장은 두견화(杜鵑花) 꽃으로 만든 전을 비롯해서, 떡, 각종 진귀한 음식을 달라고 하고는 단숨에 먹어 치우는 대식가인데, 만약 음식을 주지 않으면 사람을 괴롭힌다. 가끔 마지막으로 한번만 음식을 화려하게 차려주면 영영 떠날거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래 보았자 거짓말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서울 낙산 아래 소용동(所用洞)에 살던 과부 안(安)씨가 세상을 뜬 뒤에 이야기 속의 사장으로 변해서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어우야담"에 나온다.
* "어우야담"의 이야기에는 안씨가 생전에 항상 염불을 하며 채식을 하고 둥근 갓을 만들면서 검소하게 살면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금욕적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그 뒤에 위와 같은 귀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욕구를 참는 것을 중시하거나 채식을 해야 하는 것이 좋다는 불교 풍습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담긴 조선시대의 전설로 보입니다. 못 먹어서 먹을 것을 달라는 귀신 떼거리가 몰려 든다는 이야기이므로 일종의 "걸신" 이야기, "걸신 들리는 이야기"의 한 형태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76. 반동 (班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흉배, 공공누리1)
호랑이 종류인데, 얼룩무늬가 특이하게 되어 있어서 "얼룩이"라는 뜻으로 "반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사람을 따르지만, 돌변하여 사람을 잘 잡아 먹게 된 짐승이다. 간단한 사람 말하는 소리를 흉내낼 수가 있어서, 사람이 반동이 내는 사리를 다른 사람이 부르는 줄 알고 소리 나는 쪽으로 나가면 습격해서 잡아 먹는다. 특히 조선시대의 직위 명칭 중 하나인 "권농(勸農)"이라는 말을 둔덕리(屯德里)라는 곳에서 배워서, 둔덕리의 권농을 부르는 것처럼 "둔덕리 권농 권농"하는 말 소리를 내어 사람을 꾀어 냈다고 한다. 예전에 칼 공격을 당해서 발 뒤축이 조금 잘려 나간 모습이다. 많은 사람을 잡아 먹어 일대에 큰 화가 되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서 김제의 한 승려가 우연히 기르게 된 아기 호랑이가 도망친 후에 사람을 공격하게 되었고, 둔덕리는 남원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 호랑이에 대한 공포가 심해져서 사람 목소리까지 흉내내는 무서운 것으로 과장된 이야기가 지금의 전라북도 이야기에 돌았다가 수집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시대 전설인만큼, 불교 승려가 산에서 아기 호랑이를 길렀는데 무서운 맹수가 되었다는 도입부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약간 배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77. 거악 (巨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원춘천 청평사 극락보전 용두, 공공누리1)
순천 근처의 바다 속 어느 곳에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한겨울에도 벗은 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의 큰 전복을 따기 좋은 곳 즈음에 이상한 괴물이 사는데, 사람을 한 번에 물어 죽일 수가 있을 정도로 크다. 정확한 모습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물고기의 일종인 것처럼 설명되어 있다. 이 물고기는 쇠붙이를 무서워해서, 전복 따는 사람들은 작은 칼에 방울을 단 채로 들고 들어 가서 방울소리로 이런 괴물을 쫓으려고 한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이야기와 같이 다음의 내용도 실려 있다. 변방을 돌던 관리가 물놀이를 벌여 놓고 전복을 따오라고 몰인(沒人)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켰는데, 물 속에 들어갔다가 이상하게도 입을 딱 벌리고 웃는 얼굴로 물 밖에 떠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떤 무서운 것의 습격을 받아 허리 아래가 도끼로 잘린 것처럼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권준(權俊)이 순천 부사가 되었을 때, 어부에게 바다에 들어가게 했더니 물 속에서 거악(巨鰐)이라는 짐승에게 옆구리가 물려 고통 받다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같이 엮여 실려 있다. "어우야담"에 나와 있다.
* 물 속에서 이상한 것의 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 세 편이 한 항목으로 연결되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첫 번째 이야기는 "어우야담"의 저자인 유몽인이 집에 있던 궁매(宮梅)라는 노비가 고향 순천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해 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희생자는 물 속에 들어 가서 전복을 따던 사람인데 전복 열 개를 한 꿰미로 엮어 거래해야 하는데 아홉 개를 땄을 때 괴물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만 두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하나만 더 따오라고 하는 바람에 다시 물 속에 들어갔다가 공격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관청이나 관리에게 명령을 받거나 물건을 바치려고 어민들이 고생하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관청의 횡포를 비판하려는 느낌도 어느 정도는 서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전복을 따는 일이 어머니와 딸, 여성들이 하는 일로 묘사 되어 있어서 요즘의 해녀 문화와 비슷하다는 점도 눈에 뜨이고, 해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방울을 단 칼을 쓴다든가 하는 묘사나, 물 속에 잠수하는 사람을 "몰인"이라고 불렀다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원문에는 해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표주박을 들고 바다에 가서 작업 중 물에 떠올라야 할 때는 물에 뜨는 표주박을 이용해서 떠올랐다고 하는데, 숨을 참았다가 몰아 쉴 때 마다 휘파람 소리가 났다는 묘사도 있습니다.
한편 "거악"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거대한 악어라는 뜻인데, 실제로 거대한 악어가 순천 근처의 바다 속에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므로, 막연한 바닷 속의 무서운 괴물의 이름으로 적합할 것으로 생각하여 "거악"을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사람이 당한 형태를 보면 어찌 되었건 입이 상당히 큰 괴물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78. 장고장각 (長股長角: 다리가 길고 더듬이도 길다는 말)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초충도 8폭 병풍 중 발췌, 공공누리1)
매우 먼 옛날에 묻힌 이상한 보물이 있는 곳 근처에 있는 벌레인데, 다리가 길고 더듬이(혹은 뿔)도 긴 모양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모질고 사납게 생겼다. 보물이 될만한 커다란 은 덩어리를 상징하는 벌레이므로 아마도 크기도 보물로 거래하는 커다란 은 덩어리 정도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양주 송산리(松山里) 황금산(橫琴山)에 옛 집 터가 있었는데 평난장자(平難長者)라는 사람이 먼 옛날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 최철견(崔鐵堅)의 아들 최연(崔衍)이 집을 지으려다가 꿈에 나온 신령스러운 사람이 땅을 파면 은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땅을 파보았더니 이 이상한 벌레가 나타나서 흙을 덮었다고 한다. 다시 꿈에 그 사람이 또 나타나 더 깊이 파 보라고 하기에 다시 더 깊이 파 보았더니 이번에는 벌레는 없고 자신이 그 곳을 파내게 된다는 예언이 새겨진 흙벽돌 하나가 나왔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와 있다.
* 중국에서 유래해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유행했던 전형적인 신비로운 고대의 예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불교 문헌의 옛 이야기에서 흔히 나오는 "장자"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의 전설과 엮여 있다는 점은 특색 있어 보입니다. 아마 천년 이상 보물이 묻혀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은이 있다고 해서 파 보았는데, 은은 나오지 않고 이상한 벌레 한 마리만 나왔다는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벌레는 사람에게 귀하게 사용되어야할 은, 귀금속, 보물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묻혀서 아주 오래 있게 되면 그 순리에 어긋나는 기운이 모여서 벌레가 생기게 된 것이라거나 혹은 보물 그 자체가 변해서 생긴 보물 벌레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을 듯 싶습니다.
79. 대여구릉 (大如丘陵: 언덕 만큼 크다는 말)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호랑이 목각인형, 공공누리1)
깊은 산에 사는 이상한 짐승인데 크기가 대단히 커서 언덕과 같은 정도 크기이다. 산 속에 있는 절에서 공부하던 한 선비가 달밤에 한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서인가 소만큼 큰 커다란 호랑이가 아주 빠르게 달려 와서 절간 한켠에 숨으려 하기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선비는 이 호랑이를 보고도 놀랐는데, 그 후에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짐승이 따라 들어 와 한입에 호랑이를 무는 장면을 본다. 호랑이는 이것의 입에 물린 채로 허공에서 바동거렸다. 이 거대한 짐승은 커다란 호랑이를 먹는 것을 마치 고양이가 쥐를 먹는 듯 했다고 하며, 짐승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은 제대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고 하고 있다.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 "어우야담"에는 호랑이를 간단히 잡아 먹을 수 있을 만한 산 속에 사는 무서운 짐승에 관한 이야기를 두 가지 소개하면서 이 이야기와 사자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우야담"에서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짐승이 중국 고전에서 언급되던 "표잔(彪虥)"이라는 말로 부르던 짐승이 아닌가 추측하는 말이 덧붙어 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호랑이 보다 더 강한 짐승은 없을까"라는 상상에서 연결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크기가 아주 크다는 것 이외에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는 적은 편인데, "어우야담"에서 이 짐승을 "표잔"이라고 불렀다는 점을 받아 들인다면 아마 그 모습도 삵쾡이, 사자, 호랑이, 표범 등의 짐승과 비슷한 모습인데 크기가 거대한 형태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80. 담부 (啖父)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동사자모양향합 뚜껑 부분, 공공누리1)
여우와 비슷하지만 다른 짐승으로 자신의 아비를 잡아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비를 삼킨다는 뜻의 한자를 써서 "담부(啖父)"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비슷하게 거미는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거스른다는 뜻의 한자를 써서 "거모(据母)"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덕무의 "양엽기"에 나와 있다.
* "양엽기"의 내용은 지금 담비라고 부르는 짐승을 옛날 발음으로 "담부" 비슷하게 발음하는 지역이 있었고, 지금 거미라고 부르는 벌레를 옛날에는 "거모"라는 발음으로 부르는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민간어원 소문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대단히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상징할 만한 두 짐승을 소개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짐승들의 세계는 사람의 도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담비 가죽은 사치품을 만드는데 많이 활용되었지만 서울의 선비들은 이 짐승의 실제 습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므로 담비에 대해 그 모습과 습성에 대해 이상한 이야기가 도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담비가 나무 속에 우연히 꿀이 들어 있는 것을 잘 찾아내는 재주가 있어서 나무에 구멍을 낸 뒤에 거기에 꼬리를 담가서 꿀을 적신 뒤에 빨아 먹는다는 이야기가 "청장관전서"에 나와 있기도 합니다.
그 모습에 대해서도 엉뚱한 소문이 많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19세기의 기록인 "송남잡지"에는 춘천 등지의 깊은 산에 사는 개와 비슷한 짐승이 담부라고 설명하면서, "담부(潭夫)"라고 표기했습니다. 특히 "송남잡지"에서는 중국 고전에서 곰, 호랑이와 맞먹는 매우 강한 맹수로 자주 언급되던 "비휴(豼貅)"라는 전설 속의 짐승이 사실은 담부라고 주장했습니다. 비휴는 흔히 용맹한 군사들의 행렬을 상징하는 맹수로도 고전에서 매우 많이 활용되던 짐승인데, 현대 중국에서는 돈이 많이 모이는 것을 상징하는 짐승이라고도 흔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남잡지"에서는 비휴가 바로 조선의 담부라고 하면서, 담부는 개들이 떼지어 다니듯이 산에서 용맹한 군사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는 짐승이며 그렇게 군대처럼 행렬을 만들어 다니는 습성 때문에 호랑이라고 하더라도 대적하지 못한다는 당시의 속설을 기록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춘천 지역 산에서 담비가 발견된 것을 보면 신기한 기록이기는 합니다. 이렇게 보면 실제 담비와는 다른 조선 시대 헛소문 속의 "담부"는 담비 보다는 좀 더 개에 가까운 모습이고, 호랑이와 대적할 정도라니 크기도 좀 더 크고 이빨과 발톱도 강했을 것이며, 군대처럼 행렬을 지어 서로 규율에 따라 합심해서 싸우는 다니는 맹수이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비를 먹는 것을 꺼리지 않고, 꿀을 찾아내어 꼬리로 적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이상한 짐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득야즉광 (得夜則光: 밤이 되면 곧 빛난다는 말)
밤 중에 신비롭게 마치 별 빛, 내지는 유성과 같은 빛을 내는 신비로운 것으로 대단한 보물이나 신령스러운 물건처럼 보이는 것인데, 낮에 보면 볼품 없는 썩은 나무, 곧 "후목(朽木)"일 뿐이다. 아마도 나무가 썩으면서 거기에 생긴 더러운 물이나 벌레 따위에서 가끔 밤에 반짝거리는 것이 생긴 것 뿐인 듯 하다.
조선 중기에 정엽이 보았다고 하며, 허무한 마음에 뭔가 교훈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후목설(朽木說)"이라는 글을 써서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나온다.
* 괴물 이야기라기 보다는 주위의 환경에 따라 굉장히 좋아 보이는 것도, 분명히 객관적인 상황에서 잘 살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이야기 자체의 교훈에 이어지도록 이야기 뒤에,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이 처음 이 이야기의 앞 부분을 쓴 종이가 어느 의원 집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의원이 글재주도 뛰어 나다고 생각해서 대단하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양반인 정엽이 쓴 글이라서 별 대단치 않게 여기게 되었다는 사연도 이어져 있습니다.
신비로운 괴물에 가까운 현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자연 현상일 수도 있다고 보고, 일단 괴물로 정식 편성은 하지 않고 간단히 덧붙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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