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호정과 용산의 풍류
1. 용산의 역사와 지명
⑴ 용산의 위치와 산이름
① 용산의 위치
용산(龍山)이란 산은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4가, 산천동와 마포구 도화동, 마포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그러나, 용산이 산(山)이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선 산처럼 보이진 않고 하나의 언덕으로 보인다.
집들이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용산 남쪽 산비탈과 그 북쪽 언덕으로는 나무들만 없을 뿐이지 용산의 형상은 거의 제대로 나와 있었다. 만약, 그 집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무들을 심고 찢겨 나간 언덕 일부를 옛날 모양대로 복원했더라면 용산의 산모양은 옛날처럼 제대로 살아나 한강 경치를 즐길 좋은 명승지(名勝地)가 되어 관광 장소로도 크게 발돋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치가 좋았던 그 용산 산억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무방비로 서서히 무허가 주택들로 덮여 가더니 지금은 산자락을 가득 메운 아파트 건물들 지금은 산천동쪽으로는 삼성리버힐아파트가, 도화동쪽으로는 현대아파트, 우성파트가 가득 들어차 있다.
이 빼곡이 들어차 완전히 산머리를 가리고 말았다.
이 산이 그 유명한 옛날의 용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산천동 언덕이나 원효로4가 끝머리 정도로나 알고 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만 하더라도 이 산과 그 일대를 거의 모두 ‘용산’으로 불렀다. 그렇던 용산은 뒤에 한강로쪽에 용산역이 생기고 그 곳이 상권 지역으로 발달해 가면서 ‘용산’이란 이름은 차츰 그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본래의 용산 지역과 새로운 용산 지역이 생기면서 ‘구용산(舊龍山)이니 신용산(新龍山)이니 하는 이름으로 구분지어 말해 오기도 했다.
-용산역. 1900년 7월 8일 경인선의 보통역으로 7.5평의 목조건물로 축조되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1906년 11월 1일 경의선의 시발역으로 목조 2층(일부 3층)의 서양식 건축으로 준공되었다. 1925년 경성역사(서울역사)가 준공되기까지 서울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사였다.
요즘에 와서는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 주위의 너른 지역을 우선 떠올린다. 그래서 ‘용산에 산다.’고 하면 지금의 원효로4가쪽이 아닌 신용산, 즉 한강로 일대의 어디쯤 사는 것으로 알게끔 되어 버렸다.
경치가 좋았던 '용산'이란 산은 이제 우성아파트, 현대아파트, 삼성파트 등 아파트군에 묻혀 그 옛날의 정취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원래의 '용산'이었음을 '용산성당'과 그 아래 '용산신학교' 자리가 용산의 원터였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② ‘용산’이란 이름
용산(龍山)이란 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었다.
'용산'은 지금은 종로구, 중구, 마포구처럼 하나의 서울의 구(區)의 이름으로 또는 지역 이름으로 주로 통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북악산, 남산, 인왕산 등과 같은 하나의 산이름이었다.
요즘에 와선 이 지명이 자주 뉴스상으로 많이 나옴으로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이젠 외국에까지 더욱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어 버렸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용산전자상가, 용산가족공원 등의 민간 이용 시설들이 들어서고, 용산 미군 부지의 이전 소식과 더불어 최근 용산국제업무단지 용산구 한강로3가 용산역 철도기지창, 서부이촌동 일대에 들어설, 국제업무·상업·문화·주거시설 등 용산역세권 국제업무지구. 철도청 부지와 서부이촌동 지역을 통합 개발, 용산을 국제업무기능을 갖춘 서울의 부도심으로써의 위상을 확보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수변도시로 조성하게 된다. 111층 620미터 높이의 랜드마크타워 등이 들어선다.
건설이라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까지 가세되면서 사람들의 귀에 크게 익숙해진 지명이 되었다.
‘용산’이란 산은 둔지산(屯之山), 와우산(臥牛山), 절두산(切頭山)과 함께 한강변에 있는 산으로, 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였다.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의 기(氣)를 이어받은 인왕산(仁王山)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을 거쳐 서쪽으로 뻗어 내렸다. 효창공원을 좌측에 두고 서남쪽으로 벋어 내려가 하나의 산머리를 이루고 나서 한강가에서 마무리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한강가에서 머리를 불끈 솟군 산이 바로 용산인데, 한강물 앞에서 머리를 내밀고 물을 먹는 용(龍)의 머리 모양과 같아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추모현. 지금의 무악재. 영조가 부친 숙종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넘어다녔다 하여 붙은 이름.
이 되고, 거기서 한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 약현(藥峴), 만리현(萬里峴) 지금의 만리재. 큰 고개라 하여 ‘대현(大峴)’이라고도 했다.
⑵ 각광받은 용산 용머리 일대의 경치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산수의 형세가 매우 좋았던 용산 지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 위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귀인들의 별장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었다. 지금도 그 명칭이 남아 있는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심원정(心遠亨) 등이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조선시대에 때 삼호정과 심원정에서 이루어지던 명사 미인들의 시회(詩會)도 꽤나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산의 자연 환경 가운데에서도 문헌 자료에 용산팔경(龍山八景)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용산 산마루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용산 지역에는 인가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선박이 정박하던 용산강 용산 앞의 한강 이름. 용강(龍江) 또는 용호(龍湖)라고도 불렀다. 강기슭 옆 산비탈에는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독서당. 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산비탈, 한강이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신자 이승훈(李承薰) 의 호가 ‘만천(蔓川)’인데, 이것은 그의 집이 만천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인다.
-만천. 일제 강점기에는 욱천(旭川)으로도 불렸다. 이 물줄기는 복개되어 한때 농수산물 시장이 되었다가 그 시장이 가락동으로 이사간 후에 현재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섰다.
반면에 이곳은 수운(水運)의 요충지로 인정 받아 조선시대에는 수로전운소(水路轉運所)와 군량을 저장하는 군자감(軍資藍)의 강감(江藍) 지금의 원효로3가 1번지
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훈련도감의 군량미를 저장하던 별영창(別營倉) 등 중요한 창고들도 자리잡고 있어 이들을 운반하던 선박과 인마가 수시로 왕래했전 지역이었다.
성종 24년(1493)에 세워진 독서당(讀書堂)은 현재의 청암동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인가가 적고 경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 독서당은 용산강이 남호(南湖)로 불렸기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으로도 불리면서 인재들이 선망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때 폐지되고 말았고 개화기 이후에는 영국인과 일본인의 별장으로 전락하는 애환을 맞기도 하였다.
⑶ 용산 한강변의 자연
① 용머리
‘용머리(龍頭)’라고 불리던 곳은 지금의 용산성당이 위치한 삼호정고개 지금의 용산성당 근처의 고개로, 서낭당이 있어 ‘서낭당고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다
의 서쪽인 청암동(淸岩洞) 용산구의 법정동들 중 가장 서쪽의 동(洞). 산천동 옆동네로, 행정상으로는 원효로2동 관할.
한강변이었다. 또 옛 지도들을 통해 서울의 산세를 살펴볼 때도 인왕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산맥 한 줄기가 아현과 만리현을 지나 서남쪽으로 달리면서 용산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산줄기가 북악(北岳)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이다.
청암동 중에서 한강으로 불쑥 머리를 내민 부분을 용의 머리 같다 하여 ‘용머리’라고도 했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부루배기’ ‘부루배기’란 이름은 전국에 많은데, 대개 산자락이 불쑥 머리를 내밀거나 지대가 솟아보이는 지역에 이러한 지명이 붙는다.
라 부르기도 했다.
이 곳은 한강 물줄기가 휘어도는 곳으로 언덕 위는 경치가 나무 좋아 많은 이들이 탐내던 곳이었다. 자유당 시절의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섰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로, 그 자리는 용의 왼쪽 눈자리라 하여 풍수학상으로도 길지(吉地)로 쳐 왔다.
② 용산강
서울 지역을 흐르는 강줄기에서 용산 앞쪽으로 흘러가는 부분을 따로 ‘용산강(龍山江)’이라 했고, ‘용호(龍湖)’, ‘용강(龍江)’이라고도 불렀다.
서울의 한강은 그 흐르는 지역에 따라서 부르는 이름이 달랐는데, 지금의 동호대교가 있는 근처는 동호(東湖), 금호동과 옥수동 앞 부분은 금호(金湖), 노량진 앞 부분은 노호(露湖) 또는 노강(露江), 마포 앞 부분은 마포강 또는 마호(麻湖), 신촌 부근에선 서호(西湖) 또는 서강(西江)이라고 불렀다.
용산강은 용산의 용머리 부분을 휘돌기 전의 한강 물줄기여서 물살이 고르지 않아 사고가 잦았다. 또한 용산강에 접하는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는 여름 장마철이면 침수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해마다 지역 부군당에서 수해가 없기를 빌곤 했다. 이 일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독 부군당이 많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에는 한강의 수위에 신경을 써 용산강 언덕 아래쪽에 수위측정소 정식 이름은 구용산 수위관측소(舊龍山 水位觀測所)이다. 이 수위관측소는 한강의 수위를 자동 관측하기 위해 한강변에서는 최초로, 전국에서는 아홉번째로 세워진 자기관측소(自記觀測所)이다. 1924년 12월에 조위(潮位)와 홍수위(洪水位) 측정에 적합한 철근콘크리트 우물통 형식으로 세워졌다. 1925년 1월에 관측이 정식으로 개시되었고, 1976년 9월까지 실제 수위 관측이 이루어지다가 1977년 폐쇄되었다.
를 세워 놓기까지 했다.
한강의 그 어느 지역보다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 많은 이들의 시심을 돋구었던 이 용산강은 일제 강점기에는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되었고, 그 한켠에 있는 나루에는 노량진 방향으로 건너가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③ 덩굴내(만초천)
덩굴내는 인왕산과 안산에서 발원하여 청파동을 거쳐 지금의 용산전자상가 지역을 지나 원효로4가 현대자동차서비스 바로 남쪽의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덩굴내에서 사람들이 밤에 불을 켜 들고 게를 잡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어 ‘만초해화(蔓草蟹火)’라 하여 용산팔경 용산팔경(龍山八景) ;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
에 나온다.
이 덩굴내는 옛날에 덩굴풀이 많아 한자로는 만초천(蔓草川) 또는 만천’(蔓川)이라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장마 때 한강에서 밀려 들어오는 물을 막기 위해 내의 양쪽에 둑을 쌓고 그 위를 도로로 이용케 하였다. 당시에 이 내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한강통(漢江通)통으로, 북쪽은 ‘원정(元町)’으로 하였다. 한강통은 지금의 한강로, 원정은 지금의 원효로이다.
용산 지역의 개발이 본격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였다. 즉 이 때에 이르러 원효로(元曉路) 갈월동의 한강로에서 청암동의 대건로에 이르는 2.7km의 도로.
와 용마로(龍馬路) 지금의 백범로. 삼각지 로터리에서 공덕동 로터리에 이르는 2.2km의 도로.
가 확장․개통되었는데, 그 뒤에 바로 욱천(만초천) 복개 공사가 이루어졌다.
1981년 10월에 원효로(서부역~원효대교)가 크게 확장되면서 지역 재개발이 확대되어 나갔고, 농수산물시장 이 시장은 도심에 위치해 있어서 수송물 증가에 따라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렵다 하여 가락동으로 옮겨 갔다.
이 들어서 있던 원효로 만초천 복개지에는 1990년에 와서 용산전자상가가 들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 내의 양쪽에 쌓았던 제방 위의 도로는 6․25 전까지만 해도 원효로에서 한강로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양쪽 제방 사이로 콘크리트 다리가 3개 있었는데, 제방 비탈과 다리 밑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④ 벼랑창
청암동 앞의 한강 언덕은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강물이 이 언덕에 부딪쳐 돌면서 센 물살을 이루는데, 해마다 이 곳에선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 벼랑 일대를 ‘벼랑창’ 또는 ‘배랑챙이’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벼랑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고, 여기에 군사용 미곡(米穀)을 저장했던 별영창(別營倉) 선조 29년(1596)
이라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벼랑창은 너무나 잘 알려진 땅이름으로, 지금의 청암동 강변주유소가 있는 마을이 ‘벼랑창’이었고, 이 마을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산 끝자락의 고개는 ‘벼랑창고개’ 또는 ‘벼랑고개’라고 불렀다.
벼랑창 절벽의 남동쪽 1백 미터쯤 지점쯤에는 등대와 비슷한 모양의 수위측정소가 있다.
정조 원년(1777)에는 별영창 근처에 읍청루(挹淸樓)를 세워서 명소가 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도로와 주택만이 들어서 있다.
⑤ 여울목
‘여울목’이란 땅이름은 전국에 무척 많다. 이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일반명사에 가깝기 때문에 하천에서 여울이 심하게 이는 곳에 이러한 이름이 곧잘 붙는다.
용산에도 여울목이라 불리던 곳이 있다.
지금의 현대자동차 서비스공장이 있는 그 동남쪽 한강가가 바로 그 곳으로, 만초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이다.
한자로는 ‘탄항(灘項)’이라고 하는 이곳은 조선시대엔 용산방에 속한 21계의 하나인 ‘탄항계(灘項契)’라는 계(契)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서부이촌동 일부로 들어가 있다. 노들쪽에서 오는 한강물이 이곳에 이르면 만초천의 물과 부딪쳐 여울리 심하게 일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름이면 벼랑창 언덕과 함게 물놀이사고가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위 측정소가 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도 수해가 잦았던 용산 한강변 일대는 그 어느 곳보다 강물의 물높이(수위)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용산 지역이 물바다가 되었던 을축년 대홍수 이래로 일제는 강 양쪽에 둑을 쌓거나 강 바닥을 파내는 등 신경을 무척 썼는데, 이것은 용산 일대에 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데 대한 배려였다.
용산 한강변에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시설 즉 구용산 수위 측정소를 세워놓고 정기적으로 물높이를 관찰하기도 했다.
⑶ 용산 관할 지역의 변화
①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용산구 관할 지역
1943년 이전까지만 해도 용산구 지역은 지금의 관할 지역과 사뭇 달랐다.
지금은 용산구 지역이 용산이라는 산 남쪽 일대에 국한하지만, 일제 때의 용산구는 산 북쪽인 지금의 마포구 일부까지도 그 관할 구역이었다. 지금은 도화동과 마포동이 마포구에 속해 있지만, 도성 밖 대부분이 경기도에 속했던 일제 강점 초-중기에는 경기도 고양군의 용산면(龍山面)이었다. 지금의 용산구 일대뿐 아니라 마포구 일부도 옛날에는 용산면에 속했었다. 마포구 도화동 일대는 물론이고, 그 북쪽의 염리동(鹽里洞) 염리동은 마포에 들어온 생선을 절이는 데 필요한 소금을 공급해 주는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었다. 이 곳의 일제 때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경기도 고양군 용산면 염리(鹽里)였다.
근처까지 용산면이었다.
지금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들어간 밤섬, 즉 율도(栗島) 밤톨처럼 생겨 ‘밤섬’으로 불리웠는데, 한자로는 율도(栗島0이다. 일제 때는 그 옆의 여의도와 합하여 여율리(汝栗里)라 했다.
도 용산구에 속했었는데, 1943년에 마포구가 설정되면서 그 지역에 편입, 용산구에서 떨어져 나갔다.
일제 말기인 1944년 마포구가 새로 생기면서 1944년 10월 23일 고양군 연희면의 편입으로 마포구를 더 설치하여 서울은 8개구가 되었다.
용산구 일부였던 이 곳은 서대문구 애오개 서쪽의 마포 지역을 따로 묶어 마포구로 하면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②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용산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초기 백제였다. 마한을 정복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용산 지역도 자연적으로 백제의 정치권에 포함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어 용산지역도 77년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후 삼국이 통일되어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용산지역은 한산주, 한양군 등으로 관할을 바꾸게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정종 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열왕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부(漢陽府)였다.
용산은 고려 숙종 6년(1101) 남경(南京) 남경(南京)은 서울(수도)의 남쪽이란 의미로, 당시로서는 사실상 중수도(中首都)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후보지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충렬왕 10년(1284)에는 과주(果州) 지금의 과천시. 과천은 당시로서는 지금과는 달리 한강 북부에서 경기도 중남부 안산 지역까지를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의 용산처를 승격하여 부원현(富原縣)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용산은 한 고을 이름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치가 좋아 고려 때부터의 명승지로 알려진 용산은 임금도 와서 머물러 갔던 기록이 있다. 고려 충숙왕은 왕비와 함께 경치 좋은 이 곳에 행차하여 아들을 낳는 경사까지 있었다. 이 아들을 용산에서 낳았다고 하여 ‘용산원자((龍山元子)’라 하였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왕비는 산후가 좋지 않아 두 달만에 18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고, 여기서 태어난 그 아들도 얼마 뒤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7세의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충렬왕 때 부원현(富原縣)으로 개칭되었던 용산은 조선 태종 13년(1413) 고양현에 병합되었다.
③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도성외(都城外)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을 정하여 남쪽으로 한강과 노도(露渡) 지금의 노량진 앞의 강을 말하는데, ‘노호(露湖)’ 또는 ‘노강(露江)’이라고도 한다.
까지를 그 범위로 하고 있다. 이 때부터 용산구 일대가 한성부(서울)의 관할구역이 되는 것이다.
용산 지역은 성저십리로부터 일부 지역이 서부 반석방(盤石坊)의 관할하에 있다가 뒤에는 5부(部) 46방(坊) 제도에 따라 성외(城外) 지역인 서부 용산방(龍山功)․ 둔지방(屯芝坊)으로 되었다.
조선 초에 한성부에 속했던 용산은 조선 말에 경기도로 들어가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한 용산은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는 한성부(漢城府)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치면서 경기도에 편입한다. 다음해인 1911년 4월 경기도 도령(道令) 3호로 경성부 안에 5부 8면제 5부는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이고, 8면은 용산면龍山面, 서강면西江面, 숭신면崇信面, 두모면豆毛面, 인창면仁昌面, 은평면恩平面. 연희면延禧面, 한지면漢芝面를 말한다.
를 실시하는데, 이 때 용산방은 용산면이 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한강방(漢江坊)과 둔지방, 용산방 등이 한성부 행정구역에 새로 편입되고 있다.
④ 개화기 전후
용산 지역이 거주지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곳이 개시장(開市場) 조선 후기 중국·일본 등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 시장
이 되고 일본인과 청나라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되는 1884년 이후였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진영이 이곳에 들어섬에 따라 일본인들의 주택이 자리잡게 되었고, 예부터 간직해 온 풍경도 많이 변하게 되었다.
개시장이 된 후 용산 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개화의 물결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광무 2년(1898년)에는 옛 군자감의 강감 자리에 전환국(典園局) 조선 후기인 1883년(고종 20) 7월에 설치되어 1904년(광무 8)에 폐지된 상설 조폐(造幣)기관.
이 설치되어 동전을 주조하였고, 이것이 광무 8년(1904년)에 인쇄국으로 바뀌면서 우표, 인지 등 관청 인쇄물을 찍어 냈다.
1900년 1월 9일에는 남대문에서 서계동·청파동을 거쳐 원효로4가까지 전차가 개통됨으로써 서울 중앙으로의 교통도 더 편리해지게 되었다. 전차 개통식은 서울 경희궁 앞에서 1899년 5월4일 치러졌는데, 이용승객이 급속히 늘어나 같은 해 가을에는 전차노선이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1900년에는 구용산(舊龍山)이란 불린 지금의 원효로4가까지 연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 전쟁 때에는 일본이 용산~마포 사이에 군용 철도를 개통하였는데, 당인리 발전소(현 서울 화력발전소)로 통하던 철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훗날 용산 지역이 개발되면서 이 철도는 지역 개발에 장애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용산 지역은 개화기 때에 이르러 인구가 증가하고 나름대로의 발전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이곳의 역사가 한국 교회의 복음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개화기 때도 가장 먼저 이곳에 눈을 돌린 사람이 프랑스 성직자들이었고, 그 결과 여주 부엉골에 있던 성직자 양성소인 예수성심신학교를 1887년 3월에 현재의 원효로4가 현 성심여고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용산성당 50년사》
이에 대하여는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용산본당의 전신이 되는 ‘삼호정공소’의 역사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용산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행정 구역 이름도 변모하여 점차 오늘날의 구역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용산 일대는 성문 밖 10리 지역으로 서부 반석방(盤石행, 지금의 서부역 앞 중림동)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즉 영조 시기 이전에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용산방(龍山坊)이 설치되었고, 그 하부 행정 조직으로 21개의 계(契)를 두었다. 그러므로 용산 지역의 세부 행정 조직은 조선 후기부터 그 기초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⑤ 일제 강점기 이후
1911년 4월 1일 경기도 도령(道令)으로 경성부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도선 안은 5부 36방으로 하고 도성 밖은 8면으로 하였는데, 이 때 용산방은 용산면으로 한강방과 둔지방을 합하여 한지면(漢芝面)으로 하였다.
그 후 1913년 12월 11일 5부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8면 가운데 도성 근처에 있는 지역을 5부로 편입하였는데, 그 중 오늘날 용산 지역의 한지면과 용산면 지역은 한성부 서부에 편입되었다.
종전의 8면 가운데 경성부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은 전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함으로써 한성부는 한지면 등 6개면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부(部)․방(坊)․계(契)․동(洞)의 제도를 폐지하고,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정(町), 정목(町目), 동(洞)으로 하여 경성부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이로 인해서 용산구 지역은 경성부 직할 지역과 고양군 한지면의 일부가 되었다.
1914년 9월 27일에 이르러선 관할구역을 일부 변경하여 용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경성부 조례(條例)에 따라 4부(동부, 서부, 북부, 용산)를 두면서 용산은 용산출장소 관할이 된다.
1915년 6월 1일 총독부에서는 3부, 즉 동부, 서부, 북부의 출장소를 폐지하고, 경성부가 직접 관할함에 따라 용산은 경기도에서 경성부 소관이 된다. 1943년 4월 1일, 출장소를 폐지하고 전면적으로 구제(區制)를 실시, 서울에 7개구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영등포구, 서대문구 등 7개구.
를 설정하는데, 용산출장소는 ‘용산구가 된다. 행정기관 명칭은 ‘용산구역소’
그리고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으로 경성부의 행정 구역을 확대, 고양군으로부터 한지면, 용강면, 연희면 등의 일부를 경성부 용산지역으로 편입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용산출장소 관내에는 모두 47개의 정동(町洞) 정(町)은 일인들이 자기 나라의 행정구역 단위와의 일치를 위해 정한 것으로, 일인들은 이를 ‘마치’라 읽었다. 에를 들어 원정(元町)은 ‘모도마치’가 된다.
이 있게 되었다.
즉, 삼판통(三坂通), 강기정(岡岐町), 한강통(漢江通), 이태원정(梨泰院町), 한남정
(漢南町), 보광정(普光町), 주성정(鑄城町), 동빙고정(東氷庫町), 서빙고정(西氷庫町), 둔지정(屯芝町), 이촌정(二村町), 청엽일정(靑葉一町), 청엽이정(靑葉二町), 청엽삼정(靑葉三町), 경정(京町), 영정(榮町), 원정일정목(元町一丁目), 원정이정목(元町二丁目), 원정삼정목(元町三町目), 원정사정목(元町四町目), 암근정(岩根町), 산수정(山手町), 청수정(淸水町), 미생정(彌生町), 대도정(大島町), 금정(錦町), 신공덕정(新孔德町), 공덕정(孔德町), 염리정(鹽里町), 도화정(挑花町), 마포정(麻浦町), 토정정(土亭町), 용강정(龍江町), 대흥정(大興町), 신수정(新水町), 구수정(舊水町구수동), 현석정(玄石町), 신정정(新井町), 하중정(賀中町), 창전정(昌前町), 상수일정(上水溢町), 하수일정(下水溢町), 여의도정(汝矣島町), 당인정(唐人町). 서교정(西橋町), 합정정(合井町), 망원정(望遠町) 등인데, 이를 보면 지금의 용산구 관내 지역과 지역이 상당히 달라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 이름은 광복 후에 각각 후암동, 갈월동, 한강로, 이태원동, 한남동, 보광동, 주성동, 동빙고동, 東氷庫町), 서빙고동, 西氷庫町), 둔지동, 용산동4~6가, 이촌동, 청파동1가), 청파동1~3가, 문배동, 신계동, 원효로1~4가, 청암동, 산천동, 신창동, 도원동, 용문동, 효창동, 신공덕동, 新孔德町. 현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 공덕동, 염리동, 도화동, 마포동, 토정동, 용강동, 대흥동, 신수동, 구수동, 현석동, 신정동, 하중동, 창전동, 상수동, 하수동, 여의도동, 당인동, 서교동, 합정동, 망원동 등으로 바뀌었다.
이어 1943년 6월 10일 부령 163호에 의해 경성부에 구제(區制)를 실시, 용산출장소를 용산구로 승격하여 일정한 행정구역을 가진 경성부 하부 조직으로 용산구역소가 설치되고 구장(區長)이 임명되었다. 이 때의 용산구 관할 구역 35개의 정(町) ․ 정목(町目)이 있었다.
⑥ 광복 후
광복 후인 1945년 10월 16일 각 구의 구역소를 구청(區廳)으로 하였고, 구장(區長)을 지금과 같이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였다.
그 1년 후인 1946년 10월 1일에는 일제 강점기의 명칭을 일제히 정리하였다.
또, 새 규칙에 따라 정(町)은 동(洞)으로, 정목(町目)은 가(街)로 대부분 고쳤는데, 예를 들면 대도정(大島町)은 용문동(龍門洞)으로, 원정4정목은 원효로4가로 고치는 식이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서부 용산과 한강변 일대는 경정(京町, 영정(榮町), 원정(元町) 등 그들식의 지명이 너무 많아 이를 모두 고친 것이다.
당시의 용산구의 관할 동은 모두 35개로, 지금의 법정동의 수와 같고, 행정동수는 16개동이다.
그 후 경제발전과 인구 변동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을 거치다가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용산 한강변의 산천과 정자들
⑴ 용산의 용머리
① 용산과 용산강
용산(龍山)이란 지명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 기루왕 21년(A.D 97) 4월에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산세에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형체라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예부터 용은 길상의 상징으로 인간 성공의 길을 인도하는 영물로 보았다.
한강에 접해 있는 잠두봉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切頭山)을 일컫는 듯하다.
을 일명 ‘용산’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의 용산과는 거리가 있어 이는 동명이산(同名異山)으로 볼 수도 있다.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산천조에는 한강의 원류를 서술하는 가운데 강릉 오대산에서 발원한 한강은 서울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되고, 이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노량(露梁), 용산강(龍山江), 서강(西江)이 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보아 노량과 서강 사이에 용산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용산강의 명침은 한강이나 노량, 서강등의 명칭과 같이 독자적인 명칭이 아니라 용산이라는 산 아래 위치하였기에 그 명침이 붙은 것이다.
② 용산 산머리 부근
한강이 굽어돌고 있는 언덕으로 용산을 용의 머리로 보면 그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용산과 마포의 경계이 이 곳은 옛날에는 비탈이 심하고 밑으로 강물이 휘어돌아 작은 길조차 나 있지 않았었다.
'용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산의 이름으로, 용이 물을 먹는 모습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강변 산머리의 경치가 좋아 고려 때부터의 명승지여서 고려 충숙왕도 이 곳에 행차하여 아들을 낳는 경사까지 있었으나, 이 아기를 낳은 왕비는 산후가 좋지 않아 두 달만에 18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고, 여기서 태어난 '용산원자'도 얼마 뒤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7세의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⑵ 용산 한강변의 고개들
① 삼호정고개
삼호정고개하는 이름은 삼호정(三湖亭)이라는 정자가 고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지금은 지형이 많이 바뀌고 주위의 사정이 많이 달라져 그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으나, 일부 문헌을 참고해 보면 지금의 산천동 용산성당 동쪽 언덕일을 올라 그 너머 도화동 현대홈타운 방향으로 넘는 고개였던 곳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오정고개’라는 이름을 붙인 책도 있으나, 이는 ‘삼호정고개’의 잘못이다.
대개의 고개 이름은 고개 근처의 마을이나 이름난 바위 등의 이름이 들어간 이름으로 붙여지지만, 근처에 그리 이름난 마을이 없어서였는지, 고개 근처에 있던 삼호정 정자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삼호정 정자 근처에 있던 ‘삼호정’, ‘삼호정고개’라는 마을은 지금도 용산성당 후문 바로 앞쪽 언덕바지에 위치하고 있다.
새주소가 붙여지기 전까지는 이 마을과 용산성당 사이의 언덕길이 ‘삼호정길’ 지금은 효창원로 15길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이었으나, 지금은 새 주소가 생겨 길에서 이 이름을 글자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삼호정고개는 옛날에도 별로 이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개라고 해야 오솔길 같은 고개였고, 고개 양쪽(마포, 용산) 사람들의 생활권이 이 달라 별로 왕래가 많지 않았던 것. 더구나 길이 후미지고, 고갯길 주변의 숲이 무성해 조선시대에는 거의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 때까지만 해도 고개 양쪽 언덕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용산구쪽에 도원동(桃園洞), 마포구쪽에는 도화동(桃花洞)이란 이르밍 생겼다. 도화도은 토박이말로 ‘복삿골’이라고 불렀다.
, 그나마 나중에는 일본군 진지가 산머리에 넓게 자리를 잡고 주둔해서 양쪽의 왕래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삼호정고개’라는 이름도 차츰 사람들의 입에서 멀어져 갔다.
삼호정고개 근처로 성황당고개(서낭당고개)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에 와선 그 위치 확인이 어렵다. 다만, 지금의 효창원로 구간에서 신창동과 용문동 사이의 한 고개가 아닐까 추측될 뿐이다.
② 삼개고개
삼개고개라는 이름은 삼개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삼개는 지금의 마포(麻浦)를 일컫는데, 바로 용산의 산머리가 한강쪽으로 머리를 불쑥 내민 지역의 물가를 말한다. 즉, 마포나루 가까이 있는 동네를 일컫던 이름이었다.
지금의 청암동에서 마포의 마포동쪽으로 넘는 고개로, 이 역시 삼호정고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고개는 아니었다.
그러나, 삼개고개란 이름은 마포쪽에서 붙인 이름이 아닌 용산 원효로쪽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길 모양과 위치는 달라졌지만, 지금 근처에 ‘삼개로’ 새 주소가 생기기 전까지는 ‘삼개길’이라고 했는데, 당시의 삼개길은 마포 가든호텔 뒤에서 지금의 우성마파트가 있는 고개를 올라 마포와 용산 경게 지점에서 용산성당쪽으로 돌아 다시 마포 큰길쪽으로 되돌아오던 길이었다.
라는 새 주소 이름이 붙어 있다.
③ 벼랑창고개
‘벼랑창’이란 이름은 원래 ‘별영창’에서 나온 것이었다. ‘별영창’은 ‘별영(別營)의 창고’란 의미이다. 그 창고가 있었던 언덕을 벼랑창이라고 했는데, 이 언덕의 허리로는 지금 강변북로가 지나고 있고, 그 도로의 밑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 놓았던 수위측정소가 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이 근처로는 민가가 없어 그저 그 별영창의 창고가 있던 언덕을 별영창 또는 벼랑창이라고만 불러왔던 듯싶다.
용머리 입 부분의 언덕이 한강에 접한 부분은 강가의 험한 낭떠러지였다. 예부터 용산쪽에서 마포의 삼개나루쪽으로 가는 사람들에 의해 용머리의 입 부분을 넘는 작은 고개가 이 산비탈에 생겼는데, 벼랑창 옆의 고개이므로 ‘벼랑창고개’라 했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서울의 용산구와 마포구의 경계가 부분인데, 지금은 산비탈을 깎아 넓은 길을 냄으로써 고개 아닌 평짓길이 되어 버렸다. 결국 벼랑과 한강물이 큰 도로로 갈리게 되어 내려다보면 아찔아찔했을 그 옛날의 험한 고개 모습을 지금은 상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④ 성지물고개
성지물고개는 지금의 원효로3가에서 4가로 넘어가는, 즉 성심여고 정문 앞쪽 언덕을 일컫는다. 예부터 강바람이 세어서 ‘바람마지고개’ 또는 ‘바람모지고개’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성심여고 자리에 신학교가 생긴 이후부터는 ‘신학교고개’로 불리기도 했다.
고개 서쪽 원효로4가의 한 동네를 예로부터 ‘성지물’이라고 했는데, 이 이름은 마을에 크고작은 우물이 둘 있어 ‘형제우물’이라고 하던 것이 구개음화하여 ‘성지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우물들이 모두 없어졌다.
형제우물은 한자로 ‘형제정(兄弟井)’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용산방(龍山坊) 동문외계(東門外界)였던 이 곳의 이름을 원정4정목(元町四정목)으로 행정구역명을 변경하였다.
이 고개 밑 원효로4가와 그 옆의 산천동 일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 장마 때 한강물이 밀려 들어와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물이 바로 빠지지 않을 때는 배를 대고 인근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고개마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1960년대까지는 근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전차 종점이 있었다. 근처에는 현재 박목월(朴木月) 박목월(朴木月) ; 1916~1978년. 말년에 원효로4가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생가터가 성지물 고개 바로 밑에 있다.
시인을 기리는 ‘목월공원’이 있다.
⑶ 용산 한강가의 유서깊은 곳들
① 심원정
심원정(心遠亭)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바로 위 언덕에 있던 정자이다.
용산구 원효로4가 87번지인데, 한강 기슭의 작은 언덕이지만 숲이 무성하고, 그 앞으로 강줄기가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던 곳이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팔각(八角)으로 지어진 심원정은 당시 왜군이 패퇴하면서 조선측과 화전을 교섭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때 심었다는 백송(白松)은 없어졌고, 수백년 자란 거목 아래에 강화비만 쓸쓸히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행주대첩 등으로 이 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고, 조선측의 항의에도 화의를 진행시켰다. 따라서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 후 이 곳은 고종 때에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고,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碑)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던 원효로 백송(白松) 지금은 용산문화원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은 2003년 고사하였고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은 지금도 남아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심원정터에는 지금은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아직도 수령 오륙백 년이나 되는 나무들이 여러 그루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공원 안쪽으로 정자가 세워져 있기는 하나, 원래의 정자 모양은 아니고 오직 쉼터로서의 구실로 만든 것일 뿐이다.
② 함벽정
함벽정(涵碧亭)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1번지 성심여고 성심여자고등학교(聖心女子高等學校) ; 용산구 원효로4가 1번지. 1960년에 개교한 학교로, 현재는 여자중학교도 함께 있다. 천주교 신학교 있던 곳이어서 고색창연한 옛 건물이 아직도 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내에 있던 정자인데, 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그 정확한 터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용산 산비탈 아래 작은 언덕으로, 그 밑은 지대가 낮아 여름이면 자주 한강물이 밀려들어와 마을들이 자주 물난리를 겪기도 했다.
이 정자는 현재의 원효로4가 성심여고의 뒤쪽에 있었던 정자로, 삼호정, 심원정 심원정(心遠亭). 현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위 언덕에 위치
등과 함께 한강을 시원하게 바라보는 좋은 명승지여서 예부터 장안의 선비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기도 했다.
함벽정 일대에는 훗날 선학교가 자리잡게 되면서 한국 천주교회사와도 갚은 관련을 맺게 된다.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용산신학교 사적 제255호로, 정식 명칭은 용산예수성심신학교이다. 1892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양옥건물로, 그 옆에 서울에서 세번째로 완공된 서양식 성당인 원효로성당이 있다.
가 세워졌는데, 1992년에 세워진 신학교 건물이 잘 남아 있다.
1960년에 세워진, 가톨릭계의 성심여고가 이 곳에 위치해 있다.
③ 삼호정
삼호정(三湖亭)은 용산 산머리의 남쪽 아래쪽에 있었던 정자로, 조선시대에 김금원, 김금초 등 여류 시인들이 자주 올라와 아름다운 한강과 주변을 내려다보며 주옥같은 시를 읊던 정자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이 정자는 없어졌고, 그 일대에는 수녀원과 성당이 들어섰다.
이 정자로 인해 인근에 ‘삼호정’이란 이름이 들어간 삼호정고개, 삼호정 마을 등 이 생겼다.
원래 사가(私家)에서 지은 정자여서 일반인들의 출입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이 정자에 대해서는 ‘삼호정’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④ 남이장군 사당
용문동(龍門洞) 106번지 작은 언덕에는 1904년에 원효로2가 7번지에서 옮겨온 남이장군 사당이 있는데, 해마다 가을에 남이장군 사당제를 벌이고 있다.
동네의 유지들이 해마다 음력 4월 1일, 7월 1일, 10월 1일에 제향을 올리는데 그 목적은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남이(南怡)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1975년 편찬한 남이 장군 약사를 보면 “남장군의 애국충성을 추모하여 그 공적을 널리 알리고 해마다 지성으로 제를 봉축하며 사당을 지어 그 보존 관리에 완벽을 기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장군의 충절과 위훈을 흠모하고 억울하게 죽은 그를 기리고자 뜻있는 이들이 모여서 장군의 영정이라도 봉안할 것을 결의하고 터 를 물색 하던 중, 장군이 이시애의 난 토벌 당시 용산에서 정병(精兵)을 모집 ․ 훈련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사실을 감안하여 용산구 원효로2가 7번지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려 왔다. 1904년 철도 부설 등으로 주위가 소란해지자 사당을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 사당이 있는 용문동은 용산의 ‘용’자와 동문리의 ‘문’자를 따서 이름이 지어진 이름인데, 여기에는 우물들이 많았다. 이 곳 101번지에 물맛이 달다 하여 붙여진 단우물이 있고, 79번지에는 물맛이 짜다는 짠우물이 있었다.
⑤ 독서당
독서당(讀書堂)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 기구로, 호당(湖堂)이라고도 한다.
세종은 1426년 12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 세종 때 시작됐다가 정조 때 폐지됐다.
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자택(自宅)으로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1442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 세종은 독서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6인을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 이 상사독서는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도 실시되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사가독서제는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1476년과 1486년에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로 인해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고, 상사독서는 유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커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서거정(徐居正)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다.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쪽 언덕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이 절을 20칸 정도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여러 가지 사정으로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제학 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여 우선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다. 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용산 산비탈 언덕이 바로 그 곳이다.
이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이 세워짐에 따라서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독서당 사림(士林)으로 공부하는 재야 지식인이나 관직자가 은퇴한 뒤 자연의 경관이 뛰어나고 독서하기에 알맞은 곳에 정자나 건물을 마련하여 독서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은 공참부(公參府)의 성격보다는 연구기관으로서 학문적 기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으며,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었다.
⑥ 읍청루
《동국여지비고》(권1) 무직공서 조에 별영(別營)과 함께 읍청루(挹淸樓)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별영이 용산에 있는데 헌종 14년에 세웠다. 혹 선조 병신년에 세웠다고도 한다.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곳으로 거기에 읍청루가 강가에 있어 명승으로 친다."
또,《한경지략》 명승조에도 보인다.
"읍청루는 소속된 별영창고에 딸린 누각이다. 앞으로 긴 강물이 흘러서 경치가 매우 좋다."
정조 임금은 여기까지 나와 놀았다고 하는데, 그 때에 지은 ‘읍청루에 올라‘라는 시가 전한다.
행화 핀 봄날 강물 앞에서 술맛 더욱 좋구나
저기 저 많고 적은 배들 신선경 찾노라 저리 헤매나
하루 종일 왔다 갔다 물가에 그대로 있네
정조 외에도 셀 수 없는 시인과 주객들이 이 일대에서 풍류를 즐겼다. 읍청루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뒤에 청암대(淸岩臺)라는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되기도 했다. 근처에는 현재 청암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읍청루는 조선 말에 이르러 세관감시소가 되고 뒤미쳐 총세무사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별장이 되기도 하였다.
개화의 물결과 더불어 용산강의 수운도 현대화하여 고종 25년 용산강에 증기선이 등장, 인천과 용산 사이를 운항하기 시작한 이후 수상 운송이 활발해지면서 읍청루에는 세관이 설치되기도 했다.
⑦ 별영창
별영창은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료를 보관하던 군사용 창고로 지금의 용산구 청암동에서 마포쪽으로 넘어가던 산기슭 한강가에 있었다. 대규모의 국영 창고였는데, 근처에 있는 읍청루는 이 창고에 딸린 누각이었다.
이 ‘별영창’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근처에 있는 한강가 비탈을 ‘벼랑창’이라 했고,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벼랑창고개’라고 불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관원 김여의(金汝義)가 용산 창고에서 금, 비단, 서적 등을 배편으로 강화에 피난시키려던 차에 도적들에게 약탈당하던 것을 임경업 3형제가 말을 달려 적도들의 목을 모두 베고 창고의 물품과 관원을 구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 창고가 바로 별영창이라 한다. 혹은 군자감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 후 정조 원년(1777)에는 이 별영창에 읍청루를 세워 놓아 정조가 이곳을 찾았으므로 그후부터 명소가 되었는데 전에는 이 누각에 오르면 한강의 경치가 한 눈에 보이는 경승지였다.
벼랑창 바로 부근에는 청암경로당, 그 옆에 속칭 ‘이태조 사당’이라고 하는 조선 태조의 초상을 봉안한 영전(影殿)이 있었다. 한양 정도 이후 태조가 이곳에 몇 차례 거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이곳 주민들이 세웠다고 전한다.
⑧ 산천동 부군당
용산 한강가에는 부군당(府君堂)들이 많았다.
부군당은 조선 전기부터 한양의 각 관청에 설치하고 신을 모신 곳으로, 마을의 수호와 동민들의 안녕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제당(祭堂)이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이 부군당이 많다.
용산 지역에는 한강 유역을 따라 늘어선 각 동네마다 부군당이 있었다.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기 위한 이 부군당에서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물놀이 사고와 배의 침몰 사고가 많아 이러한 액운이 없기를 빌면서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떡과 술 등을 마을의 신인 부군(府君)에게 바치며 치성을 드렸다.
구용산 한강가의 부군당으로는 이 산천동 부군당이 유명했다. 약 4백년 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군당은 원래 산천동 한복판 저지대(산천동 173번지)에 있었는데, 1980년대 말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 유지들의 노력으로 그 북동쪽 2백미터 지점인 이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부군당에서의 제사는 전에는 봄·가을로 지내 왔으나, 요즘은 일 년에 한 번만 지내 오고 있다. 부군당 당제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안녕을 빌면서 친목을 다지고 있다.
또한 이 부군당은 해마다 가을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의 대제(大祭)가 때 꽃받이 행사(종이로 만든 꽃을 받아가는 의식)를 하는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이에 따라 요즘은 이 부군당을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의 부속 제당으로 여기기도 하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사당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⑨ 청암동 부군당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는 전란이 없기를 바라고 동시에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조선 중기에 이 부군당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에 이태조(李太祖)를 모신 사당인 ‘이태조 사당(李太祖祠堂)’이 있었다.
청암동 부군당은 마을에 불이 잘 나서 화재가 없기를 바라면서 동민들이 제를 지내어 왔기에 일명 화당(火堂)이라고도 불렀다.
1900년대 초까지 지금의 청암동 59~60번지 앞 도로 북쪽에 있었는데, 1940년경 근처에 있던 화력발전소 용산화력발전소가 지금의 강변삼성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가 이 화력발전소를 마포의 당인리로 옮기면서 그 자리는 뒤에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얼음창고로 사용되었다.
를 마포의 당인리(마포구 당인동)로 옮기고 용머리 부근의 좁은 마차길 지금의 원효로와 강변북로가 만나는 곳의 청암동 부분의 도로.
을 넓히면서 그 부군당을 길 건너 한강 벼랑 위(지금의 원효로4가 178-9,11)에 세워 주었다.
그 뒤, 이 부군당 옆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공청(公廳)도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모두 전소하였다.
수복 후인 1953년도에 청암동 주민들이 이태조 사당과 부군당을 복원하고, 경로당까지 옆에 마련하여 당을 정성껏 돌보았으나, 강변로의 확장으로 다시 이전하는 운명을 겪었다. 현재는 길가에서 좀 떨어진 마을 한가운데 청암동 178-9,11
로 건물이 옮겨져 있는데, 그나마도 건물 모습이 부군당과는 너무도 먼 콘크리트 양식이고, 건물에 현판도 달지 않아 처음 보는 이로선 부군당이나 사당으로 알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현재 건물 안에는 이성계 화상과 12신이 모셔져 있다.
2007년 음력 10월 1일 첫 당제를 올린 이후, 마을 유지들이 해마다 같은 날에 제를 지내 오고 있다.
⑩ 비변사 우물
지금의 용산구 신창동에는 변사 우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현재도 그 우물이 있기는 하나 한 건물의 주차장으로 들어가 있고, 뚜껑을 덮어 놓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다. 6․25 전까지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였다.
이 우물을 비변사사 우물이라 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文武) 합의기구로,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의 군인들이 사용했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군사행정을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던 조선시대에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대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 재상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개 적의 침입시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중종 12) 6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 우물이 있던 동네여서 일제 강점기에는 이 동리를 ‘청수정(淸水町)’이라고 하였다가 광복 후에 지금의 이름인 신창동(新倉洞)으로 하였다.
3. 용산의 아름다움과 삼호정
⑴ 용산의 아름다움
① 자연적인 아름다움
서울의 한강 유역은 그 어디나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강 유역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 중에서도 용산의 용머리 부근은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답기로 크게 소문나 있었다.
용머리 부근이 아름다운 데는 한강의 물줄기가 용머리의 앞 부분을 둥글게 휘어도는 데다가 조망되는 먼 경치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용의 머리 부분이 아파트들에 짓눌려 용이 숨수기조차 힘든 모습이지만, 엣날에 숲이 우거졌을 때의 산 경치는 멀리서 보아도 과연 으뜸이었다.
용산 경치가 아름다웠다는 소식은 고려시대에도 널리 알려졌던 모양이다. 고려 말의 충숙왕은 왕비와 함께 이 곳에 와서 며칠을 묵었고, 그러던 차에 용산 산비탈에서 아기까지 얻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용산 경치가 얼마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났기에 임금이 먼 개성에서까지 여기까지 와서 며칠 동안 경치를 즐겼을까.
② 인공적인 아름다움
경치가 좋은 곳으로 소문나 용산에는 조선시대에도 많은 정자들이 용산 산언덕 여기저기 자리를 잡았다. 함벽정(涵碧亭), 삼호정(三湖亭), 심원정(心遠亭) 등의 정자들이 그것이다.
왕립 도서관격인 독서당을 이 곳에 지은 것도 젊은 인재 양성에 용산의 좋은 경치를 통한 정서 함양이 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숲이 우거져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던 용산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용산 아래쪽 넓은 벌판에 주거지를 삼았다. 지금의 원효로 일대는 물론이고, 좀 떨어진 한강로쪽에까지 자기네의 주거지가 형성되자 큰 길을 내어 전차도 운행하였다. 이들이 이 곳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이 일대는 새와 짐승들의 보금자리였던 강변 모래밭과 풀밭이 아름답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일인들은 아니라 용산 산언덕의 정자들을 허물고 자신들이 이용하는 기관 건물을 짓거나 주거지로 사용하였다. 산마루는 군 기지로 사용해 관련 시설을 구축하고 주민들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용산의 산마루는 크게 깎이지 않아 산머리에선 강변의 좋은 경치를 즐길 수 있었기에 광복 후 자유당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방치되었던 용산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정부 수립 이후로 많은 집들이 산비탈에 가득 들어찼다. 지금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파트들이 산비탈 양쪽으로 가득 들어차, 멀리서 보면 용산의 용(龍)이 꼭 아파트 무게에 눌려 숨도 못 쉬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⑵ 용산팔경
경치가 좋은 곳이면 팔경(八景)이 정해지기도 한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좋고 유서 깊은 지역에 팔경을 만들어 즐기곤 했는데, 용산팔경(龍山八景)도 그 중의 하나다.
용산은 용산팔경(龍山八景)으로도 유명했다. 물 가운데로 머리를 쑥 내민, 그 산마루에서 바라다보는 물가의 경치를 여덟 가지 꼽아 팔경을 정했다.
①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용산 산마루에서 남동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청계산(淸溪山) 높이 618 m인 주봉 망경대(望景臺)를 비롯하여 옥녀봉(玉女峰), 청계봉, 이수봉(二壽峰) 등의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에 관악산, 남쪽에 국사봉이 솟아 있고, 이들 연봉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이 보인다. 아침이면 해가 뜨는 방향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조금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큰 산 하나가 아련히 보이는데, 여기에 아침 구름이 걸쳐 있는 모습이 매우 좋았던 모양이다.
②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청계산에서 조금 서족으로 바라보면 그 산과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산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관악산(冠岳山) 높이는 632m. 북한산, 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이중으로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 옛 서울의 요새지를 이루었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까지 이른다.
이다. 청계산보다 높은 이 산은 아침보다는 저녁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더 좋았을 것이다.
③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만천은 만초천(蔓草川)이라고도 하는데, 그리 큰 내는 아니지만, 예부터 덩굴풀이 많아 ‘덩굴내’라고 불러 왔다.
일부 고지도에선 이 내가 차천(車川)으로도 나온다.
한강물이 많이 불면 그 물이 이 덩굴내로 역류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냇가에 작은 갯벌이 형성되었다. 이 갯벌에선 주민들이 게를 많히 잡았다고 한다. 게가 밤이면 불빛을 보고 기어나오는 습성을 이용해 게잡이를 하느라 사람들이 불을 밝힌 것이다. 용산 산마루에서 밤에 바라보는 이 내의 게잡이 불빛들이 꽤 볼 만했을 것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자리에 용산 전자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④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용산 산마루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보면 동작나루(동재기나루)가 보였다. 서해로 나간 돛배들이 잡은 고기를 싣고 이 나루로 돌아오는 모습이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
토박이말로는 ‘동재기’라고 했는데, 산머리를 돌아가는 강변길이 있어서 ‘돈재기’라 하던 것이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⑤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율도’란 밤섬을 일컫는다. 밤톨처럼 생겨서 이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율도(栗島)가 되었다.
지금은 평평하고 작은 섬이지만, 전에는 하나의 산 모양을 이루었던 제법 큰 섬이었고, 사람도 많이 살았다. 지금은 핸정상으로는 영등포구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마포권에 속해 있었다.
용산 산마루에서 저녁에 해 지는 모습을 본다면 바로 이 밤섬의 머리 위로 붉은 노을을 안기며 해가 지게 되어 있었다. 그 낙조 풍경이 기찼을 것이다.
⑥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동작동 바로 옆의 동네가 흑석동(黑石洞)이다. 옛날부터 검은 돌이 박혀 있는 동네라 해서 ‘검은돌’이라 했다. 여기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 절로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이 용산 산마루에서 보였던 모양이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당시는 공기가 얼마나 맑았기에 흑석동 산비탈의 스님까지 볼 수 있었을까?
⑦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노량’이란 지금의 동작구 노량진을 말한다. 옛날에는 ‘노들’이라고 불렀고, 그 앞의 한강나루를 ‘노들나루’라고 했다. 여기에 과천쪽으로 난 옛길이 있었는데, 그 길의 행인 모습이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⑧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사촌(沙村)'은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서 한강 인도교에 이르는 벌판을 말한다. 그 일부인 한강가 일대를 '새남터' 새남터은 새(풀)와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해서 ‘새나무터’가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 표기 ‘사남기(沙南基)’는 ‘새남터(새나무터)’를 음-의역한 것이다.
라 했는데, 이 곳에서 천주교 사제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지금의 '서부이촌동'이 된 이 곳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노른자위가 됐지만, 옛날에는 온통 모래사장으로, 1900년 전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이촌동 한강맨숀이 들어선 자리 근처가 그저 허허벌판이었고, 5 60채의 오두막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규태의 600년 서울》. 이규태는 새남터를 삼각지로타라부터 한강대교에 이르는 벌판이라 했다.
6․25 전까지는 살림이 어려운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으나, 뒤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모두 헐리고 고층 아파트들이 한강을 울타리치듯이 막아선 채 들어서 있다.
옛날에는 새남터 근처 마을에서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근처에 새남터 한옥 형태로 지은 새남터성당이 있다.
⑶ 용산을 노래하다
① 용산을 노래한 시들
용산은 그 앞으로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다. 시인 묵객들의 좋은 놀이터였다는 이 곳엔 고려 시대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고려 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시와 술을 즐기며 당대 석학들과 어울린 고려시대 학자.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예서(隸書)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등이 있다.
가 이 곳의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 꼬리 같고,
세 봉우리 산 아득히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만약에 다른 날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이 시에 붙인 서문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의 이 곳 용산의 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봉우리들이 구비구비 서려서 그 형상이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턱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고, 강 건너로 먼 산이 있어 바라보노라면 묏산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곡(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 전에는 잉화도(仍火島) 또는 나의주(羅衣州)라고도 불렀는데, 여의도(汝矣島)라는 지금의 이름과 대역해 보면 ‘나벌섬’, ‘너벌섬(니블섬)’이 그 원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배우리의 땅이름기행》 참조.
과 '밤섬'[栗島=율도]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날부터 한양 일대에서 잘 알려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선 말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명사들은 용산 산비탈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자주 올라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며, 좋은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덕망 있는 대신인 남공철(南公轍) 남공철(南公轍) ; 1760(영조 36)∼1840(헌종 6). 조선 후기 문신. 1817년 우의정, 1821년 좌의정, 1823년 영의정에 올랐고, 1833년 봉조하가 되었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으며, 경전을 연구하고 구양 수의 글을 숭상하고 본받았다. 저서에 《귀은당집》외 다수가 있다.
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 곳 강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고, 미리 귀거휴양(歸去休養)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이 퇴직을 허락하지 않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로 옮겼다.
용산의 술집 장막을 꿈에도 잊을 수 없어
강가에 돌아와 살고자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임금의 은택 지극하여 직책을 더디 풀어 주시니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꽃을 심었나 물어 본다.
호수 밖의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책부터 먼저 실어 촌가로 내어 보낸다
이 해 다시 저물고, 흰 머리털만 늘어 가니
뜰 앞의 매화나무가 혼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임금도 이해했는지 얼마 후 그를 영의정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 조선시대 공신·공신적장(功臣嫡長)·동서반 당상관 등이 치사(致仕)한 뒤에 임명되는 관직. 이 제도는 전직 고급관료를 대우하던 일종의 훈호(勳號)로서 직사(職事)는 없다.
라는, 조금은 가벼운 직책으로 옮겨 준다. 그 후로 남정승은 용산의 정자로 나가 휴양할 수 있었고, 자주 이 곳을 찾아와 주는 원로 대신들과 함께 심원정(心遠亭)에 올라 아름다운 용산 풍경을 즐겼다.
조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용산하일시(龍山夏日詩)〉라는 노래에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냈다.
--새남터 푸른 수림에 돛단배 다 지났구나
동작나루에 해는 저물고
--노들 서쪽 언덕엔 풀빛이 그윽한데
--밤섬 너머의 잔잔한 물결이 버들 그늘에 찰랑인다.
② 삼호정 관련 시
용산강 언덕에선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주 출신의 여인 김금원은 타고난 재질로 불과 14세에 국내 명승지들을 찾은 많은 명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미녀들의 시 모임. 용산의 멋진 그림은 그들이 만들어 냈다.
서호(西湖) ‘서쪽 강’의 의미로, 동호(東湖)에 상대되는 지명이다. 한강 줄기 중에서 용산과 마포 지역을 지나는 부분을 일컫는다.
서호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제일인데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노닌다네
양쪽 언덕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르고 누런 물결
석양이 흘러간다
구름이 골짜기를 덮으니
외로운 돛대 보이지 않고
꽃이 낚시터에 떨어지는데
피리소리 멀리서 들린다
가 없는 풍인(風烟)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
을 남김없이 거둬들이니
비단 주머니의 밝은 빛이
난간 머리에 번쩍인다
삼호정 시. 김금원
삼호정에서 앞강(한강)을 바라보며 지은 시 《저녁 삼호정에서 바라보며》를 보아도 그 옛날 용산 삼호정 부근 한강가의 정서를 느낌 수 있다.
청류단합경신장 (淸流端合鏡新粧)
-맑은 물은 새로 닦은 거울 같고
산학아발초학상 (山學峨髮i草學裳)
-산은 쪽진 머리 방초는 치마여라
별포래익무수조 (別浦來翊無數鳥)
-이별의 나루터엔 무수한 새 날고
방주시유불지향 (芳洲時有不知香)
-꽃다운 물가에는 알 수 없는 향기 나네
송창월입식환만 (松窓月入食還薄)
-솔 창에 달 들어오니 이불 도리어 얇아라
오엽풍번로경광 (梧葉風飜露更光)
-오동잎 바람에 펄럭이니 이슬 더욱 반짝이네
춘연추홍도시신 (春燕秋鴻都是信)
-봄 제비,가을 기러기,모두가 신의 있으니
미수초한왕회장 (未須怊恨枉回腸)
-모름지기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으로 걱정하지 않네 운초의 시 중 〈저녁 삼호정에서 바라보며》(三湖亨晩免眺跳). 이 시는 허미자 펀 《조선조 여류시문전집》3에 들어 있는 《운초당시원고》(雲楚堂詩原稿橋》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는 김지용 김미란 역저 《한국 여류 한시의 세계(여강 2002)에서 인용. 삼호정에서 포구(한강)를 바라보며 느끼는 정서를 옳었다.
용산 기슭에는 심원정과 삼호정 외에 읍청루와 추흥정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 화전조약을 맺은 곳으로 유명한 심원정도 있다. 지금 용산문화원 위쪽의 심원정터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白松)이 몇 그루 남아 있었으나, 수년 전에 고사(枯死)하였다.
심원정에는 오륙백년 되는 시(市) 보호수가 여러 그루 남아 있다.
⑷ 삼호정
① 여류문인 김금원과 삼호정시사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 금원(錦園, 1817~?)은 원주 출신으로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의 소실로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경사(經史)를 통독하였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같은 시우(詩友)이며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의 《죽서집》 발문에서, “함께 후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서로 창화(唱和)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길 만큼 남성위주의 양반제도에 한을 간직했다.
1830년(순조 30) 3월 남장을 하고 고향인 원주를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금강산을 구경하던 중 만난 인연으로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는 대신에 서울로 시랑(侍郞)이며 규당(奎堂) 학사인 김덕희를 찾아와 그와 인연을 맺어 소실이 되었다. 《한국의 여행 문학》 이화여자대학 출판부. 2006.3
1843년(헌종 9) 27세로 문명(文名)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불렀다.
1845년(헌종 11) 남편을 따라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2년 동안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메모했으며, 이때의 여행기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남겼다.
-<호동서락기>. 조선 말의 여류시인 금원김씨(錦園金氏)의 시집. 사본. 1책. 작자가 호중(湖中) 4군과 관동지방의 금강산 및 관동팔경, 관서지방에서 특히 의주, 그리고 한양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쓴 것을 모은 시집. 발문 ‘호동서락기’ 가 시집 명칭이 되었다. 발문은 1850년(철종 1)에 쓰고, 편집은 이듬해에 하였다. 서문격으로 김원근(金瑗根)이 머리시를 쓰고 주를 달아 금원의 약력을 소개하였다. 발문에서는 이 책의 전말을 썼고, 《음사절(吟四絶)》의 머리 주에서는 삼호정 동인들을 소개하면서 그 시의 특징을 저자가 쓰고 있다. 순 한문으로 쓰여진 글인데다, 번역된 글도 연구자들이나 한정된 독자만이 접해 왔다.
《망한양》(望漢陽. 한양을 바라보며)
한사부평사원유 (閑似浮萍事遠遊)
-한가롭기 부평초라 나그네길 일삼아
등림다일부지휴 (登臨多日不知休)
-승지 찾기 하 많은 날 쉴 줄 전연 모르네
귀심흔축동류수 (歸心欣逐東流水)
-그리는 마음 기꺼이 등류수를 따르거니
경락풍연조만수 (京落風烟早晩收)
-서울의 저 세상도 모두 쉬이 다 보리라
오랜 국내 여행 생활을 끝내고 1847년 다시 서울에 돌아와 남편의 별장인 용산(龍山) 삼호정에서 김운초(金雲楚),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瓊春) 등의 여류시인들과 시를 읊으며 여성시단을 형성하여 우수한 시와 글로 당시의 남성시단에 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대부분의 삼호정 시단 동인들은 기생 출신이거나 소실들이었는데, 김운초는 김이양의 소실, 박죽서는 서기보의, 경산은 이정신의 소실이었다.
한양에 들어와서는 풍류 문인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경 좋은 용산 언덕에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실인 금원과 함께 나와 거처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읊었다. 여기에 다시 금원의 친구인 여류 시인 김운초, 김경선, 박죽서, 김경춘 등이 자주 금원을 찾아 삼호정에 올라가서 강변 풍경을 명시로 옮겼다.
② 관련 서적들을 통해서 본 삼호정과 김금원
삼호정과 김금원에 관한 서적들은 무척 많다.
물론, 각 서적에 실린 많은 내용들이 거의 비슷비슷하지만, “여자가 글을 알아 뭣해?”라는 인식이 깊게 깔린 조선시대에 여성들만 모여 하나의 시단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사삼들에게 작은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전국을 돌며 시심을 일구며 글을 써 내려간 한 여인의 삶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감동을 안게 된다. 금원 자신이 기록한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는 금원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라 할 만하다.
-《호동서락기》는 정민이 펴낸 《한국역대산수유기취편》에 수록되어 있고,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도 ‘여사 금원 찬(女士 錦園 撰) 《호동서락기》’ 필사본이 있다. 번역한 자료들도 있는데, 《(조선시대) 강원여성시문집》(l998)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편역
과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 산문편》 이혜순·정하영 펀역. 이화여대 출판부.2003
금원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김지용의 《삼호정 시단의 특성과 작품. 최초의 여류시단 형성과 시작 활동》(아세아여성연구 16. 1977, 숙명여대 아세아여성연구소)은 삼호정시사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글로 이후, 연구자들의 주요 참고 자료가 되었다.
금원이 어떤 집안이었는지, 그가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에 관해서는 관련 서적들을 통해서 알 길이 없다.
“19세기 중반 여성의 몸으로 여행길에 나선 이 여성은 ‘금원(錦園l’이라는 호로 알려진 인물로,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래로는 뒤에 ‘경춘(鏡春)’이라 불린 재주 많은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 말대로 한미한 집안이었는지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녀가 쓴 몇 줄의 글이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줄 뿐이다.” 《조선의 여성들》 돌배게. 2004.7.5
그러나, 그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고, 정서적인 면에서 남다른 면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나는 관동 봉래산 사람으로 호를 금원이라 한다. 어려서 병을 자주 앓아 부모께서 가엽게 여겨 부녀자의 일을 힘쓰게 하지 않고 글자를 가르쳐 주시니 나날이 가르침을 듣고 깨우치게 되었다. 몇 년 안 되어 경서와 사서를 대략 통달하고. 고금 문장을 본받고자 때때로 흥이 나면 꽃과 달을 읊조리며 생각하곤 했다.” 《호동서락기》
《조선의 여성들》이란 책에서는 부윤이 된 김덕희를 따라 의주로 간 금원이 김덕희가 벼슬을 물러날 때 함께 서울로 돌아와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렀다면서 삼호정 시회가 태어난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때 (금원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삼호정은 용산(지금의 원효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삼개고개)에 있던 김덕희 소유의 정자이다. 당시 용산 한강 부근은 풍광이 좋아 사대부들의 정자나 별장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가에 자리잡은 삼호정은 특히 경치가 아름다웠다.
벼슬을 그만둔 남편은 정원의 대나무를 꺾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금원은 종들에게 짧은 바지를 입게 했다. 그리고 물을 걷고 땔나무를 지고, 정원을 가꾸고 채소를 섬게 했다.
경치 좋은 한강변 김덕희와 금원의 생활은 한가롭고 평온했다. 이곳의 경치는 사시사철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을 때면 금원은 동생인 경춘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 기녀로 있을 때 종종 어울리던 시인 운초(雲楚), 이웃에 사는 경산(瓊山) 등 마음이 맞는 네 친구를 삼호정으로 부르곤 했다. 봄이 오면 꽂과 새가 기분을 돋우었고 강변이라 종종 끼는 안개와 강물 위를 떠가는 구름은 젊은 날의 꿈을 떠오르게 했다. 간혹 세차게 들이치는 비바람도, 눈 내리는 정원도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었다. 금원과 친구들은 언제 모여도 반갑고 애틋하고 즐거웠다. 처지가 비슷했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들은 모여서 거문고를 뜯고 시를 지으며 한껏 즐기다 헤어졌다.
금원의 삼십 대는 이렇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나갔다. 남성들의 시회는 많았지만, 이렇게 여성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뒤에 사람들은 이 모임이 금원이 살던 삼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삼호정시회’라 부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문예 의식이 고양되었던 시기에 사대부 문화에서 중인 계급이 주축을 이룬 여항 문화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문화가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세련되어 갔다.”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대의 특징적인 문화 현상 중의 하나로 시사 활동을 들었다.
“계급적 특권과 아울러 문화적 특권을 누렸던 상층 양반들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시사를 결성하여 시와 풍류를 즐겼다. 현대의 시 동인 모임과 비슷한 이 모임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사상적인 입장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파를 이루면서 서울 근처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 후기의 시사는 학문과 인생에 대한 뜻을 같이하며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고무하는 지음(知音)들이 모여 각자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문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은 지금의 회현동을 중심으로 죽란시사(竹欄詩社)를 결성하였고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 연암 그룹은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백탑 근처에 살면서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 활발한 문화 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시사가 결성되어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며 우의를 다졌고, 시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감흥과 정서를 표출하였다.”
삼호정시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맞기도 했지만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모임은 여유 있는 양반 소실들의 그저 그런 시 모임 정도로 펌하할 수도 있지만,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임의 성격은 그리 단순치 않다고 했다.
삼호정시사에 모인 여인들간에는 서로간의 유대가 든든했던 것 같다.
“금원, 운초, 경산의 교류는 비교적 활발했던 것 같고,죽서와 경춘은 금원과 가까우므로 이들 모임은 금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금원이 이들에 대해 내린 평가는 재화(才華)(운초),다문박식(경산),지혜(죽서),경사(經史)의 지식(경춘)으로,각자 고유의 핵심 특성을 집어내는 안목이 비상하거니와,이러한 예리함이 실경을 재현하고 구현시키는 데에 뛰어남을 보이게 된 이유일 것 같다.” 《여성 지성사》(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년.
《호동서락기》를 보면 삼호정시사에 모인 이들과 이들이 여기서 경치를 즐기며 즐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때때로 옳조리고 쫓아 사를 주고받는 사람이 넷이다. 한 사람은 운초인데 성천 사람으로 연천 김상서의 소실이다. 재주가 무리들 가운데 매우 뛰어나 시로 크게 알려졌다. 늘 이곳을 찾아오곤 하는데 어떤 때는 이틀밤씩 묵기도 한다. 또 한 사람은 경산으로 황해도 문화 사람이며 화사 이상서의 소실이다. 들은 게 많아 아는 것이 많고 시를 옮는 데 으뜸인데 마침 이웃에 살고 있어서 찾아온다. 또 한 사람은 죽서인데 같은 고향 사람으로 송호 서태수의 소실이다. 재기가 빼어나고 지혜로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문장은 한유와 소동파를 사모하고, 시 또한 기이하고 고아하다.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우 경춘으로 주천 홍태수의 소실이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널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시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서로틀 어울려 쫓아 노니 비단같은 글 두루마리가 상 위에 가득하고 뛰어난 말과 아름다운 글귀는 선반 위에 가득하다. 때때로 이를 낭독하면 낭랑하기가 금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였다.
여성들이 가족 밖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삼호정이라는 공간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회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에 모인 여성 시인들은 가정을 벗어난 공간에서 바느질이나 화전놀이가 아니라 한시를 매개로 만나 시를 통해 교감했다. 이들은 단지 비슷한 처지의 여성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주는 지음으로, 시인으로 만났다.
그러나, 이렇던 삼호정 시회는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한 것 같다. 여성들로 이루어진 이 모임은 가족 사회가 오늘날보다도 더 중시되는 그 당시로서는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서가 세상을 떠나고 금원이 남편인 김덕희를 따라 다른 곳으로 가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한편에서는 여성들만의 모임인 이 시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삼호정시사는 이들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들의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었던 공간,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끝나지 않았던 공간이었음을 이 책에서는 경산의 회고를 통해서 적고 있다.
“내가 일찍부터 금원의 이름을 듣고는 선망하고 사모하였는데, 마침 강가 이웃에 살게 되었다. 뜻을 함께하여 모이니 무릇 다섯 사람이었는데 생각하는 것이 넓고 풍류가 넘쳐흘렀다. 이름난 정자에서 술잔 기울이며 시를 옳조리니 그 즐거움이 도도했다. 아름다운 안개비, 옥같은 눈가루는 재자(才子)의 붓끝에서 춤추는 듯하고, 붉은 꽂 푸른 풀은 시인의 입에서 모두 향기를 뿜는 듯했다. 이 모두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자연스런 즐거웅으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호동서락기》 중에서
관련 서적들은 김금원에 관한 내용을 펼치면서 삼호정 이야기를 거의 빼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삼호정에서 벌어진 시회와 관련해서 같은 처지의 여인들과 끈근한 정을 맺으며 교류한 사실을 약간의 상상을 곁들이며 서술해 놓고 있다.
“그들이 ‘톰만 나면’ 모여 시회를 열었다고 했지만 며칠간 또는 일년에 몇 차례 모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시회를 열었을 때는 삼호정에 머물렀을 것으로,소실로서의 시간적 자유와 여유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삼호정에 한번에 오래 머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져서도 자주 그들의 끈끈한 정을 시로 써서 보낸 것 같다. 운초의 경우 계속하여 찾아와 혹은 며칠 밤을 묵기도 했고,반면 박죽서는 병으로 삼호정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죽서의 〈가을날 금원에게 보냄》(秋日寄錦園)의 금원 밑에는 삼호정 김시랑 소실이란 주가 붙어 있는데,이 시의 ”그리움에 흘린 눈물 동으로 흐르는 물에 뿌리니,삼호정에 흘러가서 파도를 일으키렴.“ 같은 구절이 그 예이다. 죽서가 금원의 시를 연이어 받고 쓴 시의 “벗이 나에게 두세 번 위로 편지 보내니”, “그대들 내 안부 물으니 더욱 부끄럽고” 같은 구절 역시 금원과 삼호정 시우들과의 정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지성사》
삼호정 모임은 조선조 사회에서 그 모임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었을 것이나 당시에 나온 성과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금원이 일생 중에 한 일에 관해서는 전국 유람과 삼호정 시회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반면, 성장 과정과 그의 말년에 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어렸을 때 몸이 약했다는 것이 그의 성장 관련해서 나온 내용의 전부이다. 심지어 그의 출생 연도는 나와 있지만, 사망 연대가 나와 있지 않은 것이다. 관련 서적 어디를 보아도 그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금원 김씨는 1817년에 출생했고 사망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본관은 미상이며 호가 금원(錦園)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호방했다고 전해지나 어려서는 병을 잘 앓아 몸이 허약했다. 《오래 된 꿈》 보림출판사. 김금원의《호동서락기》를 바탕으로 금원의 궤적을 차분히 따라간 책. 《호동서락기》는 주로 금강산 등지의 여행 기록, 감상과 금원의 자작 한시로 이뤄져 있지만, 간단하나마 금원 자신의 삶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삼호정의 모임, 그리고 마음의 벗이자 글벗들 개개인에 대해 지면이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음은 여러 서적들이 다 같이 밝혀 두고 있다.
그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위 같은 책
금원은 자신이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고,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한 우리나라에 태어남이 다행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하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것은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분수대로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옳은가.” 《호동서락기》중
삼호정과 김금원에 관해서는 많은 책들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책들은 거의 하나같이 금원의 특별한 삶과 그의 정서를 잘 담아 전하고 있다. 전국을 많이 유람했던 그 여류 시인은 용산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여기 머물러 정자에 올라 동료들과 함께 시를 읊었을까?
《호동서락기》 등을 토대로 해서 삼호정과 금원에 관해서 언급한 서적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여/성이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2)
《여인, 시대를 품다》 (이은식. 타오름. 2010.8.1)
《오래 된 꿈》 (보림출판사. 2011.6)
《오래 들여다본다(시집)》 (권지숙. 창비. 2010.12.27)
《조선의 사랑》 (권현정. 현문미디어. 2007.2.26)
《조선의 여성들》 (박무영 외. 돌베개. 2004.7.5)
《조선조 후기 여성 지성사》 (이혜순.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8.29)
⑸ 삼호정의 복원을 위해
① 누정의 종류와 모양 이 항목과 내용은 용산구청에서 실시한, ‘삼호정 복원 추진 세미나’(용산문화원 2011년 8월)에서 구사편찬위원회 류지만 사료조사원이 발표한 내용이다.
1) 경북 울진의 망향정. http://blog.naver.com/lhk9223
누정이란, 단순한 뜻풀이로 말하면 막힘이 없이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으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누(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각은 누관(樓觀)이라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우기 때문에 대각(臺閣) 또는 누대(樓臺)라고도 한다. 이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문과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이를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도 하는데 사(榭)란 ‘높은 언덕, 혹은 높은 대 위에 건립한 집이란 뜻이다.
정천(亭泉)은 연못 주위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누정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살림집과 달리 산수가 좋고 높은 곳에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 위주의 유람이나 휴신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집으로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 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누각은 규모나 법식에서 정자 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중층(重層)인 반면 정자는 단층이다.
② 누정의 입지와 명칭
누정은 경관이 좋은 산이나 대, 언덕 위에 위치하여 산을 등지고 앞을 조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나 간성의 만경루(萬景樓)와 같이 전망대로서 산꼭대기나 절벽 위에 축조한 누정도 있다. 이와 같은 누정을 흔히 높은 벼랑 위에 세운 건물이라 하여 그 경치를 찬양하여 왔다. 그러나 산 위에 세워진 누정은 산기슭 등 작은 구릉 위에 세운 것이 더 많다.
누정은 냇가나 강가 또는 호수, 바다 등 물을 볼 수 있는 곳에 짓는다. 산이나 언덕이 있으면 그에 따라 물이 흐르는 내나 호수가 있게 마련이므로 산에 세워진 누정은 대부분 맑은 물을 접하는 곳에 있다. 누정 이름에 천(川), 계(溪), 강(江), 유(流), 호(湖), 폭(瀑)․ 해(海)․ 파(波) 등이 있는 것은 물을 접한 곳에 있다는 뜻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연못 옆에 세워진 누정도 있다. 누정의 위치는 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어떤 누정이든 그 주변에 못이나 강, 내(川) 등 물이 있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누정 이름 중에는 산수와의 관련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 많다. 산에 있는 누정은 대개 산의 지형, 또는 바위나 절벽 등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물가나 물 위에 있는 누정명은 내와 호수, 바다, 못 등과 관계가 있다. 예로, 파주의 임진정(臨津亭)은 글자 그대로 임진나루 옆에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일송정(一松亭)이나 수월정(水月亭), 희우정(喜雨亭)처럼 자연의 수목, 일월, 구름, 비 등에서 연유된 이름도 많다.
동식물과 연관된 이름도 있는데, 영월의 자규루(子規樓), 진도의 동백정(冬柏亭), 파주의 반구정(伴鷗亭) 등이 그 예다.
어느 한 자연물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연을 대할 때의 포괄적인 흥취로 생긴 누정명도 있다.
이 밖에 성명이나 별호와 관계된 명칭도 있고, 다수의 모임으로 된 계(契)나 회에서 건립한 정자일 때는 그 모임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했다.
③ 누정의 기능과 구조 《민족 건축론》 (한길사) 김홍식. 1987.9. / 삼호정 세미나 (류지만). 2011.8.30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이를 건립한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첫째, 누정은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가졌다. 누정은 또 시단(詩壇)을 이루는 기능을 하였다. 시를 아는 선비들이 누정을 짓고 이를 휴식처로 삼아 유유자적 할 때 찾아오는 이는 뜻이 통하는 시우(詩友)들이다. 유흥상경의 흥치가 시적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은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용산에서의 삼호정 시단 태동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누정은 학문으로 수양하고 강학(講學)하며 인륜의 도리를 가르치는 구실을 하였다. 누정 중에는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유휴처로 만들어 은거하면서 부근의 유생들을 가르쳐 많은 문사들을 배출한 경우도 있다. 결국 누정은 강학장소가 되었고, 인간의 규범을 깨우치게 하는 정사의 구실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한두 칸 정도의 방을 만든다. 그러나 방보다는 마루를 위주로 한 구조의 특징은 유지된다.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 사람들의 동회(洞會) 또는 각종 계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용산의 삼호정이 조선 말 개화기에 마을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면서 자연스럽게 공소 천주교에서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의 단위 교회.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이다.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며, 공소 교우들의 본당신부를 대리하는 공소회장(公所會長)을 중심으로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형식의 공소예절(公所禮節)이 행하여진다.
로 발전한 것은 누정의 이러한 특성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누정 중에는 활쏘기의 수련장, 사장(射場)의 기능을 하던 곳이 많다. 관덕정은 모두 궁술 연마를 위하여 건립한 누정이다. 서울 옥동(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은 모두 궁술 연습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독립된 단일 건물이 아닌 궁궐, 사찰, 향교, 서원, 일반주택 등에 부속 건물로 누정이 건립된 경우가 있고, 고을을 지키는 성을 쌓으면 성루(城樓)를 두었다. 큰 성의 경우 동서남북에 각각 문루를 두기도 한다. 임금이나 사신, 기타 외래에서 방문하는 고위관리들을 위하여 객사에 부속된 누정을 짓기도 한다.
그 외에 별장(別莊), 전쟁 시의 지휘본부, 재실(齋室), 치농(治農), 측후(測候)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누정들이 있었다.
누정은 원래 오두막집이나 그와 비슷한 건축물에서 발전한 것이어서 비록 기와를 이은 지붕이기는 하지만 새(억새)나 이엉을 이었을 때의 지붕처럼 네 귀를 날카롭게 하지 않고 둥글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면이 정방형인 누정은 그 가구(架構)에 있어서 대들보를 쓰지 않고 귀접이 천장을 하거나 또는 네 귀의 추녀가 정상에 모이도록 하는 구조법을 사용한다. 가운데 모아지는 부분은 대개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마무리한다.
별궁의 개념을 갖거나 아니면 관아에서 관리하는 누정은 단청을 한다. 그러나 향촌의 누정은 별다른 장식 없이 백골로 두거나 긋기 정도로 그친다. 기둥에는 주연을 붙이고 누정의 명칭 편액을 걸어놓는다.
누정은 팔작지붕이 가장 많고,처마의 각에 따라 네모(4각)지붕, 6모지붕, 8모지붕 등이 있으며, 드물게 정자(丁字)형 맞배지붕도 있다. 지붕의 재료는 기와나 볏짚이고, 우물반자 등과 같은 치장을 하지 않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만든 천장이 가장 흔한 형태이다. 그러나 궁궐 안 정자처럼 품격을 높일 때에는 각종 화려한 장식으로 천장을 꾸미기도 한다.
난간에는 계자난간과 평난간 두 종류가 있다. 계자난간은 구름모양으로 된 계자다리가 지지하고 있는 나간으로 난간대가 약간 밖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여기에 앉거나 기대어 밖을 내다 볼 수 있다. 평난간은 바닥과 직각으로 서 있는 난간으로 살대로 여러 가지 무늬를 꾸민다. 바닥은 대부분 마루를 깔았으며 귀틀을 짜서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짠 우물마루를 깐 경우도 있다. 흙이나 전(塼) 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을 깐 바닥도 있다.
④ 삼호정 원형과 위치 추정
남아 있는 기록들로 보아 함벽정은 지금의 성심여고 후문 안쪽의 녹지 어디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심여고 개교 이전 신학교 설립 당시의 내용이 지금도 교내 안내판에 있는데, 여기에 함벽정 이야기가 잘 나와 있다. 따라서, 함벽정의 위치는 성심여고 구내로 한정할 수 있다.
삼호정은 용산(龍山)이라고 하는 산의 남쪽 산비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여러 문인들이 그 아래쪽 한강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던 사실이나 그 내용들로 미루어 보면 지금의 계성유치원(산천동) 건물 뒤쪽이거나 용산성당 후문(남문)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용산성당의 성직자묘지 안내판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 안내문도 삼호정 위치 추정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987년 서울교구에서는 신학교 건립과 묘지 건립을 위해 원효로4가와 산천동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고, 원효로4가 함벽정(涵碧亭)에는 신학교를, 산천동 산비탈 삼호정(三湖亭) 위에는 성직자묘지를 조성하였는데, 이 자리는 피어린 순교지 새남터거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감회어린 곳이기 때문이었다. 1889년 교구 성직자묘지로 정해지고, 1941년 이 곳에 설립된 용산본당이 묘지를 관리․보존하게 되었다. ---' 이 내용은 용산성당의 요청에 따라 한국땅이름학회의 배우리 회장이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보면 삼호정의 위치는 지금의 용상성직자 묘지에서 가까운 어디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호정의 원형은 조선 후기의 전통적 양식에 따라 지어졌을 듯싶다. 그러나, 국가에서 지은 누정이 아니어서 궁중의 전통 양식과는 상당히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정자의 양식에 관해서는 좀더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보아야 하겠지만, 삼호정은 사가(私家)에서 휴식 공간 내지 풍류 즐김의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보면 여기에서는 간단히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고, 잠을 자기 위한 시설도 함게 갖춰졌을 가능성도 있다.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가 자신의 소실을 위해 지었다고 했으니 그 부분에서 보면 여성 취향의 정자 형식을 많이 따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정자는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다용도 형태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말 이후로 천주교 탄압이 뜸해지자 용산 강변 일대에도 신앙 깊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신학교까지 생기게 되자, 신자들은 이 정자를 참례(參禮)의 장소로 이용했음이 천주교 역사로 잘 나타나고 있다.
공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백여 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용산성당의 약사(略史)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1926년 2월 ; ‘약현청년회 용산지부’ 창립. 삼호정 사랑채 사용 (초대 지부장 : 鄭在道, 총무 : 張石煥)
1937년 ; 약현 청년회 용산 지부, 삼호정 사랑채 헐고 그 곳에 청년회관 신축
1942년 1월 6일 ; 삼호정 안채를 공소 경당으로 개조하고(12칸), 뮈텔 주교 집전으로 축복 미사 봉헌
1887년 3월 ; 삼호정(三湖亭) 일대의 대지를 매입하여 교구 성직자묘지로 정함
1890년 5월 ; 삼호정(용산) 공소 설립(옛 삼호정 정자 안채, 신자 수 약 150명)
1891년 5월 23일 ;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 삼호정 공소에서 견진성사 집전
1891년 11월 9일 ;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 설립, 삼호정 공소가 약현본당 소속이 됨
이를 토대로 1920년대의 삼호정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정자의 마루 넓이가 꽤 넓었고 여기에 사랑채까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⑤ 삼호정의 역사적 가치
지금의 용산구 한강변 일대에는 누정(樓亭)들이 많았다.
용산 일대에 누각이나 정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대가 풍광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강변 일대로 지형이 많이 변하고, 많은 주택 등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한강가의 풍광은 예와 같지 않게 되었다. 특히, 강가에 이어 지은 많은 고층 아파트들은 먼 곳에서의 한강의 경치 조망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 한강가의 멋진 경치를 즐기기 위해 옛 정자를 원위치에 짓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강가의 정자 중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 의식을 후세에 심어 주기 위해서도 복원해 둘 필요가 있다.
삼호정이나 함벽정은 역사·문화적 의미가 크고, 이 정자들에서의 이루어진 여러 사실들은 그 복원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 둘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부터 용산 한강가의 유명한 세 정자를 삼정(三亭)이라 했는데, 심원정, 함벽정, 삼호정이 그것이다. 이 세 정자는 어느 정도 그 위치가 짐작되는 곳이 있지만, 현장과 주위의 모습이 나무도 달라져 현지 복원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삼호정 일대는 더욱 그러하다.
삼호정은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우리 나라 여성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을 만한, 최초의 여류 시단이 형성된 곳이다. 우리의 시 문학이 이곳에서 여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서 한 점을 짙게 찍어 줄 만한 곳이다.
아울러 이 정자가 후세에 와서 자연스럽게 신앙 공간이 되어 남녀노소들이 함께 모여 주민들의 마을 사람들의 친목과 단합을 해 옴으로써 우리 사회 계층의 차별을 없애는 데도 중요한 한 몫을 해 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⑥ 삼호정 복원 계획이 싹트기까지
삼호정의 복원은 수년 전부터 용산성당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그 필요성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용산성당 역사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1992년 성당의 총회장 성당 전체 신자의 총 대표. 주임신부와 함께 본당 사목을 해 나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필자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용산성당의 총회장직을 맡았다.
이 된 것을 계기로 성당 역사의 뿌리가 되는 ‘삼호정 공소’에 관해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 나갔다. 이렇게 되면서 용산성당의 신자들은 성당의 출발점이 바로 삼호정 공소이고, 이 곳이 조선시대 문학사에 등장하는 ‘삼호정 시단’이 형성된 장소였다는 사실도 알렸다.
오래 전부터 용산성당에는 문학을 연구하는 그룹이나 개인들이 찾아오곤 했었다. 이들 중에는 용산 삼호정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이가 많았다. 우연히 용산이나 삼호정 관련의 글들을 접한 사람들, 우리의 근대 문학사(특히 여류 문인에 관한 것)에 관심이 큰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삼호정’이란 정자에 관해 더욱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정자의 정확한 위치가 알고 싶어 종종 용산 언덕을 찾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용산성당 구내나 그 근처에서는 삼호정이라는 정자는 물론 이에 관한 표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을 알고는 실망하며 돌아서곤 했다. 더러는 성당 사무실 직원에 묻기도 했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성당의 어느 누구 하나 이에 관해 안내해 줄 사람이 없었다.
필자는 시간이 나는 대로 성당에 올라와 이런 이들을 만나곤 했는데, 이것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관한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내 관계로 삼호정과 김금원에 관한 공부를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필자는 관련 책을 구해 보는 등 자료 모으기에 힘을 쏟았다.
2010년 10월, 서울 대교구 염수정 주교의 용산성당 방문은 삼호정 복원 계획의 불씨를 지피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염 주교는 용산 성직자 묘소의 안내판에서 ‘삼호정’이라는 글귀를 보고 정자의 위치, 모양, 성당과의 관계 등에 관해 설명을 구했다. 필자의 설명을 들은 주교는 성당 안이나 근처 어디에라도 이 정자를 복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함께 있던 본당 주임신부도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는 이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복원에 관한 검토를 부탁했다.
2) 교구에서 온 ‘삼호정 복원 허락’의 공문. 2011.3.4
정자 복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정자에 관해서 더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연구에 돌입한 필자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지역 토박이 어른들로부터 증언도 들었다. 어느 정도 이 정자에 관한 지식이 축적되자, 필자는 성당 홈페이지를 통해 삼호정에 관한 내용을 올려 신자들에게도 이 정자에 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해 나갔다.
2011년 3월 4일, 드디어 서울대교에서 삼호정 복원을 승인하다는 공문이 날아 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삼호정을 복원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복원의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필자는 ‘용산사랑 포럼’이라는 지역 단체와 손잡고 세미나부터 열기로 합의했고, 결국 수개월 후인 그 해 8월 30일 성황리에 행사를 치렀다.
이러한 과정 중에 비용이나 장소 등 구청의 협조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구청장을 만났고, 여기에서 복원에 필요한 지원까지 약속받았다.
세미나는 용산구청과 용산사랑 포럼의 후원을 받아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땅이름학회 주최로 용산문화원에서 열었다.
<한강변 삼호정 일대의 옛 모습>이란 이름으로 연 세미나에는 용산의 구청장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들과 2백여 주민들이 참석했고, 이 자리에서 필자는 삼호정 복원의 필요성을 널리 부각시킬 수 있었다.
이 해 11월 용산구청에서 의회의 승인을 받아 공식 예산이 책정되었고, 구에서는 명지대의 김홍식 명예교수가 이끄는 ‘한울건축문화 연구소’에 건축 용역을 의뢰, 삼호정 복원 건립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⑦ 삼호정이란 명칭 유래
‘삼호정(三湖亭)’이란 명칭에는 ‘호수가 셋’이라는 뜻의 ‘삼호(三湖)’가 들어가 있어 정자가 세 호수가 있는 곳에 들어섰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이 이름은 호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선, ‘호(湖)’가 어떤 뜻의 한자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자전에 보면, 이 글자가 ‘호수 호’라고 나와 있다. 또는 ‘큰 못’이라는 의미와 함께 ‘고을’의 의미도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 글자는 단순히 ‘물’을 의미하며, 땅과 관련해서는 대개 ‘강물’을 뜻한다. 강줄기에서 흐름이 빠르지 않고, 다른 곳보다는 좀 넓은 부분을 말하기도 하는데, 서울 한강의 예를 들면 동호(東湖), 금호(金湖), 노호(露湖), 용호(龍湖), ‘마호(麻湖), 서호(西湖) 등이다.
이런 점에서 ‘삼호(三湖)’의 ‘호’도 한강 줄기의 어느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아마도 용산 앞강이라는 점으로 보아 노량진 앞강인 ‘노호’, 용산 바로 앞강인 ‘용호’, 그 바로 옆 마포 앞강인 ‘마호’ 등 세 호(湖)를 가리켜 ‘삼호’라고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가지나 한자 중심의 풀이이고, ‘삼호’가 우리말에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견해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용산 앞강은 옛날 샛강이었다. 따라서, '사이 물'이란 뜻의 '삿물(샅물)'로 불러온 듯하며, 이것이 '삼물'로 음이 변했다가 한자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사이 물→ 샅+물(샅물, 삿물)→ 삼물→ 삼(三)+물(湖)→ 삼호(三湖)
삼호정 정자가 있던 곳 근처의 고개가 ‘삼개고개’여서 그 ‘삼개고개’와 ‘한강’의 물을 정자 이름에 한 글자씩 취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⑧ 삼호정 복원을 위해
우리의 지역 문화를 사랑하는 옛 삼호정 근처의 많은 주민들은 삼호정이 복원되어 용산 한강변이 그 옛날 누정 문화의 중심지이고, 이 지역의 자연적 정서가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문화재의 복원은 우리의 역사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이고, 그 지역을 사랑해 온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한다.
함벽정과 삼호정은 역사․문화적 가치로 보아도 충분히 그 보존의 가치가 있다. 이것은 용산 한강변의 옛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한강변의 누정 문화의 복원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더욱이 삼호정은 조선 후기 여류문단의 시류(詩流)를 폭넓게 이해하고, 당시 용산 한강변의 좋은 경치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가치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문화재는 제 위치에 그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치가 크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는 동안 그 곳이 주택으로 들어갔거나 큰 건물 등의 시설물들이 들어서 버렸다면 제 위치의 복원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에는 그 원위치로 추정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복원이 가능한 최적지를 선택해야 한다. 다행히 함벽정이나 삼호정은 원위치로 추정되는 곳 인근에 아직 공터나 녹지 지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어 부지의 확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이번 기회에 명승과 같았던 용산의 옛 풍광이 정자의 복원을 통해 되살아나 이 지역의 살아 있는 지역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지역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를 바탕으로, 삼호정은 하루빨리 거의 제모습에 가까운 형태로, 또 원래 위치에서 가까운 어디쯤에 꼭 복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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