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9-1편] 물들지 않는 공간의 발견 |
내 안에서 에고가 작동하는 것을 깨어서 살핀다 |
우리는 대장부다 | 생각=각(본질)이 일어난 것(56:38)
시작하겠습니다
에카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영어로는 "새로운 지구(A New Earth)"
오늘은 8장을 하게 되겠습니다.
1장에서
'새로운 지구에 대한 비전'을 톨레가 제시하고
2장부터
에고에 대해서 '에고와 에고의 고통체'를 공부를 해왔고
8장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본질에 대한 깨달음'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 되겠습니다.
한번 전체를 비전을 한번 보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18
육조 혜능스님의 한국불교가 조계종이지 않습니까?
근데 그 조계에서 살았던 육조 혜능스님의 법문 중에 보면
우리들은 그러니까 본질이거든요.
우리들의 '나는 누구냐?' 할 때
나는 본질이고 본질은 의식이지요.
나는 의식인데 이 의식이 직심이 되면
(직심은 육조 혜능스님의 용어예요.)
의식이 왜곡당하지 않고 그대로 나오게 되면
똑바로 이 세상에 현상으로 드러날 때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일행은 '의식이 행한다.' 이 말이죠.
의식(본질)이 현상으로 낮투는
왜곡당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현상이 나타나는 그 일행삼매.
일행삼매의 내용은 '무심'과 '평상심'의 '중도'예요.
우리 마음이 무심하게 있다가 경계를 만나면 평상심을 쓰고
또 무심과 평상심은 지혜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왜곡당하지 않았더라면 직심으로 살게 되고
그 직심은
우리가 의식인데 경계를 만나면
의식이 있는 그대로 반응을 똑바로 한다 이거예요.
그것을 평상심이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무심 상태로 있다가
의식이 집에서 가만히 이렇게 앉아서 아무 일이 없는 거죠.
그렇게 있다가 일이 생기면 곧이곧대로 딱 보고
지혜를 가지고 딱 그대로 응하고
끝나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그러니까 무심과 평상심 이걸 중도라고 부르고
그걸 잘 쓰게 되면 불교는 자재라고 하지만
일반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자유라고 할 수가 있죠.
끝나면 다시 또 저희 집에 와서 또 무심하게 앉아 있고.
그러니까 참 삶은 쉽고 간단한 그런 모양이죠
그래서 자유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의식을 깨달은 도인이라면
그 사람의 삶은 항상 직심이다.
이 마음이 왜곡당하지 않고 그대로 나온다.
무심이라는 말은
마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마음이 비어있다는
그러니까 텅 비어 있는 마음으로 아무 일이 없는 거죠?
평소에는 무심 상태로 편안하게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거기에 맞춰서 지혜의 평상심이 나와서 쓰고
끝나면 다시 자기 집에 와서 무심하게 앉아 있고.
그러니까 참 삶은 쉽고 간단한 그런 모양이죠.
자유라고 할 수 있죠.
현상에서 무엇이 일어나도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을 하고 거기에 물들지 않는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그래서 아무튼 이게 직심을 가지고 사는 삶
깨달은 사람의 삶이다.
이렇게 육조 스님의 이야기예요.
4:28
지금 우리들은
일반적으로는 이 직심으로 못 살고 왜곡(歪曲)심으로 살아요,
이때 왜곡할 때 왜(歪)가 한자로 부(不) 정(正) 이잖아요?
바르지 못한 사람
한자로 부(不) 정(正)이라고 쓰니까 바르지 못하다.
곡은 이제 곡선, 직심이 아니고 곡선.
그러니까 이렇게 한번 굴절 당해 나온다 이거죠.
5:10
우리는 의식인데 왜곡심으로 살게 되면
첫 번째는 미혹이다.
미혹이라는 말은
자기가 의식(본질) 임을 잊고
현상에 매혹당해서 집착을 하다 보니까
현상계에 떨어져서 길을 잃은 상태.
본질이라고 하는 자기 집을 잃은 상태.
그러니까 집 나온 거지라고 비유를 하는
그런 상태가 미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의식이고 의식은 본질인데
본질인 것 까먹고 현상계에 미혹되어서
여기에 집착을 해서 여기에 붙어버리는
현상계로 떨어지는 그 상황!
이걸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 표현을 하니까
오래된 첫 단계가 잘못되었다는 거죠.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의 선조들도 그랬다는 그런 뜻이 되겠죠?
6:42
미혹되면
현상계에서 자기가 본질인데 까먹어 버리고
현상계에 있으면 (미혹되면) 어쩔 수 없이 두리번두리번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하다가
이 몸을 나라고 동일시를 하게 되었다.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나는 누구!' 하다 보니까
어 몸이 있네, 몸이 나네 하고 이제 몸이 나가 되어서
몸에는 (톨레의 말대로) 많은 역할이 있으니까,
나는 뭐 아들이고 아버지고 또 뭐 남편, 부인이고 또 형제고
뭐 이런 식으로.
또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직책들이 있잖아요?
뭐 과장이고 부장이고 온갖 직책들,
그러니까 이런 역할을 하면서
'나는 무엇이다.'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는 무엇이다.'
'나는 무엇이다.'에서 진짜 나는 '나는'이죠!
근데 '나는'은 까먹고 '무엇'이 돼 버린 거예요.
우리가 그런 상태
이 무엇들이 모여 가지고 에고를 형성하는.
그러니까 지금 동일시는 '무엇'을 동일시한다.
'무엇'을 동일시해서
특히 이제 그 무엇에 총체는 '몸'이 되는 거죠.
그래서 동일시하게 되면 '아상'이라는 '에고'라는 것이 생긴다.
여기까지는 지난 시간에도 계속 설명드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왜 반복해서 이야기하죠? 하도 잘 까먹어서요.
처음부터 자기를 까먹었는데 지금 말씀드리면 또 까먹었으니까
볼 때마다 또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
8:36
'아상이 생겼다.' 이해되시죠?
근데 그 아상의 특징은 자기가 전체인데
의식(본질)은 전체인데 전체를 까먹고
몸을 나라고 하다 보니까 - 부분을 나라고 했잖아요?
이 부분을 동일시에 하다 보니까
아상은 '나'라는 아상이 몸이 나가 되어버리면
몸 아닌 것이 생긴다 이거죠.
나와 남이 생긴다.
그러면 나는 분별의 습관에 의해서
이렇게 나를 분별했으니까
몸을 집착해 가지고 몸을 나라고 분별했으니까.
그 분별은 가만히 안 있고 남을 또 분별해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계속 분별을 해나간다.
분별을 한다.
아상은 분별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분별하면 삼독은 차별이잖아요?
삼독(三毒)은 탐진치(貪瞋癡)
탐(瞋)은 욕심을 내서 가지려고 하고
진(瞋)은 눈흘길 진
미운 것은 저렇게 눈을 흘겨 버린다. 싫은 것은 미워한다.
그리고 이제 치(癡)는
그런 자기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
자기가 탐(瞋)하고 진(瞋)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는 줄을 모르고 있는 상태.
탐진치(貪瞋癡)에 지금 걸려 있다. 삼독(三毒)이다.
그러면
당연히 경계를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 해버리니까
좋다 나쁘다는 애증(愛憎)으로 발전을 하고
애증은 취사(取捨)로 발전하고
근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계속 갈등이 일어나서 고통이 있다.
근데 문제는 고통이 있는 삶, 이것이 인생의 핵심이다.
이렇게 성인들이 다 가르쳤잖아요~
부처님은 '인생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고(苦)'다,
공자님은 '난(難)' 어려울 난, 참 인생은 곤란한 거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거와 같다.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이게 곧 이게 인생이다 이거예요.
그런 이제 고통이 있는 건데
문제는 그 고통의 의미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이 각 단계에서 제가 밑에 괄호를 치고 적어 놓은 것은
수행이라는 것은 그 단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바로잡는 게
수행이라고 할 수 있어서
바로 잡아보면
미혹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잖아요.
자기가 본질인 의식인데 의식이라는 사실을 까먹어 버리고
누구인지 모르니까
견성을 해서 (자기의 본질을 보아서)
'아, 내가 의식이구나.' 하고 깨달아야 되죠.
그래서 미혹을 바로 잡는 것은 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이해됩니까?
그래서 견성을 중요시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미혹이 첫 번째 잘못 꿰어진 단추인데
그걸 바로 잡으려면 견성이 중요한 거지.
사실은 견성이 철저하면 나머지들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이 견성을 해도 이것이 철저하지 못해요. 대부분은!
그래서 다시 옛날 습관과 옥신각신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12:28
그래서 미혹은 견성으로 바로잡고
동일시는
- 동일시를 하는 이유는
이 몸을 현상계에서 '무엇이 나지?' 하면서
몸을 집착하지 안나요? 여러분?
몸에 집착하잖아요? 아프면 큰일 나잖아요?
그러니까 동일시는 집착한다.
그래서 이걸 육조 스님은 무주라는 말을 써서
'집착하지 않는다.' 주(住)는 머물 주자거든요.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는다.' 이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면 머물게 되는 거죠.
13:04
우리의 마음은 흘러서 통해야 되는데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이게 막힌다 이거예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주(無住)
머물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가 탈 동일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주, 집착하지 않는 거다.
13:25
그리고 아상은 어떻게 해결하느냐 할 때는
아상을 수행으로 돌린다면
자기가 아상이 작동하는 것을,
내 안에서 에고가 작동하는 것을 각찰(覺察)을 해야 돼요.
각(覺)이란 말은 깨어있을 각이고
찰(察)은 살필 찰.
바로 옆이 종로경찰서인데 경찰서 그러잖아요?
경은 경제를 하고 찰은 살피고
경계해서 살피는 부서가 경찰서예요.
그것처럼 우리가 각찰은 깨어서 살핀다.
무엇을? 에고가 내 안에서 작동하는 것을.
그래서 각찰이 에고를 또 처방하는 약이라 할 수 있죠.
그러면 문제는 뭐냐면?
톨레는 계속 깨어서 에고를 관찰하면 관찰하는 힘이 강해진다.
그러면 깨어서 관찰하는 그것이 본질이라는 거죠.
그것이 의식이다.
그러니까
에고를 우리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느냐 할 때는
각찰을 통해서 각찰하는 힘을 기르면
각찰하는 그것 자체가 본질이며 의식이기 때문에
각찰을 하면 에고는 나올 때마다 정확하게 봐준다.
각찰한다. 깨어서 관찰한다. 본다.
그러면 깨어서 보는 그것이 본질이며 의식이기 때문에
에고을 볼 때마다 의식은 깨어난다.
그러니까 에고는 그렇게 처방을 우리가 하고.
15:13
그리고 분별은
에고는 분별하는데 도사거든요.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 분별을 하니까
이 분별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좋다고 하는 것이 쌓여 가지고
좋다고 하는 것이 자꾸 쌓이면 이상이 돼요. 이상!
그리고 나쁘다 하는 것이 자꾸 쌓이면 벗어나고 싶어서
근데 그것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쌓여 있는 것은
사실은 현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상의 이름으로 계속 현실은 나빠지는 거예요.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현실은 더 부정적인 것이 돼요
그러면 이상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 멀리 어딘가에 있어서
그걸 찾아서 계속 현실을 부정하고 떠나야 되는
자꾸 미래로 나가야 되는 현실을 떠나게 되는.
하여튼 저는 돌아보면 학교에서 교육받고
또 젊을 때도 항상 그 말을 들었어요.
집에서는 학교에서나 또 사회에서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하여 현실을 희생하라.'
현재에 있는 좋은 것을 못 누리고 항상 미래로 미루면서 살았다.
항상 미래는 좋은 것이고 현재는 열등한 것이고!(16:45)
17:20
진보, 첨단, 뭐 항상 좋은 것은 미래에 있다고 하는
여러분 '좋은 것이 미래에 있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냐면
모던(modern)이란 말이에요.
새로운 것이 좋다. 모던이라는 말속에는.
우리가 모던 에이지(Modern Age)잖아요
지금 현재를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미래의 것이 좋다는 그런 것이
지금 그 자체에 말 자체에 함유되어 있어요.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집단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는 시대에
지금도 다 집단적으로 우리가 최면에 걸렸던 시대.
지금도 그렇죠.
18:32
분별의 제일 핵심은 이상과 현실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끔 되어 있어.
그게 에고의 전략이에요
그래서 분별을 차단하는 것은
'이상에 속지 말자' 하는 거하고
그리고 '현실을 미워하지 말자.' '현실을 받아들이자.'
다시 말하면
이상은 대긍정이고 현실은 부정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았는데
이걸 바로 잡아야 돼요.
그래서 이상을 구하지 않고 현실은 받아들이는
요게 쌍차(雙遮) 쌍으로 막는다.
이상과 현실이라고 하는 잘못된 것을 쌍으로
이상에 속지 않고 그래서 구하지 않고
그리고 현실을 미워하고 부정하지 않고
그래서 받아들이는 쌍차(雙遮) 쌍으로 막는다. 19:38
(쌍차쌍조雙遮雙照)
20:00
그러니까 좋은 것도 취하면
좋은 것이 이상이 되어서 나를 속인다는 거예요.
20:30
수행하는 사람의 이상은 뭐예요?
대부분의 수행하는 사람의 이상은
내 마음이 고요한 거예요.(20:40)
21:12
생각이 없는 것을 적적하다 그러거든요.
그리고 졸지 않는 것을 성성하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고 하는 이상을 세워서
혹은 적적을 다른 말로 하면 선정삼매라고 해요.
그리고잘 깨어 있는 성성하게 깨어 있는 것을 지혜라고 그래요
선정과 지혜를 이상으로 삼아서 추구한다.
22:31
그러니까 분별을 바로잡는 것을 쌍차인데
수행상에서 말을 한다면 쌍으로 막는다.
이 말은 선정, 지혜를 구하는 것을 안 한다.
그리고 이 잡념 하고 혼침을 없애려고 하는 것을 안 한다.
요게 쌍차의 내용이라는 것
22:57
당장 수행에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보세요.
분별을 하니까 삼독
쌍차를 해서 그걸 안 하게 되면 삼독은
계정혜 (戒定慧)로 변하게 되는 거예요
[ 삼독:
탐욕(貪慾, lobha), 진에(嗔恚, dosa), 우치(愚癡) ]
[ 계정혜:
계(戒)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
정(定)은 산란한 마음을 안정되도록 하는 것,
혜(慧)는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 다음백과
계(戒)는 행동을 바로 하는 거예요.
정은 선정이고 혜는 지혜예요.
진짜 선정과 지혜가 나온다.
이게 진짜 선정과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삼독이 갈등을 일으켜서 고통을 하는데
갈등이 일어날 때는
사띠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림이에요.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차려야 돼요.
알아차리면 갈등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지금 갈등을 통해서 고통이 오는데
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에서
이제 핵심이 나오네요.(23:58)
수행을 가지고 비유해서 말씀을 드리면
(24:23)
자기 기준이 있어 가지고
선정과 지혜를 하고 싶은데
반대로 잡념 하고 혼침만 많으면 갈등한다.
갈등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통이 된다
그러니까 이걸 바로잡는 방법은
실제로 그렇게 해보면 잡념도 있고 혼침도 있어요.
그럼 요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게 문제예요.
왜냐하면 잡념과 혼침은 현실이잖아요?
아 현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근데 우리가 지금 이치로 따져보니까 이상에 속았고
그것 때문에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은 우리가 부정했다.
현실하고 갈등했다. 현실 하고 싸웠다.
잡념 하고 혼침을 없애려고 싸운다.
참선하면서 앉아서.
그게 그게 우리들의 지금 실제 모습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게 고통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치가 선정과 지혜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쌍차에 대해서!
좋은 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이상을 추구하면 이상에 속은 것이다.
25:52
그러면
선정과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대신에
잡념 하고 혼침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옛날에는 잡념과 혼침에 대한 상이 있었어요.
나쁘다고 하는 선입견.
상이 있어서 그 상 때문에 싸웠다 이거예요. 그 현실과.
그런데 이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냐면
그 상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받아들이면 안 싸우면.
그러면 번뇌라고 하는 상, 혼침이라고 하는 상이 없으면
번뇌나 혼침이 와도 괴롭지는 않죠.
아니 그냥 지가 오는 거지 자연적으로.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중요한 대목이에요.
잡념이 일어나도 안 싸우고 가만히 그냥
인정하고 수긍하고 받아들여서 가만히 봐.
그리고 혼침이 와도 깜빡깜빡 졸아.
졸았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앉아.
그래서 그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재밌는 게 걔네들은 왔다가 가는 거예요.
그거를 우리가 딱 이제 알아차리게 돼요.
그러면 아 얘들은 현상이구나.
생멸법이구나 생멸하는 것이구나.
그러면 잡념 하고 혼침은 생멸법이란 걸 알면
왔다 가네~ 왔다 가네~ 하다 보면
어 희한하게도 얘들이 왔다가 가면서, 내가 싸우지만 않으면.
'얘네들한테 영향받지 않네.' 라는 걸 알게 돼요.
그걸 수용해서 겪어 주면, 싸우지 말고.
겪어주면 걔네들이 왔다가 가요 맞죠.
왔다가 가면 나한테 번뇌상이
그 걔네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없으면
그냥 겪어주고 없으면
애들이 왔다가 가는데
' 왔다가 가는 것은 나를 지금 오염시키지 못하네.' 하는
그런 알아차림이 자각이 생겨요.
그게 고통의 의미라는 거예요.
28:33
그 고통
이거를 우리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딱 체득하게 되면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일상에서도 갈등과 고통이 오는데
당황하지 말고 정확하게 그거를 보고 있으면
왔다가 가네 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데 문제는 나를 걔네들이 나를 지금 뒤흔들지 못하네.
내가 싸우니까 뒤흔들었는데 안 싸우고 받아들이면 그냥 통과.
안 싸우고 받아들이면 잡념과 혼침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곤란한 어려운 것들이 통과해 버리는.
나는 뭐냐?
톨레 말대로 투명인간처럼 느껴집니다.
29:26
그러니까 오염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생겨요.
모든 생각 감정 또 외부 환경에 있는 것들은 왔다 가고
나는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에는 자꾸 해봐야 돼.
해봐야 체험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물들지 않는다.
제가 여기다가 (갈등 고통)
고통을 수용하면 불염 공간의 발견이라고 제가 썼잖아요?
불염은 '물들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진흙탕에 있어도 불염.
처염상정(處染常淨)
처 처한다
염 더러운 처해도
상 언제나
정 깨끗하다
처염상점
더러운 곳에 처해도 언제나 깨끗하다.
그걸 발견한다 이거예요.
아 내가 잡념과 혼침 혹은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는
이 현상이 살고는 있는데
이것들과 이전에는 싸웠다 이거예요, 이상의 이름으로.
근데 이상은 내가 이제 안 속고
그런 거는 난 추구하지 않아.
그러면 현실 밖에 없으니까, 도리가 없으니까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거는 받아들이면
얘네들이 나한테 왔다가 영원히 머뭅니까 갑니까?
가잖아요. 그 어떤 것도 가잖아요~
우리가 오늘 8장에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잖아요~
고민 많은 왕이 어떤 이걸 벗어나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더니
현자가 지혜로운 사람이 반지에다가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요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지나가서 어떤 고통도 지나간다.
문제는 뭐냐면
지나가고 난 뒤에 깨달음이 온다 어떤 깨달음인가?
나는 물들지 않는구나.
그래서 정말로 어떤 어떤 감정 같은 거
극복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있잖아요? 사람마다.
근데 그 감정은 항상 도망 다닌다고.
근데 한 번은 딱 날 잡아서
'이 감정을 도망 다니지 않고 내가 하면 겪어보리라.'
하고 견뎌보면 별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아픈데 견뎌보면 견딜만하다는 걸 알게 돼요.
그리고 몇 번 더 견뎌 보면 이제 별거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가 문제가 안 되어 버리는 거예요.
내가 수용하면! 수용의 힘이에요.
고통은 수용하면 굉장히 큰 힘이 돼.
그건 뭐냐?
결국에는 내 내면에서 불염 공간을 발견하는데
이것이 발견되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현상한테는 자유라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톨레 공부를 통해서 결국은
고통을 견뎌낼 때, 수용할 때, 도망가지 않고 견뎌낼 때
우리들은 고통으로부터 물들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게 자기의 본질이라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이 현상계로부터는
자유를 쟁취하게 되는 거예요. (33:00)
33:09
그러면 지금 보세요.
본질이,
1번
직심으로 들어가게 되면 일행삼매가 되고
그러면 무심과 평상심의 중도를 우리가 겪게 되면
결국에는 무심과 평상심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 거거든요,
맞습니까?
근데 2번도
왜곡심으로 들어가서
미혹→ 동일시→ 아상→ 분별→ 삼독→ 갈등→ 고통을 해도
결국 불염 공간의 발견을 통해서 자유라는 거예요.
1번을 가도 결론은 자유고
2번으로 들어가도 결론은 자유예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죠. (34:05)
'왜 하필 2번인가?
아니 창조주께서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1번만 만들어 놓지,
왜 하필이면
2번을 만들어 가지고 인류를 이 x고생을 시키시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 않나요?
왜 갈등과 어떤 악이라는 존재를 만물주께서는
왜 만드셔가지고 이렇게 우리가 힘들게 하는가? 할 때,
그냥 자유인 것하고
실컷 고생해 가지고 마침내 자유를 얻은 거하고는
농도의 차이가 어떨까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우리는 1번이 아니고 2번을 선택했다고도 해요.
왜냐하면 본질은 어차피 물들지 않아요, 사실은.
아무리 우리가 지지고 볶아도
어차피 본질은 물들지 않고 어차피 본질은 자유예요
결론은 버킹검이야, 자유야.
그런데 그냥 밋밋하게 아무것도 없는 자유보다는
고통을 겪어보고 얻는 자유의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할까?
얼마나 제대로 된 자유일까?
그래서 2번을 선택하게끔 하고
똑똑하고 용감한 사람일수록 2번을 선택한다는.
우리들은 똑똑하고 용감한 거죠.
35:48
이걸 설명할 때 어떤 분들은
2번은 일종의
본질(의식)은 어차피 현상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이 고통의 세계
이것들은 게임과 같다는 거예요.
왜 게임하는가? 재밌으라고.
그러니까 결론은 재밌으라고!
1번이 아니고 2번을 선택한 것은 심심해서,
재미있으려고.
결국에는 자유로 골인하는 요 과정이 사실은 조물주가
우리로 하여금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정말로 그 자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라고.
1번으로 그냥 거저 주어지면
너무나 이게 진짜 모르잖아요?
지금 공기가 거저 주어져 있지 않나요?
이 가치를 모르는 거예요.
이것이 정말 귀하다는 걸 알려면
이 공기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면
우리가 훨씬 더 공기의 귀중함을 알듯이,
사실 지금 대기오염이 심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만큼 우리가 모르고 그냥 이걸 막~ 한다.
근데 그런 고통을 통해서
이 불염 공간의 발견이라고 하는 물들지 않는 공간의 발견
그걸 통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왜 2번인가?
우리가 대장부라서 그렇답니다.
1번을 선택하지 않고 2번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대장부라서.
그러면 여러분 결론은 어차피 자유니까 이제 가면 되잖아요.
아이터너리(itanary)가 지금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일정표가 나왔잖아요? 한발 한발 밟아가면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제 이렇게 알고 공부를 하게 되면
훨씬 더 이제는 좀 더 안심하고 공부한다 할까?
결론을 아니까!
어차피 여행은 한 바퀴 돌면 집에 돌아오게 돼 있어요.
어차피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근데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돈 주고 스스로 고생하고
지금 이런 재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여러분, 인생관이 역전되지 않나요?
그동안에 정말 이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가 용감해서 지금 이걸 선택해서
이걸 지금 하고 있는 거구나 하고
스스로 우리가 안다 이거예요.
오케이? 여러분 대장부입니다.
지금 이번 생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결국은 우리가 이 갈등과 고통을 통해서
자기 안에 물들지 않는 공간을 발견해서 자유를 얻으니까,
자유의 강도는
고통이 강대와 강도하고 비례합니까? 반비례합니까?
비례하잖아요! (38:55)
39:31
수박에다가 소금 처서 먹듯이
그게 지혜롭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인생에도 문제아가 있어요.
그 문제아를 통해서 고통이 자유로 바뀌는
그 어떤 극적인 전환을 느껴보라는 거예요.
젊은 분들 게임할 때 이런 용어를 많이 쓰더라구요.
40:13
마치 게임에서 한 단계 레벨 업을 하려면
그 단계에서 가장 막강한 게임상의 캐릭터 강적의 캐릭터,
강적!
거기 보니까 '보스 몹'이라고,
게임에서 그 단계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강력한 적으로서의 캐릭터라고
보수 몹을 한번 해결을 해야지 올라간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에서 자유로 올라가는 관건은
보수 몹과 한번 대결해야 되는 거예요.
나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그걸 이기지 못하는 한은
이번 생에서의 이 단계를 못 넘어선다 이거예요.
그런 식으로 어차피 게임이다 이거예요.
어차피 1번이 아니고 2번을 선택한 것은 게임하자고,
근데 게임을 얼마든지 해도 되는 게
이러면 게임 속에서 주인공이 아무리 죽어도 안 죽잖아요,
우리가 그렇다 안 죽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안 죽는 걸 안다면 그 강적을 한번 맞닥뜨려 보자.
41:26
마찬가지죠, 강적이 바로 번뇌죠?
번뇌를 방금 어떻게 해결했어요?
수용을 해보니까 별거 아니라는 거 아니에요?
지나가더라는 거.
수용을 해보니까 별거 아닌데
일반적으로 수용 안 하고 계속 싸웠잖아요?
그러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지.
싸우지 말고 수용해 보면 견딜만해요.
견딜만하고 그러다 보면
내 태도가 안 싸우면 번뇌 즉 보리가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안 싸우면 번뇌도,
여러분 번뇌도 무엇이 일어난 거예요?
본질이 일어난 거예요.
번뇌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안 싸우면!
싸우면 적인데, 싸우면 상대 세계에서 못 벗어나는데
받아들여줘 버리면 상대에서 벗어나서 절대가 된다.
절대 입장에서는 모든 상대가 절대가 일어난 거잖아요.
'절대가 일어났다.', '성품이 일어났다.' '성기'!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공부상에 보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번뇌가 생각으로 비롯되잖아요
근데 생각이란 말을 보세요.
생각이 뭐냐면 '生'"생겼다'
무엇이? 覺이 본질이잖아요.
'깨달음', 깨달을 각. 각이 일어난 거예요
본질이 생긴 것이 생각이잖아요.
한번 이렇게 수용을 해보면 본질을 파악하게 되는데
모든 것이 다 생각조차도 그 원수인
(평소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괴로워요?)
근데 그 원수인 생각도 이름 자체가 보세요,
각이 일어난 것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럼
생각이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현상이에요. 집 밖에 비 오고 바람 부는 것 같아요. (43:41)
44:20
그러니까
그렇게 밖에서 비바람이 치는 거나
우리 내면에서 그런 번뇌가 왔다 가는 거나
다 이제 생명 현상이잖아요.
이걸 받아주면, 걔네들이 번뇌가 즉 보리였구나,
번뇌라는 것은 보리가, 보리는 각(覺)이잖아요.
인도말로 '보디'를 음역 하면 '보리'고
의역하면 '覺(각)' 보리가 '각'이잖아요.
'번뇌 즉 보리'
이 말은 생각은 覺이 生한 것이다.
이 말하고 같은 말이잖아요.
이것을 언제 우리가 깨닫게 되는가?
수용할 때 깨닫지, 싸우면 영원히 해결 못한다.
우리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건 에고예요.
에고는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현실과 싸우게 한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받아들여 보면
그것이 나를 물들지 못하게 하는 걸 발견한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앉아서 번뇌가 많이나 일어나도 상관없다.
일어나는 걸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혼침이 와도 상관없다.
'받아들인다' 하고 받아들이면 '어쩌라고?'
나는 그것 때문에 죽나요?
그냥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그러면 나는 물들지 않네.
걔네들은 다 지나가는 거고,
'나는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네.'라고 하는
그걸 발견하게 된다는 거죠.
거기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나서
'나는 물들지 않는 존재구나.' 하는 본질의 자각이 일어나서
대자유를 얻게 되고 이게 대장부의 길이다.
그러니까 1번을 선택하는 것은 무미건조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재미없잖아요? 안 그래요 여러분?
우리는 2번을 자기가 의도해서 선택했다.
그러니까 씩씩하게 살자. 대장부답게 이겨내 보자.
현재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그게 내가 레벨 업을 하기 위한 보스 몹이다.
그거를 내가 어떻게 그러면 보스 몹들을, 그 괴물들을
어떻게 나는 싸워서 이기는가?
여기 게임의 법칙은 수용이다.
제일 중요한 게 고통에 대한 수용!
그래서 현실과는 싸우지 말자. 수용하자.
수용하면 걔네들이 다 변해요.
여기까지 지금 잠깐 말씀드렸고
조금만 있고 이제 휴식하겠습니다.(47:05)
47:06
8번 '내면 공간의 발견'
내면 공간을 저는 '불염 공간의 발견'이라고 했어요.
지금 8장의 제목이 '내면 공간의 발견'이잖아요
요것을 따서
'불염 공간의 발견', 물 들지 않는 공간이 있다. '
우리 안에!
우리 안에는 물들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그거 발견하는 거다.
그게 견성이라는 거예요.
물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려면 고통을 피해만 다녀가는 발견 못해요.
맞닥뜨려야 돼요.
직면해서 나를 지나가게끔 하면
'아 나는 투명인간이구나, 듣지 않는구나.'
그걸 발견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
이 말도 좋지 않나요?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 평화가 있다. 이거예요.
'현상에 물들지 않는다.' 이 말은
현상에 속하지 않는 본질로서의 평화
그게 본래청정(本來淸淨)이라 그래요.
'본래청정심' 이런 말 쓰잖아요
'본래 청정한 의식'
이때 '심'은 의식이니까 본래 청정한 의식!
여기에 우리 안에 내면에 있다 이거죠.
요걸 발견하려면 고통을 겪어봐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 걸 확인할 때 발견된다는 거예요.
고통 없이는 발견 못해요.
고통이 있어야 '아 이것이 나를 어떻게 못하네.'
하면서 발견한다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신적인 평화'라는 거예요.
자 그래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49:04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앎은 무집착과 연결되고 ]
무집착을 제가 여기서 무주라고 썼어요.
육조 스님은 무주라고 표현을 해요.
육조스님이 깨달은 대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잖아요.
집착하지 말고 그 마음을 일으켜라.
집착하지 않으면 탈동일시가 됩니다.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앎은 무집착 ]
'무집착'
지나가면 집착하지 않는다. 이거죠.
[ 지나가는 줄 알면 ]
제행무상을 알면 무주가 된다. 집착하지 않게 된다.
제행무상을 알면 무주, 무집착이 된다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몸이 항상 불변이에요? 이렇게 지나가요?
지나가잖아요.
근데 몸에 대한 집착이 아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몸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면 그 아상도 힘이 빠진다.
그리고
[ 무집착과 연결되고
무집착에 의해 삶의 새로운 차원, 즉 내적 공간이 열린다. ]
집착하지 않으면 현상과 관계없는 본질이 드러난다.
그 현상의 물들지 않는 내적 공간이 열린다.
집착하지 않고 또 판단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건 분별하지 않고)
맞죠?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내면의 저항을 멈춤으로써
(내면의 저항은 현실에 대한 저항이에요. )
[ 그럼으로써 이 내적 공간의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 ]
그래서 제가 그 이번에
화요일 금요일 저녁에 시간을 정해 가지고 같이 앉아 보니까
거듭거듭 사람들이 실패를 많이 했거든요?
근데 그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실패를 해봐야 배워.
실패해 봐서 배운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실패를 하는 이유가 거꾸로 했기 때문입니다.
선정삼매는 추구하고
그리고 번뇌와 혼침은 없애려고 사람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실패했던 거예요.
실패를 반복하면서 교훈이 왔어. 어떤 교훈인가?
아 내가 실패했다.
실패한 것은 내가 거꾸로 했구나.
이제는 바로 잡아서 선정을 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으면서 오는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지금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랬더니 여러분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자각도 생겼고
또 하나는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52:37)
요게 우리 수행자의 모토예요.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근데 보세요.
앉아서 선정을 추구했는데 실패했어.
번뇌와 혼침을 없애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이걸 교훈 삼아서 선정을 추구하지 않고
번뇌와 혼침을 없애지 않고
하고 받아들이고 앉아 있으면
저의 목적은 오직 존재하는 일이 되는 거죠. 맞아요?
그러면 혼침이니 뭐 번뇌니 이런 거는 왔다 가는 거라서
상관없어.
근데 걔네들을 가만히 두면 싸우지만 않으면
존재하고 있지 않나요?
앉아 있어 보면, 번뇌가 오건 말건 존재하고
혼침이 오건 말건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고 제가 했으니까
그것들은 영향을 안 미치죠?
근데 더 놀라운 일은 뭐냐면,
저의 이번 삶의 목표는
여러분과 함께 앉을 때 참선하는 목적은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쓸 뿐인데
번뇌랑 상관없고 원칙이란 상관은 없는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싸우느라고 이미 존재하는 걸 까먹었을 뿐이야.
안 싸우니까 자각이 생겨 가지고
나의 목적은 존재하는 건데
근데 '이미 존재하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이미 존재한다는 자각이 생기면서부터는
번뇌는 번뇌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니고
혼침도 혼침 있어도 있는게 아니고
그러면서 내가 신경 안 써주면
얘네들은 저절로 그냥 고요해져 버려요.
그러면 이미 본래 존재하고 있는 거
얘가 진짜 선정이에요. 얘가 진짜 지혜인 거예요.
그렇게 현상에서 선정과 지혜를 만들려고
지랄발광을 헤왔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해보고 이게 실패하니까
'안 되는 거구나.' 하고 자각을 하고 내버려 뒀더니
뜻 밖에도 힘이 존재하고 있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것이 본래부터 선정이고
내가 본래부터 지혜예요.
이것을 번뇌와 혼침 중에서도 선졍삼매(禪定三昧)네,
선정이고 지혜네.
현상에서는 번뇌와 혼침이 막 들끓어도 상관없이
얘는 한 번도 선정과 지혜를 벗어난 적이 없네~
라고 깨닫게 된다는 거예요.
고요해져 버려요. 다~
처음부터 이랬네.
그러면 한번 이렇게 확실하게 확인하면
그다음부터는 걱정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금방금방 자각이 오잖아요.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안 싸우고.
그 이치를 수용에 적용했고
수용을 다시 현실 생활에 적용하면 똑같아요.
번뇌나 혼침처럼 온갖 문제가 있어서 좋아.
그렇지만 얘네들을 수용하고 있으면 다 지나가지
얘네들이 머물러서 나를 괴롭히지는 않아요.
다 지나가지!
그러면
진흙에서 내가 피고 있지만
나는 본래부터 이런 문제에 물들지 않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네.'
하는 그 자각이 완전해진다 이거예요.
이론과 수행과 현실 생활이 하나가 전체가 다 꿰어 가지고
일치가 된다.
요게 지금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하는
유교에서 말하는 지행합일이 일어나는 그런 공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