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 그리고 하늘까지 죄다 초록을 재촉하며 만춘의 향기가 무르익어 가는 석가탄신일에 역사 이야기를 좇아 온 사람들이 경복궁역 안으로 모여든다. 함께 있는 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한목소리를 경청하며 정을 나누던 해묵은 길벗들과 넉 달 만에 재회한다. 그동안 모두가 한결같이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그리워했기에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들뜨고 두근거리는 감동과 반가움으로 여울진다. 인연은 잠시 옷깃만 스치고 사라지는 것마저 쳐준다는데, 일행들과 해를 거듭하며 끈끈하게 다져진 인연은 시간이 흘러 고스란히 추억으로 저장되었다. 어쩌면 인연은 모질고 거친 생명과 같이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경복궁역 역사를 빠져나오면 지하철 통풍구 벽체에 3.1운동 직후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선포하기 위해 정부 수립의 취지문을 기초했던 한성임시정부 터였음을 알리는 조그만 표지석이 우두커니 자리한다. 올해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즈음하여 의미 깊은 표지석인데도 하루 일정과 비켜나 있어 추파만 던지고 뒤로 물러난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역사 지식이 해박한 문화해설가 박석환 임을 대동하여 600년의 시간이 녹아 있는 옛 한양의 심장부 지근에서 세월을 고요하게 품고 온 서울 종로구 사직동 일대를 스타트로 자연이 선사한 향긋한 계절 내음을 맡으며 싱그러운 기분으로 서촌 여정이 시작된다. 북촌이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데에서 이름 지어졌다면 서촌은 북촌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함께 혹자는 조선 시대 한양의 내산(內山)인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아랫마을이 각각 북촌, 동촌, 남촌, 서촌이라 불렸다며 역사적인 맥락으로 연관시킨다. 도심 가까이에서 오랜 세월 휴식을 제공하며 시민들과 친숙했던 아담한 규모의 '사직공원'이 아닌 '사직단'으로 들어간다. 일제가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성역화된 사직단 일대를 철거하고 공원을 만들면서 사직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으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직단보다 '사직공원'으로 익숙하게 불리고 있는지 모른다. 사직단의 효시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991년 사직(社稷)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고려 성종이 사직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는 기록이 전해진 거로 보아 사직은 인(仁)을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유교 사상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든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새 왕조의 기틀을 견고히 다지고자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여 풍수지리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백악산 기슭 명당에 새로운 경복궁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맨 먼저 궁궐을 기준으로 하여 좌묘우사(左廟右社)의 개념으로 좌측에 종묘를 우측 인왕산 자락에 사직을 지었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 즉,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지낸 왕의 개인적인 공간이 종묘라면 산 사람들을 위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곳이 바로 사직단이다. 농업이 사회 근간을 차지하며 주요 산업이었던 조선에서 농사의 풍년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직단에서 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며 재해 없는 풍년이 되도록 기원하는 사무는 국정 운영 중에서 최고 과제였을 것이다. 사직에는 단이 두 개 있었다고 한다. 동쪽은 토지의 신께 제사를 올리는 사단이고, 서쪽은 곡식의 신이 주인이 되는 직단이다. 종묘는 지금껏 그 모습이 잘 보존되고 사람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직단의 경우 사직의 의미와 역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적기 때문에 주변의 단군성전 등과 아울러 역사적 의미를 크게 부각하기 위해 '역사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거듭났으면 하는 주관적 희망을 담아본다. 사직단 북서쪽에 있는 우리나라 국조(國祖)인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시고 봉향하는 단군성전이다. 단군에 대한 봉향은 역사적으로 국가와 민간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단군은 민족의 상징이 되었기에 단군이 승하하여 산신이 되었다는 3월 15일 어천절과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는 10월 3일 개천절에 행사가 개최된다. 단군이 종교적 대상과 국조 등 여러 형태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단군성전은 대종교, 불교 등의 종교계와 지역의 유림 그리고 학교와 개인 등에서 각각 관리 운영되고 있다. 성전 건물 색채가 궁궐이나 사찰, 일반 사당과 달리 화려하지 않고 백색 내지 아이보리에 가깝게 단아해서인지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나라의 국조에 대한 성전치고 너무나 위상이 초라하고 전체적인 규모가 왜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군성전은 수천 년을 이어오며 평시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나라에 큰 외침을 당하거나 환란을 겪은 후에는 단군성전을 통해 피폐한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들을 다독이며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던 국가의 정신적인 지주였는데, 많은 사람이 국격에 걸맞게 단군성전을 대대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음에도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시고 봉향하는 행위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바람에 더는 발전을 못 하는 안타까운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길이 느슨하게 오르막 채비를 할 무렵 고종이 백성들의 심신을 단련하고 궁술을 장려하기 위해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운 곳에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인 황학정을 설치하였다는 안내판이 나오고 이어서 전통 활쏘기 국궁 연습장으로 유명한 등과정(登科亭)의 옛터 황학정에 도착한다. 사정이란 활터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광복 이후 서울중고등학교로 개명)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 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매각될 때 이를 받아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 옛터인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한 자료를 요약하면, 등과정은 서울 서쪽 지역에 있는 다섯 군데 이름난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가 갑오개혁 이래 궁술(弓術)이 폐지되면서 헐렸다. 원래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 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오사정을 비롯하여 서울에서 유명했던 활터는 일본 강점기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파손되고 활쏘기 역시 중단되었다가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건물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동쪽 측면 기둥에는 칠언 절구의 주련(柱聯)을 걸었다. 정면 외부 기둥 사이에는 사분 합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 천장으로 되었다. 건물은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무고주(無高柱) 5량가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정자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구조로 조영되었다. 건물 서남쪽 뒤로는 샘이 있고 그 뒤 바위에 황학정 팔경을 노래한 시를 음각하였으며, 건물 오른쪽인 동북쪽으로는 사모 지붕의 한옥 한천각(閒天閣)이 있고, 그 서쪽 뒤로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사우회관(射友會館)이 있다고 한다. 때마침 다섯 궁사의 활쏘기 시위가 한창이다. 145m를 날아간 과녁에 시선이 집중하지만 다들 밋밋한 표정으로 별다른 관심도 없다. 지금은 많은 스포츠와 다양한 취미가 생겨나 국궁에 대한 인기도가 떨어진 상황인데,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에도 밀려난 국궁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예전의 국궁은 지금과는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활을 쏠 때면 구름 관중이 몰려와 구경꾼에게 볼거리 흥을 제공하였으며, 측근들의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해설사로부터 건물 기둥에 설치된 주련(柱聯)에 대한 한시 풀이를 들으며 황학정을 빙 둘러본다. '우아한 봄바람에 회화나무 가지가 흔들린다.'에서 수형이 아름답고 깨끗한 품격을 지녀 귀하게 취급받았다는 회화나무는 간데없지만, 인왕산 자락에는 흙과 바위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 피어난 꽃들이 고운 자태를 자랑하고 연둣빛 이파리가 계절의 분위기를 돋아준다. 인왕산 자락길로 나서며 완만하고 푹신했던 길에서 다소 사납게 드러낸 오르막으로 표정이 바뀐다. 시간이 정오를 향해 흐르고 갑자기 찾아온 고온 탓인지 하찮게 여겼던 길마저 속도가 느려지고 발걸음에 무게가 실리는 무렵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날아든다. 올해 들어 처음 느껴 본 아카시아 향기라서 그런지 코로 킁킁대며 맡을 때마다 어찌나 상큼한지 기분이 황홀할 지경이다. 계곡이 발달하고 물이 풍부한 인왕산 자락의 영향을 받아 5월의 푸른 변신이 뚜렷하게 짙어졌다. 침묵의 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속세의 어지러운 생각을 벗어버리고 내면에 집중한다. 봄이 무르익어가며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걷는다는 건 혜택이고 선택받은 행복이다. 예로부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좋아 '수성동(水聲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인왕산 수성동 계곡으로 들어간다. 전망이 탁월한 곳에 '당신의 마음이 쉬어 간다는 사색의 공간'에 휴식의 터를 틀고 문화해설사로부터 조선 후기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지는 해설을 듣는다. 비가 갠 아침에 구름이 낮게 깔린 가운데 물 머금은 암벽의 중량감 넘치는 광경을 화폭에 압도적으로 그려낸 인왕제색도는 선생의 나이 무려 75세에 그렸다 한다. 국보 제21호로 지정될 만큼 작품이 뛰어나며, 그림의 배경이 된 이곳 수성동은 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이 겸재 선생의 작품 속의 그림 그대로라고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속된 말을 들으면 성현들은 맑은 물에 귀를 씻었다던 그런 수성동 계곡을 내려가며 물소리에 일상의 묵은 때를 씻어볼 요량으로 하산하는데, 조선 시대 태종의 둘째 효령대군과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 있던 돌다리 기린교가 금세 나타난다. 기린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효령대군의 집에 대해 나열하는 과정에서 이곳 또한 안평대군의 옛 집터라는 설명과 함께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 하나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영조 때 겸재 정선이 인왕산과 백악산에 걸쳐 있는 장동(壯洞) 일대의 경승지 8곳을 화폭에 담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가운데 수성동(水聲洞)을 묘사한 그림에도 기린교가 나타나며, 1770년경에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도 기린교가 표기되어 있다. 기린교는 195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1960년대 '불도저 시장'으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추진한 옥인시범아파트를 이곳에 세우면서 한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7년 청와대 부근의 문화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옥인시범아파트 옆 계곡 암반의 벽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다. 기린교는 길이가 3.7m에 불과한 짧은 다리이지만 겸재 선생께서 좁은 화폭에 담았을 만큼 서촌의 풍류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감이며, 수백 년 오랜 세월을 지탱하면서 다리에 난간이 박혀 있고 흙과 풀로 덮여 있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서 높은 가치와 서촌의 귀중한 맥을 이어주고 있다. 화가 박노수가 사망하기 전인 2011년에 종로구에 자신의 작품, 고미술품, 고가구와 함께 기증하여 보수를 거쳐 개관한 종로구 구립 박노수미술관이다. 유료 입장으로 운영 중이며, 정문에 '숨결음악회'가 공연 예정이라는 배너가 보인다. 예약하지 않은 관계로 입장하는 대신 문화해설사의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결한다. 건축 구조는 조적식으로서 한옥, 중국과 서양식 공법이 혼재한 다국적 양식에다 반지하가 딸린 2층 구조이다. 원래 이 집은 이완용과 함께 경술국치 조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의정부찬정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친일파의 한 사람인 윤덕영이 1937년 무렵에 자신의 딸을 위해 호화롭게 세운 집이었다. 문화재적 보존 가치가 크다고 판단하여 서울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로09번 마을버스가 지나는 골목에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이용했던 하숙집터를 지나 서촌의 세종마루 주변에서 자율적으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종로구 누하동 서촌 지역에서 50년 동안 3대째 전통을 이어오며 맛집으로 소문난 중식당이다. 평소 중화요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편이지만 시장기가 이미 발동한 상황에서 유명세까지 편승하다 보니 짜장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입소문은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오직 맛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집이다. 이 집의 콘셉은 매운 짜장면과 짬뽕이라는데, 매운맛은 인공 캡사이신 대신 오로지 청양고추 성분만 쓴다는 소문으로 유명세를 얻었다고 전한다. 맛집에서 나와 통인 시장을 둘러보고 지척의 거리에서 산수화의 전통 맥을 이으면서 한국의 산천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려내 향토색 짙은 작품을 선보인 동양화가 청전(靑田) 이상범의 가옥으로 이동한다. 국전 심사위원을 거치는 등 우리나라 동양화의 6대 가의 한 사람으로 꼽는 청전은 동아일보 재직 시 베를린올림픽의 민족 영웅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로 유명한 분이란다. 선생의 올곧은 인품으로 인해 결국 신문사에서 실직을 당하고 어렵게 생활하였다 하며, 선생의 작품에서도 변화를 거부하며 오롯이 정적인 기풍으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곳은 이상범이 사망하기 전까지 43년간 살았던 가옥과 작품 활동을 하던 '청전화숙(靑田畵塾)'으로 불리는 화실로 분리된다. 1930년대에 지은 건물이며 화실은 대지 20평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8평 남짓한 단층 양옥으로 3개의 가옥이 맞붙어 있다. 남자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 말끔하게 단장한 내부구조, 단아한 장독대와 화단 그리고 한옥의 고풍스러움이 살아 숨 쉬는 도시형 한옥의 예전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서울시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서울환경연합 앞마당에 400연 먹은 아름드리 회화나무 뒤에는 1930년대 근대 한옥의 특징이 혼재된 민가 건축으로서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건물들의 배치와 기본 구조, 건축 세부 수법 등의 전통 방식이 뛰어난 종로구 필운동에 자리한 홍건익 가옥이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듯 '필운동 홍건익 가옥'이라는 안내판만 내걸고 공휴일이라는 이유로 대문을 잠가 났다. 시대를 거듭하면서 최소한의 편익 시설을 확충하거나 자연 훼손에 따른 현대적 방식의 보수가 따랐지만 당시의 기본 구조와 모양을 잘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여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안내판 말미에는 현재 서촌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소이자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도 아끼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 지인 필운대로 향한다. 방문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옛 정취를 이끌어 주며 서촌이 품어왔던 시간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전망이 뛰어난 언덕배기에 배화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1898년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Mrs.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여사가 최초 학당을 창설, 개교하였다는 설명을 붙인 캠벨 여사의 흉상이 교정에 세워져 있다. 당시 학생수는 5명에 불과하였다는데 지금은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교까지 망라하며 거대한 사학으로 발전하였다. 교내 건물의 한적한 뒤꼍 벼랑에 오래된 보물창고 모습으로 필운대가 등장한다. 벼랑에는 굵고 깊게 팬 '필운대(弼雲臺)'라는 석각자와 함께 중간에 '제명'이 있고, 우측에 '감동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 필운(弼雲)은 이항복의 또 다른 호이다. 애초에 권율 장군의 별장이었으나 백사가 권율의 외동딸한테 장가드는 바람에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명'은 1889년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 글씨로 판명났으며, 필운대 또한 제명과 비교해보면 이유원의 글씨로 추정된다고 한다. 필운대, 제명, 감동명 모두 이항복의 글씨가 아닌 이유인지 이곳의 문화재 명칭이 애초 '필운대'에서 지금은 '백사 이항복 집터'로 바꿨다. 시대가 흘러가더라도 이항복 집터가 주목 받는 이유는 서체의 흐름과 이항복의 연구 그리고 유적을 밝히는 데도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6시간에 걸쳐 서촌 탐방길에 대한 공식적인 여정을 다 마치고 비로소 뒤를 돌아보는 여유가 생긴다. 시야에 정부서울청사와 저 멀리 현대건설 계동사옥까지 아스라이 들어오며 전망이 닥치게 펼쳐진다. 당장 눈앞에 서성거리는 도시 건물이 사라진다고 치면 예전의 필운대는 거침없이 드러낸 인왕산 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채 아마도 별장으로서의 입지가 탁월했을 모습으로 그려진다. 서촌에는 서인들의 본거지라는 보편적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는데,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 같은 서인들도 멋스럽고 풍치 있는 천혜의 서촌이 있었기에 그들만의 풍류를 펼치며 우리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을 수 있게 하였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2010년 서촌이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고 주목을 받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늘어남에 따라 골목과 시장을 가리지 않고 서촌이 뜨고 있는 모습을 몸소 체험하였다. 모두에서 언급했듯이 서촌의 유래는 다양한 해석으로 등장하며 '서촌'으로 부르게 된 시기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이 소나무와 도드라진 바위가 드리워진 인왕산 기슭에 터를 잡은 중인들의 시문학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서쪽에 있다 하여 서원시사(西園詩社) 또는 서사(西社)라 부르다가 '서촌'으로 일컬었다는데, 근현대에 이르러 이상, 윤동주, 이중섭과 이상범 같은 시인 그리고 화가 등의 여러 분야 예술가들이 서촌에서 활동하였다 한다. '조한'의 '서촌 옥류동천길'에서 서촌은 옥인동, 누하동, 통인동, 필운동과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지역 등을 일컫는 일종의 별명일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지명과 동네도 아닌 관계로 서촌이라는 명칭은 북촌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상술적인 명칭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서촌 대신 '세종마을'로 부르기를 주장한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서촌에 관한 유래를 일일이 나열하기는 어렵다. 그 진위에 대한 실체 규명이나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도 결론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갑론을박하는 모양새에 불과하다. 이곳은 지역 명칭을 떠나 오랜 세월 시민과 애환을 겪으며 우리 정서 안에 깊숙이 자리를 틀고 서울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서촌에서 다시 개명하기에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세종이 태어난 조선 한성부 준수방은 현재 서촌 지역에 해당하는 종로구 통인동에 해당하는 관계로 행정 주소가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시행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이 일대 골목길을 '세종마을길' 또는 '대종대왕길'로 표기하는 방안은 가능할 것이며 그렇게 치더라도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서촌에 대한 풍류와 의미를 깊게 관찰하고 학습하며 서촌의 묘한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서촌은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중의 한 곳인데, 1962년 군사정권 이후 국가 안보와 청와대 경호 목적이라는 미명으로 심한 규제를 받아 쇠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개발이 더디었지만, 상대적으로 전통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전화위복(轉禍爲福)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서촌이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고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오늘 역사탐방 기획으로 서촌을 둘러보면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앞서간 선각자들이 서촌에서 터를 잡고 그들만의 예술적 삶을 살찌우고 간 흔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흉내 낼 수 있다면 오늘을 선택한 서촌 역사탐방은 커다란 수확일 수밖에 없다.
|
첫댓글 자세한 설명 잘 보았습니다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드립니다.
기회되면 새로운 탐방 기행기도 올리도록하겠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글쓰시는게 직업이신가요? 완전 전문적인 탐방기행기네요.
서촌근처에는 많이 가봤어도 투어는 안해봤습니다.
앞으로 많은 기대가 됩니다.
네, 요즘에는 도보여행기를 수필로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쓰실수 있는지... 대단하십니다. 기행기 잘 읽었습니다.
참수리 운영자님 고맙습니다.
요즈음 친구들도 역사탐방 다닌다더니 산바다님도 다니시는군요 ~~ 시간적 여유가 잇으면 이곳저곳 공부 하며 탐방하는것도 의미가 잇고 유익한 여행이 되겟어요 긴 설명 감사히 읽었습니다~~^
세린님 관심을 가지고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등산을 꾸준히 하다 몇년전부터
걷기 대열에 동참하며 운동한다는 핑계삼아 역사탐방 코스를그저 걸어만 다닌
나는 누구인가 ㅎ
도보 여행기를 읽어보며 ,,
친구님의 그책을 꼭 읽어 봐야겠어요 ...
공부 하고 가요 ..
단잠 이루시고 ~~~~
우리 역사에 대해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낀다는데~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많이 읽어줄 사람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쁨이 있을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