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먼지 구덩이에서 맛본 나성의 맛
- 기자명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2.11.30 15:32
로스앤젤레스(나성)에서 가장 기뻤던 날은 공항에서 가족을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눴던 첫날이다. 제대하고 혼자 남아 이리저리 떠돌며 4개월 동안 헤매던 우리 땅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웠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니 정말로 반가웠다.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도로에 늘어서 있는 야자수의 낯선 풍경들, 거리의 가게 간판이 다 영어로 쓰여있고, 길거리만 나서면 들리는 말이 대부분 영어 아니면 스페인어인 것도 너무 새로웠다.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실감이 나지 않았고 낯선 것들이 주는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분명 어려움이 많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지겨웠던 새장 속의 군생활을 마치고 식구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1983년 11월 나는 미국으로 영주이민을 가게 되었고 거처는 이제 미국 문화권이 되고 말았다. 당시는 이민 가는 비행기가 주로 토요일에 떴고 나는 시차로 인해 다시 토요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속칭 나성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해 하룻밤을 정신없이 뜬눈으로 지새고 식구들을 따라 나성영락교회로 향하였다. 교회당 건물은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나성영락교회는 갑작스럽게 부흥하여 밀려들어오는 성도들을 감당할 길이 없어 유대인 회당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같이 몰려와서 주변의 중고등학교를 빌려 주일학교를 열었다.
나성영락교회는 건물의 외양만큼이나 사람들도 무척 세련되고 이국적으로 보였다. 성가대는 왜 그렇게 잘하던지. 화음이 딱딱 맞아떨어지고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봉헌찬송은 또 어떻고,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찬양 솜씨였다. 순서가 되어 당시 담임을 하시던 김계용 목사님이 단에 올라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핵심만 짚어 성경 강해식으로 설교하며 위로와 도전이 섞인 메시지를 전달하시는데, “야! 그 설교 말씀 정말 좋구나!” 하며 연신 감탄하시던 부모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이민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전이 꼭 필요했다. 이래저래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낯선 이방인들은 늘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지내니, 힘을 불어넣어 주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얼마나 간절했겠는가.
마냥 신기하고 멋져 보였던 로스앤젤레스의 거리와 건물들은 첫날 몇 시간만 그리 보였다. 그다음 날부터는 나는 여기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걱정해야만 했다. 2년 반 동안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잃어버리신 부모님, 동네 일본식 식당에서 매일 힘겹게 일하는 남동생, 병약하여 일을 다니는 날보다 결근하고 누워계시는 날이 많던 어머니를 대신해 밥도 하고 식구를 돌보는 막내 여동생,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 위성안테나 겉면을 사포질하고 깎으러 출근하신다는 아버지를 보니 금세 마음이 무거워져 온통 신기하던 나성의 풍경이 저만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서울에서는 작지 않은 기업체의 사장님이었던 아버지의 어깨는 왠지 옹색해 보였다. 나는 제대해서 이국땅에 왔다고 설레었는데, 식구들이랑 오손도손 지내게 되어 외로움은 끝났다고 좋아했는데, 그건 너무도 감상적인 생각이었고 삶의 냉혹한 현실 앞에 갑자기 우울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게다가 내가 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내가 젊다 해도 긴장 속에서 태평양을 건너오고 나니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정돈되지 않았다. 낮엔 졸리고 밤에 말똥말똥한 시차마저 처음 겪어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내게 뾰족한 기술이 있지도 않고, 생활 전선에서 돈을 벌어본 경험도 없었기에 무엇을 해야 가족에게 힘을 보탤 수 있을지, 해결의 실마리가 단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우리 가족밖에 없는데, 고된 일과 병으로 찌든 가족들을 보게 되니 낙망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도 패기가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에게는 약간의 허세를 부리며 이제 맏아들인 내가 나가서 일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큰소리쳤다. 그래도 아직은 날이 선 군인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부모님은 우리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신 이모부 내외에게 요청하여 내 일자리를 알아보게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아타운에 있는 이종철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자동차공업사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돈을 얼마를 주는지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와 같은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된 채로 일단 나와서 일하다가 천천히 급료와 작업조건을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아무런 재주가 없었던 나는 어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어느 월요일 아침에 한인타운의 공업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찌그러진 자동차를 수리해 주는 공업사였고 당시 미국말로는 바디샵으로 불렀다. 자동차의 차체를 펴주고 도색하는 곳으로 온종일 미세먼지가 풀풀 날아다니는 그야말로 3D 업종의 가게였다.
가게 입구 구석에는 독일산 셰퍼드 두 마리가 사람들의 출입, 혹은 앰뷸런스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죽어라 짖어대곤 했다. 망가진 자동차의 수리는 이른바 ‘마에스트로’라고 서로 호칭하는 멕시코 출신 아저씨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영어를 말하는 건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마에스트로는 영어로는 미스터로 표현되는 일종의 경어체 호칭이었다. 영어식 표현으로 마에스트로는 거장 지휘자 혹은 극도로 존경을 표하는 스승님 정도의 호칭인데, 그들은 서로를 극도로 존경하는 의미로 그렇게 서로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었다.
스페인어는 한마디도 몰랐고 첫날 배운 ‘올라’라는 인사말 정도만 할 줄 아는 나였기에 한국인 경상도 출신 사장님의 과장 없이 딱딱한 명령과 서로를 깊이 존대하는 멕시코 아저씨들 사이에서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야 했다.
어느 날 사장님의 친구가 가게로 와서 햄버거를 사 오라며 자신도 20불짜리 지폐를 내밀고, 사장님도 20불을 내밀며 처음 들어보는 햄버거 종류와 음료수를 사 오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곳에서 할 줄 아는 게 없어 무기력함을 느끼던 때라 뭐라도 임무가 떨어진 게 반가워 나는 벌떡 일어나 명을 받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한국에는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가 없던 시절이다. 말로만 듣던 햄버거와 마주할 생각에 약간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며 햄버거를 주문하기 위해 가게로 들어섰다.
긴 줄의 끝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려 사장님 친구의 햄버거 세트를 먼저 시키고, 다시 줄 뒤로 돌아가서 사장님의 햄버거를 주문하였다. 그때 나의 두 번째 주문을 받던 한 흑인 점원은 크게 웃으며 “너 왜 아까 한 번에 두 개를 다 주문할 것이지 다시 줄을 섰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질문에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따로따로 주문”을 뜻하는 세퍼레이츠 오더(separate order) 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줄을 선 것이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햄버거를 받아들자마자 가게를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영어를 모르니 이런 어이없는 창피를 당한다고 자책하며 바디샵으로 돌아와 햄버거를 전달했다. 나는 햄버거는 눈으로만 보았을 뿐 집에서 싸간 도시락을 꺼내어 구석에 앉아 끼니를 해결했다. 그날 나는 미국에 산다고 저절로 영어가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 걸 알았고, 자연스럽게 영어가 나오려면 평소에 많이 듣고 대화하며 생활화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
그런 경험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사장님으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미스터킴, 뭐 할 줄 아는 게 있나요? 영어를 알아들어 손님한테서 주문을 받을 수가 있나. 아니면 기술이 있어서 차를 고칠 수 있나. 그것도 아니면 힘이 좋아서 가게에 침입해 올지 모르는 못된 놈들로부터 가게를 지킬 수 있나?”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영어 소통도, 차 고치는 기술도, 가게 지킬 힘도 없는 나는 사실 사장님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유일한 잉여 직원이었다. 또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아 고용한 직원이기에 월급도 너무 적게 줄 수도 없고,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하니 저임금을 만족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무엇 하나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의 밥을 먹여줄 만큼 소득이 많은 가게도 아니었기에 사장님은 은근히 나가 주기를 종용했다.
아무래도 첫 직장은 잘못 들어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고, 소개해주신 이모부에게도 미안함을 전하며 사장님의 뜻대로 자동차 공업사에서의 직장생활은 마감하게 되었다. 너무 짧은 기간이어서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했고 훗날 근처로 지나가며 ‘나의 이민 첫 직장’이라는 추억담을 만들어준 그곳에 쓴 웃음만을 날렸다. 그리하여 먼 이국땅 나성, 먼지 구덩이에서 처음 맛본 것은 씁쓸함 그 자체였다.
김도일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는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