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곤경
우리가 태어난 세상으로 또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커져갔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위대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서야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 세상에 집착하는지 깨닫게 된다. 마음은 마음과 같은 환경을 갈망한다. 우리는 이것을”향수병”이라고 한다. 우리보다 덜 개성적인 프랑스인이라면 그런 감정을 "조국병"이라 부를 것이다. 조선처럼 완전히 몰개성적인 땅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동질적이고 친숙한 것에 대한 갈망을 "세계병”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감정은 별 것 아닌 것에 대해서도 강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조선인들은 친절하고, 사려 깊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랑보다는 이해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커서, 마침내 그쪽으로 영혼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조선인은 친절함 그 자체였다. “출발"이란 말을 언급할 때마다 홍영식은 왜 그 특별한 때가 떠나기에 가장 불길한지, 그래서 내가 더 머물러야 하는 지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끝없이 주워섬겼다. 그래서 나는 더 머물렀다. 몇 주가 몇 달로 늘어났고, 그러는 동안 날이 흘러 봄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기하학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평소보다 훨씬 더 생기가 돌았다. 그의 반쯤 억눌린 기쁨은 그가 소매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것에서 부분적으로 설명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정다운 생각의 표시로 건네주며, 나에게 열어 보라고 청했다. 그렇게 했더니, 금가루를 두른 큰 알약 두 개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방문 때, 내가 가벼운 감기에 걸렸었는지, 아니면 이 관심이 단순히 한 해의 계절에 적합한 일반적인 약 때문이었는지, 나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아쉬워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삼키는 대신, 조심스럽게 다시 포장 한 후(불확실하고 불필요한 것은 접어두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것들을 삼킬 수 없었다), 그것을 간직하기 위해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효능은 회의적인 것 이상이었어야 했다. 설령, 가짜 약을 할인해서 사더라도 그럴 거다. 조선에서 의술은 아주 오래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다. 그곳의 약국 가게는 가엾은 로사몬드를 홀린 아름다운 보라색 항아리처럼, 겉모양이 근사하고 아무 상관없는 매력으로 자신을 장식할 필요가 없다.
뛰어난 존중을 바탕으로 관습에 근거하고 있는 전통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건물 정면을 따라 적당한 곳에 신농유업이라는 간판이 있다. 즉 ”신농이 남긴 직업”이라는 뜻이다. 농업과 의학의 발견자인 이 유명한사람은 ”정신적인 농업주의자”였다. 오늘날 그런 가게에서 판매되는 알약은 그가 발명한 것과 맞먹는 것으로 추정된다. 간판을 제대로 번역하면 "존스, 아이스쿨라피우스의 후계자” 정도가 된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었고, 날짜가 정해졌다. 그들 역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와 함께 제물포로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날은 그들에게도 일종의 출발일 이었다.
서울에서 제물포까지는 몇 개의 뚜렷한, 아니면 개인적으로 알아서 가는 다소 분명하지 않은 길이 있다. 다행히 시작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당일에 이동하면서 더 정확한 정보를 얻었다. 다사다난했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따뜻했으며, 빈 집과 번화한 뜰에 어울리는 작별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집안에서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바닥들이 마치 버려진 것을 비난하는 것 같았고, 가구가 없던 공간을 채웠던 지극히 개인적인 물품들이 빠져 나간 방들은 더없이 황량했다. 밖에서는 수많은 짐꾼들이 그 짐더미들을 차근차근 짊어지고 있었다.
한편, 작별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은 애를 써서 그들을 헤집고 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고별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물포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작별을 고하는 곳은 정작 집 자체였다. 미소를 띤 따뜻한 봄 햇살이 당당한 위용으로 내리쬐었다. 아마도, 그 햇살 역시 약간의 이별 감정만 있어도, 거의 조선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내 조선어 지도의 편찬자가 조선에 대한 그의 장황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은 광시곡을 쓰는 계기가 된 그런 열성으로 조선에 대해 감사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지방의 한 가운데에 조선의 빛이 있다. 모든 산들이 이곳에서 합쳐지고, 모든 하천이 이곳으로 흐른다. 모든 위도의 기원, 모든 경도의 기원은 이 지점을 가로지른다. 사실, 그곳은모든 것의 중심이다. 북쪽에는 꽃이 만발한 산이 있다. 남쪽에는 조선의 강이 흐른다. 왼쪽에는 감시문 역할의 산이 있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흘러 에워싼다. 백성들은 모두 평화의 축복을 누리고 그들의 관습은 최고 문화의 결과다. 거대 도시로 뻗은 그들의 도로는 모두 곧으며, 남쪽을 향하는 왕좌는 바로 섰다. 중국의 슈왕조의 수도와 같다. 중국의 동방감시문이나 서부감시문 같은 수도들은 비교 조차되지 않는다. 천상의 대도시! 황금성! 사실, 우리는 그것이 가졌던 위대함에 대해, 그리고 영원하리라는 것을 축하해야 한다. 아! 정말로 위대하다!”
우리는 순조롭게 출발했다. 즉, 우리는 모두 만족할 때 출발했다. 마지막으로 출발한 무리가 점심 이전에 제일 먼저 출발한 무리를 따라잡았는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덮개를 씌운 가마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훌륭한 사교성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발대가 식사를 하기 위해 멈춰야 할 때 후발대가 반드시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나와 일본인 비서가 꼴찌였다. 그런데 직통도로에서 벗어나, 시내 한두 군데를 들르다보니 더 늦어졌다. 마지막 방문 장소는 우연히 남서쪽 출입문 근처에 있었던 터라, 남대문을 택하지 않고 그 문을 통해 서울을 떠났다. 이 두 관문에서 여러 나루터까지는 직각 십자형으로 교차된 길이므로 다른 관문을 통해 출발한 쪽에 비해 더디게 출발한 우리가, 건너야할 나루터에 안전하게 도착하지 않을 염려는 없었다. 강 건너편 길도 잘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조선 조랑말위에 올라탔고, 견마잡이 한 명이 고삐를 잡고 앞에서 말을 몰았다. 길고 심각한 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나의 젊은 일본인은 가마 속에 포근하게 싸여 있었다. 말이 느리긴 했지만, 가마꾼보다 훨씬 빨랐고, 나는 곧 뒤에 있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 견마잡이와 나 - 흐트러짐 없이 앞으로 터벅터벅 갔지만, 그래야하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왼쪽으로 꺾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 길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나루터로 가는 길인 줄 알았다. 견마잡이가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때 내가 가는 길과 같은 길을 갔다는 징후가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고는 엄청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과 달리, 견마잡이는 단지 윗사람들이 그에게 준 지시를 단순하게 따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겉모습에 현혹된 희생양이 되어 고통스럽게 낙담하기도 했다.
도로 위 어딘가에 있는 내 짐들 중에는 나를 초청한 사람들이 만들어 준 커다란 조선 옷장인 서랍장이 있었고, 그것은 다른 작은 선물들을 제쳐두고 손수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어떤 산을 내려올 때, 나는 앞서가는 그것을 보았다. 정신적으로 기뻤다. 그 옷장이 무사하다기 보다는 적어도 일행의 다른 사람들이 이 길로 갔을 가능성을 나에게 제공했다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아아! 더 가까이 다가가니, 나는 그것이 단지 다른 사람의 가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강에 다다랐고, 최악의 의심에 부합하게, 상류 나루터에 도착했다. 상황이 꺼림칙하게 느껴져 이곳에서 일본인 비서가 탄 가마를 기다렸지만, 가마가 나타나지 않아, 마지못해 배 한 척을 타고 건너갔다.
나는 몰려드는 불확실성의 암울함에 빠져 뱃사공에게 나룻 삯을 지불하지 않았다. 강 가운데로 반마일이나 와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내가 나룻 삯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알고, 관습적인 공손함에 큰 가책을 받았다. 그러나 관리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위풍당당하게 건너가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무신경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반성했다.
건너편 둑에 도착해서,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도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동안, 우리가 있는 곳과 내가 있어야하는 곳 사이에서 길을 더 갈 때마다 나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일본인 비서는 눈에 띄지 않았고, 내가 뒤에 올 법한 가마꾼을 좀 보자고 할 때마다 그 길도 제물포로 가는 길이니, 견마잡이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길이 제물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끝나기 전에, 점점 더 확신이 가기 시작하건대 나머지 사람들이 간 길과 이어지기는 할까? 나는 이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말의 고삐를 내가 쥐어 들판을 가로질러 갈 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지름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 번째 생각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하루 종일이 아니더라도 한 동안은 나만 혼자라는 사실이 불행하게도 분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명상을 도와줄, 그리고 얻을 수 없는 음식을 대신하기 위해 담배를 한 대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끔찍하게도, 한 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불행히도, 진짜였다.
담배가 없다니! 그리고 그것보다 덜 불행하지만 먹을 것이 없다! 최악의 상황이었다면, 길 가다가 얻을 수 있는 것, 즉 조선인들이 “밥"이라 부르는 것을 나는 애가 보채듯이 먹었을 것이다.
여기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처한 한 남자가 있다. 낯선 나라에 들어가는 데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낯선 나라로부터 나오는데 길을 잃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견마잡이는 일류의 자동인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나를 보기에 멈출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밧줄 끝의 자동인간은 제물포로 가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가는 줄알고 나는 따라갔다. 안 그러 면, 길을 잃은 채 계속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만약 내가 뒤로 돌아선다면 나는 가능한 유일한 출구를 놓칠까하는 두려움의 먹잇감일 뿐이다.
그래서 견마잡이가 ”밥’으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길가에 있는 음식점에 들를 때까지 문제는 계속되었다. 나는 행인들에게 나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에 관해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물어 볼 기회를 잡았다.
이 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나는 이쪽에는 제물포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내가 온 길을 조금 되돌아 가 추측으로 시골을 가로질러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는 제물포까지 가는 것만 유일하게 생각하는 견마잡이가, 잡고 있는 말보다 그렇게 하기를 더 꺼렸다. 곧장 나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은 훨씬 덜 편협했다. 이 미미한 도움조차 소용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급습했지만, 결단한 후, 채찍을 내 마음대로 휘둘러 우리 셋은 곧 논 사이에 솟아오른 작은 길 중의 하나를 택했다.
반마일 정도 지나자 그것은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 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완전히 바닷가에 있었다. 견마잡이는 나보다 우리의 행방에 대해 덜 알았다. 우리가 제물포 방향으로 가는 길을 만날 때마다, 그가 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큰길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절망과 그 큰길을 만날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우리는 큰길을 만났고, 나는 그것을 단번에 알았다.
작은 길에서 한 번은 다른 공포의 먹이가 되었다. 나는 내가 너무 뒤처져 있어서 절대 조선인 일행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이때쯤이면 조선인 일행은 나를 한참 앞서 있을 터였다. 그 길을 가다 5분 만에, 가마를 타고 서울로 가는 일본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나는 기쁜 나머지 그를 꼭 껴안았다. 그로부터 우리 일행이 나보다 앞 선 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내가 도랑을 타고 내려온 뒤, 내 시야에 들어온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확실히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말에 박차를 가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 표현은 엄청나게 과장되었을 것이다. 어떤 속도도 전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짐승이 정상적인 걸음걸이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냈고, 내가 뛰어 내렸을 때, 한사람이 죽음에서 돌아온 듯 환영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남은 여정은 아주 평탄했다. 작은 협곡꼭대기에 같은 노인 표지판이 서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나는 그가 괴상한 모습으로 희미하게 보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햇빛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우리는 마지막 산의 정상에 올랐고, 발 아래로 바다를 보았다. 앞 바다에는 우리가 만나러 온 기선이 놓여 있었다. 봄이 시작된 후에도 서울을 떠날 때는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 운에 맡기면, 영원히 제물포에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 글을 쓸 당시 조선을 세계에 묶는 우편 약정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일본공사관의 사적인 문제였다. 선박이 제물포에 도착하면 짐꾼이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관에 우편물을 풀어 놓고, 다음날 일본으로 가져갈 우편물과 함께 제물포로 돌아갔다. 짐꾼이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친절하게 몇몇 다른 외국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들이 보내야할 편지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맡았다.
저기, 외계에서 온 전령인 배가 누워 있었다. 그 배는 우리가 서울을 떠났을 때 생각했던 배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나가사키에서 온 배가 예상대로 다음날 도착하여, 우리는 제물포에서 짧게 머물러야 했고, 우리는 다시 친절한 영사의 손님이 되었다.
그날 밤, 홍영식은 버섯같이 급속히 번창한 일식집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수줍게 맞장구를 치는 예쁜 “아가씨”들은 이 애절하면서도 유쾌한 과거의 결말 속에서 이미 미래를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 날, 홍영식은 서울로 돌아갔고, 그 다음 날, 나는 기선 갑판에서 해안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우리가 점점 더 멀어질 때, 마치 서울이 어디인지 표시라도 하듯, 더 앞에 있는 산위로 우뚝 솟은 닭벼슬산은 바다 멀리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