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에 비친 [부산 항]
〈아메리칸 마도로스〉
김진경 작사
고봉산 작곡
고봉산 노래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 항구 제2부두
죄많은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트라
닷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
아~~~~ 항구에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카 마도로스
~♩♪♬ ~ ♩♪♬ ~
꽃물결 넘실대는 부산 항구 제2부두
술취한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트라
깃발을 올리면은 기적이 울고
테프가 끊어지면 사랑이 운다
아~~~~ 항구에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카 마도로스
☞ 노래의 ‘배경’
이 노래는 [고봉산]이 작곡을 하고 직접 노래까지 부른 곡이다.
노래가 발표되기 전인 6.25 전쟁 당시에는 후방의 군수기지였던 부산항을 통해서 군수 물자들이 주로 보급되었다.
'제1부두' 에서는 병사들을 배에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었고
'제2부두' 는 무기나 군 장비 등의 군수품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3년간의 전쟁이 멈춘 후에도 '부산항'은 외국의 구호물자들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밀가루나 옥수수 같은 먹거리들이 제2부두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국 선원들과 부산 시민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분주한 모양새가 되었다.
미국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제2부두〕는 따라서 〔아메리칸 부두〕라는 별칭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다.
따라서 외국 배의 선원이 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부산항'은 무역의 메카로 급부상한다.
물류뿐만 아니라 일본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을 비롯하여 각 나라를 연결하는 새로운 항로들이 많이 생겨났다.
'마도로스' 라는 말은 네덜란드어의 'matroos' 에서 따온 말로 외항선을 타는 선원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배를 타는 일이 힘들고 고된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 시절에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바다의 멋쟁이 신사'로 불리며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직업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아메리칸 마도로스』는 떠나가는 마도로스와 이별을 해야 하는 여인의 슬픈 이야기이지만 흥겹게 표현해 낸 경쾌한 리듬이 더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곡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한 단골 노래가 되었다.
☞ 보너스 스토리
선원을 지칭할 때는 영어의 〔Seaman〕이란 말보다는 네덜란드어인 〔Matroos〕에 더 익숙하고 친밀감을 느낀다.
마도로스는 일본을 거쳐서 전해진 대표적인 외래어의 하나로서 외항선원을 일컬어 이렇게 불러왔다.
마도로스라는 직업이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바다의 욘사마'로서 그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종가를 쳤던 적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초 해외여행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마도로스는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글로벌 맨'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원인력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초창기인 1965년의 경우 총 21척의 외국국적 선박에 781명의 선원이 해외에 취업 하였다.
전성기인 1978년에는 총 2,496척에 무려 4만2,514명의 선원이 취업을 해서 세계 제1위의 선원수출국이 되었다.
해외송출 바람을 타고 [해기사]는 몸이 금값으로 치솟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식된 마도로스는 의협심이 강한 사내의 표상이자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일꾼이 되었다.
여기에다 외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낭만파 멋쟁이의 대명사로까지 군림을 하다 보니 그 당시 마도로스는 뭇 여성들에게는 한 번쯤 순정을 보낼 만한 대상이기도 했다.
숱한 사내들에게도 하얀 제복과 금태 선명한 캡틴 모자는 누구나 한 번쯤 쓰고 싶은 선망의 물품이었다.
그래서일까?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마치 그 시대를 반영이나 하듯 자그마치 100여 곡이 넘는 마도로스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당시 내로라하는 가수 중 한 번쯤 마도로스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는 선원송출이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에 일조를 하면서 부산항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서와 맞물려 있었다.
1962년 백야성의 대표곡 '잘 있거라 부산항'은 바로 이러한 부산항의 분위기를 담아 인기가도를 달렸다.
1963년에는 남일해의 '첫사랑 마도로스', 이듬해인 1964년에는 고봉산의 '아메리칸 마도로스'가 연이어 히트곡이 됨으로써 부산항은 그야말로 마도로스의 정든 항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여기에 1964년에 개봉된 영화 '마도로스 박'은 부산에서 촬영된 액션물로서 관심을 끌었고, 이 영화의 주제가는 선창가 술집에서 심심찮게 불리어지던 애창곡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던 마도로스는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빛바랜 유물이 된 것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흔히 '마도로스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고 말한다.
가족과 떨어져서 정처 없이 떠돌며 거친 파도와 싸우는 동안 심신은 외로움과 그리움에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닻(Anchor)은 해저에 박혀 선박의 안전을 유지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 이들은 '앵커 스피릿(Anchor spirit)'으로 가족과 조국을 위해 버틴다고 한다.
부산항은 해풍에 그을린 마도로스들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해양도시다.
그래서 은퇴한 마도로스는 부산항 어딘가에 ‘마도로스 카페’라도 하나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그 카페의 LP판에서 추억의 마도로스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하는 상상은 너무 낭만적인가?
「울며 헤진 부산항」
이 노래 역시 부산항을 소재로 한 노래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되었던 사람들이 부산항에서 이별을 하는 애달픈 심정을 표현한 대중가요다.
부산항에서 출항하여 일본의 시모노세키 항을 왕복하는 [관부연락선]의 출항을 앞두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정든 땅과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노래다.
조명암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하였으며, 당대의 거물 남인수가 노래하였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 보는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드린 사람끼리 음 ~
~♩♪♬ ~ ♩♪♬ ~
달빛 아랜 허허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곳 없는 검은 수평선
이별만은 무정트라 이별만은 야속트라
더구나 못잊을 사람끼리 사람끼리(음~)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여 ‘징용’ 이나 ‘일본’ 같은 단어는 쓰지 못하였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이 곡을 징용의 설움을 노래하는 곡으로 받아들였다.
☞ [울며헤진 부산항]영화
1963년에 강대환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로 당대의 쟁쟁한 배우 최무룡과 김지미가 주연을 했다.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일등 항해사가 된 주인공은 은사의 딸과 결혼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하지만 그가 항해를 하는 동안 악당들이 모함을 한다.
그녀는 악당의 모함을 믿고 그를 오해한 나머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남편의 학대를 견디며 생활하지만 끝내는 집을 뛰쳐나온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를 다시 찾지만 그녀는 그의 행복을 빌며 멀리 떠나간다는 줄거리다.
「추억의 영도다리」
이 노래는 [월남의 달밤]으로 유명한 ‘윤일로’의 노래다.
‘추억의 영도다리’ 이후 대중가요에는 영도다리가 노랫말에 등장하는 작품이 많이 나왔다.
그것은 [영도대교]가 부산의 근·현대사 상징으로 우뚝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영도다리’가 등장하는 노래로는
‘추억의 영도다리’(윤일로),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함경도 사나이’(손인호), ‘고향의 그림자’(남인수), ‘경상도 아가씨’(박재홍), ‘부산행진곡’(방운아), ‘고달픈 청춘’(안정애), ‘손금 보는 내력’(박재홍), ‘영도다리 비가’(박재홍), ‘끊어진 영도다리’(박재홍),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여수의 부산항구’(손인호), ‘부산은 내 고향’(손인호), ‘눈물의 영도다리’(백야성), ‘울고 넘는 영도다리’(시민철), ‘이별의 영도다리’(이상열), ‘들지 않는 영도다리’(여운), ‘잠들은 영도다리’(이성남), ‘사랑의 영도다리’(진성), ‘다시 걷는 영도교’(최라성), ‘부산사나이’(김진) 등등 부지기수이다.
영도다리 테마 노래 가운데 가장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추억의 영도다리’(이철수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 1958)를 들어보자!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안개낀 부산항구 옛추억만 새롭구나
몰아치는 바람곁에 발길이 가로막혀
영도다리 난간잡고 나는 울었네
~♩♪♬ ~ ♩♪♬ ~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차디찬 부산항구 조각달이 기우는데
누굴찾아 헤메이나 어데로 가야하나
영도다리 난간잡고 나는 울었네
~♩♪♬ ~ ♩♪♬ ~
울었네 소리쳤네 몸부림쳤네
눈물진 부산항구 이슬비만 나리는데
매디매디 사모치는 그 옛날 과거사가
오늘밤도 애처로이 나를 울리네.
작중화자는 전쟁시절 피란민으로 부산에 내려와 3년 세월을 보내고 환도 이후 떠난 실향민이다.
그는 눈물의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영도다리를 먼저 찾아왔다.
피란생활의 쓰라린 추억을 떠올리니 당시의 아픔과 절박하던 심정이 왈칵 떠올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소외와 방황, 절규와 비애로 흠뻑 젖은 채 눈물짓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영도다리는 가장 힘든 전쟁 시기 피란민들의 지치고 피로한 삶을 잠시나마 기대고 의지하는 장소였다.
다리의 상징성은 고통의 이쪽에서 극복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장소 성을 지닌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썼다는 ‘회심곡’에는 사람이 살아생전 쌓아야 할 여러 공덕 중 월천공덕(越川功德)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약한 자를 업어서 하천을 건네주었거나 나룻배, 혹은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강이나 바다를 건너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 공덕을 말한다고 한다.
☞ [인생이야기]를 찾아오신 분들 오늘도 즐거운 날이 되시길…….
첫댓글 한시절 잎선 옛노래 잘 들었습니다.
실감은 나지 않지만 공부하는 심정으로 읽고 듣고 늦깍이 공부 잘 했습니다.
송이골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저녁시간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