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점 더 분열되는 사회, 탈진실의 사회, 무엇이 문제일까?
최근 한 가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을 겪었고, 작은 한 가지 해프닝을 겪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일들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다는 것이 또한 우리사회가 진실을 말할 수가 없는 구조 속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사회의 민낯을 보는 듯해서 씁쓸하였다. 신이 인간에게 언어의 능력을 주었다면 그 이유는 ‘소통하라는 것’일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든 사랑의 이름으로든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가질 때 우선적인 전제는 소통이다.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곧 공정함, 올바름, 선함 등 일체의 긍정적인 것을 도외시 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이기심의 발로이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다. 양심을 기초한 이성적이 대화가 있다면 거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거나, 양심이 있다고 해도 양심에 따라 살거나 행동하는 것이 하등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의 모습이고 모든 사회악적인 요소들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설령 대화나 토론을 하더라도 양심이 기초되지 않은 이성적인 담론은 오직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주먹질 없는 싸움이 되고, 옳고 그름, 선과 악, 정당함과 부당함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언어의 유희만이 남무하게 된다. 이럴 때 양심적인 사람은 마치 물건이 되어 버린 듯 씁쓸함이나 자괴감을 맛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양심적인 사람에겐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물꼬를 튼 『우신예찬』의 저자 ‘에라스뮈스’는 언어(말)란 영혼의 거울이라고 하였고, “너의 모습(내적 모습,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말을 해다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또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언어를 발명하였다”라는 라틴 속담도 있다. 언어란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진실한 대화를 회피한다는 것, 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진정한 관계성을 외면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진실)을 거짓으로 드러내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자신의 모습(진실)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소극적인 거짓말’이다. 왜 우리사회는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거짓말로 넘쳐나는 것일까? 거짓말로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타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는 점차 사람들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 같은 장소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철리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낮선 사람이요 나와 무관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크고 작은 온갖 부당한 행위나 악행들이 별 가책 없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진난 달 학회에서 “탈-진실의 사회”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 젊은 연구자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탈진실의 사회가 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야 없겠지만, “탈-진실의 사회”라는 말이 현재의 한국사회의 핵심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았다. 한국사회가 이렇게까지 변한 데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들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끼리끼리의 문화, 즉 집단주의 문화에서 비롯되며, 다른 하나는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장’이 사라져 버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집단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에 대한 대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좌파는 우파에 대립해 있고, 민족주의는 국제주의에 대립해 있고, 상인집단은 소비자집단에 대립해 있다. 말이야 ‘공동체’지만 사실상 한 공동체가 대립하는 집단을 배척하는 한 그것은 집단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불과하다. 이렇게 한국사회는 지역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남녀 간 갈등, 좌 우 갈등, 국가 간 갈등 등 온갖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일단 상대방을 대립하는 적처럼 간주하게 되면 여기서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진실은 불가능하게 된다. 어디를 가도 최소한 우리집단과 대립하는 상대집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 내가가 두려운 것이다.
두 번째는 진정한 소통의 장의 소멸이다. 인터넷 강국답게 한국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카톡이나 단톡방 같은 것을 통해 모임을 갖고 정보를 주고받는다. 매우 편리한 수단인 것은 맞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간에서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하고 반대의견이나 다른 대안을 말할 수도 없고, 진실한 의견을 교환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평균화된 지평에서 평균적인 말, 형식적이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것이 이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모든 것이 간편하게 진행된다. 대다수는 마치 앵무새 마냥 앞 사람이 말했던 것을 한 마디 되풀이하고 만다. 이러한 일에 습관이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골치 아픈 대화를 하고자 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 진실한 대화가 불가능한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하게 된다.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 내 것부터 챙기고 보자. 나는 괜찮으니 다행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면 결국 힘없는 자, 가난한 자, 양심 바른 자, 을의 위치에 있는 자, 의로움을 구하는 자들은 설자리가 없게 된다. 그들은 항상 손해를 보는 것 같고, 항상 피해를 보는 것처럼 느낀다. 사회가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빈자라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는 것이 곧 스트레스 같은 사회에서는 자연히 아이를 낳고 싶지 않게 된다. 경제적이 이유는 표면적이 이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 하나도 만족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내 인생을 희생하기가 싫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핵심은 도덕적인 회복에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게 산다는 것, 진실하게 산다는 것, 공정하게 산다는 것, 양심에 따라 산다는 것, 나의 이익보다 공동선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생각을 모두에게 퍼뜨리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서로 진지하게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문화’를 회복하여야 한다. 누구도 이러한 것을 갈망하지 않을 때, 그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모두가 망한다는 것이다. 지금 단기간에야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라가 망하면 그 어떤 국민도 행복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상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