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홉수
29, 39, 49 이러한 아홉수라는 말을 하시는데 저는 그런 것은 일단 “없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이 참 신기하다. 감정상태는 “있다.” 마트에 가서 1만원 짜리 물건을 사다가 9,900원짜리 물건을 보면 ‘어? 9천 단위네?’ 이런 마음에 현혹되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이가 29라고 해서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그 고비에서 참 생각이 많아진다. 그런 감정에 대한 어떠한 선택 속에서 아홉이라는 것에 하나의 구실과 핑계를 만들어 낸 것 같다. 그렇게 아홉수에 대한 얘기가 와전되고 와전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아홉수에는 OO 하면 안 되지.” “ 아홉수에는 집 지어도 안 되지.” 이러한 얘기가 만들어진 거라고 김병우는 생각한다.
다 감정에 대한 문제이고, 사람의 심리에 대한 문제이다.
주식차트 같은 경우도 참 신기한 것이 9,900원에서 1만원으로 넘어가기가 그렇게 힘들다. 오죽하면 마의 벽이라고 한다. 1만원으로 올라가면 막 올라가는데 9,900원에서 1만원으로 올라가기는 굉장한 힘이 필요하다. 이런 감정에 대한 것이 사람의 심리에 작용하는 것들이 아홉수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홉수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아~ 사람들이 그런 것에서 힘겨워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요즘은 여자분들 결혼적령기가 많이 늦어져서 35~40세가 결혼적령기가 되어 버렸다. 그럼 38까지는 상당히 느긋했다가 39세가 되어서 상담하러 온 손님들이 이렇게 묻는다. “저 애기는 낳을 수 있을까요?” 39세가 되면 그게 걱정이다. 40대 중반까지도 초혼을 꿈꾸다가 49세만 되면 “저 초혼은 안 되겠죠?” 이렇게 아홉이라는 나이는 자포자기를 해야 된다는 이러한 개념을 주는 것 같다.
50대 중반까지는 여자분들이나 남자분들이 결혼을 물어본다. 그런데 59세가 딱 되면 결혼을 묻지 않는다. “그냥 같이 갈 벗은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결혼을 거론하지 않는다. ‘참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이렇게 아홉이라는 나이에 많은 것을 포기시키는구나.’ 이것이 아홉수이다. 아홉수는 뭐가 있는 것처럼 자꾸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런 게 아니다.
2. 삼재
사람의 심리가 참 무서운 것 같다. 지금도 삼재나 이사방위를 가지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씁쓸한 답을 저도 내리게 된다. 사람의 관념이 삼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황당하게 건대 김병우라는 사람이 “삼재는 없어.”라고 하면 ‘어? 이 사람은 뭐야? 짜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직은 더 대세이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가 호시탐탐 청나라에게 위협이 되다 보니 삼재라는 것을 만들어서 3년 동안 “이사가도 안돼.” 이렇게 환란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뭐를 해도 안 된다고 얘기해서 우리나라에 억제정치를 피게 해서 속인 그러한 논리가 삼재인데 그것을 아직도 절에서도 그렇고 삼재풀이를 한다고 “옷 가져오세요.” 해서 그것을 소각하니 “와~ 나 삼대풀이해서 속이 다 후련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삼재가 없다.”라고 얘기를 하면 굉장히 허탈함을 주지 않나 싶다. 이게 바로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이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3. 관념에 매이면 발전하지 못한다.
오행을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김병우는 “관념을 깨라. 고정적인 것을 깨라.”라고 말하고 싶다. 관념을 깨지 않으면 관념에 사로잡혀서 늘 더 나은 것을 열지 못한다. 저는 성급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아침을 맞이할 때에는 ‘어제는 내가 몰라서 어리석은 결정과 판단 속에서 살 뻔 했다. 오늘 아침을 맞이하며 오늘 하루만이라도 다른 결정과 선택으로서 한번 잘 살아보겠다.’라고 노력을 많이 한다.
적어도 관념에 휘둘리지는 말자. 놓친 게 뭔지를 생각해서 하나라도 더 배우자. 입버릇처럼 늘 “배웁니다. 배웁니다.” 하면서 10년을 똑같은 말을 하고 산 것 같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아이고~ 오늘도 좋은 것 배웠습니다.”
아들이 오마카세를 대접해주어서 갔는데 “아빠입장에서 오마카세 처음 가봤는데 많이 배웠다. 내가 여기서 밥을 먹기는 먹었는데 재격인 아빠의 계산으로 여기에서 밥을 먹으려면 연봉이 최하 7~8천 정도는 되어야 2달에 한번, 1달에 한번 정도 먹을 수 있는 자리이지 여기는 아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좋은 공부 시켜주어서 고맙다.” 이렇게만 얘기를 했다. “아빠? 나는 연봉 4천밖에 안 되는데 그럼 실수한 거네?” 해서 “실수한 것은 아니지. 아빠 공부시켜주었으니까 내가 네게 빚을 지었으니 보상은 해야지.” 셈을 그렇게 멋대가리 한 개도 없게 한다. 저는 다시 가라면 안 가겠다. 국밥에 밥 한 그릇을 먹는 게 정말 행복하더라. 그리고 나는 먹는데 앞에서 요리를 해주는 이의 음식을 먹는다는 게 왜 그렇게 민망한지 모르겠더라. ‘이 느낌은 나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라는 좋은 것을 배웠다. 들어주고 선택하는 게 저는 저 답다고 생각한다.
10년 전에 아들이 같은 말을 했었다. “아빠 우리 좋은 차를 타도 되잖아?” “글쎄. 차를 소나타 정도 타려면 최소한 아빠의 연봉이 6~7천은 되어야 소나타를 타는 거지. 우리나라의 소비문화가 이래서 가난한 것 같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한다. 소나타를 타려면 얼마만큼의 가정사가 되었을 때 밸런스가 맞는 것이다. 사회라고 하는 경제를 기반으로 한 어떤 기틀 속에서 나의 선택이 넘어선 것인지, 부족한 것인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늘 아이들에게 설명했던 것 같다.
학생 : 좋은 아빠이신 것 같다.
천인지 : 그런데 아이들이 “그만 좀 하세요.”라고 똑같이 얘기한다.
학생 : 내 처지에서는 이 정도가 맞다고 선생님 스스로 그것을 딱 정해주시는 것인가?
천인지 : 네.
학생 : 그래서 서로가 실수하지 않게 하기 위함인가?
천인지 : 그렇다. 받는 사람도 불편하지 않고 주는 입장도 불편하지 않은 것이다. 주고받음의 셈에서 상대방을 힘들 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제가 선생님들에게 늘 얘기 하듯이 사회적인 직위가지고 직위가 부족한 사람을 힘들게 하면 안 되고, 경제가지고 경제가 힘든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똑같이 인품을 갖추었다는 것은 인품을 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상호관계가 음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아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힘들지 않아야 하는 그 결이 중도이다.
사서삼경에서 중용이라는 것이 옛날 조선 사대부들이 평생 10년, 20년을 끌어안고 베개 삼아서 살았다고 한다. 중용의 도라는 것이 그리도 갖추기가 힘들어서 그 시절에 중용을 공부했듯이 저도 지금 명리를 하면서 명리가 정확히 주는 메시지는 중용에 대한 것보다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상담하면서 늘 손님과 선생님들에게 또 배우는 게 아 법륜스님이 놓치는 게 있다. 법륜스님은 뭔가 내려놓으라는 그러한 개념과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비롯된다고 늘 얘기하지만 정확하게 그 사람의 결을 모르고서 얘기하는 것도 있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조합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기는 하다.
결국은 화, 물, 불 이런 것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한 제스처를 탁 하면 거기에 오행이 확 묻어난다는 것을 선생님들은 탁 느끼실 것이다. 저도 그것을 상담하면서 느낀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한테는 너무 당연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러한 과유불급을 정확하게 중도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것이 지혜라고 본다.
첫댓글 마음을 가다듬게 만드는 말씀이네요.
강의록 감사히 읽겠습니다^^
앗, 엊그제 들은 강의! 최고였습니다. 아이리스YA님의 강의록으로 복기하네요. 그대여, 감사합니다~~
아이리스님, 잘읽었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옴마 언제 이걸 정리하셨대유. 감사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리 배웠고 알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지난해가 아홉수였는데
창광쌤 상담하는중에 벼락맞은 나무가 저기 보인다..라고
참으로 작년은 잔혹한 한해였습니다.
아홉수까지 생각할정도로 ㅠ
공교롭게도 운대가 맞아떨어졌겠지요.
정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