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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몽산법어를 통해 보는 성철스님 무엇이 문제인가 -2부-(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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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부가 잘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서 재미가 없을 때야말로 진보하기에 아주 좋은 때이다. 점차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공부를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또랑또랑 깨어있으면 고요함에 들어갈 것이며, 고요해지면 ‘선정’에 들 것이다. ‘선정’에는 각각 이름이 있어서 사특한 것도 있고 올바른 것도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깨어있으면 선정에 절로 들어감!) 工夫 若到濃一上淡一上 無滋味時 正好進步 漸入程節 切不可放捨 惺惺便入靜 靜而後定 定各有名 有邪有正 宜知之]
5번이요. ‘공부가 잘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서 재미가 없을 때야말로’ 여러분 처한 상황들입니다. 공부가 잘됐다가 오늘 되게 잘 되면 업되셔서요 다 막 된 것 같아요. 내일은 안 됩니다 그럴 때 대게. 그럴 때 당황하지 마시고 ‘진보하기에 아주 좋은 때다. 됐다 안 됐다 하는 게 재미있다 없다 하는 게. ‘점차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공부를 놓아버리지 마라.’ 요 말씀하시고 싶은 거예요. 자꾸 너 늘고 있으니까 어느 날 좀 안 된다고 슬럼프 왔다고 공부 멈추지 마라. 은꾸몰. 제가 주장하는. 은근히 꾸준히 또 몰아가는 거예요. 슬럼프 왔을 때 최고의 명약이 뭔지 아세요? 또 하는 거예요. 그냥 또 한 번 하는 거예요. 별생각 없이 기대감 없이 그냥 하는 거. 이게 고수가 되는 비결입니다. 뭔 일 있어도 또 하는 거예요. 또 하는 놈 못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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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또랑또랑 깨어있으면 고요해진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다 보면 선정에 들어간다.’ 이때 강조하는 선정은요 1선정·2선정이 아니라 뭐겠어요? 우리가 배운 진여와 열반 때 배운 걸로 하면 참나 만나려면 무슨 선정에 들어가야 돼요? 잊어버리셨군요. 자 힌트! 해오(解悟). 이 참나를 알았다는 거는 뭐로 안 거죠? 무분별지. 그럼 정혜쌍수니까 어떤 정(定)에 들어야겠어요? 빈칸을 채워보세요. 무분별정이잖아요. 무분별정에 들면 되는 거예요. 이게 최고의 선정이에요. 1이니 4니 이거 따지고 있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들어가야지. 이게 최상승선입니다. 바로 여기 들어가자는 게 최상승선이에요. 이게 교학하고도 충돌 안 나요. 교학도 원래 저걸 제일 중시해요.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근데 선정을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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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 따지면 각각 이름이 있어 가지고 사특한 놈·올바른 놈, 욕계정도 있군요. 욕망에 빠진 선정. 내 욕망을 이루려는 선정도 있고 막 오만 선정이 있으니까 마땅히 조심해라. 근데 중요한 건 무분별정입니다. ‘선정에서 일어난 후에도’ 선정에 들었다가 무분별 상태에 들어가면요 딱 참나랑 하나가 되잖아요. 이게 참나접속 상태입니다, 무분별이라는 게. 그래서 여러분 진짜 쉬워요 최상승선은. 무분별이 뭐냐? 몰라예요. 몰라예요. 이원성만 놓으면 돼요. 좋다 싫다만 하지 말라고 모든 선사들이 말하는 게 무분별정에 들어가게 하려고요. 좋다 싫다만 안 하고 딱 계시면 그리고 화두 딱 잡을 때 몰라 하고 화두 잡으면 바로 들어가죠 무분별정에. 그래서 무분별지, 견성을 해버립니다. 지금 화두가요 왜 이 얘기 한번 드려보냐면 화두가 동정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 된 뒤에 견성하는 게 아닙니다. 혹시.. 성철 스님이 자꾸 이 단계를 거쳐야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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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조하고 여기다가 막 1지·7지·8지까지 갖다 붙여 놓으니까 이 단계 안 거치면 이제 안 되게 돼버렸어요. 이게 또 화두선을 망친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이거 거칠 필요가 없어요, 실제로는. 어떤 선사가 저거 거쳐서 견성했다고 얘기하던가요? 여러분 당나라 때 ‘선어록’ 보세요. “딱” 이 소리에도 견성합니다. “아!” 목침 떨어지는 소리에도 견성하고요 자다가. 뜰 앞에 잣나무 보고 견성하고요. 그런 거 나와요. 잣나무 보고 견성했는데 “야! 너 지금 이렇게 견성하면 안 되지. 숙면일여 해야지. 됐고 견성 무르고 다시 화두 숙면일여부터 가자!” 이래요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자 염불을 나무아미타불 한마디에 견성할 수 있어야 돼요. 왜 숙면일여까지 간 줄 아세요? 더럽게 견성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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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한마디에 회광자간(廻光自看)을 해야 되는데 못 하니까. “제가 뭐 자간(自看)을 했다고요?” 그러니까 “안 되겠네. 너는 자나 깨나 해. 알았지. 잘 때도 해.” 이 말이 왜 나가겠어요? 모르니까 아무리 해도 모르니까. 아는 사람 영리한 자는요 그냥 알아버려요. 아까 나왔잖아요. 영리한 자는 바로 화두 잡고 딱 알아버린다고. 이건 영리하지 않을 때 이야기예요. 누가 숙면일여까지 해서 견성을 해요? 어느 선어록에? 이거는요 화두선이 체계화되다 보니까 화두의 몰입을 단계를 막 정해주게 된 거예요. 몰입 4단계 안에서 또 나눈 거예요. 4단계 안에서도 이것도 이미 4단계예요. 동정일여 되려면 4단계여야 돼요. 몰입 흘러야 돼요. 플로우(flow) “몰입이 흐르는데 너 잠결에도 흘러?” 이런 거예요. “정성이 부족하네. 더 열심히 해.” 이런 얘기는 언제 오고 가요? 안 되니까 더럽게 견성이 안 되니까. 아는 사람은 그냥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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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영리한 자와 둔한 자를 나누는 겁니다, 선불교에서도 “더럽게 못 알아먹네. 그럼 별 수 없어. 숙면일여 가야 돼. 자나 깨나 하면 지가 언젠가는 알겠지.” 이런 거예요. 완전히 고정관념을 깨세요. 성철 스님 때문에 완전히 잘못된 고정관념이 지금 깔린 거예요. 화두는 숙면일여까지 해야 견성이 온다는 이상한 고정관념. 동정일여까지도 안 가요. 그냥 화두 잡았을 때 견성하셔야 돼요. 제가 몰라가, 잘 때도 몰라가 흘러야 된다고 얘기한 적 있나요? 근데 왜 학당에서는 견성자가 나오죠? 근데 견성자가 나오면 이상하게 왜 견성자는 잠잘 때도 참나가 있다고 얘기하죠? 참나는 숙면일여를 합니다. 원래 자기가 화두는 내가 노력해야만 되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에요. 그런 노력은 필요가 없다고요. 언제 필요해요? 점수(漸修). 해오가 안 될 때. 해오가 영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아휴 더 가자. 오늘부터 잠 다 잤다고 생각하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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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필요한 거죠. 용맹정진할 때 이럴 때. 이해 좀 되시죠. 쉬운 길 더럽게 어렵게 해놨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열을 내는 겁니다. 사람 다 잡게 생겼어요, 이대로 가면.
[6. ‘선정’에서 일어난 후에도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 일체처에 힘이 덜어지며, 움직이는 중에도 의심이 뭉쳐서 ‘한 조각’(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이 되거든(打成一片), 마땅히 자세히 마음을 써야 된다. 공부를 해 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함’(靜)과 ‘깨끗함’(淨) 두 글자를 떠나지 않는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깨닫게 되며, 깨끗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한다. 기운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움직이고 고요함의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을 때, 이것이 제1단계가 된다. 여기서 마땅히 때를 타서 진보해야 된다.
起定後 身心輕淸 一切處 省力 於動中 打成一片 當仔細用心 逐工夫 始終不離靜淨二字 靜極便覺 淨極光通達 氣肅風淸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 是第一箇程節 便宜乘時進步]
‘선정에서 일어난 후에도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 일체처의 힘이 덜어지면’ 자 선정에서 나왔어요. 참나 접속했다가 나와서 화두 들었을 때요 참나 만날 정도까지 막 들어가요. 이미 여기서 견성한 사람은 나옵니다. 근데요 딱 이렇게 들어갔다 나왔어요. “너 지금 참나 만난 거야?” “아니, 맑고 고요하긴 했는데 참나는 모르겠는데요.” “가자. 다시.” 이겁니다. 계속 가는 거예요 이제. 알았다는 애는 여래반으로 가고 견성반으로 가고. 이제 모르겠다는 애는 계속 화두 숙면일여반으로 가는 거예요. 이 구도입니다. 이해되시죠. 가자. 이제. 그럼 움직이는 중에도 딱 의심이 뭉쳐서 한 조각이 되는지 봐라.’ 선정에서 나와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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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동정(動靜) 간에죠. 움직일 때도 화두가 딱 뭉쳐지면 동정일여가 되겠죠. 화두가 늘 마음에 뭔가 딱 안착해가지고요 잡으려고 안 해도 쭉 흐릅니다. 화두가 흐릅니다. 그럼 동정일여예요. 그럼 좋은 거예요. 사실은 이때 이미 견성한 거예요. 이게 그때 이미 무분별정에 접속했을 수도 있고요, 얕은 선정에 들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게 다 참나자리의 작용인 거는 합격생은 알아요. 수험생은 몰라요. 수험생이냐? 합격생이냐? 화두 잡고 있으면 수험생이고 화두에 매몰돼 있으면 수험생이고 참나 잡고 있으면 합격생입니다. 근데 지금 계속 화두 얘기만 하잖아요. 아직 수험생이라는 얘기예요. 견성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의심이 한 덩어리 뭉치면’ 몰입이 잘 됐다는 얘기예요. 이건 몰입 4단계. 평소에도 의심이 흐른다는 건요 몰입이 흐른다는 거죠. ‘마땅히 이때 자세히 마음을 써라.’ 더 알아차려 봐라, 더 마음을 내서. 그러니까 이거는요, 무의식중에도 이렇게 흐를 때는 동정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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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려면 무의식까지 도와줘야 되거든요. 내가 안 잡았는데도 막 잡혀야 돼요. 그러다 보면요 잠결에도 잡히고 하는 거예요. ‘고요함과 깨끗함, 이 두 글자를 떠나지 않는다, 공부라는 거는’ 그러니까 고요함 깨끗함은요 결국은 이거예요. “이원성 초월” 이원성이 떨어져 나가야, 분별심이 떨어져 나가야 고요해지고 청정해져요. 그렇죠. 그래서 이 참나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고요함 청정함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화두 잡을 때마다 무분별정에 들어가야 되고요 자꾸 깨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고요해지고 청정해져야 된다. 그러다 보면 ‘고요하다 보면 깨닫게 되고 깨끗하다 보면 광명해진다.’ 의식이 더 자명해진다. 그래서 ‘기운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이런 거는 그냥 시인이 얘기하신 거예요. ‘움직이고 고요함의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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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단계다.’ 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가을 하늘에 대해서 별로 안 좋은 추억이 있는데” 막 이러면 안 먹히는 얘기잖아요. 이런 얘기는요 감성이 통할 때 먹힙니다. 그러니까 오도송은요 감성이 비슷한 애들끼리 막 신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는. “이런 예술이 없다” 막 이러면서. 안 통하면요 정말 난감한 게 예술입니다.
[7. 마치 맑은 가을 들판의 물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와 같아서, 고요하고(寂寂) 또랑또랑하여(惺惺) 마음의 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오직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짐을 볼 것이다. 이 속에 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할 것이니, 이것이 제2단계이다.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알음알이의 마음)을 내면 순일한 미묘함이 끊어지게 되어 크게 해로울 것이다.
如澄秋野水 如古廟裏香爐相似 寂寂惺惺 心路不行時 亦不知有幻身 在人間但見箇話頭綿綿不絶 到這裏 塵將息而光將發 是第二箇程節 於斯 若生知覺心 則斷純一之妙 大害也]
‘마치 맑은 가을’ 또 나오네요. ‘마치 가을 들판의 물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와 같아서’ 이 감성 전달되세요? 아무튼 그냥 그런 거예요, 뭐. ‘고요하고 또랑또랑한’ 고요한데 딱 정신이 맑은 요 상태. ‘마음의 길이 끊어졌다.’ 무분별정이죠. 선정에 들어서 참나접속이 사실 되고 있는데 이때도 지금 견성이란 말이 안 나오는 건요, 정확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 자꾸 깨어나곤 있는데. 아까 이거예요. 6식의 정중(定中)의식이 되게 강해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계속 깨어나긴 하는데 에고도 같이 작동해 버리니까, 정확한 무분별정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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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정도 찰나찰나 들겠죠. 그런데 에고가 계속 같이 작동하니까 참나라고 아직 말을 못 하는 거예요. 맑긴 맑고 되게 좋은데 화두를 잡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몰입 의식도 있고. 몰입하면서 깨어 있으니까 너무 좋은데 아직 화두를 잡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찰나찰나 무분별정을 체험은 하겠지만, 딱 “이게 참나야.”라고 못하고 지금 계속 맑은 상태로 가는 겁니다. 2단계예요 여기가. ‘오직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여기 몰입 4단계는 이미 진즉에 이루어졌고 계속 깊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4단계가. 이제 깊어지다 보면요 이런 거예요. 4단계도 내가 몰입하려고 하면 쭉 몰입이 흐르는 것부터 이미 4단계인데, 나중에는 몰입하려고 안 했는데도 막 마음에서 화두가 흐르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몰입하는 시간이 또 길어지기 시작해요 점점. 몰입도 짧게 끝났다가 몰입이 길어지고. 이러니까 4단계 안에서도 단계가 계속 깊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이제 1·2·3단계예요. 그러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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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가 끊어지고 이어짐을 볼 것이다. ‘오직 끊어지지 않고 이어짐을 볼 것이다. 이 속에 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번뇌는 쉬고요 ‘광명은 발할 것이니 이게 2단계다.’ 점점 점점 더 자명해질 것이다. ‘이때 지각심(알음알이의 마음)을 내면, 괜히 분별심을 내면 끊어진다.’ 흐름 끊어진다. “이거 맞아? 이거 맞아? 이거 참나야?” 뭐 이러고 있으면 흐름 끊어지니까 그냥 이때는 입 다물고 계속 더 화두에 몰입해라. 화두만 의심만 더 해라. “왜 무(無)라고 했는고? 이뭐꼬?” 이러고 있어라.
[8.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화두가 한결같고(동정일여動靜一如), 자나 깨나 또랑또랑 깨어있게 되어(오매성성寤寐惺惺, 寤寐一如), 화두가 절로 앞에 나타나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서 여울물결 가운데서도 지극히 생생하여, 만져도 흩어지지 않으며 쓸어내도 사라지지 않을 때, 중심이 고요하여 요동하지 아니하며 밖의 흔들림에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제3단계이니, 의단疑團을 타파하여 바른 안목이 열릴 때가 가까워졌다.
無此過者 動靜一如 寤寐惺惺 話頭現前 如透水月華 在灘浪中 活潑潑 觸不散 蕩不失時 中寂不搖 外憾不動矣 是第三箇程節 疑團破 正眼開近矣]
이러면 ‘허물이 없는 사람은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자 나왔습니다.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그러면 언제든지죠. ‘화두가 한결같고’ 요거 검은색 칠했어야 되는데.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가 동정(動靜)간에죠. 동정일여. 여기서 나온 말이에요, 지금 성철 스님 주장이. 제일 자명하게 된 데가 여기예요. ‘동정일여, 자나 깨나 오매성성’이라고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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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꿈과 잠을 구분하지 않았다. 할 필요를 못 느낀 겁니다, 몽산 스님은. ‘화두가 동정 간에 한결같고 자나깨나 또랑또랑 깨어있게 되어 오매성성(寤寐惺惺)’ 오(寤)가 깨어있을 오고요 매(寐)가 잠잘 매예요. 그러니까 이 잠잘 매(寐) 안에는요, 성철 스님이 오매일여를, 이거 2개를 합치면 오매일여입니다. 오매일여를 구분해가지고 뭐라고 한 거예요? 몽중일여와 숙면을, 꿈꿀 때랑 꿈 없는 잠을 나눈 겁니다. 근데 몽산 스님이 그렇게 중요하면 나눴겠죠. 거기서 7지가 갈리고 8지가 갈린다면 나눴겠죠. 왜 안 나눴을까요? 의미 없는 소리입니다. 화두가 꿈에 들리든 잠 속에 들리든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냥 “열심히 하네.” 이거. 그리고 우리 무의식에 화두가 박혀서 “잠잘 때도 화두가 흐르네.” 그냥 이 소리 하신 거예요. 이게 이렇게까지 단계로 나눠서 할 일인가? 그리고 놀라운 건 이 모든 거는 견성 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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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1지고 7지고 나발이고 말할 단계가 하나도 아닙니다. 해오 견성도 못 한 상태입니다. 이거 하나로 끝나요. 성철 스님 말은 맞지 않다. ‘몽산법어’ 하나로도 끝납니다, 원래. 제가 예전에 ‘몽산법어’강의한 게 있어요. 그때 낱낱이 했었어요. 고거 한번 심심하시면 찾아보시고요.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서’ 또 시작인데요. ‘화두가 절로 나타나되’ 그러니까 동정 간에 오매 간에 화두가 절로 나타나는 건 어떤 노력을 안 기울였는데도 쭉 흐른다는 겁니다. 가능해요 이게. 근데 아직 견성 전이에요. 왜? 이게 참나인지는 몰랐으니까. “아, 마음이 이렇게 깨어나고 밝고 너무 좋은데요.” 학당에 많이 오십니다. “그게 참나입니다.” “예?” 이러세요. “그걸 알아차린 자가 참나입니다.” 보통은요 이런 증상을 갖고 와요. “화두를 잡았는데요, 마음이 너무 맑아요. 이게 참나인가요?” “그 맑은 줄 아는 자리가 참나입니다.” 멘토들이 그럴 거예요. 그렇죠. 계속 반복되는 얘기죠. 똑같아요. “지금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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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고요하고..” 막 난리 아닙니다. 화두가 절로 흐르고. “전 견성했나요?”라고 물어봐요. 저는 이런 전화 진짜로 많이 받았어요. “밤새 화두가 흘러요!” 절에서 공부하시는 분이 “견성인가요? 그러면” “견화두(見話頭)죠. 견성은 모르겠고.” 왜? 본인이 알아야지 나한테 물어봐요. “제가 견성했나요?” “그러게요. 하셨으면 아시지 않았을까요. 본인이?” “어디 가서 마곡사에서 견성체험을 해서 산을 봤는데, 산이 저랑 둘이 아니더라고요. 이게 견성인가요?” “그러면 견산(見山)이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일관되죠 제 입장은. 기분이 되게 좋으셨으니까, 너무 황홀한 체험이었으니까 이 얘기를 하신 거죠. 이 황홀한 체험은 6식의 소소영영(昭昭靈靈)함입니다. 6식의 깨어있음입니다. 거미줄입니다. 거미는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얘기해야죠. 거미는 아니다. 누구보다 거미줄을 중시하는 저이지만 나눌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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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야죠. 나눌 때 나눠줘야죠. “그거는 이제 6식의 소소영영함이고 참나는요 9식의 소소영영함입니다. 레베루(레벨)가 달라요 둘이.” 아무튼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서 여울물결 가운데서 지극히 생생하여’ 물에 달이 비쳤는데요 생생하대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자나 깨나 우리 마음 안에 화두가 달이 딱 비쳐있듯이 늘 흐르고 있대요. 멋지죠 이거는. ‘만져도 흩어지지 않으며 쓸어내도 사라지지 않을 때’ 물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달이 그대로 떠 있죠. 내 마음이 아무리 요동해도 화두가 떠 있대요. 이건 이 표현은 아주 죽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중심이 고요하여 요동하지 아니하며 밖의 흔들림에도 움직이지 않고’ 이러면요 거의 12지 같지 않으세요? 놀라운 건 아직 견성을 못 했다는 거. 몰입 4단계의 극치입니다, 지금 이거는요. 이게 3단계입니다. 이제 곧 견성할 것 같아요. 이 정도까지 왔으면요 웬만하면 견성 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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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단(疑團)을 타파하여’ 이때 의심이 딱 깨져야 돼요. 여기까지 왔을 때 의단의 의미가 뭔지 아시겠어요? 화두선의 묘미입니다. 염불선하고 좀 다른데 그러니까 같이 쓸 순 있어요, 어차피. 근데 같이 쓴다는 건요 이제 이뭐꼬를 붙이면 돼요. 염불을 하다가요 “염불하는 이놈은 뭐지?” 하면은요 화두선하고 똑같아지죠. 그럼 화두선이에요. 왜 이 얘기를 하냐면요. 지금까지 화두몰입은요 ‘무분별정’ 차원입니다. ‘선정’ 체험이라고요. 왜 자꾸 언구(言句)를 의심하라는 얘기, 화두를 의심하라는 얘기를 자꾸 하는지 아세요? 왜 자꾸 화두선이 의심덩어리를 강조하고? 의심이 깨진다는 건 ‘지혜’거든요. 지금 화두가 흐른다는 거는 ‘선정’입니다, 정혜쌍수이기 때문에. 자 숙면일여까지 다 ‘선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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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지혜’입니다. 아시겠어요? 지금 왜 의단이 타파돼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지? 지금 ‘선정’은요 이미 참나체험 충분히 했어요, 제가 봤을 때는. 근데 왜 아직 견성이 아니죠? 지혜가 화두를 못 깨서. “왜 무(無)라고 했는고? 무(無)라고 했는고?” ‘무(無)!’ 하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좋았어요, 황홀하고. 그거 체험해가지고 좋았다. 거기까지는 뭐 좋으신 거죠. 그런데 왜 견성이 아닌가를 아셔야 돼요. 견성은 ‘지혜’입니다. 딱 ‘이뭐꼬’ 할 때 ‘아! 이놈이 상락아정의 참나고 일체 생각·감정·오감이 참나작용이구나!’ 이걸 깨달아야 돼요. 법공을 깨달아야 ‘지혜’죠. 결국 이것도 법공 깨달으라고 조주 무(無)자가 그겁니다, 법공 깨달음. 방편으로 ‘무(無)!’라는 게 좋아서, 선정에 들기 좋아서 무(無)를 쓴 거지 결론은요 ‘개나 소나 다 참나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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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 결론 나야지 의단이 타파돼요. 다 아시겠죠. 지혜의 부족 때문에 견성을 못 한다. 견성이라는 건요 견(見)이에요, 견(見/보다). 해(解), 해오건 증오건 간에 오(悟)죠, 오(悟/깨닫다). 깨달음이라는 건요, 견해(見解)입니다, 견해. 아까 제가 견해 어디다 썼는데, 보림 공부·견해. 참나안주는, 이거는 ‘마음챙김’의 영역이에요. ‘선정’의 영역입니다. ‘견해’는요? ‘알아차림’의 영역입니다. 이건요? ‘지혜’예요. 결국은 알아야 돼요. 왜 계속 헤매고 있어요? 모르니까. 내 참나가 뭔지 모르고 일체 지금 보이는 모든 게 참나작용인지 모르니까 헤매는 거잖아요. 이해되시죠. 몰라서 헤맨다. 알면 타파한다. 이래서 결국 의단은 아직 타파 못했습니다. 저 밑에 설명 보세요.
[* 화두를 통해 견성에 도달하기 전의 단계에서의 ‘동정일여’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에 상관없이 화두가 순일하게 이어짐을 말하며, ‘오매일여’는 잠을 잘 때도 화두가 순일하게 이어지는 단계를 말한다. 여기서 ‘잠’과 ‘꿈’은 큰 의미가 없다. ‘오매일여’는 자거나 꿈꾸거나 ‘화두의 일념’(화두에 몰입하는 6식인 정중의식定中意識)이 흐르는가를 묻는 것일 뿐이다.
‘화두일념’에 있어서 ‘몽중’과 ‘숙면’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단계이다.
화두를 통해 견성에 도달한 뒤의 ‘참나의 동정일여’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에 상관없이 참나가 늘 또렷함을 말하며, ‘참나의 오매일여’는 꿈속은 물론 깊은 잠속에서도 참나 즉 공적영지가 늘 또렷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꿈’과 ‘잠’의 경계가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선사들이 ‘몽중’과 ‘숙면’을 나누어 살피는 경우는 ‘화두의 일여’가 아니라 ‘참나의 일여’의 경우이다.]
화두를 통해 견성에 도달하기 전의 단계에서의 동정일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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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에 상관없이 화두가 순일하게 이어짐을 말한다. 오매일여는 잠을 잘 때도 화두가 순일하게 이어진 단계를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잠과 꿈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누는 실익이 별로 없어요. 성철 스님이 나눈 거예요. 누구도 화두몰입에서 꿈과 숙면을 나누지 않습니다. 꿈과 숙면 언제 나눠요? 참나 얘기할 때만. 참나일여 얘기할 때만 나눕니다. 아무도 나누지 않아요. 이건 성철 스님이 혼동한 겁니다, 혼동 화두안주랑 참나안주를 혼동시킨 겁니다. 나중에 법신안주, 1지에서 10지 가는 법신안주까지 혼동시켜 버리니까,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 거예요. 화두 몰입하는 3단계랑 동정·몽중·숙면, 참나 몰입의 3단계 동정·몽중·숙면, 법신안주 3단계, 6식정화·7식정화·8식정화 이게 다 혼동을, 섞어버리니까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아무도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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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심지어 어디서 잘못됐는지 찾기도 힘들어요. 이상한데 찾을 수가 없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왜? 부분 부분 보면 맞는 것 같거든요. 다 모아놓으면 이상한 거예요. 눈 이뻐요 코 이뻐요 입 이뻐요. 다 이쁜데 모아놓으니까 이상해요. 어디서 잘못됐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부분 부분 보면 너무 이쁘거든요. 이상하다. 모아놓으니까 이상하죠. 못 찾아내요. 어디서 잘못됐는지를. 이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잠과 꿈 나누는 실익이 없고요. 몽산 스님 안 나눠요. 단계를 나눌 단계가 아닌 거예요 그거는. ‘자나 깨나 잘하냐?’ 이거죠. 오매일여는 자거나 꿈꾸거나 화두의 일념에 몰입하는 6식인 정중의식이 흐르는가를 묻는 것일 뿐입니다. 화두일념에 있어서 몽중과 숙면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단계입니다. 여러분 염불 삼매하면서 화두 이야기로 하면 막 헷갈리실 수 있죠. 염불 삼매 할 때 “나 자는데 꿈속에서도 막 염불을 해.” 엄청난 경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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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없는 중에도 염불이 흘러” 이거 보다요 꿈꿀 때 염불하는 게 더 엄청난 경지예요. 이해되세요? 뭐냐 하면 큰 고민거리를 갖고 주무시면요 꿈 없는 잠 속에서도 계속 고민이 흘러요. 고민을 안고 자는 것 같아요. 근데 꿈을 꾸면 꿈속에 빠져들거든요. 근데 꿈속에서도 화두를 잡았다면 저는 그게 더 엄청난 경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따라서 의미가 없다고요, 구분할. 숙면일여가 더 높다고 말할 수 없다고요. 이해되시죠? 아니 고민하다가도 꿈꾸면 재밌는 꿈꾸죠. 다시 고민, 근데 다시 무의식에 들어오니까 원래 하던 가락이 있어서 화두를 품고 있을 수는 있어도 꿈이 자극해버리면 흘러간다고요. 그래서 이 몽중일여·숙면일여는요 별 의미가 없고. 화두를 잡은 채로 잠에 든 건데 화두가 흐르고 있는 상태니까 그냥 선잠 자고 있는 거기 때문에, 꿈이 일어나건 말건 선잠 자는 중에 계속 진행되는 삼매를 말하기 때문에요 꿈이 있건 없건 별 의미가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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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자는 상태라고요. 이해되시죠. 왜냐하면 깊은 잠이면 사라져 버리니까. 잠에 깊게 안 드는 거예요 일부러. 깊이 들면 사라지죠 당연히. 꿈이라는 거는, 아니 잠이라는 건 원래 의식이 작동하면 안 돼요, 과학적으로. 의식이 멈춰야 됩니다. 근데 선정을 실습한 분은 잠속 꿈속에서도 의식을 끌고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 얘기 한 거예요. 화두를 통해 견성에 도달한 뒤의 참나의 동정일여는요 차원이 다릅니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에 상관없이 참나가 늘 또렷함을 말하기 때문에, 참나의 오매일여는요 꿈속은 물론 깊은 잠속에서도 공적영지가 늘 또렷할 수 있냐? 이거를 네가 아느냐? 이거예요. 참나는 원래 그래요. 화두는 원래 안 그래요. 내가 의도적으로 꿈과 잠 속으로 끌고 들어가야 돼요. 참나는 안 그래요. 원래 깨어있어요. 그러니까 뭐만 하면 돼요? 잠잘 때 꿈꿀 때 참나를 알아차리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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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돼요. 그러니까 공부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화두일념은 화두를 끌고 들어가야 되고, 참나일념은요 그냥 참나를 계속 알아차리는 버릇이 몸에 무의식에 익어 가지고 잠결에도 알아차리고 꿈결에도 알아차리면 돼요. 느낌이 좀 다르시죠. 이 구분이 성철 스님한테 가면 없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계속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선문정로’로 들어가면 이 구분이 없어져요. 화두 오매일여 얘기하다가 참나 오매일여 얘기하다가 나중에 법신의 7식·8식 정화까지 이야기가 막 하나로 꿰어져서 굴러가니까 정신이 없어집니다. 지금부터 이렇게 분별하는 연습을 하셔야 돼요. 몽산 스님이 또 이런 글도 다른 분한테 가르친 게 있어요.
[* 몽산화상 시고원상인(蒙山和尙 示古原上人)
마음을 써서 ‘화두’를 들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화두가 현전할 때에 이르르면, 경계와 몸과 마음이 다 이전 같지 아니하며 꿈속에도 또한 화두가 들리리니, 이와 같은 때에 큰 깨달음이 가까우리라.
做到不用心提話頭 自然現前時 境界及身心 皆不同先已 夢中亦記得話頭 如是時 大悟近矣]
마음을 써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자연히 화두가 현전할 때에 이르면 경계와 몸과 마음이 다 이전 같지 아니하여 꿈속에도 화두가 들릴 거다. 이런 때에 큰 깨달음이 가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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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그렇게 견성이 안 돼도 꿈에서까지 화두 들릴 정도면 너 이제 곧 깨닫는다. 이 얘기를 하셨다. 근데 이렇게까지 꿈을 강조했던 분이 굳이 오매일여로 처리하신 거는 별 단계의 의미는 없다. 꿈과 잠의 단계의 의미는 없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요, 원래 스토리로.
[9. 문득 척척 들어맞아 맷돌 맞듯 함에, 알이 탁 깨지고 밤이 탁 터지듯이, ‘자기’(참나)를 훤히 밝혀서, ‘불조(佛祖)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곳’(불조가 밝힌 ‘불성’)을 붙잡거든(해오 解悟, 참나각성), 다시 마땅히 큰 선지식을 친견하고 단련을 구하여 대법기를 이루어야 하니 ‘작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忽然築着磕着 啐地絶 爆地斷 洞明自己 捉敗佛祖 得人憎處 又宜見大宗匠求煉 成大法器 不可得少爲足]
문득 척척 들어맞아 맷돌 맞듯 함에, 알이 탁 깨지고 밤이 탁 터지듯이 탁 터진 겁니다. 이게 해오입니다. 이제 드디어 해오 견성했어요. 참나각성했어요. 자기를 훤히 밝혀서 참나를 알았어요. ‘불조(佛祖)가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은 곳을 붙잡거든’ 요 말 참 재밌지 않아요. 부처와 조사가 사람들한테 미움 받는대요. 왜 미움 받게요? 참나 찾으라고 해서. 그 자리를 찾았다는 겁니다. 이제 의문을 풀었다. 불조가 던진 퀴즈를 드디어 풀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 스트레스 받게 해놓은 그 퀴즈를 드디어 풀었다. ‘다시 마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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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런데 여기서 12지면 왜 이런 짓을 하죠? 성철 스님 말대로라면 지금 성철 스님 논리대로라면 오매일여까지 거쳤죠. 몽중일여도 했고 오매일여 다 거쳤으면 12지 아닌가요? 여기서? 그런데 이상하죠. ‘다시 마땅히 큰 선지식을 친견하고 단련을 구하여 대법기를 이루어야 하니’ 더 커져야 하니 작은 깨달음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 다 깨지죠. 성철 스님 논리랑 하나도 안 맞아요. 12지라면서요? 딱 봐도 지금 해오인데. 해오면 지금 학당에서 몇 급인지 아세요? 8급이요. 그 어려운 길 걸어서 지금 8급 됐습니다. 8급·7급. 1급은 요원해요. 지금 1주도 요원해요. 근데 여기서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말한 거는 해오 급을, 처음에 해오를 깨닫는다는 거고 깨닫고 나서 본인이 보림 공부를 잘하면 급수가 올라가겠죠. 그래서 1급까지 돼요. 참나안주가 되면 1급까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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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뒤에 만약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깨달음 이후의 뒷일’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니, 그 해로움이 하나만이 아니다. 만약 부처와 조사의 기연機緣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으면 깨달음이 옅어서 현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증오가 되지 못함) 이미 현묘함을 다했거든 증오(證悟, 참나안주의 경지), 또한 물러나서 자취를 감추고 깨달음을 잘 보호하고 배양하여 역량을 온전히 갖추고, 불교의 대장경과 유교ㆍ도교의 책들을 모두 보아 수많은 생의 ‘습기(習氣)’를 녹여서, (참나안주 이후의 점수) 청정하여 끝이 없으며 둥글고 광명하여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높이 날며 멀리 날아 거의 광명이 성대하여 앞서가신 조사들의 종풍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悟後 若不見人 未免不了後事 其害非一 或於佛祖機緣上 有礙處 是悟淺 未盡玄妙 旣盡玄妙 又要退步 韜晦保養 力量全備 看過藏敎儒道諸書 消磨多生習氣 淸淨無際 圓明無碍 始可高飛遠擧 庶得光明盛大 不辱先宗]
그런데 ‘깨달음 뒤에 만약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깨달음 이후의 뒷일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깨달을 필요가 없죠, 원래 성철스님 논리대로라면. 12지인데. 여긴 택도 없으니까 지금 보림 공부하는 법을 알아내야 된다. 참나를 만났으면 참나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 해로움이 하나만이 아니다.’ 만약에 이거 안 배우면 그거 깨달았다고 잠깐 막 깨달아서 난리 치면 큰일 난다. ‘만약 부처와 조사의 기연(機緣), 부처와 조사의 그 가르침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으면’ 지혜가 부족한 거죠. 아니 법공을 깨달았는데 경전도 풀려야죠. 화두만 터져서는 안 돼요. 교학으로 검증해 봐야 해요, 경전이 풀리나.. 경전도 막 이해가 돼야 돼요. 근데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으면, 공적영지에 대한 가르침은 최소한 이해해야죠, 다 경전에 나온. 이거 이해 못 하면요, ‘깨달음이 옅어가지고 현묘함을 다하지 못한 거다.’ 이거는 아직 증오(證悟)가 못된 거다. 일단 해오(解悟)는 했어요. 근데 본인이 본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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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뒷일을 닦으면 이제 지혜가 깊어져가지고 증오까지 가야 돼요. 그런데 증오까지 영 못 가버리면요 안 되는 거고요. 현묘함을 다 하지 못한 거고요, 아직 부족한 거고요. 혹시 ‘이미 현묘함을 다 했거든’ 증오(證悟). 이제 스승한테까지 배워서 참나안주를 이루었거든 ‘또한 물러나서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이제 1주 보살은 된 거예요. 참나안주는 된 겁니다. 이러고 나서 이제 ‘물러나 자취를 감추고 깨달음을 잘 보호하고 배양해야 된다.’ 성철 스님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현묘함을 다 했거든’에서는 이미 12지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또 배양해야 되고요 역량을 온전히 갖추라고 그러고요 ‘불교의 대장경과 유교·도교 책을 보라’고 그래요. 자, 이거 홍익학당 아닙니까 완전히. 1주 보살 뒤에 뭘 해야 되나요? 대장경을 봐 가지고요 참나각성과 업장정화에 대해서 배우고요. 유교를 봐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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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성찰법을 배우고요. 도교를 봐서 호흡수련해서 에너지체 배양법을 배워야 됩니다. 이분 홍익학당 분 아니에요 지금? 전형적인 학당식 설명 아니에요? 학당이 하는 그대로잖아요. 그래가지고 많은 생의 ’수많은 생의 습기(習氣)를 또 녹이래요. “저 12지인데요?” 이러실 거예요? 점수(漸修), 이제 본격적인 점수예요. 이건 돈오 이후의 점수. ‘청정하여 끝이 없고 둥글고 광명하여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이건 뭐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참나 안에서 자유자재해야 된다는 얘기죠. ‘비로소 그래야 높이 날며’ 습기를 좀 녹여야 비로소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때가 좀 벗겨져야지 볼만해진다. ‘높이 날고 멀리 날아서 광명이 성대하여 앞서가신 조사들의 종풍을 더럽히지 않게 될 거다.’ 이러면 이제 1지·2지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 보면요, 11번.
[11. 만약 옛날 행동하는 버릇을 고치는 것에 미진함이 있으면, 곧장 범상한 무리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또한 말할 때는 깨친 듯하나, 경계를 대하면 도리어 미혹하여 말하는 것이 술에 취한 사람 같으며, 하는 짓이 속물들과 같아서 기틀의 숨고 나타남을 알지 못하며 말의 바르고 사특함을 알지 못하여, 인과법칙을 무시한다면 지극히 큰 해로움이 될 것이다. 앞서간 선배들의 바르고 사특함이 큰 본보기가 될 것이다.
其或換舊時行履處 未盡 便墮常流 更若說時似悟 對境還迷 出語如醉人 作爲似俗子 機不識隱顯 語不知正邪 撥無因果 極爲大害 先輩正之輿邪 大有樣子]
만약 행동하는 버릇을 고치는 것에 미진함이 있으면’ 너 혹시, 지금 증오까지 했더라도요 “너 니 습기 안 고치면, 6바라밀 더 안 닦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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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예요. “6바라밀 안 닦고” 아까 도교까지 있었으니까 “에너지 수련 더 안 하면 곧장 범상한 무리로, 다시 속인 되고 말아. 참나 깨달았다고 껄떡대다가 결국 다시 똑같아져.” 6바라밀 없어지면 똑같죠. ‘또한 말할 때는 깨친 것 같지만 경계를 대하면’ 6바라밀에 어긋난 짓을 하죠. 탐진치에 끌려가 버린다고요. 도리어 미혹하여 말하는 것이 술에 취한 사람 같으며 하는 짓이 속물들과 같아서 기틀의 숨고 나타남을 알지 못하며’ 참나의 작용, 참나의 본체와 작용을 다 구현 못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작용은요 6바라밀이에요. 그러니까 본체도 모르니까 구공을 모른다는 얘기예요 본체를 모른다는 건. 참나 안에 이렇게 법신자리가, 6바라밀 다 갖추고 있는 이 참나자리도 이해 못 하고, 이게 나투면 6바라밀이 펼쳐져야 하는데 안으로 6바라밀을 갖춘 참나도 모르고, 밖으로 6바라밀 못 펼치니까 돈오는 했지, 이거 어디다 쓰냐는 거예요. 돈오한 소시오패스가 돼요. 그러니까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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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바르고 사특함을 알지 못하여 인과를 무시’하게 되고요. ‘지극한 해로움이 된다.’ 이런 애들이 사이비 교주 돼요. 뭔가 좀 깨달은 게 있거든요. ‘앞서 간 선배들의 바르고 사특함이 큰 본보기가 될 것이다.’ 앞서 간 선배 중에 크게 되신 분하고 레전드급 성인들하고 사이비교 쪽, 이쪽으로 가신 분들 본보기가 될 겁니다.
[12. 일을 마친 사람(증오, 참나안주자)은 생사의 언덕에서 거친 것을 미세하게 바꾸며 짧은 것을 길게 바꾸어, ‘지혜가 광명한 해탈’(智光明解脫)로 일체 만물을 나투는 최고의 삼매를 얻을 것이니, 이 삼매로 ‘생각으로 만드는 몸’(의생신意生身)을 얻고 향후에 능히 ‘신묘하게 나투어 믿음을 주는 몸’(妙應身信身)을 얻을 것이다. 진리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다. 달마가 송頌하여 이르셨다. 부처의 심법을 깨달음에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나 ‘실천하는 것’(行)과 ‘아는 것(解)’이 서로 상응해야 ‘조사’祖師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了事者 生死岸頭 能易麤爲細 能易短爲長 以智光明解脫 得出生一切法三昧王 以此三昧故 得意生身 向後 能得妙應身信身 道如大海 轉入轉深 達摩 有頌云 悟佛心宗 等無差互 行解相應 名之曰祖 更莫說宗門中 有超佛越祖低作略 聰上人 信麽 信輿不信 向後自知]
‘일을 마친 사람’ 이거 참나안주자죠. 일을 마친 사람은요. ‘생사의 언덕에서 거친 것을 미세하게 바꾸고, 짧은 것을 길게 바꾸어’ 이런 신통자재해 가지고요, ‘지혜가 광명한 해탈로 일체 만물을 나투는 최고의 삼매를 얻을 것이니, 이 삼매로 의생신(意生身)’ 에너지체까지 얻는다는 겁니다. 의생신도 만들고 ‘향후 신묘하게 나투어 믿음을 주는’ 아주 부처의 몸까지 얻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래서 ‘진리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다.’ 왜 이런 맛이 없어요. 성철 스님은 화두만 죽으라고 하다가 막판에 12지로 끝나버려요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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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미없는 스토리예요. 이런 영화 보시겠어요? 참나도 못 만나고요 죽을 둥 살 둥 화두 숙면일여 이렇게 가다가 마지막 영화 끝나기 한 1분 전에 “12지다” 하고 끝나요. “닦을 것도 없구나. 이제.” 이 영화 보시겠어요? 아니면 지금 ‘몽산법어’처럼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 보시겠어요? 에고를 깎고 깎고 참나를 밝히고 밝혀서 지금 의생신의 아주 불신(佛身) 부처의 3신까지 갖추고. 그런데도 뭐라고 하냐면 진리는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질 뿐이다. 이게 공부하는 사람의 맛입니다. 공부의 끝을 설정 안 해버렸잖아요. 이분 찐입니다. 왜 우리 고려 말에 나옹 화상이 이분 법어를 우리가 내고, 훈민정음 나오자마자 이분 가르침을 언해본 냈는지 아시겠죠. 너무 좋아요. 이 글만 읽으셔도 충분해요. ‘부처님의 심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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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나.’ 이 말은요 참나자리에서는 평등해서 부처랑 중생이 없고 다 12지지만, ‘실천하는 것과 아는 것이 서로 상응해야 조사(祖師)다.’ 그럼 진리를 그렇게 안 다면 네가 행하는 걸로 보여주고 견해로 보여줘라. 말로 설명해 보고 행으로 보여줘라. 참나자리에서 선정에서는 다 부처다, 누구나. 죽이죠 마지막까지. “참나자리는 다 부처인데 너 이거 내가 말한 거 이해할 수 있고 행할 수 있어?” 이 소리입니다. “그래야 조사야.” 완전히 뭐 조사버렸죠. 그래서 깔끔하게 끝내버렸죠. 이번에는 몽산 스님의 스승이신 환산정웅선사가 몽산 스님한테 가르쳐준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몽산 스님도 스승한테 배운 겁니다. 뭐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보세요.
[* 환산정응선사 시몽산법어(皖山正凝禪師 示蒙山法語)
1. 오직 ‘무자無字’만을 알아차리되, 생각으로 헤아리려 추측하지 말고 ‘있음’과 ‘없음’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경전이라 어록의 종류를 보지도 말고, 오직 한가지로 ‘무자’만을 들어야 한다. 24시간 중,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위의威儀 동안,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자나 깨나) 마땅히 깨어있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마치 닭이 계란을 품듯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함이 없게 해야 한다. 이것이 투철하지 않다면 마땅히 늙은 쥐가 쌀통을 깨물듯이 고쳐 옮기지 않아야 한다.
只看箇無字호대 不要思量卜度하며 不得作有無解會하며 看經敎語錄之類하고 只單單提箇無字하야 於十二時中四威儀內에 須要惺惺하야 如貓捕鼠하며 如鷄抱卵하야 無令斷續호리라 未得透徹時엔 當如老鼠가 咬棺材相似하야 不可改移니라.]
‘오직 무자(無字)만 알아차려라. 생각으로 헤아리려 추측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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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과 없음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도 말라.’ 있다 없다. 이원성을 가지고 따지지 마라. ‘경전이나 어록의 종류를 보지 말고,’ 그러니까 책도 보지 말고 경전 보지 말고 오직 한 가지로 무자(無字)만 들어라. ‘24시간 중에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 네가지 동작 동안’ 그러니까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자나 깨나예요. 동정 간에, 오매간에 여기 오매일여 이런 말은 딱히 말 안 해도 다 들어있는 겁니다. ‘자나 깨나 마땅히’ 24시간 중이라고 했으니까 다 들어있죠. ‘마땅히 깨어있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닭이 계란 품듯이’ 닭이 계란 품을 때 의식이 다 계란에 가 있죠. 뭘 해도 거기 있어야 돼요. 우리가 단전 잡을 때 그렇게 잡아야 되하거든요. 단학에서 제일 중시하는 게, 닭이 계란 품듯이 하라는 겁니다, 단전을. 근데 화두를 그렇게 잡으라는 겁니다, 화두를 화두 잡으면 참나도 알아차려지겠죠. ‘이것이 투철하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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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지 않게 해라.’ 쭉 흐르게 해라. ‘이것이 투철하지 않다면 마땅히 늙은 쥐가 쌀통을 깨물듯이 고쳐 옮기지 않아야 된다.’ 뭔 소리냐면 깨문 데 또 깨물어야지 쌀통이 뚫리지 여기 깨물었다 저기 깨물었다 하면 안 뚫리죠. 한 군데만 은근히 꾸준히 계속 몰아쳐라. 아시겠죠. 우물 판다고 여기 팠다 저기 팠다 하지 말고 하나를 꾸준히 파라.
[2. 수시로 다시 채찍질하여 ‘의심’을 일으키되 “일체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 이 있다는데 조주 스님은 무슨 이유로 없다고 했는가? 그 뜻이 무엇인가?” 하라. 이미 ‘의심’이 있다면, 묵묵히 ‘무자無字’를 들어서 ‘의식의 빛’을 돌이켜서 ‘자기’(화두를 알아차리는 자)를 알아차려라. 오직 이 ‘무자’로 마땅히 ‘자기’를 알아야 하며, ‘조주 스님’을 알아야 하고, ‘불조佛祖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곳’(불조가 밝힌 ‘불성’)을 붙잡아야 한다. 다만 나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믿고 곧장 닦아 나가면, 결정코 광명함이 발현될 시절이 있을 것이니 결단코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수시로 다시 채찍질하여 의심을 일으키되’ 의심을 자꾸 해야 지혜가 터집니다. 그래서 화두가 재미있는 법인 게요 염불삼매보다 의심일념이라는 게 요 맛이 있습니다. 정혜쌍수를 같이 닦기 좋아요. 의심 때문에 몰입이 되고 의심을 풀면 지혜를 얻어요. 재밌죠. 이게 화두의 묘미입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화두대로의 묘미가 있어요. 나무아미타불은 믿음일념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의지하면서 얻는 또 힘이 있어요. 결국은요 터지면 다 똑같아요. “화두는 의심했으니까 지혜를 얻고 염불은 터지면 지혜 못 얻지 않나요?” 그런 거 없어요. 염불삼매도 결국 터지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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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자리가 아미타불과 둘이 아니구나! 나무아미타불 이게 그대로 참나의 나툼이구나! 정토가 그대로 참나의 작용이구나!” 다 알아내요. 똑같이 알아내요. 근데 좀 더 지혜 쪽을 자극한다는 거죠, 화두는. 조주 스님은 무슨 이유로 없다고 했는고?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는데, 조주는 왜 없다고 했는고?’ 요 풀 스토리를 알아야 의심이 나잖아요? ‘그 뜻이 무엇인가?’라고 의심하라. 이미 의심이 있다면 이제 궁금해졌다면 이제는 뭐만 하면 돼요? 묵묵히 무자(無字)만 들면 돼요. “무(無)라! 무(無)라! 없다! 없다!” 이게 몰라랑 똑같아요. “없다! 없다!”할 때 뚝뚝 끊어집니다, 생각·감정이. “없다! 없다!” 없어져 버려요, 진짜로. 근데 참나만 딱 있는 거예요. 고 때 견성하는 겁니다. ‘의식의 빛을 돌이켜서 자기를, 묵묵히 무자(無字)를 들어서 의식의 빛을 돌이켜서 자기를 알아차려라.’ 똑같죠. 스승한테 배운 겁니다, 몽산 스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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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 무자(無字)로 마땅히 자기를 알아야 하며’ 자기 참나 알면요 ‘조주 스님 참나도 알고 부처 조사가 미움 받는 곳(불성자리) 잡게 된다. 다만 나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믿고 곧장 닦아 나가면, 결정코 광명함이 발현된 시절(견성한 시절)이 있을 것이다. 결코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너한테 사기 친 거 아니다 이런 얘기예요.
[* 화두를 들 때의 ‘깨어있는 화두의 일념’은 ‘6식의 작용’(대상에 몰입하는 6식인 정중의식定中意識)이나 화‘두를 알아차리는 자기’는 바로 ‘8식의 미세망념’을 초월한 ‘자성청정심’이자 ‘공적영지’이다. 성철 스님이 강조하는 ‘화두의 몽중ㆍ숙면일여’도 ‘화두의 일념’이 자는 중에 흐르는 것을 말할 뿐이다. ‘화두의 일념’(6식 의 소소영령함)이 자나 깨나 흐르다 보면, 단박에 ‘자성청정심’(9식의 소소영령함)을 깨닫게 된다. 이때 이 ‘자성청정심’이 ‘6ㆍ7ㆍ8식’을 초월한 자리임을 단박에 깨닫게 된다(해오의 견성). 나아가 이 자리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하고, 자나 깨나 이 자리에 안주하고자 ‘보임공부’를 하게 된다.]
화두 들 때의 깨어있는 화두일념은요 6식의 작용입니다. 대상에 몰입하는 6식인 정중의식입니다. 화두를 알아차린 자기는요, 8식의 미세망념을 초월한 자성청정심·공적영지, 즉 9식이에요. 애초에 참나는 9식입니다. 화두에 대한 일념이 6식인 거지. 근데 자꾸 참나를 못 만난다. 성철 스님의 논리. 숙면일여까지 안 가면 견성 못한다. 왜? 숙면일여까지 해야 8식이 정화된다. 숙면일여는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과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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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면일여 한다고 8식의 업식이 정화되지 않습니다. 잠잘 때도 선정이 흐르는 것뿐입니다. 선정 체험만으로 업장이 정화되지 않습니다. 숙면일여를 아무리 해도 8식은 정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숙면일여를 해야만 견성한다는, 8식이 정화돼야만 8식의 미세망념이 떨어져서 견성한다는 논리는 안 맞는 소리다 애초에. 애초에 참나자리는 8식의 미세망념이 붙지 못한다. 그러니까 바로 그냥 화두 잡고 바로 참나 만나면 끝이다 애초에. 선사들의 기본 정신은 이겁니다. 왜 이 쉬운 길을 어렵게 해놨냐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못 가게. 지금 견성해봤자 숙면일여가 안 되면 8식의 미세망념이 그득해가지고 나는 견성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놨냐는 거예요. 완전히 이건 헛소리인데. 어디에도 경전적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이해되시죠. 완전 헛소리다 이거는. 그래서 불교 망쳤다고 한 겁니다, 제가. 아무도 견성 못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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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놨잖아요. 화두를 알아차리는 자는요 9식이에요. 성철 스님이 강조한 화두의 몽중·숙면일여도 화두일념이 자는 중에 흐르는 선정체험을 말할 뿐입니다. 화두의 일념 즉, 6식의 소소영령함이 자나 깨나 흐르다 보면 단박에 9식의 소소영령함을 깨닫는 데 도움은 되겠죠. 이게 8식 정화니 뭐니랑은 아무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몰입을 잘했기 때문에 견성하게 된 것뿐이에요. 이해되시죠. 이때 이 자성청정심이 6·7·8식을 초월한 자리임을 단박에 깨닫게 됩니다. 이게 해오견성입니다. 나아가 이 자리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자나 깨나 이 자리에 안주하고자 보임 공부를 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더 증진시키고, 이해를 증진시키고, 그 자리에 더 머물고, 더 안주하고 머물기 위해서 수행하는 겁니다. 두 가지, 안주와 이해. 이게 점수의 핵심입니다. 견성 이후 점수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법신보살이 되는 1지 보살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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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에서 6·7·8식 정화는요 그것만으로 안 돼요. 6바라밀을 총동원해야만 올라갑니다. 한번 보세요. 6식을 정화한다는 게 동정일여로 설명이 됩니까? 여러분 자나 깨나 이 일여가 이미 지금 1지부터는 법신의 이야기거든요. 즉, 6바라밀을 갖춘 법신. 동정일여는요 그럼 동정 간에 6바라밀이 완벽하다는 얘기인데 1지에서 6지가 동정 간의 6바라밀이 완벽하다고요? 이상하죠. 안 맞아요 동정일여 안 됩니다. 그럼 몽중일여, 7지는요 7지는 행주좌와에, ‘선문정로’에 나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나아가서 꿈을 꿀 때도 꿈을 꾸는 중에도 업장이 없다라는 말이 나와요. 이거를 성철 스님이 근거로 몽중일여가 7지라고 주장하는데요, 이 말은요 행주좌와와 나아가 꿈까지도 업장이 없는 단계는요 7지에서 처음이에요. 1지·6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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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꿈 빼고 행주좌와에는 업장이 없어야겠네요, 1지에서 6지는, 동정일여라면?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안 맞는 소리다. 몽중일여랑 7지랑은 상관없는 소리다, 애초에. 여기 이런 식의 얘기랑. 그냥 이 부분은요 7지부터는 업장이 다 정화됐다는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8지부터 11지는요? 업장이 더 정화되는 것뿐이에요. 숙면에, 8지에서 11지가 잠잘 때 6바라밀 잘한다는 얘기, 경지라고요? 잠잘 때 6바라밀 잘한다는 건 어떤 거죠? 자면서 장난 아니게 6바라밀로? 애초에 숙면은 고민 사항이 아닙니다. 6바라밀 닦는 이 화엄경 체계에서 꿈이 없는 잠은 고민 사항이 아니에요. 잘 주무시면 돼요. 문제는 “꿈결에라도 네 의식이 작동할 때 6바라밀을 하더냐?”를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1지에서 6지는 안 돼요. 7지부턴 돼요. 8지·11지는 엄청 잘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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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됐죠. 애초에 상관없는 소리다. 1지랑 여기다 갖다 대지 말라는 거예요. 1지부터 11지 체계랑 동정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는 아예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참나의 숙면일여·몽중일여·동정일여는 참나가 흐른다는 얘기고, 화두에 이 얘기는 자나 깨나 화두 흐르면 그만. 애초에 숙면일여·몽중일여를 나눌 필요도 없다. 오매일여·동정일여만 있으면 된다. 됐죠. 총정리! 이렇게 문제 출제되면 다 이 3단계로 나눠서 푸셔야 돼요. “지금 이건 화두의 숙면일여·몽중일여냐? 참나의 몽중일여냐? 법신의 몽중일여냐?” 이 3개가 다 다른 얘기예요. 왜 참나라고만 하고 법신이라고 안 하냐면 법신은 1지부터만 허락됩니다. 참나는 정혜쌍수만 얻었지 6바라밀쌍운·복혜쌍운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대혜종고 스님하고요 고봉 원묘 스님의 ‘선요’는요 제가 이제 그냥 이거는 양념으로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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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드리기만 할게요. 지금 화두선만 너무 얘기했잖아요. 근데 수행할 때 화두와 몰라는 어떻게 접목하는 게 좋을까? 이런 거 고민하실 때 대혜 종고 스님은 화두선 창시자입니다. 그런데도요 가르칠 때 최상승으로 가르칠 때는 화두 안 가르쳐요. 화두는, 왜 화두가 나왔냐면요 대혜 종고 스님이 사대부들을 많이 가르쳤어요. 지식층들 당시 최고 엘리트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머리가 너무 좋아요. 4서3경을 다 외우는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불경도 외워버려요. 선비들 중에 불자들을 가르친 거잖아요. 그러니까 불경을 4서3경 공부하듯이 다 외워버렸어요. 그러니까 뭔 얘기를 해도요 다 그냥 경전만 읊고 있는 거예요, 사대부들이. 참나 얘기하면 “아, 능엄경에 그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능엄경 능엄경.” “네 참나는 어디 있냐고?” 이제 이렇게 대화가 자꾸 진행되니까 대혜 스님이 꾀를 낸 게, 참구를 더욱 강조해가지고 일부러 조주 무자니 막 이런 난해한 퀴즈 만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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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서근(麻三斤) 이러면 사대부들이 아무리 경전을 뒤져도 답이 없거든요. 검색을 해봤자 어차피 답이 안 나옵니다. “왜 삼서근이라고 했느냐?” 그러면 말을 못해요. 그래서 이거를 화두선을 본격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이렇게 지도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이런 체계도 나온 거예요, 동정일여니 오매일여니. 그전에는 이렇게까지 지도한 게 아니고, 그전에도 화두는 있어요. 화두 참구도 있는데 어떤 정도냐면요 지혜 계발 용도로 쓴 거예요. 그냥 참나를 늘 돌아다 보되, 참나만 보고 있으면 지혜가 안 느니까 지혜 늘게 하려고 선정에 잘 드는, 무분별정에 잘 드는 사람한테 몰라 원래 그전에 화두도 안 했으니까 화두로 선정에 든 게 아니라고요. 그냥 몰라로 선정에 들었어요, 그전에는. 반조선 이뭐꼬 하고 내가 누군지 보다가 선정에 들었는데 지혜 계발을 도와주려고 “왜 조주 스님은 그때 무(無)자라고 했지?” 하고 의심을 품게 한 거예요. 그럼 지혜까지 계발되니까. 근데 이게 화두선은, 본격적으로 화두를 가지고 통합 상품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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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과 지혜를 다 닦자. “왜 했는고?” 이제 요령까지 나와요. 왜 했는지 풀 스토리를 이해한 다음에 “무(無)라! 무(無)라! 해라.” 이제 기본 화두에서 뭐만 몰입할 건가 그것도 나눠서 정해줍니다. 이건 화두선이에요. 그전엔 화두가 등장해도 그전에도 다 있던 말이에요. 언구(言句)를 의심 안 하는 게 병이다. 큰 의심이 있어야 된다. 이건 뭐냐 하면 격물치지 차원이에요. 지혜계발 차원에서 자꾸 문젯거리를 던져준 거고요. 문젯거리에 몰입하는 방식의 참선은요 이제 대혜 종고부터 시작됩니다. 이해되시죠 무슨 말씀인지? 왜? 사대부들이 딴생각 못 하게 딱 막아서 몰입시키려고. 그러면서 깨어나게 하려고.
[* 대혜大慧 종고宗杲(1089~1163)의 서장 書狀
그대는 편지로 나에게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다만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주기를 구하기는 한 생각이, 일찍이 머리를 숙여 아교 단지에 들이미는 것입니다. 눈 위에 서리를 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어보시니 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대는 평소에 스스로 경전의 가르침을 보거나 화두를 붙잡는 것은 물론, 남이 깨닫게 해주거나 가르쳐주어 큰 재미와 환희를 얻은 자리를. 일시에 몽땅 내려놓고 오직 일체를 모르겠다는 것에만 의지하십시오! 마치 ‘3살 아이’처럼 되십시오. 그래서 ‘알아차리는 본성’은 있으나 ‘알음알이’가 작용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거든, ‘공부의 지름길’을 찾는 그 마음의 이전을 들여다보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다보면 어느 곳 하나 붙잡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때가 오더라도 놓아버려 느슨해지지 마십시오. 이 안은 앉아서 ‘천 명의 성인의 정수리’를 끊어버리는 자리입니다 왕왕 도를 배우는 사람이 이 안에서 물러나고 맙니다. 당신께서 믿음이 미친다면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주기를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늘 ‘그 자리’를 들여다본다면 홀연히 잠과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닦는 ‘힘을 얻는 공부법’입니다.]
그런데 이분이요 누군가 제자가 공부의 지름길 좀 가르쳐달라고 한 거예요. ‘나한테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도 같죠. 다르지 않잖아요. “지름길 없나요? 이렇게. 좀 더 쉽게 가는 법 없나요?” 한 거예요. ‘다만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주기를 구하는 한 생각이 일찍이 머리를 숙여 아교 단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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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미는 겁니다.’ 지름길 좀 가르쳐줬으면 하는 그 마음이 이제 죽으려고 꾀를 쓰는 것이다. ‘눈 위에 서리를 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어보시니 답은 안 할 수 없습니다.’ 꼭 얘기해 줄 거면서 되게 안 좋은 말 먼저 하고 합니다. ‘청컨대 그대는 평소에 스스로 경전의 가르침을 보거나’ 경전도 보지 말고요 화두도 하지 마라는 거예요 지금. ‘화두 잡는 거, 남이 깨닫게 해주거나 가르쳐주어 큰 재미와 환희 얻은 자리’ 우리 같으면 뭐예요? 강의, 되게 재미있었던 강의 내용. 다, 지금 경전·화두·큰 깨달음 얻은 거 다, ‘몽땅 내려놓고, 일체를 모르겠다는 것에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니까 진짜 지름길은 뭐예요? 몰라예요, 화두보다. 화두는 왜 가르쳤는지 아세요? 머리 복잡한 친구들 가르치려다 나온 거예요. 원래 몰라 하면 될 거를 “몰라하면 된다” 이 말을 하면 또 못 알아들으니까 화두를, 퀴즈를 제시해 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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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멈추게 하려고. 머리가 하도 잘 돌아가니까. 그런데 지름길을 물어보면요 이런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공부하십니까?” 대혜 종고는 화두 창시자죠. 본인은 어떻게 견성했을까요? 당신은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이 얘기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일체를 모르겠다는 것에만 의지하십시오. 마치 3살 아이처럼 되십시오.’ 천지분간 못하는 상태로 있으라는 겁니다. 오직 그래서 알아차리는 본성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알음알이가 작용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거든,’ 그러니까 알아차리는 본성은 있으나 알음알이는 멈춘, 알아차리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거든 ‘공부의 지름길을 찾는 그 마음 이전을 들여다보십시오.’ “아, 좀 빨리 얻고 싶다!” 하는 고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보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니까 몰라하면서 참나자리 계속 돌아보라는 겁니다. 화두 잡고 참나자리 돌아보나 몰라하면서 참나자리 돌아보나 같은 건데, 몰라가 더 지름길이다. 최상승선이다. 이렇게 얘기해 주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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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요 몰라하면서 자꾸 참나자리, 그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인 참나자리, 알아차리는 자를 계속 보면서 지내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 곳 하나 붙잡을 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몰라가 잘 된 거예요. 이제 한 생각도 안 일어나요. 붙잡을 자리가 없다는 건요 한 생각도 안 일어날 때가 온다. 생각이라는 게 뭔가 하나씩 붙잡은 거잖아요. 생각도 안 일어날 때가 오는데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때가 오더라도’ 공부하다 좀 힘들더라도 ‘놓아버려 느슨해지지 마십시오. 이 안은 앉아서 천 명의 성인의 정수리를 끊어버리는 자리입니다.’ 몰라 해서 얻은 그 참나자리는요 천 명의 부처도 다 여기서 나왔지 참나에서 나왔지 별거 있어요? ‘왕왕 도를 배우는 사람이 이 안에서 물러나고 맙니다.’ 얻었다가도요 어떻게 물러나는지 아까 예를 든 경우도 이 경우죠. 이 자리에 들어가도요, 나 화두 잡아야 하는데 하고 나옵니다. ‘당신께서 믿음이 미친다면’ 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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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깃하시다면 ‘공부의 지름길을 가르쳐주길 구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관찰하십시오.’ 몰라하면서요. ‘이렇게 늘 그 자리 들여다본다면, 홀연히 잠과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겁니다.’ 이러면요 그냥 숙면일여를 따로 안 해도요 “꿈도 잠도 다 참나 작용이구나!” 하고 알아버려요. 끝이에요. 참나의 숙면일여·몽중일여는 차원이 다릅니다. 화두를 잡고 막 늘어지는 게 아니에요. 참나를 정확히 알면 끝나버려요. 아니 참나를 정확히 알면요 여러분, 노력 안 하셔도 생시에. 자꾸 막 꿈속에서 참나 잡으려는 분들 있는데 생시에도 못 잡으시면서, 왜 도대체 꿈에서 잡으려고. 이게 꼭 이거랑 똑같아요.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보면요 살아서 견성 못한 분이, 꼭 죽을 때 승부 보려고 그래요. 그 영계 가는 길에. 좀 이상하죠. 살아서도 안 된 분이 그때 되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꿈결에 참나를 잡아야지!” 이런 게 아니에요. 깨어있을 때 더 정확히 잡으면 돼요. 왜 이게 가능하냐면요 태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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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듯이 구름 속에서도 태양을 정확히 보면요 구름 걷고 봐도 그놈이에요. 똑같아요. 지금 생시에 참나를 정확히 알아차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참나가 9식인 줄 알면 돼요. 참나가, 지금 보세요. 생시에 참나를 만나면서 6·7·8식을 넘어서 9식인 줄 알면요 어차피 잠을 자도 다 8식놀음·7식놀음인데 잠을 자고 꿈을 꿔도 9식인 줄 알면, 지금 잠 안 자고도 끝난 거라니까요. 잠 안 자고도 “이 자리는 잠을 넘어서고 천지 만물이 다 여기서 나왔고, 다 여기서 이게 불변의 나구나!” 하고 알아버리면 끝이에요. 그냥 견성이에요. 그래서 당나라 때나 저기 티베트의 그런 린포체들,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공부하는 분들 숙면일여 이런 거 얘기 안 해요 그냥 참나 알면 끝이지. “생각과 생각 사이 틈만 봐라. 보이냐? 견성했다.”예요. 왜 공부를 어렵게 만들어요, 쓸데없이 자꾸. 숙면일여·몽중일여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생시에 참나 정확히 잡으면요 동정일여만 되면 끝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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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일여가 잘 되면요 잘 때도 있어요, 그냥. 그냥 잠 자더라도 내가 알아요. 잠자는 것도 내가 참나가 잔 거고, 꿈을 꿔도 참나가 꾼지 그냥 알면 끝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세상 쉽다, 원래. 어디도 이렇게 어렵게 가르치는 데가 없어요. 우리나라가 별나요. 왜 부러 어렵게 과정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고생하고 있어요. 지금 티베트 불교 거기 마하무드라 이런 거 얼마나 쉬운데요. “생각과 생각 사이 틈만 봐라. 그 틈을 확장해라. 끝!” 그러다 보면, 보세요! 이것도 말 쉽게 하잖아요, 여기도. 그냥 홀연히 잠과 꿈에서 깨어나 버린다잖아요. 쉽죠.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닦는 힘을 얻는 공부입니다.’ 저는 이렇게 합니다. 약사한테 물어본 거죠. “뭐 드세요?” 이렇게. “본인은 뭐 드세요?” 자꾸 화두 팔고 막 파니까. 저는 몰라 먹는데요.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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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원묘 선사의 ‘선요’는요 성철 스님 쪽에서 엄청 강조하는 분입니다. 근데 웃긴 건요 이분의 글을 보면 다 돈오점수예요. 근데 어떻게든 틀어가지고 다 돈오돈수라고 책을 내요. 성철스님 계열은 대단한 분들이에요. 이분들은 돈오돈수 아니면 죽어요. 돈오점수. 이 책도 보세요. 한국 불교사 중요 논쟁으로 기록된 돈점(頓漸)논쟁을 촉발시킨 책. 성철 스님은 이 책에서 돈오점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게 지금 카피 최고, 지금 제일 잘한 일입니다. 제일 못한 일입니다, 돈오점수 비판한 게. 돈오돈수를 왜? 누구를 위해서? 갑자기 12지가 되겠다는 이 발상이 얼마나 황당합니까? 고봉 원묘 스님도 보세요.
[* 고봉高峯 원묘原妙(1238~1295)의 선요禪要
만약 참으로 결정코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먼저 평소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일체의 옳고 그른 물건’을 모조리 다 물리쳐서 터럭만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아침을 마칠 때까지 ‘바보’와 같이 우두커니 있어서, 옛적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어져야 한다. 그런 뒤에 자리에 정좌하여 ‘정념正念’(화두에 대한 일념을 견고하게 뭉쳐야 한다. 정밀하게 ‘향상向上의 현묘한 기틀’을 궁구하며,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은밀한 종지’를 연구하고 음미해야 한다.]
‘만약 참으로 결정코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견성하고 싶다면 ‘먼저 평소 마음에 담고 있던 일체의 옳고 그른 물건을 모조리 다 물리쳐서 터럭만큼도 남겨서는 안 된다.’ 다 몰라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그리하여 아침인데 새벽에서 아침까지 ‘아침을 마칠 때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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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바보와 같이 우두커니’ 있으랍니다. 바보가 되라. ‘옛적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어져야 합니다.’ 다들 어디서 힘 얻고 있어요? 다. 재밌는 거는 달라이라마도 이런 거 하고 있습니다, 명상. 실제로 본인은. 아침에 족첸 하시거든요. 족첸이 뭐냐면 “과거 몰라! 미래 몰라! 오직 지금 이 순간 현존할 뿐!” 이게 족첸이에요. 거기에 안착하면 끝이에요. 그냥 참나예요. 몽중일여·숙면일여 아무도 관심 없어요. 한국만 유별나가지고. 이게 왜 나온지 아세요? 견성 못한 애들끼리요 서로 완장 차려면 나옵니다. 견성을 어차피 못했어요. “너 숙면일여 되나?” 이거죠. 이걸로 계급을 나눌 수도 있어요. 뭐냐 하면 이제 신림동을 갔어요. 고시학원을 갔는데 “너 몇 년 차야?” 그러니까 불합격인 건 똑같애요, 둘 다. 근데 짬밥이 다른 거예요. “나 10년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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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합격을 해도 내가 먼저 해야 하지 않겠냐? 10년 차인데. 너는 한 10년 열심히 해!” 이런 느낌이죠. 그러니까 불합격생들끼리 모아놓으면 이런 짓이 나옵니다. 합격생들은요 이럴 새가 없어요. “뭐 하는 거야. 빨리 합격하고 나가야지! 신림동에 왜 있어.” 제가 만난 애들이 다 그랬어요. 서울대 애들 “2년 안에는 끝내야죠!” 다른 애들 “일단 10년은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듣는 조언이 달라요. 지금 한국불교, “숙면일여 다 돼야 견성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쪽은 “단박에 끝내야죠!” 황벽 스님 ‘전심법요’에 단박무심이면 끝난다고 되어 있어요. 이렇게 쉽게 했던 얘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죠? 왜 막 복잡한 장치들이 등장했죠? 불합격생들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 안에서 서열 정리를 하는 겁니다 지금. 한 방에 12지, 여기는 합격생. 이해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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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시해 보니까 합격생은요 하늘나라 가는 것 같아요. 돈오돈수건 뭐건 나발이건 진짜 저기 하늘나라 간 것 같고요. 요 문을 못 들어간 사람들은요 자기들끼리 이제 레벨 나누는 겁니다. “무슨 과목은 그 선배가 최고인 거 같아!” 이러면서 그 안에서. 다 불합격생들이죠. “우리 중에 이 감옥을 탈출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느낌으로 수행을 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요, 바로 견성해야지. 느낌이 전혀 달라야 돼요. 숙면일여까지 하고 견성한다고 그러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요. 이게 아니고요 “오늘 바로 견성하셔야 하는데 혹시 안 되면 내일까지 안 되면 일주일.” 이런 느낌으로 접근해야 돼요. 원래 처음 선사들은 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단박에 견성하되 안 되면 일주일 안 되면 1년 이렇게. 그 안에라도 꼭 해라!”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바보같이 되고 옛적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된다 그랬죠. ‘그런 뒤에 자리에 정좌하여 정념(正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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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제 화두 딱 의심을 품으라는 거예요. 화두 잡고 화두를 의심덩어리를 뭉쳐봐라. ‘정밀하게 날로 날로 향상되는 그 현묘한 기틀’ 참나자리죠. 날로 날로 더 내 안에서 드러나는 참나자리를 궁구해보고 연구해 보고,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그 뜻을 연구하고 음미해 봐라.’ 이게 이제 화두 잡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화두 잡을 때 몰라 쓰는 법도 얘기해 드렸고요, 고봉 스님. 대혜 종고 스님은 실제 화두선 창시자지만 본인이 제일 지름길을 물어보니까 “몰라” 하라고 하죠. 이 정도면 지금 화두선과 화두선까지 또 화두선이 아닌 그 반조선까지. 지금 대혜 스님이 말한 건 반조선이예요. 몰라 하고 바로 나를 들여다보는 방식. 이게 원래 당나라 때 선사들이 하던 방식입니다. 근데 송나라 때는요 이 대혜 스님 이후로 본인은 이러셨는지 모르지만 본인의 가르침 때문에 고봉 스님 같은 분은 이제 그 이후 분이에요. 이제 송나라 때 그 이후 분들은 다 화두를 가지고 견성해야 하는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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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차이가 나게 됐습니다. 당나라 때는 반조선, 바로 그냥 참나 보고 끝났어요. “부처는 뭡니까?” “딱!” 이 소리 듣고 “딱!” 이 소리 듣는 나를 딱 보고 끝났어요. “네,” 이렇게 끝났죠. 그 듣는 사람 붙잡고 “너 저기 화두 숙면일여부터 몽중일여부터 해야 된다. 너 그냥 견성만 하면 조계종에서 인정 못 받아.” 지금 맞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로 견성하시면 조계종에서 인정 못 받으십니다. 화두 몽중일여를 안 했잖아요, 동정일여를. “아, 다시 화두 해야 되네” 이런. 좀 이상한 상황이죠. 견성했는데 다시 화두 해야 하는 건 언제인지 아세요? 실제 견성해도 화두가 필요합니다, 보림 공부할 때. 참나각성은 했는데 더 깨닫고 싶을 때 또 화두 잡아요. 그래서 고승들은 돌아가실 때까지 화두 잡습니다. 다만 일여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어요. 필요할 때, 참나가 늘 흐르는데 참나가 늘 흐르게 할 때 방편을 쓰거나, 이건 ‘수심결’에 다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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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한 뒤에도 또 우리가 왜 선정에 들어야 하는지 설명이 다 돼 있습니다. 참나를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할 때나 아니면 참나가 더 유지되게 할 때나 이미 드러났다면 더 강하게 할 때 참선용으로 쓰는 겁니다, 화두를. 그러니까 성철 스님이요, 그 유명한 일화가 있잖아요. 간월암에서 만공스님이랑 같이 계실 때 배추밭에서 일하시는데 만공 스님한테 “지금도 화두 계속 일여하십니까?” 그랬어요. 성철 스님의 관심은 오로지 참나가 아니에요. 지금 만공스님 같은 고승이니까 지금 하루 종일 화두가 지금 흐르셔야 되잖아요. “화두 일여하십니까?” 그러니까 “화두를 왜 잡아. 화두 잡으면 잘못하면 배추를 뽑아!” 이러셨어요. 화“두 잡다가 삼매에 너무 들어가 버리면 배추 뽑는다. 지금은 그냥 깨어서 잡초 뽑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분도 큰 스승이 아니구나!” 하고 실망했대요. 단단히 착각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성철 스님은 화두만, 화두를 잡아서 8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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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을 다 녹여야만 견성한다는 이 이론에 집착해 계신 거예요. 어디서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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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몽산법어를 통해 보는 성철스님 무엇이 문제인가-2부-(58:09)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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